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께서 칠판에 내 이름을 쓰고 계십니다. 끽끽 소리를 내면서, 내 이름은 어느새 선생님의 분필 아래서 짓밟히고 있습니다. - P9
5학년 3반의 새로운 친구입니다. 모토미야 안이랑 다들 사이좋게 지내요. 선생님은 나를 아이들에게 잘 봐달라고 부탁합니다. 실은 나에게 아이들을 잘 봐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 P10
나와 같은 나이의 아이들이 나를 좋아하는 것은 아주 귀찮습니다. 하지만 싫어하는 것은 더 싫습니다. 학교생활이 원만하지 않으니까요. - P11
내가 새로운 학교 생활을 맞는 건 항상 봄이 아닌 다른 계절입니다. 학년이 시작되는 봄은 누구든 나하고 같은 입장이기 때문에 새로운 기분이 들지 않습니다. - P11
다행히 우리 아버지는 무척 전근이 잦은 일을 하고계셨기 때문에, (후략). 내가 새로운 학교로 옮기는 때는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1학기가 끝나고, 나는 교실의 아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합니다. - P12
여름방학 동안 나와 나의 가족은 다른 곳으로 이사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런저런 잡다한 일로 바쁘지만, 나까지 그런 일들을 해야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 P13
누가 하늘을 파랗다고 했을까요. 짙푸른 초목들이 나를 위협하는 숲 속에서 내 머리 위는 온통 붉은 빛입니다. - P13
(전략). 새 학기가 시작되기까지의 나는 그런 식으로 나날을보냅니다. 짧은 기간 동안 무구함을 즐기면서 고독을 한껏 맛봅니다. - P15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절대 사투리를 익히지 않았습니다. 무리해서라도 그 지방의 말을 쓰면 친구들이 쉽게 모인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 P16
이곳 아이들은 확실히 알아차릴 만한 사투리를 쓰는건 아닙니다. 다만 말에 억양이 없습니다. 그런 것이 명백히 시골 아이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걸 결코 경멸하지는 않았습니다. - P17
"치마에 세로로 단추가 달렸네. "어쩜, 멋있다." "머리는 전부터 길렀니?" "네가 땋았니?" 나는 매일 옷 생각만 하는 언니와 소녀 취향의 엄마가 해주는 대로 하고 다녔기 때문에, 언제나 예쁘게 꾸민 차림이었습니다. - P18
질투 같은 건 생각도 못 하는 그 애들의 순박함에 나는 감사했습니다. "계집애 냄새 난다.‘ 남자아이들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애들이 결코 그걸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게 어때서. 난 계집애인걸." - P1
(전략). 아무래도 이 젊은 선생님은 여자아이들 사이에 인기가 있는 모양입니다. 남자아이들한테도 마치 친구처럼 대하는 이 선생님은 요시자와 선생님이라고 했습니다. 남자 - P20
"너, 이제 학교에는 익숙해졌니?" 언니가 나한테 물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요 며칠 사이 반 아이들이 나를 받아들였다는 것을느꼈던 것입니다. - P21
학교 생활은 나를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잠들때처럼 기분 좋게 교실 한구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매일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급식 때 묽은 우유를 마셔야 되는 것 빼고 내가 싫어하는 시간은 없었습니다. - P21
선생님들은 나를 보기만 하면 미소를 지으면서 다른 아이들 앞에선 의식적으로 약간 엄한 태도를 취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 P22
나는 인간을 어른과 어린애로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물론 실제로 나이를 먹었는지 아닌지는상관이 없습니다. - P23
우리 반 아이들 중에는 어린애가 많아. 그렇게 생각하며 교실을 둘러보다. 가끔씩 어른을 발견하고 놀라곤 했습니다. 내 옆자리 뒤에 앉아 있는 남자아이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보통 악코라고 불렸지만, 그 애의 진짜 이름은 아쓰히코였던 것 같습니다. - P24
악코는 내가 보낸 메모를 남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필통 속에 감췄습니다. 그 애한테서 비슷한 쪽지가 오는 일은 없었습니다. 나는 그 때문에 더욱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 P25
