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을 잡고 앙투아네트는 두 잔의 럼 펀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작은 식탁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녀가 잔을 들어 내게 주더니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라고 말했다.
"행복을 위하여."
내가 대답했다. - P95

"무얼 그렇게 무서워했다는 거요?"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안 무서웠어요. 사실 모든 게 다 무서웠어요."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고, "크리스토핀이에요." 라고 앙투아네트가 말했다. - P96

앙투아네트가 웃었다.
"저 문을 열면 당신이 쓰게 될 작은 방이 있어요. 원래는 옷 갈아입는 방이었어요."
나는 그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 P97

모든 것이 매우 선명한 색깔들을 뽐내고 있지만, 내게는 한없이 낯설기만 하다. 뿐만 아니라 어떤 것도 내게는 의미가 없다. 내가 결혼하게 될 이 여인도 내겐 아무 의미가 없는 사람이다. - P99

나는 나의 결혼 예식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 P100

결혼식 바로 전날 아침이었다. 내가 막 모닝커피 한 잔을 다 마서가고 있을 때 리처드가 프레이저 씨의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일을 진행하지 않겠다네!"
"무슨 일을?"
"자네와 결혼하지 않겠다는군."
"왜?"
"왜 그런지는 말을 안 해."
"무슨 이유가 분명 있을 것 아닌가" - P101

그녀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를 껴안고 키스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시잖아요."
"당신이 나를 믿어준다면 나도 당신을 믿으리다. 어때요? (중략)." - P102

(전략). 나는 옆방에서 들리는 물소리와 웃음소리에 잠을 깼다. 나는 아직도 잠에 취한 채 듣고 있었다.
"내 머리에 향을 많이 바르지 말아요. 그 사람이 좋아하지 않으니까."
앙투아네트의 음성이다. 또 다른 음성이 말했다.
"남자가 향내를 싫어한다구? 난 그런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구먼."
벌써 밤이었다. - P103

"사람들이 이 옷을 ‘조세핀* 스타일‘ 이라고 해요."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1796년에 결혼하여 1804년에 왕후가 된 조세핀 보나파르트는 마르티니크 출신이며 크리올이고, 그녀의 아버지는 대농장의 주인이며 노예주였다. 조세핀은 1809년에 나폴레옹으로부터 이혼당하게 되는데, 앙투아네트나그녀의 어머니 아네트의 운명과 유사한 점이 많다. - P103

"영국이 꿈과 같다는 말이 사실이에요? 내 친구 하나가 영국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그 친구가 그렇게 편지에 썼더라고요. 그 애가 말하기를 런던이란 곳은 때때로 암울하고 냉기로 가득 찬 꿈만같대요. 어서 깨어나 떨쳐버리고 싶은 꿈만 같다고요." - P104

그녀는 말을 멈추고 손을 올려 머리 위에 놓았다.
"슬픈 이야기면 오늘 밤 내게 말하지 말아요."
"슬픈 얘기 아니에요. 어떤 일이 일단 발생하면 그 사건이 언제, 왜 발생했는지는 잊어버린다 해도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은 영원히 존재해요. (후략)." - P106

그녀의 입은 억지로 웃고 있었고 눈빛은 세상과 동떨어진 외로운 사람의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내 팔로 감싸고, 아기를 달래듯 부드럽게 흔들어주었다. 그러고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내가 벌써 잊은 지 오래라고 생각했던 옛날 노래였다.


고요한 밤의 여왕에게 만세,
로빈, 환하게 빛나라, 환하게 빛나라,
네가 죽는 그날.*


*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갈리아 신화에 의하면 로빈(울새)은 ‘거세되지 않은 숫양‘ 혹은 ‘남근‘을 상징한다. 동시에 성의 희열과 희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로빈의 죽음은 여왕과의 성 접촉 후 발생할 복종과 죽음, 거세를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앙투아네트의 왕성한 성욕을 두려워하게 될 로체스터의 고민을 예고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손필드에 불을 지르고 머리칼이 날개가 되어 불사조처럼 날아오를 앙투아네트의 모습을 예고한다고 보는 것이다. - P108

다음 날 아침 내가 잠을 깼을 때 해는 연두색으로 찬란히 비치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녀는 나보다 훨씬 전에 일어난 모양이다. - P108

 내가 빛의 감상을 끝내고 나의 공간에서 침실로 돌아갔을 때, 침실은 아직도 컴컴했고 앙투아네트는 베개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중략). 앙투아네트의 곁을 아직 떠나지 않고 있던 흑인 여인이 말했다.
"제가 만든 황소의 피를 좀 마셔보세요, 젊은 서방님."
그녀가 따라준 커피의 맛은 훌륭했다. 손가락이 길고 가느다란그녀의 손은 의외로 아름다웠다. - P109

그녀가 문 쪽으로 걸어가자 그녀의 치맛자락이 땅에 끌리며 버석거리는 소리를 냈다. 문 앞에서 그녀가 몸을 돌렸다.
"서방님께서 밟아 으깬 협죽도 화환을 치우라고 아이를 보내겠습니다. 그냥 두면 바퀴벌레가 꼬이거든요. 꽃에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젊은 서방님."
"커피는 맛있지만 말투는 고약하군. 게다가 치맛자락은 좀 들고다니지, 마루를 쓸고 다니니 더러워지지 않겠어."
"치맛자락을 끌고 다니는 것은 존경을 표한다는 뜻이에요." - P110

그녀의 조그마한 부채가 탁자 위에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그것을 집어 들더니 몸을 눕히고는 눈을 감았다.
"오늘 아침엔 안 일어날래요."
"안 일어난다고? 아주 안 일어나겠다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날래요. 저도 아주 게을러요, 크리스토핀처럼. 침대에서 하루 종일 일어나지 않고 있을 때가 흔히 있어요." - P111

나는 아주 이른 아침에 연못에 가서 몇 시간씩이고 그곳에 머물렀다. 나무 그늘이 좋아 집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밤에만 핀다는 꽃들도 그곳에 있었다. 그 꽃들은 입을 꼭꼭 오므리고 고개를 숙인채 두꺼운 잎 사이에 숨어 태양을 피하면서 밤을 기다렸다. - P112

"독사야 물론 독이 있지요. 그런데 여기는 독사가 없어요."라더니 곧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알지요? 그들이 정말 알고말하는 걸까요?" 그러더니 "여기 뱀들은 독이 없어요. 물론 없고말고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 P113

"컨설레이션 저택의 주인 남자는 은둔자래요. 그분은 아무도 안만나고, 말도 거의 안 한대요."
그녀가 말했다.
"이웃이 은둔자라? 그거 나하고 잘 맞는군. 썩 잘 맞아."
"이 섬에만 은둔자가 네 명 있어요. 네 명은 진짜예요. 은둔자인척하는 다른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우기가 되면 다 떠나거나 만날 술만 마셔요. 그때 슬픈 일들이 발생하는 거죠."
"과연 이곳은 내가 느낀 대로 외로운 곳이군." - P114

