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레오는 트리 하우스에서 자동차 진입로를 올라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보자 손을 흔들고는 밧줄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레오를 다시 보자 전율이 흘렀다. - P59

언젠가 헬렌이 미용실에서 몰래 가져온 《보그》 잡지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사진 속 게이브리얼은 타자기 앞에 앉아 있었고 옆에는 위스키 잔이 놓여 있었다. (중략). 그는 독설가이자 애주가인 여성 등장인물들과 야하고 도발적인 성적 묘사로 용감한 작가라는 명성을얻었고, 때로는 내 눈물을 쏟아냈다. - P60

집안에 들어서자 추억이 밀려왔다. 현관에서 나는 냄새도 똑같았다. 사방에서 풍기던 왁스 광택제와 오래된 나무 냄새. 참나무 판자를 붙인 벽, 쪽마루를 깐 바닥, 내가 좋아한, 양말 신은 발로 밟으면 미끄러웠던 낡은 원형 계단 게이브리얼과 함께 아버지의 담배를 훔치러 가던 주방. 그곳에서 약간 떨어진 방에 게이브리얼이 있었다. - P60

"여보 우리 강아지 어디 있어? 오늘 오후에 데려온다고 하지 않았어?" 저녁을 먹으러 목장에서 돌아온 프랭크가 물었다.
"게이브리얼 아들에게 줬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프랭크는 말이 없었다.
"레오가 강아지 훈련하는 걸 도와주려고 그런 일이 다시 생기는 건 싫으니까." - P62

프랭크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이었다. ‘베스, 그 애와 엮이지 마. 그 애는 우리 아들이 아니야. 그런다고 우리 아들이 돌아오지 않아.‘ 이런 말을 하고 싶겠지.
그 대신 프랭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울프와 그 아들과 시간을 보내는 게 걱정할 일일까?" - P63

재판


내가 일반 방청석에 자리 잡자 다들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중략).
이 이야기가 처음 알려졌을 때, 사진기자들이 우리 집을 찍으려고 목장에 몰래 들어왔다. (중략).
나는 우리가 구상해서 다듬고 매일 연습하며 완벽하게 만들려고 애쓴 이야기를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그것으로 충분하기를 바라면서.
진실을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쉬울까? - P64

과거


게이브리얼의 텐트 안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른 우주에 들어간듯한 분위기였다. 더블 사이즈 매트리스에는 시트가 깔려 있고 담요가 놓여 있었다. - P65

그는 침대 옆에 펼쳐서 엎어놓은 소설책을 집어 들어 내게 보여주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편 『스완네 집쪽으로』였다.
"다음 학기 토론 수업에서 잘난 척하려고 고른 책인데 생각보다 괜찮더라. 꽤 재미있는 대목도 있고" - P66

그는 내 손을 잡았다.
"우리가 밤을 같이 보낸다고 해서 이 이상의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마."
"내가 원한다면?"
"그러면 이야기를 해봐야겠지."
"원해" - P67

우리는 천천히 서로를 향해 움직였고 곧 본능에 굴복하고 말았다. 계획된 게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분이 좋았다. - P68

잠시 후, 나는 게이브리얼 쪽으로 몸을 살짝 움직였다.
"괜찮아? 아파? 그만할까?"
"게이브리얼? 부탁인데 입 좀 다물어."
"노력할게"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 P69

이건 러브 스토리였고 과거에 내가 꿈꿨던 그 어떤 이야기다 훨씬 좋았다. 내게 단 하나의 소원이 허락된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우리의 이야기가 해피엔드이기를 - P69

1968년


레오를 만나러 가는 첫날, 나는 프랭크와 지미와 함께 양들이 풀을 뜯는 들판에 나와 있었다. 우리는 암컷 양에게 먹이와 물을주고 새끼 양을 살펴보았고, 다음 주 경매에서 어떤 양이 먼저 팔릴지 이야기하며 목록을 수정했다. - P70

그는 내 옷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오늘 나는 평소에 입던 프랭*크의 낡은 비옐라 셔츠와 코듀로이 바지를 입지 않았고 무릎까지 오는 장화도 신지 않았다. 


* 양모와 면을 섞은 옷감 - P71

나는 문을 두드렸다. 한때 지금과 매우 다른 이유로 가슴 두근대며 이 자리에서 있었던 기억을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 P72

"베스, 들어와 널 보면 아주 좋아할 사람이 있어."
때마침 레오가 강아지를 안고 현관으로 뛰어왔다.
"아직 이름 안 붙여줬어?" 내가 물었다.
"히어로예요." 레오가 대답했다. - P72

"벌써 가는 거 아니죠? 가야 해요?" 레오가 물었다.
레오가 별 뜻 없이 한 말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그 순간 아이의 외로움이 보였다. "그 전에, 트리 하우스 보여줄래?"
레오는 무척 기쁜 표정이었다.
트리 하우스 내부는 전혀 뜻밖의 모습이었다. - P74

"아빠가 여름에는 잘 거랬어요. 아빠는 야영을 좋아하거든요.
어릴 때 호숫가에서 야영했대요."
나는 가슴이 두근댔지만 애써 외면했다.
"언젠가 주말에 호수를 그린 적도 있어요. 그런 다음에 여기 올라와서 저녁을 먹고 촛불을 켜놓고 카드 게임을 했어요. 정말 최고였는데." - P74

"학교 가는 게 정말 싫어요." 레오는 갑자기 화난 표정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
"항상 혼나요. 선생님이 매일 교장 선생님한테 보내고요. 아니면 교실 밖에서 벌을 세워요." - P75

"아줌마 가기 전에 보드게임 한 판 할까?"
"좋아요." 레오는 밝은 표정으로 상자에 손을 뻗었다. - P75

과거


해가 쨍쨍 내리쬐는 8월의 어느 한 주 동안 게이브리얼의 부모님이 스코틀랜드 하일랜드로 휴가를 떠나게 되었다.
"들꿩 사냥하러 가시는 거야. 그래, 잔인하지. 하지만 그 덕에 우리가 뭘 누리게 되었는지 봐. 일주일 내내 이 집에서 마음대로 지낼 수 있다고" 게이브리얼이 말했다. - P76

