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누군가 誰か

전화가 끊긴 뒤에도 그는 일 분 가까이 수화기를 움켜쥐고있었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몇 장의 사진은 어느 틈엔가 발치에떨어졌다. 겨우 수화기를 내려놓고 그는 사진들을 주워 모았다.
어제 신인 디자이너 이나키 요헤이가 소개해준 열아홉 살모델의 사진이다. 소개라기보다 영업이었다. - P158

그렇다, 아마도 이나키가 지시했을 것이다.
"기타가와 준은 여자에 약해. 딱 한 번만 자면 돼. 그러면잡지든 텔레비전이든 광고든 줄줄이 일이 들어올 테니까."
여자애는 이케지마 리사와 미오리 레이코를 꿈꾸며 지시에 따른 것이다. 열아홉 살의 아직 단단한 젖무덤은 바람에 희롱이라도 당하듯이 잘게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전하며 떨고 있었다. - P158

오 년 전에 그가 길거리에서 스카우트한 여자도 꿈의 의상을 입기 위해 자진해서 제물이 되었다. 그녀는 유명해질 수만 있다면 뭐든 할 거라고 말했다. 배우보다는 모델이 더 낫다, 모델이라면 틀림없이 성공한다, 라는 그의 말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수께끼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미처 감추지 못한 기쁨으로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 P159

올 3월 초부터 그녀는 돌연 그에게 분노를 들이댔다.
"내 몸뚱이는 모조리 뜯어먹혔어요. 이제 뼈만 남아 쓰레기와 함께 버려지기를 기다리는 신세예요."
그건 모두 자기 책임이라고 그는 반발했다.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스타 모델을 만들어줬을 뿐이야." - P159

분명 그는 한 번도 레이코를 범한 적은 없었다. 레이코의아름다움은 렌즈 너머에 있을 뿐, 적어도 그가 육체적 욕망을 느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직업적 소재로는 완벽했다. 카메라렌즈로 바라보면 미오리 레이코는 이미 여자도 인간도 아닌 하나의 아름다움이었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엄청난 아름다움을초점에 사로잡았다는 감촉이 있었다. - P160

 올 3월, 레이코가 갑작스럽게 표현해서 그를 위협하기 시작한 뒤에도 그는 소재로서의 레이코를 사랑했다.
"당신이 사진을 찍을 때마다 나는 살갗이 한 겹 한 겹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어요.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태워버릴 차례예요 살갗만이 아니죠, 기타가와 준이라는 이름도 장래도 모두 불태워버릴 거예요."
3월의 어느 날 밤, 레이코는 그런 말과 함께 핸드백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이 작업실 테이블 위에 내던졌다. 사진에는 지중해 바다와 모터보트, 그리고 운전석 핸들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 거센 바람 소리를 자장가처럼 듣고 있는 레이코의 옆얼굴, 그리고 또 하나, 보트 뱃머리 앞쪽 바다에서 고개를 쑥 내민 얼굴 하나가 찍혀 있었다. - P160

어느 인적 드문 해안가에서 바위에 묶여 있는 모터보트를발견했을 때, 차 따위는 버려두고 질주하는 보트 위에서 머리를 휘날리는 레이코의 사진을 찍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보트 주인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단 십 분이면 된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레이코를 보트에 태우고 바다로 나갔다. - P161

다. 순간, 바다에서 뭔가가 고개를 쑥 내밀었다. 렌즈 너머로 그렇게 감지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가벼운 충격이 덮쳤다. 반사적으로 운전석의 레이코를 밀쳐내고 모터를 껐다. - P161

그날 밤 두 사람은 마르세유의 호텔에서 묵었다. 다음 날아침, 부족한 프랑스어 지식으로 호텔 신문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한 귀퉁이에 주앙 레 팡에 별장을 가진 파리의 사업가 자크뒤랑이 바다에서 사망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자세한 원인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마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 P162

일본에 돌아와 공항에서 헤어질 때, 레이코는 마치 재미난화제인 것처럼 말했다.
"그 순간에 사진이 찍혔을지도 모른다고 했죠? 만일 진짜로 찍혔으면 나한테도 보여줘요."
레이코는 원래부터 그런 잔혹한 면이 있었다.  - P162

(전략) 그녀가 어떤 성격이든 아무 관심이 없었다. 끊임없이 나쁜 소문이 들려왔지만 제대로 귀담아들은 적도 없었다. 게다가 레이코는 기타가와 준이라는 이름의 이용가치를 잘 알고 있어서 그와의 작업을 펑크내거나 도를 넘어 함부로 말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지중해에서의 사고 사진을 보고 싶다고 했을 때도 그래서그는 별반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현상한 사진에는 분명 그 순간이 찍혀 있었다.  - P163

"그런 사진은 얼른 태워버려. 필름은 이미 처분했어."
"왜요? 이 사진, 내가 최고로 아름답게 찍혔는데? 괜찮아요, 프랑스인의 얼굴 부분은 잘라서 없앨 거니까."
그리고 그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세요, 우린 공범이잖아요."
아니, 입은 미소를 띠었지만 눈 속 깊은 곳에서 차가운 번뜩임이 바늘처럼 그를 쿡 찔렀다. - P164

또 어느 날 밤에는 카메라를 들고 문제의 사진 속 프랑스인과 똑같은 얼굴을 하라고 요구했을 때도.
레이코가 하라는 대로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그녀는 만족하지 않고 부루퉁하게 말했다.
"그런 표정이 아니잖아요. 죽음이 코앞에 닥쳤어요, 좀 더입을 길게 찢어야죠." - P165

"인간의 얼굴이나 몸은 망가지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레이코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때로는잔뜩 뒤틀린 얼굴 쪽이 실제 내 얼굴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히면서도 그는 여전히 이건 레이코의 별쭝맞은 취미일 뿐이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 P165

농담이 아닌 진심이라고 깨달은 것은 팔 개월째 시달리던지난달의 어느 날 밤, 그녀의 맨션에서 문제의 사진과 사진 속 프랑스인과 똑같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의 사진을 한 장씩 봉투에 넣었을 때였다.
"이거 주간지 기자에게 보내려구요."
"너도 공범이잖아! 이 사진이 세상에 알려지면 너도 똑같이 파멸하는 거라고!" - P166

이나키가 소개해준 여자애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는 이여자애와는 세 번을 자고 끝이었어, 라고 생각했다. 미오리 레이코나 이케지마 리사가 될 수 있는 아름다움의 싹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 사진을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이나키에게서2백만 엔을 받았지만 백만 엔을 돌려주면 해결될 것이다. 하긴 계산속 빠삭한 그자가 그 정도로 포기할 리는 없다. - P167

했다. 레이코를 살해한 뒤로 그는 이유도 없이 암실에 틀어박히곤 했다. 마치 빨간 암색만이 자신의 범죄를 감춰준다는 듯이.
하지만 그가 잊고 싶은 것은 범죄가 아니라 두 개의 얼굴이었다. 지중해의 새파란 바다에서 쑥 튀어나왔던 프랑스 남자의얼굴, 그리고 지난 달의 어느 날 밤, 침대에 쓰러져 누워 있던 레이코의 얼굴이다. - P167

자신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두 남녀에ㅜ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게 어쩐지 기묘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렌즈에서 눈을떼고 살인 현장을 나왔다. 그 맨션에 다녀간 흔적을 모조리 지워없애고 복도로 나와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남프랑스에서의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목격자는 아무도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목격자가 나타난 것이다. 조금 전 전화에서 남자 목소리는 그날 밤 그가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침착하게 행동하려고 했는데 역시 남의 눈에는 다급하게구는 것처럼 보였던 것일까. "안색이 홱 변한 채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것을..."이라고 그자는 말했다. 그는 수화기에 대고대꾸했다. - P169

그날 밤에는 지난여름에 레이코에게 걷어차인 중년 의사가 먼저 그녀를 죽이려다가 실패했다. 그의 살의를슬쩍 빌려 단지 독이 든 술잔과 레이코의 술잔을 바꿔치기한 것뿐이었다.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런 싱거운 행위를 범죄라고,
살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 P169

그렇건만 엌재서 항상 이 암실을 나서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의 마지막 얼굴이 뇌리를 찌르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처음 한동안은 단지 그 프랑스인과 레이코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이코를 죽이고 나흘째 되던 날 밤, 그게 두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P170

몸을 더욱더 작게 웅크리고 손끝만 벽의 스위치에 내밀어붉은 등을 껐다. 암실은 완전한 암흑에 감싸였다. 그는 작은 개미가 되어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전화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한 차례 끊기는가 싶더니 다시 울렸다. 협박자가 또 전화한 것일까. 아니면 그자가 정말로 경찰에 가서 그날 밤 목격한 장면을 신고한 것일까. - P170

9장 누군가 誰か

"전화를 안 받네...."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수화기를 내려놓고 벌써 옷을벗은 채 침대 끝에 앉아 있는 여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기타가와가 어딘가 외출한다고 했어?"
여자애는 백치처럼 입을 헤벌린 채 고개를 저었다. 이름이 분명 요시다 가즈코라고 했다. - P174

