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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비너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빨간 망토를 둘러 쓴 비너스라고 생각했다. 표지 속의 비너스를 보며 왜 등을 돌린 채로 서있는 걸까, 어디를 향하는 걸음일까, 왜 하필 빨간망토를 썼을까 라고 생각했으나 책을 다 읽은 후에야 내가 잘못 안 것임을 알았다. 정면으로 선 발가락으로. 표지는 밀로의 비너스에 붉은 천이 씌어진 것이었다. 비너스의 뒷모습이라고 생각했을 때엔 빨간망토 속엔 은밀한 욕망이, 숙여진 목과 굽어진 어깨에서는 비밀스런 움직임이 느껴진다고 생각했지만 완전한 착각이었던 셈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오롯이, 그 자리에 못박힌 누구나 알만한 존재였다. 그저 가리워졌을 뿐인. 그러나 조금만 더 주의를 집중한다면 금방 발견하게 될 트릭을 안고. 이 소설의 내용이 딱 표지 같았다. 턱을 치켜들고 있는 비너스가 품고있는 진실을 알량한 붉은 천들이 겹겹이 가린 느낌. 반전 다시 또 반전. 이 붉은 천들을 얼른 벗겨내고 싶은 심정으로 481 페이지를 내달렸다. 다행히도 이번 히가시노 게이고 작은 선방이라는 느낌이다. 막장 같기도 한 그의 유혹이 아주 톡톡했으니까.
1. 사랑과 전쟁
수의사 하쿠로에게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아머니의 사망 후 의절하다시피 한 이부 동생의 아내 가에데가 그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해 온 것이다. 아주버님이라는 얼떨떨한 호칭에 이끌려 나간 자리에서 가에데는 남편 아키토가 실종되었고, 그 실종의 원인에는 의붓 아버지 집 안이 엮여있는 것 같다는 의심을 전해온다. 가에데를 도와 아키토의 행적을 수색하는 하쿠로. 마흔, 독신, 병원과 집 밖에 모르는 심심한 인생 하쿠로의 눈에 육감적이고 미스터리한 매력의 가에데가 자리 잡으며 동생의 아내에 대한 호감과 관심, 추궁과 집착이 어느 덧 도를 넘어서기 시작한다. 제수를 향한 하쿠로의 위험한 욕망, 소설 속 첫 번째 비너스이다.
2. 매드 사이언티스트
몰락해가는 가문이라고는 하나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 것을 증명하듯 하쿠로의 동생 아키토에게 물려질 재산은 아직 너무나 많다. 처음 의심은 분명 그 재산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의붓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재산을 둘러싸고 모여든 야가미 집안 일족에게서 느껴지는 욕망의 면면이 하쿠로와 가에데를 자극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사건은 엉뚱하게도 다른 방향에서 경종을 울리기 시작하는데. 뇌에 전기자극을 가하는 인체실험, 그 실험의 첫 참여자였던 하쿠로의 아버지 가즈키요, 그 실험의 담당의이자 연구자였던 하쿠로의 새아버지 야스하루, 선대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대에 의학적 업적을 쌓아 집안을 부흥시키고자 했던 야가미 집안의 수장 고노스케와 사라진 논문의 행방까지. 하쿠로가 알지 못했던 시간 속 겹겹이 쌓인 비밀의 문이 열리며 사건은 하쿠로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16년 전으로, 다시 아버지 가즈키요가 돌아가신 20년 전으로 인과의 흔적을 더듬어 나간다. 현생 인류의 뇌로는 탐구할 수 없는 과학의 저 너머, 지식에 대한 그릇된 욕망이 만들어 낸 안타까운 살인,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탐구욕이 소설 속 두 번째 비너스였다.
비너스는 우라노스의 잘려진 남근에서 탄생한다. 바다에 던져진 우라노스의 남근이 부글부글 거품을 뿜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신을 낳은 것이다. 그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매일 매 순간 누군가의, 어쩌면 나의 잘려진 남근이 던져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성, 재물, 권력, 명예, 탐구라는 그럴 듯한 탈을 쓰고 있지만 그 본질이 결국 음모 속에 잘려진 남근이라면 비너스가 주는 아름다운 결말이란 기대할 수 없는 게 당연한 걸지도. 욕망에 져버린 이의 파멸과 욕망을 이겨내려는 자의 고뇌와 반전을 보여주는 소설 위험한 비너스. 여름 잠을 앗아가는 흥미로운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