이 집의 아름다움에 주눅 들지 않기란 힘들었다. - P76

응접실 피아노 위에 걸린 가족사진을 유심히 보았다. 1930년대에 결혼한 신부 테사 울프는 그 어떤 할리우드 스타보다 아름다웠다. (중략).
가장 마음에 든 사진은 게이브리얼의 사진이었다. 아홉 살쯤되어 보였는데, 반바지에 흰색 셔츠를 입고 다리를 꼬고 앉아서통통한 검은 래브라도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 P77

메도랜즈에 가는 날, 어머니가 의사에게 부탁한 페서리*를 내밀어서 깜짝 놀랐다. 게이브리얼과의 관계를 어머니와 이야기해본 적은 없었지만, 내가 호숫가에서 자고 오는 날이 많았기 때문에 눈치채신 게 분명했다.
"엄마는 괜찮아요?" 내가 물었다.
"둘이 진지해 보이는데. 게다가 남자들은 결혼하기 전에 여러연인을 만나잖니. 여자라고 안 될 게 있겠어?"


* 질 경부에 씌워 정자가 자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여성용 피임 도구. - P78

일주일 동안 우리는 한 사람처럼 지냈다. (중략).
우리는 신선한 식재료가 떨어져서 저장 식료품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점점 희한한 요리를 해서 먹었다. 통조림 햄을넣은 콩소메 수프, 너무 오래 익혀서 접착제처럼 끈적해진 쌀, 큰 통조림 완두콩을 곁들인 구운 감자 같은 것들이었다.  - P79

"우리가 뇌를 공유한 기분이야. 현실로 다시 돌아가면 어떻게 적응하지?" 게이브리얼이 말했다. - P79

우리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것도 와인에 취해 혀가 풀린 이런 밤이었다. 나는 게이브리얼을 만나기전에 나를 사랑한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같아서 걱정된다고 털어놓았다. - P80

나는 적당한 말을 생각하느라 잠시 멈추었다. 그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어머니의 불륜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가 그 관계를 정리하고 게이브리얼과 아버지에게 분노와 원망을 표출했기 때문이었다. 이기적이고 모진 사람 같았다. - P81

"날 떠나지 않을 거지?" 함께 보낸 마지막 밤에 게이브리얼이 물었다. - P81

1968년

(전략). 바비가 죽고 나서 사람들은 명상을 권했고 도서관에서 불교나 고대 요가 수련에 관한 책을 빌려다 주기도 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정말이지, 몇 분 동안 심호흡한다고 내 고통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는건가?‘ 어디에서나 바비가 보여 고통에 몸부림치던 초반 몇 달동안에는 글을 읽을 수조차 없었다. - P83

시골 사람들은 대부분 그랬다. 우리는 도시 사람들보다 예의를 중시하며 산다. 적어도 나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중략).
하지만 현관문을 열었을 때 게이브리얼이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 P84

게이브리얼은 그 사진을 유심히 보았다.
(중략).
"마감일이 다가오는데 일이 많이 밀려서, 매일 레오를 몇 시간정도 봐줄 사람이 필요해. 당연히 유급이고, 학교 끝나는 시간에 레오를 데려와서 내가 글 쓰는 동안 같이 뭔가를 해주면 돼. 혹시 해줄 수 있어?" - P85

게이브리얼의 말이 옳았다. 지난 몇 주 동안 나는 메도랜즈에서 점점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었다. 잘 웃고 재잘대고 호기심많은 레오와의 편안한 우정은 그 무엇보다 큰 위로가 되었다. - P85

"네가 와준 덕분에 레오가 많이 달라졌어. 나도 그렇고. 네가 날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야. 어색하다는거 알아.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하려는 말은,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는 거야"
"친구잖아." - P86

"프랭크와 이야기해 볼게. 우린 모든 걸 의논해서 결정하거든."
"물론 그래야지. 고마워." - P87

저녁을 먹으며 프랭크와 나는 목장 일과 늘어나는 빚에 관해 이야기했다. 프랭크는 곧 은행에 가야 하는데 걱정된다고 했다. 소규모 목장은 수익이 나지 않았다. 돈을 벌려고 하는 일이 아니었다. 고생스럽지만 목장을 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 P87

"게이브리얼이 방과 후에 레오를 봐달라고 부탁했어. 매일 두시간씩 가끔은 내가 메도랜즈로 가겠지만 난 레오를 우리 집으로 데려오고 싶어. 레오는 목장을 좋아해. 동물을 정말 좋아할거라고"
"안 돼, 베스."
프랭크의 표정이 달라졌다. 내가 싫어하는 표정이었다. - P88

"그 사람의 동정 따위는 필요 없어.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으면서도 그런 걸 고민하다니 놀라운데."
"동정이 아니라 일자리야, 내가 안 하면 다른 누군가가 하겠지.
하지만 난 할 거야. 그래, 돈 때문이야. 하지만 그 애를 위해서가더 큰 이유야 프랭크, 내게도 도움이 된다고."
"그건 위험한 일이야." 프랭크가 나지막이 말했다. - P89

과거

가까이에서 본 테사 울프는 정말 놀라웠다. - P89

게이브리얼의 말에 따르면 테사는 점점 술에 취하고 있었다.
"그냥 어머니 말이 전부 다 맞다고 하면 괜찮을 거야." 저녁 식사 자리에 도착한 내게 게이브리얼은 이렇게 말했다. - P90

음식을 내온 세라는 나보다 두 살이 더 많았고, 우리 둘 다 헴스턴 초등학교에 다녔다. 내가 소고기 조각을 먹는 동안 기다리는 세라를 보자 나 자신이 가짜처럼 느껴졌다. - P90

