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나는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다. 미끼를 이용해서 상대방이접근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미끼란, 아까 모든 사람 앞에서 보여줬던 기리유 에리코의 유서다. - P87

"아까 말씀하신 유서 말인데요." 유카가 약간 굳은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뭐라고 쓰여 있는지 전혀 짐작이 안가세요?"
"전혀요." - P88

"그건 터무니없는 상상일 뿐이야." 나보다 먼저 다케히코가 입을 열었다. "특히 고모는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어서 즐기는 것 같았어." - P89

"놀란 정도가 아니에요. 저는 완전히 잠에 빠져 있었는데,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나서 벌떡 일어났어요. 그때 전 ‘D‘동에서 자고 있었는데 화재가 난방하곤 떨어져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엄마는 많이 놀랐을 거예요. 복도를 사이에 두고바로 옆방이었으니까요. 게다가 혼자셨고." - P90

"유카 언니 방도 화재가 난 곳에서 떨어져 있었지, 아마?"
"응, 지금 묵고 있는 ‘C-3‘ 이었으니까."
"자고 있었어?"
"응. 나도 누군가의 고함을 듣고 깨어난 것 같아."
"어머, 그래? 그런 것에 비하면 방에서 굉장히 빨리 나온거네." 가나에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 P91

다케히코가 내 질문을 비웃었다. "모두 자고 있었는걸요.
게다가 ‘A-1‘ 방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해도 그걸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바로 옆방에 묵은 요코 고모뿐인걸요."
"하지만 ‘A-1‘ 방에서만 소리가 났을 거라고 단정할 수는없지 않나?" - P92

"목욕을 했더니 기분이 산뜻하네요. 기쿠요 부인도 탕에들어가는 게 어떠세요?"
"아니에요. 난 식사 전에 했답니다."
"나도 목욕할래."
가나에가 불쾌한 얼굴로 일어섰다. 그러자 그 자리에 나오유키가 앉았다. - P93

"외삼촌은 그날 밤 무슨 소리 같은거 못 들었어요?"
나오유키의 표정을 못 봤는지 가나에가 물었다. 유카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짝거렸지만 그 전에 나오유키가대답했다.
"아니, 전혀 기억이 없어. 그날 밤에는 잠이 깊이 들었거든.
"그럼 나오유키 씨도 소스케 씨의 고함을 듣고 깨어났나요?"
내가 묻자 그는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목소리가 아주 커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어디에 묵으셨어요?"
"오늘과 같은 ‘C-1‘이었습니다만." - P94

"마에바시는 아직 춥죠?" 그가 물었다.
"예. 하지만 얼마 전 드디어 정원수들도 겨울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답니다."
마에바시에는 혼마 부부의 집이 있다. 목조로 된 자그마한 2층집이다.
"가족분이 없다고 들었는데."
"예, 남편이 떠난 뒤로는 줄곧 혼자서 지내왔죠." - P95

"사실 혼자인 게 편할 때가 더 많답니다."
"이웃들과의 왕래는 어떻습니까?"
"요즘에는 소원하죠. 요즘 젊은 사람들이 어디 그런 것을좋아하나요?"
"그렇긴 하지만 ・・・・・…."
나오유키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았다. 그렇게 되면 노인들이 자택에서 쓰러질 경우, 이웃이 전혀 눈치를 못 채는게 아니냐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 P96

나오유키의 재촉이 효력을 발휘했는지 곧 마실 것이 나왔다. 그는 미즈와리(술에 물이나 얼음을 넣어 묽게 만든 것 - 옮긴이)를 마시면서 미국에서의 직장생활과 일상생활에 대해 빠른어조로 말했다. 나는 기쿠요 부인이 그랬던 것처럼 약간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지은 채, 상대방이 편하게 말할 수 있게 가끔 맞장구를 쳐주기도 하고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 말참견도했다. - P97

"큰오빠의 활동력은 굉장했잖아. 그래서 이치하라 집안의 재산을 엄청나게 불릴 수 있었겠지만 죽으면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무덤까지 가져갈 수도 없는데." - P98

"오히려 잘됐어. 만약 유언장이 없었으면 한바탕 난리가났을 거야."
"그야 그렇지만 썩 기분 좋은 상황은 아냐. 유산 배분을 보면 큰오빠가 마음에 들어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확연하게 드러날 테니까." - P99

"넌 좋겠다. 실질적으로 오빠의 회사를 물려받은 셈이고이미 나름대로 구축해 놓은 것도 있잖아. 그 정도면 유산을충분히 받은 거 아닌가?" - P99

"속물적인 얘기를 들려드려서 죄송합니다. 집안의 치부를드러낸 것 같아 창피하네요."
"아니에요." 나는 손을 내저었다. "나 같은 사람한텐 너무먼 얘기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습니다. 만약 선거에 나가게되면 당선됐으면 좋겠네요." - P100

