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시간이 노동 시간과 신성 시간으로의 분할에 이르는 인간의 본질적 체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광기 또는 그와 유사한 극단적인 어떤 쪽을 향해 삶의 문을 열어 놓으면 (그것은 죽음, 신성의 위협 또는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것들의 현전이나 에로티즘과 관련된 모든 가능성을말한다.) 성찰과 노동은 성찰이 멈추는 다른 어떤 것에 종속되기에 이른다. - P304

이 발표의 초두에서도 밝혔듯이, 신성은 모든 사람에게 가치 있는것으로 제시되는 반면 에로티즘은 고독의 의미를 갖는다. 나는 여러분 중 다만 몇 명이라도 신성에서 찾을 수 없는 어떤 가치를 에로티즘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단 한 순간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어떤환상에도 불구하고 또 어떤 무능의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에로티즘은 원칙적으로 한 사람에게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 쌍에게만 의미를 갖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 P305

에로티즘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에로티즘의 의미는 바로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그것도 의미일 텐데, 그러나 고독은 그 의미를 질식시킨다. - P305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 이야기를 듣는 여러분들에게는 일반적인 의미의 신성과 기독교의 신성 사이에 원칙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내가 기독교적 신성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은 편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앞서 말한 기독교적 개념으로 말머리를 돌리는 것은, 내가 말하는 위반을 기독교에서는 죄과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고 싶어서인 것이다. 죄과란 잘못이며, 저지르지 말았어야 할 행동이다.  - P306

에로티즘에 빠졌을 때 우리로 하여금 극단의 강렬함을 맛보게 하는 어떤 것은 동시에 우리를 결정적으로 저주의 고독 속에 몰아넣곤 한다. 반면 신성은 우리를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그 극단성이 우리를 속죄해 주는 역설 (펠릭스 퀼파, 다행스러운 죄과)을 인정할 때 비로소 그럴 수 있다.  - P306

왜냐하면 기독교권의 우리는 위반을 저지르면서 즐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권 밖의 사람들만이 고독에 처해진 채 위반을 누릴 수 있다. 기독교도는 위반에 다름 아닌 어떤 것을 더 이상 행사하지 않을 때, 다시 말해 문명의 근거인 금기를 범하지 않을 때 비로소 같은 인류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 P307

죽음과 관련된 금기의 위반 사이에 완전한 일치는 없다. 금기의 위반은 오히려 전쟁이다. 그러나 신성도 그에 못지않게 죽음의 고도에 이른다.
죽을 각오로 사는 성자라는 점에서 신성과 전사의 영웅심은 유사하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죽을 각오로 산다니? 얼마나 역설인가? 계획이 본질은 아닐지라도 신성은 언제나 계획이다. - P307

가장 야릇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전적인 위반은 그것에 대한 언급을피하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가령 모든 형태의 고대 종교가 그랬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거기에 대한 언급을 허용하는 위반의 길을 열어 놓았다. 여기서 간단히 인정할 것은 담론은 기독교 너머로 위반과 유사한 모든 것, 금기와 유사한 모든 것을 부정하는 성향이 있다는 점이다. 성행위 차원의 탈선적 나체, 성금기의 부정, 금기가 필연적으로 초래하곤 하는 위반의 부정이 그렇다. - P307

나는 생각건대 말을 하면서도 침묵에 아주 막중한 경의를 표한 듯하다. 이 경의는 아마 에로티즘에도 해당된다. - P308

 지금부터는 우리를 세상에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여기에서의 구원은 일종의 신성이 교회와 무관하게 또는 교회에 역행해서 세상으로부터 구원해 낸다는 의미에서이다.)은 그 어떤 것도 나의 의도를 어긋나는 것이다. 계율은 우리를 노동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반면, 극단적 체험으로부터는 멀어지게 한다고 했다. - P308

그러나 극단적 체험도 나름대로의 계율이 있는 법이다. 어쨌든 이 계율은 어떤 형태의 것이든 에로티즘의 언어적 변론을 거부한다. 나는 에로티즘은 침묵인 동시에 고독이라고 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현전이, 현전 그 자체가 순수 침묵의 부정, 수다, 가능한 고독의 망라인 사람에게는 그럴 수 없다. - P308

3장

번식과 관련된 금기

자유로은 동물적 성생활을 거부하는 우리 안의 보편적 금기

 장애물로부터 그것이 전복된 시점으로 건너가고 싶어 하다가벌써 나는 죽음의 금기와 평행 관계를 이루는 일련의 금기들을 문제 삼는 데까지 왔다. 나는 성을 대상으로 하는 금기들에 대해서는 부차적으로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죽음과 관련된 관습에 대한 흔적은 아주 오래전의 것들이 남아 있는 반면, 성에 관련된 자료는 최근에야 선사시대의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 P55

(전략) 그러므로 우리는 성행위도 죽음에 못지않게 일찍부터 인간의 관심사였음을 알 수있다. 죽음의 경우와는 달리 그렇게 모호한 자료를 통해 명백한 증거를찾아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음경의 그림은 상당한 자유를 반증한다. 그러나 자유롭게 음경을 그렸다고 해서 그 사실 하나만으로 음경을그린 사람들이 성적 자유를 누렸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 P56