"뱁티스트는 아주 집사 노릇을 잘하고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뱁티스트나 크리스토핀에 대한 나의 생각은 내색하지 않으며, 나는 그녀가 그런 말을 할 때면 동의하곤 했다.
"뱁티스트가 그러는데……………, 크리스토핀이 그러는데. - P115

밤중에 잠이 깨면 밖에는 흔히 비가 내렸다. 변덕을 부리며 가볍게 내리기도 했고, 춤추듯 장난기 어리게 내리기도 했으며, 혹은 소곤거리듯 조용히 오기도 했다. 그러다 점점 소리가 커지면서 비는 끈질기게 내렸다. 강력하고도 냉혹한 소리를 내면서.  - P116

"당신을 알기 전에 저는 살고 싶지 않았답니다. 죽는 게 낫다고 항상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시간을 기다렸는지."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 말을 했소?"
"제가 말을 나눌 사람이나 제 말을 들어줄 사람이 어디 있어야죠. 쿨리브리에서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하실 거예요." - P117

"왜 크리스토핀과 포옹을 하고 입을 맞추고 그러지?"
"그러면 왜 안 되는데요?"
"나 같으면 그 사람들과 껴안고 입 맞추는 짓은 안 할 거요. 아니, 못할 거요."
내 말을 듣고 그녀는 한참 동안 웃었다. 그러나 왜 웃는지 결코 말해 주지 않았다. - P118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녀가 내게 속삭였다.
"만일 내가 죽을 수만 있다면, 지금, 내가 가장 행복할 때, 당신이 날 죽게 해주겠어요? 당신이 날 죽일 필요도 없어요. 그저 ‘죽어라.‘ 하고 말만 하세요. 그러면 제가 죽을게요. 안 믿으시는군요. 그럼 한번 시험해 보세요, ‘죽어라.‘ 하고 말하세요. 그리고 제가 죽는 모습을 보시라니까요."
"죽어, 죽고 싶으면 죽으라니까!" - P119

내가 위험을 느끼는 것은 밤이었다. 나는 위험을 잊으려 했고,
위험을 내 인생에서 밀쳐내려고 했다.
"당신은 안전해."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 주곤 했다. ‘당신은 안전하다‘ 라는 말을 듣는 것을 그녀는 좋아했다.  - P120

만일 그녀를 어린애라고 한다면 그녀는 어리석은 아이가 아니라 고집이 센 아이라고 해야 한다. 그녀는 가끔 내게 영국에 대해 질문을 했고 내가 말해 주는 것을 경청했다. 그러나 내가 무슨 말을 하건 그녀에겐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했다고 나는 확신한다. 영국에 대한 그녀의 의식은 이미 확고하게 결정돼 있었으니까.  - P121

나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끝없이 계속될 것처럼 내리는 비의 졸린 듯한 노래. 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비야, 나를 잠에 빠지게 해다오. 금세 나는 잠들어 버렸다. - P122

"주인님, 이게 오늘 아침 일찍 왔어요. 힐다가 받았어요." 아멜리는 동판 인쇄처럼 얌전하게 겉봉이 쓰인 두툼한 봉투를 내게 주었다. 편지 귀퉁이에 ‘친전, 급‘이라는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이 주변에 산다는 은둔자 중 하나겠지.‘ 나는 생각했다. - P122

나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중략). 마치 내가 이런 편지를 기대하고 있었던 듯이, 아니 아마 나는 이런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 P128

앙투아네트가 말했다.
"그리고 가서 크리스토핀에게 내가 보잔다고 말해."
아멜리가 비질을 멈추고 말했다.
"크리스토핀이 떠난다는대요." - P128

앙투아네트가 갑자기 침대에서 뛰어내리더니 아멜리의 따귀를 때렸다.
"나도 너를 때릴 거야, 이 흰 바퀴벌레야. 나도 너를 때릴 거야."
 거아멜리가 정말 앙투아네트를 쳤다.
앙투아네트가 그녀의 머리칼을 휘어잡았다. 아멜리는 이를 악물더니 이번에는 앙투아네트를 이빨로 물려고 덤볐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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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겐이치의 의자가 뒤로 쓰러졌다. 비명소리.
"이상해, 이상해, 아까부터 그 말뿐이네."
케이시가 심하게 다리를 떨면서 불평했다.
"맞아. 그게 바로 답이거든." - P56

"숀이 다리 위에 쓰러져 있던 건 틀림없어. 그렇다면 이 이어폰은 범인이 일부러 남겨둔 가짜 단서였다는 말이 돼. 범인은 다리 아래로 이어폰을 떨어뜨림으로써 손이 그곳에서 공격당한 것처럼 보이게 한 거야. 바꿔 말하면, 사실 손은 그곳에서 공격당하지 않았어. 하지만 어째선지 숀은 그 사실을 숨기고 있지." - P57

"마치 직접 목격한 것처럼 말하는데, 증거 있어?" - P58

"숀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건데?"
야스가 뒤에서 머리카락을 비비 꼬며 말했다. - P59

내가 내뱉은 말에서 신물이 났지만, 나는 계속했다.
"숀이 돌아오면 지금 내가 말한 건 전부 잊어줘. 그리고 가능하면 모두 조금씩 숀에게 말을 걸어줬으면 해."
창문에 바람이 부딪혔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스토브 팬이 돌아가는 소리만 크게 들렸다. - P60

"방금 영상에서도 보셨다시피 침팬지 릴리가 연구원 흉내를 내며 문의 키패드를 조작한 결과, 비밀번호가 적중한 것이 이번 탈출 사고의 원인입니다."
열두 명의 하원의원과 서른 명의 방청객에 둘러싸인 채유성제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중략).
"제멋대로 누른 숫자 조합이 우연히 1/10⁵의 비밀번호였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 P61

다만 센터의 존속이 공공안전위원회의 평가에 달린 이상,
그런 속내를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기적 같은 우연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밖에요."
웃기지 마. 신의 뜻으로 돌리려는 거냐. - P62

센터장인 자신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한다면 센터는 즉시 폐쇄될 것이다. 성제는 시선을 내리깔고 땀에 젖수 은 손수건을 움켜쥐었다.
"제 위험 예측이 미흡했던 것 같습니다." - P63

소현은 성제의 여동생이다. (중략), 그사이에 한국 교육부의 정책보좌관으로 취임했다는 듯, 5일 전부터 여당 의원과 함께 뉴욕을 방문한 상태였다. - P64

"전라남도 무안의 승호라는 아이, 들어본 적 있어?"
성제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소현은 안경을 밀어 올리며 그렇게 물었다. 성제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핫한 천재 소년이야. 불과 열 살에 서울대에 수석으로 합격했어." - P65

대규모 부정행위가 발각된 2004년 이후, 한국의 대학 입시에서는 철저한 방지 대책이 시행 중이다. 물론 빠져나갈길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열 살에 서울대학교에 수석 합격하는 것은 상식과 너무 동떨어졌기에 오히려 더욱 그럴싸하게 느껴진다.  - P65