나는 그렇게 기분 좋은 인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중략). 원인은 요시자와 선생님이었습니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 P26
. 왜 자신의 호의를 나한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까지 알리고 싶어 하는 걸까요. 잔잔하던 내 인생이 서서히 파괴되는 걸 느낍니다. - P27
처음에 나선 건, 반장인 에미코라는 여자아이였습니다. 그 전부터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는 이미 음습한 공기가 차올라 출구를 찾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 P27
"잘난 척하기는." 언제나처럼 남자아이가 내 머리를 잡아당기고 있을때, 에미코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 P27
에미코가 특히 요시자와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걸 나는 처음부터 눈치 챘습니다. 에미코는 선생님이 화내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말대꾸로 관심을 끌고, 선생님의 눈이 자신을 향하면 비로소 호의를 나타내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 P28
나는 결코 그 애를 좋아하는 않았지만, 고마웠던 건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아이가 한 사람 있으면 나같은 아이는 살아가기 쉬우니까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촌스러운 그 애를 우습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 P29
어느 날 한 아이가 결석했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침통한 표정으로 그 아이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말했습니다. (중략). 에미코였습니다. 그녀는 우리가 당황해하는 사이대성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문득 악코를 떠올리고 슬쩍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중략). 나는 왠지 기뻐져서 쿡, 하고 웃었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뭐가 우습니? 모토미야 안!" 선생님이 이마의 힘줄을 푸르르 떨면서 나를 노려보지 않겠습니까. - P30
그래도 그렇지, 내가 우는 시늉 따위를 하게 만들다니. 나는 나도 모르게 선생님을 미워하게 될 것 같았습니다. 나는 다들 왜 그렇게 슬퍼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 P31
. 아이들이 나를 외톨이로 만들기까지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잘난 척하기는. 그것이 그녀의 첫 ‘곡성‘이었습니다. 다음 날 학교에 가자, 주위 공기가 급격히 팽창해 내가 있을 자리를 좁히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 P31
한 남자아이가 내 옆을 지나가면서, 아이구 냄새야. 하고 말했습니다. (중략). "계집애 냄새가 풀풀 나네." (중략). 참다 못한 나는 지치지도 않고 또다시 다가온 한 남자아이한테 말했습니다. "네가 훨씬 냄새 나!" 남자아이는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순간 멈칫했습니다. (중략). 그 애 네 집은 생선 가게였던 것입니다. 나는 단순한 악의로시작한 장난이 험악하게 바뀌어 가는 걸 느꼈습니다. - P32
그런데 오늘은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중략). 여자란 정말 나이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가 중년 여자가 될 수도 있는 겁니다. - P34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두세 명의 남자아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중략). "너, 남자 꾀는 속옷 입는다며?" "남자 밝힌다고 여자애들이 그러더라." "어떻게 그러고도 부끄럽지 않니?" - P34
차별이야, 차별, 하고 나한테만 들리도록 옆의 아이들이 속삭입니다. 나는 요시자와 선생님한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지 않습니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귀여움을 받아 괴로워하는 겁니다. - P35
