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이브닝, 펭귄
김학찬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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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이라고 하자. 있는 그대로 함부로 부르면 욕처럼 들리니까, 펭귄이라고 하자. 가끔 입에 좆을 물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앞으로는 부드럽게 "오늘 기분 참 펭귄같네" 라고 하자. (p8)

이 펭귄이 어떤 펭귄인지 살짝 감이 잡히실지 모르겠다. 그렇다. 이 펭귄은 우리가 아는 그 펭귄이 아니다. 마다카스카의 펭귄도 아니고 파퍼씨네 남극 펭귄도 아니고 해피피트의 황제 펭귄도 아니다. 화자의 설명에 따르면 사춘기 이후 나타나 남자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놈으로 우리 아부지도 할아버지도 내 동생도 미래의 내 남자친구와 지지난 달 소개팅한 그 놈과 이웃집 아저씨와 에브리바디 지구 인류의 절반에 해당하는 모든 남자들은 다 펭귄의 식민 육체일 따름이다. "굿 이브닝, 펭귄"은 크기는 작아도 성깔은 짱짱한 펭귄 때문에 겪게 되는 주인공의 눈물 나는 청소년기와 청년기 그리고 해방기에 이르는 성장소설이었다. 펭귄의 펭귄에 의한 펭귄을 위한 성장소설인 줄로만 알았으나 남자와 펭귄은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이므로 결국 주인공의 성장기이기도 한 응답하라 1997의 또다른 버전이랄까.

시작은 좀 머쓱하다. 국기 게양대도 내려간 시간, 학교 운동장에서 "굿 이브닝" 하고 깨어난 소년의 펭귄으로 온동네에 소란이 인다. 어린 머스마 거시기 펭귄 좀 일어났기로 웬 소란이냐 싶겠지만 아람단 소녀의 손에 보이스카우트 소년이 펭귄을 쥐어준 것은 동네가 뒤집히고도 남을 일이었다. 머리에 피도 안마른 놈이 저지른 성추행.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었고 소년은 순진했으므로 죄를 따져 묻진 않았지만 솔직히 까놓고 말해 그 시절이니까, 소설이니까 이해를 구할 수 있는 일이기는 했다. 주인공은 철인28호에 심취해있던 아직 포경도 안한 무지한 아이였으니 13세여도 몰랐다고 믿자. 어쨌든 그 일이 있고  어찌저찌 포경 수술도 하고, 자기가 해리포터도 아닌데 거시기 번개 흉터도 얻어 가며 중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더 큰 고난들이 시작되었다. 성장기 소년답게 펭귄이 한층 포악해진 탓이다. 오로지 머릿속엔 여자! 여자! 그것도 얼굴 예쁘고!! 가슴 큰 여자!! 밖에는 없다. 관련한 에피소드도 여럿 나온다. 비아그라 아이돌 사진이 찍힌 트럼프 카드나 사이버섹스1999 같은 야설 가득한 플로피 디스켓들이 소지품 검사에서 털렸는데 그 양이 리어카로 끌어야 할 만큼이었단다. 에로 비디오를 보기 위해 비디오방을 터는 누군가에 대한 소문도 나돌고 주인공은 하루 아홉번을 넘기는 펭귄과의 악수(직접적인 표현은 피하고 싶으니 알아서 상상하시길)로 펭귄이 아야 할 정도고 더하여 기타 등등. 게 중 몇 몇은 좀 판타지 내지는 지나친 구라 같았으나 어쨌든 녀석의 펭귄은 IMF 아버지 실직 앞에서도 혈기왕성했고, 엄마의 고달픈 마트근무에도 융성했으며, 누나에 대한 부모님의 차별이나 진로 포기에도 정기만발, 성장기 내내 아주 힘차고 적극적이었다. 펭귄의 식민지배는 영원할 것 같았다. 영원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대학 진학 후 현실은 내 맘 같지 않고, 군대 가, 학비 벌어, 인턴으로 취업해, 살아갈 날은 내내 막막하고, 사는 게 피곤한 청년의 펭귄에게도 한계가 오고 만다. 펭귄은 펭귄대로 주인공은 주인공대로 삶이 지친다. 결국 펭귄은 굿 이브닝, 또 한번 이별을 고하며 떠나간다. 식민지를 넘겨줄테니 자주국방의 독립국가를 이루라는 덕담을 남기고. "오늘부터 생각은, 네가 해." 그러나 펭귄이 사그라든 인생에 오로지 머리로만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인생에 만족할 남자가, 그런 남자에 만족할 여자가 몇이나 될런지. 책소개를 보고 그저 조금 야한 이야기려나 했는데 의외의 한방이 있는 소설이었다. 고개 숙인 청년, 우리들의 청춘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수컷이 아니어서 이해할 수 없는 류의 이야기도 있었지만 같은 시대 안에서 성장한 사람으로서 느낄 수 밖에 없는 동질감과 좌절감으로 무던히 공감하며 고개 끄덕이게 되는.

