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임금이 듣고 나서 감동하여 즉시 홍 아무개를 풀어주고 인형을 경상감사로 임명하며 말했다. "그대가 만일 감사의 지위를 가지지 않으면 길동을 잡지 못할 것이다. 일년 기한을 줄 테니 속히 잡아들이라." - P29
"길동아, 네가 한번 집을 떠난 뒤 생사를 알지 못하여 아버지께서는 깊은 병을 얻으셨다. 너는 갈수록 불효를 끼칠 뿐 아니라 나라에 큰 근심이 되니, 무슨 마음으로 불충불효를 하고 도적이 되어 세상에 비할 데 없는 죄를 짓느냐? 이 때문에 임금께서 진노하시어 나를 시켜 너를 잡아들이라 하셨다. 이는 피치못할 일이니 너는 일찍 서울로 올라가 왕명을 따르도록 하라" - P30
이때 팔도에서 다 길동을 잡아 올리니 조정과 서울 사람들이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몰랐다. 임금이 놀라서 온 조정 신하들을 모으고 몸소 죄인을 다스리는데, 여덟 길동을 잡아 올리니 그들이 서로 "네가 진짜 길동이지, 나는 아니다." 하며 싸우니 어느 것이 진짜 길동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 P31
내어 입에 넣으니 홍공이 잠시 후 정신을 차렸다. 여덟 길동이 임금께 아뢰었다. "저의 아비가 나라의 은혜를 많이 입었사온데 제가 어찌 감히 나쁜 짓을 하오리까마는, 저는 본래 천한 종의 몸에서 났기로 그 아비를 아비라 못 하옵고 그 형을 형이라 못 하와 평생한이 맺혔기에 집을 버리고 도적의 무리에 참여하였사옵니다. (후략)." 하고 말을 마치자 여덟 명이 한꺼번에 넘어지기에 자세히 보니다 초인이었다 - P32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경상감사에게 길동 잡기를 재촉하니감사가 왕명을 받고는 황공하고 송구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하루는 길동이 공중으로부터 내려와 절하고, (중략). 하니 감사가 이 말을 듣고는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 철없는 아이야. 너도 나와 형제인데 부형의 가르침을 듣지 않고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니 어찌 애달프지 않으랴. (후략)." 하고 급히 길동의 왼쪽 다리를 보니 과연 사마귀가 있었다. 즉 - P33
여러 날 만에 서울에 다다라서는 대궐 문에 이르러 길동이 한 번 몸을 솟구치니 쇠사슬이 끊어지고 수레가 깨어져,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듯 공중으로 오르더니 나는 듯이 구름에 싸여 가버렸다. - P33
이때 여러 신하 중 한 사람이 아뢰기를, "길동의 소원이 병조판서를 한번 지내면 조선을 떠나겠다하옵고, 한번 제 소원을 풀면 제 스스로 인사를 드리러 올 터이니 그때를 타 잡는 것이 좋을까 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즉시 길동에게 병조판서를 제수하고 사대문에 글을 써 붙였다. - P34
길동이 제 거처에 돌아와 부하들에게 명하기를, "내가 다녀올 곳이 있으니 너희들은 아무 데도 출입하지 말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라." 하고 즉시 몸을 솟구쳐 남경으로 향하여 가다가 한 곳에 다다르니 그곳은 율도국이었다. 사방을 살펴보니 산천이 깨끗하고 인물이 번성하여 편안하게 살 만한 곳이었다. - P35
소년은 땅에 엎드려, "저는 전임 병조판서 홍길동이옵니다." (중략) "제가 전하를 받들어 만세를 모실까 했으나 천한 종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문(文)으로는 벼슬길이 막혀 있고 무(武)로는 추천받을 길이 막혀 있습니다. (중략)." 말을 마치고 공중으로 올라가 나는 듯이 가니 임금이 그 재주를 못내 칭찬하였다. 그 후로는 길동의 폐단이 없으니 사방이 태평하였다. - P36
하루는 길동이 화살촉에 바를 약을 구하러 망당산으로 가다가 낙천 땅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백룡이라는 부자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재질이 비상하여 애중하게 여겼으나 어느 날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어나면서 그 딸이 없어져 버렸다. (중략). 부부는 슬퍼하며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누구라도 내 딸을 찾아주면 재산의 반을 주고 사위를 삼으리라." 하였다. 길동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측은하였으나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 P37
길동이 약주머니에서 독약을 내어 급히 온수에 타서 먹이니 한참 만에 큰 소리를 지르고 죽었다. 모든 요괴가 일시에 달려들었으나 길동은 신통술을 부려 모든 요괴를 물리쳐 나가는데 문득 젊은 여자 둘이 애걸하였다. "저희는 요괴가 아니라 세상 사람으로 잡혀 왔사오니 가여운 목숨을 구하여 세상으로 나가게 해주셔요." 길동은 백룡의 일을 생각하고 그들이 사는 곳을 물었더니 하나는 백룡의 딸이요, 또 하나는 조철의 딸이었다. - P38
