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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 이토록 가깝고 이토록 먼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지음, 김정훈 옮김 / 호두 / 2023년 7월
평점 :
서평] 죽음 : 이토록 가깝고 이토록 먼
죽음이라는 주제 자체가 무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죽음이라는 주제에 직면하게 된다. 내가 알지도 못하고, 내가 알기도 전에 죽음이라는 것은 순간을 예고하지 않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렇다고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고 불편해 하고, 불안해 하고 살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도 만만하지 않다.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고 매번 주어진 시간을 메꿔나가야 한다.
도서 [죽음: 이토록 가깝고 이토록 먼]은 프랑스 철학자이자 음악학자인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의 저서로 깊이있고 철학적인 접근으로 우리에게 죽음에 대한 설명을 한다. 우리는 저자가 전하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예의가 필요하고, 예를 차릴 때에는 그 사람의 과보다는 공을 생각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우리는 죽음을 대할 때 어떤 경우이든 약간의 충격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죽음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가 어떻게 해결하지 못하는 신비로운, 어떤 신성함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죽음: 이토록 가깝고 이토록 먼]에서 죽음에 대한 본질과 우리가 죽음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것, 나아가 우리가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안에서 우리가 해나가야 하는 것들에 대한 것까지 짚어낸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용의주도하게 준비할 수는 없다. 죽음은 보편적인 불행이고 확산된 병이라고 말한다. 질병을 대하는 자세 또한 사람마다 다르다. 나아가 죽음과 관련된 철학적인 접근을 통해 우리가 죽음을 마주하게 하는 자세를 새롭게 한다.
죽음을 경험하지 못하고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에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을 ‘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무’라고 단정하지도 않는다. 저자는 우리의 삶에서 죽음이 무가 아닌 이유를 말한다.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 윤회나 다른 세상이 있음 또한 명확하게 알아내지 못하였지만 죽음 전에 우리의 삶, 그리고 죽음 이후에 남겨진 이들에게 주어진 의미들로 인해 완전 ‘무’라고도 하지 않는다. 또한 죽음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야 말로 우리에게 가장 큰 기회이자 신비로운 기회라고 말한다. 죽음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소멸시키지만 존재했던 사실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애에서 탄생은 받아들이면서 죽음은 회피하고 외면한다. 죽음이라는 존재가 사람들에게 마지막이라는 점에서 회피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매번 경험하면서 익숙해지지도 않고, 마음에 불편함과 다양한 감정을 남긴다. 도서 [죽음: 이토록 가깝고 이토록 먼]에서는 죽음을 기이하고도 오랜 새로움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경험할 수 밖에 없지만 일인칭, 그리고 이인칭, 삼인칭 시점에서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 죽음에 대한 시점을 살피게 한다.
저자가 풀어내는 죽음에 대해 읽다보면 나이들어 감과 죽음의 순간들이 조금 씁쓸함도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작과 끝 말고 존재했음에 집중하자라 말하는 저자의 말에 우리가 죽음보다는 삶에 더 집중해야 하고 어떤 방향으로 삶을 채워 나가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죽음의 신비는 우리가 아직 밝혀내지 못한 영역이다. 그저 소문으로, 여러사람의 경험(?)으로 그렇겠구나 하는 정도다. 두려운 것은 인간이 가지는 아주 근본적인 감정이다.
나는 어떤 자세로 죽음을 마주하게 될까. 애썼다, 수고했다, 참 열심히 잘 살아냈다 하고 스스로를 쓰담쓰담하면서 마주하고 싶다.
책의 두께가 만만치 않다. 글밥 또한 어마 무시하다. 하룻밤 꼴딱새우기에도 무리가 있어 조금 천천히 읽기로 했다. 조금씩 천천히. 저자가 펼쳐 놓고 있는 죽음에 대한 진실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이책은 그래야 한다.
<도서내용 중>
p37. 우리는 어느날, 우리가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신비로운 문제 속에 되레 자신이 장악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p88. 인간은 아프거나 서툴러서 혹은 무방비 해서 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서” 말하자면 그 자체로 죽음을 당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인간이 죽는 존재인 것은 이렇거나 저래서가 아니고, 이런저런 점에서 어떠어떠한 측면에서가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본질적으로 단적으로 그냥 죽는 존재인 것입니다.
p160. 신은 시간성을, 즉 시간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부과했지만, 그것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고 일시적으로 자기를 실현하며 우리의 가능성을 현실화 하도록 허락합니다. 이시간을 사건과 일로 채우는 자유뿐만아니라, 목표 달성에 필요한 시간의 경과를 우리 마음대로 줄이고 가속하는 모든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p193. 기억은 이미지를 그 물리적 대상에서 떼어서 우리에게 남깁니다. 그래서 기억이 모든 인간에게 시적 상태의 자연스로운 서곡인 것입니다. 과거 제조자인 시간, 지나쳐버림인 시간은 따라서 스스로 일종의 시를 발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견실하지 않은 시, 무력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시, 작품이 되지 못하는 시입니다.
p208. 죽음이 오리라는 것은 알지만, 죽음이 ‘무엇인지’를 모르기에, ‘무엇이’올지를 결국 모릅니다. 그리고 ‘언제’를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올 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르고, 게다가 이 올 것이 도대체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기라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p235.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한 인간의 행동은 일반적으로 그 명석함에 반비례합니다. 나는 모른다. 고로 아직 뭔가 할 것이 있다. 날짜를 우리가 모르는 덕분에, 우리의 삶에 바람이 통하고 확실한 죽음의 걱정이 가벼워져 숨을 쉴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행동파 인간은 그에게 남겨진 희망의 여지와, 그에게 운을 시험해 보기를 권하는 가능성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p315. 해가 거듭됨에 따라 늙는다는 의식은 전체적으로 그리고 평균적으로 연령이 가리키는 대로 확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몸이 쇠약해짐에 따라, 가끔 드문드문 생기던 자각이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p415. 이런점에서 모든 죽음은 가장 완만한 것조차도 비교적 급작스럽고 우발적인 죽음입니다. 모든 죽음은 어느 정도는 난폭한 죽음입니다. 아니 차라리 죽음은 난폭함 그자체입니다. 창조하는 ‘이루어지라’가 비존재를 존재로 만들 듯이, 죽음은 파괴하는 순간이니 말입니다.
p628. 죽음은 우리의 능력 너머에 있어 모든 기술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기술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할 뿐입니다. 우리의 의료는 건강을 개선하고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어떤 약도 듣지 않고 어떤 의학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병입니다. 절대적인 불치병인 것이죠.
~690(끝)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