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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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쓰야와 고헤이, 쇼타는 좀도둑입니다. 그들이 어디의 누구를 털고서 도주 중인지는 이야기의 초입에선 알 수가 없어요. 도둑질 그 후, 정확히는 도주 중 차가 퍼진 관계로 나미야 잡화점으로 숨어들면서 이 얘기가 시작되니까요. 배는 고프고 폐가 속 잠자리는 불편하고 세 친구가 수런거리는 와중에 우편함에서 의문의 편지 한 통을 발견해요. [저는 국가대표 운동선수구요. 불치병에 걸려 아픈 남자친구를 간호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제가 올림픽에 출전하는 걸 꼭 보고 싶다고 합니다. 저는 어떡하면 좋을까요?] 요약하자면 대충 이 정도가 되겠네요. 하지만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나미야 잡화점은 폐가란 말이지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아요. 누가 다녀간 흔적도 없구요. 본래 그 자리에 있던 편지라기엔 편지가 너무나 깨끗합니다. 장난이라기엔 누굴 놀리기 위한 장난인지도 모르겠고 이거 영 앞뒤가 맞지 않잖아요? 그런 와중에 좀도둑 치고는 좀 순진해 보이는 고헤이와 쇼타가 그 편지에 답장을 써서 우유상자에 넣어둡니다. 그러자 그 답장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다시 국대의 그녀로부터 답장이 오지요. 답장은 잘 받았지만 말처럼 결정이 쉽지 않다 뭐 그런 내용이에요. 그러면 어쩌라는 거냐, 자기 맘대로 할거면 상담은 왜 하는거냐 내용에 열도 좀 받으면서 무섭기도 무서워 좀도둑들은 벌벌 떱니다. 두 눈 부릅뜨고 감시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거든요. 편지가 저 홀로 나타난 겁니다. 거기다 아무래도 이 편지는 과거로부터 도착한 것 같거든요. 잡화점의 시간도 이상합니다. 안에서 몇 시간을 보내든 문을 열고 나가면 잡화점 밖은 여전히 그 시간, 여전한 그 달이, 그 자리에 콕 찍혀 있습니다. 사차원의 세계로 통하는 문 안으로 들어와버린 것 같아요. 그리고 연이어 도착하는 또다른 편지들, 또다른 답장, 여러 사연들. 꼭 도깨비에 홀린 것 같더라구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가 생의 기쁨인 나미야 할아버지, 정답이 없는 인생에 확신을 가지고 싶은 고민 많은 사람들, 좀도둑이지만 근본적으로 착한 고달픈 백수 삼인방이 소설의 주요 인물들입니다. 이들의 진지하고 아름답고 얼렁뚱땅한 편지들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 교차하며 동화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요. 젊은 나미야와 화광원 설립자의 슬픈 첫사랑, 야반도주 때 부모와 헤어진 아들의 자책과 염원, 가수가 되진 못했지만 영원불멸의 곡을 남긴 생선가게 장남,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오해를 풀고 삶을 사랑하게 된 어느 가수의 매니저, 나미야 잡화점의 편지로 부자가 된 고아 등등등. 재미난 건 뭐냐면요. 알고 봤더니 이 사람들이 아주 남남은 아니더라는 거에요. 영 딴판인 사람들의 고민 토막극 같은 느낌이었는데 사실은 이들 모두가 거대한 인연으로 엮여져 있는 사람들이었거든요. 우연처럼 잡화점으로 흘러들어간 좀도둑까지도요. 물론 이 같은 구성이 경악할만큼 놀랍다거나 출판사가 홍보하는 것처럼 치밀한 짜임새에 짜릿한 쾌감까지 느꼈다 이건 좀 오버인 것 같지만 전혀 관계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결국 한 거미가 짜놓은 그물 속에 오종종 매달린 같은 먹이더라, 인연이라는 먹이... 라는 건 좀 유쾌했습니다. 그랬구나, 마리아님이 보고 계셨구나 같은 느낌이랄까요. 전 뭐 이런 억지 인연도 나쁘지 않아요. 사실 꽤 좋아하는 편이라 아주 괜찮았습니다.

