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머리말


흔히 말하는 ‘자유의지‘ 를 다루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 - P19

다시 말해 나는 이 책에서 사회가 개인을 상대로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성질과 그 한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 P19

. 한 나라 안에서 약자들이 이런저런 강자들의 침탈 대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그들 모두를 제압할 수 있을만큼 힘이 센 최고 강자가 하나 있어야 했다. (중략). 따라서 이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자기나라를 온전히 지탱하기 위해, 최고 권력자가 행사할 수 있는 힘의 한계를 규정하고자 했다. - P20

권력을 제한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정치적 자유 또는 권리라고 하는 어떤 불가침 영역을 설정한 뒤, 권력자가 이를 침범하면 그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간주해서, 피지배자들의 국지적 저항이나 전면적 반란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한다. 둘째,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 통용된 것이지만, 국가가 중요한결정을 내릴 때 구성원 또는 그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기관의동의를 얻도록 헌법으로 규정한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유럽 - P21

 민주 정부를 세우는 것이 꿈속에서나 가능하거나 까마득한 옛날에나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질 때는, 인민이 자기 자신에게 행사하는 권력을 제한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자명했을 것이다. - P23

(전략), 다시 말해 민주적 기관이 인민의 뜻을 받들어 정상적인 방법으로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중략).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지구상의 큰 땅덩어리를 차지하는 한 나라에서 민주 공화정democratic republic이 세워졌고, 그 나라는 국제 사회의 열강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³ - P23

3) 미국을 말한다. - P240

권력을 행사하는 ‘인민‘은 그 권력이 행사되는 대상과 늘 같은 것은 아니다. ‘자치‘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각자가 스스로를 지배government of each by himself 하기보다. 각자가 자기 이외 나머지 사람들의 지배를 받는 정치 체제government of each by all the rest가 되고 있다. - P23

(전략). 따라서 인민이 자신들 가운데 일부를 억누르고 싶은 욕망을 가질 수도 있으므로 다른 권력 남용 못지않게 이에 대한 주의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 P24

이제 정치영역에서 ‘다수의 횡포tyranny of the majority‘⁴는 온 사회가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큰 해악 가운데 하나로 분명히 인식되고 있다. - P24

4) 프랑스의 정치사상가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이 자신의 명저<미국의 민주주의De la démocratie en Amérique)에서 썼던 말이다. 밀은 토크빌의 책이 출판되자마자 장문의 논평을 발표하여 그의 문제의식에 공감을 표시했다. - P240

(전략). 사회는 이런 방법을 통해 다수의 삶의방식과 일치하지 않는 그 어떤 개별성individuality도 발전하지못하도록 방해한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아예 그 싹조차 트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급기야는 모든 사람의 성격이나 개성을 사회의 표준에 맞도록 획일화시키려고 한다. - P25

원론적으로 보자면 이 명제에 이의를 제기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 P25

그러나 아주 명백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이 문제의 정답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시대에 따라서 답이 항상 다르다. - P26

관습은 사람들이 만들고 지켜온 행동 규칙의 타당성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못하도록 만드는데, 관습은 이성적인 토의의 대상이 아니라는 일반적인 인식때문에 이런 속성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 P26

(전략).
따라서 사회 또는 사회를 움직이는 중요한 세력이 좋아하는것과 싫어하는 것이 규칙의 실질적 원천이 된다. 사람들은 법을 지키지 않을 때 따르는 처벌이 두려워, 또는 여론의 힘에 밀려 그 규칙을 준수한다.  - P28

그러나, 어디나 있기 마련인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적 신념만은 한마음으로 꾸준히 지켜왔다. 이 문제는 여러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른바 도덕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데 더 없이 중요한 사례가 되기 때문이다. - P29

종교의 자유를 신장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위대한 저술가들은 특히 양심의 자유가 결코 침해되어서는 안 될 권리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각개인이 자신의 종교적 믿음에 대해 절대적 자유를 누려야만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 P30

영국에서는 독특한 정치사의 영향 때문에 여론의 구속력이 크지만 상대적으로 법의 간섭은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적은 편이다.  - P30

 대다수 인민들이 아직은 정부가 자신들의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에 정부의 힘이 곧 자신의 힘이 되고 정부의 생각이 곧 자신의 생각과 같은 것이라고 믿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 P31

나는 이 책에서 자유에 관한 아주 간단명료한 단 하나의 원리를 천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사회가 개인에 대해 강제나 통제-법에 따른 물리적 제재 또는 여론의 힘을 통한 도덕적 강권-를 가할 수 있는 경우를 최대한 엄격하게 규정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 P32

이 원리가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굳이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P33

같은 이유에서 미개 사회backward states of society에 사는 사람들도 이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그런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아직 미성년자nonage 인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 P33

. 우리가 여기에서 검토하고 있는 자유의 원리는 인류가 자유롭고 평등한 토론을 통해 진보를 이룩할 수 있는 시대에나 성립되지, 그런 때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 P34

효용utility과 무관한 추상적인 권리에 관한 생각이 이러한나의 주장에 어떤 도움을 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아무 말도하지 않았다. 나는 효용이 모든 윤리적 문제의 궁극적 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 - P34

마땅히 해야 할 이런 일들을 하지 않는 개인에 대해 사회가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또 살다보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지 않음으로써 남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 - P35

대외적으로 모든 개인은 자신이 하는 일에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들의 보호자인 사회에 대해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 P35

(전략). 다시 말해 이웃 사람들의 판단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만큼 자신에게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 P36

 지금까지 말한 이런 것들이 인간 자유의 기본 영역이된다. 자유의 기본 영역으로 다음의 셋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내면적 의식의 영역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실제적이거나 사변적인 것, 과학 · 도덕· 신학 등 모든 주제에 대해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양심의 자유, 생각과 감정의 자유. 그리고 절대적인 의견과 주장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말이다.
(중략).
둘째, 사람들은 자신의 기호를 즐기고 자기가 희망하는 것을 추구할 자유를 지녀야 한다. (중략).
셋째, 이러한 개인의 자유에서 이와 똑같은 원리의 적용을받는 결사의 자유가 도출된다. - P37

어떤 정부 형태를 가지고 있든 이 세 가지 자유가 원칙적으로 존중되지 않는 사회라면 결코 자유로운 사회라고 할 수 없다. - P37

지금 우리는 사회가 설정한 성공의 기준에 맞춰 살도록 강하게 종용받고 있다. 그것은 (사회가 만든것으로서 우리와 무관하지만, 그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 여간 심한 것이 아니다. - P-1

오늘날에는 정치 공동체의 규모가 커진데다무엇보다도 세속적 권위와 종교적 권위가 분리된 까닭에 (다시 말해 인간의 양심을 다루는 권력과 일상의 삶을 다스리는권력이 다르기 때문에)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 법이 지나치게 관여할 수 없다. - P38

 도덕 감정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종교이다. 그러나 종교는 지금까지 거의 언제나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를 통제하려 하는 야심만만한 고위 성직자 또는 청교도 정신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 P39

이런 예외적 성향의 개별 사상가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는 여론, 심지어 법의 힘을 통해 개인에대한 사회 통제를 과도하게 확대하려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 P39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개하자면, 전폭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측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하나의 항목에 집중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한꺼번에 펼치는 것보다 더 나을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생각의 자유이다.  - P40

