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문득 그 생각이 들었다.
‘아, 아까 회사 AI가 보낸 통지는 이 로봇을 데리고 나가지 말라는 거였구나.‘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잡힐 듯 말 듯 실마리가 보였다. 그러나 유희는 그 실마리를 잡지 않았다. 그 순간에 집어 들기에는 너무 복잡한 세상사 같았다. - P41

"어떤 인간들 눈에는 그게 굴욕적으로 보였나 봐. 공연하는사람들 말고 제삼자들 말이야. 배달 음식 시켜 먹듯 예술을 배달시키는 탐욕스러운 로봇이랬는데. 나 이런 건 왜 이렇게 잘기억하지? 아무튼, 작은 무대에서 공연하는 사람일수록 내가 초대하는 게 큰 도움이 됐을 텐데 말이지. 짧은 시간이나마 그 사람들이 추는 춤이 직업이 되게 해줬으니까. 나같은 로봇이 천대쯤 있었으면 거리에서 춤추는 일도 꽤 괜찮은 직업이 됐을 거야. 왜 안 그렇겠어, 없던 시장이 만들어지는데? 우리는 군림하는 로봇이 아니라 시장 그 자체였다고!" - P43

"그런데 그거 아마 함정이었을 거야. 내가 이 그림 작가를 알게 된 거. 이 작가 쫓아다니다가 여기까지 와서 갇혀버린 셈이니까. 여러 번 회상하니까 뭐가 자꾸 떠오르려 그러네. 뭐, 아니었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나는 함정이라고 결론 내렸던 것 같아. 이유는 까먹고 그것만 기억에 남았어. 고성능 저기능 로봇이라는 게 그래. 기억이 인간적이지. 흠, 이게 뭘까?" - P44

"그런데 팀장님, 한 가지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팀장님 휴가 중에 있었던 일인데요, 심해도시 외벽에 균열 생긴 거 아무래도 이쪽에서 저지른 일 같아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별안간 공기의 흐름이 이상해졌다.
"오작동인지 뭔지 모르겠어요. 밖에 나가 있던 심해용 대형로봇 한 대가 도시 외벽에 충돌했어요. 영상이 남아 있는데, 실수가 아니었어요. 다섯 번이나 같은 자리에 충돌했거든요.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 P46

"했어요, 보고, 그런데 그게 더 이상해요."
"왜요?"
"아무 조치도 없었거든요. 한시간쯤 답이 없다가 연락이 왔어요. 긴급회의라도 했나 보다 하고 받았는데, 언급이 없었어요. 그 사고에 대해서."
"그냥 덮은 거예요?"
직원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P47

"이유를 모르겠어요. 내부에서야 그냥 덮는 게 가능하지만,
상대방은 손해배상 청구를 할 거 아녜요? 그냥 달라는 대로 배상을 하겠다는 건데, 한두 푼도 아니고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결정을 내린 걸까요? 기계들, 뭔가 어마어마한 걸 발견한 게 아닐까요? 이렇게 도망치듯 내팽개치고 떠나는 걸 보면." - P47

. 이거야말로 영감이라고 불릴 만한 깨달음이었다. 맞춰진 퍼즐을 들여다보았다. 공급곡선 전체가 하나밖에 없는 소비 로봇을 유인해 심해저에 잠재워버린 사건 이상한 말이었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제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 P48

 잔해가처참하게 흩어지는 모습을 담은 항공 영상이 한동안 업계에 떠들썩하게 퍼져나갔다. 실사로 인한 파손이라니. 회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사고였지만 회사는 평소처럼 영업을 계속했다. - P48

유희는 마사로가 한 말을 떠올렸다. 파괴도 실적으로 바꿔서 계산할 수 있는 거라고. 유희는 그날 회사가 무엇을 파괴해서 어떤 실적을 올렸는지 알 것 같았다. - P49

마사토가 진짜로 작동하는 소비 로봇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유희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꽤 아름다운 추억일지는 몰라도, 마사로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근거는 되지 못했다. - P49

유희에게서 마사로 이야기를 들은 옛 소장님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거기로 갔군요. 우리도 추정은 했어요, 그런 데 있을 거라고.
쭉 네트워크에 연결돼 있었으면 찾기 쉬웠을 텐데 사적인 내면을 지닌 로봇이라 그럴 수 없었거든요."
당혹스럽게도 소장님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 P49

"진짜였군요, 그 소비 로봇이라는 거?" - P50

"그렇죠. 소비 로봇은 개체 하나하나를 분리된 존재로 만들어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불가능하지 않다는 걸 입증한 사례가있잖아요. 하나가 가능하면 언젠가 다른 것도 가능하다는 말이니까. 마사로는 세상을 바꿀 수 있었어요. 마사로를 다시 찾을수 있을까요?" - P50