"좀 진지하게 들어!" 소현이 허벅지를 걷어찼다. "날짜를봐. 승호가 마법에 걸린 게 2월 24일. 그리고 아이오와의 방사장에서 침팬지 릴리가 탈출한 게 2월 25일. 바로 다음 날이지." - P66

"승호가 각성하기 나흘 전인 2월 20일. 한 남자의 연설이서구의 지도자들을 혼란에 빠뜨렸어."
어?
"아프리카의 사자, 가다이 대령 말이야. 라빌리 공화국의독재자. (후략)." - P67

"가다이는 이미 그 정체를 밝혔어. 그는 TV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지. 이 무기는 시대의 흐름을 바꿀 것이다."
소현은 허공에 ‘time‘이라고 적었다. - P68

소현은 바 테이블에 양 팔꿈치를 올리고 상반신을 앞으로내밀었다.
"라빌리군의 기술자들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겠지. 그들은 신무기 작동에 실패했다고 믿고 같은 조작을 반복했어.
그 결과 비슷한 시각에 같은 현상이 연이어 발생했어. (후략)." - P69

5

(전략).
"이번부터는 규칙을 바꾸겠다. 시험지를 회수하는 건 타이머가 울리고 나서야. 다 풀고 나서도 끝날 때까지 답안을 검토할 것"
선생님이 잠시 나를 쳐다보고는 곧바로 눈을 돌렸다.
책장에 머리를 부딪힌 그날, 나는 과학 시험지를 2분도 안되어 제출했다. 내 답안이 너무 빨랐기에 이래서는 체면이서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 P71

전어는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고는 몇 번이고 복도를 둘러본 후 내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
"료타, 너 진범에게 속은 것 같아." - P72

"내가 진범을 알아차리게 된 계기는 이거야."
전어는 주머니에서 유리 조각을 꺼내서 기쁜 듯 저녁노을에 비췄다.
"료타와 하늘신 공원에 갔을 때 번개 연못에서 주운 거야.
경찰 아저씨에게 귀가 찢어지도록 혼이 났지만, 어떻게든유리 조각을 들키지 않고 넘겼어." - P73

"나는 그날 다리 밑에서 잉어가 헤엄치는 걸 봤어. 사건이있던 밤, 연못이 얼었다면 잉어는 다 죽었을 거야."
"물 전체가 얼었다고는 말하지 않았어. 수면만 얼었던 거야. 우리가 빙어 낚시를 했던 시치로가타 호수에서처럼." - P74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어. 우리가 사건 다음 날 공원에갔을 때, 이미 연못에 얼음은 없었어. 해가 뜨고 우리가 수업을 듣는 사이에 녹은 거지. 그럼 고드름은 어떨까? 그만큼의 시간이 지났으니 이쪽도 꽤 녹아서 작아졌을 거야. (후략)." - P75

"료타의 추리는 잘못됐어. 이 사건에는 범인이 있어. 그 범인이 창문의 금이라는 가짜 단서를 남기고 숀이 자작극을벌인 것처럼 꾸민 거야.
그렇다고 해서 숀을 공격한 직후에 창문을 깬 건 아니야. (후략)." - P76

"손이 공격받았을 때 연못 물은 꽁꽁 얼어 있었어. 범인은얼음 위에 올라선 채 다리 밑에 숨어 있었어. (중략). 숀은 키가 작아. 머리 꼭대기는 어렵더라도 목덜미라면 키가 작은 나도 할 수 있었을 거야."
(중략).
전어는 이제 바보가 아니다. - P77

"이상하다는 생각에 풍뢰교 위에서 공원을 바라봤어. 그랬더니 바람 연못에 녹색 유리 조각이 흩뿌려져 있는 게 보이더라고. 전날에는 번개 연못에 있었던 병 조각이 바람 연못으로 이동한 거야." - P78

"왜 범인은 범행 다음 날 갑자기 생각을 바꿨을까. 마치 갑자기 머리가 좋아진 것처럼 말이야. 그것도 살짝 머리가 좋아진 수준이 아니야. 평범한 사람은 이렇게 복잡한 생각은 하지 않으니까. 고작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머리가 변할 수 있는 걸까?" - P79

당황한 듯 난간을 잡고 병원 주변을 둘러보았다.
"숀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범인은 다시 숀을 죽이려고 할지도 몰라. 철저하게 경비하지 않으면 위험해."
나는 눈을 감았다. 숨을 멈추고 주먹을 쥐었다.
명탐정이 여러 명 있는 것은 이상하다. 단 한 명이기에 명탐정은 명탐정이 될 수 있다. - P80

이것이 나의……………. - P80

학년 소식지 원고를 다 쓴 후, 구보 후키코는 안경을 벗고양어깨를 번갈아 주물렀다.
어느새 오후 9시가 지나 있었다. 젊은 교사가 자진해 교내순찰을 나간 탓인지 교무실은 완전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 P81

"혹시 최근에 5학년 3반에서 시험 본 적 있으세요?"
다라야마는 동요하지 않고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구보는5학년 수학을, 다라야마는 과학을 담당한다.
"시험은 안 봤는데."
다라야마의 책상에는 채점이 끝난 시험지가 쌓여 있었다. - P82

부정행위인가.
"전어지?"
머릿속에 떠오른 별명을 입에 올렸다. (중략).
다라야마는 할 말을 찾듯 허공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저희 반, 평소에는 평균 65점 정도거든요. 그런데..
도움을 구하듯 이쪽을 바라본다.
"오늘 시험, 전부 만점이었어요." - P83

1

‘참다운 신사는 자신의 결점을 고백한다.‘ 프랑스의 격언에 따르면, 침입자들은 틀림없는 신사였다.
2030년 6월 24일. (중략), 투루울 산기슭 평원에 살던투바족 사냥꾼 여덟 명이 이를 알지 못한 채 구조물에 접근했고, 그 직후 모습을 감췄다. - P87

. 이들은 구조 직후, 자신들을보호한 양국 군인에게 ‘고차원 생명체‘를 자처하는 뿔 달린 존재에게 붙잡혀 있었으며, 그들로부터 일곱가지 전언을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후략). - P88

7월 3일, 고차원 생명체 비행선은 고도 1만 5천 미터까지상승하여 성층권을 지나 1구역의 중앙 부근에 위치한 몽골 허브드 주의 락타르 평원에 착륙했다. - P90

64명이 끌려간 지 32일이 지난 8월 4일. 다시 락타르 평원에 비행선이 착륙했고, 고차원 생명체 70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비행선 내에서 복제한 것으로 보이는 대량의PKM 기관총으로 1구역을 습격, 약 15시간 만에 3천300만명을 살해했다.  - P91

와플대학국방장관은 통합참모본부의 일원인 육해공군 장관, 우주군 작전부장, 해병대 종합사령관을 비롯해 기계공학자, 분석화학자, 소립자물리학자, 면역학자, 동물행동학자 들을 불러들여 특별국방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는 고차원 생명체를 고트Goat, 고차원 생명체 비행선을 팬파이프라 명명하고, 그들이 7구역에 나타날 예정인 2031년 1월 16일까지 공격을 회피할 방법을 모색하고자 했다. - P92