 지금부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지난 300년 동안 끊임없이 논의되어온 주제에 대해 새삼스럽게 사족을 하나 더 붙이는 것을 용서해주기 바란다. - P40

제2장 생각과 토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가 정부의 타락이나 전횡(專橫)을 막아주는 중요한 장치의 하나라는 사실을 굳이 강조해야 하던 때는 이미 지났다. 사실 그렇게 믿어도 될 것이다.  - P43

일반적으로 말해서 인민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국가든 아니든 인민의자유를 전면 억압하겠다고 노골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가 가끔씩 사람들의 의사 표현을 통제하려한다고 해서 특별히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 P43

나는 인민이 스스로든 정부를 통해서든 그렇게 강제할 권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 P43

 여론을 빌려 자유를 구속한다면 그것은 여론에 반해 자유를 구속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나쁜 것이다. - P44

첫째, 권력을 동원해서 억누르려는 의견이 사실은 옳은 것일 수 있다. 그 의견을 짓밟으려는 사람들은 물론 그것을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결코 잘못을 범하지 않을 만큼 완벽한 사람들은 아니다.  - P45

스스로 완전하다infallibility고 전제하지 않는 한 일체의 토론을차단해버릴 수는 없다. 사람들이 흔히 이런 착각에 빠진 탓에자기와 다른 생각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 P45

인간의 양식(良識)을 위해서는 불행한 일이지만, 사람들은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이론상으로는 인정하면서도, 막상 현실 문제에 부딪히면 좀처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P45

즉 인간의 판단이 잘못될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 P45

사람들이 자신의 독자적인 생각에 자신감이 없으면 없을수록 일반적인 의미의 ‘세계‘ 의 완전함에 암묵적인 믿음을 가지고 더욱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각자가 직접 부딪히고 경험하는 것, 즉 정당, 집단, 교회, 계급 등이 모여 이 세계를 구성한다. - P46

이러한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자신이 항상 옳다는 판단과 책임감 아래 다른 사람이 잘못된 생각을 전파할지도 모른다고 노심초사하는 이들이 있다. 그 가운데 아마도 공권력이 첫 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 P47

 우리 생각이 틀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각자의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한다면,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 P47

의식이 아직 개화되지 못했던 과거 어느 때에, 지금은 옳다고 받아들여지는 어떤 생각을 펼친다는 이유로 탄압을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 P48

그러나 인간의 삶에서 어떤 목적을 향해 나가는 것이 좋은지 판단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 P48

인류가 발전시켜온 생각이나 일상적인 행동의 역사를 놓고볼 때, 우리의 삶이 더 나빠지지 않고 지금 이 상태로나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의 지적 능력 속에 들어 있는 그 어떤 힘 덕분에 그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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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부르주아적 성과학: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에빙


과학과 부르주아 도덕


정신의학자이자 의사인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에빙 (1840~1902)에게 성은 과학이었다. (중략). 그 책은 그가 사망한 다음 해인 1903년에 마지막 판본이 출간될 때까지 모두 11개의 개정판이 발간되었고, 죽은 뒤에도 1924년까지 네 개의 판본이 출간되었다. 이는 인쇄 횟수를 포함하지 않고 순수한 판본만을 꼽은 것이다. 1937년에 발간된 열여섯번째 판본은 1962년까지 열 - P29

크라프트에빙은 성과학을 정초한 인물이다. 이는 그가 성에 대하여과학적으로 발언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자연적인 성"은이미 18세기부터 논의되었고, 현재의 연구자들이 성과학으로 분류하는 저술들도 이미 1860년대부터 출현하고 있었다. 다만 크라프트에빙에 앞선 연구들은 동성애 같은 개별적인 성 병리를 논했다. - P30

성에 대한 크라프트에빙의 진술은 진정 과학이었을까? - P30

 사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성은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언급되고 연구되었다. 17~18세기에는 자위행위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졌고, 18~19세기에는 여자의 성이 편집증적으로 서술되었다. - P31

크라프트에빙이 『성 정신병리』에서 제시한 분류법은언뜻 과학적인 것으로 보인다. (중략).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다. 그는 국부신경증은 분류만 했을 뿐 단 한 줄도 서술하지 않았다. 척수신경증에 대해서도 딱 두 쪽만 서술했다.⁴ - P31

크라프트에빙의 주된 관심사는 뇌신경증이었다. 따라서 이 부분을 살펴보면 그가 말하는 과학이 무엇인지 드러날 것이다. - P33

여기서도 그는 분류한다. 크게 네 가지다. 첫째는 유소아나 노인이 성욕을 느끼는 경우를 지칭하는 성욕설, 두번째는 성욕결핍증, 그리고 성욕과다증과 성감각 이상이다. 여기서도 그의 관심은 편향적이다.  - P33

 성감각 이상이야말로 크라프트에빙의 주된 관심사인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그는 무슨 기준으로 저런분류를 한 것일까? - P34

만일 각각의 신경증과 특정 부위의뇌 피질의 관련성이 함께 제시되었다면 확고한 기준이 있었다고 말할수 있고, 우리는 자신의 논의가 과학이라는 크라프트에빙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 P35

그렇다면 크라프트에빙의 기준은 무엇이란 말인가? 기준이 없다. - P35

(전략). 그는 그저 자신이 성 병리라고 규정한성 유형들을 나열해놓았을 뿐이다. 그러나 기준이 있다. (중략). 바로 과잉과 과소이다.  - P35

 크라프트에빙은 인간이 성교 중에 상대방을 꼬집거나 깨무는 것은 흔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심리학적이기까지 하다. 쾌감과 폭력은 언제나 함께 가는 현상이란다. 그리고 덧붙인다. 사랑과 분노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 P35

과잉과 과소는 양의 문제다. 여기서 우리는 크라프트에빙의 분류법이 19세기 서양의학에서 발생한 거대한 패러다임의 변화와 연관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 P36

그러나 문제는 양은 재기만 할 뿐만 아니라 평가도 해야 한다는 데 있다. 과잉과 과소는 양이 아니다. 그것은 평가다. 따라서 여기에도 기준이 설정되어야 한다.  - P36

이 자리에서 크라프트에빙이 제시한 병리 전부에 대한 당시의 사회적 통념을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략) 실망스럽게도 우리의 주인공은 그 기준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묘하게도 기준과 관련된 발언은 무수히 했다. - P37

크라프트에빙은 병리의 원인을 제시하면서 논의의 영역을 뜻밖의 장으로 전치시킨다. 바로 도덕과 윤리의 장이다. - P37

사실 크라프트에 도덕과 결부시키지 않고 성 병리를 논의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 14세이하의 미성년을 탐하는 것도, 노출증도, 조각상과 유사 성교를 하는것도, 시간도, "도덕 감정이 원체부터 부재하거나 잃어버렸거나 순간적으로 흐려진 탓"이다. 성도착자는 모두 "윤리적 백치"이고 "도덕적 지진아이다.*

* 필자는 윤리와 도덕이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윤리는 인류의 규범이고 도덕은 특정 공동체의 규범이다. 따라서 윤리는 보편적인 것이고, 도덕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양자를 날카롭게 구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당대의 성과학자들이 별다른 기준 없이 두 개념을 섞어 썼기 때문에 여기서 사후적으로 구분하자니 인용할 때마다 설명을 덧붙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고, 또한 역사가란 당대인들의 사고 지평을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는 신념도 한몫했다. 당대인의 주장을 그대로 옮기지 않을 경우에는 문맥에 따라윤리와 도덕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인들의 사유 지평을 분명히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의 도덕이 인류의 윤리라고 믿었다. - P37

