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5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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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상당한 수수께끼 같아."p.83

책을 읽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그 안에 담긴 내용이 하나도 이해가 안갈 때에는 어떤 감상평을 남겨야 하는걸까. 이게 뭔소리야 싶을 적에는 독자도 감상평을 알아들을 수 없게 야옹야옹왈왈으르렁 이렇게 써도 괜찮은걸까. 한글책을 읽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까마득하니 남의 나라 말 같을 수가 있는지, 1장에서 3장으로 넘어갈 때까지 어떻게 이 책이 단편집인 줄도 몰랐을 수가 있는지, 7장에 닿아선 또 어떤 식으로 단편들이 장편화 되는지 그 유기적 관계를 일일이 설명하려니 말문이 다 막히지만 결국 나는 한번 더 책을 읽음으로써 막힌 말문과 생각을 터보기로 했다. 소설 마니아들이 헌책방 순례를 하면서까지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를 찾아나섰던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 지루하다, 재미없다 라는 말 이외의 무언가를 나도 이 책에서 건져올릴 수 있기를 바랬다. 1회독 때의 해독불능이 2회독 때엔 부디 만회가 되기를, 그러나 큰 기대는 갖지 않은 채 읽고 다시 읽다보니 새삼 독서의 재미라는 게 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주의해. 귀를 기울여. 이 세상에 야구와 관계없는 건 하나도 없어" (p111)

제1장. 가짜 르나르의 야구 박물지. 2만권의 책과 함께 365일 반찬백과라는 고양이를 키우며 책에 나온 야구 이야기를 필사 중인 남자 "나"가 등장한다. 그는 프란츠 카프카와 홍당무의 작가 쥘 르나르가 야구선수였음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며 서부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의 시나리오를 두고 야구 경기의 해석본이라고 단 한번도 야구를 보지 못한 소년에게 설명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헛소리다. 제2장. 라이프니츠를 흉내 내어. 슬럼프에 빠진 주전 투수와 슬럼프에 빠지지는 않았으나 공을 치기 싫은 타자가 말하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라이프니츠의 단자론과 키르케고르의 불안이론이 썩 그럴 듯해 보이는 것도 잠깐이고 그냥 헛소리다. 제3장. 센티멘털 베이스볼 저니.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돌아온 큰아버지가 초등학교 5학년 소년에게 야구의 모든 것을 가르친다. 2시간 안에 야구시 900개 쓰기, 매일 100편 이상의 포르노 보기 등 맹훈련에 힘쓰며 소년을 야구선수로 키워냈고 소년은 훌륭하게 야구를 해낸 탓에 소년원행, 역시나 헛소리인게지. 제 4장. 일본야구창세기담.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책을 많이 읽는 배고픈 늑대와 보기 드물게 공정한 닭의 자본론으로부터 일본야구를 실현하는 감독님이 등장하는가 싶더니 교환일기를 쓰며 일본야구를 창조하는 에로신들이 등장하는 새삼 헛소리였다. (그래도 죽는 순간까지 야구만을 생각한 감독님은 살짝 찡하기도) 제5장. 코 푸는종이로부터의 생환. 제1장 야구 박물지에 등장했던 시나리오가 굳이 재등장해서 떠드는 언제까지고 헛소리다. 제6장. 사랑의 스타디움. 스타디움에 둘러앉은 선수 이외의 많은 사람들의 수다, 그럼에도 시합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헛소리다. 제7장. 일본 야구의 행방. 대망의 끝, 한신 타이거스 선수들이 모두 사라졌다. 일본야구도 사라졌다. 소설도 막을 내렸다. 모든 게 헛소리인 줄로만 알았는데 헛소리를 한 그들의 정체를 알고 나니 이것이 과연 헛소리가 맞는 것인지 의아해진다. 적어도 이 책 속에는 야구와 관계없는 건 정말이지 단 하나도 없었던 셈이다. 멋진데?