"따님이 미인이라 쫓아다니는 남자가 너무 많아서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나는 입에 발린 소리를 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해서 아직 어린애랍니다. 남편도 가나에가 서른살쯤은 돼야 제 몫을 해낼 것 같다고 하거든요." - P101

"작은오빠는 단순한 사람이야. 오히려 올케가 보통이 아니지. 올케는 유카를 정재계 쪽으로 시집보내고 싶어 하니까만약 오빠가 당선이라도 된다면 마음이 움직일지도 몰라. 다만.…………." 요코는 몸을 앞으로 내밀더니 호기심 어린 눈으로말했다. "가나에 말로는 유카한테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다케히코가 아닌 것만은 확실한 모양이야." - P102

나는 화제를 동반자살 사건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요코의 얘기를 좀 더 듣고 싶었지만 나오유키 앞에서는 왠지 조심스러웠다. - P103

연못가에 벤치가 있었다. 깨끗한 것을 확인하고 벤치에 앉았다. 연못 수면에 회랑정이 거꾸로 비쳤다. 고개를 들자 바로 정면에 ‘A‘동이 있었다. - P104

"밤경치도 꽤 멋지죠?" 고바야시 마호는 이내 지배인다운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실컷 만끽하고 있답니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고바야시 씨도 산책 나오셨어요?"
"아뇨, 한번 둘러보는 거예요. 항상 그러는 건 아니지만 오늘 밤은 손님들이 계시니까요."
"수고하시네요." - P105

"이 료칸에 오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
"글쎄요, 벌써 그럭저럭 20년쯤 된 것 같아요."
고바야시 마호는 연못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줄곧 혼자셨나요?"
"예, 혼자였어요. 다카아키 씨한테는 결혼하게 되면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결국 그러지 못했지요."
"좋은 사람이 없었나 보네요." - P106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모두 마호 씨를 높이 평가하고있는걸요. 누가 경영을 하든지 계속 이곳을 맡아달라고 할 거예요. 틀림없이."
"감사합니다." 마호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좀 지쳤어요. 이제 물러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무슨 그런 말씀을………. 단골손님들이 실망하겠어요" - P107

"예, 고맙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고바야시 마호와 헤어진 뒤 복도를 지나 내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잠근 뒤 휴우, 한숨을 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 P108

시계를 보았다. 아직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다. 그러나일흔을 눈앞에 둔 노파라는 걸 감안하면 잠자리에 드는 게 당연한 시각이기도 하다. 나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맡에 봉투를 두었다. 기리유 에리코의 유서다. - P108

이번엔 가방을 열고 안에서 소형 비디오카메라를 꺼냈다.
8 밀리미터 비디오카메라여서 최대 두 시간까지 녹화가 가능하다. 전원 코드를 콘센트에 꽂고 본체를 다시 가방에 넣은뒤, 렌즈부분을 밖으로 내놓고 방 입구 쪽을 찍을 수 있도록위치를 조절했다. 그 상태에서 녹화 스위치를 켜고 렌즈를 가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가방 위에 타월을 걸쳐놓았다. 코드 위에는 방석을 놓아 위장했다. - P109

무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서 눈을 떴다.
이런 멍청한 짓을 하다니. 잠깐 눈만 붙일 생각이었는데 신경을 쓰느라 피로했던 모양이다. - P115

누구일까? 이 사람은 누구일까?
차라리 지금 일어나서 상대방을 덮칠까 하는 생각이 불쑥들었다. 아니, 그러면 안 된다. 잘된다는 보장이 없다. 자칫하다가는 내가 상대방에게 당하고, 요란한 소리를 듣고 다른 사람들이 달려오기라도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것이다. 지금은 꾹 참는 수밖에 없다. - P116

나는 벌떡 일어났다. 머리맡에 두었던 봉투가 안 보였다.
시계를 보자 새벽 1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불 속으로 들어간지 거의 두 시간이 흘렀다. - P116

아, 이 사람은 ・・・・・..
그랬구나. 그런 거였구나.
이 사람이 그때의 범인이란 말인가. 거기에 찍혀 있는 여자는 이치가하라 유카였다. - P118

그 이유를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일인지 모른다. 나는 동반자살 사건을 꾸민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기리유 에리코의 유서를 미끼로 상대방을 유인하려 했다. 그 결과 유카가 덫에 걸려들었고 당연히 유카가 범인일 것이다. - P119

손발을 묶기 위해 허리끈 두 개를 품에 넣었다. 그리고 열쇠를 가방에서 꺼냈다. 이 료칸의 마스터키와 똑같은 것이다.
원래 다카아키 씨가 갖고 있던 것인데 몇 년 전에 내가 맡았다가 그대로 보관하게 되었다. - P120

유카가 어느 방에 묵는지는 알고 있다. 화재가 일어났을 때와 같은 ‘C-3‘이라고 식사를 마친 뒤 이야기를 나눌 때 말했다.
긴 복도를 걸어간 뒤, 유카의 방 앞에 섰다. 인기척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고 열쇠 구멍에 키를 집어넣었다. - P121