그가 화를 낸 것은 우선 이 여자애 때문이었다. 애교 있는 달달한 목소리에 보통 남자라면 욕망을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그에게는 단지 짜증을 부를 뿐이었다.
게다가 그 목소리는 어딘지 미오리 레이코와 비슷했다. - P174

남자만 사랑하고 여자라면 모조리 미워하는 프랑스인이레이코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코는 어떤 일도 당한 적이 없는 것처럼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당신, 질투 나지 않아? 그 늙은이와 내가 그런 짓을 했는데도?"
"난 그런 남자, 사랑하지 않아." - P175

이다.
그렇게 레이코는 오히려 큰 성공이라는 듯이 말했던 것
"몸에 상처는 나지 않았어?"
"전혀 걱정할 거 없어. 나는 성공하고 싶거든. 유럽에서도유명해질 거야. 마르탱이 디자인한 의상을 입을 수만 있다면 어떤 아픔이라도 견뎌야지. 게다가 나는 상처 따위 무섭지 않아. 인간의 몸이란 상처 입기 위해 존재하는 거야. 하긴 중요한 상품이니까 조심해야겠네."
항상 아래로 숙여서 쓸쓸해 보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이코는 장래에 대한 꿈에 부풀어 금빛으로 환하게 빛났다. - P175

사진작가 기타가와 준은 항상 피사체가 아닐 때의 레이코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투로 말하곤 했다.
"나는 카메라 렌즈를 벗어나면 레이코가 어떤 여자인지 전혀 몰라." - P176

하지만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미오리 레이코는 단지 자신의 꿈에 탐욕스러운 인간이었다.  - P177

레이코는 올해 초부터 느닷없이 그를 미워하며 무서운 말을 퍼부었다.
"다들 피라냐였어. 내 살을 뜯어먹고 이득을 노리는 자들이야. 당신도 그중 한 사람이었어."
하지만 파티에서 그가 소개해준 유명 인사들을 수수께끼같은 미소로 차례차례 포로로 만들어가는 레이코는 다른 누구보다 힘센 피라냐로 세계 전부를 뜯어먹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 P177

"패션계 같은 좁은 세계에서 톱에 올라봤자 별거 없어. 더유명해져서 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야지."
만날 때마다 입버릇처럼 그런 말을 했다. 그런 때도 몹시차가운 무표정이었지만 목소리에서는 그전보다 강한 열기가 느껴졌다. - P178

"뉴욕의 내 친구가 <라이프>지 편집에 발언권을 가진 사람을 잘 안다는데 좀 도와줄래요?"
바로 작년 봄에만 해도 그런 말을 했었다.
<라이프>지 표지에 실리는 거, 예전부터 내 꿈이었어. 하지만 그 사람, 마르탱처럼 여자는 사랑하지 않는다네요.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잖아. 그 대신 <보그> 편집인은 내 손안에 있으니까 당신이 디자인한 의상을 실어달라고부탁해볼게."
매사에 결단이 빠른 그는 일 분도 안 되어 <보그>지 여섯페이지를 교환 조건으로 레이코의 부탁에 응했다. - P178

"난 더, 더 유명해지고 싶어."
술에 취한 눈을 허공에 고정한 채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는소리를 들으면 등이 오싹해질 때가 있었다. 적어도 그의 눈에는그렇게 보였다.
"당신, 사 년 전에 ‘위‘라고 했었지?"
그렇기 때문에 올 3월에 레이코가 갑작스럽게 한 장의 사진을 내밀며 르네 마르탱과 두 사람의 관계를 빌미로 협박했을 때, 전혀 다른 여자가 나타난 것처럼 생경했다. - P178

"내가 정말로 성공 따위를 꿈꾼 줄 알아요? 나는 단지 이업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당신들과 똑같은 수위까지 타락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마르탱의 더러운 손도, 당신의 창피한 줄 모르는 눈빛도, 진짜 나를 잊게 해주지는 못했어. 문득 돌아보니 엉망으로 망가진 잔해뿐이었어. 당신과 똑같은 쓰레기였다면 아마 이런 잔해 같은 몸이라도 질질 끌고 살아갔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여전히 나는 나였어."
그가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레이코는 도무지영문 모를 시비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대꾸를 되풀이할 뿐이었다. - P180

올 초에 르네 마르탱의 방에서 오래 전에 훔쳐 왔다는 한장의 사진을 그의 눈앞에 들이댔을 때부터 언젠가 이 여자를 죽이고 말 거라고 예감했었다. 마르탱과 그가 벌거숭이로 뒤엉킨 수치스러운 사진이었다.  - P181

그로부터 몇 달 동안 그는 단지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날 밤에 그 기회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레이코가 제 손으로 독약을 넣은 술잔과 또 하나의 술잔, 그 두 개를 바꾸기만 하면 되었다. 단지 그것만으로 다른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 수 있었다. 끔찍한 협박 재료를 손아귀에 움켜쥔 여자를, 지난 몇 달 동안 자신에게 온갖 굴욕감을 안긴 여자를, 죽일 수 있었다. - P181

"나를 오늘 밤 안에 죽이는거야."
하지만 곧바로 날카로운 웃음으로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하긴 소심하고 못나 빠져서 당신은 그럴 용기도 없지."
그녀의 비웃음을 보며 마침내 레이코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 P182

오 분 뒤, 자기 대신 범인이 되어줄 의사의 전화가 걸려오고 레이코가 수화기를 내동댕이쳤다.
"이 사람, 집에 가서 또 혼자 술을 마신 모양이야."
그 말을 들은 순간, 자신의 결심을 재확인했다. 다시 오 분이 지나 레이코가 침실에 담요를 찾으러 갔을 때, 그의 손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두 개의 술잔을 바꿔치기했다. - P182

 레이코가 몸을 뒤틀며 거친파도처럼 침실로 뛰어드는 것과 동시에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삼 초 뒤에는 침대 위에서 이미 숨을 거둔 레이코를똑같은 미소로 내려다보았다.
입에서 황갈색 액체가 흘러나와 긴 줄을 그리며 목을 타고 흘러 파란색과 흰색 줄무늬 스웨터의 가슴 안으로 사라졌다. 그는 지난 몇 달 동안 겪었던 굴욕감이 마침내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 P183

"가슴에 상처가 남았어. 한동안 남들 앞에서 옷은 못 벗어오늘 쇼 무대 때 옷 갈아입는 건 당신 혼자서 도와줘."
쇼가 시작되고 대기실 한쪽에서 드레스를 벗겼을 때, 레이코의 왼쪽 가슴 나비 문신에 또렷한 쇠사슬 자국이 찍혀 있었다.
똑같은 상흔이 그의 가슴에 조금 더 생생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레이코는 알지 못했다. - P184

남자들뿐만이 아니라 만일 여자들이 그의 나신을 볼 기회를 가졌다면 역시 상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단 한 사람, 레이코만 유일하게그의 몸에 경멸의 시선을 던졌다. 벌거벗은 제 몸을 그의 몸에 맞대며 말하곤 했다.
"그 썩어 문드러진 몸으로 나를 안을 수 있으면 안아봐. 그러면 용서해줄 테니까."
그러고는 빨간색 검은색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으로 그의온몸을 애무했다. 증오감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여자의 애무는 채찍이나 사슬보다 더 격한 고통을 그의 몸에 안기곤 했다. - P184

깔끔하게 거실의 지문도 처리했다. (중략). 범죄를 저지른 덕에 미모에 한층 깊이가 더해진 것 같았다. 그는 거울 속에서 그 아름다운 애인에게 아주 잘했어, 라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머플러로 얼굴 아래 부분을 감싸고 깊숙이 눌러쓴 모자 차양으로 얼굴 윗부분을 가린 채 맨션을 나섰다………
"나는 뭘 하면 될까요?"
곁에서 여자애가 물었다. 그는 그날 밤의 일을 떠올리며 어느새 자신의 침실 거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P185

그는 말없이 베갯머리로 다가가 꽃병 속의 장미를 모조리뽑아 침대에 던졌다. (중략). 순순히 옷을 벗은 여자애는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침대 위의 장미꽃과 그의 너무도 차가운 눈빛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가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고 싶어? 그럼 그 전에 이 장미의상을 걸치지 않으면 안 돼."
순간, 여자애의 눈에 공포가 내달렸다. - P186

"걱정할 거 없어. 이건 일종의 의식이야. 내가 디자인한 이최고의 의상을 소화해내지 못하면 넌 앞으로 어떤 옷도 입을 수없어."
사실 그건 그의 디자인이 아니라 르네 마르탱이 사랑과 증오의 제물들을 위해 고안해낸 의상이었다. - P186

여자애는 드러누운 채 머뭇머뭇 몸을 움직여 자세를 바로잡으려고 했다. 꽃 조각이 자글거렸다. 그때마다 농밀한 향기가방 안의 밤기운에 번져갔다.
"이게 내가 주는 아름다움의 세례야."
육년 전 르네 마르탱이 했던 말을 그대로 입에 올렸을 때,
돌연 베갯머리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짜증 난 손길로 수화기를들었다.
"이나키 요헤이 씨?" - P187