덧. 김학찬 작가가 83년생이다. 그의 생생할 수 밖에 없는 청소년기의 기억은 고스란히 내 기억 한 부분을 닮아있다. 동생과 함께 봤던 철인 28호, FX는 비디오로 빌려봤을 거다. 처음으로 샀던 컴퓨터, PC 통신, 흥했던 통신소설들, 마이마이, H.O.T 그리고 IMF. 아버지는 실직 후 몇 번에 걸쳐 무직유직무직을 반복했고 엄마가 아버지 대신으로 돈을 벌었다. 나는 만화책에 심취했고 동생은 뭐하고 사는지를 몰랐다. 사춘기 남매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남남처럼 사니까. 주인공 누나처럼 나도 동생을 민달팽이 취급했다. 변성기에 왔을 때는 내 옆에서 말도 못했다. 하도 듣기 싫다고 난리를 떠니까 그냥 더러워서 입 다물고 있었단다. 기찻길로 학교를 가다 얼굴에 멍을 달고 삥 뜯긴 채 돌아온 적이 두어번, 멀쩡한 길 놔두고 왜 그리로 다니냐고 등짝을 쥐어 팬 기억만이 누나로써 보인 애정의 전부였다. 그 이상으로는 간섭하지 않는 서로가 영 딴 세상이었다. 그 때의 기억을 무던히 떠오르게 하는 책이다. 사람 감성적으로 만드는 책이기도 하고. 마냥 즐거운 추억만 있었던 건 아닌데 딱히 큰 괴로움도 아니었던. 부모님이 견뎌야 했던 시간과는 별개로 어리고 철없던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 편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기. 그 소년기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다가도 힘내 라는 말 밖엔 별다른 위로도 없는 우리들의 펭귄을 생각하면 또 좀처럼 마음이 편치 않다. 새끼 손가락 크기로 작아지다 눈을 감은 펭귄이 남 같지가 않아서, 벌써부터 정력이 다한 듯 피곤한 오늘, 나는 너무 늙어버린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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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과 도발의 그리스로마신화 - 명화로 훔쳐보는 은밀하고 노골적인 신들의 사생활
구예 지음, 정세경 옮김 / 도도(도서출판)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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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젬마씨가 썼던 그림 읽어주는 여자였던가요? 그 책이랑 비슷하게 명화의 배경이 되는 그리스로마신화를 알려주는 책입니다. 작가는 구예라는 중국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예술청년인데요. 그가 책 속에서 그대로 화자로 등장해 매 페이지의 그림들을 설명해줘요. 283 페이지에 150여점의 그림이 들어있으니 그림양이 상당하지요? 문체도 신화체(?)가 아니어서 진지하거나 지루하지 않고 술술 읽힙니다. 구예가 인터넷에 올렸던 글이 인기를 끌면서 책으로 엮여 나온거라  면면이 흐르는 분위기가 시종일관 밝고 유쾌해요. 블로그 연재물처럼 가볍습니다. 우리 식으로 치면 아재스럽기도 하구요. 웃긴 농담, 안웃긴 농담도 꽤 많고 신화를 깊이 파고 들기 보다 신화 안에서도 자극적인 가쉽들, 아주아주 유명한 사건, 대게는 연애 및 치정 위주로 짧게 얘기해 주고 말아요. 쓰고 보니 어릴 때 미용실에서 접했던 잡지 같기도 하군요. "피비린내와 폭력, 근친상간, 암투, 동성애가 모두 등장하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의 그리스로마신화 속으로!"라는 주제에서 한발짝이라도 비켜서거나 눈 돌리는 법이 없습니다. 그 일관된 주제 의식만큼은 마음에 들었어요. 나름 신선하더라구요. 