하지만 세라는 고개만 까딱하며 겨우 아는 체하고는 시선을 피했다.
"옥스퍼드에 지원했다면서? 잘됐구나 어느 칼리지에 지원했지?" 에드워드가 물었다.
(중략).
"사실 세인트 앤스는 평판이 아주 훌륭해. 물론 내가 다니던시절에는 옥스퍼드에 여학생이 하나도 없었지만, 게이브리얼이 정말 부러운데." 에드워드가 말했다. - P91

"부모님은 두 분 다 일하신다고? 어머니가 자식들이 어릴 때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 걸 아쉬워하실 것 같구나."
(중략).
일종의 시험 같은 기분이 들었고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 P92

테사는 내 침묵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술잔을 채우고 다른 질문을 쏟아냈다. "게이브와 네 얘기를 해주렴. 그 애를 정말 사랑하니? 대답 안 해도 되겠네. 네 눈에 답이 다 있으니. 그리고 게이브도 널 아주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단다." - P92

나는 게이브리얼이 해준 어머니 이야기를 떠올리며 자신을 위로했다. 테사는 심술궂은 주정뱅이고 자기 인생이 마음에 들지않아서 게이브리얼의 인생에 집착한다고.
그리고 테사가 게이브리얼을 나만큼도 모른다는 사실도 알 수있었다. - P93

"그럼, 이제 저희는 호숫가로 가도 될까요?" 게이브리얼이 적당한 시점에 대화를 끊었다.
(중략).
"그 전에 설거지를 돕고 싶어요." 나는 주방에서 일하는 세라 생각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호화로운 음식을 먹는 동안 시중세라 때문에 죄책감이 들고 당혹스러웠다. - P94

멀리 주방 한구석 싱크대 앞에 세라가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접시가 쌓여 있었다. 내가 들어갔는데도 세라는 돌아보지 않았다. - P94

테사는 이렇게 말하고는 속삭임보다 살짝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기 전에 한마디 할게. 분별 있게 피임은 잘하고 있겠지?"
나는 너무 소름 끼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테사를 보기만 했다. 주방 반대편에 있는 세라에게 이 말이 들릴 리 없었지만, 그럼에도 모멸감을 느꼈다. - P95

(전략).
게이브리얼은 그럴 리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 당황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 저녁 식사잖아.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내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분노를 통제할 길이 없었다. "넌 이해 못 해. 하긴, 이해할 필요가 없겠지. 넌 그런 사람이니까."
"그게 무슨 뜻이야?" - P96

게이브리얼은 나를 꼭 안았다. (중략).
곧 눈물이 흐를 듯 눈이 반짝였다.
"사실 난 가끔 어머니가 무서워. 어머니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거든 그래도 내가 널 지켜야 했는데 날 용서해 줄래?"
우리는 키스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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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미


01
"히로미, 신경과에 한번 가 보는 게 어떻겠니?"
퇴근길에 들른 카페에서, 같은 기획사 도우미 아츠코가 한참 망설이던 끝에 그렇게 말했다. - P9

지난달부터 몸이 불편했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고, 밤에는 잠을 못 잤다. 숨쉬기도 힘들었다. 가슴이 찌릿찌릿 아플 때도 있었다.
원인은 잘 알고 있다. 누군가가 뒤를 밟기 때문이다. - P10

그 색골 놈 때문이야. 지가 뭔데 내 허리에 손을 둘러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데, 대각선 방향에서 께름칙한 시선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그러나 바라보는 사람은 없었다. - P10

스토커를 담당하는 여경이 상대의 인상을 물었다.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원래 스토커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선을 느낍니다."
"어디서든 늘 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30분을 설명하자, 여경과 아츠코는 당혹스런 표정을지었다. 여경은, 상대를 목격한 다음에 오세요, 하고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아츠코는 생각에 잠겼다. - P11

그 후에도 아츠코에게 몇 번에 걸쳐 현 상황을 설명했다. 아츠코는 응응, 하고 대화에 응해 주긴 했지만,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히로미의 건강에 대해 걱정했다.
아무래도 정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 P12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이라부 종합병원‘ 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 P12

이라부 종합병원의 신경과는 지하에 있었다.
아침에 거울 앞에 서서 피부가 거칠어진 것을 보고서야 결심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에 지장을 주고 말 것이다. 겉모습은 히로미의 생명줄이다. - P13

"스물네 살에 직업은 탤런트 겸 모델, 정확히 무슨 일을 해?"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어시스턴트도 하고, 잡지 모델도 해요."
사실 일의 태반은 이벤트 도우미지만, 예전에는 그런 일도 했었다. - P14

"주사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놈으로, 한 방 놔줄게."
•증상 같은 거, 안 들어도 돼요?"
"그런 건 나중에 어~이, 마유미짱." - P14

주사를 맞고, 다시 이라부와 마주하고 앉았다. 아까보다 거리가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중략).
"나도 독신이지, 우후후후."
(중략).
"이 병원의 후계자야. 자가용은 포르셰, B형에 천칭자리."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야. 당신이 왜 자기소개를 하고 그래? - P15

"히로미짱은 왜 불면증에 걸렸을까?"
갑자기 왜 ‘짱‘ 이야. 히로미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 P16

다시 한 번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요컨대 그 스토커는 하이힐을 신고, 완벽하게 화장을 한 스크린 속의 여배우에 대해 망상을 품었던 거야. 그러니까 실물을 보고 낙담한 거고. 히로미짱도 맨얼굴로 나가 보지 그래."
이라부를 다시 보았다. 그렇게 멍청이는 아닌 것 같았다. - P17

"자, 그럼 한동안 통원 치료를 받도록 해. 컨디션을 조절해주는 주사를 놓아 줄 테니까."
이라부는 다시 잇몸을 드러내 보였다. 이런 데서 통원 치료를 받아? 그러나 예, 하고 대답했다.
음침한 의사 같지만, 혼자서 고민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 P18

2

다음날은 국제전시장에서 열리는 게임 쇼에 도우미로 나갔다. 계약한 메이커의 부스에서 팸플릿을 나누어 주고 상품에 대해 설명하는 일이다. - P19

