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겐이치의 의자가 뒤로 쓰러졌다. 비명소리.
"이상해, 이상해, 아까부터 그 말뿐이네."
케이시가 심하게 다리를 떨면서 불평했다.
"맞아. 그게 바로 답이거든." - P56

"숀이 다리 위에 쓰러져 있던 건 틀림없어. 그렇다면 이 이어폰은 범인이 일부러 남겨둔 가짜 단서였다는 말이 돼. 범인은 다리 아래로 이어폰을 떨어뜨림으로써 손이 그곳에서 공격당한 것처럼 보이게 한 거야. 바꿔 말하면, 사실 손은 그곳에서 공격당하지 않았어. 하지만 어째선지 숀은 그 사실을 숨기고 있지." - P57

"마치 직접 목격한 것처럼 말하는데, 증거 있어?" - P58

"숀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건데?"
야스가 뒤에서 머리카락을 비비 꼬며 말했다. - P59

내가 내뱉은 말에서 신물이 났지만, 나는 계속했다.
"숀이 돌아오면 지금 내가 말한 건 전부 잊어줘. 그리고 가능하면 모두 조금씩 숀에게 말을 걸어줬으면 해."
창문에 바람이 부딪혔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스토브 팬이 돌아가는 소리만 크게 들렸다. - P60

"방금 영상에서도 보셨다시피 침팬지 릴리가 연구원 흉내를 내며 문의 키패드를 조작한 결과, 비밀번호가 적중한 것이 이번 탈출 사고의 원인입니다."
열두 명의 하원의원과 서른 명의 방청객에 둘러싸인 채유성제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중략).
"제멋대로 누른 숫자 조합이 우연히 1/10⁵의 비밀번호였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 P61

다만 센터의 존속이 공공안전위원회의 평가에 달린 이상,
그런 속내를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기적 같은 우연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밖에요."
웃기지 마. 신의 뜻으로 돌리려는 거냐. - P62

센터장인 자신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한다면 센터는 즉시 폐쇄될 것이다. 성제는 시선을 내리깔고 땀에 젖수 은 손수건을 움켜쥐었다.
"제 위험 예측이 미흡했던 것 같습니다." - P63

소현은 성제의 여동생이다. (중략), 그사이에 한국 교육부의 정책보좌관으로 취임했다는 듯, 5일 전부터 여당 의원과 함께 뉴욕을 방문한 상태였다. - P64

"전라남도 무안의 승호라는 아이, 들어본 적 있어?"
성제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소현은 안경을 밀어 올리며 그렇게 물었다. 성제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핫한 천재 소년이야. 불과 열 살에 서울대에 수석으로 합격했어." - P65

대규모 부정행위가 발각된 2004년 이후, 한국의 대학 입시에서는 철저한 방지 대책이 시행 중이다. 물론 빠져나갈길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열 살에 서울대학교에 수석 합격하는 것은 상식과 너무 동떨어졌기에 오히려 더욱 그럴싸하게 느껴진다.  - P65

"좀 진지하게 들어!" 소현이 허벅지를 걷어찼다. "날짜를봐. 승호가 마법에 걸린 게 2월 24일. 그리고 아이오와의 방사장에서 침팬지 릴리가 탈출한 게 2월 25일. 바로 다음 날이지." - P66

"승호가 각성하기 나흘 전인 2월 20일. 한 남자의 연설이서구의 지도자들을 혼란에 빠뜨렸어."
어?
"아프리카의 사자, 가다이 대령 말이야. 라빌리 공화국의독재자. (후략)." - P67

"가다이는 이미 그 정체를 밝혔어. 그는 TV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지. 이 무기는 시대의 흐름을 바꿀 것이다."
소현은 허공에 ‘time‘이라고 적었다. - P68

소현은 바 테이블에 양 팔꿈치를 올리고 상반신을 앞으로내밀었다.
"라빌리군의 기술자들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겠지. 그들은 신무기 작동에 실패했다고 믿고 같은 조작을 반복했어.
그 결과 비슷한 시각에 같은 현상이 연이어 발생했어. (후략)." - P69

5

(전략).
"이번부터는 규칙을 바꾸겠다. 시험지를 회수하는 건 타이머가 울리고 나서야. 다 풀고 나서도 끝날 때까지 답안을 검토할 것"
선생님이 잠시 나를 쳐다보고는 곧바로 눈을 돌렸다.
책장에 머리를 부딪힌 그날, 나는 과학 시험지를 2분도 안되어 제출했다. 내 답안이 너무 빨랐기에 이래서는 체면이서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 P71

전어는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고는 몇 번이고 복도를 둘러본 후 내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
"료타, 너 진범에게 속은 것 같아." - P72

"내가 진범을 알아차리게 된 계기는 이거야."
전어는 주머니에서 유리 조각을 꺼내서 기쁜 듯 저녁노을에 비췄다.
"료타와 하늘신 공원에 갔을 때 번개 연못에서 주운 거야.
경찰 아저씨에게 귀가 찢어지도록 혼이 났지만, 어떻게든유리 조각을 들키지 않고 넘겼어." - P73

