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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알라딘 특별판, 양장)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악녀에 대하여를 너무 재미있게 읽은 탓인지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커피를 너무 마신 탓일 수도 있고. 구매하고 선물 받고 읽지 않아 쌓인 책이 열 권을 넘어서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 꺼내든 책 7년의 밤. 가랑비도 비라고 축축해진 밤에 책을 펼치기도 전부터 으스스한 기분이었다. 읽는 내내 춥고 어둡고 착찹하고 서늘해서 책을 다 읽고 잠들었던 오후엔 이불이 아니라 한기를 덮고 깨어난 느낌이기도 했다. 압도적인 서사, 폭발적으로 몰아치는 이야기의 힘에 이끌려 나는 본 적도 없는 그곳 세령호, 세령댐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 그리며 책을 읽었다. 물 속에서 물 밖까지 폐허가 되어버린 귀곡의 땅을.
1. 오세령
"보지 마세요. 아저씨, 보지 마세요....." (p69)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달아나다 최현수의 마티즈에 치이고 다시 목이 꺾인 채 세령호로 떨어졌다.
아무 것도 모르는 현수의 아들 서원의 꿈 속으로 찾아와 함께 가자거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한다. 고양이와 숨바꼭질 하듯 다가오는 소녀의 종아리 같은 묘사들은 7년의 밤에 심령소설 같은 섬뜩함을 주었지만 동시에 가여워 눈물을 자아냈던 인물이기도 하다. 무결한 피해자. 고이 잠드소서.
2. 최현수
"수수밭 우물은 내가 짊어진 모든 책임들의 무덤이었어. 정말로 죽어버릴까 봐 무서워서 실제 신발은 던지지도 못했어. 그저 우물 앞에 서서, 없어져버렸으면 하는 인간들을 떠올리면서, 내 마음 속의 신발들을 집어 던졌지. 아버지, 남동생, 여동생, 막내 꼬까고무신까지." (p373)
마음 속 우물로는 더는 버텨낼 수 없던 그 날. 12살 현수는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며 죽음을 부르는 고향 우물 속으로 부친의 구두를 집어 던진다. 현수가 구두를 던진 때에 우물에 빠져죽은 아버지의 원한 탓인지 아니면 최현수가 그저 심약한 때문인지 그는 평생에 걸쳐 우물의 환상에 시달린다. "현수야... 현수야아..." 라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함께. 그것이 남은 그의 삶, 그가 가진 모든 실패의 근원적인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용팔이라 명명하는 왼팔의 마비 증상, 프로 야구선수로 실패한 삶,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아내와의 갈등, 상습적 음주운전, 뺑소니 그리고 살해. 7년의 밤, 이 모든 이야기의 시초. 그 시작점. 만약에 그가 우물 속에 아버지의 신발을 던지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그가 현수야.. 라는 부름을 따라 우물 속을 들여다 보았다면, 만약에 그가 음주운전을 하지 않았다면, 만약에 그가 세령호에 가지 않았다면 만약에 또 만약에를 생각하게 되는 인물이었다. 현수를 생각하면 저절로 수수벌판을 맨발로 달리고 있을 가난한 소년이 떠오른다. 가엾고 불쌍하지만 동정해서는 안되는 남자.
3. 오영제
"해결법은 하나뿐이었다. 몇 대 갈겨서 화를 푼 다음, 회초리로 그녀를 각성시키는 것. 알몸과 회초리는 내상을 입히지 않으면서도 고통과 모멸감을 안기는 도구였다. 고집스럽게 닫아건 입술을 열고 그가 원하는 말을 실토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용서해줘요"라고 애원하게 만드는 힘이. 물론, 거기서 용서해주지 않는다. 뼛속까지 굴복시키고 교정하는 '강간'이라는 절차가 남아 있었다." (p98)
오영제가 사람을 때리고 달래고 학대하고 강간하고 다시 달래는 과정을 이르는 말 교정. 아내와 딸을 자신이 정한 자리, 자신이 정한 모습에서 한치도 어긋남 없이 놓여있게 만드는 수단. "교정". 나는 이 단어가 이토록이나 무섭게 들릴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아내 하영은 영제의 폭력을 피해 집을 나가고 달아난 딸은 사체로 돌아왔다. 완벽할 것만 같던 그의 세계가 산산히 부서졌다. 오영제는 복수심으로 칼을 간다. 그런 그의 시계에 잡힌 최현수의 가족들. 어미 고양이를 도끼로 찍고 새끼 고양이들을 생매장 하듯 현수의 가족들을 몰살시키려는 오영제의 계획. 싸이코패스인 영제가 딸의 죽음을 알아내고 복수하는 과정은 통쾌하기 보단 무섭고 두려웠다. 정유정이 후기작 종의 기원에서 말했듯 악과 선이 공존하다 생존을 위해 무언가 하나가 남게 된 거라면, 그리하여 오영제에게 남은 것이 오롯이 악뿐인 거라면 며칠 밤 부모에게서 떨어져, 고작해야 세 끼를 굶고, 담임과 친구들에게 조금의 모욕을 당한 것도 생존의 위협이었다고 할 수 있는걸까. 그로부터 발현한 오영제의 악, 그속에서 종의 기원 속 유진의 씨앗을 본 느낌이었다.