"사랑은 사라져도, 야구는 남는다." (p221)

야구가 너무너무 좋은 사람들의 이야기, 야구가 너무너무 좋아 야구를 찾으러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다카하시 겐이치로 작가의 여기도 야구 저기도 야구 그러나 이것이 정말로 야구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이 책을 처음 읽을 적엔 95년과 2005년을 거쳐 2017년에 다시 개정판이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어째서? 왜 또?? 이걸 누가 읽는다고??? 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만큼 갖가지 수다 사이에서 어떤 이야기라는 걸 끄집어 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스토리가 없다는 것이, 줄거리의 줄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 독서에 이토록 큰 괴로움을 선사할 줄이야. 그러나 재독 후의 감상은 처음과는 조금 다르다. 뭐라는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저만큼이나 좋아서 떠들어댈 수 있다니 작가도 등장인물들도 대단하네.. 이런 심경? 실존의 야구가 소멸한 세계에서 프란츠 카프카와 쥘 르나르와 월트 휘트니와 다자이 오사무, 그리고 무수한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 속에서, 철학자들의 말 속에서 한편의 시처럼 살아남게 된 어느 미래의 일본야구를 만나보시기를 기원한다. 나만 지루할 수 없다는 심보 가득한 추천이라고 의심할 수도 있지만!! 땀내나는 글러브와 묵직하게 공을 울리는 배트 소리와 함성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자리를 채우는 얄밉도록 해체된 말과 상황들이 어리둥절하게 여러분을 반길 것이다. 줄거리가 아니라 수수께끼의 답을 찾아가는 느낌으로 읽는다면 예상치 못한 흥미를 느낄 수도 있으리라. 일본에서도 재미없기로 악명 높다는 책을 어쨌든 읽어는 냈다는 기분을 덤으로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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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픽 미스터리
다비드 포앙키노스 지음, 이재익 옮김 / 달콤한책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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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책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온전히 자기중심적인 흥분을 느낄 수 있는 활동이 바로 독서다. 우리는 책을 읽을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책이 건네는 말을 찾는다. 작가들이 아무리 엉뚱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쓴다고 해도 '세상에! 이건 내 이야기잖아!'라고 말하는 독자는 언제나 존재한다." (p81)

출판사에 보내었으나 재미가 없어서 작품의 질이 떨어져서 또는 유행이 아니라 기타 많은 이유로 거절 당한 누구도 읽지 않아 투명한 원고들이 프랑스에 있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책들의 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린 것은 구르벡 관장 때문이었다. 결혼이라는 짧은 방황 이후 오롯이 책만 판 이 도서성애자는 독자없는 원고와 작가들을 긍휼히 여겨 도서관의 한 열람실을 개방한다. 바다에 던져진 유리병처럼 표류하던 많은 원고 중에서 단 하나의 원고가 "HHhH"(2015년 공쿠르상 수상작)를 발견하여 출판하게 힘썼던 그라셰 출판사의 에디터 델핀과 그의 남자친구이자 신인작가인 프레드에게 발견됨으로써 사건은 시작한다. 작가는 앙리 픽, 제목은 사랑의 마지막 순간들. 작품의 온점과 방점까지 사랑하게 될만큼 델핀은 이 원고에 푹 빠졌고 출간을 위해 작가를 찾아 나선다. 앙리 픽은 델핀 고향에서 피자집을 하던 노인이었으나 이미 사망한지 몇 년 된 상태였고 그의 아내는 그가 결단코 책을 읽거나 소설을 쓸만한 위인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려 하지만 델핀이 내민 원고를 읽고는 인정하게 된다. 이건 우리가 연애하던 17세의 짧았던 이별 순간을 그려낸 소설 같구려 라고. 죽은 남편의 애정에 새삼 흐뭇해하며 계약서에 사인을 휘리릭 날린 이후 델핀과 죽은 앙리 픽, 앙리 픽의 아내 마들렌 부인과 딸 조제핀은 태풍 같은 책의 존재감에 거세게 휘말린다. 졸라짱쎈 드래곤급 파워를 발휘하며 앙리 픽의 소설은 세간의 화제가 되었고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판권을 사들이려는 영화사들로 시끄러워졌으며 작가의 일대기를 알고자 하는 독자와 신문과 방송의 빗발치는 요청으로 도시가 들썩들썩할 지경까지 이른다. 그렇게 책이 화려한 성공의 정점에 올라선 순간 이 짱짱한 책과 작가에 대한 의심과 질투가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이 책을 정말 일평생 피자만 만들었던, 문학적 소양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피자집 할아버지가 쓴 게 맞을까? 라는 한 기자의 의구심이 미스터리를 만들고 미스터리를 파헤친다. 무덤에 묻혀 그 어떤 진실도 알릴 수 없는 앙리 픽의 책에는 기자의 의심처럼 기가 막힌 비화가 담겨 있었을까? 제목 속 앙리 픽의 미스터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의문의 답과는 별개로 그냥 책이 너무나 재미나 키득키득 웃음이 터졌다. 단번에 출간되지 못하고 거절 당했던 많은 유명 작품들의 비사와 너도 독자 나도 독자 우리 모두 독자니까 다 공감하지? 하며 책이 건내오는 이야기들이 진짜진짜 웃겼다. 책을 좋아하고 책을 아끼고 매일 같이 책을 가까이 하는 독자들이라면 누구나가 빙그레 미소 짓다 깔깔깔 웃음을 터트릴 흐뭇한 책 속의 책 이야기. 장담컨데 이 책을 읽다가 한번쯤은 "세상에! 이건 내 이야기잖아!"라고 외치게 될 것이다. 부디 앙리 픽의 미스터리를 리뷰가 아닌 책으로 계속 만나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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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시공 제인 오스틴 전집
제인 오스틴 지음, 이미경 옮김 / 시공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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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치기와 열정, 현명한 어른의 오랜 경험 중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언제쯤이면 알 수 있을까? 
어린 처녀들은 무엇에 의지해 생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하고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

