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 사람이 죽었다. (중략). 우발적 사고였을까? 아니면 계획된 살인? (중략).
그들은 내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략).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더 필요했다. - P11

1968년:
노스 도싯North Dorset 헴스턴Hemston


"게이브리얼 울프가 메도랜즈Meadowlands로 돌아왔더군. 아내와는 이혼했고, 그 넓은 집에서 휑하게 아들이랑 둘만 사나 봐" 아침 식사 중에 프랭크가 그의 이름을 불쑥 꺼냈다. - P12

"게이브리얼은 여기 사는 걸 정말 싫어했는데 왜 돌아온 걸까?" - P13

프랭크는 해가 떠 있는 내내, 밤에도 꽤 많은 시간을 목장에서 보내며 동물을 돌보고 땅을 가꾼다. 내가 아는 누구보다 열심히일하지만, 언제나 짬을 내 봄날 석양의 아름다움이나 느닷없이하늘로 솟구치는 종달새의 어지러운 비상을 감상할 줄 아는 사람이다. - P13

"그냥 맥주 한 잔 마시고 헤어질 거라더니?" 프랭크가 지미를 향해 씩 웃으며 물었다.
"맥주는 하루 종일 정직하게 고생한 대가로 신이 주는 보상이라고."
"성경에서 그래?"
"성경에 이런 말이 없다면 반드시 넣어야 해" - P15

과거 :
1955년

나는 공상에 푹 빠져 무단 침입하는 줄도 몰랐다. 머릿속에는 사랑을 이루어 멋진 순간을 맞이하는 낭만적인 시나리오가 가득했다. 공상 속의 나는 분수 옆에 서서 오케스트라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열정적인 사랑 고백을 받고 있었다. - P16

"여긴 외딴곳이야. 우리 말고 아무도 없고 웃으면 안 될 이유가 없잖아?"
남자애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 뒤에야 내 말을 알아들은 듯했다. "그러네. 세상에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게이브리얼 울프라고 해." 그는 손을 내밀며 화해를 청했다. - P17

"앉아서 책 읽을 곳을 찾고 있었어." 나는 외투 주머니에서 책을 꺼냈다. 에밀리 디킨슨의 얇은 책이었다.
"아, 시를 읽는구나."
"실망했나 봐. 우드하우스* 쪽이 취향이야?"


*P. G. Wodehouse, 가볍고 재치 있는 소설을 주로 쓴 영국의 유머 소설가 - P18

게이브리얼은 다시 미소 지었다. 얼굴이 달라지는 미소였다. 노인 옷차림을 하고 있어도 잘생겨 보이는 그런 미소. "비스킷도 있어 가자"
"무슨 비스킷인데?"
게이브리얼은 머뭇거렸다. "커스터드 크림."
분수와 오케스트라 호수와 비스킷, 그렇게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 P19

1968년

나는 모든 계절 중에서 이른 봄을 가장 좋아한다. 공기는 은근히 차갑고 새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며 들판에는 양들이 가득하다. - P19

지미는 트랜지스터라디오를 틀어놓았는데, (중략). 목장에 썩어울리는 음악은 아니었지만 지미의 숙취에는 분명 효과가 있을것 같았다. (중략).
"프랭크는?" 내 말에 지미는 들판 아래쪽을 가리켰다.
우리는 함께 서서 울타리를 뛰어넘는 남편을 지켜보았다. - P20

암컷 양이 대부분 새끼를 낳은 덕분에 들판에 나가 있는 양 46마리 말고도 헛간에 양이 몇 마리 더 생겼다. 젖병으로 젖을 먹여야 하는 어린 양은 한 마리뿐이었고 사산된 양도 한 마리뿐이었다. - P21

양들은 신음했고 새끼 양들은 두려움에 떨며 울었다. 태어난지 며칠 안 됐지만 위험을 감지한 것이다. 개의 눈빛이 스위치를 켠 듯이 달라졌다. - P22

"이런 젠장" 프랭크는 한 걸음 물러서서 내 뺨을 감싸고 얼굴을 확인했다.
우리는 개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서 양들을 달래며 "얘들아, 이리 오렴" 하고 불렀지만, (후략).
그때 갑자기 신기루처럼 남자아이 하나가 들판을 뛰어 올라왔다. 반바지를 입은 작고 마른 소년이었다. 열 살쯤 되어 보였다.
"내 개란 말이에요!" 아이는 소리를 질렀다.
고음의 다정한 목소리였다. - P23

"어쩔 수 없었어요." 프랭크가 도살된 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게이브리얼은 프랭크가 누구인지, 아니 적어도 그의 아내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후 돌아서서 나를 발견했다. - P23

