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나는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다. 미끼를 이용해서 상대방이접근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미끼란, 아까 모든 사람 앞에서 보여줬던 기리유 에리코의 유서다. - P87

"아까 말씀하신 유서 말인데요." 유카가 약간 굳은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뭐라고 쓰여 있는지 전혀 짐작이 안가세요?"
"전혀요." - P88

"그건 터무니없는 상상일 뿐이야." 나보다 먼저 다케히코가 입을 열었다. "특히 고모는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어서 즐기는 것 같았어." - P89

"놀란 정도가 아니에요. 저는 완전히 잠에 빠져 있었는데,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나서 벌떡 일어났어요. 그때 전 ‘D‘동에서 자고 있었는데 화재가 난방하곤 떨어져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엄마는 많이 놀랐을 거예요. 복도를 사이에 두고바로 옆방이었으니까요. 게다가 혼자셨고." - P90

"유카 언니 방도 화재가 난 곳에서 떨어져 있었지, 아마?"
"응, 지금 묵고 있는 ‘C-3‘ 이었으니까."
"자고 있었어?"
"응. 나도 누군가의 고함을 듣고 깨어난 것 같아."
"어머, 그래? 그런 것에 비하면 방에서 굉장히 빨리 나온거네." 가나에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 P91

다케히코가 내 질문을 비웃었다. "모두 자고 있었는걸요.
게다가 ‘A-1‘ 방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해도 그걸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바로 옆방에 묵은 요코 고모뿐인걸요."
"하지만 ‘A-1‘ 방에서만 소리가 났을 거라고 단정할 수는없지 않나?" - P92

"목욕을 했더니 기분이 산뜻하네요. 기쿠요 부인도 탕에들어가는 게 어떠세요?"
"아니에요. 난 식사 전에 했답니다."
"나도 목욕할래."
가나에가 불쾌한 얼굴로 일어섰다. 그러자 그 자리에 나오유키가 앉았다. - P93

"외삼촌은 그날 밤 무슨 소리 같은거 못 들었어요?"
나오유키의 표정을 못 봤는지 가나에가 물었다. 유카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짝거렸지만 그 전에 나오유키가대답했다.
"아니, 전혀 기억이 없어. 그날 밤에는 잠이 깊이 들었거든.
"그럼 나오유키 씨도 소스케 씨의 고함을 듣고 깨어났나요?"
내가 묻자 그는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목소리가 아주 커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어디에 묵으셨어요?"
"오늘과 같은 ‘C-1‘이었습니다만." - P94

"마에바시는 아직 춥죠?" 그가 물었다.
"예. 하지만 얼마 전 드디어 정원수들도 겨울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답니다."
마에바시에는 혼마 부부의 집이 있다. 목조로 된 자그마한 2층집이다.
"가족분이 없다고 들었는데."
"예, 남편이 떠난 뒤로는 줄곧 혼자서 지내왔죠." - P95

"사실 혼자인 게 편할 때가 더 많답니다."
"이웃들과의 왕래는 어떻습니까?"
"요즘에는 소원하죠. 요즘 젊은 사람들이 어디 그런 것을좋아하나요?"
"그렇긴 하지만 ・・・・・…."
나오유키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았다. 그렇게 되면 노인들이 자택에서 쓰러질 경우, 이웃이 전혀 눈치를 못 채는게 아니냐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 P96

나오유키의 재촉이 효력을 발휘했는지 곧 마실 것이 나왔다. 그는 미즈와리(술에 물이나 얼음을 넣어 묽게 만든 것 - 옮긴이)를 마시면서 미국에서의 직장생활과 일상생활에 대해 빠른어조로 말했다. 나는 기쿠요 부인이 그랬던 것처럼 약간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지은 채, 상대방이 편하게 말할 수 있게 가끔 맞장구를 쳐주기도 하고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 말참견도했다. - P97

"큰오빠의 활동력은 굉장했잖아. 그래서 이치하라 집안의 재산을 엄청나게 불릴 수 있었겠지만 죽으면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무덤까지 가져갈 수도 없는데." - P98