 노동의 공동 사회는 노동 시간 동안 성행위에 빠져 있을수 없다. 그러므로 성의 자유에는 원래부터 제한이 가해졌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적용되는 경우들에 대해 아직 무슨 말을 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우리는 거기에 금기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있을 것이다. - P56

그러한 제한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크게 다르다. 모든 사람들이 성기를 숨길 필요성을 같은 정도로 느끼지는 않는다. 그러나 발기된 남성의 성기를 보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대개 남녀가 결합할때는 한적한 곳으로 자신들을 숨긴다.  - P56

오히려 우리의 체험은 자체적으로 별 중요성이 없는 피상적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금기가 지닌 깊은 의미를 반증할 뿐이다. 우리는 이제 금기는 형태가 분명치 않으며, 그래서 그 양상은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성행위를 할 때 지키는 여러가지 제한들은 이처럼 형태가 분명치 않은 금기에서 비롯된다. - P57

그러나 우리가 이 기회에 확신하게 된 것은 거기에는 공통적으로 우리를 구속하는 어떤 기본적인 규칙이 있다는 사실이다. 성에 제한을 가하는 우리 안의 금기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어떤 것이다. - P57

 로제 카유아는 "근친상간 금기처럼 많은 잉크를 소비시킨 문제들은 주어진 한 사회의 종교적 금기들의 총체를 끌어안는 체계 안에서 고찰하되 개별적인 경우들로 고찰할 때 비로소 만족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²고 한다. 로제 카유아의 이 말은 출발로서는 완벽하다. 


2) 『인간과 신성』, 2판(갈리마르, 1950), 71쪽. - P57

근친상간 금기

근친상간의 금기는 ‘하나의 특수한 경우‘에 불과하지만 우리의 가장 큰 관심거리이다. 심지어 그것은 성 금기 자체와 대체될 수 있을 만큼 일반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 P58

 무수한 다른 금기를 낳은 금기 자체 (근친상간 금기도 그 한 경우이긴 하지만)는 인간의 행동에 관한 연구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지 못한 반면 근친상간이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지성은 단순하고 명확한 것은 주목하지만, 모호해서 변수가 많은 것, 파악이 어려운 것은 외면하는 성향이 있다. - P58

교대 사회는 인척 관계에 따라 사람들을 엄격하게 분류했으며, 그에 따른 결혼과 금기도 과학 이상으로 엄격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고대의 가족 구조를 파헤쳐, 인간들을 동물의 자유와는 다른 규칙의 준수로 인도하는 막연한 그러나 근본적인 금기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원천적 특수성들을 찾아낸 데 있다. - P59

 그러한 조치들은 명확하면서도 이상한데 그러나 정당한 분배가 가져다주는 이해관계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만도 아니다. 금기는 어떤 규칙을 따라 작용한다. 그러나 규칙들은 성적 폭력과도 무관하고 합리적 질서에 대해 그것이 표상하는 위험과도 무관한 부차적 이유들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결정되었을 수 있다. - P59

근친끼리의 육체적 관계를 금하는 근친상간 금기의 보편적 성향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으면 우리는 우선 고집스럽게 고개를 쳐드는어떤 강한 감정을 떠올려야만 한다. 이 감정이 본질적인 것이라고 할수는 없다. - P59

 드러난 원인을 가지고 금기의 원칙을 정할 수 없었고, 다만 원칙을 임시 목적에 사용할 수는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잘 알고 있고,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있는 ‘종교적 금기의 총체‘
에 그 특수한 경우를 연관시켜볼 필요가 있다. 근친상간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이 우리에게 있을까? (나는 여기에 죽은 사람에 대한 경의를 포함시킨다. 그러나 근기의 총체가 연결돠어 나타나는 최초의 단위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언급하려고 한다.) - P59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다 보면 우리는 일상과 때로는 일치하는가 하면 때로는아무렇게나 반응하는 듯한 어떤 원초적인 공포감을 느끼기에 이른다.
문제는 평온하고 합리적인 행동이 지배하는 세계와 성적 충동의 폭력의 세계가 근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데에 기인한다. 시간이 흐르면 거기에서 생겨난 규칙들이 불안정하고 임의적인 형식이 아닌 명확한 정의를 얻을 수 있을까?³

3) 나는 클로드 레지스트러스의 저서를 참조하면서 2부에서(이 책 2부의 연구 4 참조.) 근친상간의 문제점에 대해 상세히 다루었다. 『친족의 기본구조』(PUF, 1949), 8절판, 640쪽. - P60

월경과 출산의 피

 피는 그 자체가 이미 폭력의 상징이다. 더 나아가 월경은 성행위를 의미하며,
성행위에서 분비되는 체액을 의미하기도 한다. 체액은 폭력의 한 결과이다. 출산도 이러한 총체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출산 역시 그 자체가 이미 파열이며, 질서 있는 행동의 흐름을 넘쳐나는 과잉 아닐까? - P61

 이러한 의견들이 특별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금기들도 마찬가지다.
비록 우리가 체액에 대해 공포감을 갖는다 해도, 그와 관련된 금기들은우리가 보기에 의미가 없다. 문제는 불변의 핵심이 아니다. 우리가 다룰 것은 잘못 정의된 핵심 주변의 보조적 양상들이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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