앞에서 우리는 당대의 성과학은 지식을 쌓기보다는 분류했다고 했는데, 그 분류 작업에서도 그들은 인과관계를 논하기보다 특정한 성 유형을 정의하고 있었다. 따라서 크라프트에빙의 갈지자걸음을 납득하려면 그의 성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 P38

19세기 말에 충동은 정신과 육체의 경계에 위치하는 것으로 이해되고있었다. 또한 크라프트에빙은 충동으로서의 성이 삶의 모든 영역, 즉 타인과의 관계, 노동과 성취, 예술적 취향, 종교적 경건성의 형태 등에 스며든다고 파악했다.¹¹ - P38

11 R. v. Krafft-Ebing, Psychopathia Sexualis, p.1 - P525

성이 개별적인 신체 내에 자리하되, 그 인간의 정신적 삶과 사회문화적 삶을 좌우한다는 발상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성이 ‘자율적인‘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뜻한다.  - P38

자율적인 성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실제로 크라프트에빙의 책 곳곳에서 공포가 출몰한다.  - P39

 그러나 19세기 후반이라는 ‘해방된‘ 개인의 세상에서 무엇이 성을 통제할 수 있겠는가? 이 문제에 부딪친 크라프트에빙이 꺼내든 낡은 칼이 바로 윤리와 도덕이다. - P40

게다가 크라프트에빙이 지치지 않고 강조한 것처럼, 성이 노동과 경제적 성취, 예술적 취향, 종교성에 스며드는 것이라면, 그 윤리에는 당연히 노동, 재산, 미적 취미, 종교적 경건성이 포함된다. 이는 그러한 부르주아적 윤리와 문화 및 성취를 거부하거나 그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성도착 혹은 잠재적인 성도착 혐의가 씌워진다는 것을 뜻한다. - P41

크라프트에빙의 성 개념에는 또 한 가지 층위가 존재한다. 도덕은 무릇 공동체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크라프트에빙이 성 개념을 논할 때 사회가 언급되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 P42

크라프트에빙의 과학적 성에서 진화론은 서로 연관된 두 가지 영역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국가와 사랑이 그것이다. 앞서 말한 바처럼, "감각적인 성"의 창궐은 "국가의 파멸, 국가의 물질적·도덕적·정치적 파탄"을 낳는다. 따라서 성과 성 병리는 국가적인 문제다. - P42

(전략).
크라프트에빙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플라톤적인 사랑"이 "괴물"이자 "자기기만"이라고 단언한다. 사랑의 뿌리는 "감각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성 무능력자는 남성다운 특징을 상실해버리고 급기야 자신감마저 잃어버린다. 그런 남자는 "이기적이고, 속물적이고, 무기력하고, 자존감과 명예심을 잃고, 타인과 불화하고, 우울한 인간이 된다.¹⁵ - P43

10 R. v. Krafft-Ebing, Psychopathia Sexualis, p.13 - P525

크라프트에빙에게 인간 진화의 역사란 동물과 다름없는 생식적인 성이 도덕과 낭만적 사랑에 의해 관리되는 단계로 진보하는 것으로, 그로부터 이탈하는 성은 의당 해당 공동체를 퇴보로 이끈다.  - P43

 퇴행론은 『성 정신병리』의 모든 맥락에서 튀어나온다. 그는 심지어 열정적인, 즉 "감상적인sentimental"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조차 "유전적으로 취약한 인물"로 평가한다. - P44

동성애와 성 인격

지금까지 우리는 크라프트에빙의 성 범주화가 과잉과 과소에 입각해 있었다는 점에서 시작하여 그 진화론적 함의까지 추적해왔다. 그러나 이 분석에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성 유형을 건너뛰었다. 바로 우리의 주제인 동성애다. - P45

동성애에 대한 크라프트에빙의 설명은 아주 간명하다. 남성 동성애자는 신체는 남성인데 정신은 여성인 사람이다.  - P45

사상사적으로 보아, 크라프트에빙에게 젠더라는 기준을 전해준 사람은 카를 하인히리 울릭스Karl Heinrich Ulrichs였다. - P45

변호사였던 울릭스는 1864년부터 1879년에 이르는 시기에 동성애에 대한총 열두 편의 에세이를 발표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하였고, 동성애 처벌법이 잘못된 것이라고 외쳤으며, 동성애자들 간의 결혼의 합법화까지 주장했다. - P46

젠더 문제, 특히 여성성 문제는 19세기 중반에 이미 인간과 세계를 관찰하는 지배적인 담론이었다. 물론 여성이 남성과 다르다는 발상이 19세기에 와서 비로소 부각되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전근대의 서양에서도 여성은 언제나 남성과 다른 존재였다.  - P47

(전략). 생물학적인 차원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몸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여겨졌다. 다만 발달이 상이하게 전개되어, 예컨대 여성의 자궁은 뒤집힌 페니스로 간주되었다.
또한 전근대 여성은 신의 뜻에 따라 출산을 담당하는 존재로 규정되었으나, 여성성은 결코 생식 기능에 한정되지 않았다. - P47

흥미로운 점은 몸을 자연화한 그 과정을 이끈 것이 여성성 담론이었다는 사실이다. (중략), 묘하게도 의사들은 여자를 사랑과 모성에 국한시키면서도 동시에 자연적인 성에 좌우되는 존재로, 그것도 성기에의해 좌우되는 존재로 표상했다. - P48

크라프트에빙의 젠더는 19세기 후반의 성 담론 지형과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남자의 성욕은 "공격적이고 질풍노도"와 같으며 "적극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이 남자의 전부인 것은 결코 아니다. - P49

그는 그 이분법을 그가 공들여 논한 모든 성 병리에 적용했다. (중략), 때리거나 깨무는 것은 남자의 속성인 "공격성의 표현이다. 바로 그 때문에 사디즘은 주로 남자에게서 나타나고 여자에게서는 드문 편이다. 마조히즘은 정확히 그 반대다. 그것은 여자의 속성인 "수동성"이 병적으로 타락한 현상이다. - P49

페티시즘의 경우는 모호한 구석이 있다. 젠더에 중립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P50

남녀이분법의 역전이 가장 잘 적용될 수 있는 성 유형은 동성애다. 우선 지적할 점은, 그가 여자 동성애자를 별도로 논하지 않고 그저 남자 동성애자의 작은 일부로 다루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가 당대의 전반적인 경향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 P50

또 한 가지 지적할 사항은, 그가 동성애를 분류할 때 우리가 이제까지 언급하지 않았던 기준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선천"과 "후천"이 그것이다. - P50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학문 내적 차원의 이유를 들 수 있다. 당시 정신의학은 생물학에 크게 빚지고 있었다. (중략).
인간의 외부가 인간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 또 다른 학문은 심리학이다. (중략). 예컨대 프로이트가 프랑스의 히스테리 연구를 둘러본 때가1880년대 중반이다. - P51

정치적이고 법률적인 이유도 있었다. 만일 동성애를 선천적인 것이라고만 규정하면 이에 대한 처벌은 이율배반적인 것이 되고 만다. 의지가 작동하지 않는 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근대 서양의 형사법적 원칙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 P51