 히로미는 상품 옆에 서서 고객들에게 웃음을 던진다. (중략).
"히로미."
아츠코가 낮은 목소리로 다가왔다.
"주오 텔레비전의 <투모로>가 와 있어."
"거짓말"
히로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주오 텔레비전의 <투모로〉는시청률이 가장 높은 심야 정보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보물섬>도."
<보물섬>은 젊은 남자들에게 인기를 끄는 사진 잡지다. - P20

그러나 싫은 것만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사진을 좋아했다.
파스너의 효과 때문인지, 카메라 렌즈가 히로미 쪽으로 집중되었다.
플래시가 연속으로 터졌다. 셔터 누르는 소리, 소리남에게 주목받을 때의 쾌감이 히로미의 가슴속을 가득 채웠다.  - P21

잠시 후, 카메라 렌즈가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 본다. 같은 사무실에 소속된 19세의 에미린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다.
뭐야, 데뷔도 안 한 주제에 예명부터 지었어! 너, 가슴에 껌붙였니? - P21

당연히 내가 이기지, 전문대생의 아르바이트와는 격이 달라.
5년의 커리어를 자랑한다. - P22

수염 난 카메라맨이 도우미들을 둘러보았다. (중략).
아츠코는 지명받지 못했다.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츠코는 아마도 평범한 주부가 될 것이다. 성격은 좋지만 화려하지는 못하다.
"자, 웃어!" - P22

카메라맨의 손가락이 한층 더 바쁘게 셔터를 눌러댄다.
촬영이 끝나자 기자가 다가왔다.
"이름과 나이, 쓰리 사이즈를 좀 가르쳐 줘."
가벼운 어투로 물어 온다.
히로미는 나이를 두 살 속이고, 쓰리 사이즈는 상하를 살짝늘리는 대신 가운데를 조금 줄여서 말했다. - P23

<투모로> 팀이 나타났을 때, 히로미는 가슴의 파스너를 2센티미터나 더 내렸다.
이벤트는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격렬한비트의 BGM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히로미는 가슴을 흔들며 춤을 추어 보였다. - P24

어느새 서로 밀치고 당기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결국 히로미는 중심에서 밀려났다. 이 여자들, 왜 이렇게 천박해!
나도 질 수야 없지. 히로미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슴의 파스너를 1센티미터 더 내리고, 여자들 틈으로 뛰어들었다.
문득 스테이지 아래를 내려다보니, 중년 사원 하나가 입을 헤벌쭉 벌리고 있었다. - P25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온 것은 11시가 넘어서였다. 히로미는샤워를 하고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오늘 쇼가 방영되는지 체크하기 위해서였다.
(중략).
배달을 시키려면 호텔 레스토랑 정도는 돼야지. 도우미들은 모두 불만스러워 했다. - P25

"약을 먹어도 잠이 안 온단 말이지."
이날 이라부는 머리에 기름을 발랐다. 이발을 한 듯, 지난번 같은 그런 불결한 느낌은 안 들었다. 가운도 풀을 먹여 다려 입었다.
"아, 좀 약한 놈이었으니까. 오늘은 좀 더 센 놈으로 줄게." - P27

오늘도 화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스커트는 미니로 골랐다.
오후부터 큰 대리점에서 다음 일과 관련된 미팅이 열린다. 다른 도우미들은 화려하게 꾸미고 나타날 것이다. 자기 혼자 화장도 안 하고 후줄근한 차림으로 갈 수야 없지 않은가.
"여전히 누군가가 미행하고 있어?"
"그래요. 아침에 집을 나설 때부터 시작되는걸요."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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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요한에게 잘해 주겠다고 말한 건 거래용 카드였나? 나한테 사과한 건? 하지만 이런 질문을 따라가 봐야 답 없는 의심만 깊어질게 뻔해서, 나는 승윤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 P106

반년가량이 흐른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애매했다. 요한은원래 이름을 되찾긴 했지만 대우가 완전히 바뀐 건 아니었다. 녀석은 여전히, 매번 말끝을 흐렸고 모자란 취급을 받았다.  - P106

게다가 승윤의 플레이 스타일은 한층 더 괴팍해져서 맞춰 주기도 어려울 지경이 됐다. - P107

어린 시절의 업보를 지금 청산하는 것이라고도 믿어 보았다. - P107

고등학교 3학년 6월 모의고사에서 이변이 생겼다. 수학 등급이 평소보다 괜찮게 나왔던 것이다. - P108

처음에는 평소처럼만 플레이하려 했지만 승윤이 자기 욕심으로 죽어 놓고는 내탓을 하는 순간(심지어 이번에도 반군 소리가 나왔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 끊겼다. - P108

이건 결국 게임이다. 나는 게임을 제대로 하는 법을 알았고, 팀원을 엿 먹이는 법도 알았으며, 게임을 제대로 하면서 탑 한 명 골탕 먹이는 법까지 잘 알았다. - P109

키워주새오(제리) 기적의 남탓층 ㄷㄷ
T1 Seraphel(룰루) 라인이 밀릴수도 있다
T1 Seraphel(룰루) 근데 정글이 케어해 주는데 성장을 못했으면
T1 Seraphel(룰루) 그건 자기 책임이...ㅋㅋ
알기쉬운미드입문(제라스)ㅋㅋㅋㅋ ㄹㅇ 탑 양심 ㅇㄷ?