시공간을 거슬러, 모든 인연들이 퍼즐처럼 하나로 꿰여져 반짝반짝하게 맞춰질 때에는 익숙하고 빤한 구성이라도 아 재미있네 하며 웃으실 수 있을 거에요. 이거 좀 감동적이잖아 하고 눈시울을 붉힐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랬거든요. 12년도부터 쭉 빼놓지 않고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자리매김한 이유를 확실히 알 것 같은 책이었어요. 봄밤에 어울리는 책이기도 하구요. 배경이 되는 9월 13일이면 초가을이라기에도 이른 늦여름의 밤인데 소설은 어쩜 이렇게 청명한 봄의 느낌일까요? 호젓하고 심심한 밤. 스릴러, 추리, 살인, 방화 등에 지쳐 어떤 책을 읽어볼까 고민 중이시라면 이 책 나미야 잡화점을 만나보시길 추천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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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인 2017-08-11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에도 나미야 할아버지가 있었어요!
책을 읽는 내내, 나에게도 ‘나미야 할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페이스북에 ‘나미야 잡화점을 현실로‘라고 검색하니 실제로 누군가가 익명 편지 상담을 운영하고 있더라구요.
namiya114@daum.net 여기로 편지를 받고 있고, 광주광역시 동구 궁동 52-2, 3층 나미야할아버지 로 손편지를 보내면 손편지 답장도 받을 수 있다고 하네요.
아마 이 책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대부분 저같은 생각을 한번쯤 해보셨을 거라 생각돼 이곳에 공유합니다.
 
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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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정말로 좋아, 미도리."
"얼마나 좋아?"
"봄날의 곰만큼 좋아."
"봄날의 곰?" 미도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뭔데, 봄날의 곰이?"
"네가 봄날 들판을 혼자서 걸어가는데, 저편에서 벨벳 같은 털을 가진 눈이 부리부리한 귀여운 새끼 곰이 다가와. 그리고 네게 이렇게 말해. '오늘은, 아가씨. 나랑 같이 뒹굴지 않을래요.' 그리고 너랑 새끼 곰은 서로를 끌어안고 토끼풀이 무성한 언덕 비탈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하루 종일 놀아. 그런 거, 멋지잖아?"
"정말로 멋져."
"그 정도로 네가 좋아." (p388)


그 유명한 노르웨이의 숲 속 봄날의 곰 이야기입니다. 이 부분만 보면 노르웨이의 숲이 솜사탕처럼 달콤한 사랑 이야기일 것 같다는 착각이 생기고 마는데요. 네, 그야말로 착각입니다. 노르웨이의 숲은 와타나베와 나오코, 미도리, 레이코, 기즈키, 나가사와, 하쓰미의 허무하게 피었다 지는 불안한 청춘의 이야기입니다. 풋내를 떨치기도 전에, 꽃이 무르익기도 전에 허물어지고 바스라진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등장인물 중 자살한 아이만해도 넷이나 됩니다. 멀쩡히 친구와 당구를 치고 돌아가, 동생의 학교 이야기를 잘 들어준 다음 날, 치료를 받아 완치하겠다고 요양원에서 친해진 언니와 수다를 떨다, 쓰레기 같은 놈과 헤어져 결혼을 하고 2년 후에. 이들 모두가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지요. 떠난 사람에게도 그 선택은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만 남은 이들 모두가 고통받아요. 그래서인지 등장인물 중 멀쩡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좀 이상해요. 나오코가 와타나베에게 하는 이야기가 꼭 제 마음을 대변한 것 같았습니다.


