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
전경판 24장본
조선조 세종 때에 한 재상이 있었는데 성은 홍씨요, 이름은아무개였다. 대대 명문거족의 후예로서 젊은 나이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명성이 조정에서 으뜸이었으며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워 그 이름을 온 나라에 떨쳤다. - P7
"상공의 체통이 있으신데 이를 생각하지 않으시고 경박한젊은이의 더러운 행실을 하고자 하시니 저는 따르지 못하겠나이다." 하면서 말이 끝나자 손을 뿌리치고 나가 버렸다. (중략). 그때 마침 시비 춘섬이 차를 받들고 나왔다. 마침 주위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춘섬을 이끌고 곁방에 들어가 바로 관계를 가졌는데 그때 춘섬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 P8
길동이 점점 자라 여덟 살이 되자 총명하기가 보통이 넘어하나를 들으면 백을 깨달았다. 공은 더욱 귀여워했지만 천한 어미 소생이어서 길동이 늘 아버지니 형이니 하고 부르면 그때마다 꾸짖고 그렇게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 P8
"(전략). 나는 어찌하여 이렇게 외롭고, 아버지와 형이 있는데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심장이 터질 지경이라,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 P9
길동은 공손한 태도로 대답하였다. "소인은 마침 달빛을 즐기는 중입니다. 만물이 생겨날 때부더 오직 사람이 귀하게 태어났으나 소인에게는 이런 귀함이 없사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지요?" (중략). 하니 길동이 절하고 말씀드리기를, "소인이 평생 서러워하는 바는 대감의 정기를 받아 당당한 남자로 태어났고, 낳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옵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 P9
원래 곡산어미는 곡산 땅 기생으로 상공의 첩이 되었는데 이름은 초란이었다. 아주 교만하여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공에게 고자질을 해서 집안에 무수한 폐단을 만들었다. 자신은아들이 없는데 춘섬은 길동을 낳아 상공으로부터 늘 귀여움을 받게 되자 속으로 앙심을 품고 길동을 없애 버릴 마음만 먹고있었다. - P11
"너는 어떠한 여자이며 무슨 일로 왔느냐?" "소인은 관상 보는 사람이온데 우연히 상공 댁에 이르렀습니다." (중략). 하니 관상녀가 마지못한 체하며 주위 사람들을 내보내게 하고나서 말했다. "공자의 관상을 보니 가슴속에 조화가 무궁하고 미간에 산천 정기가 영롱하오니 진실로 왕이 될 기상입니다. 장성하면 장차 온 집안이 멸망하는 화를 당할 걱정이 있으니 상공께서는 유념하시옵소서." 공이 듣고 나서 놀란 나머지 한참 동안이나 묵묵히 있다가마음을 진정하고, (후략). - P12
초란은 특재에게 전후 내막을 자세히 일러주고는 공에게가서 아뢰었다. "며칠 전 관상녀가 아는 일이 귀신 같으니 길동의 앞일을 어떻게 처리하려 하시는지요? 저도 놀랍고 두려우니 일찍 길동을없애 버리는 것이 나을 듯하옵니다." - P13
"상공의 병환이 위중하심은 길동으로 인한 것입니다.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길동을 죽여 없애면 상공의 병환도 완쾌되실뿐 아니라 가문도 보존할 것이온데, 어찌 이런 점을 생각하지않으시는지요?" - P14
"너는 무엇 때문에 나를 죽이려 하느냐? 무죄한 사람을 해치면 어찌 천벌이 없겠느냐?" 그러고는 주문을 외니 문득 검은 구름이 일어나며 큰 비가 퍼붓듯이 쏟아지고 모래와 자갈이 날리었다. 특재가 정신을 가다듬고 살펴보니 길동이었다. 재주가 대단하다고는 여기면서도 ‘저까짓 게 어찌 나를 대적하겠는가.‘ 하고 달려들면서, - P15
길동은 분노를 이기지 못해 그날 밤에 바로 관상녀를 잡아 와 특재가 죽어 있는 방에 들이쳐 박고 꾸짖기를, "네가 나와 무슨 원수가 졌다고 초란과 짜고 나를 죽이려 했느냐?" 하고 칼로 치니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 P16
길동이 두 줄기 눈물을 감당하지 못해 말을 이루지 못하자공은 그 모습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타일렀다. "내가 너의 품은 한을 짐작하여 오늘부터는 아비를 아비라 부르고 형을 형이라 부르기를 허락하노라." - P17
상공이 크게 놀라, "길동이 밤에 와 슬피 울며 하직하기에 이상하다 여겼더니, 결국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니 좌랑이 감히 숨기지 못하여 초란이 그동안 한 일을 아뢰었다. 공이 더욱 노하여 초란을 내쫓고 그들의 시체를 몰래 치운 뒤에 종들을 불러 이런 말을 내지 말라고 당부했다. - P18
한 사람이 길동의 예사롭지 않은 모습을 보고, "그대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곳을 찾아왔는가? 이곳에는 영웅이 모여 있으나 아직 우두머리를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가 만일 용력(勇力)이 있거든 저 돌을 들어보라." - P18
하루는 여러 사람들이 말하였다. "우리가 벌써부터 합천 해인사를 쳐 그 재물을 빼앗고자 했으나 지략이 부족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데, 이제 장군의 의견은 어떠하신지요?" 길동은 웃으며, "내가 장차 출동할 터이니 그대들은 내 지휘대로만 하라." - P19
길동이 맨 윗자리에 앉아 모든 중을 일제히 청해 각기상을 받게 하고는 먼저 술을 마시며 차례로 권하니 모든 중들이 황공해하였다. 길동이 상을 받고 먹다가 모래를 슬그머니 입에 넣고 깨무니 소리가 제법 컸다. 중들이 듣고 놀라 사죄했지만 길동은 일부러 화를 내어 꾸짖기를, "너희들이 음식을 어찌 이렇게 더럽게 만들었느냐? 이는 필시 나를 깔보고 업신여긴 탓이다." - P20
"대장부가 이만한 재주 없어서야 어찌 여러 사람의 우두머리가 되리오." 그 후 길동은 스스로 ‘활빈당(活貧黨)‘⁶이라 이름하고 조선팔도로 다니며 각 읍 수령이 불의로 모은 재물이 있으면 탈취하고,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있으면 구제하면서 백성은 침범하지 않고 나라의 재산에는 추호도 손을 대지 않으니 부하들은 그 뜻에 감복하였다.
