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을 잡고 앙투아네트는 두 잔의 럼 펀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작은 식탁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녀가 잔을 들어 내게 주더니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라고 말했다.
"행복을 위하여."
내가 대답했다. - P95

"무얼 그렇게 무서워했다는 거요?"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안 무서웠어요. 사실 모든 게 다 무서웠어요."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고, "크리스토핀이에요." 라고 앙투아네트가 말했다. - P96

앙투아네트가 웃었다.
"저 문을 열면 당신이 쓰게 될 작은 방이 있어요. 원래는 옷 갈아입는 방이었어요."
나는 그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 P97

모든 것이 매우 선명한 색깔들을 뽐내고 있지만, 내게는 한없이 낯설기만 하다. 뿐만 아니라 어떤 것도 내게는 의미가 없다. 내가 결혼하게 될 이 여인도 내겐 아무 의미가 없는 사람이다. - P99

나는 나의 결혼 예식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 P100

결혼식 바로 전날 아침이었다. 내가 막 모닝커피 한 잔을 다 마서가고 있을 때 리처드가 프레이저 씨의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일을 진행하지 않겠다네!"
"무슨 일을?"
"자네와 결혼하지 않겠다는군."
"왜?"
"왜 그런지는 말을 안 해."
"무슨 이유가 분명 있을 것 아닌가" - P101

그녀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를 껴안고 키스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시잖아요."
"당신이 나를 믿어준다면 나도 당신을 믿으리다. 어때요? (중략)." - P102

(전략). 나는 옆방에서 들리는 물소리와 웃음소리에 잠을 깼다. 나는 아직도 잠에 취한 채 듣고 있었다.
"내 머리에 향을 많이 바르지 말아요. 그 사람이 좋아하지 않으니까."
앙투아네트의 음성이다. 또 다른 음성이 말했다.
"남자가 향내를 싫어한다구? 난 그런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구먼."
벌써 밤이었다. - P103

"사람들이 이 옷을 ‘조세핀* 스타일‘ 이라고 해요."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1796년에 결혼하여 1804년에 왕후가 된 조세핀 보나파르트는 마르티니크 출신이며 크리올이고, 그녀의 아버지는 대농장의 주인이며 노예주였다. 조세핀은 1809년에 나폴레옹으로부터 이혼당하게 되는데, 앙투아네트나그녀의 어머니 아네트의 운명과 유사한 점이 많다. - P103

"영국이 꿈과 같다는 말이 사실이에요? 내 친구 하나가 영국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그 친구가 그렇게 편지에 썼더라고요. 그 애가 말하기를 런던이란 곳은 때때로 암울하고 냉기로 가득 찬 꿈만같대요. 어서 깨어나 떨쳐버리고 싶은 꿈만 같다고요." - P104

그녀는 말을 멈추고 손을 올려 머리 위에 놓았다.
"슬픈 이야기면 오늘 밤 내게 말하지 말아요."
"슬픈 얘기 아니에요. 어떤 일이 일단 발생하면 그 사건이 언제, 왜 발생했는지는 잊어버린다 해도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은 영원히 존재해요. (후략)." - P106

그녀의 입은 억지로 웃고 있었고 눈빛은 세상과 동떨어진 외로운 사람의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내 팔로 감싸고, 아기를 달래듯 부드럽게 흔들어주었다. 그러고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내가 벌써 잊은 지 오래라고 생각했던 옛날 노래였다.


고요한 밤의 여왕에게 만세,
로빈, 환하게 빛나라, 환하게 빛나라,
네가 죽는 그날.*


*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갈리아 신화에 의하면 로빈(울새)은 ‘거세되지 않은 숫양‘ 혹은 ‘남근‘을 상징한다. 동시에 성의 희열과 희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로빈의 죽음은 여왕과의 성 접촉 후 발생할 복종과 죽음, 거세를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앙투아네트의 왕성한 성욕을 두려워하게 될 로체스터의 고민을 예고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손필드에 불을 지르고 머리칼이 날개가 되어 불사조처럼 날아오를 앙투아네트의 모습을 예고한다고 보는 것이다. - P108

다음 날 아침 내가 잠을 깼을 때 해는 연두색으로 찬란히 비치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녀는 나보다 훨씬 전에 일어난 모양이다. - P108

 내가 빛의 감상을 끝내고 나의 공간에서 침실로 돌아갔을 때, 침실은 아직도 컴컴했고 앙투아네트는 베개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중략). 앙투아네트의 곁을 아직 떠나지 않고 있던 흑인 여인이 말했다.
"제가 만든 황소의 피를 좀 마셔보세요, 젊은 서방님."
그녀가 따라준 커피의 맛은 훌륭했다. 손가락이 길고 가느다란그녀의 손은 의외로 아름다웠다. - P109

그녀가 문 쪽으로 걸어가자 그녀의 치맛자락이 땅에 끌리며 버석거리는 소리를 냈다. 문 앞에서 그녀가 몸을 돌렸다.
"서방님께서 밟아 으깬 협죽도 화환을 치우라고 아이를 보내겠습니다. 그냥 두면 바퀴벌레가 꼬이거든요. 꽃에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젊은 서방님."
"커피는 맛있지만 말투는 고약하군. 게다가 치맛자락은 좀 들고다니지, 마루를 쓸고 다니니 더러워지지 않겠어."
"치맛자락을 끌고 다니는 것은 존경을 표한다는 뜻이에요." - P110