"근데, 넌 어떻게 그런 사람만 좋아하는 거야? 우린 다 이상하고 비틀리고 꼬여서 버둥거리기만 하다가 점점 깊은 물에 가라앉는 사람들이야. 나도 기즈키도 레이코 씨도. 모두가 그래. 왜 좀 제대로 된 사람을 좋아할 수 없는 거야?" (p245)

아이고 작가 양반, 왜 좀 제대로 된 사람은 하나도 없는겁니까 하고 저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읽는 내내 마음이 울적하거든요. 큰 사건이 없는 이야기는 사실 좀 지루하고 혼몽스럽기도 해요. 와타나베의 감성을 발판으로 하여 나열되어 있는 단어들은 허무하고 정적이고 우울해서 서른일곱이 된 그가 자신의 추억을 회고하며 고통으로 머리를 싸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싶을 정도였지요. 그런데 그 어지러움이, 무절제하고, 난잡한 이야기 속에 뭐라 콕 찝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불안하고 불완전하고 나약하고 이기적이고 도착적이고 엉뚱하고 그런 동시에 결벽스런 인물들이 주는 매력이었죠. 돌이켜 저는 이런 청춘을 보내지도 않았고, 이런 사람들을, 이렇게나 많은 헤어짐을, 그것도 충격적인 방법으로 행해진 이별을 겪어본 적 없이 성장한 사람이지만 이 평범하지 못한 청춘들에게도 공감할 구석이 있더라구요. 완벽히는 아니지만 그들의 상처와 고통에 마음이 갔습니다. 다시 읽어보길 잘했다 싶었어요. 저는 사실 노르웨이의 숲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거든요.


고등학생 때 상실의 시대로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지금과 같은 감상은 아니었습니다. 대단히 혐오스러웠지요. 열서너살 즈음의 아이들일 뿐인 나오코와 기즈키, 레이코의 그 아이와 관련한 직접적인 애무의 표현들, 남자의 성기를 앞에 두고 여자의 손과 입이 할 수 있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활자로 펼쳐지는 것, 여자 아이와 어른 여자의 관계 앞에 깊은 수치심을 느꼈어요. 나가사와와 와타나베가 밤마다 여자를 바꾸어 낚는 일이나(책의 표현 그대로), 어떤 방향성으로 등장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와타나베의 성적 욕구와 그의 해소에 관련한 이야기들은 책이 아니라 마치 성매매 전단지쯤을 줏어 읽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런 걸 읽어본 적이 있다면 말이지만.) 특히나 사랑했던 나오코가 죽고 와타나베와 스무살 가량 연상인 레이코가 몸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또 다음 날 곧장 여자친구인 미도리에게 전화해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장면 등이 나왔을 땐 그야말로 대충격!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적에 제가 읽던 사랑 이야기엔 폭풍 순정이 가득했어요. 인어공주를 위하여, 늘푸른이야기, 은비가 내리는 나라, 바람의 저편 등이 그랬지요. 남녀가 키스를 하면 만화책에 꽃무늬가 아로새겨지던 때였습니다. 꽃보다 남자, 맨발의 그 녀석 같은 좀 폭력적인 이야기도 있긴 했지만 그래봤자 순정만화였으니까요. 물론 초등학교 6학년 때 읽은 가시나무 새가 있긴 했지만 그 땐 뭘 몰라도 너무 모를 나이였기 때문에 그런 장면들은 채 이해를 못했던 반면 고등학생은 활자의 성적인 요소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나이잖아요. 부끄럽더군요. 상실의 시대는 도무지 극복할 수 없는 취향의 책 정도가 아니라 혐오스러운 외서였고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그 때의 저에게 이 책은 해독불가한 암호책이었습니다. 롤리타를 읽을 때의 충격도 상실의 시대만큼은 아니었으니 당시의 제 충격이 어느 정도였을지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민음사 새 판본이 나왔을 땐 구매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아름답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특별판에 혹해서 구입하곤 벚꽃 같은 표지에 반해서 봄이다 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놀랍도록 그 때의 혐오스런 느낌이 없습니다. 도색물 같은 이야기는 여전한데도 이제는 그 때와는 다른 장면, 다른 감성들이 더 눈에 들어옵니다. 이 달라진 감상은 그저 나이를 먹은 탓일까요? 도무지 알 수가 없지만 취향의 폭이 넓어졌다면 그거야말로 잘 된 일이라고 만족하는 중입니다. 더하여 그 때에는 없던 불만도 하나 생기긴 했습니다. 이것도 나이 탓인 것 같습니다. 도대체 서른 여덟 레이코를 뭔 늙은 할머니처럼 표현을 해놓은건지 그 나이의 여자가 얼굴도 몸도 주름투성이일 리가 있겠습니까. 물론 십대의 저는 이 부분에서 전혀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했었지만 말이죠. 서른이 넘으니 좀 기분 나쁘군요! 흥!!



