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다른 테이프들도 비슷비슷한 내용이었다. 순수하게 취재를 목적으로 촬영한 것 외에다른 특이사항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게 수사원들의 결론이었다. 일단 우리는 서로의 테이프를 교환하여 빨리감기 등으로 전체를 살펴보았지만 그 결론에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 P198

‘칼날 부분에 몇 번 사용한 듯한 마모 흔적이 있음. 혈액이묻은 일은 없었던 것으로 보임. 손잡이 부분에 지문 다수 감식결과, 이 지문은 모두 노노구치 오사무의 것으로 추정됨.‘ - P198

그녀가 먼저 내민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전에 그녀에게서받은 『야광충』이라는 소설의 단행본이다.
이 책이 왜요?"
표지를 넘겨보세요."
그녀의 말에 나는 손끝으로 표지를 넘겼다. 마키무라 형사가 옆에서 앗 하는 소리를 냈다.
책의 내부가 도려내졌고 그 속에 비디오테이프가 들어 있었다. 마치 예전의 스파이소설 같았다. - P199

화면 귀퉁이에 날짜를 나타내는 숫자가 주르륵 적혀 있었다. 7년 전 12월의 어느 날이라고 알려주는 자막이었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건가, 하고 나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카메라는 하염없이 정원과 창문을 찍고 있을뿐이었다. 아무런 변화도 없고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 P200

이다음에 가가 형사가 내 병실을 찾아오는 것은 모든 것을알아냈을 때가 아닐까. 나는 최근 며칠 동안 실은 그런 생각을했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활동하는 모습을 지켜본 끝에 나는그런 예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 P203

역시나 가가 형사는 병실에 두 가지 증거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나이프, 또 하나는 비디오테이프였습니다. 놀랍게도 테이프는 『야광충』의 책 내부를 도려내고 그 안에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정말 히다카다운 장난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역시 히다카는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고 실감했습니다.
만일 그것이 『야광충』이 아니라 다른 책이었다면 아무리 혜안을 가진 가가 형사라도 그리 쉽게 진실을 눈치채지는 못했을테니까요. - P204

"아무래도 내가 진 것 같군." 나는 말했습니다. 낭패감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애써 느릿느릿 말했습니다. 그나마 내 나름대로 최대한 강한 척했다는 건 가가 형사도 뻔히 알았겠지요. - P205

"내 추리에 잘못된 부분이 있었어요?"
"아니, 거의 없어. 대단하네. 다만 보충해야 할 부분이 몇 군데 있어. 명예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니까."
"그건 선생님의 명예인가요?"
"아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히다카 하쓰미 씨의 명예야." - P206

"고백의 글을 써주겠다는 건가요?"
"그게 허용된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
"알겠습니다. 나로서도 그게 편하겠군요. 시간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하루만 주면 쓸 수 있을 거야." - P207

어린 시절의 친구였기 때문에 나는 그가 데뷔했을 때부터유심히 지켜봤습니다. 참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생각하는 반면 시샘이 있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 당시 나 또한 언젠가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P208

그런 계산도 있어서 사실은 당장이라도 그를 만나고 싶었지만, 데뷔 직후의 그에게 어린 시절의 친구가 격려랍시고 찾아가봤자 공연히 폐만 끼칠 것이라고 짐작하고, 한참 동안은 문예지와 책을 통해 그의 작품을 읽는 것으로 조용히 후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 P209

한번 만나자는 이야기는 그 전화를 통해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주쿠의 찻집에서 만났고 이어서 중화요리점에서식사도 했습니다. 나는 학교에서 퇴근하는 길이어서 양복 차림이었지만 그는 블루종 점퍼에 면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역시 작가라는 건 자유롭구나, 하고 묘한 데서 감동했던 기억이 납니다. - P211

"완성한 작품은 있어?" 그가 물었습니다.
"아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제 겨우 첫 작품을 쓰는 중이야 조금만 더 하면 완성될 예정이기는 하지만"
"그거 다 쓰면 나한테 가져와 내가 읽어보고 괜찮으면 아는편집자를 소개해줄게." - P212

하지만 히다카에게서 도무지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일이 바쁜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재촉 전화 같은 건 하지 않았습니다. 머릿속 한 귀퉁이에서는 어쩌면 너무도 한심한 작품이라서 히다카가 대답을 못 하고 난감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상상이 커져갔습니다. - P213

"정말 미안해. 이 일만 정리되면 바로 읽어볼게. 첫 부분만얼핏 봤는데, 폭죽 장인의 이야기인 것 같던데?"
"응."
"절 옆에 살던 그 할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쓴 거지?"
히다카도 그 폭죽 만드는 노인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 맞아, 라고 나는 대답했습니다. - P214