아래 보시면 편집도 블로그 게시글 느낌 그대로입니다. 글밥은 작은데 구성하는 글자들이 하나 같이 큼지막큼지막, 전 살면서 유딩 때 읽었던 그림동화들 빼고 이렇게 페이지가 크게 찍혀있는 책은 처음 봤어요!! 처음엔 헉 하고 놀랐다가 엄청 웃었습니다. 회화 관련 책들은 몇 읽어 본 게 없어 그런지 제 기준에선 새롭기도 하고 읽기도 편하더군요. 뭔가 풋내가 느껴진다고 해야할지, 엉뚱한 이야기도 참 많았구요. 관점이 좀 괴랄한가 싶기도 하지만 듣고 보니 썩 그럴 듯해 이거 공감해야 해 말아야 해 하고 헷갈리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바다 거품에서 태어난 비너스에 왜 배꼽이 있냐는 꼬집음! 탯줄도 없이 태어난 신이 저럴 수 있냐, 이해할 수 없다 주장하지만 배꼽없는 비너스는 또 상상이 안가므로 그냥 눈 감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사람 시선에선 그리스로마 신화와 손오공 사이에서 어떤 유사점을 느끼나봐요. 서유기를 안읽어봐서 전 잘 모르겠던데 언젠가는 서유기도 꼭 읽어보리라 했습니다. 

어쨌든 오래만에 접한 그리스로마 신화라 아주 재미났어요. 각각 다른 책으로 세 번은 봤던 것 같은데 몇 몇 이야기 빼고는 다 왜 이렇게 낯선지 아주 깜깜이가 되어 혼났습니다. 신도 못알아보구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와 아테네를 혼동해서 뭐라고? 아폴로랑 아테네가 쌍둥이였다고?! 하면서 깜짝 놀랐다가 아르테미스와 아테네가 비슷한 이미지이긴 해도 전혀 다른 신이었다는 걸 아테네 탄생 얘기에서야 깨닫고 이 바보멍충이 하며 자책하구요. 헤라가 제우스의 정실(?)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첩이 첩꼴 못본다의 장본인이었다는 얘기에도 벙 쪘습니다. 미의 남신 아폴로가 실상 연애에서는 죄 실패만 했다는 얘기에는 동질감으로 하마터면 울 뻔 했지만 찌질한 느낌이라 참았습니다. 낭만을 산산히 깨부시는 열 두 별자리 얘기도 아련한 느낌으로 읽었군요. 소라는 점쟁이라고 어릴 때 별자리 얘기를 접하곤 나도 물병자리였으면 좋았을 걸 했는데 알고 보니 물병자리 그 친구도 제우스 애인이었더라구요. 그냥 아름다운 소년인 줄 알았건만. 눈물 찔끔.

신화책은 재미없다, 어렵다, 지루하다는 편견이 조금씩들 있잖아요. 이 책은 그런 편견을 일부나마 뿌셔뿌셔 할 수 있는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대신에 굉장히 얕은 깊이에 생략된 이야기들도 많기 때문에 그리스로마 신화의 맛보기 정도로 생각하고 읽어야 할 것 같아요. 본질은 신화가 아니라 그림에 대한 해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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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 제155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김난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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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이는 이발소는 제 155회 나오키상 수상작인데요. 띠지를 보면 미야베 미유키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추천사가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가장 공감가는 것은 기리노 나쓰오의 말이었어요.

"확실한 디테일에 힘입은 안정감, 그것이 독서의 기쁨으로 이어진다."

