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쿠정 철교 밑을 지나 도쿄 교통회관 건물로 향하는 그녀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가슴이 설렜다. 약속 장소는 15층 도교 회관 긴자 스카이라운지였다.
"유라쿠정의 하늘에서 만나요." - P106

이케우치 씨는 시라이시 씨를 발견하고 일어섰다.
"나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싹 나았는걸요."
(중략)
코스 요리를 주문한 뒤 이케우치 씨는 애용하는 노트를 폈다.
"이걸 보십시오. 그저께 도착한 겁니다." - P106

‘내 『열대』만이 진짜랍니다.‘
"보낸 사람 이름은 없네요."
"지요 씨가 보낸 겁니다."
보아하니 지요 씨는 학파에서 탈퇴한 뒤 교토로 간 듯했다.
그녀는 교토 출신이니 그곳으로 가도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하지만 일부러 이런 그림엽서를 이케우치 씨에게 보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 P107

이 엽서에는 다른 목적이 있다고 시라이시 씨는 생각했다.
"지요 씨는 교토로 오라고 하는 거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 그렇지만 왜요? 무슨 이유로?"
"아마도 『열대』의 비밀이 교토에 있기 때문이겠죠." 이케우치 씨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도 비장의 카드가 있어서 말입니다" - P107

"『열대』를 쓴 사야마 쇼이치는 교토에 살았습니다. 당시 그 사람은 학생이었죠. 그런데 1982년 2월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거든요."
"어떻게 그런 걸 아시죠?"
"지요 씨는 사야마 쇼이치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게 제비장의 카드입니다." - P108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저도 지요 씨한테서 들었어요." 시라이시 씨가 끼어들었다. "어렸을 때 서재에 숨어들었다면서요?"
천일야화 말이죠?"
"네, 그거."
"지요 씨 아버지가 사야마 쇼이치와의 만남에 얽혀 있는 겁니다." - P109

서재에는 ‘방 안의 방‘ 같은 기묘한 장소가 존재했다. 계단식 사다리로 이어지는 중 2층 같은 좁은 공간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할 법한 작은 문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말을미루어 짐작하건대 그 방에는 희귀 서적과 개인적인 메모 및 여러 권의 일기장이 가득한 듯 했다. - P109

 아버지가 이집트에 여행 가서 사온 천일야화 사본의 일부였다. 찾아온 학생은 문학부에서 아랍어를 공부하는 대학원생으로, 아버지는 사본을 그에게 읽어봐 달라고 부탁할 생각인 듯했다. 결과적으로 별달리 진기한사본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버지는 학생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 뒤로 청년, 즉 사야마 쇼이치는 애용하는 노트를 옆구리에 끼고 이따금 아버지의 서재를 찾아오게 됐다. - P110

"지요 씨와 사야마가 처음 만나고 반년 뒤, 다시 말해 1982년2월이군요. 요시다 신사의 세쓰분(입춘 전날) 축제를 구경하러나간 날 밤, 지요 씨는 인파 속에서 사야마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야마는 그 뒤로 모습을 감춰서 두번다시 지요 씨앞에 나다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해 겨울 사야마는 이따금
‘소설을 쓸 생각‘이라고 지요 씨한테 말했습니다. 마술에 얽힌이야기, 남양의 섬을 둘러싼 불가사의한 모험담이 될 거라고말이죠." - P110

지요 씨가 이케우치 씨에게 한 이야기에 따르면, 그냐가 사야마 쇼이치의 『열대』를 알게 된 것은 2년 전, 남편 사무실을대청소하고 있을 때였다. 폐기할 자료들 틈에 섞여 있던 것을우연히 발견했다. 이상하게도 남편은 그런 책을 산 적 없다고하는 데다 사무실 다른 사람들도 그 책의 출현 경위에 관해 짐작가는 데가 없는 듯했다.  - P111

"사야마 쇼이치라는 인물도 노트를 애용했나 봅니다."
이케우치 씨는 노트를 덮고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지요 씨와 산책을 나갈 때도 하숙집에서 이야기를 할 때도 늘 노트를 들고 있던 모양입니다. 그 부분에서 아주 공감이 느껴지더군요." - P111

시라이시 씨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사야마 쇼이치는 어째서 모습을 감췄을까. 『열대』라는 책이 존재하니까 그는 죽은 게 아니다. 하지만 살아 있다면 어째서 지요 씨에게 연락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사야마는 『열대』라는작품을 남긴 것을 끝으로 30년 이상 다른 작품을 한 편도 쓰지않았다. 아니, 애초에 『열대』의 존재 자체가 확실하지 않다. 실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까. - P112

"갔다 오시면 모험의 전말을 들려주세요."
"물론입니다. 좋은 소식을 기대해 주십시오."
이케우치 씨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P113