길동이 탄식하면서, "내가 하늘의 별을 보고 부모의 안부를 짐작해 왔는데, 지금 하늘을 보니 부친의 병세가 위중하게 되신 것 같다. 그런데도 내 몸이 먼 곳에 있어 가 뵙지를 못할 듯하구나." 하니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였다. - P39
이때 홍 판서가 문득 병을 얻어 위증하게 되자 부인과 인형을 불러 당부하기를, "내가 죽어도 다른 한이 없으나 길동의 생사를 알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구나. 제가 살아 있으면 찾아올 것이니 적서를 구분하지 말고 제 어미를 잘 대접해라." 하고 숨을 거두었다. - P39
"형님께서 어찌 아우를 몰라보십니까?" 하기에 상주가 자세히 보니 바로 길동이었다. 붙잡고 통곡하며, "아우야, 그사이 어디 갔더냐? 아버지께서 평소에 유언이 간절하셨는데 이제야 오니 어찌 자식의 도리이겠느냐?" - P40
길동이 부친 제사를 극진히 받들어 삼년상을 마치고 나서 모든 장수들을 모아 무예를 익히며 농업에 힘쓰니 병사는 잘 조련되고 양식도 풍족하였다. - P41
인형이 기뻐하면서 말했다. "너의 재주 기이한지라, 좋은 터를 구했다니 무슨 염려가 있으랴." 다음 날 길동이 부친 시신을 운구하여 제 모친을 모시고 서 강가에 이르니 미리 지시해 놓은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 P40
여러 날이 되자 인형은 길동과 춘섬을 이별하면서 산소를 극진히 모시라 당부한 후 산소에 하직 인사를 드리고 출발하였다. 본국에 이르러 모부인을 뵈옵고 전후 사실을 말씀드리니부인이 신통하게 여겼다. - P41
남쪽에 율도국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기름진 평야가 수천 리나 되어 실로 살기 좋은 나라였고 길동이 마음속으로 늘 그리던 곳이었다. 모든 사람을 불러 당부하기를, "내가 이제 율도국을 치고자 하니 그대들은 최선을 다하라." 하고는 그날 군대를 이끌고 떠났다. - P41
길동이 성안에 들어가 백성을 달래어 안심시키고 왕위에 오른 후 율도왕을 의령군에 봉하였다. 마숙과 최철을 각각 좌의정과 우의정으로 삼고나머지 여러 장수에게도 각각 벼슬을 내리니 조정 신하들이 만세를 불러 하례하였다. - P42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삼십 년 만에 갑자기 병이 들어 별세하니 나이 일흔둘이었다. 왕비도 이어 죽으니 선산에 안장한 후 세자가 즉위하여 대대로 이으면서 태평스럽게 지냈다. - P43
작품 해설
정하영
1. 문제 작가의 문제 작품 「홍길동전」
「홍길동전」은 한국고소설 가운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문제의 작품이다. 최초의 국문소설이고, 허균의 창작소설이며, 민감한 사회문제를 제기한 사회소설이라는 평가가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는 작품이다. - P107
「홍길동전」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작자 허균(許筠, 1569~1618)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 P107
허균은 자유분방하고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행동 때문에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아 파직을 당했다. 한때는 당시의 집권 세력인 대북파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나 마지막에는 역적모의를 주도했다는 죄목으로 저잣거리에서 사지가 찢기는 참형(斬刑)을 당했다. 그는 생전에 수많은 저작을 남겼으나 비참한 죽음으로모두 사라지고, 그 가운데 일부만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 P108
허균과 「홍길동전」의 관계는 실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그가 이 작품을 지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허균이 지었다는 「홍길동전」의 원본은 현재 남아 있지않고, 그가 이 작품을 지었다는 증거 또한 허균 자신의 문집이나 관련 자료에서 찾아볼 수 없다. - P109
택당의 증언을 근거로 초창기 국문학 연구자들은 허균을「홍길동전」의 작자로 확인하였고, 이를 토대로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평가하였다. 그러나 허균을 작자로 단정한 데는 택당의 증언 이외에도 허균 자신의 행적이나 사상이 작품의 내용과 부합한다는 점이 함께 고려되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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