27살의 앤 엘리엇은 8년 하고도 반년 전 사랑을 약속했던 웬트워스 젊은이에게 이별을 고한다. 어머니와도 같은 레이디 러셀의 설득과 준남작으로써의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아버지와 언니의 반대 때문이지 결코 사랑이 식어서는 아니었다. 웬트워스는 귀족가의 사내도 아니었고 가진 바 재산도 없었으며 갓 입대한 해군으로 전장에서의 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인생이 필리가 없는 남자였다. 레이디 러셀의 설득은 적어도 19살의 앤이 겪어야 할 현실을 생각하면 합당한 것처럼 보였다. 정작 8년이 지나 웬트워스가 여전히 아름답고 건강하며 곧 준남작으로 승급할 지위와 거대한 포상금과 함께 돌아왔을 때에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상냥하고 다정하지만 큰 미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와 언니의 사치로 지참금을 기대할 수도 없는 빚쟁이 딸의 신세인데다 이제는 누가 봐도 나이 먹는 처녀인 앤의 신세만 처량해졌다. 빚을 갚기 위해 그들의 집을 웬트워스 누나에게 임대하지 않으면 안되던 때의 비참함이란!! 게다가 자신은 아직 8년전의 마음을 채 다 정리하지도 못한 상태인데 웬트워스는 앤의 동생 메리의 시누이 루이자와 헨리에타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갖은 인기를 누린다. 처음 앤은 웬트워스의 성향상 이 처녀들과 사랑에 빠지기는 힘들 것이라 낙관했지만 운명은 기어이 앤의 앞으로 절망적인 번개를 내리꽂았으니 웬트워스의 책임 아래서 루이자가 죽음의 위기를 겪게 되는 것이다.  뭘 어떻게 뛰어내려야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가 자빠져 죽을 수 있는지 알 순 없지만 그들 모두가 루이자가 죽었다고 믿었다. 또는 죽을 거라고. 하다못해 해전에 나아가 십여 년을 싸우고 돌아온 대령조차도;;; 그리고 이 머리통이 부셔지는... 이라고 책에는 과격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정확한 병명은 뇌진탕의 결과로 루이자는 웬트워스 대령의 구애를 받게 된다. 박수칠 만한 책임감이다;;;; 앤은 다시 한번 마음을 접은 채로 가족들이 이사한 바스로 몸을 옮겨가고 이제는 완벽하게 그를 잊었다고, 잊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때에 웬트워스가 다시 바스로 오며 이 두 사람은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뭐 뻔하지. 그냥 나도 네가 좋고 너도 내가 좋은 것 같고 이러구저러구 묻고 확인하고 결혼하면 됐을 걸 오해하고 질투하고 샘내다가 돌아서고. 그런데 이런 게 다 연애감성 넘치는 소설의 재미 아니겠는가. 이것들이 놀고 있네 싶으면서도 어딘지 흐뭇하고 장난치냐? 하면서도 더 쳐라 싶은 이 마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여튼 결과적으로는 다 잘됐다. 오만과 편견과 이성과 감성에 이어 이번 설득에서도 모든 이들이 그 나름으로 보답받고 한편으로는 합당한 벌을 받으며 모두 다 그럭저럭 잘산다. 미운 사람이 단 한명도 등장하지 않는 소설이라 참 다행이지 뭐.