4. 승환
"고양이는 뭔가를 할퀴어야 하고, 개는 뭔가를 물어뜯어야 하며, 나는 뭔가를 써야 한다." (p58)
승환의 그 믿음이 결국 그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작가로, 소설에 대한 집착으로, 베스트셀러를 안길 뮤즈에 대한 일념으로 승환은 식수원인 호수에 불법 잠수를 시행하다 물에 빠진 영제의 딸 세령을 보게 된다. 경찰에 신고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다 외면해버린 밤, 영제와 현수에 대한 의심과 그에 대한 관찰, 사건을 소설로 구성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환멸, 그 환멸에도 결말을 보고 싶었던 그의 어리석은 선택들의 나열. 세령과 영제, 현수와의 인연 보다 이야기에 대한 절제되지 않은 그의 욕망이 결국 그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게 아닐까? 적당히 정의롭고 적당히 속물적인 남자. 그러나 의외로운 곳에서 희생과 책임을 다하며 근성을 보이는 미워할 수 없는 남자였다.
5. 은주
"그녀가 생각하기에, 스트레스는 겁쟁이의 변명이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압박의 운명을 짊어진 존재였다.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피 터지게 싸워 거꾸러뜨려야 마땅했다. 하다 못해 침이라도 뱉어줘야 했다. 그것이 그녀가 '사는 법'이었다." (p242)
타고난 자질인지 연마한 무기인지(p79) 알 수 없을 만큼 돈에 있어선 뻔뻔한 여자, 현수의 아내 은주. 은주와 현수의 이야기를 볼 때엔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이 만나 결혼했구나 라는 생각 밖엔 들지 않았다. 불행한 가정에서 성장한 남녀의 결합이 일으키는 불운의 시너지가 고달프다. 그럼에도 그렇게 죽을 만큼 나쁜 여자는 아니었다.
6. 서원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 "
소설의 시작, 프롤로그의 처음. 누구에게나 소설의 첫 문장에 이끌려 단숨에 책장을 넘긴 경험이 있을 텐데 내게는 7년의 밤이 그랬다.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는 그 문구에 얼마나 많은 호기심이 들끓어올랐는지 모른다. 세령호의 재앙, 한 마을을 수몰시킨 살인자의 아들이기에 세상의 칼에 몇 십번이고 찔리기를 반복한(기사의 헤드카피는 활자의 조합이 아니었다. 내 갈비뼈 밑에 찔러 넣은 세상의 칼이었다/ p42) 서원의 앞에 도착한 소포 속 승환의 소설, 7년 전의 그 밤, 사건이 벌어진 그 여름 속으로 서원과 함께 나 또한 멱살이 잡혀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홀로 남은 세상 속에서 사형집행인으로 최현수를 치죄하며 현수의 목에 오랏줄을 걸었던 서원. 현수의 우물이 서원의 오랏줄로 바뀌어 결국 서원의 인생도 잡아먹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현수의 아버지 최상사와 현수, 아들 서원까지. 부자 삼대에 되물림 되는 트라우마가 가슴 아팠지만 그는 강했다. "멈추고, 생각하고, 행동하고"(p298) 그리하여 빛 속으로 걸어가는 남자 아니 소년. 모든 키는 여기 서원의 손에 들려 있었다.
한국소설이 아닌 것만 같았다. 영미, 근간에 떠오르는 스웨덴의 스릴러물 같았다. 참으로 편협한 사고로구나 손가락질 한데도 별 수 없지만 나는 정말 한국소설이 재미가 없었다. 정유정이 그 중 드물게 괜찮은 작가인 줄은 알았지만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압도당해 버렸다. 빠르고 강렬하다. 글을 쫓아가는 게 힘들어 숨이 찰 정도였다. 악의 근원에 가까울 남자와 본질은 악이 아니지만 심약하여 결국 악을 저질러버린 남자, 그리고 악에서 벗어나려는 소년의 사투 그 긴장감에 가슴을 뜯게 된다. 한국작가 정유정에게 찬탄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