** 책이 정말 예쁩니다. 볼 때마다 예쁘다고, opp봉투에 쌌다가 뺐다가 해가면서 아직도 호들갑을 떨고 있어요. 살 때 한 권 쯤 더 사둘걸,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어져 검색했더니 특별판은 품절입니다. 아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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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알라딘 특별판, 양장)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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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 대하여를 너무 재미있게 읽은 탓인지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커피를 너무 마신 탓일 수도 있고. 구매하고 선물 받고 읽지 않아 쌓인 책이 열 권을 넘어서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 꺼내든 책 7년의 밤. 가랑비도 비라고 축축해진 밤에 책을 펼치기도 전부터 으스스한 기분이었다. 읽는 내내 춥고 어둡고 착찹하고 서늘해서 책을 다 읽고 잠들었던 오후엔 이불이 아니라 한기를 덮고 깨어난 느낌이기도 했다. 압도적인 서사, 폭발적으로 몰아치는 이야기의 힘에 이끌려 나는 본 적도 없는 그곳 세령호, 세령댐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 그리며 책을 읽었다. 물 속에서 물 밖까지 폐허가 되어버린 귀곡의 땅을.


1. 오세령

"보지 마세요. 아저씨, 보지 마세요....." (p69)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달아나다 최현수의 마티즈에 치이고 다시 목이 꺾인 채 세령호로 떨어졌다.
아무 것도 모르는 현수의 아들 서원의 꿈 속으로 찾아와 함께 가자거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한다. 고양이와 숨바꼭질 하듯 다가오는 소녀의  종아리 같은 묘사들은 7년의 밤에 심령소설 같은 섬뜩함을 주었지만 동시에 가여워 눈물을 자아냈던 인물이기도 하다. 무결한 피해자. 고이 잠드소서. 
  

2. 최현수

"수수밭 우물은 내가 짊어진 모든 책임들의 무덤이었어. 정말로 죽어버릴까 봐 무서워서 실제 신발은 던지지도 못했어. 그저 우물 앞에 서서, 없어져버렸으면 하는 인간들을 떠올리면서, 내 마음 속의 신발들을 집어 던졌지. 아버지, 남동생, 여동생, 막내 꼬까고무신까지." (p373)

마음 속 우물로는 더는 버텨낼 수 없던 그 날. 12살 현수는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며 죽음을 부르는 고향 우물 속으로 부친의 구두를 집어 던진다. 현수가 구두를 던진 때에 우물에 빠져죽은 아버지의 원한 탓인지 아니면 최현수가 그저 심약한 때문인지 그는 평생에 걸쳐 우물의 환상에 시달린다. "현수야... 현수야아..." 라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함께. 그것이 남은 그의 삶, 그가 가진 모든 실패의 근원적인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용팔이라 명명하는 왼팔의 마비 증상, 프로 야구선수로 실패한 삶,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아내와의 갈등, 상습적 음주운전, 뺑소니 그리고 살해. 7년의 밤, 이 모든 이야기의 시초. 그 시작점. 만약에 그가 우물 속에 아버지의 신발을 던지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그가 현수야.. 라는 부름을 따라 우물 속을 들여다 보았다면, 만약에 그가 음주운전을 하지 않았다면, 만약에 그가 세령호에 가지 않았다면 만약에 또 만약에를 생각하게 되는 인물이었다. 현수를 생각하면 저절로 수수벌판을 맨발로 달리고 있을 가난한 소년이 떠오른다. 가엾고 불쌍하지만 동정해서는 안되는 남자. 

