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문득 그 생각이 들었다. ‘아, 아까 회사 AI가 보낸 통지는 이 로봇을 데리고 나가지 말라는 거였구나.‘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잡힐 듯 말 듯 실마리가 보였다. 그러나 유희는 그 실마리를 잡지 않았다. 그 순간에 집어 들기에는 너무 복잡한 세상사 같았다. - P41
"어떤 인간들 눈에는 그게 굴욕적으로 보였나 봐. 공연하는사람들 말고 제삼자들 말이야. 배달 음식 시켜 먹듯 예술을 배달시키는 탐욕스러운 로봇이랬는데. 나 이런 건 왜 이렇게 잘기억하지? 아무튼, 작은 무대에서 공연하는 사람일수록 내가 초대하는 게 큰 도움이 됐을 텐데 말이지. 짧은 시간이나마 그 사람들이 추는 춤이 직업이 되게 해줬으니까. 나같은 로봇이 천대쯤 있었으면 거리에서 춤추는 일도 꽤 괜찮은 직업이 됐을 거야. 왜 안 그렇겠어, 없던 시장이 만들어지는데? 우리는 군림하는 로봇이 아니라 시장 그 자체였다고!" - P43
"그런데 그거 아마 함정이었을 거야. 내가 이 그림 작가를 알게 된 거. 이 작가 쫓아다니다가 여기까지 와서 갇혀버린 셈이니까. 여러 번 회상하니까 뭐가 자꾸 떠오르려 그러네. 뭐, 아니었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나는 함정이라고 결론 내렸던 것 같아. 이유는 까먹고 그것만 기억에 남았어. 고성능 저기능 로봇이라는 게 그래. 기억이 인간적이지. 흠, 이게 뭘까?" - P44
"그런데 팀장님, 한 가지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팀장님 휴가 중에 있었던 일인데요, 심해도시 외벽에 균열 생긴 거 아무래도 이쪽에서 저지른 일 같아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별안간 공기의 흐름이 이상해졌다. "오작동인지 뭔지 모르겠어요. 밖에 나가 있던 심해용 대형로봇 한 대가 도시 외벽에 충돌했어요. 영상이 남아 있는데, 실수가 아니었어요. 다섯 번이나 같은 자리에 충돌했거든요.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 P46
"했어요, 보고, 그런데 그게 더 이상해요." "왜요?" "아무 조치도 없었거든요. 한시간쯤 답이 없다가 연락이 왔어요. 긴급회의라도 했나 보다 하고 받았는데, 언급이 없었어요. 그 사고에 대해서." "그냥 덮은 거예요?" 직원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P47
"이유를 모르겠어요. 내부에서야 그냥 덮는 게 가능하지만, 상대방은 손해배상 청구를 할 거 아녜요? 그냥 달라는 대로 배상을 하겠다는 건데, 한두 푼도 아니고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결정을 내린 걸까요? 기계들, 뭔가 어마어마한 걸 발견한 게 아닐까요? 이렇게 도망치듯 내팽개치고 떠나는 걸 보면." - P47
. 이거야말로 영감이라고 불릴 만한 깨달음이었다. 맞춰진 퍼즐을 들여다보았다. 공급곡선 전체가 하나밖에 없는 소비 로봇을 유인해 심해저에 잠재워버린 사건 이상한 말이었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제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 P48
잔해가처참하게 흩어지는 모습을 담은 항공 영상이 한동안 업계에 떠들썩하게 퍼져나갔다. 실사로 인한 파손이라니. 회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사고였지만 회사는 평소처럼 영업을 계속했다. - P48
유희는 마사로가 한 말을 떠올렸다. 파괴도 실적으로 바꿔서 계산할 수 있는 거라고. 유희는 그날 회사가 무엇을 파괴해서 어떤 실적을 올렸는지 알 것 같았다. - P49
마사토가 진짜로 작동하는 소비 로봇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유희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꽤 아름다운 추억일지는 몰라도, 마사로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근거는 되지 못했다. - P49
유희에게서 마사로 이야기를 들은 옛 소장님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거기로 갔군요. 우리도 추정은 했어요, 그런 데 있을 거라고. 쭉 네트워크에 연결돼 있었으면 찾기 쉬웠을 텐데 사적인 내면을 지닌 로봇이라 그럴 수 없었거든요." 당혹스럽게도 소장님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 P49
"진짜였군요, 그 소비 로봇이라는 거?" - P50
"그렇죠. 소비 로봇은 개체 하나하나를 분리된 존재로 만들어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불가능하지 않다는 걸 입증한 사례가있잖아요. 하나가 가능하면 언젠가 다른 것도 가능하다는 말이니까. 마사로는 세상을 바꿀 수 있었어요. 마사로를 다시 찾을수 있을까요?" - P50
"쉽지는 않아 보여요. 차라리 심해저에 쭉 있었던 거면 모르겠는데, 해류의 영향을 받는 깊이에서 얼마간 쓸려간 다음 가라앉았을 테니까. 그래도 해보려고요." 마지막 말을 덧붙이다가 유희도 갑자기 목이 멨다. ‘그게 다 진짜라니, 세상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마사로가어떤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없애버린 거잖아!" - P50
기억 속 소장님의 쾌활한 목소리와는 달리, 바닷속 풍경은 너무 어두웠다. 마사로는 자기가 왜 미움을 받았는지 생각했다. - P52
다행히 마사로는 바다가 심해도시를 집어삼키던 순간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애를 쓰지 않도록 디자인된 마사로의 내면이, 극도의 공포를 유발하는 기억을 발생하자마자 자동으로 삭제해버린 덕분이었다. - P52
그 기나긴 침묵 속에서 마사로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 돈 쓰고 싶다‘ - P52
마사로는 내면 가득 무언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니, ‘가득‘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커다란 무언가였다. 마사로는 문득 희열을 느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기쁨이었다. - P53
마사로는 내면의 우주로 퍼져나가는 강렬한 기쁨을 마음으로어루만졌다. 마음의 끝을 향해 뻗어나가는, 형언할 수 없이 황홀한 즐거움. ‘이건 돈이야? 7년 반 만에 지불 수단이 갱신되어 있었다. - P53
연구소의 도움으로 마사로의 지불 수단 몇 가지의 유효기간을 갱신하고 몇 시간이 지났을 무렵, 심해도시 근처를 돌던 무인 항공기가 흔치않은 광경을 포착했다. 수십 마리의 고래가한 지점에 모여들어 있었다. 열다섯 마리 이상, 많으면 스무 마리는 돼 보인다고 했다. - P54
마치 처음부터 그러려고 만들어진 로봇처럼. 엄밀히 따지면 마음을 탐구하는 일은 마사로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지만, 마사로는 왠지 엄밀해지고 싶지가 않았다. 지갑이 두둑해졌기때문만은 아니었다. - P54
그러다 전원이 켜졌다. 광학 신호, 소리 신호가 들어오고 네트워크에도 연결이 되었다. (중략) 마침내 깨어난 마사로에게 유희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마사로, 다시 가서 세상을 구해." 성능이 꽤 좋은 마사로의 기억에 그 말이 영원히 각인되었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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