"조금 전에 두 번 전화했는데 두 번 다 통화 중이더군. 실은 내가 그날 밤 우연히 미오리 레이코의 맨션 뒤쪽에 있다가 당신이 안색이 홱 변한 채 비상계단을 뛰어내려와 도망치는 것을목격했어. 당신 얼굴은 잡지에서 여러 번 봤기 때문에 잘 알고있어."
"그날 밤이라니, 어떤 밤이라는거야?"
"11월의 그날 밤, 당신이 미오리 레이코를 죽인 날밤."
"거짓말도 잘하는구나. 나는 그때 머플러로 얼굴을 가려서...."
실언이라는 것을 깨닫고 저절로 앗 하고 부르짖었을 때, 그보다 큰 비명이 방 안을 울렸다.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여자애가 움직였던 것이다. - P188

전화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오늘 저녁에 사와모리 에이지로가 레이코를 죽였다는 유서를 남기고 엽총 자살을 한 것을 알고 있나? 하지만 사와모리는 레이코를 죽이지 않았어. 실제 범인은 당신이야...." - P188

10장 누군가 誰か

죽은 그 애의 스웨터를 걷어 올리고 왼쪽 젖가슴의 검은 나비에 내 오른쪽 가슴의 빨간 나비를 맞댔다. 살아 있을 때, 우리는 곧잘 그렇게 침대 위에서 서로를 탐했다. (중략)
"아, 가엾어라. 너도, 네 젖가슴의 나비도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 애의 파란색과 흰색 줄무늬스웨터를 반듯하게 다듬어주고 내 가슴팍의 단추를 다시 채운뒤에 침실을 나왔다. - P190

문을 닫은 뒤에는 거실에서 뭔가 내 손이 닿은 게 없는지 생각해보았다. 손댄 것이라고는 내가 마시던 술잔과 그 애가 "술 좀 따라줘"라고 했을 때 손에 들었던 브랜디 병, 얼음 집게뿐이었다.
처음 집에 들어올 때 현관문을 여닫는 건 그 애가 했다. 그리고얘기하던 중에 그 애를 죽이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되도록 아무것도 손대지 않도록 조심했었다. - P190

소파 앞 테이블에 남은 술잔은 한 개뿐이었다. 그 잔에는의사와 그 애의 지문이 찍혀 있을 뿐이다. 의사가 마셨다는 술잔과 그 애의 술잔을 바꿔치기할 때, 손수건을 사용했던 것이다. 또한 가지, 그 애가 침실 문 앞에서 죽기 직전에 바닥에 떨어뜨려깨져버린 유리잔에도 내 지문은 찍히지 않았다. - P191

그렇다, 발소리를 들었다면 알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두운 비상계단에서 스카프와 선글라스로 가려진 얼굴이 누구 얼굴인지 정말로 알아볼 수 있을까.
오...."
"당신 얼굴은 잡지에서 여러 번 봤기 때문에 잘 알고 있방금 전화를 걸어온 남자는 분명하게 말했다.
"흥, 장난치지 말아요."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대꾸해주었다. 내 얼굴을 알아봤다니, 거짓말이 틀림없다. - P191

"아무튼 거래를 하자. 내일 밤에 다시 전화할 거야. 그때까지 잘 생각해봐."
"좋아요, 내일 밤 아홉 시에 다시 이 번호로 전화해요. 녹음해서 경찰에 신고할 테니까."
(중략)
전화 목소리는 ‘진범은 당신‘이라고 말했다. 분명 그날 밤,
그 아이를 죽인 건 나다. 사와모리 에이지로가 그 아이를 죽였다고 유서에 고백한 것은 전화 목소리가 말했던 대로 죽기 전에 엉터리 같은 소리를 늘어놓은 것이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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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살인자의 섬‘과 이 소설의 원작 ‘셔터 아일랜드‘가 생각난다.

‘결손‘이란 용어는 신경학에서 매우 자주 사용되는 단어로, 신경 기능의 장애나 불능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이 말은 말소리상실, 언어상실, 기억상실, 시각상실, 정체성상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기능의 상실 그리고 그 밖의 많은 특정 기능(또는 능력)의 결함이나 상실을 지칭할 때 쓰인다. - P18

뇌와 정신의 관계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1861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프랑스의 브로카가 뇌 좌반구의 특정 부위에 손상이 생기면 그에 해당하는 특정한 장애 즉 언어상실증이 반드시 뒤따른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 P20

 19세기 끝 무렵이 되자, 좀더 예리한 관찰자들이 등장했는데,
그중 특히 프로이트는 자신의 책 《언어상실증》에서 기존의 뇌 지도가지나치게 단순하며, 모든 정신활동에는 매우 복잡한 내적 구조가 있고 그와 똑같이 매우 복잡한 생리학적 원리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 P20

프로이트가 염두에 두었던 새로운 과학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러시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A. R. 루리야(그리고 그의 부친 R. A. 루리야), 레온체프, 아노킨, 번스틴과 그 밖의 여러 과학자들이 힘을 합쳐새로운 분야를 창조하고, 그것에 신경심리학‘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 P20

신경심리학은 《인간의 상위뇌피질기능》 (영어판은 1966년)이란 기념비적인 책 안에 체계적으로 집대성되었다. 또한 일종의 전기 즉 ‘병적학‘이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 (영어판은 1972년)에도 실렸다.  - P20

‘열등한‘ 반구라고 불리는 멸시를 당할 정도로 우반구에 대한 연구가 소홀하게 다루어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좌반구의 손상부위와 그에 따른 증상을 밝혀내는 것이 비교적 쉬운 일이었던 데반해, 우반구의 각 영역에 해당하는 증후군은 알아내기가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 P21

과거에도 우반구의 증후군을 연구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아니다(예를 들면 1890년대의 안톤과 1928년의 푀츨). 그러나 우반구를 연구하려는 시도는 어쩐 일인지 번번이 무시되고 말았다.  - P21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에는 발표하지 못했고 그후에도 소련에서는 출간되지 않았다. 그는 우반구를 다룬논문을 영국의 R. L. 그레고리에게 보냈고, 그레고리가 자신이 편집중이던 《옥스퍼드 컴패니언, 정신편》에 실었던 것이다. - P22

우반구를 연구하는 일이 어려운 까닭은 환자 스스로 자신의 증상을 알 수가 없고 게다가 외부 관찰자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반구 증후군에 시달리는 경우, 환자 본인은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기가 어렵다.  - P22

 우반구 증후군은 좌반구 증후군과 거의 같은 빈도로 일어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반구 증후군이 신경정신학과 신경심리학의 문헌에 얼굴을 내미는 빈도는 터무니없이 떨어진다. 우반구 증후군의 서술이 1이라면 좌반구 증후군의 서술은 1,000정도의 비율이다. - P22

 우반구 증후군은 그만큼 중요하다. 그 새로운 유형의 신경학은 ‘개인 주체의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루리야가 특히 즐겨 사용한 용어를 빌려서 ‘낭만적‘ 과학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과학에서는 ‘자기‘라든가 ‘인격‘의 밑바탕에 있는 기초가 밝혀지고 검증되기 때문이다. - P23

 즉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와 대비되는 병력사를 서술하는 것이다. 루리야는 죽기 직전에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한 이야기를, 설령 스케치 정도에 불과하더라도 꼭 발표하기바랍니다. 그것은 엄청난 경이의 세계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러한 장애에 각별한 흥미를 지니고 있다. - P23

당시 내가 흥미를 품었던 분야는 지금까지 말한 ‘결손‘보다는 오히려 ‘자기‘ 그 자체를 비정상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신경장애였다. 이러한 장애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을 것이고 또한 기능의 결손이 아니라 기능의 과잉이 원인인 것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를 일단 구분해서 별도로 생각하는 방법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 P23

아이비 맥킨지는 이 점을 당당하게 서술했다.

도대체 ‘병의 본질‘이라든가 ‘새로운 병‘이란 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의사는 자연학자와는 달리 다양한 생명체들이 환경에 적응하는방식을 이론화하는 것보다, 단 하나의 생명체, 역경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려고 애쓰는 하나의 개체, 즉 주체성을 지닌 한 인간에 마음을 둔다. - P24

 특히 프로이트는 이 방면에 매우 심혈을 기울였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편집광의 망상이란 산산이 부서져 혼돈으로 변한 세계를 무언가에 의해 보상받고 다시 한 번 재구축하는 노력의 결과라고 한다. - P24

 프로이트와 똑같은 견해를 아이비 맥킨지는 이렇게 피력했다.

파킨슨 증후군의 치료란 혼돈에서의 복구라고 말할 수 있다. 조화를이루던 것이 무너지고 최초의 혼돈이 온다. 그것이 재활지도를 통해 아직은 불안정한 토대 위에서 재통합되는 것이다.