6가지 단편 중 사실 어느 하나 새롭거나 신선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굉장히 굉장히 익숙해서 이 얘기 어디서 들어봤는데 뭐더라? 어? 영화로 봤던 내용 아닌가? 어디서 봤더라? 하고 생각하고 말아요. 인간극장, 좋은생각,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분위기로는 얼마전에 읽었던 펭귄철도 분실물센터나 나미야잡화점의 기적과도 비슷하고요. 똑같은 내용으로 딱 떠오르는 소설이나 영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네, 이게 함정이네요) 분명 어디선가 들어 봤음직한 친숙함과 익숙함이 있어요. 딸의 죽음을 성인식으로 극복하는 부부의 이야기라던가, 16년만에 절연했던 모친을 만났는데 그 모친이 치매에 걸려 있었다던가, 남편에게 이혼할거얏! 하고 친정에 내려왔는데 그 밤부터 도착하는 과거로부터의 문자라든가, 학대당한 아이들이 가출해서 만나게 되는 좋은 어른 등 면면이 처음과 끝을 알만한 이야기였어요. 대충 소재만 들려줘도 독자분들 무슨 얘기인 줄 알겠다 하는 그렇고 그런 상투적인 줄거리!! 근데 그래서 지루하냐면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 일년 전에 본 인간극장, 십년 전에 본 인간극장 사람만 달라졌지 사는 내용이야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지만 그래도 보다 보면 그 새로울 것 없는 얘기에 감동 받아 울고 기특해서 울고 슬퍼서 울고 안타까워서 울고 하는 것처럼 각기 다른 디테일로 그렇게 눈물이 납니다. 특별한 것은 없지만 딱히 꿀리는 것도 없고 모난 데도 없고 참 취향 안탈만한 글 같다는 느낌이에요. 긴장감은 없지만 누구에게나 먹힐 류의 감성, 베스트셀러로 손색이 없을, 뭣보다 감정선이 되게 섬세하고 찡해요. 두 이야기 성인식과 이 책의 제목인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가 특히 그렇습니다.

딸을 잃고 한없이 우울했던 부부가 딸을 대신해 성인식에 참여하는 과정이 신납니다. 염색을 하고 성인식에 맞는 또 딸이 좋아했을 법한 기모노를 빌리고 복근운동을 하고 피부관리를 하는 장면 등이 아주 귀엽고 재미나요. 노력했지만 아무래도 괴이쩍을 부부의 행색을 보며 비웃는 젊을 애들을 꼴아보는 그 건달 같은 아버지의 모습에는 키득키득 웃기면서도 눈물이 나구요.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가, 이 얘기가 특히나 대단한데요. 혹시라도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시거든 이 단편 하나만 우선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외딴 바닷가의 인적 없는 이발소를 젊은 사람이 무슨 영문으로 찾았나 의아하다가, 이발소의 정면 거울 한가득히 들여다보이는 남청 바다와 푸른 하늘의 묘사에 설레였다가, 처음 만난 젊은 손님에게 살인자였던 제 과거까지 거리낌없이 밝히는 이발사의 회환에 가슴 아프다, 끝내 밝혀지는 그들의 관계, 손님을 배웅하는 늙은 이발사의 ", 얼굴을 다시 한번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앞머리가 깔끔하게 정리되었는지 신경이 쓰여서"라는 말에는 아주 펑펑 울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쓰니 그냥 별 문장 아닌 것 같은데 이 이야기의 처음에서부터 쭉 따라가다 보면 이 특별하지 않은 물음이 너무나 특별하게 느껴져요. 헤어졌던 가족의 만남, 가족의 이별 그리고 가족으로 인한 상실감을 극복하고 회복하는 이야기들이 애틋하고 따뜻합니다. 절절하진 않은데 애가 끓어요. 폭염주의보까지 내린 이 봄과는 약간 계절감에 괴리가 있기는 한데 그래도 울고 나니 개운한걸요. 막장 읽고 욕 하며 느끼는 개운함과는 또 다른 카타르시스입니다.

** 멀리서 온 편지가 태평양 전쟁에 살짝 발 담구고 있어요. 전쟁터에서 보낸 짦은 편지 내용이 있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나 때가 없는 시계에도 패전 즈음 이야기가 찔끔 있구요. 츠츠이 야스타카에 지레 겁 먹은 것도 있지만 나라를 지키고 어쩌고, 미얀마에서 전사하고 어쩌고 해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침략전쟁을 호국전쟁인냥 묘사하는 거 아냐 의심의 꼬리를 세웠는데 목숨이 있다면 나라 따위는 필요없다는 그 말에 더 집중해서 읽고 넘겼습니다. 일본작가 책에 전쟁 얘기가 나오면 민감해지는 거 참 싫은데 전례가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촉각을 세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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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뺏는 사랑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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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난 후 제목에 반감이 생겼다. 아낌없이 뺏는 사랑이라니 내용에 비해 제목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뽑은 것 같다. '열여덟 호구짓 마흔까지 간다', '호구는 연애금지', '유혹하는 호구' 내지는 ' 내 인생의 호구', '호구왕 조지의 모험', '산산이 부서진 호구' '이것이 호구의 세상이다', '이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호구짓' 정도로 뽑았으면 딱일 것 같은데 약간 아쉽다. (신기하다. 책장에 꽂힌 책에 호구를 대입하니 안어울리는 제목이 없다!! 우왕!!!!) 