설득은 작가가 투병 중에 쓴 소설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책보다 얇고 다른 책보다 감정적 소모가 적다. 얄미운 캐릭터들이 등장하지 않아 진 빠짐도 없는 대신에 톡톡 튀던 개성의 일말도 사라졌지만 그래도 무한히 즐거우며 그래서 무한히 감사하다. 아프신 와중에도 이렇게나 행복해지고 기분 좋아지는 소설로 오래오래 우리 곁에 남을 작품을 남겨주셔서. 작가의 매력을 너무 늦게 알게 됐다는 처음의 아쉬움은 사라지고 아직 몇 편쯤 더 읽을 책이 남았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며 작가의 또다른 책 에마를 꺼낸다. 이 책엔 또 어떤 기쁨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설레고 기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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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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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혼례식이라면, 우리 듣는 이들은 통로를 걸어들어오는 신부를 지켜보는 신랑이죠.
상상의 완성이라는 행위 안에서 함께 어우러져 이야기가 탄생하는 거예요.
여느 결혼이 그렇듯, 또 결혼이 제각기 다르듯 이 행위는 우리와 관련되고,
그래서 각자 이야기를 다르게 해석하고 다르게 느끼죠.
하느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듯 이야기는 우리 개개인에게 찾아와요." (p187)

표지를 자세히 보면 높다란 산을 끼고 세 명의 남자와 십자고상, 자동차, 아이. 그리고 침팬지가 등장한다. 십자고상의 등장에서 알 수 있듯이 이야기는 많은 비극들의 퇴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상실로 시작하여 언제나 황량한 대지, 산이라고 명명되나 정작 바위뿐인 몽환의 땅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서 종말을 맞는다. 행군을 시작하는 첫 번째 고난자는 1904년 포르투갈에서 국립 박물관의 학예사 보조로 일하던 토마스였다. 그는 숙부의 집에서 하녀로 고용된 도라에게 첫눈에 반했고 사랑했으며 가스파르라는 귀염둥이 아들을 낳았지만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엔 아들을, 목요일엔 연인을, 그리고 그 주의 일요일엔 아버지를 잃었다. "집을잃다"라는 1부 제목이 그렇게 완전해진 것이다. 박물관에서 훔쳐낸 식민지 아프리카의 선교사 윌리엄스 신부의 일기와 그가 남겼다는 비밀스런 유산이 때마침 그에게 방향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의 생은 완전히 침몰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 그곳 교회에 숨겨졌을 부덕한 종교의 상징, 신에 대한 복수라는 목표와 별개로 막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자동차를 타고 가는 그의 여정이 얼마나 심란했던지 나는 안쓰러움과 어이없음과 불결함의 공포에 사로잡혀 덜덜 떨었는데 그가 기생충에 시달리다 못해 정신착란을 일으키며 휘발유 병에 초를 꽂았을 때, 그리하여 기어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숙부의 르노와 자신의 몸에 불이 붙었을 때, 화르르르륵 이는 동정심에 압도 당하여 그를 이해하기로 했다. 더욱이 고난이 끝난 것도 아니었으므로. 이 수줍고 온유하고 내성적이던 사내는 도로연수조차 없이 차를 몰다 한적한 도로에서 아이를 친다. 면허증은 고사하고 책으로 운전을 배웠으니 사고 자체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면허제도가 있기는 했을까?) 이상한 것은 가족을 잃는 고통을 너무도 잘 아는 그 남자가 아이를 들판에 방치한 채로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했다는 것 뿐. 앞을 보고 걷지 않고 뒤로 돌아 걸어다녔던 그가, 그 1년 간의 강박적 행위로 신에 반발하며 운명을 힐난했던 그가, 이로써 머리를 어느 방향으로 두고 걸어다닐런지 나는 비탄스런 마음으로 궁금해졌다.