《깨어남》은 어떤 하나의 병으로 인해 발생한 혼돈의 ‘복구와 재통합‘을 묘사한 연구이다. - P25

제1부 ‘상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극히 특수한 시각적 인식불능증‘의 예, 즉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일 것이다. 나는 이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P25

이것이 마비 또는 상실된 인간에게 남는 것은 감정과 구체적 즉흥적인태도뿐이라는 것이다(1860년대의 휴링스 잭슨도 이와 거의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음악가 선생의 경우에는 정반대이다. 그는감정, 구체성, 개인적인 것, 현실적인 것 모두를 잃어버리고 (그렇다고는해도 이것은 시각의 세계에 대해서뿐이지만) 추상적·범주적인 것만을 부둥켜안고 살며 극히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곤 했던 것이다. - P25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P선생은 오랫동안 뛰어난 성악가로 명성을 날렸던 지방의 음악교사였다. 그에게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음악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무렵이었다. 학생들이 자기 앞으로 다가와도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학생이 말을 걸면 목소리를 듣고 그제서야 누구인지를 알았다. - P27

거리를 거닐다가 소화전이나 주차요금 자동징수기를 보면 마치아이들의 머리라도 본 것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구의 장식을 향해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가 아무런 대답이 없어 깜짝 놀라기도했다. 주변 사람들도 처음 한동안은 그가 착각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고 웃어넘겼다. P 자신도 웃었다. 그에게는 남다른 유머감각이 있었고선문답처럼 들리는 역설과 과장이 그의 장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 P27

 게다가 그의 실수들이 어찌나 익살맞으면서도 재기가 넘쳐 보이던지,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또 앞으로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3년 후에 그가 당뇨병에 걸리고 나서부터였다. - P28

 의사는 "선생의 눈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하지만 시각을 담당하는 뇌 부분에 문제가 있네요. 저보다는신경전문의에게 가보세요." 하고 말했다. P선생이 나를 찾아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 P28

그러나 약간 이상한 점도 있었다. 나를 쳐다보면서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뭔가 이상했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내 느낌으로 그의 귀는 분명 나를 향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눈은 아닌 것 같았다. 보통 평범하게 사람을 쳐다보는 그런 눈빛이 아니었던것이다. 그의 시선은 한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여기저기 옮겨다녔다. - P28

잠깐 밖으로 나와 그의 아내와 이야기를 나눈 다음 다시 방으로 돌아와 보니, P선생은 창가에서 평온하게 창밖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바라보고 있다기보다는 듣고 있었다.
"차 다니는 소리가 들리네요. 저기 멀리서 기차 소리도 들리고요. 마치 교향곡처럼 들리지 않나요? 혹시 오네게르의 <퍼시픽 231>이라는 곡을 아시나요?"
정말로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이런 멀쩡한사람에게 어떻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걸까? 검사를 해보자고 하면 혹시 언짢아하지 않을까?
"물론 그러셔야죠. 의사 선생님" - P29

 처음으로 이상한 점이 눈에 띈 것은 반사 반응을 검사할 때였다. 왼쪽 구두를 벗기고 열쇠로 발바닥을 긁자 작은이상 징후가 나타난 것이다. 시시해 보일지는 몰라도 이것은 반사 반응을 검사할 때 반드시 해야 하는 과정 중 하나이다.  - P29

"좀 도와드릴까요?"
"뭘요? 누구를 도와주신다는 말씀이지요?"
"선생님이 신을 신는 것 말입니다."
"아차 신을 깜빡했군."
(중략). 그러다가 마침내 그의 시선이 자기 발에 가서 딱 멈추었다.
"이게 내 신 맞죠?"
내가 잘못 들은 것일까? 아니면 그가 잘못 본 것일까?
손을 자신의 발에 갖다대며 이렇게 말한 것이다. - P30

농담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님 미쳤을까? 아니면 정말 눈이 안보이는 것일까? 이게 바로 그가 말하는 ‘이상한 실수‘라면, 그것은 내가본 중에 가장 이상한 실수일 것이다.
더이상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가 신(그의발)을 신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 P30

그의 반응은 아주 이상했다. 그의 눈은 내 얼굴을 쳐다볼 때처럼 여기저기로 빠르게 옮겨다니며 각각의 세세한 특징을 잡아냈다. 그중에서도 특히 밝게 빛나는 것이나 색채, 형태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설명을 했다. 그러나 결코 장면 전체를 파악하지는 못했다. - P31

"이 사진이 뭐로 보이시나요?"
"강이군요. 물 위로 테라스가 딸린 작은 집이 있고, 사람들이테라스에 나와 식사를 하고 있고요. 색색의 파라솔이 여기저기에 보이네요."
그는 표지에서 시선을 떼고 허공을 보면서(본다는 말이 맞기나 한걸까?) 사진에 있지도 않은 것들을 꾸며대서 말하고 있었다. 사진에 있지도 않은 강, 테라스, 색색의 파라솔을 상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 P31

그는 검사가 다 끝났다고 여겼는지 모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손을 뻗어 아내의 머리를 잡고서 자기 머리에 쓰려고 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것일까? 그런데도 그의 아내는 늘 있어온 일이라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 P31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한 번 더 그를 만나봐야 했다. 그것도 그의 평소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 바로 그의 집에서 며칠 뒤 나는 P선생의 집을 방문했다. 내 가방 안에는 <시인의사랑>의 악보(나는 그가 슈만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와 지각 검사에 필요한 여러 도구들이 들어 있었다. - P32

 책도 있고, 그림도 있었지만, 주인공은 뭐니뭐니 해도 음악이었다. P 선생이 들어 왔다. 그러나 정신은 딴 곳에 가 있는 것 같았다.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면서도 그는 자꾸만 커다란 벽시계를 향해 가고 있었다. - P32

P선생의 관자엽에는 분명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피질은 음악에 관한 한 완벽했다. 문득 마루엽과 뒤통수엽 그중에서도 시각에 관여하는 부분에 문제가 발생했는지 궁금해졌다.  - P33

추상적인 형태를 인지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렇다면 사람의 얼굴은? 나는 카드 한 벌을 꺼냈다. 그는 모든 카드를 제대로골라냈다. 잭, 퀸, 조커까지도. 그러나 카드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모두 정형화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그가 얼굴을 보고 구별해냈는지, 아니면 그냥 패턴만을 보고 골라냈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 P33

(전략). 그러나 만화 역시 형식적이고 도식적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나는 그가 진짜 얼굴 즉 사실적으로표현된 얼굴에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P33

소리가 안 나오게 한 채로 텔레비전을 틀자, 베티 데이비스의초창기 영화가 나왔다. 러브신이 나오는 장면이었다. P선생은 배우가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베티 데이비스를 원래부터 몰랐기 때문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말 기가 찰 노릇은 그가 그녀나 상대 배우의 얼굴 표정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 P34

 나는 사진들을 한데 모아 그에게 보여주면서 조금은 근심스럽게 지켜보았다. 그는영화를 보여주었을 때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러운 일이 실제 생활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그는 거의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가족도, 동료도, 제자도, 자기 자신조차도 아인슈타인의 사진은 알아봤지만 그것은 특이한 머리와 콧수염 덕분이었다. - P34

 그의 전반적인 인지 방식에 뭔가 근본적인 잘못이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얼굴을 대할 때 그가 보이는 반응은 마치 추상적인 퍼즐 검사를 받는 사람처럼 보였다. 심지어는 친척이나 친한 사람의 사진일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 P35

 그는 모든 것을 그저 형태로만 대했다. 게다가 자신이 본 것을 표현하는 데도무관심했다. 우리는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개성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얼굴을 통해 그 사람의 개성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에게는 얼굴이 전혀 그런 구실을 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얼굴의 겉모습도,
얼굴 속에 들어 있는 내면의 개성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 P35

나는 그의 집에 오기 전에 꽃집에 들러 화려한 붉은 장미 한송이를 샀고 그것을 윗주머니에 꽂고 있었다. 나는 그 꽃을 빼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표본을 받아든 식물학자나 형태학자 같은 행동을 했다. 꽃을 받는 사람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길이가 15센티미터 정도군요. 붉은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초록색으로 된 기다란 것이 붙어 있네요."
나는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맞아요. 그게 뭐 같나요?"
"뭐라고 콕 꼬집어 말하기가 쉽지 않네요." - P35

내 말에 그는 다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차원적인 대칭성을 냄새로 알아내라는 말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점잖게 그것을 코에 갖다댔다. 그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예쁘군요! 철 이른 장미. 정말 천국 같은 향기예요!"
그는 "장미, 백합...." 하고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시각이 아니라 후각을 통해 실체를 인식한 것처럼 보였다. - P36

나는 장갑을 들어올리며 뭐냐고 물었다.
"조사해봐도 되겠습니까?"
그는 장갑을 손에 들고 마치 기하학적인 형태를 조사하는 것처럼 자세하게 조사해나갔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표면이 단절되지 않고 하나로 이어져 있어요. 주름이 잡혀 있군요. 음, 또 주머니가 다섯 개 달려 있는 것 같군요. 음, 말하자면..."
그가 주저하며 말했다.
"맞습니다. 설명을 하셨으니 이제 그게 뭔지 말해보세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 P36

나는 말이 엉뚱한 데로 흐르는 것을 막았다.
"뭔가 흔히 보던 것 같지 않나요? 몸의 일부를 넣는 것이라는 생각은 안 드시나요?"*
그의 얼굴에는 뭔가를 알아냈다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장갑을 보고 "표면이 단절되지 않고 하나로 이어져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아이는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나중에 우연히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고는 그는 소리쳤다. "아니 이거 장갑이잖아!"라고. 이런 모습을 보고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바로 쿠르트 골드슈타인의 환자라누터이다. 그는 물건을 실제로 사용해보아야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할 수 있었다고 한다. - P37