마지막으로 의료의 차원이 있다. 선천설을 택하면 의사에 의한 치유는 사실상 배제되고, 후천설을 택하면 의사에게 활동 공간이 열린다. 동성애의 의료적 · 법적 차원은 『성 정신병리』의 두 번째 부제가 "의료·법의학적 연구"인 것에서도 드러난다. - P52

(전략), 크라프트에빙이 선천적 동성애자의 경우 친인척들 역시 신경 정신병리를 앓는다고 주장했다는 데 있다. 단순한 유전론이다. - P53

그러니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동성애자가 여성화된 남성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그렇게 "역전된 성 감각"을 크라프트에빙은 성도착으로 간주했다. - P53

(전략). 그러나 『성 정신병리에 담긴 크라프트에빙의 시선은 그 일반명제가 함축하는 것과 종류가 다르다. 크라프트에빙은 그 책에서 객관적인 진술 뒤의 구조로서만이 아니라, 환자들과 함께 직접 등장한다. 그는 그 책에 다른 연구자들이 공개한 환자에 대한 기록, 자신의 임상기록, 그를 찾아온 환자와의 대화 내용, 그에게 발송된 환자의 편지 등을 통째로 제시해놓았다. 사실 크라프트에빙의 책이 그토록 인기를 끌고 영향력을 발휘한 것도, 성 병리에 대한 체계화 작업 외에 그러한 기록들, 즉 개별 사례들이 외치던 목소리 덕분이었다. - P54

당사자의 목소리가 책에 등장한 것에도 역사가 있다. 동성애로 국한시킬 경우 독일에서 그 시작은 크라프트에빙의 선배 법의학자인 카스퍼Johann Ludwig Casper가 했다. - P54

동성애를 하나의 인격으로 구성하려는 크라프트에빙의 시선은 광범하고 집요했다. 그는 부모의 신체, 직업, 병력, 특히 신경병의 유무, 사망원인, 특히 자살 여부를 물었고, 가능하면 조부모와 사촌들도 살펴보았다. 당사자 유년기에 대해서는 언제 처음 글을 배웠는지, 인형놀이를 했는지 병정놀이를 했는지, 누구와 놀았는지, 놀이 장소는 집안이었는지바깥이었는지, 어떤 꿈을 꾸었는지, 자주 아팠는지, 학교 성적은 어떠했는지, 어떤 과목에 관심이 갔는지, 성에 대해서는 언제 처음 알게 되었는지, 몽정 혹은 자위는 언제 어떤 계기로 처음 경험했는지, 성교는 언제가 처음이었는지, 그 대상이 이성이었는지 동성이었는지, 그때 느낌은 어떠했는지 등등을 물었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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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임금이 듣고 나서 감동하여 즉시 홍 아무개를 풀어주고 인형을 경상감사로 임명하며 말했다.
"그대가 만일 감사의 지위를 가지지 않으면 길동을 잡지 못할 것이다. 일년 기한을 줄 테니 속히 잡아들이라." - P29

"길동아, 네가 한번 집을 떠난 뒤 생사를 알지 못하여 아버지께서는 깊은 병을 얻으셨다. 너는 갈수록 불효를 끼칠 뿐 아니라 나라에 큰 근심이 되니, 무슨 마음으로 불충불효를 하고 도적이 되어 세상에 비할 데 없는 죄를 짓느냐? 이 때문에 임금께서 진노하시어 나를 시켜 너를 잡아들이라 하셨다. 이는 피치못할 일이니 너는 일찍 서울로 올라가 왕명을 따르도록 하라" - P30

이때 팔도에서 다 길동을 잡아 올리니 조정과 서울 사람들이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몰랐다. 임금이 놀라서 온 조정 신하들을 모으고 몸소 죄인을 다스리는데, 여덟 길동을 잡아 올리니 그들이 서로
"네가 진짜 길동이지, 나는 아니다."
하며 싸우니 어느 것이 진짜 길동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 P31

내어 입에 넣으니 홍공이 잠시 후 정신을 차렸다. 여덟 길동이 임금께 아뢰었다.
"저의 아비가 나라의 은혜를 많이 입었사온데 제가 어찌 감히 나쁜 짓을 하오리까마는, 저는 본래 천한 종의 몸에서 났기로 그 아비를 아비라 못 하옵고 그 형을 형이라 못 하와 평생한이 맺혔기에 집을 버리고 도적의 무리에 참여하였사옵니다. (후략)."
하고 말을 마치자 여덟 명이 한꺼번에 넘어지기에 자세히 보니다 초인이었다 - P32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경상감사에게 길동 잡기를 재촉하니감사가 왕명을 받고는 황공하고 송구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하루는 길동이 공중으로부터 내려와 절하고,
(중략).
하니 감사가 이 말을 듣고는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 철없는 아이야. 너도 나와 형제인데 부형의 가르침을 듣지 않고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니 어찌 애달프지 않으랴. (후략)."
하고 급히 길동의 왼쪽 다리를 보니 과연 사마귀가 있었다. 즉 - P33

 여러 날 만에 서울에 다다라서는 대궐 문에 이르러 길동이 한 번 몸을 솟구치니 쇠사슬이 끊어지고 수레가 깨어져,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듯 공중으로 오르더니 나는 듯이 구름에 싸여 가버렸다. - P33

이때 여러 신하 중 한 사람이 아뢰기를,
"길동의 소원이 병조판서를 한번 지내면 조선을 떠나겠다하옵고, 한번 제 소원을 풀면 제 스스로 인사를 드리러 올 터이니 그때를 타 잡는 것이 좋을까 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즉시 길동에게 병조판서를 제수하고 사대문에 글을 써 붙였다. - P34

길동이 제 거처에 돌아와 부하들에게 명하기를,
"내가 다녀올 곳이 있으니 너희들은 아무 데도 출입하지 말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라."
하고 즉시 몸을 솟구쳐 남경으로 향하여 가다가 한 곳에 다다르니 그곳은 율도국이었다. 사방을 살펴보니 산천이 깨끗하고 인물이 번성하여 편안하게 살 만한 곳이었다. - P35

소년은 땅에 엎드려,
"저는 전임 병조판서 홍길동이옵니다."
(중략)
"제가 전하를 받들어 만세를 모실까 했으나 천한 종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문(文)으로는 벼슬길이 막혀 있고 무(武)로는 추천받을 길이 막혀 있습니다. (중략)."
말을 마치고 공중으로 올라가 나는 듯이 가니 임금이 그 재주를 못내 칭찬하였다. 그 후로는 길동의 폐단이 없으니 사방이 태평하였다. - P36

하루는 길동이 화살촉에 바를 약을 구하러 망당산으로 가다가 낙천 땅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백룡이라는 부자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재질이 비상하여 애중하게 여겼으나 어느 날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어나면서 그 딸이 없어져 버렸다. (중략). 부부는 슬퍼하며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누구라도 내 딸을 찾아주면 재산의 반을 주고 사위를 삼으리라."
하였다. 길동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측은하였으나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 P37

 길동이 약주머니에서 독약을 내어 급히 온수에 타서 먹이니 한참 만에 큰 소리를 지르고 죽었다. 모든 요괴가 일시에 달려들었으나 길동은 신통술을 부려 모든 요괴를 물리쳐 나가는데 문득 젊은 여자 둘이 애걸하였다.
"저희는 요괴가 아니라 세상 사람으로 잡혀 왔사오니 가여운 목숨을 구하여 세상으로 나가게 해주셔요."
길동은 백룡의 일을 생각하고 그들이 사는 곳을 물었더니 하나는 백룡의 딸이요, 또 하나는 조철의 딸이었다. - P38

