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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평점 :
"책에 페이지를 매긴 이유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타당한 이유로 책 읽기가 중단되었을 경우, 그 지점을 찾기 쉽게 해주려고 말이다." (p381)
페이지의 존재 이유가 이와 같다면 이 책 모스크바의 신사야말로 페이지가 필요치 않은 책이다.
읽기 시작하면 어떤 이유로도 중단할 수 없을테니까.
적어도 내겐 그랬다.
1. 메트로폴 호텔의 로빈슨 크루소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당신의 증언을 모두 고려해보면 우린 그 시 「그것은 지금 어디 있는가?」를 썼던 명민한 영혼이 자기 계급의 부패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굴복했으며, 지금은 한때 자신이 지지했던 바로 그 이상에 위협이 되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소. 이를 근거로 한다면 우리로서는 당신을 이 방에서 내보내 수감하는 게 온당할 것이오. 하지만 당의 고위직 중에는 혁명 이전 단계 영웅의 범주에 당신을 넣는 사람들이 있소. 그래서 위원회의 의견은, 당신은 당신이 그리도 좋아하는 그 호텔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오. 하지만 절대 착각하지 마시오. 만약 당신이 한 걸음이라도 메트로폴 호텔 바깥으로 나간다면 당신은 총살될 테니까. (p17)"
소설의 시작. 1922년 6월 21일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하 백작)은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 러시아 땅에서 꽤나 온건한 형을 선고받는다. 메트로폴 호텔에서의 감금형. 그와 유사한 처지의 귀족들이 재산을 압류 당한 채 사형 당하거나 시베리아 유배형을 선고받는 것에 비한다면 천국행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프랑스로 도피한 상태에서의 자발적 귀국이었다는 점에서 소설은 시작부터 궁금증을 자아낸다. 어쨌든 서른셋의 대귀족은 궁궐 같았던 자신의 거처에서 쫓겨나 하인들이나 쓰는 다락방에 기거하게 됐다. 조상이 물려준 훌륭한 유물 중의 몇 가지ㅡ백부가 남긴 책상을 포함하여ㅡ 자존심과도 같은 책들과 위스키, 아버지의 시계, 여동생의 초상화와 함께. 그렇다면 다음 장면이야 뻔하지 않겠는가 하고 나는 아마도 다른 독자들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냥 귀족도 아니고 성 안드레이 훈장(러시아 최고 훈장, 시진핑이 푸틴에게 이 훈장을 받았다.) 수훈자이며 경마클럽 회원이고 사냥의 명인인 남자가 설마 단칸방에 가만히 앉았겠는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럴 수가! 그는 가만히 앉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작정하고 드러눕는다. 그리고 결심한다. "이번 달엔 미셸 드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는 데 전념할 거야!" 하고. 십년에 걸친 결심이지만 인생이 유혹이었기에 매번 성공하지 못했던 이 목표 앞에 드디어 책만 읽을 수 있는 온전한 시간과 고독이 주어진 것이다. 그는 의자의 뒷다리 두 개로만 균형을 이룬 채 책상에 발을 올리고 앉아 내내 책을 읽는다. (좋겠다!) 또한 책상 속에 숨겨진 예카테리나 대제의 황금주화를 이용해 질 좋은 침대시트와 백작이 가장 좋아하는 비누 네 개, 천개의 이파리라는 밀푀유도 하나 주문한다. (진짜 좋겠다!) 이뿐이랴. 다락방 옷장을 뚫고 지나가 (나니아 연대기냐!!) 누구도 모르는 비밀의 서재까지 한 칸 마련하고 보니 이 세상의 모든 로빈슨 크루소들이 꿈꾸는 완벽한 피난처와 깨끗한 물을 모조리 갖춘 것과 다름 없는 상태가 되었다. (진짜진짜 좋겠다!!) 이제 남은 일은 15년의 고독과 25년 후 프라이데이와의 만남 뿐인가?
2. 메트로폴 호텔의 소공녀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 백작이 꽤나 유머러스하고 긍정적인 성향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호텔이라고 하는 단 하나의 장소에서 기거하는 것은 상당히 스트레스가 되는 일이었다. 외향적인 그로써는 집돌이가 되는 것도 사회활동을 하지 못하는 것도 사교활동을 제한 당하고 귀족이 사라져버린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는 것도 어느 하나 쉽지 않은 일. 헤어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들이 꿈처럼 반복되는 때에 백작은 자살을 생각한다. 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목표로 해왔던 일이기도 하다. 그가 호텔의 와인 저장고에서 가지고 온 샤토뇌프-뒤-파프 와인 (머리 나쁜 사람은 주문도 못할 듯)을 들고 다락방 보다 한칸 위 호텔의 지붕 위에서 만나게 된 꿀벌의 기적이 아니었다면 두개골이 깨어진 참혹한 모습으로 다음 날 호텔 앞에 추락해 있었을 테다. 그러나 어떤 기적이 그를 삶으로 불러들였고 직업을 가지는 것을 수치로 알던 유한계급의 백작은 웨이터들이 입는 흰색 재킷을 왼팔에 건 채 호텔을 오가는 현실을 선택한다. 마치 소공녀의 세라처럼. 기적은 또한 그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다락으로 한정됐던 백작의 좁은 세계를 우주만큼 넓혀준 메트로폴 호텔의 만능키 니나, 다락방에 피는 사랑 안나, 칼을 지휘봉처럼 휘두르지만 실은 수줍음 많은 주방장 에밀, 피아니스트와 같은 손으로 주문을 도와주는 영민한 지배인 안드레이, 백작의 터진 바지와 용기를 함께 꿰매주는 재봉사 마리나, 카사블랑카를 좋아하는 의리있는 공산당 간부 오시프, 백작의 모든 특별한 시간이며 장소인 그녀 소피야와의 만남과 동거가 그의 인생에 풍족한 이야기를 선사한다. 때문에 메트로폴 호텔 사방 벽 안에서 만들어지는 32년에 걸친 백작의 삶은 단 한순간 어떤 장면 어떤 상황 어떤 인물 앞에서도 지루하지가 않다. 알렉산드로 로스토프 백작이라는 한 남자의 다정하고도 선량한 매력이 723 이라는 거대한 페이지조차 짧고 아쉽게 만든다. 러시아 역사를 몰라도 괜찮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의 추천작이라고 겁먹을 필요도 없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인생책들과 달리 이 책은 정말 재미있으니까. 메트로폴 호텔의 로빈슨 크루소였고 소공녀였던 모스크바 신사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백작의 우미함에 꼭 한번 빠져보시길!! 그가 과연 몽테뉴의 수상록을 다 읽었을까?? 이또한 책으로 확인해 보시라. 추천 쾅!!