승윤은 한동안 채팅에 열중하더니 나를 홱 돌아보았다. - P110

나는 이왕 대화를 한다면 1층으로 내려가서, 건물 바깥에서하고 싶었는데 승윤은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다. (중략).
"너 요새 내가 좆같냐?" - P110

"음흉하게 정치질 하니까 재밌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밌냐고." - P111

고등학교 3학년씩이나 되어 놓고, 게임 따위로 싸우고 싶지도않았다. 하지만 승윤이 고작 세 판으로 이렇게까지 화난 걸 보니 묘한 오기가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 P112

"예전부터 속으로 불만 쌓아 두고 있었던 거 맞잖아. 이제 학원도 다닐 만큼 다녔고, 대치동 자료도 받을 만큼 받았고, 내 눈치볼 필요도 없으니까 막 나가는 거지?"
"아닌데."
나는 짧게만 말했다. - P112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맞잖아. 이용할 거 다 이용해 먹고, 이제 필요 없다 싶어져서 손절 치려는 거 아니야?"
"이용해?"
"그래."
하지만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가만있고 싶지는 않았다. - P113

"지금 그 얘기 하는 게 아니잖아. (중략). 근데 내가 지적하는 건 타이밍이라고 불만을 터뜨릴 거면 진작 했어야지 왜 지금이냐는 거야. (후략)." - P114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일은 간단하다. (중략). 하지만 친구끼리 호의를 주고받는 일에는 마법 같은 구석이있다.  - P114

결국 내가 수류탄을 던졌다.
"내가 형보다 6모 성적 잘 나온 게 순전히 형 덕분이면, 형이 대장 노릇 하고 다니는 건 형네 엄마가 결혼 잘해서 그런 거 아냐? 형은 한 거 하나도 없고 형 엄마가 다 해 준 거라고 말하면 형도 화날 거잖아. 논리가 딱 그 수준이라고."
말해 놓고 보니 끝장이었다. 이 말을 하기 전까지는 화해할 여지가 남아 있었지만, 이 말을 했기 때문에 나는 비로소 지금까지 돈 쓰고 신경 써 준 게 아까운 놈이 됐다. - P115

곧장 집으로 향하는 대신 한참이나 동네를 걸어 다녔다. 7월이라도 벌써 푹푹 찌는 날씨였다. 잔뜩 달궈진 아스팔트 도로의 열기가 신발 밑창을 뚫고 올라왔다. - P116

그런데 더 좋은 방법을 찾아서 뭘 어쩐단 말인가. 자기가한 짓은 생각도 않고 청구서만 내미는 놈과는 상종하기 싫다. - P116

역시 끝장을 봤어야 했다! 나는 죽을 뻔했는데 코뼈가 대수인가? 게다가 6월 모의고사 성적 따위로 남의 저의를 의심하다니 속좁은 놈이다. 나는 생각도 않고 있었는데. - P117

롤을 하는데 승윤이 신경질을 부려서 싸웠다, 이건 불충분하다.
승윤이 계속 나를 반군이라 부르고 부려먹었다. 이것도 정확하지는 않다.
내 자존심이 상했다. 이게 그나마 사실에 가까웠다. - P117

똑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한 어떤 말보다는 ‘그 말이 효과를 발휘했다는 사실‘이 더 따갑게 느껴질 때가 있다. - P118

요컨대, 요한에게서 이름을 빼앗을 권한도 돌려줄 권한도 승윤에게 있다는 거. 호주는 승윤에게 어떤 공격도 될 수 없지만, 내가공격당할 때는 남아시아나 호랑이 반군 등이 불려 나온다는 거. - P118

요새는 노아를 좀처럼 못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아는 학교에 거의 오지 않고, 나는 가게에 거의 가지 않게 된 까닭이었다. - P118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덧 저녁이 되어 있었다. 해장국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엄마가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땀에 푹절은 애가 죽을상을 짓고 있는데 옷에는 핏방울까지 묻어 있으니 무슨 일이라도 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 P119

"응급실 비싸잖아요. 약국 마데카솔로 될 일에 삼십만 원 써서뭐 해요."
"한마디도 안 지는 것 봐라. 돈 걱정할 시간에 네 엄마 말이나잘 듣고 살어."
고모는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돌아섰다. 엄마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P121

"아무튼 토요일 학원은 앞으로는 못 가고, 안 가. 이유는 설명 안 할란다. 진짜 미안. 대신 게임은 아예 접을 거고, 자습 더 열심히 할게."
"지금 그게 중요해?"
"나한테는 중요해."
"응급실 가라고 해도 안 갈 거지?"
"응. 가서 씻고 자면 돼."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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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평이 조금 넘는 부엌과 세 평짜리 거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방이기 때문에 아파트 견학은 모노레일 구경을 포함해 30분 이내에 모두 끝이 났다.
"이제 넷이서 식사라도 함께 하죠. 어때요?" - P96

(전략).
료스케는 전화를 걸어 직접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참았다. 하지만‘‘‘‘ 또 만나고 싶군요.‘ 라는 메일을 보내는 것까지 참을 수는 없었다.
얼버무리거나 또다시 연락을 끊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는데 곧바로 답장이 왔다. 그것도 ‘좋아요. 언제가 좋은가요? 라는 놀라울 정도로 가볍고 산뜻한 문장이었다. - P97

오다이바에서


이곳 23층 흡연실에서는 도쿄만을 사이에 둔 대안 시나가와 부두가 멀리 바라다보인다. (중략).
그러나 전차를 타면 교통이 불편해진다.  - P101

그때 누군가 창가에서 멍하니 대안 부두를 바라보는 미오의어깨를 툭 하고 건드렸다. 뒤를 돌아다보니 함께 점심을 먹기로약속한 동료직원 요시노(佳乃)가 서 있었다.
"왜 그래? 도쿄만에서 뭐라도 튀어나올 것 같니? - P102

먼저 흡연실을 나간 요시노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 홀로 향하던 미오는 막 화장실에서 나온 구보(久保) 과장과 몸을 부딪칠뻔했다.
변함없이 와이셔츠와는 전혀 안 어울리는 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아마 며칠 동안 빨지도 않은 듯한 손수건에다 열심히 손을 닦는 중이었다. - P103

엘리베이터 홀로 가자 의미심장한 표정을 띤 요시노가 애써시선을 피하며 "대단하다! 그런 모습을 보면 설마 두 사람이 같은 침대에서 출근한 일이 있었다고는 아무도 상상 못할걸"이라며 웃었다. - P104