 그러나 P선생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어떤 물건 앞에서도 그것을 친숙한 물건으로 보지 않았다. 시각적인 면에서 볼 때, 그는 생기가 없는 추상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현실의 시각 세계는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현실의 시각적 자아가 없었다.  - P37

 휴링스 잭슨은 언어상실증이나 좌반구 장애 환자들은
‘추상적이거나 ‘명제적인 사고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런 환자들을 개에 비유한다(사실은 개를 언어상실증 환자에 비유한다). 그러나 P선생의 뇌는 기계처럼 정확하게 기능했다. 시각 세계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면에서 그는 컴퓨터와 똑같았다.  - P37

지금까지 내가 했던 검사로는 P선생의 내면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의 시각적 기억력이나 상상력에는 아직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일까? 나는 그에게 집 근처에 있는 광장을 북쪽에서부터 걸어온다고 상상하면서 거리에 보이는 건물들에 대해 말해달라고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오른쪽에 있는 건물들은 말했지만 왼쪽에 있는 건물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았다.  - P38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시각화하고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데 거의 환상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작가인 톨스토이가 떠오른나는 P선생에게 <안나 카레니나>에 대해 질문해보았다. 그는 소설 속에 나오는 사건들을 쉽게 기억해냈을 뿐만 아니라 줄거리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각적인 특징이나 시각과 관련된 사건 그리고시각적인 장면은 하나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 P38

그러나 모든 경우에 다 이런 장애가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시각화 능력의 장애는 얼굴이나 장면의 시각화 또는 시각적인 면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이야기나 드라마의 경우에만 크게 드러났다(시각화의 능력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도식과 관련된 시각화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었다. 아니 더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 P39

루리야는 자제츠키가 게임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지만 ‘생생한 상상력‘만큼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 P39

(전략), 잃어버린 자신의 능력을 되찾기 위해끈질기게 싸운 반면에 선생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둘 중 어느 쪽이 더 비극적일까? 둘 중 누가 더 지옥 같은 상황에 처한 것일까?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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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법원 검찰 가기 전 알아야 할 ‘법‘

03
 1만원으로
1천만원 돌려받는 법

소송 전에 내용증명 우편으로 제압하자 - P86

사례 1 (중략)
 주인은 "새로 세입자를 들여놓고 나가는 것이 시장의 관행"이라고 했다.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따졌지만 안씨는 요지부동이었다. 새로운 세입자에게 돈을 받아서 나가든지 아니면 세를 물고 계속 장사를 하든지 알아서 하란다.
상씨는 법학전문대학원에 다니는 아들 전현명 씨에게 이 사실을 털어놨다. 전씨는 "어머니. 저에게 맡겨주세요"라고 큰소리쳤다. 상씨는 속는 셈 치고 아들이 하는 대로 지켜보기로 했다. 놀랍게도 보름 후 상씨의 통장에는 1,000만원이 고스란히 입금되어 있었다. - P86

이런 경우 내용증명 우편은 어떤 소송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만일 상씨가 곧바로 임대차보증금 반환소송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소장을 작성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들였을테고, 또 판결을 받기까지는 최소한 몇 달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그동안 월세는 월세대로 까먹었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내용증명을 쓰는 데는 하루, 비용은 1만원 안짝이었다. - P87

금전 관련 사건에 효과적인 내용증명 우편

 하지만 알고보면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 내용증명 우편이란 발송인이 누구에게 어떤 내용의 문서를 언제 발송했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증명해주는 특수우편제도다.
우체국이 문서 내용과 발송 사실을 증명해준다. 말은 주고 받는 사람들끼리만 기억할 뿐 근거가 남지 않는다.  - P87

내용증명 우편은 주로 금전과 관련하여 상대방에게 이행을 촉구할 때 많이 사용되는데, 내용증명 우편이 효과를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 P87

• 상대방이 제때 돈을 갚지 않거나 계약을 이행하지 않을 때
• 부동산 매매계약 후 전주인이 이전등기를 해주지 않을 때
• 전세보증금을 제때 돌려받지 못했을 때
• 방문판매, 인터넷 쇼핑 등으로 물건을 구입한 뒤 반품(청약철회)을 할 때
• 채권의 양도사실을 통지할 때
• 소송 전에 마지막으로 상대방 의사를 확인하고 싶을 때
• 계약해제(또는 해지) 의사표시를 분명히 하고 싶을 때 - P88

내용증명 우편은 상대방에게 어떤 사실을 통지하는 차원을 넘어 최후통첩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순순히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법대로 할 테니 그전에 좋게 처리하라는 뜻도 된다.  - P88

하지만 내용증명 우편은 ‘언제 어떤 서류를 누구에게 보냈다‘라는 사실만을 확인해주기 때문에 강제력이 있거나 그 자체로 특별한 효력이 있는서류는 아니다.
따라서 ‘배째라‘고 나오는 비양심적인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 P88

그렇더라도 내용증명 우편이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수단으로 의외로 큰 효과를 보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 P88

내용증명 우편, 어떻게 작성하고 어떻게 보내나

(중략)
내용증명 우편을 쓰는 데는 특별한 형식이 필요하지 않다. A4 용지에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문서 제목 등을 표시하고 육하원칙에 따라 정확하고 간결하게 본문을 써 내려가면 된다. - P89

이때 주의사항 한가지가 있는데, 받는 사람에게 악감정을 드러내거나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할표현을 쓸 필요는 전혀 없다. 내용증명 우편을 보내는 이유는 소송으로 가기 전에 깔끔하게 해결하기 위해서인데 오히려 상대방을 자극했다가는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 자기주장만 정확하게 전달하면 된다. - P89

마지막 부분에는 보낸 날짜를 쓰고 보내는 사람의 이름 옆에 도장을 찍는다. 문서가 두 장 이상이면 앞문서와 뒷문서 사이에도 도장(간인)을 찍는다.
작성을 마쳤으면 똑같은 서류를 총 3부(본인 보관용, 상대방 발송용, 우체국보관용)를 들고 우체국으로 가면 된다.  - P89

상대방이 서류 받은 사실 확인하려면 배달증명을

내용증명처럼 특수한 우편제도로 배달증명도 있다. 배달증명이란 상대방이 서류를 언제 받았는지를 우체국에서 확인해주는 제도다. - P90

한편 내용증명 서류를 분실했을 경우 3년까지 재증명을 청구할 수 있고, 배달증명은 1년 안에는 배달 내용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 P90

04 미투, 성인지감수성, 성희롱...
올바른 성문화는?
[최근 이슈와 법 1] 성적 자유와 법 - P92

최근 ‘미투 운동‘이 우리 사회를 휩쓸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문화·예술계 내부의 성폭력을 고발하던 목소리에서 출발했지만이제는 정치권, 방송계, 대학까지 성적 불평등의 민낯을 속속 드러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 P92

판례에 따르면 성추행은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행위로서 피해자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 P93

"비록 성적인 만족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도 친분관계 없는 여자아이를 상대로 불시에 두 손을 모아 항문 주위와 배를 찌른 행위는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미숙한 B양의 성적 정체성의 형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행위다."

성적 목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상대의 의사에 반하여 성적으로 민감한 부위를 접촉한 행위는 강제추행이다. - P93

건물 엘리베이터 앞에서 지나가는 초등학생 여자아이의 턱과 볼을 만진 중년 남성이 징역형 처벌을 받은 사례도 있다. - P94

부부·연인 사이도 성적자기결정권‘ 침해는 범죄


사례 3 주점에서 술을 마시던 E씨(남)는 옆자리에 있던 F씨에게 호감을 갖고 합석을 하게됐다. 두 사람은 밤 11시에 술자리를 마치고 인적 없는 인근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서 입을 맞췄는데 E씨는 그 이상(?)을 원했다. 성관계를 끝낸 두 사람은 웃으며 손을 잡고 옥상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이들 후F씨는 성폭행을 당했다며 E씨를 고소했다. E씨는 "때리거나 협박한 적이 없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 P94

E씨의 경우는 어떨까? F씨가 성관계에 동의를 하지 않았지만 둘은 서로호감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강간, 강제추행이 성립하려면 폭행이나 협박과 같은 ‘유형력‘이 있어야 하는데 E씨는 완력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이런까닭에 1심에서 무죄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2심과 3심은 "피해자가 범행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거나 피해자가사력을 다하여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가해자의 폭행·협박이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다고 섣불리 단정하여서는 안된다"(대법원 2005.7.28. 선고 2005도3071 판결 등)며 당시 구체적인 상황을 기준으로 판단했다. - P95

 법원은 "E씨로서는 인적이 드문 장소에서 더무거운 피해를 당하거나 변고가 발생할 가능성 등을 회피하기 위해 현장을 벗어나거나 사력을 다하여 반항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 P95

사실 이성 간의 신체 접촉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는 어려운 문제다. 커플마다 특수성이 있을 테고, 남자와 여자의 생각이 또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가지는 기억하자. - P96