"쉽지는 않아 보여요. 차라리 심해저에 쭉 있었던 거면 모르겠는데, 해류의 영향을 받는 깊이에서 얼마간 쓸려간 다음 가라앉았을 테니까. 그래도 해보려고요."
마지막 말을 덧붙이다가 유희도 갑자기 목이 멨다.
‘그게 다 진짜라니, 세상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마사로가어떤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없애버린 거잖아!" - P50

기억 속 소장님의 쾌활한 목소리와는 달리, 바닷속 풍경은 너무 어두웠다. 마사로는 자기가 왜 미움을 받았는지 생각했다. - P52

다행히 마사로는 바다가 심해도시를 집어삼키던 순간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애를 쓰지 않도록 디자인된 마사로의 내면이, 극도의 공포를 유발하는 기억을 발생하자마자 자동으로 삭제해버린 덕분이었다. - P52

그 기나긴 침묵 속에서 마사로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 돈 쓰고 싶다‘ - P52

마사로는 내면 가득 무언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니, ‘가득‘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커다란 무언가였다. 마사로는 문득 희열을 느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기쁨이었다. - P53

마사로는 내면의 우주로 퍼져나가는 강렬한 기쁨을 마음으로어루만졌다. 마음의 끝을 향해 뻗어나가는, 형언할 수 없이 황홀한 즐거움.
‘이건 돈이야?
7년 반 만에 지불 수단이 갱신되어 있었다. - P53

연구소의 도움으로 마사로의 지불 수단 몇 가지의 유효기간을 갱신하고 몇 시간이 지났을 무렵, 심해도시 근처를 돌던 무인 항공기가 흔치않은 광경을 포착했다. 수십 마리의 고래가한 지점에 모여들어 있었다. 열다섯 마리 이상, 많으면 스무 마리는 돼 보인다고 했다. - P54

 마치 처음부터 그러려고 만들어진 로봇처럼. 엄밀히 따지면 마음을 탐구하는 일은 마사로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지만,
마사로는 왠지 엄밀해지고 싶지가 않았다. 지갑이 두둑해졌기때문만은 아니었다. - P54

그러다 전원이 켜졌다. 광학 신호, 소리 신호가 들어오고 네트워크에도 연결이 되었다. (중략)
마침내 깨어난 마사로에게 유희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마사로, 다시 가서 세상을 구해."
성능이 꽤 좋은 마사로의 기억에 그 말이 영원히 각인되었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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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간이 노동 시간과 신성 시간으로의 분할에 이르는 인간의 본질적 체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광기 또는 그와 유사한 극단적인 어떤 쪽을 향해 삶의 문을 열어 놓으면 (그것은 죽음, 신성의 위협 또는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것들의 현전이나 에로티즘과 관련된 모든 가능성을말한다.) 성찰과 노동은 성찰이 멈추는 다른 어떤 것에 종속되기에 이른다. - P304

이 발표의 초두에서도 밝혔듯이, 신성은 모든 사람에게 가치 있는것으로 제시되는 반면 에로티즘은 고독의 의미를 갖는다. 나는 여러분 중 다만 몇 명이라도 신성에서 찾을 수 없는 어떤 가치를 에로티즘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단 한 순간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어떤환상에도 불구하고 또 어떤 무능의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에로티즘은 원칙적으로 한 사람에게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 쌍에게만 의미를 갖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 P305

에로티즘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에로티즘의 의미는 바로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그것도 의미일 텐데, 그러나 고독은 그 의미를 질식시킨다. - P305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 이야기를 듣는 여러분들에게는 일반적인 의미의 신성과 기독교의 신성 사이에 원칙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내가 기독교적 신성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은 편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앞서 말한 기독교적 개념으로 말머리를 돌리는 것은, 내가 말하는 위반을 기독교에서는 죄과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고 싶어서인 것이다. 죄과란 잘못이며, 저지르지 말았어야 할 행동이다.  - P306

에로티즘에 빠졌을 때 우리로 하여금 극단의 강렬함을 맛보게 하는 어떤 것은 동시에 우리를 결정적으로 저주의 고독 속에 몰아넣곤 한다. 반면 신성은 우리를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그 극단성이 우리를 속죄해 주는 역설 (펠릭스 퀼파, 다행스러운 죄과)을 인정할 때 비로소 그럴 수 있다.  - P306

왜냐하면 기독교권의 우리는 위반을 저지르면서 즐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권 밖의 사람들만이 고독에 처해진 채 위반을 누릴 수 있다. 기독교도는 위반에 다름 아닌 어떤 것을 더 이상 행사하지 않을 때, 다시 말해 문명의 근거인 금기를 범하지 않을 때 비로소 같은 인류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 P307