"오히려 잘됐어. 만약 유언장이 없었으면 한바탕 난리가났을 거야."
"그야 그렇지만 썩 기분 좋은 상황은 아냐. 유산 배분을 보면 큰오빠가 마음에 들어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확연하게 드러날 테니까." - P99

"넌 좋겠다. 실질적으로 오빠의 회사를 물려받은 셈이고이미 나름대로 구축해 놓은 것도 있잖아. 그 정도면 유산을충분히 받은 거 아닌가?" - P99

"속물적인 얘기를 들려드려서 죄송합니다. 집안의 치부를드러낸 것 같아 창피하네요."
"아니에요." 나는 손을 내저었다. "나 같은 사람한텐 너무먼 얘기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습니다. 만약 선거에 나가게되면 당선됐으면 좋겠네요." - P100

"따님이 미인이라 쫓아다니는 남자가 너무 많아서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나는 입에 발린 소리를 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해서 아직 어린애랍니다. 남편도 가나에가 서른살쯤은 돼야 제 몫을 해낼 것 같다고 하거든요." - P101

"작은오빠는 단순한 사람이야. 오히려 올케가 보통이 아니지. 올케는 유카를 정재계 쪽으로 시집보내고 싶어 하니까만약 오빠가 당선이라도 된다면 마음이 움직일지도 몰라. 다만.…………." 요코는 몸을 앞으로 내밀더니 호기심 어린 눈으로말했다. "가나에 말로는 유카한테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다케히코가 아닌 것만은 확실한 모양이야." - P102

나는 화제를 동반자살 사건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요코의 얘기를 좀 더 듣고 싶었지만 나오유키 앞에서는 왠지 조심스러웠다. - P103

연못가에 벤치가 있었다. 깨끗한 것을 확인하고 벤치에 앉았다. 연못 수면에 회랑정이 거꾸로 비쳤다. 고개를 들자 바로 정면에 ‘A‘동이 있었다. - P104

"밤경치도 꽤 멋지죠?" 고바야시 마호는 이내 지배인다운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실컷 만끽하고 있답니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고바야시 씨도 산책 나오셨어요?"
"아뇨, 한번 둘러보는 거예요. 항상 그러는 건 아니지만 오늘 밤은 손님들이 계시니까요."
"수고하시네요." - P105

"이 료칸에 오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
"글쎄요, 벌써 그럭저럭 20년쯤 된 것 같아요."
고바야시 마호는 연못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줄곧 혼자셨나요?"
"예, 혼자였어요. 다카아키 씨한테는 결혼하게 되면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결국 그러지 못했지요."
"좋은 사람이 없었나 보네요." - P106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모두 마호 씨를 높이 평가하고있는걸요. 누가 경영을 하든지 계속 이곳을 맡아달라고 할 거예요. 틀림없이."
"감사합니다." 마호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좀 지쳤어요. 이제 물러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무슨 그런 말씀을………. 단골손님들이 실망하겠어요" - P107

"예, 고맙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고바야시 마호와 헤어진 뒤 복도를 지나 내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잠근 뒤 휴우, 한숨을 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 P108

시계를 보았다. 아직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다. 그러나일흔을 눈앞에 둔 노파라는 걸 감안하면 잠자리에 드는 게 당연한 시각이기도 하다. 나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맡에 봉투를 두었다. 기리유 에리코의 유서다. - P108

이번엔 가방을 열고 안에서 소형 비디오카메라를 꺼냈다.
8 밀리미터 비디오카메라여서 최대 두 시간까지 녹화가 가능하다. 전원 코드를 콘센트에 꽂고 본체를 다시 가방에 넣은뒤, 렌즈부분을 밖으로 내놓고 방 입구 쪽을 찍을 수 있도록위치를 조절했다. 그 상태에서 녹화 스위치를 켜고 렌즈를 가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가방 위에 타월을 걸쳐놓았다. 코드 위에는 방석을 놓아 위장했다. - P109