투바족의 전언에 따르면, 고트는 규칙에 대단히 얽매인다고 했다. 그렇다면 비행선 착륙 지점에도 인류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닐까. - P93

더는 물러설 곳이 없게 된 6구역에서는 마지막 카드인 ‘헤르메스 계획‘이 감행되었다. 무대는 일본 이즈 반도. 여기에서는 하버드대, 스탠퍼드대, 매사추세츠공대에서 선발된 아시아계 성적 우수자 50명이 투입되었다.
그들의 무기는 ‘지성‘이었다. - P94

2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상사를 마주치는 것만큼 기분 나쁜 일도 없다. 가령 인류 멸망이 눈앞에 다가왔다 해도 그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마터면 길거리 갱단을 치어 죽일 뻔했네."
옛 아메우라 경찰서장인 구스카미 신페이는 18년 전과 변함없이 세상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P96

"구스카미 씨야말로 용케 무사하셨네요. 일본인은 6구역과 7구역에서 전멸했다고 생각했는데요." - P97

"나는 지금 케냐 정부의 긴급안전보장팀에 속해 있네."
구스카미는 다시 한번 도키요의 안대를 바라본 후 한잔에 5랜드의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직함은 그럴싸하지만 사실은 그저 어중이떠중이를 모아놓은 거야. 잘 알겠지만 우리 대통령과 여당 의원들도 7구역에서 모두 목숨을 잃었어. (후략)." - P98

"그 사건 관계자 중 6구역의 공격을 피한 자가 한 명 더있네. 쓰노 기미코야."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쓰노 기미코는 그 사건의 주범이었다. 체포되고 3년 만에사형 판결이 확정되었다. (중략).
구스카미는 안대를 차지 않은 내 오른쪽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남아프리카를, 아니, 전 인류를 구할지도 몰라." - P99

‘기미코씨‘와 ‘다카시 씨‘에게 괴롭힘을 당해 아빠가 죽을것만 같다. (중략).
도키요는 반신반의했다. 소녀는 둘째치고 성인 남성인 아버지까지 누군가에게 감금당했다고 믿기는 어려웠다. 소녀가 어린아이다운 착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P101

"맞은편 공사 소음이 너무 심하죠? 밤에는 공사하지 말라고 해도 멈추지 않아서 다들 잠을 못자 힘들답니다."
기미코는 말을 쏟아냈다. 명백하게 화제를 돌리려는 듯 보였다. - P102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열었다.
브라운관 TV, 녹슨 선풍기, 물때 낀 수조, 잡다한 물건을가득 쌓아놓은 방.
그곳에 한 남자가 있었다. - P103

도키요는 죽지 않았다.
의식을 되찾는 데 3일, 그리고 기억을 회복하는 데 2주 정도가 걸렸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수사 보고서에 따르면 현장에서 발견된 탄환은 두 개였다. 하나는 창문을 관통해 바깥 화단에 박혔고, 다른 하나는창고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 P104

뒤쪽 도로에서 착암기 공사가 진행되고 있던 탓에 이웃대부분은 파이프건의 발포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대각선 맞은편 연립주택에 살던, 철거 작업자 청년만이 착암기와는 다른 울림을 깨닫고 창밖을 내다보았다고한다. - P105

"쓰노 기미코의 무기가 뭐라고 생각하나?"
윗입술에 묻은 포도주를 핥으며 구스카미는 말을 이었다.
"말이야. 기미코는 말로 상대의 방어벽을 허물고 마음을사로잡아 자기 뜻대로 조종하지. (중략). 사회 규범상 그녀는 악인이지만, 희귀한 능력의 소유자인 건 틀림없네." - P107

기미코의 무기는 말. 그것은 도키요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경찰에게 폐를 끼치는 나쁜 어른이 되지 말라고 애를 혼내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죠."
사건이 발각되기 9개월 전, 알몸으로 물을 뒤집어쓴 아이가 있다는 신고를 받고 찾아간 도키요에게 그 여자는 그렇게 말했다. - P108

창문 밖에서 총성이 울렸다. 구스카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구스카미 씨는 9구역 샘플에 기미코를 끼워 넣으려는 건가요?"
"맞아. 조지 웰스의 외계인을 멸망시킨 세균처럼 말이야."
"그녀가 체포된 건 18년 전이에요. 이미 꽤 늙었을 텐데요?" - P109

전기가 없는 생활은 사람을 규칙적으로 만든다. - P110

만약 그때 이 커튼을 움켜쥐고 끌어내리지 않았다면, 후배경관이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고 도키요는 지금쯤 콘크리트와 함께 드럼통에 들어 있을 것이다.
아니, 아니다. 도키요는 커튼을 움켜쥐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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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사건

3월 1일 오후 7시경. 고테자키 시 우에베 정 4초메의 한 공원에 아동 3명이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됐다. 3명 모두 얼굴과 목에 자상을 입었으며 의식 불명 상태다. 우에베 정에서는 지난달에도 아동이 괴한에게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해 경찰은 순찰을 강화한 상황이었다.

고테자키 신보 온라인(3/1 19:55) - P7

"겐이치 군은 고테자키 초등학교 5학년 3반 학생이지요?"
"네."
"오늘 학교는?"
"휴교예요."
"겐이치 군은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 P9

"우리 반에는 명탐정이 있거든요." - P9

2011년 1월 10일, 북아프리카 라빌리 공화국의 항구도시 베르그지에서 경찰조직에 대한 항의 시위가 열렸다. (중략).
무장 경찰에 맞서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SNS에서 주목받으며 시위는 곧장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 P10

2월 1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서방 각국 주도로 시민에 대한 라빌리 정부의 무력행사를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고, 정부 자산 동결, 정부 고위 관료의 비자 발급 중지 등의 제재도 가해졌다. - P11

1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왔다.
전어가 소풍비를 도난당한 것이다.

지난 겨울방학, 나는 명탐정이 되기로 결심했다. - P12

마치 지옥 같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붓토비맨을 보는 동안 이 나라에서는 범죄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나는 고타쓰(일본의 난방 기구-옮긴이) 속으로 파고들었다.  - P13

아빠는 눈을 두 번 깜빡이더니 말했다.
"료타의 꿈이라면 웬만한 건 다 응원할 생각이지만, 경찰은 안 돼. 절대 허락 못 해."
한쪽 발로 서서 신발을 벗으며 아빠는 "세무서 직원도 마찬가지야"라고 덧붙였다. - P14

하지만 탐정의 길은 험난했다. 나는 곧장 벽에 부딪혔다.
아무리 기다려도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사 요령이나 추리 팁은 어떤 책에 실려 있었지만, 사건을 만나는 방법은 적혀 있지 않았다. - P15

2월 사건은 발생했다.