죽음과 관련된 금기의 위반 사이에 완전한 일치는 없다. 금기의 위반은 오히려 전쟁이다. 그러나 신성도 그에 못지않게 죽음의 고도에 이른다.
죽을 각오로 사는 성자라는 점에서 신성과 전사의 영웅심은 유사하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죽을 각오로 산다니? 얼마나 역설인가? 계획이 본질은 아닐지라도 신성은 언제나 계획이다. - P307

가장 야릇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전적인 위반은 그것에 대한 언급을피하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가령 모든 형태의 고대 종교가 그랬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거기에 대한 언급을 허용하는 위반의 길을 열어 놓았다. 여기서 간단히 인정할 것은 담론은 기독교 너머로 위반과 유사한 모든 것, 금기와 유사한 모든 것을 부정하는 성향이 있다는 점이다. 성행위 차원의 탈선적 나체, 성금기의 부정, 금기가 필연적으로 초래하곤 하는 위반의 부정이 그렇다. - P307

나는 생각건대 말을 하면서도 침묵에 아주 막중한 경의를 표한 듯하다. 이 경의는 아마 에로티즘에도 해당된다. - P308

 지금부터는 우리를 세상에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여기에서의 구원은 일종의 신성이 교회와 무관하게 또는 교회에 역행해서 세상으로부터 구원해 낸다는 의미에서이다.)은 그 어떤 것도 나의 의도를 어긋나는 것이다. 계율은 우리를 노동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반면, 극단적 체험으로부터는 멀어지게 한다고 했다. - P308

그러나 극단적 체험도 나름대로의 계율이 있는 법이다. 어쨌든 이 계율은 어떤 형태의 것이든 에로티즘의 언어적 변론을 거부한다. 나는 에로티즘은 침묵인 동시에 고독이라고 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현전이, 현전 그 자체가 순수 침묵의 부정, 수다, 가능한 고독의 망라인 사람에게는 그럴 수 없다. - P308

3장

번식과 관련된 금기

자유로은 동물적 성생활을 거부하는 우리 안의 보편적 금기

 장애물로부터 그것이 전복된 시점으로 건너가고 싶어 하다가벌써 나는 죽음의 금기와 평행 관계를 이루는 일련의 금기들을 문제 삼는 데까지 왔다. 나는 성을 대상으로 하는 금기들에 대해서는 부차적으로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죽음과 관련된 관습에 대한 흔적은 아주 오래전의 것들이 남아 있는 반면, 성에 관련된 자료는 최근에야 선사시대의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 P55

(전략) 그러므로 우리는 성행위도 죽음에 못지않게 일찍부터 인간의 관심사였음을 알 수있다. 죽음의 경우와는 달리 그렇게 모호한 자료를 통해 명백한 증거를찾아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음경의 그림은 상당한 자유를 반증한다. 그러나 자유롭게 음경을 그렸다고 해서 그 사실 하나만으로 음경을그린 사람들이 성적 자유를 누렸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 P56

 노동의 공동 사회는 노동 시간 동안 성행위에 빠져 있을수 없다. 그러므로 성의 자유에는 원래부터 제한이 가해졌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적용되는 경우들에 대해 아직 무슨 말을 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우리는 거기에 금기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있을 것이다. - P56

그러한 제한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크게 다르다. 모든 사람들이 성기를 숨길 필요성을 같은 정도로 느끼지는 않는다. 그러나 발기된 남성의 성기를 보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대개 남녀가 결합할때는 한적한 곳으로 자신들을 숨긴다.  - P56

오히려 우리의 체험은 자체적으로 별 중요성이 없는 피상적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금기가 지닌 깊은 의미를 반증할 뿐이다. 우리는 이제 금기는 형태가 분명치 않으며, 그래서 그 양상은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성행위를 할 때 지키는 여러가지 제한들은 이처럼 형태가 분명치 않은 금기에서 비롯된다. - P57

그러나 우리가 이 기회에 확신하게 된 것은 거기에는 공통적으로 우리를 구속하는 어떤 기본적인 규칙이 있다는 사실이다. 성에 제한을 가하는 우리 안의 금기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어떤 것이다. - P57

 로제 카유아는 "근친상간 금기처럼 많은 잉크를 소비시킨 문제들은 주어진 한 사회의 종교적 금기들의 총체를 끌어안는 체계 안에서 고찰하되 개별적인 경우들로 고찰할 때 비로소 만족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²고 한다. 로제 카유아의 이 말은 출발로서는 완벽하다. 


