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말하기 영단어 1000 - 20일 만에 네이티브와 수다 떨 수 있는
이시원 지음 / 시원스쿨닷컴 / 201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영어를 진짜진짜 지이이이인짜 못해요.

모르긴 해도 초딩 저학년보다도 못할 것 같은데

키다리 아저씨 원서를 읽겠다고 구매한 나란 사람;;;

작년 10월에 산 책을 아직 다 못읽고

기억날 때마다 펼쳐 쩜쩜 찍어 읽고 쩜쩜쩜 하고 닫아요.

자극도 줄겸 동기부여도 할겸 새 영어책을 하나 봐야지 하는 와중에

눈에 딱 하고 들어온 제목! 추억 돋는 "영단어 1000!!"

손바닥만하게 익숙한 책이 일단 만만한 느낌을 줍니다.

어릴 때 제가 본 책은 중학생이 알아야 할, 고등학생이 알아야 할이 붙었는데

이 책은 대신에 기적의 말하기가 붙어서 성인인 제 손에 올라가 있어도 덜 부끄러워요. 

하루에 50개씩 20일 동안 1000개 단어 외우기라는 목표가 뚜렷해서 든든하구요.

책 제일 앞에 MP3 파일이랑 샘플강의 OR 코드가 있어서 휴대폰만 대면

자동으로 사이트로 넘어가고 듣기가 가능해서 편리하더라구요.

책 받은지 2주쯤 됐는데 그럼 단어 700개쯤은 외웠겠네?

하고 물으신다면 부끄러워 잠적합니다.

공부하자 마음 먹긴 쉬운데 실행하는건 넘나 어려운 것ㅠㅠㅠㅠ

그래도 계속계속 열심히 외워서 제 영어를 조금이나마 업그뤠이-ㄷ 시켜보겠어요.

 

 

추가) 요즘 단어책엔 발음기호가 없는가 봐요.

저 하도 영어책을 안봐서 업그뤠이-ㄷ처럼 한글로 써져있는 발음들이 신통방통.

굳이 MP3 파일 안들어도 단어 밑에 한글 발음만 읽어도 음성지원이 됩니다.

실은 책 도착한 첫날 한글발음들이 잼나고 웃겨서 

시집 낭독하듯 따라 읽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다 본 거 안비밀 ㅋㅋㅋ

아참 왕초보용 단어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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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나 읽을걸 - 고전 속에 박제된 그녀들과 너무나 주관적인 수다를 떠는 시간
유즈키 아사코 지음, 박제이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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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마 책을 읽다가 잠든 것 같아요. 표지 속의 홀가분하게 드러누운 여자 말예요. 저런 복장으로 잠들지는 않지만 안경을 벗고 책을 읽다가 저도 곧잘 꿈나라로 직행하곤 하거든요... 는 옛날 얘기!! 요즘은 유툽 보다 잠듭니다ㅠㅠ 의미없이 휴대폰에 할애하는 시간이 넘 길어졌어요. 정신 차려보면 십 분, 이십 분, 길게는 한 시간씩도 훌쩍 흘러가 있어서 이 시간이면 책 반 권은 더 읽었을텐데 하고 자책하지만 딱 그 때뿐. 눈 떠서 제일 먼저 보는 것도 잠들기 전 제일 마지막까지 쥐고 있는 것도 책이 아니라 휴대폰이란 사실이 부끄럽네요. 그런 제 마음을 고전으로 유혹하는 책을 만났습니다. 제목부터가 <책이나 읽을걸>, 무지 마음에 들지 않나요? <서점의 다이아나>와 <나는 매일 직장상사의 도시락을 싼다> 등 여자들의 우정을 다감하게 그리는 유즈키 아사코 작가님의 신간이에요. 우리한테는 신간이지만 책 속의 글들이 연재된 건 2011년 즈음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81년생 작가님이 서른 즈음을 얘기하시거든요. 한창 싱숭생숭할 나이인데 어떻게 고전으로 잘 극복했을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물씬 풍기는 것 같죠? ㅎㅎ