"인간은 고난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눈을 뜨게 해줄까?
고난의 결과로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될까?
율리시스 신부의 경우를 보면,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이런 질문들의 답은 '아니다'였던 것 같다."(p127)

분명한 것은 토마스도 그 '아니다'에 속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고통이 닥쳤을 때 그는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타인의 시련을 차단하려고 애쓴다. 피해자에게 동정을 구한다. 구토를 하고 십자고상에 매달렸지만 처벌을 구하지 않는 그 알량한 죄책감에도 가치라는 게 있는 것일까? 그리고 소설은 2부 "집으로" 넘어가며 한 차례 환몽 같은 혼란을 겪는다. 토마스와 윌리암스 신부와 십자고상이 언뜻 사라지는 듯 보였으므로 완전히 별개의 단편인가 착각도 했다. 누가 "집으로" 향하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들을 이용해 예수를 해석하는 에우제비우의 아내 마리아의 장황한 설명에 혹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건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 했다. 달라진 시대, 달라진 등장인물, 언뜻 주제조차도 연결되는 않는 것 같은 부부의 대화. 숨쉬듯 꼼꼼하게 아내를 사랑하는 병리학자 에우제비우의 깊은 마음에 감탄하는 게 다였다. 그러다 곧 알게 된다. 이 남자 에우제비우 또한 토마스와 같은 아픔을 겪는 중이라는 것을. 2부 끝에서야 모습을 드러낸 토마스의 흔적들이 어떻게 "집으로" 향하게 되는지를. 지나치게 기괴하고 끔찍한 형태로, 상실이 낳은 또다른 상실들이 에우제비우가 해체한 라파엘이라는 남성의 갈비뼈 속에서 등장했을 때 두 존재가 너무 슬퍼서 책을 계속 읽기가  힘들었다. 삼천포로 빠진 것 같던 이야기가 3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안심이 될 정도로 2부는 읽기 편한 내용은 아니었던 걸로ㅠㅠ 3부에서는 드디어 주인공들이 높은 산의 꼭대기랄 수 있는 바위들을 오른다. 그들이 바위 위에서 마주하는 인세의 모습이 꽤나 다정하고 아름다워서 긍정적인 결말을 보여주지 않을까하는 기대감도 생겨난다. 찜찜했던 1, 2부 속 애매한 결말의 뒤로 한 채 콤콤한 퇴적층을 발 아래 깔아두고 나도 다시금 힘을 내어 포르투갈의 산을 함께 오른다. 또한번 연결고리가 없는 것 같은 캐나다로 무대가 옮겨갔지만 상원의원 피터는 앞서의 토마스나 윌리엄스 신부, 마리아나 에우제비우, 라파엘보다는 좀 더 이해하기 쉬운 남자였다. 그또한 아내를 잃었고 그 또한 가슴으로 통곡 중이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집"을 찾았던 것이다. 사랑의 상실을 다시금 사랑으로 채우며 "집"을 회복한 피터. 유인원 오도의 둥지가 그에게 안식을 주었다. 두 친구가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하는 과정은 평화롭기 그지 없었고 인간과 영장류의 우정은 신비롭고 애틋했다. 동화 같은 결말, 모든 이야기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재확인하게 하는 암시들, 정체되었던 상실의 기꺼운 성장도 감동적이다. 워싱턴 포스트가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 내어놓은 찬사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감상적이지도 비극적이지도 눈물을 짜내지도 않는 아름다움의 결정체". 어느 쪽으로 빛이 비추어지느냐에 따라 색을 달리하는 얀 마텔의 결정체로 나도 나만의 이야기를 꾸려본다. 번역가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던 결말까지 더해져 (이런 식의 결말을 좋아하진 않지만) 오롯이 나만의 신부가 된 책과 함께 오래도록 마음을 나누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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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리 종활 사진관
아시자와 요 지음, 이영미 옮김 / 엘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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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반드시 드라마와 수수께끼가 있다. 후회 없는 엔딩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것도 '종활'이지만,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준비하고 배웅하는 것, 그리고 그 후에도 열심히 살아가는 것 역시 '종활'이다. 바라건대 이 소설이, 혹여 소중한 사람이 사라진다고 해도, 당신이 계속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ㅡ 아시자와 요