둘째, 사람은 누구나 성적인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 성적자기결정권이란 자기운명결정권(헌법에 보장된 행복추구권을 실현하기 위하여자기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의 일종으로 성행위를 할지 안 할지 한다면누구와 할지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말한다. - P96

 법원은 심지어 부부 사이에도 성적자기결정권이 있다고 본다. 대법원은 남편이 아내의 반대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로 성관계를 맺었다면 강간이 성립한다고 판시했다. - P96

남녀가 합의하여 함께 모텔에 들어갔더라도 곧바로 성관계에 동의한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원하지 않는 성적 접촉은 언제, 어디서나 거부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현행법은 비동의간음죄를 처벌하지는 않지만 피해자가 동의 의사를 밝히지 않거나 침묵한 것을 동의로 받아들였다가는 경우에 따라 E씨처럼 성범죄자가 될 수 있다. - P96

대법원이 ‘성인지감수성‘ 강조한 까닭

최근 법원은 성폭력 사건에서 ‘성인지감수성‘을 강조하고 있다. 가해자의시선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2차 피해가 발생하거나 가해자 중심적인 사고가 작동하지 않도록 피해자를 살피라는 뜻이다. 법원판결에 성인지감수성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건 2018년이다. - P97

특히 대법원은 피해자의 진술을 섣불리 배척해서는 안 된다면서 성희롱이나 성범죄 소송에서 법원이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감수성‘을잃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인지감수성이란 일반적으로 ‘남자와 여자 사이의 성별 불균형을 인식하고 성차별 요소를 감지해내는 민감성‘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 P98

또한 성인지감수성 언급은 성희롱 사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부정적 여론, 불이익, 정신적 피해 등 2차 피해를 입지 않도록 유념하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 P98

성관계 동의하면 범죄 아니다?

덧붙여, 업무나 고용 등으로 ‘갑을관계에 있는 경우 성관계 동의를 더 엄격하게 해석한다. 원래 성폭력은 폭행 또는 협박을 수단으로 할 때 성립하지만,
업무나 고용관계에서는 위계(속임수)나 위력만으로도 범죄가 된다. 최근엔 미투 운동의 영향으로 처벌을 받는 사례가 늘어났다.
형법에 따르면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사람에 대하여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간음(피감독자 간음)한 자는 7년 이하의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성폭력특별법에선 피감독자의 추행도 처벌 대상이다. - P101

성폭력, 성폭행, 성추행, 성희롱

성폭력: 성과 관련된 육체적·정신적 폭력행위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르면 성폭력범죄란 강간, 강제추행,
미성년자 간음뿐 아니라 공연 음란, 음화 반포, 음행 매개 등을 지칭한다.  - P102

6장 형사소송, 제대로 알면 무서울 게 없다

08 자살,
부추기는 자를 벌하라

자살 돕거나 원인 제공해도 형사처벌 - P362

"자살은 결코 해결수단이 될 수 없다"는 말로는 그들의 절박한 심정을위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실의와 좌절에 빠진 이에게 삶의 의욕을북돋아주기는커녕 오히려 자살을 부추기거나 도와준다면, 그건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
법은 자살을 돕거나 자살의 원인을 제공한 자에게 엄중히 책임을 묻는다. 이는 군대, 교도소 등 국가기관에서 발생한 자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 P362

동반자살시도,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우선, 형법 제252조를 보자.

1.사람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그를 살해한 자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처한다.
2. 사람을 교사 또는 방조하여 자살하게 한자도 전항의 형과 같다.

①은 촉탁· 승낙에 의한 살인죄, ②는 자살방조·교사죄다. 그중 실의에빠진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대표적인 죄가자살방조죄다. - P363

자살도구 제공하거나 조언. 격려했다면 자살방조

사례 2 S씨와 T씨는 직장 동료였다. 친하게 지내던 두 여성은 동성애 관계로 발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S씨가 씨에게 어떤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충격을 받은 씨는 "헤어질 수 없다. 차라리 우리 자살하자"고 말했고, S씨도 "알았다"
고 답했다. 둘은 야산으로 향했는데 앞서가던 씨가 혼자 목을 매어 숨졌다. - P364

법원은 S씨에게 자살방조의 책임을 물어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S씨는 "T씨가 말릴 사이도 없이 자살을 시도했으므로 억울하다"고항소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 P364

판례는 자살방조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자살방조죄는 자살하려는 사람의 자살행위를 도와주어 용이하게 실행하도록 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으로서, 그 방법에는 자살도구인 총, 칼 등을 빌려주거나 독약을 만들어주거나 조언 또는 격려를 한다거나 기타 적극적, 소극적, 물질적, 정신적 방법이 모두 포함된다."(대법원 2005도1373 판결 등) - P364

법원 "자살 실패 엄벌하면 삶의 의욕 꺾을 수 있다" 감형

동반자살은 일반 범죄와 달리 복잡한 성격을 띤다. 숨진 사람은 처벌할 수없으니 실패한 사람에게만 책임이 돌아간다. 또한 자살을 부추겨 함께 실행한사람을 가볍게 처벌하는 건 용납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자살에 실패한 이후 마음을 다잡고 살아보고자 노력하는 사람을 엄하게 처벌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 P365

 재판부는 그러나 "오늘날 자살방조의 행태는 동반자살을 시도했다가 살아남은 경우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데, 이는 서로 상대방의 자살에 대한 방조행위가 됨에도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처벌되는 면이 없지 않다"고 설명했다. -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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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너는 게르마니아 방의 희곡 동아리에 가입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하자 분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분풀이로 성경 읽기모임에 지원했지만 거기서도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하일너는 막무가내로 그 모임에 들어가서는 점잖은 작은 형제회의 경건한 대화에 특유의 주제 넘는 독설과 신성모독적인 풍자로 불화와 시비를 일으켰다. - P130

 하일너는 그런 장난에 곧 흥미를 잃었지만 비꼬며 성경적으로 말하는 방식은 꽤 오랫동안 유지했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 P130

어느 날 아침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나오면서 세면장 문에붙어 있는 쪽지를 발견했다. 쪽지에는 ‘스파르타에서 보낸 여섯 편의 에피그램(기지와 풍자가 넘치는 짧은 시, 경구-옮긴이)‘
이라는 제목 아래 몇몇 유별난 동급생들의 어리석은 행동이며우정에 관한 내용이 풍자적인 이행시로 적혀 있었다. 물론 기벤라트와 하일너 커플도 공격을 받았다.  - P130

다음 날 아침에는 학생들의 방문마다 반박하거나 동의를 나타내거나 새롭게 공격하는 풍자시와 경구가 잔뜩 붙었다. 정작 스캔들을 일으킨 장본인은 영리하게 여기에 동참하지 않았지만 헛간에 불씨를 던지겠다는 그의 목적은 성취된 것이었다. - P131

신문제목은 <산미치광이 (꼬리 쪽 몸이 가시털로 뒤덮인 쥐처럼 생긴 야행성 동물-옮긴이)>로 주로 익살맞은 기사가 실렸다. 창간호 기사 중 역작은 여호수아서(구약성경 중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책 - 옮긴이)의 저자가 마울브론의 신학생과 나눈 재미있는 대담이었다.
신문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둔스탄은 매우 바쁜 편집자이자 발행인으로 명성을 누렸다. - P131

헤르만 하일너도 열정적으로 신문 편집에 참여했다. 뛰어난 재치와 능력을 발휘해 둔스탄과 함께 날카로운 풍자가 담긴 비판적인 기사를 쓰기 시작하자 학교 전체가 놀라움에 휩싸였다.
이 작은 신문은 거의 4주간이나 수도원 전체를 뒤흔들었다.  - P132

교수가 한스를 지목하며 번역을 해보라고 했다. 그런데 한스가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었다.
"뭐 하는 겁니까? 왜 일어서지 않습니까?" 교수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한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의자에 똑바로 앉은 채 고개를약간 숙이고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꿈에서 약간 깨어나긴 했지만 교수의 목소리는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 아득했다. - P132

"기벤라트 군!" 교수가 소리를 질렀다. "지금 자고 있었던 겁니까?"
한스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놀란 얼굴로 교수를 바라보고는머리를 저었다.
"자고 있었군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지금 어느 부분을 공부하고 있는지 말할수 있겠지요? 자, 어느 부분입니까?"
한스는 손가락으로 책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는 어디를배우고 있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면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겠습니까?" 교수가 비꼬듯이 말했다. - P133

"그만 자리에 앉으세요. 수업이 끝나면 내 방으로 오도록 하세요." - P133

한스는 또 동시에 교사의 목소리와 학생들이 번역하는 소리,
그리고 강의실의 모든 사소한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을느꼈다. 그러다 마침내 그 소리들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실제적인 소리로 들리는 것이었다. - P134

"어디 말해봐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정말자고있던 게 아니었나요?"
"아닙니다."
"그러면 왜 기벤라트 군을 불렀을 때 일어나지 않았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P133

식사하기 전에 한스는 다시 호명되어 기숙사로 불려갔다. 그곳에는 교장이 마을 의사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중략). "그냥 지나가는 신경쇠약이에요. 일종의 가벼운 멀미지요. 이 젊은이는 매일 바깥바람을 쐬어야 합니다.
두통에는 제가 몇 가지 물약을 처방해줄 수 있습니다." - P135