"나는 그날 다리 밑에서 잉어가 헤엄치는 걸 봤어. 사건이있던 밤, 연못이 얼었다면 잉어는 다 죽었을 거야."
"물 전체가 얼었다고는 말하지 않았어. 수면만 얼었던 거야. 우리가 빙어 낚시를 했던 시치로가타 호수에서처럼." - P74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어. 우리가 사건 다음 날 공원에갔을 때, 이미 연못에 얼음은 없었어. 해가 뜨고 우리가 수업을 듣는 사이에 녹은 거지. 그럼 고드름은 어떨까? 그만큼의 시간이 지났으니 이쪽도 꽤 녹아서 작아졌을 거야. (후략)." - P75

"료타의 추리는 잘못됐어. 이 사건에는 범인이 있어. 그 범인이 창문의 금이라는 가짜 단서를 남기고 숀이 자작극을벌인 것처럼 꾸민 거야.
그렇다고 해서 숀을 공격한 직후에 창문을 깬 건 아니야. (후략)." - P76

"손이 공격받았을 때 연못 물은 꽁꽁 얼어 있었어. 범인은얼음 위에 올라선 채 다리 밑에 숨어 있었어. (중략). 숀은 키가 작아. 머리 꼭대기는 어렵더라도 목덜미라면 키가 작은 나도 할 수 있었을 거야."
(중략).
전어는 이제 바보가 아니다. - P77

"이상하다는 생각에 풍뢰교 위에서 공원을 바라봤어. 그랬더니 바람 연못에 녹색 유리 조각이 흩뿌려져 있는 게 보이더라고. 전날에는 번개 연못에 있었던 병 조각이 바람 연못으로 이동한 거야." - P78

"왜 범인은 범행 다음 날 갑자기 생각을 바꿨을까. 마치 갑자기 머리가 좋아진 것처럼 말이야. 그것도 살짝 머리가 좋아진 수준이 아니야. 평범한 사람은 이렇게 복잡한 생각은 하지 않으니까. 고작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머리가 변할 수 있는 걸까?" - P79

당황한 듯 난간을 잡고 병원 주변을 둘러보았다.
"숀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범인은 다시 숀을 죽이려고 할지도 몰라. 철저하게 경비하지 않으면 위험해."
나는 눈을 감았다. 숨을 멈추고 주먹을 쥐었다.
명탐정이 여러 명 있는 것은 이상하다. 단 한 명이기에 명탐정은 명탐정이 될 수 있다. - P80

이것이 나의……………. - P80

학년 소식지 원고를 다 쓴 후, 구보 후키코는 안경을 벗고양어깨를 번갈아 주물렀다.
어느새 오후 9시가 지나 있었다. 젊은 교사가 자진해 교내순찰을 나간 탓인지 교무실은 완전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 P81

"혹시 최근에 5학년 3반에서 시험 본 적 있으세요?"
다라야마는 동요하지 않고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구보는5학년 수학을, 다라야마는 과학을 담당한다.
"시험은 안 봤는데."
다라야마의 책상에는 채점이 끝난 시험지가 쌓여 있었다. - P82

부정행위인가.
"전어지?"
머릿속에 떠오른 별명을 입에 올렸다. (중략).
다라야마는 할 말을 찾듯 허공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저희 반, 평소에는 평균 65점 정도거든요. 그런데..
도움을 구하듯 이쪽을 바라본다.
"오늘 시험, 전부 만점이었어요." - P83

1

‘참다운 신사는 자신의 결점을 고백한다.‘ 프랑스의 격언에 따르면, 침입자들은 틀림없는 신사였다.
2030년 6월 24일. (중략), 투루울 산기슭 평원에 살던투바족 사냥꾼 여덟 명이 이를 알지 못한 채 구조물에 접근했고, 그 직후 모습을 감췄다. - P87

. 이들은 구조 직후, 자신들을보호한 양국 군인에게 ‘고차원 생명체‘를 자처하는 뿔 달린 존재에게 붙잡혀 있었으며, 그들로부터 일곱가지 전언을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후략). - P88

7월 3일, 고차원 생명체 비행선은 고도 1만 5천 미터까지상승하여 성층권을 지나 1구역의 중앙 부근에 위치한 몽골 허브드 주의 락타르 평원에 착륙했다. - P90

64명이 끌려간 지 32일이 지난 8월 4일. 다시 락타르 평원에 비행선이 착륙했고, 고차원 생명체 70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비행선 내에서 복제한 것으로 보이는 대량의PKM 기관총으로 1구역을 습격, 약 15시간 만에 3천300만명을 살해했다.  - P91