3. 오영제

"해결법은 하나뿐이었다. 몇 대 갈겨서 화를 푼 다음, 회초리로 그녀를 각성시키는 것. 알몸과 회초리는 내상을 입히지 않으면서도 고통과 모멸감을 안기는 도구였다. 고집스럽게 닫아건 입술을 열고 그가 원하는 말을 실토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용서해줘요"라고 애원하게 만드는 힘이. 물론, 거기서 용서해주지 않는다. 뼛속까지 굴복시키고 교정하는 '강간'이라는 절차가 남아 있었다." (p98)

오영제가 사람을 때리고 달래고 학대하고 강간하고 다시 달래는 과정을 이르는 말 교정. 아내와 딸을 자신이 정한 자리, 자신이 정한 모습에서 한치도 어긋남 없이 놓여있게 만드는 수단. "교정". 나는 이 단어가 이토록이나 무섭게 들릴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아내 하영은 영제의 폭력을 피해 집을 나가고 달아난 딸은 사체로 돌아왔다. 완벽할 것만 같던 그의 세계가 산산히 부서졌다. 오영제는 복수심으로 칼을 간다. 그런 그의 시계에 잡힌 최현수의 가족들. 어미 고양이를 도끼로 찍고 새끼 고양이들을 생매장 하듯 현수의 가족들을 몰살시키려는 오영제의 계획. 싸이코패스인 영제가 딸의 죽음을 알아내고 복수하는 과정은 통쾌하기 보단 무섭고 두려웠다. 정유정이 후기작 종의 기원에서 말했듯 악과 선이 공존하다 생존을 위해 무언가 하나가 남게 된 거라면, 그리하여 오영제에게 남은 것이 오롯이 악뿐인 거라면 며칠 밤 부모에게서 떨어져, 고작해야 세 끼를 굶고, 담임과 친구들에게 조금의 모욕을 당한 것도 생존의 위협이었다고 할 수 있는걸까. 그로부터 발현한 오영제의 악, 그속에서 종의 기원 속 유진의 씨앗을 본 느낌이었다.

4. 승환

"고양이는 뭔가를 할퀴어야 하고, 개는 뭔가를 물어뜯어야 하며, 나는 뭔가를 써야 한다." (p58) 

승환의 그 믿음이 결국 그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작가로, 소설에 대한 집착으로, 베스트셀러를 안길 뮤즈에 대한 일념으로 승환은 식수원인 호수에 불법 잠수를 시행하다 물에 빠진 영제의 딸 세령을 보게 된다. 경찰에 신고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다 외면해버린 밤, 영제와 현수에 대한 의심과 그에 대한 관찰, 사건을 소설로 구성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환멸, 그 환멸에도 결말을 보고 싶었던 그의 어리석은 선택들의 나열. 세령과 영제, 현수와의 인연 보다 이야기에 대한 절제되지 않은 그의 욕망이 결국 그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게 아닐까? 적당히 정의롭고 적당히 속물적인 남자. 그러나 의외로운 곳에서 희생과 책임을 다하며 근성을 보이는 미워할 수 없는 남자였다.

5. 은주

"그녀가 생각하기에, 스트레스는 겁쟁이의 변명이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압박의 운명을 짊어진 존재였다.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피 터지게 싸워 거꾸러뜨려야 마땅했다. 하다 못해 침이라도 뱉어줘야 했다. 그것이 그녀가 '사는 법'이었다." (p242)

타고난 자질인지 연마한 무기인지(p79) 알 수 없을 만큼 돈에 있어선 뻔뻔한 여자, 현수의 아내 은주. 은주와 현수의 이야기를 볼 때엔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이 만나 결혼했구나 라는 생각 밖엔 들지 않았다. 불행한 가정에서 성장한 남녀의 결합이 일으키는 불운의 시너지가 고달프다. 그럼에도 그렇게 죽을 만큼 나쁜 여자는 아니었다. 