1. 첫 번째 유언장

"마지막에 가족에게 퀴즈를 내고 싶다고 하셨어요. '죽는 건 두렵다. 하지만 죽으면, 할머니에게 퀴즈 정답을 들을 수 있다.' 그런 기대감을 가족들에게 안긴다면, 죽음이 조금은 즐거워질거라고."

하나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실연의 상처와 실직으로 히키코모리가 되어가던 하나에게 더할 수 없는 충격을 준 사건이었지요. 그러나 그런 충격과는 별개로 하나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모친으로부터의 배신감에 잠도 들지 못하는 어머니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었죠. 하나의 외할머니가 큰딸인 하나의 엄마를 제외하고 나머지 두 자식에게만 재산이 돌아가게끔 한 유언장의 공개는 유산의 많고 적음과는 별개로 엄마의 가슴을 쥐어뜯게 만드는 상처였으니까요. 할머니의 장례 사진을 찍어주고 변호사를 소개시켜주었다는 아마리 종활 사진관으로 발걸음을 내딛은 하나의 용기는 유언장의 비밀을 푸는 것으로 보답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나 가족을 사랑했던 하나의 외할머니는 어째서 큰딸에게만 재산을 물려주지 않았던 걸까요?

2. 십이 년 만의 가족사진   

"오해가 풀렸다고 떠난 가족이 되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멈춰 있던 시간은 다시 움직이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고이치로 할아버지의 가족이 무너진 것은 한순간이었습니다. 의문투성이 색깔로 그려낸 무섭도록 괴이한 손자의 그림, 며느리가 손주를 학대하고 있다는 소문, 바쁜 일과로 집안 문제에 무심한 아들, 학교장으로서의 체면 때문에 소문을 무시하며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던 고이치로가 마주하게 된 현실은 며느리의 추락사였어요. 경찰의 조사 끝에 손자인 가이토가 어머니의 추락을 목격하고도 구조대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고이치로 가족은 죄책감과 의심 속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지만 십이 년 만에 고이치로 할아버지는 용기를 냅니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유일하게 남은 소망인 가족의 재결합을 위해서였지요. 고이치로 할아버지는 아마리 종활 사진관의 멤버들과 함께 장례 사진 한 장으로 해체된 가족을 다시금 모을 수 있었을까요? 가족들의 오해는 또 무엇이었는지 궁금해 하십쇼. 제발요! ㅋㅋ

