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야기가 혼례식이라면, 우리 듣는 이들은 통로를 걸어들어오는 신부를 지켜보는 신랑이죠.
상상의 완성이라는 행위 안에서 함께 어우러져 이야기가 탄생하는 거예요.
여느 결혼이 그렇듯, 또 결혼이 제각기 다르듯 이 행위는 우리와 관련되고,
그래서 각자 이야기를 다르게 해석하고 다르게 느끼죠.
하느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듯 이야기는 우리 개개인에게 찾아와요." (p187)

표지를 자세히 보면 높다란 산을 끼고 세 명의 남자와 십자고상, 자동차, 아이. 그리고 침팬지가 등장한다. 십자고상의 등장에서 알 수 있듯이 이야기는 많은 비극들의 퇴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상실로 시작하여 언제나 황량한 대지, 산이라고 명명되나 정작 바위뿐인 몽환의 땅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서 종말을 맞는다. 행군을 시작하는 첫 번째 고난자는 1904년 포르투갈에서 국립 박물관의 학예사 보조로 일하던 토마스였다. 그는 숙부의 집에서 하녀로 고용된 도라에게 첫눈에 반했고 사랑했으며 가스파르라는 귀염둥이 아들을 낳았지만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엔 아들을, 목요일엔 연인을, 그리고 그 주의 일요일엔 아버지를 잃었다. "집을잃다"라는 1부 제목이 그렇게 완전해진 것이다. 박물관에서 훔쳐낸 식민지 아프리카의 선교사 윌리엄스 신부의 일기와 그가 남겼다는 비밀스런 유산이 때마침 그에게 방향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의 생은 완전히 침몰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 그곳 교회에 숨겨졌을 부덕한 종교의 상징, 신에 대한 복수라는 목표와 별개로 막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자동차를 타고 가는 그의 여정이 얼마나 심란했던지 나는 안쓰러움과 어이없음과 불결함의 공포에 사로잡혀 덜덜 떨었는데 그가 기생충에 시달리다 못해 정신착란을 일으키며 휘발유 병에 초를 꽂았을 때, 그리하여 기어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숙부의 르노와 자신의 몸에 불이 붙었을 때, 화르르르륵 이는 동정심에 압도 당하여 그를 이해하기로 했다. 더욱이 고난이 끝난 것도 아니었으므로. 이 수줍고 온유하고 내성적이던 사내는 도로연수조차 없이 차를 몰다 한적한 도로에서 아이를 친다. 면허증은 고사하고 책으로 운전을 배웠으니 사고 자체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면허제도가 있기는 했을까?) 이상한 것은 가족을 잃는 고통을 너무도 잘 아는 그 남자가 아이를 들판에 방치한 채로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했다는 것 뿐. 앞을 보고 걷지 않고 뒤로 돌아 걸어다녔던 그가, 그 1년 간의 강박적 행위로 신에 반발하며 운명을 힐난했던 그가, 이로써 머리를 어느 방향으로 두고 걸어다닐런지 나는 비탄스런 마음으로 궁금해졌다.

"인간은 고난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눈을 뜨게 해줄까?
고난의 결과로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될까?
율리시스 신부의 경우를 보면,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이런 질문들의 답은 '아니다'였던 것 같다."(p127)

분명한 것은 토마스도 그 '아니다'에 속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고통이 닥쳤을 때 그는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타인의 시련을 차단하려고 애쓴다. 피해자에게 동정을 구한다. 구토를 하고 십자고상에 매달렸지만 처벌을 구하지 않는 그 알량한 죄책감에도 가치라는 게 있는 것일까? 그리고 소설은 2부 "집으로" 넘어가며 한 차례 환몽 같은 혼란을 겪는다. 토마스와 윌리암스 신부와 십자고상이 언뜻 사라지는 듯 보였으므로 완전히 별개의 단편인가 착각도 했다. 누가 "집으로" 향하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들을 이용해 예수를 해석하는 에우제비우의 아내 마리아의 장황한 설명에 혹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건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 했다. 달라진 시대, 달라진 등장인물, 언뜻 주제조차도 연결되는 않는 것 같은 부부의 대화. 숨쉬듯 꼼꼼하게 아내를 사랑하는 병리학자 에우제비우의 깊은 마음에 감탄하는 게 다였다. 그러다 곧 알게 된다. 이 남자 에우제비우 또한 토마스와 같은 아픔을 겪는 중이라는 것을. 2부 끝에서야 모습을 드러낸 토마스의 흔적들이 어떻게 "집으로" 향하게 되는지를. 지나치게 기괴하고 끔찍한 형태로, 상실이 낳은 또다른 상실들이 에우제비우가 해체한 라파엘이라는 남성의 갈비뼈 속에서 등장했을 때 두 존재가 너무 슬퍼서 책을 계속 읽기가  힘들었다. 삼천포로 빠진 것 같던 이야기가 3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안심이 될 정도로 2부는 읽기 편한 내용은 아니었던 걸로ㅠㅠ 3부에서는 드디어 주인공들이 높은 산의 꼭대기랄 수 있는 바위들을 오른다. 그들이 바위 위에서 마주하는 인세의 모습이 꽤나 다정하고 아름다워서 긍정적인 결말을 보여주지 않을까하는 기대감도 생겨난다. 찜찜했던 1, 2부 속 애매한 결말의 뒤로 한 채 콤콤한 퇴적층을 발 아래 깔아두고 나도 다시금 힘을 내어 포르투갈의 산을 함께 오른다. 또한번 연결고리가 없는 것 같은 캐나다로 무대가 옮겨갔지만 상원의원 피터는 앞서의 토마스나 윌리엄스 신부, 마리아나 에우제비우, 라파엘보다는 좀 더 이해하기 쉬운 남자였다. 그또한 아내를 잃었고 그 또한 가슴으로 통곡 중이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집"을 찾았던 것이다. 사랑의 상실을 다시금 사랑으로 채우며 "집"을 회복한 피터. 유인원 오도의 둥지가 그에게 안식을 주었다. 두 친구가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하는 과정은 평화롭기 그지 없었고 인간과 영장류의 우정은 신비롭고 애틋했다. 동화 같은 결말, 모든 이야기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재확인하게 하는 암시들, 정체되었던 상실의 기꺼운 성장도 감동적이다. 워싱턴 포스트가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 내어놓은 찬사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감상적이지도 비극적이지도 눈물을 짜내지도 않는 아름다움의 결정체". 어느 쪽으로 빛이 비추어지느냐에 따라 색을 달리하는 얀 마텔의 결정체로 나도 나만의 이야기를 꾸려본다. 번역가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던 결말까지 더해져 (이런 식의 결말을 좋아하진 않지만) 오롯이 나만의 신부가 된 책과 함께 오래도록 마음을 나누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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