여자의 일생, 보바리 부인, 골짜기의 백합, 목로주점, 나나, 적과 흑, 소녀 파데트, 빙점, 오만과 편견, 폭풍의 언덕, 제인에어, 위대한 유산, 과자와 맥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댈러웨이 부인, 주홍글씨, 작은 아씨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캐롤, 분노의 포도, 순수의 시대,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초원의 집. 총 50권의 고전 명작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번역되지 않은 일본책들을 제외하면 36권쯤? 읽었어도 또 읽고 싶은 책, 모르니까 꼭 읽을 책을 체크하다 보니 이거이거 거의 다잖아요. 전적으로 작가님 취향으로 분류됐을 책들에 황홀해져 침을 꼴딱 삼켰습니다. 여러분은 작가님의 어느 취향에 마음이 동하시나요? ①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애호가 작가님 ② 여중여고를 졸업해서 여자들만의 공감대 포착에 진한 향수와 동경이 있는 작가님 ③ 기숙사나 수녀원, 대저택을 사랑하는 작가님 ④ 귀족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그 중에서도 영국!) 작품을 좋아하는 작가님 ⑤ "체리 파이와 푸딩과 파인애플과 구운 칠면조 고기와 태피와 토스트를 섞은 맛" 나를 마셔요 음료처럼 먹는 얘기 하나쯤은 꼭 있었으면 좋겠는 작가님 ⑥ 파파괴 여주인공에 어쩐지 해방감을 느끼는 작가님. 저는 1부터 6까지 싹 다요. 모조리 싹, 통틀어 싹, 완전히 싹 제 취향이라 작가님의 일상과 함께 펼쳐지는 고전의 얘기에 완전히 매혹되고 말았습니다. 한 달에 한 권씩, 유즈키 아사코가 들려주는 세계명작극장을 쫓아 저도 고전읽기에 도전해 보리라 결심까지 했으니 말 다했죠. 36권을 읽으려면 족히 3년은 걸릴테지만요. 작가님도 서른 즈음에 시작한 이 연재를 서른 중반까지 계속하고 있었더라구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한 권 한 권 휴대폰 볼 시간 쪼오끔씩만 더 줄여서. 책이나 읽을걸 하고 다음번 밤엔 후회하지 않도록 오늘은 폰 대신에 책을 꼬옥 쥐고 잠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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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지막 히어로
엠마뉘엘 베르네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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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질하다 데뷔하고 덕질하다 연애하고 덕질하다 결혼했다더라~

하는 얘기 다들 한번쯤 들어보셨지요?

오늘 소개할 책은 이처럼 "덕질"에 인생이 홀랑 바뀌어버린 여자 리즈의 이야기입니다.

제목은 <나의 마지막 히어로>.

어떤가요? 제목에서부터 덕질 충만의 기운이 듬뿍 느껴지시나요?


의사가 되려다 힘들어서 포기하고 대신에 의사의 비서일을 하고 있는 리즈.

아무 생각없이 실베스타 스탤론의 영화 록키 3편을 보다 운명의 벼락을 맞게 됩니다.


"나 지금 여기서 뭐하는 겨?"

"나 대체 이 놈이랑 뭐하는 겨??"

"엄마아빠가 뭐? 남자가 뭐? 내 나이가 뭐?!!"

내가 선 곳이 뒷골목은 아니지만 뒷골목에서 맨주먹으로 일어선 록키 발보아처럼 투쟁하리라!!!


스크린 밖으로 후두둑 쏟아지는 록키의 땀방울에 흠뻑 젖어

잊고 있던 과거의 꿈, 미래에 품게 될 영광을 떠올리게 된 리즈.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40도의 고열에 시달리다 며칠 근무까지 빼먹었다면 말 다한 거 아니겠어요?

열이 식고 그녀가 눈을 떴을 때엔 더는 어제의 리즈가 아니었습니다.

그녀 영혼에 숨어있던 투지로 불타오르는 호랑이가 번쩍 눈을 떴거든요.

귓가에 진동하는 Eye of the tiger의 리듬에 몸을 맞긴 채

입술을 꽉 깨물지 않으면 목청껏 불러버릴 것 같은 가사를 가슴 깊이 새기고서

긴장도 열정도 향상심도 없는 지루한 날들에게 고하는 안녕이란.


도전을 비웃는 부모님을 등지고

도전을 만류하는 남친도 뻥 차버리고서

홀로 전진하는 리즈의 인생으로 록키 발보아의 그림자가 거대한 돗대처럼 일어섭니다.