"선생님, 이거 가져왔어요."
전어는 3단으로 접힌 납부 봉투를 펴더니 셀로판테이프를 떼면서 "소풍비예요"라고 말하며 교탁에 올려놓았다.
(중략).
"지금 장난치는 거냐?"
무뚝뚝하게 봉투를 집고는 안을 들여다본 다라야마 선생님이 봉투를 도로 내밀었다.
"(중략)
"저요?" 전어가 눈을 크게 떴다. "저는 장난 안 쳤는데요." - P16

이날의 버스비로 1월 중에 한 사람당 천 엔을 학교에 납부하기로 했다.
"내일까지 돈 안 가져오면 내년 수학여행 때 너만 교실에서 자습이다."
계속 돈을 가져오지 않는 전어를 보고 인내심이 바닥난다라야마 선생님이 어제 종례 시간에 그렇게 경고했다. - P17

내가 신경이 쓰인 것은 그 셀로판테이프였다.
(중략). 전어가 테이프를 뜯어낸 것은 거기에 진짜 돈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전어는 실제로 소풍비를봉투에 넣어두었다. - P18

"내가 소풍비를 훔친 범인을 찾아낼게."
나는 선언했다. 붓토비맨의 엔딩처럼 점퍼가 바람에 멋지게 나부꼈다. - P19

"그런데 오늘 아침에 지각하고 말았어. 원래는 조회 시간에 선생님께 내려고 했는데 늦어서 못 드렸지. 그래서 종례시간에 내게 된 거야."
조회 시간에 전어가 없었던 것은 나도 기억하고 있다. - P19

조회 시간을 알리는 음악이 끝난 후, 선생님이 야스의 책상에 지갑이 놓인 것을 보고 "딱히 필요도 없는데 학교에 돈가지고 오지 마" 하고 야스를 꾸짖었다. 야스는 불량 학생이다. - P20

"왜 지각했는데?"
"왜였지." 전어는 코 밑을 긁적이더니, "아, 맞다!" 하며 뒷주머니에 손을 넣고 2센티미터 길이의 유리 조각을 꺼냈다. "이거 하수구에 떨어져 있던 걸 발견하고 주워왔어." - P20

"오늘 소풍비 가져온 거, 누군가한테 말했어?"
전어는 "흐음" 하고 이마를 찌푸리더니 말했다.
"케첩한테만 말한 것 같아." - P21

추리할 재료는 갖춰졌다. 이제 남은 일은 그것을 어떻게조합하는지다.
아버지는 "뭐 하는 거냐?" 하고 이상한 표정을 지었고, 다라야마 선생님은 "멍 때리지 마" 하고 머리를 두드렸지만,
나는 추리를 멈추지 않았다. - P22

숀이 목에 건 이어폰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누군가가 전어의 봉투에서 돈을 빼갔다고 해도 그게 우리반 학생의 소행이라고 단정할 순 없잖아?"
숀은 전학생이다. - P23

나는 이때다 싶어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반 아이들은 그날 전어가 소풍비를 가지고 왔다는사실을 몰랐어. 하지만 우리 반은 달라. 전날 종례 시간에 선생님이 내일은 꼭 소풍비를 가져오라고 전어에게 신신당부했어. 범인은 그걸 들었기에 다음 날 전어의 돈을 훔칠 수있었던 거야." - P24

"그럼 범인은 언제 전어의 소풍비를 훔쳤을까? 봉투를 꺼내는 것뿐 아니라 그걸 반바지 주머니에 되돌려놓을 수 있는 상황이어야 해. 그런 절호의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어."
나는 교단에서 내려와 칠판 옆에 걸린 시간표를 가리켰다.
"2교시 체육 시간 전의 쉬는 시간." - P26

"그날 아침 조회 시간을 떠올려봐. 다라야마 선생님이야스를 혼냈지. 용건도 없는데 학교에 돈을 가지고 오지 말라고 말이야. 그때 선생님은 야스의 지갑에서 5천 엔짜리 지폐를 꺼내서 모두에게 보여줬어. 범인도 그걸 봤을 거야. 여기서 의문이 생기지. 범인은 탈의실에 있는 모든 남학생의 옷에서 물건을 훔칠 수 있었는데, 왜 야스의 5천  엔이 아니라 전어의 천 엔을 가져갔을까?" - P27

"이 봉투에는 접힌 자국이 세 개 생겨 있어. 종이를 3단으로 접었을 때 생기는 자국은 두 개야. 그런데 왜 이 봉투에는 접힌 자국이 하나 더 있을까?"
봉투를 바라보았다. 듣고 보니 그 말이 맞았다. - P28

"잠깐만. 전어의 주머니에 구멍이 있는 걸 숀이 어떻게 알아?"
라부카가 큰 목소리로 물었다. - P29

"전어, 너 혹시 선생님께 소풍비를 가지고 오라는 소리를듣고 그날 밤 봉투에 천 엔 지폐를 넣은 채로 현관에 놓아둔거 아니야?"
전어는 몸을 기울이다 벽에 머리를 부딪혔다. "그, 그렇긴한데." - P30

"전어가 잠든 후, 아버지는 현관에서 봉투를 발견했을 거야. 그날 아버지에게 천 엔은 무척이나 큰돈이었겠지. 아버지는 봉투에서 천 엔을 빼낸 후, 전어가 눈치채지 못하게 학년 소식지를 대신 넣어둔 거야." - P31

2011년 2월 25일, 아이오와 영장류 연구센터의 제4관찰실에서 침팬지 두 마리가 탈출했다. - P31

그날은 조지 워싱턴 초등학교 학생 154명이 센터를 견학하는 날이었다. 침팬지 두 마리는 송전탑에서 전시동 입구를 내려다보며 아이들을 위협하는 행동을 보였다. - P32

이 사고는 조지 워싱턴 초등학교 학부모들을 분노케 했을뿐만 아니라 전 세계 영장류 연구자들을 경악시켰다. (중략).
침팬지 탈출 사고는 드문 일이 아니다. - P32

침팬지 탈출에 대한 대책을 세울 때는 다른 종의 그것과는 수준이 다른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침팬지는 인간을관찰하고 출입 방법을 이해한 후 이를 실행에 옮기기 때문이다. - P33

 주임연구원 유성제가 리더를 맡은 안전관리팀이 설계,
개발한 것이 수치계산식 잠금 시스템CNL이었다.
직원은 방사장을 출입할 때 숫자 키패드로 비밀번호 다섯자리를 입력한다. 이 번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세 가지 변수-그날의 날씨W, 월M, 요일D-를 포함하는 2차 방정식으로 정해진다. - P34

유성제는 경악했다.
릴리는 단 한 번의 입력으로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마치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숫자의 개념조차 알지 못하는 릴리가 어떻게 자물쇠를 풀수 있었을까? - P35

2

내 비명소리에 잠에서 깼다.
(중략).
아주 이상한 꿈이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시간이 멈춘 걸까. 아니, 시간이 꽉응축된 것 같다. - P35

오늘은 2월 24일, 소풍비 도난사건으로부터 2주가 지났지만, 나는 아직 실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명탐정이 되기로 결심한 지 어언 1년. 드디어 첫 사건을만났는데, 나는 그만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점찍고 말았다. 그뿐 아니라 아마추어에게 잘못을 지적받고 사건 해결의 영광을 빼앗기기까지 했다. - P36