2) 『인간과 신성』, 2판(갈리마르, 1950), 71쪽. - P57

근친상간 금기

근친상간의 금기는 ‘하나의 특수한 경우‘에 불과하지만 우리의 가장 큰 관심거리이다. 심지어 그것은 성 금기 자체와 대체될 수 있을 만큼 일반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 P58

 무수한 다른 금기를 낳은 금기 자체 (근친상간 금기도 그 한 경우이긴 하지만)는 인간의 행동에 관한 연구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지 못한 반면 근친상간이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지성은 단순하고 명확한 것은 주목하지만, 모호해서 변수가 많은 것, 파악이 어려운 것은 외면하는 성향이 있다. - P58

교대 사회는 인척 관계에 따라 사람들을 엄격하게 분류했으며, 그에 따른 결혼과 금기도 과학 이상으로 엄격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고대의 가족 구조를 파헤쳐, 인간들을 동물의 자유와는 다른 규칙의 준수로 인도하는 막연한 그러나 근본적인 금기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원천적 특수성들을 찾아낸 데 있다. - P59

 그러한 조치들은 명확하면서도 이상한데 그러나 정당한 분배가 가져다주는 이해관계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만도 아니다. 금기는 어떤 규칙을 따라 작용한다. 그러나 규칙들은 성적 폭력과도 무관하고 합리적 질서에 대해 그것이 표상하는 위험과도 무관한 부차적 이유들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결정되었을 수 있다. - P59

근친끼리의 육체적 관계를 금하는 근친상간 금기의 보편적 성향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으면 우리는 우선 고집스럽게 고개를 쳐드는어떤 강한 감정을 떠올려야만 한다. 이 감정이 본질적인 것이라고 할수는 없다. - P59

 드러난 원인을 가지고 금기의 원칙을 정할 수 없었고, 다만 원칙을 임시 목적에 사용할 수는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잘 알고 있고,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있는 ‘종교적 금기의 총체‘
에 그 특수한 경우를 연관시켜볼 필요가 있다. 근친상간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이 우리에게 있을까? (나는 여기에 죽은 사람에 대한 경의를 포함시킨다. 그러나 근기의 총체가 연결돠어 나타나는 최초의 단위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언급하려고 한다.) - P59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다 보면 우리는 일상과 때로는 일치하는가 하면 때로는아무렇게나 반응하는 듯한 어떤 원초적인 공포감을 느끼기에 이른다.
문제는 평온하고 합리적인 행동이 지배하는 세계와 성적 충동의 폭력의 세계가 근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데에 기인한다. 시간이 흐르면 거기에서 생겨난 규칙들이 불안정하고 임의적인 형식이 아닌 명확한 정의를 얻을 수 있을까?³

3) 나는 클로드 레지스트러스의 저서를 참조하면서 2부에서(이 책 2부의 연구 4 참조.) 근친상간의 문제점에 대해 상세히 다루었다. 『친족의 기본구조』(PUF, 1949), 8절판, 640쪽. - P60

월경과 출산의 피

 피는 그 자체가 이미 폭력의 상징이다. 더 나아가 월경은 성행위를 의미하며,
성행위에서 분비되는 체액을 의미하기도 한다. 체액은 폭력의 한 결과이다. 출산도 이러한 총체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출산 역시 그 자체가 이미 파열이며, 질서 있는 행동의 흐름을 넘쳐나는 과잉 아닐까? - P61

 이러한 의견들이 특별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금기들도 마찬가지다.
비록 우리가 체액에 대해 공포감을 갖는다 해도, 그와 관련된 금기들은우리가 보기에 의미가 없다. 문제는 불변의 핵심이 아니다. 우리가 다룰 것은 잘못 정의된 핵심 주변의 보조적 양상들이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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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쿠정 철교 밑을 지나 도쿄 교통회관 건물로 향하는 그녀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가슴이 설렜다. 약속 장소는 15층 도교 회관 긴자 스카이라운지였다.
"유라쿠정의 하늘에서 만나요." - P106

이케우치 씨는 시라이시 씨를 발견하고 일어섰다.
"나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싹 나았는걸요."
(중략)
코스 요리를 주문한 뒤 이케우치 씨는 애용하는 노트를 폈다.
"이걸 보십시오. 그저께 도착한 겁니다." - P106

‘내 『열대』만이 진짜랍니다.‘
"보낸 사람 이름은 없네요."
"지요 씨가 보낸 겁니다."
보아하니 지요 씨는 학파에서 탈퇴한 뒤 교토로 간 듯했다.
그녀는 교토 출신이니 그곳으로 가도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하지만 일부러 이런 그림엽서를 이케우치 씨에게 보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 P107

이 엽서에는 다른 목적이 있다고 시라이시 씨는 생각했다.
"지요 씨는 교토로 오라고 하는 거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 그렇지만 왜요? 무슨 이유로?"
"아마도 『열대』의 비밀이 교토에 있기 때문이겠죠." 이케우치 씨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도 비장의 카드가 있어서 말입니다" - P107