몇 달 만에 재회하기로 한 료스케와는 몇 번 메일로 연락을주고받으며, 쓰키시마(月島)에서 몬자야키(묽은 반죽을 약한 불에 얇게 구운 뒤 뜯어먹는 일본식 누룽지)를 먹기로 약속했다. - P105

그날 만나기로 한 지하철 지상 출구에 료스케는 5분 정도 늦게 나타났다. 미오는 계단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가 모습을 나타내기 전부터 개찰구를 빠져나와 지하통로를 달려오는 료스케의 모습이 보였다. - P106

식당 위치를 알 리 없는 료스케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이젠 괜찮아요?" 라고 미오는 그의 등에 대고 물었다.
"음, 괜찮아요. ‘아오야마 호타루‘ 알아요?"
료스케가 휙 뒤를 돌아다봤다.
"소설가?"
"응, 그녀가 집에 왔었어요. 그래서 조금 늦어졌죠." - P107

"얼마 전에 우리 창고로 견학을 왔는데 내가 안내를 했어요. 그랬더니 이번엔 내 아파트를 구경하고 싶다는 겁니다. 우리 집창에서 모노레일이 보이는데 아무래도 그게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아, 그렇지, 료코와도 함께 봤었지?" - P107

요시노의 손에는 《LUGO》라는 여성 패션지가 들려 있었다.
"취재를 왔던 게 지난달인데 그렇게 빨리 연재를 시작할 수있겠어?"
미오는 요시노 손에서 《LUGO》를 빼앗아 대충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 P109

"흐음......."
TV가이드를 책꽂이에 다시 꽂으며 요시노는 뜻 모를 발신음과 함께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렸다.
"무슨 뜻이야, 그 ‘흐음‘은‘
"아무것도 아냐." - P110

(전략). 다시 한번 그 페이지 언저리를 훑어보니 ‘아오야마 호타루의 신작소설《동경만경(東京湾景)》연재 시작‘ 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적혀 있었다. - P110

시금치 카레를 사들고 엘리베이터로 23층까지 올라가니 엘리베이터 문 바로 앞에 구보 과장이 서 있었다.
"어머, 어디 나가세요? 점심 사왔는데." - P111

"지금 막 점심 먹고 와서 생각 없어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것 같았다. 거의 닫힌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도미다(富田)가 아직 안 먹었으니까, 그 친구 줘!"라고 과장이 소리쳤다. - P112

창가의 구보 과장도 내내 그 풍경에 넋을 잃은 채 앉아 있었다. 그때 갑자기 과장이 미오의 무릎에 손을 올렸다. 과장의 얼굴은 여전히 창밖을 향한 채였다. - P112

웃통을 벗으면 료스케 가슴팍에 화상 자국이 보인다. 근육질 어깨 부위에서 시작하는 피부의 균열은 왼쪽 가슴 전체를 뒤덮고 있다. - P117

. 별 생각 없이 긴자에 나가보자고 말한 건 미오 쪽이었다.
"어디 가서 한잔 더하고 가죠, 뭐."
"난, 긴자는 잘 모르는데....."
료스케는 목을 길게 빼고 앞 유리창에 비치는 야경을 바라봤다.
"바를 몇 군데 알아요. 아무 데나 괜찮겠죠? - P118

(전략).
"가고 싶을 리가 없잖아요."
료스케가 화난 말투로 중얼거렸다. 미오는 "그래요, 그럼 미안! 이라며 사과했다. 그 순간, 료스케가 시트 위에 올려진 미오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냥 우리 집으로 가죠." - P118

"저어, 긴자 어디쯤인가요?"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들었는지 운전사가 물었다. 미오는 료스케와 얼굴을 마주보았다.
"으음, 하치초메(八丁目) 근처에 세워주세요. ....하치초메닛코(日?)호텔 앞에."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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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 사람이 죽었다. (중략). 우발적 사고였을까? 아니면 계획된 살인? (중략).
그들은 내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략).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더 필요했다. - P11

1968년:
노스 도싯North Dorset 헴스턴Hemston


"게이브리얼 울프가 메도랜즈Meadowlands로 돌아왔더군. 아내와는 이혼했고, 그 넓은 집에서 휑하게 아들이랑 둘만 사나 봐" 아침 식사 중에 프랭크가 그의 이름을 불쑥 꺼냈다. - P12

"게이브리얼은 여기 사는 걸 정말 싫어했는데 왜 돌아온 걸까?" - P13

프랭크는 해가 떠 있는 내내, 밤에도 꽤 많은 시간을 목장에서 보내며 동물을 돌보고 땅을 가꾼다. 내가 아는 누구보다 열심히일하지만, 언제나 짬을 내 봄날 석양의 아름다움이나 느닷없이하늘로 솟구치는 종달새의 어지러운 비상을 감상할 줄 아는 사람이다. - P13

"그냥 맥주 한 잔 마시고 헤어질 거라더니?" 프랭크가 지미를 향해 씩 웃으며 물었다.
"맥주는 하루 종일 정직하게 고생한 대가로 신이 주는 보상이라고."
"성경에서 그래?"
"성경에 이런 말이 없다면 반드시 넣어야 해" - P15

과거 :
1955년

나는 공상에 푹 빠져 무단 침입하는 줄도 몰랐다. 머릿속에는 사랑을 이루어 멋진 순간을 맞이하는 낭만적인 시나리오가 가득했다. 공상 속의 나는 분수 옆에 서서 오케스트라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열정적인 사랑 고백을 받고 있었다. - P16

"여긴 외딴곳이야. 우리 말고 아무도 없고 웃으면 안 될 이유가 없잖아?"
남자애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 뒤에야 내 말을 알아들은 듯했다. "그러네. 세상에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게이브리얼 울프라고 해." 그는 손을 내밀며 화해를 청했다. - P17

"앉아서 책 읽을 곳을 찾고 있었어." 나는 외투 주머니에서 책을 꺼냈다. 에밀리 디킨슨의 얇은 책이었다.
"아, 시를 읽는구나."
"실망했나 봐. 우드하우스* 쪽이 취향이야?"