"선생님, 숀이 없어요!"
(중략). 다라야마 선생님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그 녀석은 결석이야"라며 출석부를 덮었다.
"도쿄로 돌아간 건 아니죠?"
라부카가 과장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순간 기분 좋은 상상을했다가 금세 그런 자신이 한심해졌다. - P37

틀림없다.
내 머리에 이상이 발생했다.
(중략).
머리를 부딪혀서 바보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 걸까.
나는 30초 만에 모든 문제를 다시 검토하고 시험지를 교탁으로 가져갔다. - P38

종례 시간.
"숀은 어젯밤에 괴한에게 습격당했다."
급식 시간까지는 운동복 차림이던 다라야마 선생님이 의자에 걸쳐놓았던 재킷을 입고 말했다.
(중략).
"주, 주, 죽었나요?"
"시민병원에 입원했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한다."
모두가 선생님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 P39

전어는 요즘 신바람이 나 있었다. 반 친구들이 다들 갑자기 상냥해졌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소풍비를 가져갔다는 사실을 알고는 역시나 불쌍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몽당연필이나 입지 않는 옷을 전어에게 선물하거나, 급식을 만화에서처럼 푸짐하게 퍼주거나, 공원에서 조금이나마 놀이에 끼워주곤 했다. - P40

"숀을 때린 범인을 잡을 거야."
전어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불가능해. 료타는 소풍비를 훔쳐 간 범인도 알아내지 못했잖아.‘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 P41

3

(전략).
테이프를 넘어 공원에 들어서자 발밑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지면에 서리가 내려 있었다. 우리는 소리를 내지 않도록 연못 주변의 돌을 따라 풍뢰교로 향했다.
"명탐정의 철칙, 그 첫 번째, 추리는 현장에서 시작된다.
현장을 구석구석 조사해야 해. 숀을 공격한 범인도 분명 단서를 남겼을 거야." - P42

다리를 지탱하는 나무 중 하나에 전선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중략).
그것은 숀의 이어폰이었다. 얻어맞고 쓰러질 때 다리에서떨어진 것이리라. - P44

그 이어폰의 정확한 모양은 잊어버렸지만 숀의 이어폰이완전히 다른 구조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 P45

며칠 전 내가 공원에 왔을 때 저런 금은 없었다. 관리 창고앞에서 솔방울을 주운 덕에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저 유리창을 깬 것은…………,
퐁당. 물에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중략). 아무래도 반짝이는 것을 발견한 듯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연못 여기저기에 녹색 유리 조각이 가라앉아 있었다. - P46

명탐정의 철칙, 일곱 번째. 경찰은 적이 아니다. 친밀하고원만한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런 일로 경찰관에게 미움받으면 안 된다.
"내일 보자!" - P47

다음 날, 2월 25일,
(중략).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졌나요?"
라부카가 둥글게 만 책받침을 움켜쥐었다.
"아니. 숀은 범인을 보지 못했다."
다라야마 선생님은 고개를 저었다. - P47

야스가 스마트폰을 치우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머지 두 명도 고개를 들고 희미하게 심술궂은 미소를 보였다.
"뭐야, 탐정맨."
"이거랑 같은 이어폰 가지고 있지?" 나는 주머니에서 숀의 이어폰을 꺼냈다. "어떻게 쓰는지 좀 알려줘." - P49

"경찰은 숀을 공격한 범인을 찾지 못했어!"
이를 악물고 소리를 질렀다.
(중략).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야."
야스가 돌아보았다. 분노와 어이없음이 반쯤 섞인 이상한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진짜 미쳤어?"
"숀을 위해서야. 제발, 이렇게 부탁할게." - P50

4

방과 후.
나는 다시 교탁 앞에 섰다.
"숀을 공격한 범인을 알아냈어."
모두가 나를 보고는 곧장 눈을 돌렸다. ‘아직도 그런 말을하는 거야?‘, ‘쳐다보는 내가 다 부끄럽다. 대부분의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 P51

"즉, 이런 뜻이야?" 겐이치가 콩가를 두드리듯 책가방을두드렸다. "숀이 거짓말한 거구나." - P53

"이렇게 된 거 아니야?" 마리코가 공기를 뒤섞는 듯한 제스처를 했다. "숀이 쓰러졌을 때, 이어폰은 강에 떨어졌어. 이윽고 경찰이 손을 발견했어. 경찰은 다리 주변을 살피다가 강에 떨어져 있던 이어폰을 찾았어. 그리고 그걸 주워서 나무에 걸어뒀어. 코드에 피가 묻어 있지 않은 건 한번 강에 떨어져서 피가 씻겨나갔기 때문이야."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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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 칠판에 내 이름을 쓰고 계십니다. 끽끽 소리를 내면서, 내 이름은 어느새 선생님의 분필 아래서 짓밟히고 있습니다. - P9

5학년 3반의 새로운 친구입니다. 모토미야 안이랑 다들 사이좋게 지내요. 선생님은 나를 아이들에게 잘 봐달라고 부탁합니다. 실은 나에게 아이들을 잘 봐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 P10

나와 같은 나이의 아이들이 나를 좋아하는 것은 아주 귀찮습니다. 하지만 싫어하는 것은 더 싫습니다. 학교생활이 원만하지 않으니까요. - P11

내가 새로운 학교 생활을 맞는 건 항상 봄이 아닌 다른 계절입니다. 학년이 시작되는 봄은 누구든 나하고 같은 입장이기 때문에 새로운 기분이 들지 않습니다. - P11

다행히 우리 아버지는 무척 전근이 잦은 일을 하고계셨기 때문에, (후략).
내가 새로운 학교로 옮기는 때는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1학기가 끝나고, 나는 교실의 아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합니다.  - P12

여름방학 동안 나와 나의 가족은 다른 곳으로 이사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런저런 잡다한 일로 바쁘지만, 나까지 그런 일들을 해야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 P13

누가 하늘을 파랗다고 했을까요. 짙푸른 초목들이 나를 위협하는 숲 속에서 내 머리 위는 온통 붉은 빛입니다. - P13

(전략).
새 학기가 시작되기까지의 나는 그런 식으로 나날을보냅니다. 짧은 기간 동안 무구함을 즐기면서 고독을 한껏 맛봅니다. - P15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절대 사투리를 익히지 않았습니다. 무리해서라도 그 지방의 말을 쓰면 친구들이 쉽게 모인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 P16

이곳 아이들은 확실히 알아차릴 만한 사투리를 쓰는건 아닙니다. 다만 말에 억양이 없습니다. 그런 것이 명백히 시골 아이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걸 결코 경멸하지는 않았습니다. - P17

"치마에 세로로 단추가 달렸네.
"어쩜, 멋있다."
"머리는 전부터 길렀니?"
"네가 땋았니?"
나는 매일 옷 생각만 하는 언니와 소녀 취향의 엄마가 해주는 대로 하고 다녔기 때문에, 언제나 예쁘게 꾸민 차림이었습니다. - P18