"『열대』를 쓴 사야마 쇼이치는 교토에 살았습니다. 당시 그 사람은 학생이었죠. 그런데 1982년 2월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거든요."
"어떻게 그런 걸 아시죠?"
"지요 씨는 사야마 쇼이치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게 제비장의 카드입니다." - P108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저도 지요 씨한테서 들었어요." 시라이시 씨가 끼어들었다. "어렸을 때 서재에 숨어들었다면서요?"
천일야화 말이죠?"
"네, 그거."
"지요 씨 아버지가 사야마 쇼이치와의 만남에 얽혀 있는 겁니다." - P109

서재에는 ‘방 안의 방‘ 같은 기묘한 장소가 존재했다. 계단식 사다리로 이어지는 중 2층 같은 좁은 공간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할 법한 작은 문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말을미루어 짐작하건대 그 방에는 희귀 서적과 개인적인 메모 및 여러 권의 일기장이 가득한 듯 했다. - P109

 아버지가 이집트에 여행 가서 사온 천일야화 사본의 일부였다. 찾아온 학생은 문학부에서 아랍어를 공부하는 대학원생으로, 아버지는 사본을 그에게 읽어봐 달라고 부탁할 생각인 듯했다. 결과적으로 별달리 진기한사본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버지는 학생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 뒤로 청년, 즉 사야마 쇼이치는 애용하는 노트를 옆구리에 끼고 이따금 아버지의 서재를 찾아오게 됐다. - P110

"지요 씨와 사야마가 처음 만나고 반년 뒤, 다시 말해 1982년2월이군요. 요시다 신사의 세쓰분(입춘 전날) 축제를 구경하러나간 날 밤, 지요 씨는 인파 속에서 사야마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야마는 그 뒤로 모습을 감춰서 두번다시 지요 씨앞에 나다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해 겨울 사야마는 이따금
‘소설을 쓸 생각‘이라고 지요 씨한테 말했습니다. 마술에 얽힌이야기, 남양의 섬을 둘러싼 불가사의한 모험담이 될 거라고말이죠." - P110

지요 씨가 이케우치 씨에게 한 이야기에 따르면, 그냐가 사야마 쇼이치의 『열대』를 알게 된 것은 2년 전, 남편 사무실을대청소하고 있을 때였다. 폐기할 자료들 틈에 섞여 있던 것을우연히 발견했다. 이상하게도 남편은 그런 책을 산 적 없다고하는 데다 사무실 다른 사람들도 그 책의 출현 경위에 관해 짐작가는 데가 없는 듯했다.  - P111

"사야마 쇼이치라는 인물도 노트를 애용했나 봅니다."
이케우치 씨는 노트를 덮고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지요 씨와 산책을 나갈 때도 하숙집에서 이야기를 할 때도 늘 노트를 들고 있던 모양입니다. 그 부분에서 아주 공감이 느껴지더군요." - P111

시라이시 씨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사야마 쇼이치는 어째서 모습을 감췄을까. 『열대』라는 책이 존재하니까 그는 죽은 게 아니다. 하지만 살아 있다면 어째서 지요 씨에게 연락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사야마는 『열대』라는작품을 남긴 것을 끝으로 30년 이상 다른 작품을 한 편도 쓰지않았다. 아니, 애초에 『열대』의 존재 자체가 확실하지 않다. 실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까. - P112

"갔다 오시면 모험의 전말을 들려주세요."
"물론입니다. 좋은 소식을 기대해 주십시오."
이케우치 씨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P113

시라이시 씨는 상점 계산대에 턱을 괴고 있었다.
이케우치 씨는 『열대』의 수수께끼에 도전하기 위해 교토로 떠났다. 빈둥빈둥 손 놓고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한심하다. 뭔가 자기 나름의 가설을 세울 수는 없을까. - P113

지요 씨는 사막의 궁전이 무대를 지나서 있다고 말했다.
어떻게 단언할 수 있었을까. 그녀만의 비밀, 다른 학파 멤버들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은 기억이 있는 게 틀림없다. 그건 거의 완성된 퍼즐로서 그녀의 가슴에 감춰져 있었으나 마지막 조각이 모자랐다. 그런데 자신이 나타났다. 그리고 ‘보름달의 마녀‘
라는 말이 지요 씨의 퍼즐을 완성으로 이끈 것이라면,
보름달의 마녀는 어떤 인물일까. - P114

일요일 정오 지나 그녀가 메리에서 점심을 먹는데 갑자기전화가 왔다. 이케우치 씨였다. 무슨 발견이라도 한 걸까.
"웬일이세요. 이케우치 씨."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바쁘지 않아요. 지금 점심시간이거든요."
(중략)
"지금 어디 계시는지요?"
이케우치 씨의 목소리에는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중략)
"아뇨, 교토에서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봐서 말입니다."
"전 유라쿠정에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녀는 웃었다. - P115