다만 곤란했던 건 산책을 나갈 때 하일너가 동행하는 것을 교장이 분명하게 금지한것이었다. 하일너는 분개하여 욕설을 내뱉었지만 어쩔 도리가없었다.  - P135

라틴어 학교 시절 한스는 지금과 달리 더 열정적이고 호기심 깃든 눈으로 세심하게 봄을 들여다보았다. 철새가 돌아오면새의 종류마다 눈여겨보았고, 어떤 꽃이 먼저 피어나는지도 관찰했다. 5월이 되면 드디어 낚시를 시작했다. 지금은 새 종류를 확인하거나 새싹을 보고 풀 이름 맞히기 따위는 하지 않는다. - P136

한스는 책을 읽거나 공부할 때 집중하려고 애써야 했다. 흥미가 떨어지는 내용은 그림자처럼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히브리어 단어들은 수업 시간 30분 전부터 외우고 있어야만 수업시간에도 간신히 기억할 수 있었다. (중략). 한스는 자신의 기억력이 더 이상 아무것도 흡수하려 하지 않고 갈수록 더욱 희미해지고 불확실해지는 것을 느끼며 절망했다. 그러면 - P137

. 한스는 하일너와 함께 기숙사 건물 안을 어슬렁거리며 고향과 아버지와 낚시와 학교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일너는 유난히 말이 없었다.
한스가 떠들거나 말거나 고개를 까딱이며 하루 종일 갖고 놀던작은 자를 허공에서 몇 번 심란하게 휘두르곤 했다. 한스도 점 - P137

"그냥 생각이 났는데, 네가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말이야."
"대체 뭔데 그래?"
"있잖아, 한스 너 여자애를 쫓아다녀 본 적 있어?"
침묵이 흘렀다. 이런 이야기는 그들끼리 해본 적이 없었다.
한스는 주저했지만 이 수수께끼 같은 주제가 마치 동화처럼 그를 잡아당겼다. 그는 얼굴이 빨개지고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느꼈다.
"딱 한 번." 한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P138

"그 후에는! 뭐, 아무 일도 없었지."
하일너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한스는 마치 금지된 정원에서 나온 영웅이라도 보는 듯 친구를 쳐다보았다.
그때 취침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등이 꺼지고 모두 조용해진 후에도 한스는 침대에서 오랫동안 깨어 있는 채로 하일너가 애인에게 키스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 P139

교사들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이상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교장은 얼굴을 찌푸리고 꾸중을 했으며, 동급생들도 이미 한스가 정상의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일등이 되려는 노력을 그만뒀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일너만이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 P139

한스는 날마다 하일너의 연애사 뒷이야기를 듣고 싶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물어보기가 더 어려워졌다. 학생들 사이에서 두 사람은 전처럼 미움을 받았다. 하일너가 <산미치광이>에 악의에 찬 농담을 써댄 바람에 아무도 두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 P140

그러던 어느 날 이번에는 진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그주인공이자 장본인은 이번에도 수도원의 문제아 헤르만 하일너였다.
교장은 하일너가 자신의 금지령을 무시하고 거의 매일 한스의 산책에 동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이번에 한스는 혼내지 않고 주범이자 자신의 오랜 적인 하일너만 집무실로 불렀다.  - P140

다음 날 한스는 공식적인 산책을 하기 위해 전처럼 혼자 나서야 했다. 2시에 산책에서 돌아와 다른 학생들과 함께 강의실에 앉았다. 수업을 시작할 때쯤 하일너가 자리에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힌딩거가 사라졌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지만 이번에는 누구도 그가 수업에 늦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P141

 밤이 깊도록 모든 침실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학생들은 하일너가 물에 뛰어들었을 거라는 가정이 가장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실종된 하일너는 수중에돈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 P141

그 시간, 하일너는 수 킬로미터 떨어진 수풀 속에 누워 있었다. 그는 추위에 떨며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무한한 자유를 만끽하며 좁아터진 새장을 빠져나온 것처럼 팔다리를 활짝 뻗었다. 점심때부터 뛰쳐나온 그는 지금은 크니틀링엔 마을에서 산빵을 뜯어 먹으며 아직 봄기운이 남아 있는 연한 나뭇가지 사이로 밤의 어둠과 별, 빠르게 지나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로 가든 상관없었다. - P142

 하일너는 온갖 농담을동원한 아부로 시장의 환심을 얻더니 급기야 시장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시장의 집에서 햄과 달걀을 푸짐하게 얻어먹고 하룻밤 잠자리도 제공받았다. 그리고 다음 날 하일너는 밤새 그리로 달려온 아버지의 손에 넘겨졌다. 마침내 도망자가 붙잡혀오자 수도원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 P142

교장은 이 심각하고 반항적인 비행 사건에 대해 화려하고 열정적이며 장황한 연설을 했다. 슈투트가르트의 상부 관청에 보내는 교장의 편지는 그보다는 더 온건하고 덜 감정적이며 부드러운 어조로 썼다. 퇴학당한 괴물 같은 아이와의 편지 왕래는 금지되었는데, 한스는 이에 대해 당연하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몇 주 동안 학생들의 주요 화제는 하일너와 그의 도주였다. - P143

 최근에 비워진 자리의 주인공은 이전 주인공처럼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교장만이 두 번째 사건 역시 조용히 처리되길 바라고 있었다. 하일너가 수도원의 평화를 깨는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한스는기다리고 기다렸지만 하일너에게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다. - P143

한 교사는 수업 시간에 한스가 여러 가지 질문에 전혀 답을못하자 이런 말까지 했다.
"어째서 기벤트 군은 그 잘난 친구 하일너와 함께 가버리지 않았지요?"
교장은 한스를 내버려 두었다. 바리새인들이 세리(성경에서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 격인 바리새인들은 세금을 걷으며 횡령을일삼는 세리들을 죄인 취급했고, 부정이라도 탈까 봐 그들을 가까이하지도 않았다-옮긴이)를 쳐다보듯 경멸에 찬 동정심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 P144

5장

한스는 결국 헛되이 괴로워하는 일을 그만두고 모세5경과 호메로스, 크세노폰과 대수학을 차례로 던져버렸다. 교사들 사이에서 자신의 평가가 ‘좋음‘에서 ‘괜찮음‘으로, ‘괜찮음‘에서
‘중간‘으로, 그러다 마침내 ‘나쁨‘으로 점점 떨어지는 것을 별생각 없이 지켜보았다. - P145

가끔은 잠들어 버린 그의 야망을 비꼬는 말로 자극하여 깨워보려고도 했다.
"우리 기벤라트 군께서 주무시는 게 아니라면 이 문장 좀 읽어주십사하고 감히 부탁드려도 될까요?"
교장은 아주 고상하게 불쾌감을 표현했다.  - P146

그런데 한스가 자신의 위엄과 권위적인 눈빛에 매번 힘없이 겸손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점점 불안을 느끼더니 다짜고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 그렇게 멍청하게 웃고나 있을 때입니까? 나 같으면 엉엉 울어댔을겁니다."
그 무엇보다 한스에게 충격이었던 것은 그에게 제발 성실히지내달라고 간청하는 아버지의 편지였다. - P146

고집스럽고게으른 그 성향을 반드시 몰아내고 폭력을 써서라도 한스를 바르게 돌려놓아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한스를 가련히 여기는 지도교사 외에는 누구도 비쩍 마른 소년의 얼굴에 깃든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 P146

게다가 아버지와 몇 명의 교사들, 그리고 학교의 잔인한 야망이 이 부서지기 쉬운 존재를이 지경이 되도록 끌고 왔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도대체 왜 한스는 가장 예민하고 위태로운 소년기에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해야 했을까?  - P147

여름이 시작될 무렵 마을 의사는 다시 한스의 증상이 성장기에 주로 나타나는 신경쇠약이라고 설명했다. 한스가 방학 동안간호를 잘 받으며 잘 먹고 숲에서 산책을 충분히 한다면 곧 나아질 거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상황은 방학 때까지 기다려주지 못했다.  - P147

마을 의사는 자신의 환자가 이런 모습을 보이자 매우 언짢아했다. 그는 환자에게 즉시 요양이 필요하다고 조심스럽게 말하며 정신과 의사에게 진찰받기를 권유했다.
"저 아이는 조만간 무도병 증세도 보일 겁니다."
의사가 교장의 귀에 대고 말했다. 교장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P148

 얼마 전 하일너 사건으로 시끄러웠던 교육청이 이번의 새로운 사고를 또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교장은심지어 이 사고에 걸맞은 연설을 포기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으며 한스가 떠나기 전까지 이상할 정도로 친절을 보였다. 이 소년이 요양을 위해 휴학한 후에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 P148

 하지만 교장은 한스를 격려하려고 "금방 다시 봅시다"라고 진심인 것처럼 인사했다. 이후 교장은 헬라스 방에 들어가 비어 있는 세 개의 책상을 볼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재능 있는 두 학생의 퇴학에 자신도 얼마간 기여한 바가 있다는 생각을 애써 억눌렀다. - P148