"계속 울어. 울면 좀 나을 거야"
반바지를 입은 남자아이는 내 품에 안겨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모든 일은 이렇게 다시 시작되었다. - P24

재판:
1969년, 올드 베일리Old Bailey

사랑하는 남자가 피고인석에서 교도관 사이에 앉아 판결을 기다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고통은 그 무엇으로도 감당할 수 없었다.
상상할 수 없는 범죄로 기소된 남자
(중략). 피고인석 앞에 선법원 서기는 은근히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차분하고 냉정하게 선언했다. "피고인은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 P25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피고인석에 앉아 있을 때는 매우 다르다. ‘자기, 제발 나를 좀 봐.‘ 나는 늘 그랬듯이 그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려고 애썼지만, 그는 낯설고 멍한 눈빛으로 앞을 응시할뿐이었다. - P26

과거

(전략).
게이브리얼은 돗자리, 소풍 바구니 접이식 캔버스 의자한 개를 갖다 놓았고, 낚싯대 두 개가 의자에 걸쳐 있었다. (중략). 그는 바구니에서 차가 담긴 타탄체크 무늬보온병과 가리발디 Garibaldi 비스킷 봉지를 꺼냈다. - P27

내 눈에는 메도랜즈 같은 저택에 사는 남자애가 굳이 야영하며 불편하게 지내는 게 이상해 보였다. - P28

그런데 게이브리얼은 기억나지 않았다.
"마을 축제 때 왜 널 본 적이 없었을까?"
"난 언제나 학교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안 가. 2주 전에 기말고사가 끝났어. 대학에 가기 전까지 3개월 동안 집에 있어야 하는데 잘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어." - P28

게이브리얼을 만난 지 15분이 채 안 되었지만, 그가 말하지 않은 것들이 이미 들리는 듯했다.  - P29

"10대 여자애들은 무슨 공상을 해? 제임스 딘? 말런 브랜도?"
"그것보단 좀 더 고상해." 나는 즉시 방어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게이브리얼의 말이 옳았다. 우리는 주로 남자와 사랑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공상 속에 평범한 사람들도 있었어? 그러니까 특별히 신경 쓰이는 사람이라든지?" - P30

게이브리얼의 질문에 답하지 않는 것이 가장 간단할 것 같았다. (중략).
"넌 이야기를 잘하는구나. 분명 작가가 될 거야."
"난 시를 써."
시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었다. 스스로 별로라고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 P31

우리는 미소 지었다. 둘 다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중략). 우리에게 공통점이 이렇게 많을 줄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무슨 글?"
"소설인데 앞부분만 몇 번을 쓰나 몰라. 항상 똑같은 부분에서막혀. 70쪽쯤 썼을 때" - P32

"비웃고 싶지 않은데." 내가 불쑥 말했다. "내가 한 말을 모조리 주워 담고 싶을 뿐이야.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이번에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민 사람은 나였다.
"베스 케네디, 넌 이상한 애야" 게이브리얼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좋은 뜻이야, 나쁜 뜻이야?" - P33

1968년

게이브리얼 울프를 다시 만나 그의 아이와 죽은 개를 집에 데려다주다니. 그 수많은 공상 어디에도 없었던 일이다. - P34

나는 게이브리얼을 흘끗 보았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여전히 잘생겼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동안 신문이나 잡지에서 보던 다른 자아가 아닌 이렇게 평범한 모습의 그를, 상심한 아들을 달래는 아버지의 모습을 한 그를 보고 있자니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 P36

우리는 메도랜즈 대문으로 들어섰다. 게이브리얼이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은 여전히 지금껏 내가 본 집 중 가장 아름다웠다. (중략). 나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풍경이 반가웠다. - P37

"묻어줘야지."
감성적인 내 아들 바비가 떠올랐다. 그 애는 새나 토끼가 죽을때마다 묻어주었고 작은 장례식을 숱하게 치렀다.
"어디에?"
"공간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 안 그래?" 내 말에 게이브리얼은 예전의 그 익숙한 눈빛으로 나를 곁눈질했다 - P37

우리는 말끔하게 다듬어진 푸른 잔디를 가로질러 예전에는 없던, 게이브리얼이 레오를 위해 지은 게 틀림없는 트리 하우스를 지나갔다. 바비가 트리 하우스를 정말 좋아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P38

아버지와 아들은 버드나무 아래의 어느 지점을 골랐다.
"삽을 가져오면 구덩이 파는 걸 도와줄게." 내가 말했다.
게이브리얼이 삽을 가지러 간 사이에 나는 레오와 나란히 서서 호수를 바라보았다.
레오는 이제 울지 않았지만 침울하게 호수를 보고 있었다 - P39