먼저 얼굴을 확인해야 했다. 틀림없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이불 끝을 잡고 천천히 들춰 보았다.
이치하라 유카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유카는 눈을 뜨고 있었다. 엎드린 자세로 목을 틀어 얼굴만이쪽을 향하고 있다. - P122

유카는 죽어 있었다.
내가 죽인 게 아니다. 목을 조를 때 이미 죽어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불을 걷어낸 나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유카의 복부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옆구리에 나이프 같은것이 꽂혀 있는 게 보였다. 살해당한 것이다. - P123

맨 먼저 떠오른 생각은 유서를 회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여행가방 안, 옷 주머니, 세면대등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봉투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방안은 잔뜩 어지럽혀져 있었다. 나보다 먼저 누군가가 방안을 뒤진 흔적이었다. - P123

이불을 다시 덮으려다 바닥에 유카의 피가 묻어 있는 걸 보았다. 자세히 보니 유카가 왼손으로 쓴 글자 같았다. 알파벳
‘N‘을 거꾸로 뒤집은 ‘(문자오류)‘처럼 보였다. - P124

이로써 나만이 유카의 메시지를 알게 된 것이다.
방을 나오려고 출입문손잡이를 잡았을 때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맞은편 방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맞은편은 ‘C-1‘
로 나오유키가 묵고 있는 방이다. - P124

이렇게 망설이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방안으로 돌아와 툇마루의 유리창을 조용히 열었다. 게다(일본 사람들이 신는 나막신-옮긴이)가 놓여 있었지만 그걸 신을 수는 없다. 양말만 신은 발로 땅에 내려섰다. 생각보다 차갑지는 않았다. - P125

중간에 연못을 만났다. 다리를 건너려면 많이 돌아가야 하고 상야등 불빛에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연못 한쪽엔 군데군데 잘록한 부분이 있었는데 가장 좁은 곳은 폭이 대략 2미터쯤 되어 보였다. - P125

"그런데 어젯밤 여기에 묵은 사람들은 피해자의 친척뿐인것 같은데, 다른 손님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저기, 그건 말이죠…………."
소스케가 고바야시 마호를 대신해 현재 이 료칸은 휴업 중이라고 설명했다. 야자키 경감은 다른 종업원의 모습이 안 보이는 것도 그 설명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낮에 불쑥 찾아와서 묵게 해달라는손님이 있었어요. 휴업 중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모양이에요.
사정을 설명하고 돌려보내긴 했지만."
"그 사람의 인상착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 P132

"저기요." 아주 조심스럽게 요코가 입을 열었다. "유카가자살했다고 볼 수는 없는 건가요?"
"자살은 아닙니다." 경감은 일언지하에 부정했다. "흉기로보이는 나이프에 유카 씨의 지문이 묻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나이프는 유카씨가죽은 뒤 몸에서 빼낸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이건 이상한 부분입니다만, 유카씨 목을 누군가가 조른 흔적이 있습니다. 이 또한 죽은 뒤에 그런 것 같습니다." - P133

"유카씨 복부를 찌른 나이프입니다. 등산 나이프 같은데혹시 본 적이 있는 분 안계십니까?"
모두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일회용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는 파란색 손잡이가 달린 나이프가 찍혀 있었다. 칼에 묻어있는 검붉은 피가 선명했다.
"안 계십니까?" 야자키 경감이 다시 한번 물었다.
"처음 보는데." 나오유키가 말했다. - P135

"우리 중에 등산 다니는 사람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큰형님이 예전에 잠깐 다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소스케도 대답했다. - P136

"아지사와 히로미라고 합니다. 후루키 선생님 일을 도와주고있습니다." 히로미라는 조수가 시원시원한 말투로 대답했다.
단정한 얼굴, 탱탱한 피부.
옆에서 가나에가 남자인 그에게 예쁘다,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P138

중요한 것은 유카가 기리유 에리코의 유서를 훔쳤다는 사실이다. 그 일과 살인사건이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강도사건이 아니다. - P140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유카를 살해한 범인 또한 그 유서를훔치기 위해 벼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유카가 먼저 훔치는 것을 목격하고 당황해서 유카를 죽인 뒤 유서를 빼앗은것은 아닐까? - P140

유산이 많으면 많을수록 다툼도 많아지는 법이죠."
"아니, 다툼이랄 것까지는....…."소스케는 말을 우물거렸다.
"유산 다툼 같은 게 아니에요. 올케 언니가 이성을 잃고 멋대로 생각하는 거라고요."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요코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내가 그런 짓을 할 리 없잖아."
그만 진정하세요, 야자키 경감은 요코를 달래는 손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 P145

"다행히 알리바이는 증명되었습니다. 어제는 밤늦게까지사무실에서 일을 했으니까요. 다른 직원들에게 물어보면 저희 두 사람이 한밤중에 이곳으로 오는 게 불가능했다는 것을알겁니다."
아무튼 후루키 변호사와 아지사와 히로미는 유카를 살해한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 P147