*P. G. Wodehouse, 가볍고 재치 있는 소설을 주로 쓴 영국의 유머 소설가 - P18

게이브리얼은 다시 미소 지었다. 얼굴이 달라지는 미소였다. 노인 옷차림을 하고 있어도 잘생겨 보이는 그런 미소. "비스킷도 있어 가자"
"무슨 비스킷인데?"
게이브리얼은 머뭇거렸다. "커스터드 크림."
분수와 오케스트라 호수와 비스킷, 그렇게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 P19

1968년

나는 모든 계절 중에서 이른 봄을 가장 좋아한다. 공기는 은근히 차갑고 새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며 들판에는 양들이 가득하다. - P19

지미는 트랜지스터라디오를 틀어놓았는데, (중략). 목장에 썩어울리는 음악은 아니었지만 지미의 숙취에는 분명 효과가 있을것 같았다. (중략).
"프랭크는?" 내 말에 지미는 들판 아래쪽을 가리켰다.
우리는 함께 서서 울타리를 뛰어넘는 남편을 지켜보았다. - P20

암컷 양이 대부분 새끼를 낳은 덕분에 들판에 나가 있는 양 46마리 말고도 헛간에 양이 몇 마리 더 생겼다. 젖병으로 젖을 먹여야 하는 어린 양은 한 마리뿐이었고 사산된 양도 한 마리뿐이었다. - P21

양들은 신음했고 새끼 양들은 두려움에 떨며 울었다. 태어난지 며칠 안 됐지만 위험을 감지한 것이다. 개의 눈빛이 스위치를 켠 듯이 달라졌다. - P22

"이런 젠장" 프랭크는 한 걸음 물러서서 내 뺨을 감싸고 얼굴을 확인했다.
우리는 개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서 양들을 달래며 "얘들아, 이리 오렴" 하고 불렀지만, (후략).
그때 갑자기 신기루처럼 남자아이 하나가 들판을 뛰어 올라왔다. 반바지를 입은 작고 마른 소년이었다. 열 살쯤 되어 보였다.
"내 개란 말이에요!" 아이는 소리를 질렀다.
고음의 다정한 목소리였다. - P23

"어쩔 수 없었어요." 프랭크가 도살된 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게이브리얼은 프랭크가 누구인지, 아니 적어도 그의 아내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후 돌아서서 나를 발견했다. - P23

"계속 울어. 울면 좀 나을 거야"
반바지를 입은 남자아이는 내 품에 안겨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모든 일은 이렇게 다시 시작되었다. - P24

재판:
1969년, 올드 베일리Old Bailey

사랑하는 남자가 피고인석에서 교도관 사이에 앉아 판결을 기다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고통은 그 무엇으로도 감당할 수 없었다.
상상할 수 없는 범죄로 기소된 남자
(중략). 피고인석 앞에 선법원 서기는 은근히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차분하고 냉정하게 선언했다. "피고인은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 P25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피고인석에 앉아 있을 때는 매우 다르다. ‘자기, 제발 나를 좀 봐.‘ 나는 늘 그랬듯이 그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려고 애썼지만, 그는 낯설고 멍한 눈빛으로 앞을 응시할뿐이었다. - P26

과거

(전략).
게이브리얼은 돗자리, 소풍 바구니 접이식 캔버스 의자한 개를 갖다 놓았고, 낚싯대 두 개가 의자에 걸쳐 있었다. (중략). 그는 바구니에서 차가 담긴 타탄체크 무늬보온병과 가리발디 Garibaldi 비스킷 봉지를 꺼냈다. - P27

내 눈에는 메도랜즈 같은 저택에 사는 남자애가 굳이 야영하며 불편하게 지내는 게 이상해 보였다. - P28

그런데 게이브리얼은 기억나지 않았다.
"마을 축제 때 왜 널 본 적이 없었을까?"
"난 언제나 학교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안 가. 2주 전에 기말고사가 끝났어. 대학에 가기 전까지 3개월 동안 집에 있어야 하는데 잘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어." - P28

게이브리얼을 만난 지 15분이 채 안 되었지만, 그가 말하지 않은 것들이 이미 들리는 듯했다.  - P29

"10대 여자애들은 무슨 공상을 해? 제임스 딘? 말런 브랜도?"
"그것보단 좀 더 고상해." 나는 즉시 방어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게이브리얼의 말이 옳았다. 우리는 주로 남자와 사랑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공상 속에 평범한 사람들도 있었어? 그러니까 특별히 신경 쓰이는 사람이라든지?" - P30

게이브리얼의 질문에 답하지 않는 것이 가장 간단할 것 같았다. (중략).
"넌 이야기를 잘하는구나. 분명 작가가 될 거야."
"난 시를 써."
시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었다. 스스로 별로라고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 P31

우리는 미소 지었다. 둘 다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중략). 우리에게 공통점이 이렇게 많을 줄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무슨 글?"
"소설인데 앞부분만 몇 번을 쓰나 몰라. 항상 똑같은 부분에서막혀. 70쪽쯤 썼을 때" - P32

"비웃고 싶지 않은데." 내가 불쑥 말했다. "내가 한 말을 모조리 주워 담고 싶을 뿐이야.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이번에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민 사람은 나였다.
"베스 케네디, 넌 이상한 애야" 게이브리얼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좋은 뜻이야, 나쁜 뜻이야?" - P33

1968년

게이브리얼 울프를 다시 만나 그의 아이와 죽은 개를 집에 데려다주다니. 그 수많은 공상 어디에도 없었던 일이다. - P34

나는 게이브리얼을 흘끗 보았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여전히 잘생겼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동안 신문이나 잡지에서 보던 다른 자아가 아닌 이렇게 평범한 모습의 그를, 상심한 아들을 달래는 아버지의 모습을 한 그를 보고 있자니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 P36