시라이시 씨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내 『열대』만이 진짜랍니다.
확신에 찬 목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했다.
지요 씨가 보트를 타고 거침없이 바다를 달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반짝이는 눈동자는 수평선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참아름다운 이미지였다.
이케우치 씨는 교토에서 지요 씨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 P116

그 다음 월요일 오후, 시라이시 씨는 진보정에 갔다.
야스쿠니 거리에는 평온한 빛이 비추고 길을 걷는 이들도느긋해 보였다.
거리를 따라 늘어선 헌책방 앞에는 책이 가득한 손수레가여럿 있었다. 입구 양옆으로 쌓인 헌책 탑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곳도 있었다. 그쯤 되면 점포라기보다 헌책으로 만든 동굴이다. - P117

가령 여기 진보정의 서점에 들어가 책 한권을 집어서 펴면그 순간 특별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을 말이 메워 대지가 생겨나고 초목이 우거지고 인간이 살기 시작해 그곳에 세계가 나타난다. 다른 책을 집으면또 다른 세계가 나타날 것이다. - P117

‘어째 정신이 아득해지네.‘
시라이시 씨는 살짝 하품을 했다.
(중략)
약속 시간에 런천으로 가자 친구는 먼저 와서 교정쇄인 듯한 종이 뭉치를 읽고 있었다. 아주 편집자 같은 모습이었다. - P118

친구는 "그나저나 이상하네" 하고 중얼거렸다.
"학파 사람들은 지금까지 1년도 넘게 『열대』에 관해 조사한거잖아? 그동안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어. 그런데 연말에 네가 학파에 참가한 뒤부터 빠른 속도로 진전이 있었지. 의외로네가 핵심 인물일지도 몰라." - P119

친구는 아는 편집자들에게 물어봤지만 사야마 쇼이치라는소설가도, 『열대』라는 작품도 안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헌책방 주인에게 묻자 "그 책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다"라는대답이 돌아왔다. 1년쯤 전에 문의를 받았다고 했다. 어째서 그런 것을 기억하느냐 하면 나카쓰가와 씨라는 수집가가 끈덕지게 묻고 다니는 바람에 헌책방거리에서 조금 화제가 됐다는것이다.
"그런데 못 찾았다." - P119

어쨌거나 친구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나카쓰가와 씨에 관한 소문뿐, 막상 『열대』의 내용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세계 최대의 헌책방 거리에서 화제가 됐는데도 아무도 정체를 모른다는 것은 참 기이한 일이다.
"시라다마는 『열대』의 정체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데?"
시라이시 씨의 이름은 다마코라서 친구는 마음이 내킬 때면 갑자기 ‘시라다마‘라고 부르곤 했다. - P120

"...하나 생각한 게 있긴 한데."
『천일야화』와의 관계였다.
하리마 고개의 아파트를 찾아갔던 날, 지요 씨는 소파에 앉아 천일야화』를 읽고 있었다. 
(중략)
"『열대』와 『천일야화』는 뭔가 관계있는 걸까 싶어서." - P111

"반대일지도 모르잖아. 『열대』에 『천일야화』가 나오는 거야."
"그러게, 그런 패턴도 있겠네."
(중략)
"뭐, 실물이 없으니까 확인할 방법이 없네."
친구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나도 생각난 게 있는데"라며 뜸을 들였다. - P121

"......그거 정말 『열대』였어?"
정색하고 물으니 시라이시 씨는 괜히 불안해졌다. 꽤 오래전에 읽은 데다 실물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열대』를 읽은 사람들이 있다. 실물은 없어졌어도 학파 멤버들의 ‘추억‘은 남아 있다. - P122

"다시 말해서 말이지, 사실 『열대』라는 책은 존재하지 않는거야. 그건 학파 사람들의 바람 속에만 존재해, 너희가 읽었다고 믿는 건 실은 다 다른 책이야. 그걸 조합해서 『열대』라는 한권의 책을 날조하려고 하면 불일치가 생기는 건 당연하잖아? 그 모순을 ‘무풍대‘라고 부르면서 얼버무리는 거야."
(중략)
".....라는 가설을 세워봤는데, 어때?" - P122

시라이시 씨는 멈춰 서서 친구가 지적한 것을 돌이켜봤다.
사실 『열대』라는 책은 존재하지 않는 거야.
자신들은 『열대』를 읽은 게 아니라 『열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신조 군의 ‘언어적 독‘ 가설과 비슷한 정도로 황당무계한 가설이었지만 허튼소리라고 무시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그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진실일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 P123

"시라이시 씨."
그녀는 놀라 전화를 끊고 돌아봤다.
신조 군이 공터 울타리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홀쭉하게 여위어서 눈만 형형하게 빛났다. 분위기가 확실히 이상했다.
"신조 군? 어디 아파요?"
"아까 큰길에서 보고 쫓아왔어." 신조 군은 여유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 환영이 보여."
- P124