"설마, 상속 몇 푼 더 받겠다고 살인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 정도는 경찰도 알고 있을 거야." 나오유키가 말했다.
유카의 죽음으로 법정상속분이 3분의 1에서 2분의 1로 늘어난 소스케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과연 그럴까? 어쨌든 상속액이 엄청나잖아." - P149

그때 검은색 넥타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넥타이가 떨어졌네요."
내가 넥타이를 주워주었다. 넥타이에는 진주로 된 타이택이 부착되어 있었다. 구입한지 얼마 안 된 듯 백금으로 된 받침 부분에 흠집 하나 없었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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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91년에 쓰여진 책이다.








간호사는 동정심 가득한 얼굴을 옆으로 살짝 돌렸다.
"기억 안 나세요?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하지만 이제 괜찮을 거예요. 선생님이 수술을 잘해주셨으니까 곧 회복될 거예요." - P20

"아아, 내 얼굴·-어떻게 된 거죠?"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 마세요. 자, 진정하세요."
"내 얼굴을 보여주세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내가 몸부림을 치자 간호사는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수술이 무사히 끝났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 P21

"그는……… 나와 함께 있던 남자는 어떻게 됐죠?"
나는 의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안경 뒤에서 그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나를 외면했다. 나는 곧 사태를 파악했다. - P22

"사토나카 지로를 알고 계시죠?"
딱딱하고 위엄 있는 얼굴의 중년 형사가 침대 옆에 앉더니 사무적인 말투로 물었다. 지로의 이름에 경칭을 붙이지 않는게 거슬렸다. - P23

"왜 모르는 거죠?"
"자고 있었으니까요."
"그 말은, 사토나카가 올 줄 몰랐다는 거군요."
"예, 몰랐어요." - P23

"그럼, 당신을 만나서 무얼 했죠?"
나는 머뭇거렸다. 심리적인 효과를 노린 행동이었는데, 형사는 쉽게 속아 넘어갔다. 그는 내가 망설인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이 질문은 나중에 다시 하죠. 그건 그렇고, 화재가 난 것을기억하고 계십니까?"
"단편적으로요." - P24

"지금은 어떻습니까? 왜 사토나카가 당신 옆에서 잤는지짐작가는 게 있습니까?"
나는 눈을 내리깔고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형사의 눈을 쳐다보았다.
"글쎄요.......그 화재와 연관이 있는 건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형사는 수긍했다. "사토나카는 당신이묵고 있는 방에 불을 지른 후, 자신도 약을 먹고 자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P25

"뺑소니였습니다. 사토나카의 아파트로부터 몇 킬로미터떨어진 국도에서 노인을 치었습니다. 노인은 머리를 세게 부딪혀 즉사했고요."
나는 잠자코 있었다.
"사고 현장에 차량 파편이 떨어져 있어서 바로 차종을 알아낼 수 있었는데, 회랑정 옆에 버려진 사토나카의 차와 일치했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알아본 결과, 동일한 차량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 P26

"자고 있는데 갑자기 ・・・・・・ 고통스러워서 정신을 차려보니누군가가 목을 조르고 있었어요."
"상대방의 얼굴을 봤습니까?"
"아뇨. 어두웠던 데다 눈을 떴을 때는 의식이 몽롱한 상태였습니다." - P27

"무슨 약을 먹었나요?"
시안화수소입니다. 사토나카가 공장에 들른 건 그 약품을훔치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정비공장에는 청산가리 같은게 상비되어 있으니까요."
"왜 나한테는 그것을 먹이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자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자는 사람을 일부러깨워 약을 먹이는 것보다는 목을 조르는 편이 손쉬울 거라고생각했겠지요." - P29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소녀처럼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다. 울면서 마음속으로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절규를 터뜨렸다.
사토나카 지로는 살해당했다. - P30

"만약 그렇게 됐다면 더 복잡해졌을지도 몰라요." 가나에가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잖아요. 만약 큰외삼촌이 그 언니와 결혼했다면 대부분의 유산이 그쪽으로 갔을 거예요. 그렇게 되었다면 오늘 이렇게 모일 필요도 없었을걸요? 그런 의미에서는 그 동반자살사건을 고맙게 생각해야겠네요." - P51

하지만 이 또한 공허한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다카아키 씨가 여성성을 보고 선택했다면, 주저 없이 회랑정의 지배인인 고바야시 마호에게 청혼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다. 고바야시 마호는 다카아키 씨에게 애인과 같은 존재였다. 일찍 아내를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고바야시 마호를 곁에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그가 성불구자가 되면서 고바야시 마호의 애인으로서의 임무는 끝이 났다. - P56

그는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것과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걸알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그가 가장 염려했던 건 자신이 이룩해 놓은 것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려고 한 것에 불과했다. - P57