3. 세 번째 유품

"아빠와 나누는 마지막 대화일지도 모른다는 걸 알았다면, 분명 다른 말을 했을 것이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여줬을 것이다.
아빠 딸로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아빠를 너무너무 좋아한다고.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홀로 큰 교코에게 걸려 온 한 통의 전화는 교코로 하여금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 일으킵니다. 전화를 건 곳은 다름아닌 아마리 종활 사진관으로 사진관이 전파를 타게 되면서 그 사연 중의 하나로 교코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진이 선택된 것이었어요. 사랑하는 것이 틀림없는 젊은 부부와 부부가 함께 받쳐들고 있는 볼록 튀어나온 배. 그러나 일찌감치 헤어졌던 부부 사이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있는 걸까요? 방송을 위해 사진의 사연을 파헤쳐 보려는 아마리 멤버들은 과연 교코의 아버지를 찾아 엄마의 세 번째 유품을 확인 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이미 뱉어낸 말을 줏어담지 못해 내내 후회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4. 두 번째 영정사진

"병에 걸리기 전까지 나는 내 생각을 의심해본 적이 없어요. 내 삶의 방식이 가장 옳다고 믿었고, 행복하다고 믿었고, 아니 굳게 믿으려고 했던 건지도 모르죠. 내가 죽은 후, 그때의 나를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아요. 가장 소중한 게 뭔지도 몰랐던 때보다는 머리칼이 빠졌어도 지금의 모습을 남기고 싶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아름다운 젊은 여성 레이카와 종활사진을 찍으러 왔던 중년의 남자 오에씨. 아마리 사진관 사람들은 당연히 레이코가 오에의 딸이라고 생각했으나 오에씨의 집에 방문해 그의 아내와 함께 두 번째 종활 사진을 찍으며 그들에겐 아들만 있을 뿐 딸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일찍이 유부남에게 속아 그에게 프로포즈까지 받았던, 그리하여 결혼준비를 위해 자발적 퇴사까지 감행했으며 이제는 아마리 종활 사진관의 또한명의 직원이 된 하나는 오에의 행각으로부터 한가지 사실을 유추하며 분노와 충격으로 부들부들 하지요. "배송지 주의!!"라는 강력 문구까지 넣은 오에의 주문서와 젊은 애인 레이카와 오에의 아내에게 각각 보내게끔 되어 있는 사진이 들어있는 택배 두 상자. 하나는 제 손에 쥐어진 두 상자의 택배를 무사히, 안전하게, 정확한 주소로 배송할 수 있었을까요? 유부남 전 애인으로부터 당도한 여전히 좋아해 라는 유혹의 문자는 그녀로 하여금 또 어떤 선택을 하게 만들었을까요?

인생을 마무리 짓기 위한 활동 "종활"을 위해 아마리 사진관을 찾는 사람들과 지나치게 거대한 요크셔테리어 같은 인상의 사진사 아마리, 돈에 목숨 건 사진관의 코디네이터 유메코, 본적을 알 수 없는 사투리로 유쾌한 웃음을 자아내는 조수 도톤보리, 할머니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방문했다 직원으로 입사해버린 헤어 디자이너 하나의 앙상블로 엮어진 코지 미스터리입니다. 기대감을 갖기에는 좀 낯선 제목, 낯선 작가, 애매한 표지의 책이었습니다만 제가 느낀 감동은 요몇년간 계속해서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그 이상이었어요. 삶의 마지막 자리에서 남은 가족을 배려하는 어른들과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지만, 또는 죽어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또다른 행복으로 전진하는 우리네 평범한 이웃들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미스터리는 거들 뿐 실상은 성장물 같은 느낌이기도 하구요. 규모가 작고 아기자기 하고 마음 졸이는 일 없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전형적인 일본감성의 책이라 많은 분들이 잡기만 한다면 아주 재미나게 술술 읽을 책임이 확실한데 이 좋음을 전달할 방법이 없어 안타까워요. 제가 리뷰를 더 잘 썼더라면 몇 명쯤은 유혹을 했을 터인데!!!!!ㅠㅠㅠㅠ 타인의 죽음이 곧 내 행복인 삭막하지만 카타르시스 넘치는 미스터리도 물론 좋지만요. 이렇게 가끔은 함께 애도하고 함께 웃고 함께 성장하고픈 주인공들과의 작은 추리도 즐거운 것 같아요. 호빵 같이 훈훈한 책 아마리 종활 사진관과 함께 올겨울 따뜻하게 나시기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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