길동이 탄식하면서,
"내가 하늘의 별을 보고 부모의 안부를 짐작해 왔는데, 지금 하늘을 보니 부친의 병세가 위중하게 되신 것 같다. 그런데도 내 몸이 먼 곳에 있어 가 뵙지를 못할 듯하구나."
하니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였다. - P39

이때 홍 판서가 문득 병을 얻어 위증하게 되자 부인과 인형을 불러 당부하기를,
"내가 죽어도 다른 한이 없으나 길동의 생사를 알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구나. 제가 살아 있으면 찾아올 것이니 적서를 구분하지 말고 제 어미를 잘 대접해라."
하고 숨을 거두었다.  - P39

"형님께서 어찌 아우를 몰라보십니까?"
하기에 상주가 자세히 보니 바로 길동이었다. 붙잡고 통곡하며,
"아우야, 그사이 어디 갔더냐? 아버지께서 평소에 유언이 간절하셨는데 이제야 오니 어찌 자식의 도리이겠느냐?" - P40

길동이 부친 제사를 극진히 받들어 삼년상을 마치고 나서 모든 장수들을 모아 무예를 익히며 농업에 힘쓰니 병사는 잘 조련되고 양식도 풍족하였다. - P41

인형이 기뻐하면서 말했다.
"너의 재주 기이한지라, 좋은 터를 구했다니 무슨 염려가 있으랴."
다음 날 길동이 부친 시신을 운구하여 제 모친을 모시고 서 강가에 이르니 미리 지시해 놓은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 P40

여러 날이 되자 인형은 길동과 춘섬을 이별하면서 산소를 극진히 모시라 당부한 후 산소에 하직 인사를 드리고 출발하였다. 본국에 이르러 모부인을 뵈옵고 전후 사실을 말씀드리니부인이 신통하게 여겼다. - P41

남쪽에 율도국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기름진 평야가 수천 리나 되어 실로 살기 좋은 나라였고 길동이 마음속으로 늘 그리던 곳이었다. 모든 사람을 불러 당부하기를,
"내가 이제 율도국을 치고자 하니 그대들은 최선을 다하라."
하고는 그날 군대를 이끌고 떠났다.  - P41

 길동이 성안에 들어가 백성을 달래어 안심시키고 왕위에 오른 후 율도왕을 의령군에 봉하였다. 마숙과 최철을 각각 좌의정과 우의정으로 삼고나머지 여러 장수에게도 각각 벼슬을 내리니 조정 신하들이 만세를 불러 하례하였다. - P42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삼십 년 만에 갑자기 병이 들어 별세하니 나이 일흔둘이었다. 왕비도 이어 죽으니 선산에 안장한 후 세자가 즉위하여 대대로 이으면서 태평스럽게 지냈다. - P43

작품 해설

정하영

1. 문제 작가의 문제 작품 「홍길동전」

「홍길동전」은 한국고소설 가운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문제의 작품이다. 최초의 국문소설이고, 허균의 창작소설이며, 민감한 사회문제를 제기한 사회소설이라는 평가가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는 작품이다. - P107

「홍길동전」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작자 허균(許筠, 1569~1618)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 P107

허균은 자유분방하고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행동 때문에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아 파직을 당했다. 한때는 당시의 집권 세력인 대북파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나 마지막에는 역적모의를 주도했다는 죄목으로 저잣거리에서 사지가 찢기는 참형(斬刑)을 당했다. 그는 생전에 수많은 저작을 남겼으나 비참한 죽음으로모두 사라지고, 그 가운데 일부만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 P108

허균과 「홍길동전」의 관계는 실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그가 이 작품을 지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허균이 지었다는 「홍길동전」의 원본은 현재 남아 있지않고, 그가 이 작품을 지었다는 증거 또한 허균 자신의 문집이나 관련 자료에서 찾아볼 수 없다. - P109

택당의 증언을 근거로 초창기 국문학 연구자들은 허균을「홍길동전」의 작자로 확인하였고, 이를 토대로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평가하였다. 그러나 허균을 작자로 단정한 데는 택당의 증언 이외에도 허균 자신의 행적이나 사상이 작품의 내용과 부합한다는 점이 함께 고려되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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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독자들에게


(전략). 어떤 기회를 맞닥뜨린 대로 받아들이다 보면, 인생이 어디로 흘렀는지 되돌아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군인이나 집단학살 가해자 등 특정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수행한 대부분의 연구는 대체로 적절한 사람들을 우연히 만난 결과였을 뿐, (후략). - P10

그 일은 2016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나는 영향력 있는 과학 저널에 ‘명령에 따르는 것이 뇌 기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아보는 획기적인 연구를 발표했다. - P11

현장 조사를 한다는 아이디어는 실제로 2018년 BBC 인터뷰 이후에 떠올랐다. 어느날 조르주 바이스Georges Weiss에게서 이메일을 받았다. 그는 비영리 단체인 라디오 라 베네볼렌치야 인도주의 지원 도구 재단Radio LaBenevolencija Humanitarian Tool Foundation의 이사였다. - P11

그가 르완다와 집단학살을 이야기했을 때 내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복종이 인지 작용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 중이었지만, 비교적 최근에 집단학살이 일어난 나라에 가는 일은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 P12

나는 이전 학자들처럼 실험실에서 명령에 따라 ‘폭력‘이 발생하는 모습을 관찰했는데 그 결과는 놀라웠다. 지난 8년 동안 나는 다른 사람에게 실제 고통을 주는 전기 충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4만 5,000건이나 내렸다. 그중 약 1,340건의 명령이 거부되었다(대략 2.97퍼센트). 다시 말해 1,500명 중 약 44명만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물론 그들도 지시받은 모든 명령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 P13

인간이 명령에 복종하는 능력, 심지어 끔찍한 명령까지도 따르는 능력은 더 이상 증명할 필요가 없다. 하워드 진Howard Zinn은 1997년에 출간된그의 책에서 "역사적으로 전쟁, 집단학살, 노예제도 같은 가장 끔찍한 일들은 불복종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복종 때문에 일어났다"라는 유명한말을 했다. 많은 사회는 위계질서가 있는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다.*

• H, Zinn, The Zinn Reader Writings on Disobedience and Democracy. (Seven StoriesPress, 1997), p. 420, - P14

 수많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 민간인 역시 권위자의 지시를 따르며 다른 집단에 잔혹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 P15

처음에 나는 이 책을 ‘의인들Righteous‘에게 바치고자 했다. 여기서 의인들이란 집단학살 중에 선전에 저항하고 말살 위협에 직면한 인간들을 구한 자들이다. 그러나 이 책을 그저 의인들에게만 바치면 전달하려는 더 큰메시지를 놓치게 될 것이다. - P15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든 부도덕한 명령을 거부했고, 그 결정으로 인한 결과를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선택을 지킨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 P16

1

집단학살 가해자들의

들어보기


감정은 없었고 감정을 갖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으며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해야 했습니다.
감정은 없었고 죽이는 것이 일이었으며
일단 살인을 시작하면 살인은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전업이 되었죠.