Eye of the tiger의 ost가 영원히 늘어나지 않는 배경으로 흘러가요.

"빰 빠바밤 빠바밤..."


처음 만나는 엠마뉘엘 베르네임 작가님.

책을 읽는 내내 발을 동동 굴리며 록키 보고 싶다! 고 생각했는데 3일의 연휴는 어쩜 이리도 짧은가요.

그래도 책 한 권 읽는데는 조금의 무리도 없는 시간, 더욱이 소설 본편만 따지면 60쪽 밖엔 되지 않아서

<나의 마지막 히어로>만은 즐겁게 완독할 수 있었습니다.

"100페이지의 미학"이라 찬양받는 작가님이신데 그 이유 또한 확실히 알게 됐구요.

손바닥 보다 얇은 페이지, 짤막짤막한 구절 앞뒤로도 리즈의 인생이 꽉 차게 그려져있더라구요.

알알이 설명하지 않아도 맛을 다 알겠는 그런 거?

몸뚱이 하나로 굳세게 살아남은 록키 발보아처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주먹을 불끈 쥐었던 리즈.

실베스타 스텔론이 망할까봐 걱정되서 적금통장까지 만든 사랑스러운 그녀의

열띈 노력과 충만한 애정이 아름답습니다.

바쁜 시간, 잠깐이라도 짬을 내어 읽어보시길 꼭꼭 추천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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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해지는 연습을 해요
나토리 호겐 지음, 네코마키 그림, 강수연 옮김 / 양파(도서출판)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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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표지가 익숙한가요?

일러스트레이터 네코마키의 작품입니다.

글은 일본 어느 절의 주지스님인 나토리 호겐님이 쓰셨구요.

장르는 마음 에세이, 인간관계가 가벼워지는 38가지의 팁을 소개한 책입니다.


귀여운 삽화 하나당 첨부되는 팁의 페이지가 2, 3쪽쯤.

인간관계를 바꾸는 작은 힌트와 곤란할 때의 요령, 즐거운 관계를 도모하는 방법,

마음 편한 관계를 이어가는 조언들을 아낌없이 풀어줍니다.

그중 인상 깊었던 5가지만 소개하자면요.


1. 비교를 도약으로 전환하자

: 비교가 언제나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말씀!

향상하기 위해서는 비교도 유익하다네요.


2. 혼자서 모든 걸 떠안지 말자

"부탁하면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시종일관 나만 생각하는, 자기보호에 급급한 상태"(p43)

동의가 되시나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전 좀 동의가 가더라구요.

사람이 너무 칼 같이 자기 일만 해도 그릇을 못키우는 느낌?

주고 받기가 수월하게 잘 되는 사람들이 사회생활도 원만하게 해나가는 것 같아 부러워요.


3. 마음의 날씨를 청명하게 하자

: 스트레스를 제 때 못풀어서 뜬금포 화풀이를 하는 경우가 있죠.

이런 잘못을 저지른 경우 제깍제깍 사과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요.

더 주의해야 할 것은 스트레스를 감당못할만큼 쌓지 않는 것.

그럼 어떤 경우에 스트레스가 발생할까요?

정답! 내 능력의 허용범위를 넘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허용범위 안에서 능력껏 해결을 보거나 그게 안되면 내 허용범위 자체를 키우거나

그것도 안되면 그 상황을 아예 회피하거나... 도 방법이 될 수 있을까요?

살짝 고민이 되는데 어쨌든 내 마음은 내가 치워가며 살자구요. 아자!


4. 상대의 씨름판에 올라가지 않는다

: 애인이 있다는 씨름판, 젊다는 씨름판, 능력있다는 씨름판 등등

질 게 뻔한 싸움판에서는 잠깐 돌아서 있자구요.

혼자서도 홀가분하게, 혼자서도 잘해요를 연마하는 사람이 됩시다.


5. 마음의 짐은 속히 내려놓자

: 남의 말에 전전긍긍, 아침에 들은 말을 잠들기 직전까지 가슴에 두고 끙끙 앓는 경우도 있어요.