그녀의 조그마한 부채가 탁자 위에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그것을 집어 들더니 몸을 눕히고는 눈을 감았다.
"오늘 아침엔 안 일어날래요."
"안 일어난다고? 아주 안 일어나겠다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날래요. 저도 아주 게을러요, 크리스토핀처럼. 침대에서 하루 종일 일어나지 않고 있을 때가 흔히 있어요." - P111

나는 아주 이른 아침에 연못에 가서 몇 시간씩이고 그곳에 머물렀다. 나무 그늘이 좋아 집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밤에만 핀다는 꽃들도 그곳에 있었다. 그 꽃들은 입을 꼭꼭 오므리고 고개를 숙인채 두꺼운 잎 사이에 숨어 태양을 피하면서 밤을 기다렸다. - P112

"독사야 물론 독이 있지요. 그런데 여기는 독사가 없어요."라더니 곧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알지요? 그들이 정말 알고말하는 걸까요?" 그러더니 "여기 뱀들은 독이 없어요. 물론 없고말고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 P113

"컨설레이션 저택의 주인 남자는 은둔자래요. 그분은 아무도 안만나고, 말도 거의 안 한대요."
그녀가 말했다.
"이웃이 은둔자라? 그거 나하고 잘 맞는군. 썩 잘 맞아."
"이 섬에만 은둔자가 네 명 있어요. 네 명은 진짜예요. 은둔자인척하는 다른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우기가 되면 다 떠나거나 만날 술만 마셔요. 그때 슬픈 일들이 발생하는 거죠."
"과연 이곳은 내가 느낀 대로 외로운 곳이군." - P114

"뱁티스트는 아주 집사 노릇을 잘하고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뱁티스트나 크리스토핀에 대한 나의 생각은 내색하지 않으며, 나는 그녀가 그런 말을 할 때면 동의하곤 했다.
"뱁티스트가 그러는데……………, 크리스토핀이 그러는데. - P115

밤중에 잠이 깨면 밖에는 흔히 비가 내렸다. 변덕을 부리며 가볍게 내리기도 했고, 춤추듯 장난기 어리게 내리기도 했으며, 혹은 소곤거리듯 조용히 오기도 했다. 그러다 점점 소리가 커지면서 비는 끈질기게 내렸다. 강력하고도 냉혹한 소리를 내면서.  - P116

"당신을 알기 전에 저는 살고 싶지 않았답니다. 죽는 게 낫다고 항상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시간을 기다렸는지."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 말을 했소?"
"제가 말을 나눌 사람이나 제 말을 들어줄 사람이 어디 있어야죠. 쿨리브리에서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하실 거예요." - P117

"왜 크리스토핀과 포옹을 하고 입을 맞추고 그러지?"
"그러면 왜 안 되는데요?"
"나 같으면 그 사람들과 껴안고 입 맞추는 짓은 안 할 거요. 아니, 못할 거요."
내 말을 듣고 그녀는 한참 동안 웃었다. 그러나 왜 웃는지 결코 말해 주지 않았다. - P118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녀가 내게 속삭였다.
"만일 내가 죽을 수만 있다면, 지금, 내가 가장 행복할 때, 당신이 날 죽게 해주겠어요? 당신이 날 죽일 필요도 없어요. 그저 ‘죽어라.‘ 하고 말만 하세요. 그러면 제가 죽을게요. 안 믿으시는군요. 그럼 한번 시험해 보세요, ‘죽어라.‘ 하고 말하세요. 그리고 제가 죽는 모습을 보시라니까요."
"죽어, 죽고 싶으면 죽으라니까!" - P119

내가 위험을 느끼는 것은 밤이었다. 나는 위험을 잊으려 했고,
위험을 내 인생에서 밀쳐내려고 했다.
"당신은 안전해."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 주곤 했다. ‘당신은 안전하다‘ 라는 말을 듣는 것을 그녀는 좋아했다.  - P120

만일 그녀를 어린애라고 한다면 그녀는 어리석은 아이가 아니라 고집이 센 아이라고 해야 한다. 그녀는 가끔 내게 영국에 대해 질문을 했고 내가 말해 주는 것을 경청했다. 그러나 내가 무슨 말을 하건 그녀에겐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했다고 나는 확신한다. 영국에 대한 그녀의 의식은 이미 확고하게 결정돼 있었으니까.  - P121

나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끝없이 계속될 것처럼 내리는 비의 졸린 듯한 노래. 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비야, 나를 잠에 빠지게 해다오. 금세 나는 잠들어 버렸다. - P122

"주인님, 이게 오늘 아침 일찍 왔어요. 힐다가 받았어요." 아멜리는 동판 인쇄처럼 얌전하게 겉봉이 쓰인 두툼한 봉투를 내게 주었다. 편지 귀퉁이에 ‘친전, 급‘이라는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이 주변에 산다는 은둔자 중 하나겠지.‘ 나는 생각했다. - P122

나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중략). 마치 내가 이런 편지를 기대하고 있었던 듯이, 아니 아마 나는 이런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 P128

앙투아네트가 말했다.
"그리고 가서 크리스토핀에게 내가 보잔다고 말해."
아멜리가 비질을 멈추고 말했다.
"크리스토핀이 떠난다는대요." - P128

앙투아네트가 갑자기 침대에서 뛰어내리더니 아멜리의 따귀를 때렸다.
"나도 너를 때릴 거야, 이 흰 바퀴벌레야. 나도 너를 때릴 거야."
 거아멜리가 정말 앙투아네트를 쳤다.
앙투아네트가 그녀의 머리칼을 휘어잡았다. 아멜리는 이를 악물더니 이번에는 앙투아네트를 이빨로 물려고 덤볐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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