그리고 노력했다. 업무가 끝난 뒤 외국어를 배웠고, 여러 강습에 나가 몇 가지 자격증을 땄다. 이윽고 동료들 사이에서 고립되었지만 무능한 사람들이 질투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무시했다. - P55

이런 식으로 나는 못생긴 외모를 발판 삼아 최고의 스피드로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나 나는 인정해야 했다. 연애에 대한 동경이 마음속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이치가하라 다카아키 씨는 내 능력을 내다보고 비서로 지명했다. - P56

그는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것과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걸알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그가 가장 염려했던 건 자신이 이룩해 놓은 것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려고 한 것에불과했다. - P57

"그랬군요. 그런데 기리유 씨가 어쨌는데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이겠지만, 에리코 양은 이 료칸에서 사고를 당한 뒤 자살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떠올리기 싫은 기억인 듯 대부분의 사람이 순간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그런 반응과는 전혀 대조적인 목소리가 날아왔다. - P59

"에리코 양이 죽고 나서 2~3일쯤 지났을 때 이 편지가 도착했어요. 보시다시피 보낸 사람 이름은 기리유 에리코라고되어 있습니다."
"그러네요. 어렴풋하지만 필적도 맞는 것 같네요." 나오유키가 봉투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에리코 양의 필적이 틀림없어요." - P60

그리고 다카아키 씨의 유언장 공개는 적당한 때와 장소를 선택한 뒤, 한정된 사람들 앞에서만 행해질 거예요. 아마 부인께서도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탁드리는 겁니다. 그 자리에 이 봉투를 꼭 갖고 가셔서, 유언장을 공개하기 전 모두 앞에서 개봉한 뒤이 편지를 읽어주세요. - P62

"그렇게 생각한다면 개봉 시기를 지정한 부분이 마음에 걸려요 오빠의 유언장을 공개할 때라고 지정한 이상 유언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봐야 하잖아요. 가나에 말처럼 원한을 푸는 효과가 있을지도 몰라요. 예를 들어 그 유서의 내용이 밝혀지면 오빠의 유산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 생긴다든가요." - P70

"뭐, 어차피 추리에 불과한 얘기예요. 어쨌든 내일이면 알게 되겠죠. 저 안에 쓰여 있을 테니까."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요코가 말했다. - P71

적에게 접근할 방법은 없는 걸까?
병원 침대에 누워서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복수보다 먼저 조심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범인이 여전히 내 목숨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내가 목숨을 건진 건 범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 P72

자살미수 사건 이후, 간호사의 감시가 심해졌다. 나는 여전히 죽음에 대한 동경을 입밖에냈고, 언제 또 이상한 짓을 할지 모른다는 위험한 분위기를 계속해서 풍겼다. - P73

"...... 이런 곳에서 괜찮겠습니까?" 택시기사가 오랜만에입을 열었다.
"예. 사람이……… 애인이 올 거예요."
"아아, 그렇다면야." 택시기사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애인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 밖에 내는 승객을 경박하다고 생각했는지 뺨이 약간 경직되었다. - P75

스웨터 위에 걸친 가운을 벗었다. 병원에서 항상 입고 있던옷이다. 그 가운을 둥그렇게 말아 힘껏 바다로 던졌다. 연분홍색 가운은 바람에 약간 밀리는 듯하더니 이윽고 바다에 떨어졌다. 나는 그 장면에 나 자신을 이입했다. 나는 방금 이곳에서 떨어졌다. 기리유 에리코는 죽었다………. - P76

그런 상황과 이전의 행동으로 볼 때, 기리유 에리코는 자살했을 거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다만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점이 경찰과 관계자들의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결국 사건은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더 이상 기리유 에리코의 소재가 밝혀지지 않았을뿐더러 그녀에게는 위장 자살을 할 동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P79

복수를 계획했을 때부터 내가 갈 곳은 여기라고 정했다. 이곳에는 내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혼마 기쿠요 부인이 살고 있었다. - P80

"괜찮아요. 사실은 에리코 양만 오는 게 더 좋답니다. 다카아키 씨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내가 회사 실적에 대한 얘기를 들어서 뭐 하겠어요. 하품을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그리고 역시 여자끼리가 편하죠. 이런 할머니도 여자로 생각해 준다면 말이에요." - P81

아니, 만났지만 얘기를 나눌 수 없었다. 집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거실에 쓰러져 있는 부인의 시체였다. - P82

나는 한참 동안 기쿠요 부인 옆에서 울었다. 시체가 무섭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었고 그냥 슬펐다. 누군가에 의해 꾸며진 동반자살 사건은 나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 갔다. 이제 나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 P83

이 최초의 거짓말로 나는 어떤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기쿠요 부인의 죽음을 숨기자, 그리고 내가 부인으로 변장하고 적에게 다가가는 거다.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다. - P84