6. 서원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 "

소설의 시작, 프롤로그의 처음. 누구에게나 소설의 첫 문장에 이끌려 단숨에 책장을 넘긴 경험이 있을 텐데 내게는 7년의 밤이 그랬다.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는 그 문구에 얼마나 많은 호기심이 들끓어올랐는지 모른다. 세령호의 재앙, 한 마을을 수몰시킨 살인자의 아들이기에 세상의 칼에 몇 십번이고 찔리기를 반복한(기사의 헤드카피는 활자의 조합이 아니었다. 내 갈비뼈 밑에 찔러 넣은 세상의 칼이었다/ p42) 서원의 앞에 도착한 소포 속 승환의 소설, 7년 전의 그 밤, 사건이 벌어진 그 여름 속으로 서원과 함께 나 또한 멱살이 잡혀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홀로 남은 세상 속에서 사형집행인으로 최현수를 치죄하며 현수의 목에 오랏줄을 걸었던 서원. 현수의 우물이 서원의 오랏줄로 바뀌어 결국 서원의 인생도 잡아먹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현수의 아버지 최상사와 현수, 아들 서원까지. 부자 삼대에 되물림 되는 트라우마가 가슴 아팠지만 그는 강했다. "멈추고, 생각하고, 행동하고"(p298) 그리하여 빛 속으로 걸어가는 남자 아니 소년. 모든 키는 여기 서원의 손에 들려 있었다. 



한국소설이 아닌 것만 같았다. 영미, 근간에 떠오르는 스웨덴의 스릴러물 같았다. 참으로 편협한 사고로구나 손가락질 한데도 별 수 없지만 나는 정말 한국소설이 재미가 없었다. 정유정이 그 중 드물게 괜찮은 작가인 줄은 알았지만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압도당해 버렸다. 빠르고 강렬하다. 글을 쫓아가는 게 힘들어 숨이 찰 정도였다. 악의 근원에 가까울 남자와 본질은 악이 아니지만 심약하여 결국 악을 저질러버린 남자, 그리고 악에서 벗어나려는 소년의 사투 그 긴장감에 가슴을 뜯게 된다. 한국작가 정유정에게 찬탄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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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 대하여
아리요시 사와코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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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죄가 없어요. 그저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했을 뿐이랍니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 아리요시 사와코. 오로지 독자들의 흥미진진한 리뷰로 관심을 가지게 된 책이었던지라 드물게 작가 소개부터 꼼꼼히 읽었다. 박완서 작가님과 동갑내기 친구더라. 1931년생. 명문가 집안에 아버지를 따라 자카르타에서 유년을 보냈고 대학 졸업 후에도 다시 유학길에 올랐던 엘리트층이셨던 듯. 등단도 빨랐다, 25살. 아쿠타가와상 후보였다고 한다. 일본이라고 해도 여류작가가 흔했을 시대는 아닌 것 같은데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다 84년도에 심부전증으로 사망하셨다고. 작품의 여주인공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삶이지 않나 싶어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한번 옮긴이의 말을 소설을 읽듯 들여다봤다. 예의가 아닐 수 있지만 역시나 흥미진진하다.