땅파기는 힘들고 체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땅이 너무 단단해서 깊이 파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레오는 곧 포기하고 1미터쯤 떨어진 곳에 앉아서 지켜보았다.
게이브리얼과 나는 한동안 말없이 땅만 팠다. 그러다가 내가 말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지금 오스트레일리아에 사신다며" - P40

"아빠, 베스 아줌마도 아들이 있대요. 하지만 죽었대요. 그래서지금도 아주 슬프대요." 레오가 말했다.
게이브리얼과 나의 웃음이 이내 사그라들었다.
"오, 알고 있었어." 게이브리얼은 나를 보지 못하고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편지를 쓰고 싶었는데 확신이………… 그러니까 네가......."
"괜찮아. 정말로." - P41

"우리가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게이브리얼이 한 손을 내밀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게이브리엘의 초조해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가 그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늘 그랬다.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 P42

과거


게이브리얼은 메도랜즈 진입로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내가 어느 쪽에서 오는지 잊은 듯이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덕분에 그를 잠시 살펴볼 수 있었다.  - P42

우리는 서로를 보고 이내 미소 지었다. 바보처럼 활짝 웃었다. 게이브리얼도 나와 같은 감정이라는 뜻일까? - P43

"정말 근사해. 많이 힘들었겠는데."
"말했잖아. 남는 게 시간이라고. 불행히도 준비하는 걸 어머니가 보셨어. 그래서 지금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어서 안달이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 여기 내려오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네 어머니와 만나도 상관없어." 내 말에 게이브리얼은 웃음을 터뜨렸다. - P44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접시를 내려다보았지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게이브리얼처럼 태어날 때부터 미래가 정해져 있는 사람에게는 이토록 쉬운 일이었다. - P46

저녁 날씨가 서늘해지자 우리는 의자를 불가로 옮겼다. 게이브리얼은 장작을 더 넣고 부지깽이로 불씨를 들쑤셨고 불길이 솟구칠 때까지 바람을 불어넣었다. 우리 집 뒷마당에서 보는 별보다 이곳의 별이 더 밝게 빛나는 것 같았다. - P47

 그는 의자에서 몸을 숙여 내 입술에 입을맞췄다. 머뭇거리면서도 다정한 키스였다.
"저녁 내내 키스하고 싶었어."
"그런데 왜 이제야 한 거야?"
게이브리얼은 웃음을 터뜨렸고 나는 생기가 도는 그의 모습이 좋았다. 평소에 그는 관찰자처럼 행동하는 경향이 있지만, 웃을때면 경계심이 풀렸다. - P47

게이브리얼은 나를 데려다주겠다며 마을 외곽에 있는 메도랜즈에서 우리 집이 있는 중심가까지 함께 걸었다. 우리 집 대문앞에서 다시 입 맞췄는데, 위층 창가에서 부모님이 보고 있을까봐 작별 인사의 의미로 뺨에 순수하게 했다. - P48

1968년


프랭크는 술집으로 오라는 쪽지를 남겨 놓았다.
나는 주전자에 물을 얹어 차를 한 잔 끓였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감정에 휩싸여 무기력하게 서성대면서도, 그 감정을 의식적으로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이게 다 레오 때문이었다.  - P49

가끔 이럴 때면 나는 그냥 슬픔에 굴복했다. - P49

프랭크와 지미는 바에 앉아 있었고 앞에 놓인 500밀리리터 잔이 반쯤 비어 있었다. 프랭크 뒤로 다가가 톡톡 두드리자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 P50

"울프는? 어땠어?"
프랭크가 나를 유심히 살피는 게 느껴졌다. 프랭크는 게이브리얼과 헤어진 나를 위로하고 보살펴 주었다. 그랬기에 내가 이별을 극복하는 데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얼마나 혹독한 대가를 치렀는지 누구보다 잘알았다. - P51

오늘 밤에는 헬렌이 술집에 왔다. 헬렌은 학창 시절부터 나와 가장 친한 친구였다. 바비가 죽었을 때 마을 전체가 1, 2주 동안 슬픔에 빠졌다. 그러고 나서 다들 그 일을 잊은 듯했다. - P52

과거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수녀원The Immaculate Conception Conve라고 학교 이름을 지은 수녀회가 혼인 관계 이외의 성관계에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혼인 관계 안에서의 성관계조차 반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 P54

"엘리자베스 케네디!"
(중략).
"옥스퍼드에 지원할 생각이라고 들었는데?"
영어 선생님에게 옥스퍼드에 가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선생님은 반대 의견을 비쳤다. - P55

프랭크의 어머니는 그가 열세 살 때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오후에 소젖 짜는 일을 돕다가 젖소의 발길질에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맞았다. 목장에서 사고가 종종 발생한다는건 다들 알고 있었다. 정작 내가 충격을 받았던 건, 바로 그다음날 프랭크가 통학버스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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