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네가 정말로 좋아, 미도리."
"얼마나 좋아?"
"봄날의 곰만큼 좋아."
"봄날의 곰?" 미도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뭔데, 봄날의 곰이?"
"네가 봄날 들판을 혼자서 걸어가는데, 저편에서 벨벳 같은 털을 가진 눈이 부리부리한 귀여운 새끼 곰이 다가와. 그리고 네게 이렇게 말해. '오늘은, 아가씨. 나랑 같이 뒹굴지 않을래요.' 그리고 너랑 새끼 곰은 서로를 끌어안고 토끼풀이 무성한 언덕 비탈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하루 종일 놀아. 그런 거, 멋지잖아?"
"정말로 멋져."
"그 정도로 네가 좋아." (p388)


그 유명한 노르웨이의 숲 속 봄날의 곰 이야기입니다. 이 부분만 보면 노르웨이의 숲이 솜사탕처럼 달콤한 사랑 이야기일 것 같다는 착각이 생기고 마는데요. 네, 그야말로 착각입니다. 노르웨이의 숲은 와타나베와 나오코, 미도리, 레이코, 기즈키, 나가사와, 하쓰미의 허무하게 피었다 지는 불안한 청춘의 이야기입니다. 풋내를 떨치기도 전에, 꽃이 무르익기도 전에 허물어지고 바스라진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등장인물 중 자살한 아이만해도 넷이나 됩니다. 멀쩡히 친구와 당구를 치고 돌아가, 동생의 학교 이야기를 잘 들어준 다음 날, 치료를 받아 완치하겠다고 요양원에서 친해진 언니와 수다를 떨다, 쓰레기 같은 놈과 헤어져 결혼을 하고 2년 후에. 이들 모두가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지요. 떠난 사람에게도 그 선택은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만 남은 이들 모두가 고통받아요. 그래서인지 등장인물 중 멀쩡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좀 이상해요. 나오코가 와타나베에게 하는 이야기가 꼭 제 마음을 대변한 것 같았습니다.


"근데, 넌 어떻게 그런 사람만 좋아하는 거야? 우린 다 이상하고 비틀리고 꼬여서 버둥거리기만 하다가 점점 깊은 물에 가라앉는 사람들이야. 나도 기즈키도 레이코 씨도. 모두가 그래. 왜 좀 제대로 된 사람을 좋아할 수 없는 거야?" (p245)

아이고 작가 양반, 왜 좀 제대로 된 사람은 하나도 없는겁니까 하고 저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읽는 내내 마음이 울적하거든요. 큰 사건이 없는 이야기는 사실 좀 지루하고 혼몽스럽기도 해요. 와타나베의 감성을 발판으로 하여 나열되어 있는 단어들은 허무하고 정적이고 우울해서 서른일곱이 된 그가 자신의 추억을 회고하며 고통으로 머리를 싸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싶을 정도였지요. 그런데 그 어지러움이, 무절제하고, 난잡한 이야기 속에 뭐라 콕 찝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불안하고 불완전하고 나약하고 이기적이고 도착적이고 엉뚱하고 그런 동시에 결벽스런 인물들이 주는 매력이었죠. 돌이켜 저는 이런 청춘을 보내지도 않았고, 이런 사람들을, 이렇게나 많은 헤어짐을, 그것도 충격적인 방법으로 행해진 이별을 겪어본 적 없이 성장한 사람이지만 이 평범하지 못한 청춘들에게도 공감할 구석이 있더라구요. 완벽히는 아니지만 그들의 상처와 고통에 마음이 갔습니다. 다시 읽어보길 잘했다 싶었어요. 저는 사실 노르웨이의 숲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거든요.


고등학생 때 상실의 시대로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지금과 같은 감상은 아니었습니다. 대단히 혐오스러웠지요. 열서너살 즈음의 아이들일 뿐인 나오코와 기즈키, 레이코의 그 아이와 관련한 직접적인 애무의 표현들, 남자의 성기를 앞에 두고 여자의 손과 입이 할 수 있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활자로 펼쳐지는 것, 여자 아이와 어른 여자의 관계 앞에 깊은 수치심을 느꼈어요. 나가사와와 와타나베가 밤마다 여자를 바꾸어 낚는 일이나(책의 표현 그대로), 어떤 방향성으로 등장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와타나베의 성적 욕구와 그의 해소에 관련한 이야기들은 책이 아니라 마치 성매매 전단지쯤을 줏어 읽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런 걸 읽어본 적이 있다면 말이지만.) 특히나 사랑했던 나오코가 죽고 와타나베와 스무살 가량 연상인 레이코가 몸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또 다음 날 곧장 여자친구인 미도리에게 전화해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장면 등이 나왔을 땐 그야말로 대충격!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적에 제가 읽던 사랑 이야기엔 폭풍 순정이 가득했어요. 인어공주를 위하여, 늘푸른이야기, 은비가 내리는 나라, 바람의 저편 등이 그랬지요. 남녀가 키스를 하면 만화책에 꽃무늬가 아로새겨지던 때였습니다. 꽃보다 남자, 맨발의 그 녀석 같은 좀 폭력적인 이야기도 있긴 했지만 그래봤자 순정만화였으니까요. 물론 초등학교 6학년 때 읽은 가시나무 새가 있긴 했지만 그 땐 뭘 몰라도 너무 모를 나이였기 때문에 그런 장면들은 채 이해를 못했던 반면 고등학생은 활자의 성적인 요소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나이잖아요. 부끄럽더군요. 상실의 시대는 도무지 극복할 수 없는 취향의 책 정도가 아니라 혐오스러운 외서였고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그 때의 저에게 이 책은 해독불가한 암호책이었습니다. 롤리타를 읽을 때의 충격도 상실의 시대만큼은 아니었으니 당시의 제 충격이 어느 정도였을지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민음사 새 판본이 나왔을 땐 구매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아름답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특별판에 혹해서 구입하곤 벚꽃 같은 표지에 반해서 봄이다 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놀랍도록 그 때의 혐오스런 느낌이 없습니다. 도색물 같은 이야기는 여전한데도 이제는 그 때와는 다른 장면, 다른 감성들이 더 눈에 들어옵니다. 이 달라진 감상은 그저 나이를 먹은 탓일까요? 도무지 알 수가 없지만 취향의 폭이 넓어졌다면 그거야말로 잘 된 일이라고 만족하는 중입니다. 더하여 그 때에는 없던 불만도 하나 생기긴 했습니다. 이것도 나이 탓인 것 같습니다. 도대체 서른 여덟 레이코를 뭔 늙은 할머니처럼 표현을 해놓은건지 그 나이의 여자가 얼굴도 몸도 주름투성이일 리가 있겠습니까. 물론 십대의 저는 이 부분에서 전혀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했었지만 말이죠. 서른이 넘으니 좀 기분 나쁘군요! 흥!!



** 책이 정말 예쁩니다. 볼 때마다 예쁘다고, opp봉투에 쌌다가 뺐다가 해가면서 아직도 호들갑을 떨고 있어요. 살 때 한 권 쯤 더 사둘걸,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어져 검색했더니 특별판은 품절입니다. 아쉬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