"편리함이라는 게 뭔지 얘기해줄게요." 잠시 후 그가 입을 뗐다. "정오까지 잠을 잔 다음에 누군가를 시켜 쟁반에 받친 아침 식사를 가져오도록 하는 것. 약속 시간 직전에 약속을 취소해버리는 것. 한 파티장의 문 앞에 마차를 대기시킴으로써 얘기만 하면 즉시 다른 파티장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하는 것. 젊었을 때 결혼을 피하고 아이갖기를 미루는 것. 이런 것들이야말로 최고의 편리함이에요, 안나, 한때 난 그 모든 걸 누렸었죠. 그런데 결국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불편함이었어요." (p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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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이 읽었거나 읽는 중이거나 읽으려고 목표하는 책들>
1. 해저 2만 리 : "진취적인 기상이 조금이라도 있는 소년이라면 누구나 노틸러스호에서 보내는 하룻밤과 궁전에서 보내는 100일 밤을 기꺼이 맞바꾸지 않겠는가?" (p31) 응, 난 아냐. 난 궁전으로 고고~ 반면에 백작은 자신의 다락방에 도착해 작은 침대를 보며 생각한다. 내가 기어이 노틸러스호에 이르렀구나 하고. 그다지 절망조차 않고서.
2. 몽테뉴의 수상록 : 고독과 시간이 함께 하지만 읽기 쉽지 않은 책. 백작은 분노한다. "당신과 함께한다는 건 이런 겁니까? 한 걸음 나아갔다 두 걸음 뒷걸음질해야 하는 거에요?"(p57) 방금 전에 읽은 부분조차 기억나지 않아서 하는 말. 귀족은 책을 집어던지지 않더라. 농 밑의 받침대로 쓸 지언정.
3. 안나 카레리나 :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그 불행의 모습이 제각각이다."멋진 말이야"(p106) 이외에 무슨 감탄사가 필요할까. 그러나 수상록에 이어 농의 받침대가 되어버린 책. 수상록과 두께가 비슷하다나?
4. 호두까기 인형 : 백작은 호두까기 인형의 1막 1작이 러시아가 서구사회에 기여한 두 번째 문물이라고 말한다. 서구 어린이들의 크리스마스 꿈 속에 호두까기 인형의 트리가 자라나고 있단다. 첫번째는?
5. 체호프와 톨스토이 : "정확하고 깔끔한 체호프의 작품들은 우리를 어떤 별개의 시간에 어떤 가정의 한 구석으로 초대하는데 그곳에서 적나라한 인간 조건이 갑자기 손에 잡힐 듯이 드러나게 되죠. 반면에 다른 극단에는 톨스토이가 있어요. 당신은 전쟁과 평화보다 시야와 범위가 더 큰 작품을 생각해낼 수 있나요? 배경이 응접실에서 전장으로, 다시 전장에서 응접실로 능란하게 옮아가는 작품을 생각해낼 수 있어요? 어떤 식으로 개인들이 역사에 의해 형성되고, 역사가 개인들에 의해 형성되는지를 그토록 철저히 탐구한 작품을 생각해 낼 수 있느냐 말입니다." (p255)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고 싶은데 안읽어봤으니 알 수가 있나. 올해 전쟁과 평화는 꼭 읽어보자... 고 목표하지만 아마 십년을 오늘 같이 생각하겠지.
6. 전쟁과 평화 : 이미 사랑에 빠진 남자와 호감을 드러내는 여자의 저녁. 호텔 식당의 청춘들을 보며 백작은 생각한다. 그들의 눈빛이 전쟁과 평화 속 나타샤가 피에르에게 보여준 부드러움과 같았다고. 읽었어야 알지. 덴장. (p158)
7. 크리스마스 캐럴 : 12시에 풀어보라는 니나와의 약속 때문에 선물을 코 앞에 두고 크리스마스 캐럴을 읽는 백작. 한두 단락만 읽을 생각이었지만 어느 새 흥미를 느껴 책을 완독, 책을 덮고 불을 껐을 때 백작이 느낀 커다란 행복을 나도 이 책으로 느꼈다. 모스크바의 신사 말이다.
그밖으로 햄릿, 니콜라이 고골의 외투, 죽은 넋, 알렉시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잭 런던의 야성의 외침, 체호프의 편지 등 다양한 책들이 잠깐씩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