질투 같은 건 생각도 못 하는 그 애들의 순박함에 나는 감사했습니다.
"계집애 냄새 난다.‘
남자아이들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애들이 결코 그걸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게 어때서. 난 계집애인걸." - P1

(전략). 아무래도 이 젊은 선생님은 여자아이들 사이에 인기가 있는 모양입니다. 남자아이들한테도 마치 친구처럼 대하는 이 선생님은 요시자와 선생님이라고 했습니다. 남자 - P20

"너, 이제 학교에는 익숙해졌니?"
언니가 나한테 물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요 며칠 사이 반 아이들이 나를 받아들였다는 것을느꼈던 것입니다. - P21

학교 생활은 나를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잠들때처럼 기분 좋게 교실 한구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매일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급식 때 묽은 우유를 마셔야 되는 것 빼고 내가 싫어하는 시간은 없었습니다. - P21

선생님들은 나를 보기만 하면 미소를 지으면서 다른 아이들 앞에선 의식적으로 약간 엄한 태도를 취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 P22

나는 인간을 어른과 어린애로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물론 실제로 나이를 먹었는지 아닌지는상관이 없습니다. - P23

우리 반 아이들 중에는 어린애가 많아. 그렇게 생각하며 교실을 둘러보다. 가끔씩 어른을 발견하고 놀라곤 했습니다. 내 옆자리 뒤에 앉아 있는 남자아이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보통 악코라고 불렸지만, 그 애의 진짜 이름은 아쓰히코였던 것 같습니다. - P24

악코는 내가 보낸 메모를 남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필통 속에 감췄습니다. 그 애한테서 비슷한 쪽지가 오는 일은 없었습니다. 나는 그 때문에 더욱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 P25

나는 그렇게 기분 좋은 인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중략).
원인은 요시자와 선생님이었습니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 P26

. 왜 자신의 호의를 나한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까지 알리고 싶어 하는 걸까요. 잔잔하던 내 인생이 서서히 파괴되는 걸 느낍니다. - P27

처음에 나선 건, 반장인 에미코라는 여자아이였습니다. 그 전부터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는 이미 음습한 공기가 차올라 출구를 찾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 P27

"잘난 척하기는."
언제나처럼 남자아이가 내 머리를 잡아당기고 있을때, 에미코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 P27

에미코가 특히 요시자와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걸 나는 처음부터 눈치 챘습니다. 에미코는 선생님이 화내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말대꾸로 관심을 끌고, 선생님의 눈이 자신을 향하면 비로소 호의를 나타내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 P28

 나는 결코 그 애를 좋아하는 않았지만, 고마웠던 건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아이가 한 사람 있으면 나같은 아이는 살아가기 쉬우니까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촌스러운 그 애를 우습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 P29

어느 날 한 아이가 결석했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침통한 표정으로 그 아이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말했습니다. (중략). 에미코였습니다. 그녀는 우리가 당황해하는 사이대성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문득 악코를 떠올리고 슬쩍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중략). 나는 왠지 기뻐져서 쿡, 하고 웃었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뭐가 우습니? 모토미야 안!"
선생님이 이마의 힘줄을 푸르르 떨면서 나를 노려보지 않겠습니까. - P30

그래도 그렇지, 내가 우는 시늉 따위를 하게 만들다니. 나는 나도 모르게 선생님을 미워하게 될 것 같았습니다. 나는 다들 왜 그렇게 슬퍼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 P31

. 아이들이 나를 외톨이로 만들기까지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잘난 척하기는. 그것이 그녀의 첫 ‘곡성‘이었습니다.
다음 날 학교에 가자, 주위 공기가 급격히 팽창해 내가 있을 자리를 좁히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 P31

한 남자아이가 내 옆을 지나가면서, 아이구 냄새야.
하고 말했습니다. (중략).
"계집애 냄새가 풀풀 나네."
(중략).
참다 못한 나는 지치지도 않고 또다시 다가온 한 남자아이한테 말했습니다.
"네가 훨씬 냄새 나!"
남자아이는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순간 멈칫했습니다. (중략). 그 애 네 집은 생선 가게였던 것입니다. 나는 단순한 악의로시작한 장난이 험악하게 바뀌어 가는 걸 느꼈습니다. - P32

그런데 오늘은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중략). 여자란 정말 나이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가 중년 여자가 될 수도 있는 겁니다. - P34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두세 명의 남자아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중략).
"너, 남자 꾀는 속옷 입는다며?"
"남자 밝힌다고 여자애들이 그러더라."
"어떻게 그러고도 부끄럽지 않니?" - P34

차별이야, 차별, 하고 나한테만 들리도록 옆의 아이들이 속삭입니다. 나는 요시자와 선생님한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지 않습니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귀여움을 받아 괴로워하는 겁니다. - P35

집으로 돌아오자 나는 언니한테 우선 속옷 이야기를했습니다. 언니는 저녁 식사 전에 와인을 마시면서 깔깔 웃었습니다.
"남자를 꾀다니, 최상의 칭찬 아니니? 나도 네 나이때 그런 소리 들은 적은 없었는데. 너, 소질이 있나 보다." - P36

언니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습니다.
"그 에미코라는 아이는 어떤 팬티 입니?"
"그냥 보통."
"그래 봐야 무명으로 된 커다란 팬티겠지, 뭐. 그런 애한테 지지 마. 촌스러운 속옷을 입은 여자는 구제 불능이야. 넌 이미 이긴 거나 마찬가지야."
"얘!"
엄마가 더 이상 못 들어 주겠다는 듯 언니를 야단니다. - P37

나는 내가 제물이 되어 가고 있단 걸 느꼈습니다. 이것은 내가 제일 걱정하던 일입니다. 물처럼 잔잔한 인생. 나는 그것만을 바랐는데, 교실에선 언제나 제물을 필요로 하는 종교가 판을 칩니다.  - P38

어쨌든 같이 화장실에 갈 친구가 없다는 건 견디기힘든 일이었습니다. - P38

혼자서 화장실까지 가는 길은 굉장히 멉니다. 지나치는남자아이가, 아, 오줌을 누러 가는구나, 하고 쳐다보는 느낌이 듭니다. 오줌 누러 가는데 같이 갈 친구가 없느냐고 다른 반 아이들이 생각할 것 같습니다. - P39

(전략). 그러면 그 종기를 제일 처음 할퀸 에미코의 말일까요. (중략). 처음 한두 번은 정말로 가려워서 긁지만, 그 후부터 가렵다는 생각이 드는 건 망상입니다. - P40

하지만 세상 아이들의 부모들이 생각하는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경우에 따라 마음대로 모습을 바꾸는 미덥잖은 존재라는 건 아무도 모르는 게 아닐까 합니다.
아이들을 지도하는 선생님의 역할, 그 역할은 도대체 누가 부여한 것일까요.  - P41

우리 담임선생님은 여자입니다. 가끔 히스테리를 일으켜 소리를 지르는 게 단점이지만, 그다지 존재감이 없기 때문에 싫어하지 사람도 딱히 없는 타입이었습니다. - P42