시라이시 씨는 상점 계산대에 턱을 괴고 있었다.
이케우치 씨는 『열대』의 수수께끼에 도전하기 위해 교토로 떠났다. 빈둥빈둥 손 놓고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한심하다. 뭔가 자기 나름의 가설을 세울 수는 없을까. - P113

지요 씨는 사막의 궁전이 무대를 지나서 있다고 말했다.
어떻게 단언할 수 있었을까. 그녀만의 비밀, 다른 학파 멤버들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은 기억이 있는 게 틀림없다. 그건 거의 완성된 퍼즐로서 그녀의 가슴에 감춰져 있었으나 마지막 조각이 모자랐다. 그런데 자신이 나타났다. 그리고 ‘보름달의 마녀‘
라는 말이 지요 씨의 퍼즐을 완성으로 이끈 것이라면,
보름달의 마녀는 어떤 인물일까. - P114

일요일 정오 지나 그녀가 메리에서 점심을 먹는데 갑자기전화가 왔다. 이케우치 씨였다. 무슨 발견이라도 한 걸까.
"웬일이세요. 이케우치 씨."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바쁘지 않아요. 지금 점심시간이거든요."
(중략)
"지금 어디 계시는지요?"
이케우치 씨의 목소리에는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중략)
"아뇨, 교토에서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봐서 말입니다."
"전 유라쿠정에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녀는 웃었다. - P115

시라이시 씨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내 『열대』만이 진짜랍니다.
확신에 찬 목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했다.
지요 씨가 보트를 타고 거침없이 바다를 달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반짝이는 눈동자는 수평선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참아름다운 이미지였다.
이케우치 씨는 교토에서 지요 씨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 P116

그 다음 월요일 오후, 시라이시 씨는 진보정에 갔다.
야스쿠니 거리에는 평온한 빛이 비추고 길을 걷는 이들도느긋해 보였다.
거리를 따라 늘어선 헌책방 앞에는 책이 가득한 손수레가여럿 있었다. 입구 양옆으로 쌓인 헌책 탑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곳도 있었다. 그쯤 되면 점포라기보다 헌책으로 만든 동굴이다. - P117

가령 여기 진보정의 서점에 들어가 책 한권을 집어서 펴면그 순간 특별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을 말이 메워 대지가 생겨나고 초목이 우거지고 인간이 살기 시작해 그곳에 세계가 나타난다. 다른 책을 집으면또 다른 세계가 나타날 것이다. - P117

‘어째 정신이 아득해지네.‘
시라이시 씨는 살짝 하품을 했다.
(중략)
약속 시간에 런천으로 가자 친구는 먼저 와서 교정쇄인 듯한 종이 뭉치를 읽고 있었다. 아주 편집자 같은 모습이었다. - P118

친구는 "그나저나 이상하네" 하고 중얼거렸다.
"학파 사람들은 지금까지 1년도 넘게 『열대』에 관해 조사한거잖아? 그동안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어. 그런데 연말에 네가 학파에 참가한 뒤부터 빠른 속도로 진전이 있었지. 의외로네가 핵심 인물일지도 몰라." - P119

친구는 아는 편집자들에게 물어봤지만 사야마 쇼이치라는소설가도, 『열대』라는 작품도 안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헌책방 주인에게 묻자 "그 책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다"라는대답이 돌아왔다. 1년쯤 전에 문의를 받았다고 했다. 어째서 그런 것을 기억하느냐 하면 나카쓰가와 씨라는 수집가가 끈덕지게 묻고 다니는 바람에 헌책방거리에서 조금 화제가 됐다는것이다.
"그런데 못 찾았다." - P119

어쨌거나 친구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나카쓰가와 씨에 관한 소문뿐, 막상 『열대』의 내용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세계 최대의 헌책방 거리에서 화제가 됐는데도 아무도 정체를 모른다는 것은 참 기이한 일이다.
"시라다마는 『열대』의 정체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데?"
시라이시 씨의 이름은 다마코라서 친구는 마음이 내킬 때면 갑자기 ‘시라다마‘라고 부르곤 했다. - P120

"...하나 생각한 게 있긴 한데."
『천일야화』와의 관계였다.
하리마 고개의 아파트를 찾아갔던 날, 지요 씨는 소파에 앉아 천일야화』를 읽고 있었다. 
(중략)
"『열대』와 『천일야화』는 뭔가 관계있는 걸까 싶어서." - P111

"반대일지도 모르잖아. 『열대』에 『천일야화』가 나오는 거야."
"그러게, 그런 패턴도 있겠네."
(중략)
"뭐, 실물이 없으니까 확인할 방법이 없네."
친구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나도 생각난 게 있는데"라며 뜸을 들였다. - P121