장례식이 끝나고 1주일 뒤, 이치하라 소스케에게서 한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에는 다카아키 씨의 유언장 공개에 대해 적혀 있었다. 사십구일재를 회랑정에서 지낼 예정인데 유언장과 관련해 기쿠요 부인의 이름이 올라 있으니 꼭 참석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참석 의사를 서면으로 전했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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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예전에 네이버에서 산 적이 있어서 다시 보았습니다.
다시봐도 몽환적인 상황이 능청스럽게 이어지는 점이 재미있었습니다.
영화와 소설이 다른 점이 있다면, 소설이 각각의 단편 모음집 형식이라면, 영화는 그것들을 잘 버무려 만든 장편입니다. 각기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엄지손가락을 남몰래 안으로 숨기면 굳게 쥐려고 해도쥐어지지 않아요. 그 살짝 숨긴 엄지손가락이야말로 사랑이에요." - P9

신랑은 가라츠마오이케 지점에 근무하는 은행원이고, 신부는 후시미에 있는 양조회사의 연구원이다. 둘 다 부모의의향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호걸들이라 양쪽 부모는 아직 얼굴도 마주한 적이 없다고 한다. 두 사람의 교제가 시작된 것은 대학 1학년 때, 여러 차례의 파란을 극복하며 들판을 지나고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 지금 이렇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운운. - P11

그러나 그 자리에서는 주위에 온통 선배님들만 있어서 마음껏 술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축하해야 할 결혼피로연 자리에서 만에 하나라도 실수를 하여 스승 같은 선배의 얼굴에 먹칠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술에 대한 욕구를 지그시 누르고 있다가 2차로 가는 자리에서 살짝 빠져나왔습니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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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다른 테이프들도 비슷비슷한 내용이었다. 순수하게 취재를 목적으로 촬영한 것 외에다른 특이사항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게 수사원들의 결론이었다. 일단 우리는 서로의 테이프를 교환하여 빨리감기 등으로 전체를 살펴보았지만 그 결론에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 P198

‘칼날 부분에 몇 번 사용한 듯한 마모 흔적이 있음. 혈액이묻은 일은 없었던 것으로 보임. 손잡이 부분에 지문 다수 감식결과, 이 지문은 모두 노노구치 오사무의 것으로 추정됨.‘ - P198

그녀가 먼저 내민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전에 그녀에게서받은 『야광충』이라는 소설의 단행본이다.
이 책이 왜요?"
표지를 넘겨보세요."
그녀의 말에 나는 손끝으로 표지를 넘겼다. 마키무라 형사가 옆에서 앗 하는 소리를 냈다.
책의 내부가 도려내졌고 그 속에 비디오테이프가 들어 있었다. 마치 예전의 스파이소설 같았다. - P199

화면 귀퉁이에 날짜를 나타내는 숫자가 주르륵 적혀 있었다. 7년 전 12월의 어느 날이라고 알려주는 자막이었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건가, 하고 나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카메라는 하염없이 정원과 창문을 찍고 있을뿐이었다. 아무런 변화도 없고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 P200

이다음에 가가 형사가 내 병실을 찾아오는 것은 모든 것을알아냈을 때가 아닐까. 나는 최근 며칠 동안 실은 그런 생각을했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활동하는 모습을 지켜본 끝에 나는그런 예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 P203

역시나 가가 형사는 병실에 두 가지 증거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나이프, 또 하나는 비디오테이프였습니다. 놀랍게도 테이프는 『야광충』의 책 내부를 도려내고 그 안에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정말 히다카다운 장난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역시 히다카는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고 실감했습니다.
만일 그것이 『야광충』이 아니라 다른 책이었다면 아무리 혜안을 가진 가가 형사라도 그리 쉽게 진실을 눈치채지는 못했을테니까요. - P204

"아무래도 내가 진 것 같군." 나는 말했습니다. 낭패감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애써 느릿느릿 말했습니다. 그나마 내 나름대로 최대한 강한 척했다는 건 가가 형사도 뻔히 알았겠지요. - P205

"내 추리에 잘못된 부분이 있었어요?"
"아니, 거의 없어. 대단하네. 다만 보충해야 할 부분이 몇 군데 있어. 명예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니까."
"그건 선생님의 명예인가요?"
"아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히다카 하쓰미 씨의 명예야." - P206

"고백의 글을 써주겠다는 건가요?"
"그게 허용된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
"알겠습니다. 나로서도 그게 편하겠군요. 시간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하루만 주면 쓸 수 있을 거야." - P207

어린 시절의 친구였기 때문에 나는 그가 데뷔했을 때부터유심히 지켜봤습니다. 참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생각하는 반면 시샘이 있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 당시 나 또한 언젠가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P208

그런 계산도 있어서 사실은 당장이라도 그를 만나고 싶었지만, 데뷔 직후의 그에게 어린 시절의 친구가 격려랍시고 찾아가봤자 공연히 폐만 끼칠 것이라고 짐작하고, 한참 동안은 문예지와 책을 통해 그의 작품을 읽는 것으로 조용히 후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 P209

