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파다. 곧 일흔 살이 되는 노파………. 표를 건네고 개찰구를 나오자 약간 긴장이 풀렸다. 괜찮을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사람들이 알아차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전철 안에서는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학생으로 보이는 맞은편의 청년은 할머니한테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만화잡지를 읽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 P9
"일원정(原亭)으로 가주세요." 내가 말했다. "일원정이라면...... 아아, 알겠습니다." 택시기사는 미터기를 작동시키고 나서 고개를 살짝 내 쪽으로 돌렸다. - P10
"불이 난 걸로 주위에서도 화제가 됐었나요?" "그럼요. 좀 특이한 사건이었으니까요." 거기까지 말하고택시기사가 갑자기 말투를 바꾸었다. "사실 자세한 내용은 저도 잘 모릅니다. 지금은 말끔히 수리를 해서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하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 P11
"아아, 그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면 원하시는 방에 묵게 해드려야죠. 어떤 방이죠?" 눈가에 약간 불안한 기색을 띠며 지배인이 물었다. "‘A-1‘ 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내 대답에 지배인은 몹시 당황했다. "아, 그 방요? 부인께서 원하신다면 저희야 상관없습니다만………" - P13
"일전에 발생한 사고 때문이라면 걱정 마세요. 그걸 알면서도 ‘A-1‘에 묵게 해달라고 부탁드리는 거니까요. 택시기사 얘기를 들어보니 지금은 깔끔하게 수리를 했다고 하던데요." 이 말이 효과를 발휘한 모양이다. 지배인은 안도의 한숨을내쉬었다. - P14
본관과 각각의 별관은 긴 복도로 이어져 있는데, 이 복도측면에는 창문 여러 개가 나 있어 주위의 경치를 바라볼 수있다. 그래서 본관에서 맨 끝에 있는 ‘A-1‘까지 가려면 왼쪽의 정원을 바라보면서 복도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면 된다. 정원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는데 복도의 일부는 이 연못을 건너는 다리 역할도 겸한다. - P15
냄새가 마음에 걸렸는지 지배인이 그렇게 물었지만, 나는거절했다. 3월의 공기는 아직 차갑다. 그것보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밀폐된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 P15
가방을 끌어당겨 안에서 손거울을 꺼냈다. 둥근 거울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자 그 속에 백발 노파의 얼굴이 비쳤다. 뺨은 늘어져 있고 눈가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아무리 잘봐. 도 예순 살 아래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 객관적인 사실이 다시금 용기를 주었지만 약간 쓸쓸한 기분이 드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 P17
건강한 피부는 극히 일부고 나머지는흉한 수술 자국으로 메워져 있다. 텔레비전에 출연해 성형외과의 진보가 눈부시다고 말했던 사람이 어느 대학의 교수였더라. 노파로 변장하지 않았더라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 P18
욕조에 물을 다 받은 다음, 기모노를 벗었다. 전라로 거울앞에 서서 서른두 살 여자의 마른 몸을 바라본 뒤, 몸을 약간틀어 등을 비쳐보았다. 등에도 흉한 화상 자국이 지도에 그려진 섬처럼 남아 있다. 이 상처를 잊어서는 안 된다. 증오를 누그러뜨려서는 안 된다. - P19
지로, 나의 지로, 그와 함께했던 나날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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