본론인 책에 대한 감상을 말하자면 이것도 참 재미있다. 작가님 연세와 작품이 쓰여진 1978년도, <주간 아사히> 연재에서 어딘지 칙칙한 시대극을 연상했으나(편견이다) 전후부터 시작해 1970년대까지 이어지는 도미노코지 기미코라는 여성의  삶은 배경적으로도 감성적으로 별 괴리감이 없이 아주 화려하고 풍성하고 세련됐다. 번역의 힘일지도 모르지만 그냥 이천년대라고 생각해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의 느낌이었고 굉장히 흥미진진하고 흥미로운 구성의, 악녀 주다해로 화제가 되기도 했던 야왕이 떠오르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총 27개의 챕터, 도미노코지 기미코라는 여성과 관련한 27명의 사람들의 인터뷰로 구성된 책이다. 부기학원을 같이 다녔던 남자, 소학교 동창, 디자이너, 집주인, 전전남편, 전전남편의 가족들, 전남편, 전남편의 가족들, 첫남자, 불륜남, 불륜남의 아내, 같은 아파트 주민, 집사, 의사, 간호사, 친엄마와 방송국 PD, 연하남, 큰 아들과 작은 아들, 그 외 불특정 다수 관련자들. 이들이 이 인터뷰에 응했던 이유가 있다. 그녀가 죽었기 때문이다. 이십대 초반 젊은 나이에 빌딩주, 보석점, 레스토랑 사장, 방송인으로 승승장구 하던 그녀가 어느 날 붉은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꽃 같은 자태로 자살을 한 것. 인터뷰어도 주인공인 도미노코지도 전면에 드러나는 법 없이 소설은 일관되게 그녀와 관계되었던 이들의 시각에 따른 증언으로만 엮어진다. 그런데 그 증언이 우습기 짝이 없다. 도미노코지 기미토라는 여성이 27개의 인격을 가진 다중이도 아니었을텐데 누구는 고관대작의 자녀로 고생없이 자란 부잣집 고명딸이라 하고, 누구는 세상 이보다 정직하고 겸손하며 순결한 이가 없다 하는데, 또 누군가는 아주 빙그레 웃으며 뒷통수 치는 여자, 사기꾼에 창녀에 천박한 투기꾼이라 칭한다. 더 우스운 것은 그녀의 남편들과 애인들은 그녀가 사망하기 전까진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다는 것. 때문에 아들들에게 호적을 내어준 이는 그들이 제 자식이 아니라 하고 숨은 애인들은 서로 나서 제 자식들이라 주장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익숙한 막장 스토리인데 도미노코지 본인이 아니라 타인의 의한 다채로운 증언들로 구성된 탓인지 이 여자 뭐지? 대체 뭐가 본 모습이지? 사람이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사기극을 펼칠 수 있나?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죽었다는건데? 하는 호기심이 페이지 뒤로 계속계속 커져간다. 때문에 성급하게 페이지를 넘길 수 밖에 없었는데 사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나는 좀 기대가 있었다. 틀림없이 에필로그가 있을 거라고, 그녀가 진실로 어떤 여자였는지 그녀의 본성과 생각, 사기극의 본질을 엿볼 수 있는 챕터와 사망원인이 밝혀지는 장면있을 거라고 예상을 했었다. 기대는 허무하게 끝이나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인터뷰 내용 밖에 없었지만. 그래서 책을 다 덮은 지금도 궁금해 미치겠다. 도대체, 왜, 어떻게해서 그녀는 죽게 된 걸까? 숨겨둔 연하 애인과의 하와이 결혼식을 앞두고 붉은 드레스까지 맞춘 상태로, 결혼식 후 또다른 애인과 미국에서 만날 것을 약속한 상태로 어째서 모란꽃 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빌딩 바닥에 떨어져 있었던걸까? 그의 작은 아들의 말처럼 평생을 아름다움에 심취해 살았던 여자가 허공 중에 펼쳐진 보석같은 무지개에 홀리기라도 했던 것일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 도미노코지가 매번 중얼이는 어라라 때문에 우아한 분위의 여성을 상상하는 게 상당히 힘들었다. 귀족적인 어라라 어투라니, 아무리 봐도 어라라는 너무 푼수같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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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글쓰기 (특별판) - 스티븐 킹의 창작론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02년 2월
평점 :
품절


 

 

 

 

궁극적으로 글쓰기란 작품을 읽는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아울러 작가 자신의 삶도 풍요롭게 해준다. 글쓰기의 목적은 살아남고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 이 책의 일부분은ㅡ어쩌면 너무 많은 부분이ㅡ내가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부분이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한 내용이다. 나머지는ㅡ이 부분이 가장 쓸모 있는 부분일지도 모른다ㅡ허기증이랄까. 여러분도 할 수 있다는, 여러분도 해야 한다는, 그리고 시작할 용기만 있다면 여러분도 해내게 될 것이라는 나의 장담이다. 글쓰기는 마술과 같다. 창조적인 예술이 모두 그렇듯이, 생명수와도 같다. 이 물은 공짜다. 그러니 마음껏 마셔도 좋다.