과거 집단학살 가해자 P171, 르완다, 2021년 8월 인터뷰.
키냐르완다어를 번역함. - P64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는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동안 자행된 잔혹행위의 상징이 되었으며 이 수용소에서약 11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나는 권위에 대한 복종을 연구하면서 이 수용소와 나치 학살 당시 일어난 일을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 P64

20세기에만 여러 정부가 집단학살, 대량학살, 집단 살인, 고의적인 기근으로 살해한 사람의 수는 최소 2억 6,2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인류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세기였다. 나치의 집단학살 이후 사람들은 "다시는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라고 외쳤지만, 그 이후에도 더 많은 사건이 발생했고 21세기에도 여전히 같은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다. - P66

1948년 12월 9일 유엔 총회가 채택한 집단학살협약 제2조는 집단학살을 "국가, 민족, 인종 또는 종교 집단의 전체 혹은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자행하는 다음과 같은 행위"로 정의했다.

ⓐ 집단 구성원 살해
⑥ 집단 구성원에게 심각한 신체적 또는 정신적 피해를 주는 경우
ⓒ 집단생활 조건에 의도적으로 영향을 끼쳐 전체적이든 부분적이든 집단의 실질적인 파괴를 초래하는 경우
ⓓ 집단 내에서의 출산을 막으려는 조치를 부과하는 경우ⓔ 집단의 아이들을 강제로 다른 집단으로 옮기는 경우 - P67

하지만 인간 역사에는 집단학살의 정의에 잘 맞는 사례가 훨씬 더 많다.
일부 집단학살은 여전히 부인되거나 의도적으로 축소되는데, 특히 이러한 사건에 가담했다고 비난받은 사람들과 그들을 방관한 동료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 P67

르완다와 캄보디아에서 진행한 많은 인터뷰에 따르면 응답자 대부분은 주된 이유가 그저 명령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밝혔다.²⁷ 그들은 복종했다. 그래서 흔히 그들은 책임이 없다고 느낀다. - P68

27 E. A. Caspar, Understanding individual motivations and deterrents: Interviews with genocide perpetrators from Rwanda and Cambodia. Journal of PerpetratorResearch (2024, in press). - P352

르완다와 캄보디아에서의 인터뷰 수행의 어려움

2021년 8월과 9월에 우리는 날마다 르완다의 여러 마을을 차로 다녔다. (중략). 우리는 감옥에서 풀려난 과거 집단학살 가해자 55명을 인터뷰했다. - P68

인터뷰한 집단학살 가해자는 모두 남성이었다. 이렇게 대상이 모두 남성인 첫 번째 이유는 여성 가해자가 남성 가해자보다 훨씬 적었기 때문이다.²⁸ 두 번째 이유는 집단학살 이후 많은 남성이 감옥에 갇혔지만 여성은 일반적으로 직접 가해자로 간주되지 않아서 그렇다. - P68

28 P. Verwimp. An economic profile of peasant perpetrators of genocide: Micro-level evidence from Rwanda, Journal of Development Economics 77 (2005), 297-323. - P352

응답자의 평균 연령은 60세였지만, 41세에서 79세까지 연령 차이가 있었다. 사실 일부 응답자는 집단학살에 가담했을 당시 미성년자였다.  - P69

우리는 인터뷰를 하면서 생각하지 못한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예를들어 어느 날 인터뷰 대상자 중 일부가 예상치 못한 ‘파업‘을 했다. - P69

개인의 행동과 신념 역시 우리 연구에 영향을 주었다. 인터뷰에 응한 어떤 가해자는 너무 취해서 답변을 신뢰하기 힘들었다. - P70

응답자 중 다섯 명은 가차차법원에서 기소되었음에도 자신들이 전혀 죄가 없으며 어떠한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중략). 실제로 무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 외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 P70

우리 표본에서 나온 각 범죄의 빈도를 분석하면 응답자 49명 중 19명은 집단 공격에 가담했다고 답했고, 29명은 사람을 살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답했으며, 11명은 타인의 물건을 약탈하거나 망가뜨린 혐의로 형을 선고받았다고 답했다. - P71

저질러진 잔혹행위를 고려할 때 가해자들에게 선고된 형량에 자주 놀라곤 했다. (중략). 그러나 르완다는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첫째, 국가를 재건하고 경제가 다시 돌아가게 만들어야 했다. (중략). 둘째, 교도소의 수용 인원이 완전히 초과되었다. 최대 4만 명의 수감자까지 수용할 수 있었지만 집단학살 이후 약 12만 명이 투옥되었다.²⁹ - P72

29 P. Clark, When the killers go home: Local justice in Rwanda. Dissent 52 (2005). 14-21. - P352

인터뷰 대상자에게 할 몇 가지 질문을 준비했지만 인터뷰 대상자가 원한다면 다른 측면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었다. 그들이 집단학살 당시 어떤 범죄를 저지른 것인지 알려준 후,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그 범죄를 저지를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무엇 때문에 살인을 멈추었는지 물었다. - P73

내가 처음 캄보디아문서센터의 유크 창에게 연락해 연구 프로젝트를위해 캄보디아 집단학살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찾고 있다고 말했을 때, 그가 당황한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중략). 하지만 그는 내게 캄보디아에서는 집단학살 당시 무슨 일을 했든 모두 ‘생존자‘로 간주된다고 말했다. - P73

나는 당시 캄보디아 인구의 4분의 1이 죽은 것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달리 불러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르완다에서는 ‘생존자‘라는 단어는 피해자에게만 사용하고, 피해자들은 실제로 ‘피해자‘라는 단어보다 ‘생존자‘라는 단어를 선호했다. - P74

나는 안롱벵에 위치한 센터의 소장과 직원들에게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크메르루주 조직의 과거 구성원‘인지 알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나는 ‘가해자‘라는 말을 감히 쓸 수 없었다. 분명히 사람들이 일관되게 불편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 P74

나는 처음부터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인터뷰 참여자들에게 질문했을 때 거의 모두가 자신이 피해자라고 말했다. 심지어 번역을 도와준 연구조교들조차도 특정 인물이 피해자라고 이야기했지만, 센터 소장이 나중에 그들 역시 전 크메르루주였다고 말해주었다. 실제로는 예상보다 훨씬 더복잡한 과정이었다. - P75

캄보디아에서는 명령을 따른 행동이 금지되어야 할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책임을 경감시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P75

캄보디아 사람들이 내게 말했듯이 진짜 피해자는 정권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었다. 모두가 유죄이거나 모두가 무죄인 상황이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진짜 피해자는 거의 남지 않았고 오직 정권 구성원만 남은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 정권 아래에서 고통을 겪었고 ‘단지 명령에 따랐을 뿐인 피해자만 남은 것이다. - P76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정권 아래에서는 야자나무 작업반, 의료반, 이동작업반, 중년 이동 작업반, 여성 이동 작업반, 선생, 군대, 감옥 경비 등 많은 역할이 부과되었다. 그래서 인터뷰 대상자들에게 크메르루주 정권 동안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물었다. 그들의 역할을 아는 것이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죽인‘ 사람과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단순히 낮은 수준의 역할을 한 사람을 식별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했다. - P77

또한 나는 대학의 연구 조교 대신 현지 센터 직원에게 인터뷰를 진행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이는 인터뷰 대상자가 질문에 더 편안하게 대답할 수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전직 크메르루주 조직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거의 말하려 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가족에게도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 P78

르완다에서는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범죄 가능성을 인정했지만 캄보디아에서는 60건의 인터뷰를 시행한 결과, "1975년과 1979년 사이에 누군가를 다치게 한 적이 있나요?"라는 질문에 모두 "아니요"라고 답했다. - P78

물론 이 기간에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들만 인터뷰 응답자로모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10명은 1975년부터 1979년 사이에 군인이나간수로서 수감자를 킬링 필드*로 이송한 적은 있다고 시인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그때 누구에게도 해를 끼친 적이 없다고 말했고 한 명은 답변을거부했다.