"잠깐만요, 신조 군." 시라이시 씨는 말했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태양이 구름에 가려져 뒷골목은 수몰되듯 어스름에 잠겨갔다. 신조 군은 울타리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시라이시 씨에게 서서히 다가오며 진범을 지적하듯 말했다.
"당신이 ‘보름달의 마녀 ‘지?"
시라이시 씨는 경악했다. - P125

주위 공간이 순간 일그러진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소리예요? 그럴 리 없잖아요." 미인
"자, 저주를 풀어 줘. 이제 수수께끼는 지긋지긋해."
서서히 다가오는 신조 군의 눈은 정상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자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쯤은 스스로 알 수 있다. 대체 신조 군은 어떤 망상같은 가설에 사로잡힌 걸까. - P125

시라이시 씨는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첫째는 신조 군의 ‘체력 부족‘을 만만히 본 것이었다. 탐정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 체력이 약해진 데다 최근 계속 수면 부족을 겪은 신조 군에게 거침없이 달려가는 시라이시 씨를 뒤쫓는 것은 무리였다. - P126

또 하나의 실수는 자신이 길치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신조 군을 떼치고 진보정 뒷길을 지그재그로 달리는 사이에 시라이시 씨는 길을 알 수 없게 됐다. ‘설마 여기까지 쫓아오지는 않겠지‘ 하고 한숨을 돌리려고 한 순간 신조 군의 궁상맞은 뒷모습이 보였다. - P126

중 2층 구석에서 난간 너머로 오락실 입구를 망보고 있으려니 아니나다를까 신조 군이 들어왔다. 게임기 불빛에 창백한얼굴이 비쳤다.
‘헉, 살인귀 같아.‘
그녀는 몸을 움츠리고 숨을 죽였다. - P127

그러고 보니 나카쓰가와 씨의 사무실이 진보정에 있다고 했다.
"쫓기고 있군요?"
"어떻게 아세요?"
"당신이 허겁지겁 들어오고 나서 신조 군이 보였으니까요.
그 친구 요새 분위기가 이상했거든요. 집요하게 시비를 걸어오는 바람네 저도 애먹는 중입니다." - P127

"저런 곳에 있으면 나갈 수 없잖아요."
그러나 나카쓰가와 씨는 침착했다.
"아가씨, 진보정은 우리 집 앞마당이랍니다."
나카쓰가와 씨는 오락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관계자외출입금지‘라고 쓰여 있는 작은 문이 있었다. 문을 지나자 건물 뒤로 나올 수 있었다. 눈앞에 콘크리트 벽이 있어 썰렁했다. - P128

나카쓰가와 씨가 그녀의 등을 계속 밀며 명랑하게 말했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거죠?"
"못 나갑니다."
".....못 나간다고요?"
그녀는 숨을 훅 들이마시며 멈춰 섰다.
"여기는 이야기의 막다른 골목이에요, 아가씨."
그 순간 뒤에서 문을 잠그는 차가운 소리가 났다.
"난 칼을 갖고 있으니까 쓸데없는 저항은 할 생각 말아요. 불을 켤 테니까 안으로 들어가서 소파에 앉아요. 고급 커피를 대접하죠.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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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애스터로이드 시티 - 아웃케이스 없음
웨스 앤더슨 감독, 제이슨 슈왈츠먼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23년 10월
평점 :
품절


각본가도 모르는 주인공의 심정 그리고 정체 모를 외계인.
세밀한 설정 그리고 장광한 대사.
배정되어 온 배우 그리고 도망치는 배우.

두 번 봐도 뭔 지는 모른 영화다.
그래도 이젠 ‘세상 일 어떻게든 되겠지‘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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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정치적 체험을 기초로 별도의 철학 체계를 세우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며, 엄밀히 보면 이는 철학의근대적 방향을 특징짓는 원칙이기도 하다. 그런 관점에서, 철학도 이제하나의 체험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점을 인정하고 나면,
이제 철학을, 철학에만 묻혀 논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 P296

반복하건대, 철학은 종합적인 작업의 방향에서만 가능성의 총체일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보기에 비교적 종합적이었던 것은 헤겔의 철학이다. 적어도 그의 초기의 변증 작업을 보면 에로티즘이 그의 이론의 일부를 공공연히 차지했는데, 아마 에로티즘의 체험은 얼핏 보기보다 그에게 더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 P297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는 철학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닥치는 대로 모든 것에 손을 대던 당시의 낭만주의 철학의 특성에 대해 강경한 반론을 제기한 철학자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그가 철학의 영역에서 즉흥적인 것을 몰아내 버런 잘못을 저질렀다고 탓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에서는 즉흥이 아예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헤겔의 빈틈없는 축조 (이것이 철학 용어라고 하더라도 이 용어를 쓰자면)는 특히 수집하게 해 주고, 수집과 체험을 분리시키게 해 주는 전문 분야로서의 가치를 갖추고 있다. - P297