한번 만나자는 이야기는 그 전화를 통해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주쿠의 찻집에서 만났고 이어서 중화요리점에서식사도 했습니다. 나는 학교에서 퇴근하는 길이어서 양복 차림이었지만 그는 블루종 점퍼에 면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역시 작가라는 건 자유롭구나, 하고 묘한 데서 감동했던 기억이 납니다. - P211

"완성한 작품은 있어?" 그가 물었습니다.
"아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제 겨우 첫 작품을 쓰는 중이야 조금만 더 하면 완성될 예정이기는 하지만"
"그거 다 쓰면 나한테 가져와 내가 읽어보고 괜찮으면 아는편집자를 소개해줄게." - P212

하지만 히다카에게서 도무지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일이 바쁜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재촉 전화 같은 건 하지 않았습니다. 머릿속 한 귀퉁이에서는 어쩌면 너무도 한심한 작품이라서 히다카가 대답을 못 하고 난감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상상이 커져갔습니다. - P213

"정말 미안해. 이 일만 정리되면 바로 읽어볼게. 첫 부분만얼핏 봤는데, 폭죽 장인의 이야기인 것 같던데?"
"응."
"절 옆에 살던 그 할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쓴 거지?"
히다카도 그 폭죽 만드는 노인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 맞아, 라고 나는 대답했습니다. - P214

"그건 안 되지. 내용도 완성도도 알지 못하는 작품을 항상바쁜 편집자들에게 들이대는 식으로 일을 처리하고 싶지는 않아. 그러잖아도 형편없는 작품들이 꾸역꾸역 들어오는 통에 지겨워 죽겠다고 항상 투덜거리는데. 소개를 하더라도 우선내가 읽어본 다음에 해야 돼. 아, 내가 미덥지 않다면 자네 원고, 지금 당장 돌려줄까?" - P215

나는 선물로 스카치위스키를 들고 그의 집을 찾았습니다.
히다카는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나를 맞이해주었습니다. 그런 그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 하쓰미 씨입니다. - P217

"나쁜 작품은 아니야, 주제 등은 오히려 좋은 편이라고 할까?"
"나쁘지는 않지만 좋지도 않다. ・・・・・ 그런 얘기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독자를 끌어당기는뭔가가 약간 부족하다고 할까. 소재는 좋은데 요리법이 잘못되어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 P218

"한 가지 주제에 오래 매달리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 이 폭죽 장인의 이야기는 일단 없었던 일로 하는 게 좋아. 자칫하면이번과 똑같은 일이 반복될 우려가 있어. 나로서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쓰라고 권하겠어." - P219

두 번째 소설은 그렇게 난항을 거듭했지만, 그 사이에 나는히다카의 집을 자주 찾았습니다. 코흘리개 친구이고 중학교때까지 함께 뛰어놀던 사이라서 우정이 금세 부활한 것이겠지요. 나로서는 현역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 흥미로웠고, 히다카로서도 외부인을 접한다는 메리트가 있었던 게 아니겠습니까. 작가가 된 뒤로 자기도 모르게 세상과는 멀어졌다는 말을 비친 적이 있으니까요. - P220

이윽고 나의 두 번째 소설이 완성되었습니다. 즉시 히다카에게 보여주고 비평을 청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이 작품 역시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흔해빠진 연애소설 같다. 라는 것이 히다카의 평이었습니다. "소년이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는 이야기라면 빗자루로 쓸어 담을 만큼 많아. 뭔가 플러스알파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 게다가 가장 중요한 여주인공이 어쩐지 마음에 쏙 들어오지 않아. 실재감이 없다는 거지. 머리로만 생각했다는 게뻔히 보여." - P222

"남편은 노노구치 씨를 함정에 빠뜨리고 있어요."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요?"
"노노구치 씨가 작가로 데뷔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해요. 작가가 되지 못하게 하려는 거예요."
"그건 내 소설이 재미가 없기 때문인가요?"
"아뇨, 그렇지 않아요. 분명 그 반대일걸요. 노노구치 씨가 쓴 작품이 자기 소설보다 뛰어나니까 질투심이 생긴 거예요." - P226

"그런데 막상 읽기 시작하고는 그 소설에 푹빠져버린 눈치였어요. 저는 그런 걸 잘 알아요. 그 사람은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이라 재미가 없으면 금세 내던졌을 거예요. 그만큼 열심히읽었다는 건 노노구치 씨의 작품 세계에 빠져들었다고 생각할수밖에 없어요.‘ - P227

"내 소설을 열심히 읽어준 것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나는 그녀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어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부정했습니다.
"남편은 그런 타입의 인간이 아니에요. 그 사람은 자기 자신말고는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이에요." - P228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둘이서만 지낼 수 있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나는 잔뜩 들뜬 마음으로 하쓰미씨와 상의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정해진 것이 바로 그 오키나와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사에 가서 신청하고 비용까지 지불했습니다. 짧은 기간이나마 마치 부부처럼 함께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그저 꿈만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 P231

