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이브닝, 펭귄
김학찬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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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이라고 하자. 있는 그대로 함부로 부르면 욕처럼 들리니까, 펭귄이라고 하자. 가끔 입에 좆을 물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앞으로는 부드럽게 "오늘 기분 참 펭귄같네" 라고 하자. (p8)

이 펭귄이 어떤 펭귄인지 살짝 감이 잡히실지 모르겠다. 그렇다. 이 펭귄은 우리가 아는 그 펭귄이 아니다. 마다카스카의 펭귄도 아니고 파퍼씨네 남극 펭귄도 아니고 해피피트의 황제 펭귄도 아니다. 화자의 설명에 따르면 사춘기 이후 나타나 남자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놈으로 우리 아부지도 할아버지도 내 동생도 미래의 내 남자친구와 지지난 달 소개팅한 그 놈과 이웃집 아저씨와 에브리바디 지구 인류의 절반에 해당하는 모든 남자들은 다 펭귄의 식민 육체일 따름이다. "굿 이브닝, 펭귄"은 크기는 작아도 성깔은 짱짱한 펭귄 때문에 겪게 되는 주인공의 눈물 나는 청소년기와 청년기 그리고 해방기에 이르는 성장소설이었다. 펭귄의 펭귄에 의한 펭귄을 위한 성장소설인 줄로만 알았으나 남자와 펭귄은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이므로 결국 주인공의 성장기이기도 한 응답하라 1997의 또다른 버전이랄까.

시작은 좀 머쓱하다. 국기 게양대도 내려간 시간, 학교 운동장에서 "굿 이브닝" 하고 깨어난 소년의 펭귄으로 온동네에 소란이 인다. 어린 머스마 거시기 펭귄 좀 일어났기로 웬 소란이냐 싶겠지만 아람단 소녀의 손에 보이스카우트 소년이 펭귄을 쥐어준 것은 동네가 뒤집히고도 남을 일이었다. 머리에 피도 안마른 놈이 저지른 성추행.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었고 소년은 순진했으므로 죄를 따져 묻진 않았지만 솔직히 까놓고 말해 그 시절이니까, 소설이니까 이해를 구할 수 있는 일이기는 했다. 주인공은 철인28호에 심취해있던 아직 포경도 안한 무지한 아이였으니 13세여도 몰랐다고 믿자. 어쨌든 그 일이 있고  어찌저찌 포경 수술도 하고, 자기가 해리포터도 아닌데 거시기 번개 흉터도 얻어 가며 중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더 큰 고난들이 시작되었다. 성장기 소년답게 펭귄이 한층 포악해진 탓이다. 오로지 머릿속엔 여자! 여자! 그것도 얼굴 예쁘고!! 가슴 큰 여자!! 밖에는 없다. 관련한 에피소드도 여럿 나온다. 비아그라 아이돌 사진이 찍힌 트럼프 카드나 사이버섹스1999 같은 야설 가득한 플로피 디스켓들이 소지품 검사에서 털렸는데 그 양이 리어카로 끌어야 할 만큼이었단다. 에로 비디오를 보기 위해 비디오방을 터는 누군가에 대한 소문도 나돌고 주인공은 하루 아홉번을 넘기는 펭귄과의 악수(직접적인 표현은 피하고 싶으니 알아서 상상하시길)로 펭귄이 아야 할 정도고 더하여 기타 등등. 게 중 몇 몇은 좀 판타지 내지는 지나친 구라 같았으나 어쨌든 녀석의 펭귄은 IMF 아버지 실직 앞에서도 혈기왕성했고, 엄마의 고달픈 마트근무에도 융성했으며, 누나에 대한 부모님의 차별이나 진로 포기에도 정기만발, 성장기 내내 아주 힘차고 적극적이었다. 펭귄의 식민지배는 영원할 것 같았다. 영원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대학 진학 후 현실은 내 맘 같지 않고, 군대 가, 학비 벌어, 인턴으로 취업해, 살아갈 날은 내내 막막하고, 사는 게 피곤한 청년의 펭귄에게도 한계가 오고 만다. 펭귄은 펭귄대로 주인공은 주인공대로 삶이 지친다. 결국 펭귄은 굿 이브닝, 또 한번 이별을 고하며 떠나간다. 식민지를 넘겨줄테니 자주국방의 독립국가를 이루라는 덕담을 남기고. "오늘부터 생각은, 네가 해." 그러나 펭귄이 사그라든 인생에 오로지 머리로만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인생에 만족할 남자가, 그런 남자에 만족할 여자가 몇이나 될런지. 책소개를 보고 그저 조금 야한 이야기려나 했는데 의외의 한방이 있는 소설이었다. 고개 숙인 청년, 우리들의 청춘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수컷이 아니어서 이해할 수 없는 류의 이야기도 있었지만 같은 시대 안에서 성장한 사람으로서 느낄 수 밖에 없는 동질감과 좌절감으로 무던히 공감하며 고개 끄덕이게 되는.

덧. 김학찬 작가가 83년생이다. 그의 생생할 수 밖에 없는 청소년기의 기억은 고스란히 내 기억 한 부분을 닮아있다. 동생과 함께 봤던 철인 28호, FX는 비디오로 빌려봤을 거다. 처음으로 샀던 컴퓨터, PC 통신, 흥했던 통신소설들, 마이마이, H.O.T 그리고 IMF. 아버지는 실직 후 몇 번에 걸쳐 무직유직무직을 반복했고 엄마가 아버지 대신으로 돈을 벌었다. 나는 만화책에 심취했고 동생은 뭐하고 사는지를 몰랐다. 사춘기 남매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남남처럼 사니까. 주인공 누나처럼 나도 동생을 민달팽이 취급했다. 변성기에 왔을 때는 내 옆에서 말도 못했다. 하도 듣기 싫다고 난리를 떠니까 그냥 더러워서 입 다물고 있었단다. 기찻길로 학교를 가다 얼굴에 멍을 달고 삥 뜯긴 채 돌아온 적이 두어번, 멀쩡한 길 놔두고 왜 그리로 다니냐고 등짝을 쥐어 팬 기억만이 누나로써 보인 애정의 전부였다. 그 이상으로는 간섭하지 않는 서로가 영 딴 세상이었다. 그 때의 기억을 무던히 떠오르게 하는 책이다. 사람 감성적으로 만드는 책이기도 하고. 마냥 즐거운 추억만 있었던 건 아닌데 딱히 큰 괴로움도 아니었던. 부모님이 견뎌야 했던 시간과는 별개로 어리고 철없던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 편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기. 그 소년기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다가도 힘내 라는 말 밖엔 별다른 위로도 없는 우리들의 펭귄을 생각하면 또 좀처럼 마음이 편치 않다. 새끼 손가락 크기로 작아지다 눈을 감은 펭귄이 남 같지가 않아서, 벌써부터 정력이 다한 듯 피곤한 오늘, 나는 너무 늙어버린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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