헤겔의 철학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만 지적하고 넘어가면, 헤겔의 철학적 논리 전개는 전문성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헤겔 자신이 그러한 느낌을 못 벗어났던 듯하다. 그는, 반론을 예방하기 위해서, 철학도 시간 속의 전개이며 연속적 부분의 합으로진술되는 하나의 담론 체계임을 강조한 바 있다. 누구나 그렇게 인정할수 있다. - P298

전문화의 노력과 비교해 볼 때, 신성은 변덕스러운 것이다.
성자는 유효성을 찾지 않는다. 그를 자극하는 것은 오직 욕망뿐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에로티즘의 인간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이제 남은 일은 계획의 전문화, 다시 말해 계획의 유효성을 보장해 주는 전문화가 철학, 내가 위에서 말한 가능성의 총체와 종합 작업으로서의 철학의 본질에 가까운 것인지 아니면 욕망이 거기에 더 가까운 것인지를 가늠하는 일이다. - P299

이야기를 더 진행시키기 전에, 비록 본질을 언급하려고 하면 그때마다 기본적으로 부딪히는 난관이 없지 않지만 나는 그 점을 무릅쓰라도에로티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넘어가고 싶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성행위는 금기에 의해 금지를 당하며, 에로티즘의 영역은 그러한 금기들에 대한 위반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동물들의성행위와는 다르다. 에로티즘의 욕망은 금기를 눌러 이기는 욕망이다. - P299

(전략), 그러니까 오늘날 문제되는 나체라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그것들을 고찰할 수도 있다.
사실 나체에 대한 금기는 예나 지금이나 아주 강하게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나체 금기는 역사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며, 그래서 아무도 그것의 무상성, 상대적 부조리를 모르지 않을 뿐 아니라 에로티즘(에로티즘이 되어 버린 성행위, 인간의 성행위, 언어 능력이 있는 존재의 성행위)의 보편적 테마를 디공하는 것은 나체에 대한 금기와 위반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 P300

내 생각에는 우선 금기와 위반의ㅜ이론이 어디서 비롯되는디를 상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중략) 나는 개인적으로 그의 구두 강의를 들은 적이 없지만, 위반에 관한 마르셀 모스의이론은 제자인 로제 카유아의 작은 책자 인간과 신성에 잘 드러나 있다. 더욱 다행한 것은, 로제 카유아는 단순한 편집에 그치지 않고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예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다가 자신의 능동적이고도 확고한 사상까지 가미시켰다 - P300

 나는 여기에 카유아의 진술의 도식을 빌려오고 싶은데, 그의 진술에 의하면, 인종학이 다루는 미개인들의 시간은 세속적 시간과 신성의 시간으로 갈려 있었다고 한다. 세속적 시간이란 일상의 시간으로써 노동의 시간이자 금기를 준수하는 시간이었다. 반면 신성의 시간이란 축제의 시간, 다시 말해 금기를 위반하는 시간이었다. 에로티즘의 차원에서 볼 때 축제는 성적 방종의 시간이다. - P300

내가 비전문적인 철학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문 작업으로서의 철학은 말하자면 하나의 노동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철학은 내가 처음에 언급한 강렬한 감동적 순간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을뿐더러, 배제한다. - P301

사실 극단적 인간성, 즉 인간의 성행위와 죽음의 폭발을 외면한채 오직 평범한 인간성만을 설명할 뿐인 철학의 기만적인 결과에 놀라는 것은 내가 처음이 아닐 것이다. 내가 보기에 철학의 이러한 싸늘한측면에 대한 반발은 키에르케고르는 말할 것도 없고, 니체에서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근대 철학자들의 특징을 이룬다. 당연한 일이지만 철학은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P302

철학은 삶의 극단과 관련된 내가 어디에선가 ‘가능성의 극단‘이라고 표현한 것, 즉 철학적 대상의 극단을 끌어안지 못한 이유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죽음의 철학조차도 기본에 그친다면, 대상을 잊어버리고 만다. 물론 철학은 죽음에 파묻힐 때, 즉 죽음의 끝인 혼미에 자신을 내던질 때만 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 P302

그러한 가정은 철학적 계율을 인정하는 동시에 파기를 전제하는데그러면 이제 철학은 모든 가능성의 총체로서의 종합 작업이 될 수 있다. 그 총체는 종합이지 단순한 더하기가 아닌 것이 왜냐하면 그곳은인간의 노력이 한계를 드러내며, 인간이 무기력에 기꺼이 자신을 맡기는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계율이 없었다면 철학은 지금의 그 지점에이르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계율이 철학을 그것의 최종 목적지에 데려다 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경험적인 진리이다.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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