그리고 여기서 질문 하나. 이십여년 만에 나타난 전 여자친구가 당신에게 부탁을 한다. "나 대신 돈을 전해주면 좋겠어. 네가 돈을 전해주면서 날 용서해달라고 부탁해줘."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돈을 받는 대상은 전여자친구와 헤어진지 얼마 안된 불륜남이고, 그 돈은 불륜남에게서 훔친 돈이며, 그 불륜남의 의뢰로 쫓아온 남자에게 신장에서 피가 날 정도로 옆구리를 얻어터진 상태라면. 거기다 전 여자친구는 이십여년 전 아버지와 친구를 죽인 살인 용의자이다. 심정적 증거 및 물증까지 충분한 99.99 프로에 가까운 범인이며 도망자 신분. 당신이라면 이 부탁을 들어 전여자친구의 불륜남을 만나겠는가?

내 대답은 NO다. 절대로라는 말은 쉽게 하는 게 아니라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장담할 수 있다. 나는 절대 남의 돈을 대신 가져다주는 심부름 따윈 하지 않는다. 생전에 남의 돈 꿔 본 적도 없는데 빌린 돈도 아니고 남이 훔친 돈을 대신 반납하다니. 그런데 조지는 한다. 리아나, 이 리플리 증후군인지 허언공상증인지 하여간에 여느 평범한 꽃뱀과는 차원이 다른 꽃뱀 오브 꽃뱀, 한번 문 남자는 기본 이십년은 호구 잡고 가는 꽃뱀의 여왕에게 홀려서 냉큼 "할게" 한다. 나름 자존심 챙긴답시고 객관적으로 묻고 어쩌구 시간 끌구 어쩌고 하는데 대답은 매번 그냥 "할게"다. 그 불륜남이 망치에 뒤통수를 맞아 죽고 친구이자 파트너인 아이린이 길가다 횡액을 당하고 자신도 다이아몬드 절도 용의자 중 한 사람이 된 상태에서도 리아나의 부탁 앞에선 그냥 한다. 어이구 이 등신, 머저리, 팔푼이 같은 놈아, 지 팔자 지가 꼬고 앉았네. 한다. 나도 욕을.

인생 모른다 더 살아봐라고 어른들이 흔히 말씀하시곤 하는데 한 오십 페이지만 넘어 가도 조지 인생은 좆됐구나 하고 각이 딱 잡혀 온다. 어디서 얼마만큼 좆될것인가를 상상하며 읽는 것이 큰 재미였는데 책에 한껏 몰입하는 순간 순수한(?) 독자의 심정으로 조지가 죽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그래야 이 소설이 더욱 완벽하게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지가 똥멍청이 짓을 하다 개과천선 하거나 깊은 깨달음을 얻어 안멍청이가 되거나 이러면 시시할 것 같았다. 기왕지사 호구로 시작한 것 리아나에게 당할 만큼 당하고 호구로 아름답게 종결 짓고 세상 뜨기를. 사망 플래그가 찍힐 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책의 중반부터 조지 죽겠구나, 조지 죽겠지, 조지 안죽으면 싫은데, 조지 죽었으면 좋겠다, 조지 죽어라 하며 읽었다. 꼭 저주 거는 것 같아 쓰고 보니 좀 무서운가 싶지만 정말 드물게 주인공이 죽어도 슬프지 않을 류의 소설이었다. (조지가 죽었는지 안죽었는지는 비밀~~~) 나쁜 놈도 아니고 징그러운 놈도 아니고 뭣 같은 놈도 아닌데 왜 그런지 딱 잘라 설명은 못하겠는데 그냥 조지 욕하면서 읽는 재미가 참 좋아서 그런 게 아닌가 하고 결론을 내렸다. 아마 이런 것이 막장극의 기쁨인가 보다. 주인공 욕하다 도끼 자루 썩는 줄을 모르겠는 거. 책장이 처음에서 끝으로 순간이동을 한다. 조금 과장해 얼마나 스피드 하게 넘어가는지 책 넘길 때마다 잔상이 보였다라고 하면 뻥 치지 말라고 하겠지만 어쨌든 재밌다. 킬링타임용이라도 이 정도면 에이뿔 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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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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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겠다. 세상 천지에 이러구 괴랄한 소설은 또 처음 본다. 한 편도 아니고 단편 여덟 편을 모두 약 빨고 썼나 했다. 보도방 뛰는 십대 소년소녀들의 아재 랩  소환 소설 "버니". 본드 빨면 나타나는 햄릿과 동거중인 삼류배우의 진술서 "햄릿 포에버". 망치 보다 더 큰 호치키스로 사람 머리도 내리찍는 피씨방 알바생의 자기 소개서 대필문 "옆에서 본 저 고백은". 살아 움직이는 머리칼로 스님 거시기도 일으켜 세우는 팜므파탈인데 분위기는 전설의 고향인 여자의 "머리칼". 박정희의 눈을 뒷통수에 달고 심수봉 닮은 여자에게 반한 남자의 일대기 "백미러 사나이". 음주 미스터리(가장 평범했다) "간첩이 다녀가셨다", 성경책 형식이라 복음 막장인 줄 알았더니 이것도 사랑과 전쟁이었네? "최순덕 성령충만기". 차라리 숫처녀 생식으로 할 것이지 한국판 미노타우루스도 아니고 검은소와 교배한 순녀와 그녀의 아들 황우석의 씨감자 이야기 "발 밑으로 사라진 사람들". 약이 아니면 본드, 본드 아니면 술, 술이 아니면 담배 한 보루를 30분 안에 빨고 (담배를 안펴봐서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제정신 아닌 상태로 의식의 흐름을 쫓으며 글을 쓰면 이런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하고, 절대 그럴리는 없겠지만 잠깐 의심을 했다. 재미는 있는데 너무 이상해서.