우리는 메도랜즈 대문으로 들어섰다. 게이브리얼이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은 여전히 지금껏 내가 본 집 중 가장 아름다웠다. (중략). 나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풍경이 반가웠다. - P37

"묻어줘야지."
감성적인 내 아들 바비가 떠올랐다. 그 애는 새나 토끼가 죽을때마다 묻어주었고 작은 장례식을 숱하게 치렀다.
"어디에?"
"공간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 안 그래?" 내 말에 게이브리얼은 예전의 그 익숙한 눈빛으로 나를 곁눈질했다 - P37

우리는 말끔하게 다듬어진 푸른 잔디를 가로질러 예전에는 없던, 게이브리얼이 레오를 위해 지은 게 틀림없는 트리 하우스를 지나갔다. 바비가 트리 하우스를 정말 좋아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P38

아버지와 아들은 버드나무 아래의 어느 지점을 골랐다.
"삽을 가져오면 구덩이 파는 걸 도와줄게." 내가 말했다.
게이브리얼이 삽을 가지러 간 사이에 나는 레오와 나란히 서서 호수를 바라보았다.
레오는 이제 울지 않았지만 침울하게 호수를 보고 있었다 - P39

땅파기는 힘들고 체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땅이 너무 단단해서 깊이 파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레오는 곧 포기하고 1미터쯤 떨어진 곳에 앉아서 지켜보았다.
게이브리얼과 나는 한동안 말없이 땅만 팠다. 그러다가 내가 말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지금 오스트레일리아에 사신다며" - P40

"아빠, 베스 아줌마도 아들이 있대요. 하지만 죽었대요. 그래서지금도 아주 슬프대요." 레오가 말했다.
게이브리얼과 나의 웃음이 이내 사그라들었다.
"오, 알고 있었어." 게이브리얼은 나를 보지 못하고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편지를 쓰고 싶었는데 확신이………… 그러니까 네가......."
"괜찮아. 정말로." - P41

"우리가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게이브리얼이 한 손을 내밀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게이브리엘의 초조해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가 그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늘 그랬다.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 P42

과거


게이브리얼은 메도랜즈 진입로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내가 어느 쪽에서 오는지 잊은 듯이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덕분에 그를 잠시 살펴볼 수 있었다.  - P42

우리는 서로를 보고 이내 미소 지었다. 바보처럼 활짝 웃었다. 게이브리얼도 나와 같은 감정이라는 뜻일까? - P43

"정말 근사해. 많이 힘들었겠는데."
"말했잖아. 남는 게 시간이라고. 불행히도 준비하는 걸 어머니가 보셨어. 그래서 지금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어서 안달이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 여기 내려오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네 어머니와 만나도 상관없어." 내 말에 게이브리얼은 웃음을 터뜨렸다. - P44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접시를 내려다보았지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게이브리얼처럼 태어날 때부터 미래가 정해져 있는 사람에게는 이토록 쉬운 일이었다. - P46

저녁 날씨가 서늘해지자 우리는 의자를 불가로 옮겼다. 게이브리얼은 장작을 더 넣고 부지깽이로 불씨를 들쑤셨고 불길이 솟구칠 때까지 바람을 불어넣었다. 우리 집 뒷마당에서 보는 별보다 이곳의 별이 더 밝게 빛나는 것 같았다. - P47

 그는 의자에서 몸을 숙여 내 입술에 입을맞췄다. 머뭇거리면서도 다정한 키스였다.
"저녁 내내 키스하고 싶었어."
"그런데 왜 이제야 한 거야?"
게이브리얼은 웃음을 터뜨렸고 나는 생기가 도는 그의 모습이 좋았다. 평소에 그는 관찰자처럼 행동하는 경향이 있지만, 웃을때면 경계심이 풀렸다. - P47

게이브리얼은 나를 데려다주겠다며 마을 외곽에 있는 메도랜즈에서 우리 집이 있는 중심가까지 함께 걸었다. 우리 집 대문앞에서 다시 입 맞췄는데, 위층 창가에서 부모님이 보고 있을까봐 작별 인사의 의미로 뺨에 순수하게 했다. - P48

1968년


프랭크는 술집으로 오라는 쪽지를 남겨 놓았다.
나는 주전자에 물을 얹어 차를 한 잔 끓였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감정에 휩싸여 무기력하게 서성대면서도, 그 감정을 의식적으로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이게 다 레오 때문이었다.  - P49

가끔 이럴 때면 나는 그냥 슬픔에 굴복했다. - P49

프랭크와 지미는 바에 앉아 있었고 앞에 놓인 500밀리리터 잔이 반쯤 비어 있었다. 프랭크 뒤로 다가가 톡톡 두드리자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 P50

"울프는? 어땠어?"
프랭크가 나를 유심히 살피는 게 느껴졌다. 프랭크는 게이브리얼과 헤어진 나를 위로하고 보살펴 주었다. 그랬기에 내가 이별을 극복하는 데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얼마나 혹독한 대가를 치렀는지 누구보다 잘알았다. - P51

오늘 밤에는 헬렌이 술집에 왔다. 헬렌은 학창 시절부터 나와 가장 친한 친구였다. 바비가 죽었을 때 마을 전체가 1, 2주 동안 슬픔에 빠졌다. 그러고 나서 다들 그 일을 잊은 듯했다. - P52

과거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수녀원The Immaculate Conception Conve라고 학교 이름을 지은 수녀회가 혼인 관계 이외의 성관계에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혼인 관계 안에서의 성관계조차 반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 P54

"엘리자베스 케네디!"
(중략).
"옥스퍼드에 지원할 생각이라고 들었는데?"
영어 선생님에게 옥스퍼드에 가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선생님은 반대 의견을 비쳤다. - P55

프랭크의 어머니는 그가 열세 살 때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오후에 소젖 짜는 일을 돕다가 젖소의 발길질에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맞았다. 목장에서 사고가 종종 발생한다는건 다들 알고 있었다. 정작 내가 충격을 받았던 건, 바로 그다음날 프랭크가 통학버스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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