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는 정치적 체험을 기초로 별도의 철학 체계를 세우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며, 엄밀히 보면 이는 철학의근대적 방향을 특징짓는 원칙이기도 하다. 그런 관점에서, 철학도 이제하나의 체험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점을 인정하고 나면, 이제 철학을, 철학에만 묻혀 논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 P296
반복하건대, 철학은 종합적인 작업의 방향에서만 가능성의 총체일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보기에 비교적 종합적이었던 것은 헤겔의 철학이다. 적어도 그의 초기의 변증 작업을 보면 에로티즘이 그의 이론의 일부를 공공연히 차지했는데, 아마 에로티즘의 체험은 얼핏 보기보다 그에게 더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 P297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는 철학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닥치는 대로 모든 것에 손을 대던 당시의 낭만주의 철학의 특성에 대해 강경한 반론을 제기한 철학자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그가 철학의 영역에서 즉흥적인 것을 몰아내 버런 잘못을 저질렀다고 탓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에서는 즉흥이 아예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헤겔의 빈틈없는 축조 (이것이 철학 용어라고 하더라도 이 용어를 쓰자면)는 특히 수집하게 해 주고, 수집과 체험을 분리시키게 해 주는 전문 분야로서의 가치를 갖추고 있다. - P297
헤겔의 철학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만 지적하고 넘어가면, 헤겔의 철학적 논리 전개는 전문성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헤겔 자신이 그러한 느낌을 못 벗어났던 듯하다. 그는, 반론을 예방하기 위해서, 철학도 시간 속의 전개이며 연속적 부분의 합으로진술되는 하나의 담론 체계임을 강조한 바 있다. 누구나 그렇게 인정할수 있다. - P298
전문화의 노력과 비교해 볼 때, 신성은 변덕스러운 것이다. 성자는 유효성을 찾지 않는다. 그를 자극하는 것은 오직 욕망뿐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에로티즘의 인간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이제 남은 일은 계획의 전문화, 다시 말해 계획의 유효성을 보장해 주는 전문화가 철학, 내가 위에서 말한 가능성의 총체와 종합 작업으로서의 철학의 본질에 가까운 것인지 아니면 욕망이 거기에 더 가까운 것인지를 가늠하는 일이다. - P299
이야기를 더 진행시키기 전에, 비록 본질을 언급하려고 하면 그때마다 기본적으로 부딪히는 난관이 없지 않지만 나는 그 점을 무릅쓰라도에로티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넘어가고 싶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성행위는 금기에 의해 금지를 당하며, 에로티즘의 영역은 그러한 금기들에 대한 위반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동물들의성행위와는 다르다. 에로티즘의 욕망은 금기를 눌러 이기는 욕망이다. - P299
(전략), 그러니까 오늘날 문제되는 나체라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그것들을 고찰할 수도 있다. 사실 나체에 대한 금기는 예나 지금이나 아주 강하게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나체 금기는 역사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며, 그래서 아무도 그것의 무상성, 상대적 부조리를 모르지 않을 뿐 아니라 에로티즘(에로티즘이 되어 버린 성행위, 인간의 성행위, 언어 능력이 있는 존재의 성행위)의 보편적 테마를 디공하는 것은 나체에 대한 금기와 위반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 P300
내 생각에는 우선 금기와 위반의ㅜ이론이 어디서 비롯되는디를 상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중략) 나는 개인적으로 그의 구두 강의를 들은 적이 없지만, 위반에 관한 마르셀 모스의이론은 제자인 로제 카유아의 작은 책자 인간과 신성에 잘 드러나 있다. 더욱 다행한 것은, 로제 카유아는 단순한 편집에 그치지 않고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예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다가 자신의 능동적이고도 확고한 사상까지 가미시켰다 - P300
나는 여기에 카유아의 진술의 도식을 빌려오고 싶은데, 그의 진술에 의하면, 인종학이 다루는 미개인들의 시간은 세속적 시간과 신성의 시간으로 갈려 있었다고 한다. 세속적 시간이란 일상의 시간으로써 노동의 시간이자 금기를 준수하는 시간이었다. 반면 신성의 시간이란 축제의 시간, 다시 말해 금기를 위반하는 시간이었다. 에로티즘의 차원에서 볼 때 축제는 성적 방종의 시간이다. - P300
내가 비전문적인 철학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문 작업으로서의 철학은 말하자면 하나의 노동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철학은 내가 처음에 언급한 강렬한 감동적 순간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을뿐더러, 배제한다. - P301
사실 극단적 인간성, 즉 인간의 성행위와 죽음의 폭발을 외면한채 오직 평범한 인간성만을 설명할 뿐인 철학의 기만적인 결과에 놀라는 것은 내가 처음이 아닐 것이다. 내가 보기에 철학의 이러한 싸늘한측면에 대한 반발은 키에르케고르는 말할 것도 없고, 니체에서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근대 철학자들의 특징을 이룬다. 당연한 일이지만 철학은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P302
철학은 삶의 극단과 관련된 내가 어디에선가 ‘가능성의 극단‘이라고 표현한 것, 즉 철학적 대상의 극단을 끌어안지 못한 이유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죽음의 철학조차도 기본에 그친다면, 대상을 잊어버리고 만다. 물론 철학은 죽음에 파묻힐 때, 즉 죽음의 끝인 혼미에 자신을 내던질 때만 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 P302
그러한 가정은 철학적 계율을 인정하는 동시에 파기를 전제하는데그러면 이제 철학은 모든 가능성의 총체로서의 종합 작업이 될 수 있다. 그 총체는 종합이지 단순한 더하기가 아닌 것이 왜냐하면 그곳은인간의 노력이 한계를 드러내며, 인간이 무기력에 기꺼이 자신을 맡기는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계율이 없었다면 철학은 지금의 그 지점에이르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계율이 철학을 그것의 최종 목적지에 데려다 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경험적인 진리이다.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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