그 뒤로 며칠이나 고민을 했을까요. 나는 교사로서의 일도 내팽개치고 타개책을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미 다 아시겠지요. 아니, 가가 형사는 오래전부터 짐작하고 있었으니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나는 히다카를 죽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 P232

당연한 일이지만 나의 제안에 하쓰미 씨는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런 무거운 죄를 짓게 할 수는 없다고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그런데 그 눈물은 나를 한층 더 미치게 했습니다. 히다카를 죽이는 것밖에 다른 길은 없다고 굳게 믿게 된 것입니다. - P233

그렇게 우리는 함께 히다카를 죽일 계획을 짰습니다. 하긴 계획이라야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강도가 저지른 것으로 위장하자는 것뿐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마침내 그 12월 13일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 P234

본심을 말하자면 나는 교살을 택하고 싶었습니다. 나이프로 찌른다는 건 상상만 해도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강도가 저지른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서는 나이프를 쓰는 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강도짓을 하려고 남의 집에 뛰어든 자가 제대로 된흉기도 준비하지 않았다는 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P235

"이봐, 노노구치." 그는 내 머리를 밀어붙이며 말했습니다.
"도범 방지법이란 거 알아? 거기에 정당방위에 관한 내용이 있어. 범죄를 목적으로 침입한 자를 잘못하여 죽게 하더라도 그 죄는 묻지 않는다고 나와 있어.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겠지? 여기서 내가 너를 죽여도 아무도 나를 처벌하지 못한단말이야!"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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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파다. 곧 일흔 살이 되는 노파……….
표를 건네고 개찰구를 나오자 약간 긴장이 풀렸다. 괜찮을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사람들이 알아차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전철 안에서는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학생으로 보이는 맞은편의 청년은 할머니한테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만화잡지를 읽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 P9

"일원정(原亭)으로 가주세요." 내가 말했다.
"일원정이라면...... 아아, 알겠습니다."
택시기사는 미터기를 작동시키고 나서 고개를 살짝 내 쪽으로 돌렸다. - P10

"불이 난 걸로 주위에서도 화제가 됐었나요?"
"그럼요. 좀 특이한 사건이었으니까요." 거기까지 말하고택시기사가 갑자기 말투를 바꾸었다. "사실 자세한 내용은 저도 잘 모릅니다. 지금은 말끔히 수리를 해서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하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 P11

"아아, 그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면 원하시는 방에 묵게 해드려야죠. 어떤 방이죠?" 눈가에 약간 불안한 기색을 띠며 지배인이 물었다.
"‘A-1‘ 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내 대답에 지배인은 몹시 당황했다. "아, 그 방요? 부인께서 원하신다면 저희야 상관없습니다만………" - P13

"일전에 발생한 사고 때문이라면 걱정 마세요. 그걸 알면서도 ‘A-1‘에 묵게 해달라고 부탁드리는 거니까요. 택시기사 얘기를 들어보니 지금은 깔끔하게 수리를 했다고 하던데요."
이 말이 효과를 발휘한 모양이다. 지배인은 안도의 한숨을내쉬었다. - P14

본관과 각각의 별관은 긴 복도로 이어져 있는데, 이 복도측면에는 창문 여러 개가 나 있어 주위의 경치를 바라볼 수있다. 그래서 본관에서 맨 끝에 있는 ‘A-1‘까지 가려면 왼쪽의 정원을 바라보면서 복도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면 된다.
정원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는데 복도의 일부는 이 연못을 건너는 다리 역할도 겸한다. - P15

냄새가 마음에 걸렸는지 지배인이 그렇게 물었지만, 나는거절했다. 3월의 공기는 아직 차갑다. 그것보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밀폐된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 P15

가방을 끌어당겨 안에서 손거울을 꺼냈다. 둥근 거울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자 그 속에 백발 노파의 얼굴이 비쳤다. 뺨은 늘어져 있고 눈가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아무리 잘봐.
도 예순 살 아래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 객관적인 사실이 다시금 용기를 주었지만 약간 쓸쓸한 기분이 드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 P17

건강한 피부는 극히 일부고 나머지는흉한 수술 자국으로 메워져 있다. 텔레비전에 출연해 성형외과의 진보가 눈부시다고 말했던 사람이 어느 대학의 교수였더라. 노파로 변장하지 않았더라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 P18

욕조에 물을 다 받은 다음, 기모노를 벗었다. 전라로 거울앞에 서서 서른두 살 여자의 마른 몸을 바라본 뒤, 몸을 약간틀어 등을 비쳐보았다. 등에도 흉한 화상 자국이 지도에 그려진 섬처럼 남아 있다. 이 상처를 잊어서는 안 된다. 증오를 누그러뜨려서는 안 된다. - P19

지로, 나의 지로,
그와 함께했던 나날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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