6) 부자의 제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도무리를 이르는 말이다. - P21
하루는 길동이 여러 부하를 모으고, "이제 우리가 합천 해인사에 가 재물을 탈취하고 함경감영에가 돈과 곡식을 훔친 까닭에 소문이 파다하고, 또 나의 이름을 써서 감영에 붙였으니, 오래지 않아 잡히게 될 테지만 그대들은 나의 재주를 보라." 하고 즉시 초인(草人)⁷ 일곱을 만들어 주문을 외며 혼백을 붙였다.
7) 땅을 주름잡아 먼 길을 짧은 시간 안에 간다고 하는 술법이다. - P22
팔도 각 고을이 어지러워 밤에는 잠을 자지 못하고 낮에는 길을나다니지 못하니 감사가 공문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였다.
난데없는 홍길동이라는 대적(大)이 신통한 술법을 부려 각고을 재물을 탈취하고 서울로 보내는 물품을 가로채어 폐단이자심하니 그 도적을 잡지 않으면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를지 알지못할 정도이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좌우 두 포도청에 명하여 잡게 하옵소서.
임금이 보고 크게 놀라 포도대장을 찾고 있는데 팔도에서 연달아 공문이 올라왔다. - P23
하니 우포장 이흡이 아뢰었다. "신이 비록 재주는 없으나 그 도적을 잡겠사오니 전하께서는 근심하지 마시옵소서. 좌우 포장이 한꺼번에 나갈 필요가어디 있겠나이까?" - P23
하루는 날이 저물어 주막을 찾아 쉬고 있는데 갑자기어떤 소년이 나귀를 타고 들어와 인사를 했다. 포장이 답례를 하니 그 소년은 갑자기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온 천하가 다 임금의 땅이요, 온 땅의 백성이 모두 임금의신하인데 내가 비록 시골에 살고 있으나 나라의 일이 걱정입니다." - P24
"그대는 정말 장사시오. 내가 여러 사람을 시험해 보았지만나를 움직이게 한 자가 없었는데 그대에게 차이니 오장이 울린듯합니다. 그대가 나를 따라오면 길동을 잡을 것이오." 하고 첩첩산중으로 들어가기에 포장이 생각하기를, ‘나도 힘을 자랑할 만하더니 오늘 저 소년의 힘을 보니 어찌놀랍지 않은가! 이곳까지 왔으니 저 소년 혼자인들 길동 잡기를 근심하리오.‘ - P25
포장이 겨우 정신을 차려, "소인은 인간 세상의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죄도 없이 잡혀왔으니 살려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애걸하니 전상에서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아, 나를 자세히 보라. 내가 바로 활빈당 당수 홍길동이라네. 그대가 나를 잡으려 하기에 그 용력과 뜻을 알고자어제 푸른 도포 입은 소년으로 꾸며 그대를 인도해 이곳에 와서 나의 위엄을 보여 주는 것일세." - P26
이상한 생각이 들어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제 몸이 가죽 부대 속에 들어 있었다. 간신히 빠져나와보니 부대 셋이 나무에 걸려 있었는데 차례로 끌러보니 처음떠날 때 데리고 왔던 부하들이었다. (중략). 포장이 당부하기를, "이 일이 너무나 허무맹랑하니 남에게 말하지 말라. 길동의재주는 헤아릴 수 없으니 사람의 힘으로야 어찌 잡겠는가? 우리가 이제 그냥 들어가면 반드시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니 몇 달을 기다리다가 들어가자." - P27
차례대로 열어보니 팔도에서 홍길동이 작란한다는 내용이어서 임금이 크게 근심하여 주위를 돌아보고 묻기를, "이놈이 사람은 아니고 아마 귀신인 것 같소. 신하 중에서누가 그 근본을 아는 사람이 없겠소?" 하니 한 사람이 나와서 아뢰었다. "홍길동은 전 이조판서 홍 아무개의 서자요, 병조좌랑 홍인형의 서제(庶)이오니, 이제 그 부자를 잡아다 친히 문초하시면 아실까 하옵니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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