와플대학국방장관은 통합참모본부의 일원인 육해공군 장관, 우주군 작전부장, 해병대 종합사령관을 비롯해 기계공학자, 분석화학자, 소립자물리학자, 면역학자, 동물행동학자 들을 불러들여 특별국방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는 고차원 생명체를 고트Goat, 고차원 생명체 비행선을 팬파이프라 명명하고, 그들이 7구역에 나타날 예정인 2031년 1월 16일까지 공격을 회피할 방법을 모색하고자 했다. - P92

투바족의 전언에 따르면, 고트는 규칙에 대단히 얽매인다고 했다. 그렇다면 비행선 착륙 지점에도 인류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닐까. - P93

더는 물러설 곳이 없게 된 6구역에서는 마지막 카드인 ‘헤르메스 계획‘이 감행되었다. 무대는 일본 이즈 반도. 여기에서는 하버드대, 스탠퍼드대, 매사추세츠공대에서 선발된 아시아계 성적 우수자 50명이 투입되었다.
그들의 무기는 ‘지성‘이었다. - P94

2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상사를 마주치는 것만큼 기분 나쁜 일도 없다. 가령 인류 멸망이 눈앞에 다가왔다 해도 그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마터면 길거리 갱단을 치어 죽일 뻔했네."
옛 아메우라 경찰서장인 구스카미 신페이는 18년 전과 변함없이 세상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P96

"구스카미 씨야말로 용케 무사하셨네요. 일본인은 6구역과 7구역에서 전멸했다고 생각했는데요." - P97

"나는 지금 케냐 정부의 긴급안전보장팀에 속해 있네."
구스카미는 다시 한번 도키요의 안대를 바라본 후 한잔에 5랜드의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직함은 그럴싸하지만 사실은 그저 어중이떠중이를 모아놓은 거야. 잘 알겠지만 우리 대통령과 여당 의원들도 7구역에서 모두 목숨을 잃었어. (후략)." - P98

"그 사건 관계자 중 6구역의 공격을 피한 자가 한 명 더있네. 쓰노 기미코야."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쓰노 기미코는 그 사건의 주범이었다. 체포되고 3년 만에사형 판결이 확정되었다. (중략).
구스카미는 안대를 차지 않은 내 오른쪽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남아프리카를, 아니, 전 인류를 구할지도 몰라." - P99

‘기미코씨‘와 ‘다카시 씨‘에게 괴롭힘을 당해 아빠가 죽을것만 같다. (중략).
도키요는 반신반의했다. 소녀는 둘째치고 성인 남성인 아버지까지 누군가에게 감금당했다고 믿기는 어려웠다. 소녀가 어린아이다운 착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P101

"맞은편 공사 소음이 너무 심하죠? 밤에는 공사하지 말라고 해도 멈추지 않아서 다들 잠을 못자 힘들답니다."
기미코는 말을 쏟아냈다. 명백하게 화제를 돌리려는 듯 보였다. - P102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열었다.
브라운관 TV, 녹슨 선풍기, 물때 낀 수조, 잡다한 물건을가득 쌓아놓은 방.
그곳에 한 남자가 있었다. - P103

도키요는 죽지 않았다.
의식을 되찾는 데 3일, 그리고 기억을 회복하는 데 2주 정도가 걸렸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수사 보고서에 따르면 현장에서 발견된 탄환은 두 개였다. 하나는 창문을 관통해 바깥 화단에 박혔고, 다른 하나는창고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 P104

뒤쪽 도로에서 착암기 공사가 진행되고 있던 탓에 이웃대부분은 파이프건의 발포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대각선 맞은편 연립주택에 살던, 철거 작업자 청년만이 착암기와는 다른 울림을 깨닫고 창밖을 내다보았다고한다. - P105

"쓰노 기미코의 무기가 뭐라고 생각하나?"
윗입술에 묻은 포도주를 핥으며 구스카미는 말을 이었다.
"말이야. 기미코는 말로 상대의 방어벽을 허물고 마음을사로잡아 자기 뜻대로 조종하지. (중략). 사회 규범상 그녀는 악인이지만, 희귀한 능력의 소유자인 건 틀림없네." - P107

기미코의 무기는 말. 그것은 도키요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경찰에게 폐를 끼치는 나쁜 어른이 되지 말라고 애를 혼내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죠."
사건이 발각되기 9개월 전, 알몸으로 물을 뒤집어쓴 아이가 있다는 신고를 받고 찾아간 도키요에게 그 여자는 그렇게 말했다. - P108

창문 밖에서 총성이 울렸다. 구스카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구스카미 씨는 9구역 샘플에 기미코를 끼워 넣으려는 건가요?"
"맞아. 조지 웰스의 외계인을 멸망시킨 세균처럼 말이야."
"그녀가 체포된 건 18년 전이에요. 이미 꽤 늙었을 텐데요?" - P109

전기가 없는 생활은 사람을 규칙적으로 만든다. - P110

만약 그때 이 커튼을 움켜쥐고 끌어내리지 않았다면, 후배경관이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고 도키요는 지금쯤 콘크리트와 함께 드럼통에 들어 있을 것이다.
아니, 아니다. 도키요는 커튼을 움켜쥐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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