그런데 곤란하게도 이 선생님이 교실에서의 내 처지를 서서히 눈치 채 버렸습니다. (중략). 즉 무슨 일만 생기면 나를야단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나쁜 일을 한 나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나한테 잔소리를 하는 걸 습관화하려는 의도였습니다. - P42

. 그런 행위는 교실에서의 그녀의 입장을 쾌적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나는 그녀를 미워할 수 없습니다. 내가 물처럼 잔잔한 인생을 바란 것처럼, 그녀도 파도에 저항하지 않는 편안한 생활을 바란 것이니까요. - P43

한순간의 안심도 잠깐, 선생님이 내 쪽으로 성큼성큼걸어왔습니다. (중략). 선생님은 내 손에서 칠판 지우개를 빼앗더니 말했습니다.
"얘처럼 가정교육이 엉망인 애는 처음 봤어!" - P44

나뿐 아니라, 우리 아빠, 엄마, 그리고 언니까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부정당한 것입니다. 나는 따돌림을 겪기 시작한 후로 처음으로 눈물이 났습니다. - P45

나는 새삼스럽게 선생님의 얼굴을 쳐다봤습니다. 펑퍼짐한 얼굴의 주근깨, 쌍꺼풀 없는 작은 눈에서 올챙이처럼 움직이는 눈동자. 그것조차 덮어 버리는 뿌연 안경. 그녀의 얼굴은 보잘것없습니다. - P45

초조해진 선생님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녀는 들고 있던 지우개로 내 머리를 서너 번 때렸습니다. 아프지는않았습니다. 방금 막 칠판을 닦은 지우개는 분필 가루를 잔뜩 머금고 있었으니까요. - P46

유일한 위안은 악코가 오늘 결석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교실에서 그와 걸맞은 이는 나뿐이라고 자부하는 이상 이런 모습은 죽어도 보일 수 없습니다. - P47

가정교육이 엉망이다. 이 말은 신조어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 아이들은 새롭게 배운 그 형용사를 나를 향해쓰는 법을 익혔습니다. 특히 에미코는 그 말이 마음에들었는지 즐겨 쓰곤 했습니다. - P47

게 합니다. 더럽혀진 생리대를 등교 전 내 책상에 놔두어 내 몸에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합니다.
처음에 그걸 보았을 때의 기분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중략). 나는 아직 초경을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습키다. - P48

나는 한동안 책상 앞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습니다. 도대체 누구 피일까. 희미한 의식 속에서 생각했습니다. 그때 남자아이들은 나를 놀리지 않았습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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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상 분류 명칭일 뿐입니다. 이 용어가 다른 데서도 남용되면서 터무니없는 오해를 불러 일으켜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히스테리와는 다릅니다." - P128

슈헤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가나미가 해리성 장애라면, 견디기 힘든 마음의 상처는 역시 중절 문제일까요?" - P128

어려운 질문을 받은 이소가이는 마음을 다잡았다.
"우선은 해리성 빙의 장애라는 진단을 확정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병을 일으킨 심인을 중절 수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답은 ‘예‘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제가 가타부타할 수가 없습니다. 임신 21주까지의 인공 임신 중절은 법적으로 인정되고 있으니까요." - P129

"가능하다면 아이를 낳고 싶지만, 도저히 무리예요. 타이밍이 너무 나빴던 거죠."
"그렇습니까?"
이소가이는 뒷말을 재촉했다. 환자뿐만 아니라 가족의 정신적인 부담을 덜어 주는 것도 정신과 의사의 임무였다.
슈헤이는 굉장히 상세한 금액을 거론하면서 가계 상황을 설명했다. 중절이라는 결론에 이소가이가 동의해 주길 바라는 듯했다. - P130

이소가이의 머릿속에 성가신 문제가 떠올랐다. 임신부에게 항불안제를 투여하면 확률이 낮기는 하지만 태아에게 부정적인 영향을미칠 수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하지만 그 보고를 부정하는 연구 결과도 있어 약물로 인한 부작용에 대해서는 전문가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 P131

지금 가나미의 몸안에 태아가 자라고 있는 이상 임신 초기에 약물을 사용하는 것은 의사의 윤리에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 P131

완전히 납득한 것은 아닌 듯한 말투로 슈헤이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마시고 이름으로 불러 주셨사으면 좋겠는데요."
슈헤이는 멀거니 이소가이를 봤다.
"친구가 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소가이가 말했다. 의사 가운을 입고 있지 않은 지금, 자신이 의사라는 갑옷을 입는다는 데 반감이 들어서였다. - P132

"그럼 진료비는 어느 정도로 생각하면 될까요? 국민건강보험에가입되어 있으니 30퍼센트만 부담하면 되긴 한데."
이소가이는 또 다시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나쓰키 슈헤이는 휴직 중인 자신을 찾아왔다.  - P132

 결국 이소가이는 정신 요법만큼은 개인적으로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약물 요법의 경우 월 5000엔에서 1만 엔 정도 들지만 정신 질환은 지자체에서 보조금이 나오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게다가당장은 정신 요법만 할 테니 의료비는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P133

"실은, 인터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이름을 물어봤었거든요."
(중략).
‘상대방은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묻기만 했습니다. 어제 발작을 일으켰을 때도 가나미는 똑같이 말했어요."
가나미는 인격의 정체가 밝혀지는 게 두려운 걸까? - P134

슈헤이가 뭔가 생각해 낸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대화를 나누실 때 가나미의 말에 비웃는 뉘앙스가 배어 있었다는 점을 혹시 눈치 채셨나요?"
"네." - P134

"가나미 씨의 지인 중에 그런 어투를 사용하는 사람이 혹시 있나요? 단서는 임신부란 것밖에 없습니다만.
슈헤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 P133

2

슈헤이네 맨션에서 나온 이소가이는 의대로 돌아가 도서관에서빙의 현상에 관련된 전문 서적과 논문을 산더미처럼 빌렸다. 나쓰키 가나미의 증세는 다루기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 P136

막 스물아홉 살이 된 여동생은 주부 생활을 3년이나 했는데도 전혀 그런 티가 나지 않았다. (중략). 이혼 사유는 남편이 다른 간호사에게 손을 댔기 때문이라는 듯했다. 의학계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 P137

"먼저 먹어."
내뱉듯 대답한 이소가이는 나쓰키 가나미의 증상에 대해 생각했다. 빙의 망상은 여러 가지 정신 장애로 일어날 수 있어 우선은 감별 진단을 제대로 해 둘 필요가 있었다. - P140

이소가이는 감별 기준을 참조하기 위해 책상 안쪽에 세워 둔 두권의 책자를 꺼냈다. 미국정신의학협회가 저술한 『정신 질환 진단및 통계 편람(DSM-IV)』과 세계보건기구가 발표하는 『국제 질병 및사인분류(ICD-10)』였다. 오늘날 일본 정신 의학계에서는 이 두 개에 더해 종래의 전통적 진단 기준까지 세 가지가 난립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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