"......그거 정말 『열대』였어?"
정색하고 물으니 시라이시 씨는 괜히 불안해졌다. 꽤 오래전에 읽은 데다 실물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열대』를 읽은 사람들이 있다. 실물은 없어졌어도 학파 멤버들의 ‘추억‘은 남아 있다. - P122

"다시 말해서 말이지, 사실 『열대』라는 책은 존재하지 않는거야. 그건 학파 사람들의 바람 속에만 존재해, 너희가 읽었다고 믿는 건 실은 다 다른 책이야. 그걸 조합해서 『열대』라는 한권의 책을 날조하려고 하면 불일치가 생기는 건 당연하잖아? 그 모순을 ‘무풍대‘라고 부르면서 얼버무리는 거야."
(중략)
".....라는 가설을 세워봤는데, 어때?" - P122

시라이시 씨는 멈춰 서서 친구가 지적한 것을 돌이켜봤다.
사실 『열대』라는 책은 존재하지 않는 거야.
자신들은 『열대』를 읽은 게 아니라 『열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신조 군의 ‘언어적 독‘ 가설과 비슷한 정도로 황당무계한 가설이었지만 허튼소리라고 무시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그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진실일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 P123

"시라이시 씨."
그녀는 놀라 전화를 끊고 돌아봤다.
신조 군이 공터 울타리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홀쭉하게 여위어서 눈만 형형하게 빛났다. 분위기가 확실히 이상했다.
"신조 군? 어디 아파요?"
"아까 큰길에서 보고 쫓아왔어." 신조 군은 여유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 환영이 보여."
- P124

"잠깐만요, 신조 군." 시라이시 씨는 말했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태양이 구름에 가려져 뒷골목은 수몰되듯 어스름에 잠겨갔다. 신조 군은 울타리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시라이시 씨에게 서서히 다가오며 진범을 지적하듯 말했다.
"당신이 ‘보름달의 마녀 ‘지?"
시라이시 씨는 경악했다. - P125

주위 공간이 순간 일그러진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소리예요? 그럴 리 없잖아요." 미인
"자, 저주를 풀어 줘. 이제 수수께끼는 지긋지긋해."
서서히 다가오는 신조 군의 눈은 정상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자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쯤은 스스로 알 수 있다. 대체 신조 군은 어떤 망상같은 가설에 사로잡힌 걸까. - P125

시라이시 씨는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첫째는 신조 군의 ‘체력 부족‘을 만만히 본 것이었다. 탐정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 체력이 약해진 데다 최근 계속 수면 부족을 겪은 신조 군에게 거침없이 달려가는 시라이시 씨를 뒤쫓는 것은 무리였다. - P126

또 하나의 실수는 자신이 길치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신조 군을 떼치고 진보정 뒷길을 지그재그로 달리는 사이에 시라이시 씨는 길을 알 수 없게 됐다. ‘설마 여기까지 쫓아오지는 않겠지‘ 하고 한숨을 돌리려고 한 순간 신조 군의 궁상맞은 뒷모습이 보였다. - P126

중 2층 구석에서 난간 너머로 오락실 입구를 망보고 있으려니 아니나다를까 신조 군이 들어왔다. 게임기 불빛에 창백한얼굴이 비쳤다.
‘헉, 살인귀 같아.‘
그녀는 몸을 움츠리고 숨을 죽였다. - P127

그러고 보니 나카쓰가와 씨의 사무실이 진보정에 있다고 했다.
"쫓기고 있군요?"
"어떻게 아세요?"
"당신이 허겁지겁 들어오고 나서 신조 군이 보였으니까요.
그 친구 요새 분위기가 이상했거든요. 집요하게 시비를 걸어오는 바람네 저도 애먹는 중입니다." - P127

"저런 곳에 있으면 나갈 수 없잖아요."
그러나 나카쓰가와 씨는 침착했다.
"아가씨, 진보정은 우리 집 앞마당이랍니다."
나카쓰가와 씨는 오락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관계자외출입금지‘라고 쓰여 있는 작은 문이 있었다. 문을 지나자 건물 뒤로 나올 수 있었다. 눈앞에 콘크리트 벽이 있어 썰렁했다. - P128

나카쓰가와 씨가 그녀의 등을 계속 밀며 명랑하게 말했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거죠?"
"못 나갑니다."
".....못 나간다고요?"
그녀는 숨을 훅 들이마시며 멈춰 섰다.
"여기는 이야기의 막다른 골목이에요, 아가씨."
그 순간 뒤에서 문을 잠그는 차가운 소리가 났다.
"난 칼을 갖고 있으니까 쓸데없는 저항은 할 생각 말아요. 불을 켤 테니까 안으로 들어가서 소파에 앉아요. 고급 커피를 대접하죠.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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