* 킬링 필드는 크메르루주가 주로 국가의 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 지식인, 전문가, 종교인 소수 민족을 표적으로 삼아 희생자를 처형하고 매장한 곳이다. 크메르루주 정권은 통치의 잠재적 위협을 제거하고 농민을 기반으로 한 동질적 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크메르루주가 무너진 후 법의학 팀은 다양한 킬링 필드의 집단 매장지를 발굴해 희생자들의 유해와 개인 소지품을 발견했다. 집단 매장지는 캄보디아 전역에 흩어져 있었는데, 주로 과거의 감옥이나 강제노동수용소 근처였다. 널리 알려진 장소로는 쯔엉아익, 뚜얼슬렝 등이 있다. 후자는 원래 학교 건물이었지만 감옥과 고문 센터로 개조되었다. 이는 대량학살과 잔혹행위의 규모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 P79

인터뷰 대상자가 인터뷰에 응하도록 설득하는 어려움 외에도, 사건이거의 50년 전에 일어났고 대부분의 인터뷰 대상자가 상당히 나이가 많았다는 또 다른 난관이 있었다. 우리는 일부 인터뷰에서 날짜나 때로는 역할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P80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나요?

르완다에서는 응답자의 대다수가 ‘나쁜 정부‘의 명령을 따랐기 때문에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일부는 강요 때문에 그런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했고, 다른 일부는 집단의 영향을 받아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 P81

동조conformity는 어떤 집단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 집단에 맞추려고 자신의 행동을 바꾸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개인이 동조할 때 그들은 단지 다수에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할 뿐이다. - P81

집단 공격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르완다의 무장 민병대인 인테라함웨는 1994년 집단학살에 책임이 있다. (중략). 실제로 범죄에 관해 물었을 때 다수의 과거 르완다 가해자들은 어떻게 죽였는지 설명하기 위해 이기테로igitero (복수형은 ibitero)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집단 공격을 의미한다.³³ - P82

33 C. Mironko, Igitero: Means and motive in the Rwandan genocide. Journal of Genocide Research 6(1) (2004), 47-60. - P352

나는 단순히 르완다에 도착하기 전에 읽었던 기존 인터뷰에서도 반복해서 나오는 문구인 "우리 집단이 한 일입니다"보다 훨씬 자세하고 정확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중략). 집단 내에서 살인 행위를 수행한다는 점이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쳐, 태어나서 한 번도 살인을 저지른 적이 없었는데도 살인을 저지를 수 있었다. - P83

(나쁜) 권위에 대한 복종

1992년에 미국의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브라우닝Christopher Browning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질서경찰ordnungspolizei, Orpo의 한 부대인 101예비경찰대대에 소속된 125명의 심리 분석을 담은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그들이 심문 중에 제공한 증언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³⁴ 그들 중 다수는 가족이 있는 중년이었다. - P84

34 C. R. Browning, Ordinary Men: Reserve Police Battalion 101 and the Final Solution in Poland. (New York: Harper Collins, 1992). - P352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핑계를 대는 것의 주된 목적은 책임이 없음을 표현하고자 함이다. 그 방법으로 그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과 해명을 회피한다.  - P85

내가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면, 49명의 인터뷰 대상자중 33명이 그들이 대량학살을 저지른 이유는 ‘나쁜‘ 정부가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P86

르완다에서는 권위에 대한 존중과 경의가 문화적으로 중요하다. 많은학자와 언론인은 권위에 대한 존중이 집단학살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했다.³⁸ ³⁹ - P87

38 E. L. Paluck & D. P. Green, Deference, dissent, and dispute resolution: An experimental intervention using mass media to change norms and behavior inRwanda.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103 (2009), 622-644.


39 G. Prunier, The Rwanda Crisis:History of a Genocide. (C. Hurst & Co, 1998). - P353

하지만 권위에 대한 복종이 지역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기는 해도 절대적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이며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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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

전경판 24장본

조선조 세종 때에 한 재상이 있었는데 성은 홍씨요, 이름은아무개였다. 대대 명문거족의 후예로서 젊은 나이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명성이 조정에서 으뜸이었으며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워 그 이름을 온 나라에 떨쳤다. - P7

"상공의 체통이 있으신데 이를 생각하지 않으시고 경박한젊은이의 더러운 행실을 하고자 하시니 저는 따르지 못하겠나이다."
하면서 말이 끝나자 손을 뿌리치고 나가 버렸다. (중략). 그때 마침 시비 춘섬이 차를 받들고 나왔다. 마침 주위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춘섬을 이끌고 곁방에 들어가 바로 관계를 가졌는데 그때 춘섬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 P8

길동이 점점 자라 여덟 살이 되자 총명하기가 보통이 넘어하나를 들으면 백을 깨달았다. 공은 더욱 귀여워했지만 천한 어미 소생이어서 길동이 늘 아버지니 형이니 하고 부르면 그때마다 꾸짖고 그렇게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 P8

"(전략). 나는 어찌하여 이렇게 외롭고, 아버지와 형이 있는데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심장이 터질 지경이라,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 P9

길동은 공손한 태도로 대답하였다.
"소인은 마침 달빛을 즐기는 중입니다. 만물이 생겨날 때부더 오직 사람이 귀하게 태어났으나 소인에게는 이런 귀함이 없사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지요?"
(중략).
하니 길동이 절하고 말씀드리기를,
"소인이 평생 서러워하는 바는 대감의 정기를 받아 당당한 남자로 태어났고, 낳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옵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 P9

원래 곡산어미는 곡산 땅 기생으로 상공의 첩이 되었는데 이름은 초란이었다. 아주 교만하여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공에게 고자질을 해서 집안에 무수한 폐단을 만들었다. 자신은아들이 없는데 춘섬은 길동을 낳아 상공으로부터 늘 귀여움을 받게 되자 속으로 앙심을 품고 길동을 없애 버릴 마음만 먹고있었다. - P11

"너는 어떠한 여자이며 무슨 일로 왔느냐?"
"소인은 관상 보는 사람이온데 우연히 상공 댁에 이르렀습니다."
(중략).
하니 관상녀가 마지못한 체하며 주위 사람들을 내보내게 하고나서 말했다.
"공자의 관상을 보니 가슴속에 조화가 무궁하고 미간에 산천 정기가 영롱하오니 진실로 왕이 될 기상입니다. 장성하면 장차 온 집안이 멸망하는 화를 당할 걱정이 있으니 상공께서는 유념하시옵소서."
공이 듣고 나서 놀란 나머지 한참 동안이나 묵묵히 있다가마음을 진정하고,
(후략). - P12

 초란은 특재에게 전후 내막을 자세히 일러주고는 공에게가서 아뢰었다.
"며칠 전 관상녀가 아는 일이 귀신 같으니 길동의 앞일을 어떻게 처리하려 하시는지요? 저도 놀랍고 두려우니 일찍 길동을없애 버리는 것이 나을 듯하옵니다." - P13