"그건 안 되지. 내용도 완성도도 알지 못하는 작품을 항상바쁜 편집자들에게 들이대는 식으로 일을 처리하고 싶지는 않아. 그러잖아도 형편없는 작품들이 꾸역꾸역 들어오는 통에 지겨워 죽겠다고 항상 투덜거리는데. 소개를 하더라도 우선내가 읽어본 다음에 해야 돼. 아, 내가 미덥지 않다면 자네 원고, 지금 당장 돌려줄까?" - P215

나는 선물로 스카치위스키를 들고 그의 집을 찾았습니다.
히다카는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나를 맞이해주었습니다. 그런 그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 하쓰미 씨입니다. - P217

"나쁜 작품은 아니야, 주제 등은 오히려 좋은 편이라고 할까?"
"나쁘지는 않지만 좋지도 않다. ・・・・・ 그런 얘기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독자를 끌어당기는뭔가가 약간 부족하다고 할까. 소재는 좋은데 요리법이 잘못되어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 P218

"한 가지 주제에 오래 매달리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 이 폭죽 장인의 이야기는 일단 없었던 일로 하는 게 좋아. 자칫하면이번과 똑같은 일이 반복될 우려가 있어. 나로서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쓰라고 권하겠어." - P219

두 번째 소설은 그렇게 난항을 거듭했지만, 그 사이에 나는히다카의 집을 자주 찾았습니다. 코흘리개 친구이고 중학교때까지 함께 뛰어놀던 사이라서 우정이 금세 부활한 것이겠지요. 나로서는 현역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 흥미로웠고, 히다카로서도 외부인을 접한다는 메리트가 있었던 게 아니겠습니까. 작가가 된 뒤로 자기도 모르게 세상과는 멀어졌다는 말을 비친 적이 있으니까요. - P220

이윽고 나의 두 번째 소설이 완성되었습니다. 즉시 히다카에게 보여주고 비평을 청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이 작품 역시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흔해빠진 연애소설 같다. 라는 것이 히다카의 평이었습니다. "소년이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는 이야기라면 빗자루로 쓸어 담을 만큼 많아. 뭔가 플러스알파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 게다가 가장 중요한 여주인공이 어쩐지 마음에 쏙 들어오지 않아. 실재감이 없다는 거지. 머리로만 생각했다는 게뻔히 보여." - P222

"남편은 노노구치 씨를 함정에 빠뜨리고 있어요."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요?"
"노노구치 씨가 작가로 데뷔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해요. 작가가 되지 못하게 하려는 거예요."
"그건 내 소설이 재미가 없기 때문인가요?"
"아뇨, 그렇지 않아요. 분명 그 반대일걸요. 노노구치 씨가 쓴 작품이 자기 소설보다 뛰어나니까 질투심이 생긴 거예요." - P226

"그런데 막상 읽기 시작하고는 그 소설에 푹빠져버린 눈치였어요. 저는 그런 걸 잘 알아요. 그 사람은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이라 재미가 없으면 금세 내던졌을 거예요. 그만큼 열심히읽었다는 건 노노구치 씨의 작품 세계에 빠져들었다고 생각할수밖에 없어요.‘ - P227

"내 소설을 열심히 읽어준 것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나는 그녀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어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부정했습니다.
"남편은 그런 타입의 인간이 아니에요. 그 사람은 자기 자신말고는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이에요." - P228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둘이서만 지낼 수 있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나는 잔뜩 들뜬 마음으로 하쓰미씨와 상의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정해진 것이 바로 그 오키나와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사에 가서 신청하고 비용까지 지불했습니다. 짧은 기간이나마 마치 부부처럼 함께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그저 꿈만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 P231

그 뒤로 며칠이나 고민을 했을까요. 나는 교사로서의 일도 내팽개치고 타개책을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미 다 아시겠지요. 아니, 가가 형사는 오래전부터 짐작하고 있었으니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나는 히다카를 죽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 P232

당연한 일이지만 나의 제안에 하쓰미 씨는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런 무거운 죄를 짓게 할 수는 없다고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그런데 그 눈물은 나를 한층 더 미치게 했습니다. 히다카를 죽이는 것밖에 다른 길은 없다고 굳게 믿게 된 것입니다. - P233

그렇게 우리는 함께 히다카를 죽일 계획을 짰습니다. 하긴 계획이라야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강도가 저지른 것으로 위장하자는 것뿐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마침내 그 12월 13일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 P234

본심을 말하자면 나는 교살을 택하고 싶었습니다. 나이프로 찌른다는 건 상상만 해도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강도가 저지른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서는 나이프를 쓰는 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강도짓을 하려고 남의 집에 뛰어든 자가 제대로 된흉기도 준비하지 않았다는 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P235

"이봐, 노노구치." 그는 내 머리를 밀어붙이며 말했습니다.
"도범 방지법이란 거 알아? 거기에 정당방위에 관한 내용이 있어. 범죄를 목적으로 침입한 자를 잘못하여 죽게 하더라도 그 죄는 묻지 않는다고 나와 있어.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겠지? 여기서 내가 너를 죽여도 아무도 나를 처벌하지 못한단말이야!"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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