제가 한 소심 하거든요 ㅎㅎ

"내 불행이나 괴로움을 남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람은 타인을 용서하지 않는다."(p83)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 못할 사람을 용서한다니 좀 우습긴 하지만

용서로 하여 잊을 수 있으면 속히 그 죄를 사해주는 것도 한 방법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스님, 오늘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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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총총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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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꽤 옛날 배경의 책이로구나. 검정 전화기의 다이얼을 돌리는 사키코를 보며 생각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다이얼을 돌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까 궁금해하면서. 설마하니 78년의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말이죠. 꽤가 아니라 엄청 옛날이지요? 중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에 사키코는 출산을 합니다. 상대는 같은 직장의 유부남. 처자식이 있는 남자라도 사랑하니 상관없었던 걸까요? 미혼모로 딸 지하루를 낳습니다. 밤업소로 흘러들어간 19살, 이후로도 주욱 사랑만을 좇는 부평초 같은 인생입니다. 남자에게 홀딱 반해 돈도 주고 몸도 주고 마음도 주고. 아버지 없이 홀로 몸으로 자신을 키운 어머니도, 하나뿐인 딸도 뒷전입니다. 사랑이 너무나 달콤해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어디에서나 모래알 같은 연정을 키우며 그 연정에 버려지거나 버리거나 다른 연정으로 덧씌우는 것으로 인생을 소모하는 닳고 닳은 여자. 고작 이런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읽어야 하다니 기운이 쑤욱 빠집니다. 덮을까 말까. 스트레스로 굳은 어깨를 주무르며 고민하는 사이에도 이상하게 눈은 글자를 따라갑니다. 사람은 비호감인데 글은 비호감이 아니라니 그것 참 이상한 일이지만 한 챕터가 끝나고 나니 이런이런. 더는 사키코가 없습니다. 시점은 완전히 바뀌어버렸고 저는 이 책을 완전히 착각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사키코가 아니라 그녀의 어린 딸 지하루가 이 다양한 시점의 삶에서 가장 중심된 축이라는 것을요.


총 아홉 명의 화자가 등장합니다. 남자 없이는 살 수 없는 여자 사키코, 지하루는 13살 여름방학 때 잠깐이지만 엄마인 그녀와 함께 삽니다. 엄마보다 더 커버린 가슴에 처음 브레지어를 착용한 것도 이 때입니다. 얼마나 무심한 엄마인가요. 뼈를 깎는 마음으로 의대생 아들을 뒷바라지하는 이쿠코, 16살이 된 지하루는 그녀의 도움으로 임신중절 수술을 합니다. 지하루 뱃속의 아이는 그녀 생각처럼 이쿠코의 핏줄이 맞았을까요? 이복 오빠를 사랑하는 스트리퍼 레이카, 19살의 지하루는 레이카의 자리를 물려받아 로망좌에서 알몸으로 춤을 춥니다. 지하루에게 호감을 보인 몇 안되는 여성이지만 모르겠습니다. 그녀 인생도 못지 않게 나락이었으니까요. 불평투성이 어머니와 함께 살던 노총각 하루히코, 22살의 지하루는 마흔도 넘은 그와 결혼을 합니다. 남자는 무상쾌락을, 시어머니는 무상노동을 바라는 지옥 속으로 걸어가며 지하루는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었을까 그녀 머리를 쪼개 보고 싶었습니다. 불륜을 의심하는 남편으로 평생을 고통받은 기리코, 28살의 지하루는 생후 6개월도 되지 않아 내버린 딸이 시어머니 손에서 크고 있는 줄을 알았을까요? 아참, 그녀는 지하루 인생의 두 번째 시어머니입니다. 젊은 날의 이혼을 훈장처럼 달고 사는 환갑의 시인 도모에, 38살의 지하루는 그에게 작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언젠가 완성될 그녀의 소설 속에서 시인은 틀림없이 헐떡이고 있을테죠. 이 때의 혐오스런 밤을 지하루의 소설 속에서 그가 꼭 마주하길 바랍니다. 살인방화범으로 18년째 도피 중인 주지, 44살의 지하루를 찾아와 그녀의 시집을 받아간 그는 죽어가는 사키코의 연인입니다. 지하루를 욕망하지 않은 유일한 남자는 대신에 살이 부러진 낡은 우산으로 지하루에게 장애를 안깁니다. 양 겨드랑이 아래로 목발을 짚은 채 아래로 아래로만 굴러떨어지는 삶이란. 편집자로도 남편으로도 실패한 인생 야스노리, 45살의 지하루는 어머니를 찾아가는 길에 그를 만나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야스노리는 드물게 지하루의 몸이 아니라 지하루의 경험과 기억을 욕망합니다. 약탈적이라는 점에서 그도 다른 남자와 다를 바는 없어요. 어느 땅에 뿌리를 박는 일도 먹는 일도 사랑하는 일도 귀찮기만 한 90년생의 아가씨 야야코, 성인이 된 딸의 곁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지하루에게 저는 이제 연민이나 동정을 배제한 채로 안부를 전할 수 있습니다. 안녕하신가요?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잘 지내고 계십니까? 당신의 남은 삶이 저는 계속해 궁금합니다.