"상공의 병환이 위중하심은 길동으로 인한 것입니다.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길동을 죽여 없애면 상공의 병환도 완쾌되실뿐 아니라 가문도 보존할 것이온데, 어찌 이런 점을 생각하지않으시는지요?" - P14

"너는 무엇 때문에 나를 죽이려 하느냐? 무죄한 사람을 해치면 어찌 천벌이 없겠느냐?"
그러고는 주문을 외니 문득 검은 구름이 일어나며 큰 비가 퍼붓듯이 쏟아지고 모래와 자갈이 날리었다. 특재가 정신을 가다듬고 살펴보니 길동이었다. 재주가 대단하다고는 여기면서도 ‘저까짓 게 어찌 나를 대적하겠는가.‘ 하고 달려들면서, - P15

길동은 분노를 이기지 못해 그날 밤에 바로 관상녀를 잡아 와 특재가 죽어 있는 방에 들이쳐 박고 꾸짖기를,
"네가 나와 무슨 원수가 졌다고 초란과 짜고 나를 죽이려 했느냐?"
하고 칼로 치니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 P16

길동이 두 줄기 눈물을 감당하지 못해 말을 이루지 못하자공은 그 모습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타일렀다.
"내가 너의 품은 한을 짐작하여 오늘부터는 아비를 아비라 부르고 형을 형이라 부르기를 허락하노라." - P17

상공이 크게 놀라,
"길동이 밤에 와 슬피 울며 하직하기에 이상하다 여겼더니,
결국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니 좌랑이 감히 숨기지 못하여 초란이 그동안 한 일을 아뢰었다. 공이 더욱 노하여 초란을 내쫓고 그들의 시체를 몰래 치운 뒤에 종들을 불러 이런 말을 내지 말라고 당부했다. - P18

한 사람이 길동의 예사롭지 않은 모습을 보고,
"그대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곳을 찾아왔는가? 이곳에는 영웅이 모여 있으나 아직 우두머리를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가 만일 용력(勇力)이 있거든 저 돌을 들어보라." - P18

하루는 여러 사람들이 말하였다.
"우리가 벌써부터 합천 해인사를 쳐 그 재물을 빼앗고자 했으나 지략이 부족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데, 이제 장군의 의견은 어떠하신지요?"
길동은 웃으며,
"내가 장차 출동할 터이니 그대들은 내 지휘대로만 하라." - P19

 길동이 맨 윗자리에 앉아 모든 중을 일제히 청해 각기상을 받게 하고는 먼저 술을 마시며 차례로 권하니 모든 중들이 황공해하였다. 길동이 상을 받고 먹다가 모래를 슬그머니 입에 넣고 깨무니 소리가 제법 컸다. 중들이 듣고 놀라 사죄했지만 길동은 일부러 화를 내어 꾸짖기를,
"너희들이 음식을 어찌 이렇게 더럽게 만들었느냐? 이는 필시 나를 깔보고 업신여긴 탓이다." - P20

"대장부가 이만한 재주 없어서야 어찌 여러 사람의 우두머리가 되리오."
그 후 길동은 스스로 ‘활빈당(活貧黨)‘⁶이라 이름하고 조선팔도로 다니며 각 읍 수령이 불의로 모은 재물이 있으면 탈취하고,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있으면 구제하면서 백성은 침범하지 않고 나라의 재산에는 추호도 손을 대지 않으니 부하들은 그 뜻에 감복하였다.


6) 부자의 제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도무리를 이르는 말이다. - P21

하루는 길동이 여러 부하를 모으고,
"이제 우리가 합천 해인사에 가 재물을 탈취하고 함경감영에가 돈과 곡식을 훔친 까닭에 소문이 파다하고, 또 나의 이름을 써서 감영에 붙였으니, 오래지 않아 잡히게 될 테지만 그대들은 나의 재주를 보라."
하고 즉시 초인(草人)⁷ 일곱을 만들어 주문을 외며 혼백을 붙였다. 

7) 땅을 주름잡아 먼 길을 짧은 시간 안에 간다고 하는 술법이다. - P22

팔도 각 고을이 어지러워 밤에는 잠을 자지 못하고 낮에는 길을나다니지 못하니 감사가 공문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였다.

난데없는 홍길동이라는 대적(大)이 신통한 술법을 부려 각고을 재물을 탈취하고 서울로 보내는 물품을 가로채어 폐단이자심하니 그 도적을 잡지 않으면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를지 알지못할 정도이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좌우 두 포도청에 명하여 잡게 하옵소서.

임금이 보고 크게 놀라 포도대장을 찾고 있는데 팔도에서 연달아 공문이 올라왔다. - P23

하니 우포장 이흡이 아뢰었다.
"신이 비록 재주는 없으나 그 도적을 잡겠사오니 전하께서는 근심하지 마시옵소서. 좌우 포장이 한꺼번에 나갈 필요가어디 있겠나이까?" - P23

 하루는 날이 저물어 주막을 찾아 쉬고 있는데 갑자기어떤 소년이 나귀를 타고 들어와 인사를 했다. 포장이 답례를 하니 그 소년은 갑자기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온 천하가 다 임금의 땅이요, 온 땅의 백성이 모두 임금의신하인데 내가 비록 시골에 살고 있으나 나라의 일이 걱정입니다." - P24

"그대는 정말 장사시오. 내가 여러 사람을 시험해 보았지만나를 움직이게 한 자가 없었는데 그대에게 차이니 오장이 울린듯합니다. 그대가 나를 따라오면 길동을 잡을 것이오."
하고 첩첩산중으로 들어가기에 포장이 생각하기를,
‘나도 힘을 자랑할 만하더니 오늘 저 소년의 힘을 보니 어찌놀랍지 않은가! 이곳까지 왔으니 저 소년 혼자인들 길동 잡기를 근심하리오.‘ - P25

포장이 겨우 정신을 차려,
"소인은 인간 세상의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죄도 없이 잡혀왔으니 살려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애걸하니 전상에서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아, 나를 자세히 보라. 내가 바로 활빈당 당수 홍길동이라네. 그대가 나를 잡으려 하기에 그 용력과 뜻을 알고자어제 푸른 도포 입은 소년으로 꾸며 그대를 인도해 이곳에 와서 나의 위엄을 보여 주는 것일세." - P26

이상한 생각이 들어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제 몸이 가죽 부대 속에 들어 있었다. 간신히 빠져나와보니 부대 셋이 나무에 걸려 있었는데 차례로 끌러보니 처음떠날 때 데리고 왔던 부하들이었다. (중략).
포장이 당부하기를,
"이 일이 너무나 허무맹랑하니 남에게 말하지 말라. 길동의재주는 헤아릴 수 없으니 사람의 힘으로야 어찌 잡겠는가? 우리가 이제 그냥 들어가면 반드시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니 몇 달을 기다리다가 들어가자." - P27

차례대로 열어보니 팔도에서 홍길동이 작란한다는 내용이어서 임금이 크게 근심하여 주위를 돌아보고 묻기를,
"이놈이 사람은 아니고 아마 귀신인 것 같소. 신하 중에서누가 그 근본을 아는 사람이 없겠소?"
하니 한 사람이 나와서 아뢰었다.
"홍길동은 전 이조판서 홍 아무개의 서자요, 병조좌랑 홍인형의 서제(庶)이오니, 이제 그 부자를 잡아다 친히 문초하시면 아실까 하옵니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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