단편들은 하나같이 난해, 심란, 민망, 당혹, 혐오, 불편, 서글픔의 어드매에 있다. 뭘 비판하려는 건지는 알겠는데 싫어하는 분위기로 풀어가는 이야기여서 별로였다. 상상 좀 하고 살라는데 이런 상상은 별로 하고 싶지가 않달까. 근데도 잘 읽힌다. 근데도 재미있고. 괴랄한 내용과는 별개로 문체가 발랄한데다 힘이 세다. 사람으로 치면 청소년, 사차원 같고 중2병스럽다. 이런 걸 평론가들은 문학적 미학이라고 표현하는건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그냥 좀 이상한 단편집이었다. 출판사도 이런 어려움을 알아서인지 수능기출문제풀이집처럼 이기호 소설 "해설"을 단편분량으로 엮어 놓았는데 제일 싫어하는 짓이다. 간단하게 추천사 정도면 몰라도 이 분량이면 그냥 문학평론가 본인이 책 한 권을 따로 써라. 삐딱한 욕망의 카니발이고 나발이고 어려우면 어려운데로 난해하면 난해한대로 독자가 저 알아서 느끼고 해석하게 놔둘 것이지 뭔 고려가요 얄리얄리 얄랴셩 얄랴리 얄라도 아닌데 이 따위 해설을 붙여놓은건지 정말 꼴불견이다. 거기다 해설이 소설보다 더 어렵다!! 90년대 출간작이야 뭐야 하고 심난한 맘으로 찾아봤더니 흠, 오래 됐긴 했구나. 2004년도 작품이었다. 그 때에는 그래, 각종 한국작품들에 (하다 못해 여행기에까지) 문학평론가들의 해설이 붙어있던 시절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수능 독파를 외치는 국어선생님 마냥 중요 문장에 밑줄 쫙쫙 그어가며 a 단편의 d 줄은 이런 뜻이고 d줄은 x 단편의 이 문장과 연결되고 그런 걸 읽다 보면 졸음은 쏟아지고 안그래도 심란하게 읽은 책에 정도 팍 떨어지고 그렇고 그런... 으로 끝날 뻔 했는데 어쩔씨구. 작가는 이러고 괴상망측한 글을 써놓고 이제야 겨우 칼을 씻은 기분이란다. 누가 보면 뭐 대단하게 썰었는 줄, 웃음이 픽 났다. 그냥 그렇다고. 책은 딱 잘라 추천은 못하겠는데 재미는 있고 뭐 그렇다. 아참, 저 문구 하나에 떨어질려던 정은 도로 붙었다. 칼 씻는 게 뭐라고. 이런 게 병맛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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