풍경이 계속해서 변하면서 고향의 모습과 점점 더 닮아가자 소년은 설렘을 느꼈다. 하지만 고향마을이 가까워지자 마침내 아버지가 떠올랐다. 마중 나올 아버지를 생각하니 민망하고 두려운 마음 때문에 자그마한 여행의 홍이 전부 깨져버렸다. - P149

마침내 한스는 우산과 여행 가방을 들고 서서, 그를 바라보는 아버지와 마주했다. 잘못된 길로 빠진 아들에 대한 실망과 분노는 교장의 마지막 편지를 읽고 당혹감과 황당함으로 바뀌었다. 아버지는 사실 한스가 몹시 아프고 쇠약한 모습일 줄 알았다. 그런데 약간 야위고 쇠약해 보이긴 했지만 아직 건강하고 제 발로 걷는 것을 보니 얼마간 안심이 되었다. - P150

첫날, 소년은 마중 나온 아버지가 혼을 내지 않아 기뻤다. 하지만 곧 아버지가 얼마나 자신을 조심스럽고 근심스럽게 대하는지, 또 그러기 위해 얼마나 눈에 띄게 애쓰고 있는지 깨달았다. 아버지는 가끔 한스를 묘하게 관찰하는 눈빛으로, 때로는 호기심을 감추지 못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 P150

한번은 이런 꿈을 꾸었다. 죽어서 들것에 실려 있는 헤르만 하일너를 보고는 가까이 다가가려 하는데 교장과 교사들이 그를 밀쳐내고 다시 다가가려 할 때마다 아프게 때리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신학교의 교수들과 지도교사들 외에도 라틴어 학교 교장과 슈투트가르트의 시험관들도 있었는데 모두 화난 표정이었다. - P151

 그러다 드디어 하일너가 발을 멈추었는데 가까이 다가온 한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야, 난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어." 그러고는 대단히 큰 소리로 웃으며 덤불 속으로 사라져갔다.
한스는 마른 체구의 잘생긴 남자가 배에서 내려오는 모습을보았다. 그의 눈은 고요하고 거룩해 보였고 손은 아름답고 평화가 가득했다. - P151

 "egisVOTES AUTO TEQLEDQalov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곧 예수를 알아보고 그리로 달려오니)." 한스는 neQuégalov(달려오니)가 어떤 방식으로 변하는 동사인지, 현재형, 명령형, 완료형, 미래형은 어떻게 쓰이는지, 주어가 하나 혹은 둘 이상일 때 어떻게 변하는지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기억나지 않아 두려움에 식은땀까지 흘렸다. - P152

몇 주가 지나자 한스는 라틴어 학교 시절의 마지막 이 년간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의 동창들 중일부는 멀리 떠났고, 일부는 수습공으로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는데 한스는 이들 중 누구와도 친하지 않았다. - P152

마을목사가 한스에게 조금 신경 써주었다면 좋았을 테지만그가 무얼 해줄 수 있었겠는가? 목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지식, 적어도 지식을 향한 열정을 전해주는 것 정도였을것이다. - P153

 한스는 외롭고 버림받은 기분으로 작은 정원에 앉아 볕을 쬐거나 숲에 누워 몽상에 빠지거나 괴로운 생각에 잠겼다. 책을 읽는 것도 별 소용이 없었다.
금방 머리와 눈이 아팠고, 어느 책이든 펼치기만 하면 수도원 시절의 유령과 그곳의 두려움이 되살아나 그를 끔찍하고 숨 막히는 꿈속으로 끌고 들어가 꼼짝 못 할 만큼 무섭게 노려보는것이었다. - P183

그리고 마침내 아름답게 죽을 수 있을 만한 데를 발견해 죽음의 장소로 결정했다. 한스는 그 장소를 자주 드나들었다. 그자리에 앉아 며칠 뒤 사람들이 그곳에서 죽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상상을 하며 묘한 기쁨을 맛보았다. - P154

왜 진작 나무에 목매달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한스는 의아했다. 이제 마음의 준비를 끝냈고 그의 죽음은 결정된 일이었다. 그 사실은 한동안 한스를 편안하게 했다.
멀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그는 마지막 날들 동안 아름다운 햇살과 고독한 몽상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다. - P154

헤어날 수 없게 한스를 짓누르던 상념들은 줄어들었다. 그대신 맥없이 체념하게 만드는 편안하고 게으른 감성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한스는 아무 생각 없이 몇 시간 혹은 며칠을 그냥 흘려보내며 무심하게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 P155

 그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 그 노래를 계속해서 흥얼거렸다.

아, 난 너무 피곤해.
아, 난 너무 지쳤어.
지갑에는 돈이 하나도 없고
주머니에도 아무것도 없네.

한스는 기억에 남아 있는 멜로디를 따라 스무 번쯤 노래했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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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된 잡음

우리는 보통 무작위 잡음 신호를 골칫거리로 여기지만, 생물학적 시스템과 기술적 시스템 양쪽 모두에서 잡음은 사실 기회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로라스피니(Laura Spinney)는 잡음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뇌가 지금의 절반만큼도 기능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 P231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비행경로와 폭탄의 궤적을 계산해야 했던 공군은 비행기가 땅 위에 있을 때보다는 하늘을 날고 있는 동안 장비가 더 잘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 P231

그런데 우연히도 이 주파수 중 일부가 장비에 들어 있는 다양한 가동부품의 공명주파수와 일치해서 가볍게 두드려주는 작용을 하는 바람에 부품들이 더매끄럽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어느 주파수가 중요한 것인지알 수 없었던 기술자들은 공명을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장비 안에 작은 진동 모터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 P231

지금은 진화가 우리보다 선수 쳐서 이 기술을 사용했음이 밝혀지고 있다. 생명은 이미 무작위 신호의 혜택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잡음을 조금 넣어주는 것이 주변 환경에 대한 유기체의 감각을 더 날카롭게 만들어준다. - P232

진화가 뇌 자체에도 디더(Dither) 기능을 포함시켜놓지 않았을까? 사실 이것이 바로 한 신경과학자 집단에서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부분이다. 이들은 ‘고의적 잡음 설계(noisy by design)‘ 신경회로를 찾아냈다고 말한다.  - P232

잡음의 기본적인 정의는 주파수가 뒤죽박죽 섞여 있는 광대역(broadhand) 신호다.  - P232

확률공명은 출력이 입력에 비례하지 않는 비선형계(non-linear system)에 특별히 적용된다. 막전위가 역치에 도달했을 때만 흥분하는 신경세포는 비선형계의 좋은 사례다.  - P233

 가재의 감각유모세포(sensory hair cell)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지느러미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데 난류가 도움을 주는 이유, 희미하게 보이는 이미지를 파악하는 데 잡음이 도움을 주는 이유를 확률공명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점이 밝혀진이후로 외부 잡음을 인간의 수행 능력 향상에 사용해왔다 - P233

하지만 뇌가 확률공명을 이용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잡음을 만들어낸다는 증거는 오랫동안 전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옥스퍼드대학교의 신경과학자 게로 미에센뵈크(Gero Miesenback)가등장했다. 미에센뵈크는 잡음을 발생시켜 뇌 기능을 강화하는 특별한 뇌 회로를 발견했다고 믿는다. - P233

초파리의 후각기관은 커다란 신경회로다. 이 신경회로는 초파리의 더듬이에서 1,200개 정도의 후각 수용체 신경세포(olfactoryreceptor neuron)로 시작한다. (중략)
특정한 냄새에만 반응하는 이 냄새특이성(odour-specific) 후각 수용체 신경세포는 더듬이에서 출발해서 사구체라는 신경절로 모여든다. - P234

하지만 몇 년 전에 신경과학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개별 투사신경세포의 전기적 활성을 기록했더니 가끔은 자신과 연결된 후각 수용체 신경세포가 포착한 냄새가 아닌 다른 냄새에도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 P234

이들은 특정 사구체와 연결된 후각 수용체 신경세포가 모두 소실된 돌연변이 초파리를 가져다가 그 투사신경세포로 다른 입력이 들어오는지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기존에는 몰랐던 ‘사이신경세포(intermeuron)‘의 네트워크가 사구체들을 서로 연결해서 그 사이로 활성을 전달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 P235

이것으로 당장 눈앞의 문제는 해결됐지만 또 다른 의문이 제기됐다. 냄새 수용체와 투사신경세포 사이의 정교한 일대일 대응관계를 망가뜨리는 신호를 보태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미에센뷔크는 이렇게 말한다. "직관에 어긋나 보이죠. 입력이 깔끔하게 잘 분리되어 있는데 거기에 잡음을 섞어서 흐리게 만들 이유가 뭘까요?" 그가 내놓은 가설은 잡음을 추가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것이었다.  - P235

미에센뷔크의 연구진은 막스플랑크 신경생물학연구소의 알렉산더 보르스트(Alexander Borst)가 1983년 발표한 논문도 우연히 접하게 됐다. 이 논문은 사구체들을 서로 연결하는 억제성 국소신경세포의 네트워크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미에센뷔크는 이것이 홍분성 국소신경세포와 반대 효과를 가지고 있어서 후각 수용체 신경세포로부터 오는 강력한 신호를 가라앉히는 역할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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