부디 실컷 마시고 허전한 속을 채우시기를.


ㅡ유혹하는 글쓰기, 김영사, p332

아니 뭔 놈의 글쓰기 책이 이다지도 재미있는지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다. 호러의 제왕, 공포소설의 대가라는 별칭에도 나는 그의 책보단 영화가 더 익숙한 사람이다. 미저리나 쇼생크 탈출, 스탠 바이 미, 그린 마일 같은. 이 중에서 읽은 책은 그린 마일 밖에 없을 정도로 스티븐 킹에는 문외한이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만난 듯이  읽는 내내 뿌듯하고 즐거웠는데 이게 다 이 책의 굉장한 재미 때문인 것 같다. 아마 스티븐 킹의 팬이라면 ㅡ물론 팬들은 알라딘 특별판 이전의 책으로 다들 읽으셨을 것 같지만ㅡ 한층 더 기꺼운 마음으로 읽게 되지 않을까? 책을 다 읽고 나니 괜스레 팬들의 리뷰까지 궁금해진다. 

"유혹하는 글쓰기"는 크게 이력서와 연장통, 창작론, 인생론의 순서로 진행이 된다. 글쓰기 관련 책은 처음 읽어 봐서 보통 다 이런 구성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어쩐지 그 스티븐 킹이라면 마냥 평범하게 짜놓은 순서는 아닐 것 같다. 작가의 꿈이 없어서인지 글쓰기 방식과 퇴고과정을 일러주는 <연장통>과 <창작론>을 읽을 때는 잠깐, 정말 잠깐 지루하긴 했는데 자서전 격인 <이력서>에 나열된 일대기와 교통사고에 대한 회고인 <인생론>은 아주 푹 빠져 읽었다. 온동네 전기를 나가게 만들어 경찰에 잡혀갈까 잔뜩 숨죽였던 말썽꾸러기 면모의 일화들이나 보모에게 당한 학대에도 유년을 방구 뿡뿡으로 희화화 하는 긍정성. 남편 없이도 당찬 어머니와 요즘으로 치면 영재 겪인 형과의 여러 일상들의 나열. 글을 쓰게 된 계기. 출판사나 잡지사에 투고했다 거절 당한 원고들. 벽에 못밖아 보관한 거절 메시지와 처음으로 받은 고료. 아내와의 만남. 세탁소에서 학교로 이어지는 직업 변화. 마약 및 알콜 중독.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1999년의 치명적인 교통사고와 회복까지. 책은 스티븐 킹 일생의 다양한 이야기들과 소설에 대한 가치관, 작가로서의 경험 등을 재치있게 풀어쓴다. 단순 독자인 나로서야 작가 지망생분들께 실제로 도움이 될 만한 책인지 명료하게 평가하기는 힘들 것 같고, 독자의 입장에서만 평을 하자면 앞으로 마주할 책들과 작가에 대해 더 깊이 있게 상상하고 공감하게 할 유익함이 있었다. 글쓰기가 화석 캐기와 같다면 독자인 우리는 여러 종류의 화석을 선물 받고 구입하고 보관하는 중이라며 읽는 내내 즐거운 상상도 할 수 있었고 말이다. 

이 책 한 권으로 글쓰기에 유혹 당하진 않았다. 그러기엔 글쓰기는 너무나 힘든 작업이다. 대신에 독서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의 폭이 넓어졌고 독서의 목적까지도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다. 글쓰기의 목적이 행복이라면 독서의 궁극적 목적도 마찬가지가 아닐런지.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유혹하는 글쓰기도 곁들여 궁금해지는 스티븐 킹의 책을 추천하며, 오늘도 절치부심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을 모든 작가들과 작가를 기다리는 모든 독자들을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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