훗카이도의 항구도시. 삿포로와 오타루, 아사히카와를 떠도는 지하루의 삶은 내도록 타인의 반사된 욕망에 파도를 타며 흘러가는 모양새입니다. 그 욕망 어느 구석에도 지하루의 것은 없다는 점에서 사키코보다 더욱 질이 나빠요. 먹고 마시고 움직이고 살아가지만 어딘지 식물인간 같은 모양새라고 할까요. 단순히 자존감이 낮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녀는 운명에 아무런 응어리가 없는 것 같거든요. 불평하거나 괴로워하거나 좌절하거나 증오하거나 두려워하는 불행한 인간의 보편타당한 그 어떤 모습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자기연민의 파편조차 없이 시종 일관 덤덤하게. 생이 불행한 것을 당연한 일처럼 살아갑니다. 자포자기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어쩜 이렇게 편안한 걸까요? 쓰면서도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싶지만 이 책을 함께 읽으신 독자라면 공감해 주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그녀는 안팎으로 정말이지 편안해 보입니다. 어떤 사람도 어떤 일도 하다못해 마흔이 넘어 얻은 육체적 장애도 그녀를 괴롭힐 수 없는 것처럼 보여요. 많고 많은 불행에도 지하루가 눈물을 보인 일은 단 한번, 첫 아이를 지울 때 뿐.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 또한 독자의 것이지 지하루의 것이었던 적은 없습니다. 가혹한 운명에 온몸으로 부딪혀가는 그녀의 긴 긴 세월을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지만 제게는 마치 구도자의 것처럼 느껴진 이유입니다. 어느 독자는 그녀를 혐오할테고(충분히 이해합니다) 또 어느 독자는 그녀를 연민하겠지만(잠깐동안은 저도 그랬습니다) 우리 의견이야 아무 상관없이 그녀는 별이 총총한 밤으로 내처 혼자서 걸어 갈 것만 같은 느낌을 줍니다. 조금 과장하면 살아있는 보살 같아요. 조금 성스럽기까지 했다고 하면 보살님에 대한 모욕일까요? 이런 삶을 산 여자를 두고 이런 생각 진짜 말도 안되죠? 저도 말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녀의 삶으로 투명하게 정화되는 이 마음을 어떻게 다 전해야할지. 끙끙.


지하루의 한자는 일천 천자에 봄 춘자를 쓴 거라고요. 책을 두 번이나 읽고 나서야 그 이름 뜻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녀의 삶과는 너무 다른 이름인데도 묘하게 동의가 갑니다. 피지 않은 꽃 사키코가 천 개의 봄 지하루를 낳고 천 개의 봄이 다시 야야코, 새로운 시대의 아이를 탄생시켰네요. 야야코의 이름 유래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삶은 어머니와도 할머니와도 많이 다를 거라는 강렬한 예감으로 책을 덮습니다. 미세먼지가 낭만을 가려서 창을 열지도 밤하늘을 구경하지도 않았지만요. 투명한 글을 차곡차곡 읽고나니 마음의 때가 벗겨진 듯 후련하고 개운합니다. 몇 안되는 제 안의 슬픈 더깨를 지하루가 다 가져간 듯이 가벼워요. 창밖의 하늘에는 별이 총총할 것만 같구요. 환하게 맑은 봄을 맞은 기분입니다. 정말로 봄이 다 온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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