집으로 돌아오자 나는 언니한테 우선 속옷 이야기를했습니다. 언니는 저녁 식사 전에 와인을 마시면서 깔깔 웃었습니다. "남자를 꾀다니, 최상의 칭찬 아니니? 나도 네 나이때 그런 소리 들은 적은 없었는데. 너, 소질이 있나 보다." - P36
언니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습니다. "그 에미코라는 아이는 어떤 팬티 입니?" "그냥 보통." "그래 봐야 무명으로 된 커다란 팬티겠지, 뭐. 그런 애한테 지지 마. 촌스러운 속옷을 입은 여자는 구제 불능이야. 넌 이미 이긴 거나 마찬가지야." "얘!" 엄마가 더 이상 못 들어 주겠다는 듯 언니를 야단니다. - P37
나는 내가 제물이 되어 가고 있단 걸 느꼈습니다. 이것은 내가 제일 걱정하던 일입니다. 물처럼 잔잔한 인생. 나는 그것만을 바랐는데, 교실에선 언제나 제물을 필요로 하는 종교가 판을 칩니다. - P38
어쨌든 같이 화장실에 갈 친구가 없다는 건 견디기힘든 일이었습니다. - P38
혼자서 화장실까지 가는 길은 굉장히 멉니다. 지나치는남자아이가, 아, 오줌을 누러 가는구나, 하고 쳐다보는 느낌이 듭니다. 오줌 누러 가는데 같이 갈 친구가 없느냐고 다른 반 아이들이 생각할 것 같습니다. - P39
(전략). 그러면 그 종기를 제일 처음 할퀸 에미코의 말일까요. (중략). 처음 한두 번은 정말로 가려워서 긁지만, 그 후부터 가렵다는 생각이 드는 건 망상입니다. - P40
하지만 세상 아이들의 부모들이 생각하는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경우에 따라 마음대로 모습을 바꾸는 미덥잖은 존재라는 건 아무도 모르는 게 아닐까 합니다. 아이들을 지도하는 선생님의 역할, 그 역할은 도대체 누가 부여한 것일까요. - P41
우리 담임선생님은 여자입니다. 가끔 히스테리를 일으켜 소리를 지르는 게 단점이지만, 그다지 존재감이 없기 때문에 싫어하지 사람도 딱히 없는 타입이었습니다. - P42
그런데 곤란하게도 이 선생님이 교실에서의 내 처지를 서서히 눈치 채 버렸습니다. (중략). 즉 무슨 일만 생기면 나를야단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나쁜 일을 한 나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나한테 잔소리를 하는 걸 습관화하려는 의도였습니다. - P42
. 그런 행위는 교실에서의 그녀의 입장을 쾌적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나는 그녀를 미워할 수 없습니다. 내가 물처럼 잔잔한 인생을 바란 것처럼, 그녀도 파도에 저항하지 않는 편안한 생활을 바란 것이니까요. - P43
한순간의 안심도 잠깐, 선생님이 내 쪽으로 성큼성큼걸어왔습니다. (중략). 선생님은 내 손에서 칠판 지우개를 빼앗더니 말했습니다. "얘처럼 가정교육이 엉망인 애는 처음 봤어!" - P44
나뿐 아니라, 우리 아빠, 엄마, 그리고 언니까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부정당한 것입니다. 나는 따돌림을 겪기 시작한 후로 처음으로 눈물이 났습니다. - P45
나는 새삼스럽게 선생님의 얼굴을 쳐다봤습니다. 펑퍼짐한 얼굴의 주근깨, 쌍꺼풀 없는 작은 눈에서 올챙이처럼 움직이는 눈동자. 그것조차 덮어 버리는 뿌연 안경. 그녀의 얼굴은 보잘것없습니다. - P45
초조해진 선생님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녀는 들고 있던 지우개로 내 머리를 서너 번 때렸습니다. 아프지는않았습니다. 방금 막 칠판을 닦은 지우개는 분필 가루를 잔뜩 머금고 있었으니까요. - P46
유일한 위안은 악코가 오늘 결석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교실에서 그와 걸맞은 이는 나뿐이라고 자부하는 이상 이런 모습은 죽어도 보일 수 없습니다. - P47
가정교육이 엉망이다. 이 말은 신조어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 아이들은 새롭게 배운 그 형용사를 나를 향해쓰는 법을 익혔습니다. 특히 에미코는 그 말이 마음에들었는지 즐겨 쓰곤 했습니다. - P47
게 합니다. 더럽혀진 생리대를 등교 전 내 책상에 놔두어 내 몸에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합니다. 처음에 그걸 보았을 때의 기분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중략). 나는 아직 초경을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습키다. - P48
나는 한동안 책상 앞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습니다. 도대체 누구 피일까. 희미한 의식 속에서 생각했습니다. 그때 남자아이들은 나를 놀리지 않았습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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