무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서 눈을 떴다.
이런 멍청한 짓을 하다니. 잠깐 눈만 붙일 생각이었는데 신경을 쓰느라 피로했던 모양이다. - P115

누구일까? 이 사람은 누구일까?
차라리 지금 일어나서 상대방을 덮칠까 하는 생각이 불쑥들었다. 아니, 그러면 안 된다. 잘된다는 보장이 없다. 자칫하다가는 내가 상대방에게 당하고, 요란한 소리를 듣고 다른 사람들이 달려오기라도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것이다. 지금은 꾹 참는 수밖에 없다. - P116

나는 벌떡 일어났다. 머리맡에 두었던 봉투가 안 보였다.
시계를 보자 새벽 1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불 속으로 들어간지 거의 두 시간이 흘렀다. - P116

아, 이 사람은 ・・・・・..
그랬구나. 그런 거였구나.
이 사람이 그때의 범인이란 말인가. 거기에 찍혀 있는 여자는 이치가하라 유카였다. - P118

그 이유를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일인지 모른다. 나는 동반자살 사건을 꾸민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기리유 에리코의 유서를 미끼로 상대방을 유인하려 했다. 그 결과 유카가 덫에 걸려들었고 당연히 유카가 범인일 것이다. - P119

손발을 묶기 위해 허리끈 두 개를 품에 넣었다. 그리고 열쇠를 가방에서 꺼냈다. 이 료칸의 마스터키와 똑같은 것이다.
원래 다카아키 씨가 갖고 있던 것인데 몇 년 전에 내가 맡았다가 그대로 보관하게 되었다. - P120

유카가 어느 방에 묵는지는 알고 있다. 화재가 일어났을 때와 같은 ‘C-3‘이라고 식사를 마친 뒤 이야기를 나눌 때 말했다.
긴 복도를 걸어간 뒤, 유카의 방 앞에 섰다. 인기척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고 열쇠 구멍에 키를 집어넣었다. - P121

먼저 얼굴을 확인해야 했다. 틀림없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이불 끝을 잡고 천천히 들춰 보았다.
이치하라 유카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유카는 눈을 뜨고 있었다. 엎드린 자세로 목을 틀어 얼굴만이쪽을 향하고 있다. - P122

유카는 죽어 있었다.
내가 죽인 게 아니다. 목을 조를 때 이미 죽어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불을 걷어낸 나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유카의 복부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옆구리에 나이프 같은것이 꽂혀 있는 게 보였다. 살해당한 것이다. - P123

맨 먼저 떠오른 생각은 유서를 회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여행가방 안, 옷 주머니, 세면대등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봉투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방안은 잔뜩 어지럽혀져 있었다. 나보다 먼저 누군가가 방안을 뒤진 흔적이었다. - P123

이불을 다시 덮으려다 바닥에 유카의 피가 묻어 있는 걸 보았다. 자세히 보니 유카가 왼손으로 쓴 글자 같았다. 알파벳
‘N‘을 거꾸로 뒤집은 ‘(문자오류)‘처럼 보였다. - P124

이로써 나만이 유카의 메시지를 알게 된 것이다.
방을 나오려고 출입문손잡이를 잡았을 때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맞은편 방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맞은편은 ‘C-1‘
로 나오유키가 묵고 있는 방이다. - P124

이렇게 망설이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방안으로 돌아와 툇마루의 유리창을 조용히 열었다. 게다(일본 사람들이 신는 나막신-옮긴이)가 놓여 있었지만 그걸 신을 수는 없다. 양말만 신은 발로 땅에 내려섰다. 생각보다 차갑지는 않았다. - P125

중간에 연못을 만났다. 다리를 건너려면 많이 돌아가야 하고 상야등 불빛에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연못 한쪽엔 군데군데 잘록한 부분이 있었는데 가장 좁은 곳은 폭이 대략 2미터쯤 되어 보였다. - P125

"그런데 어젯밤 여기에 묵은 사람들은 피해자의 친척뿐인것 같은데, 다른 손님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저기, 그건 말이죠…………."
소스케가 고바야시 마호를 대신해 현재 이 료칸은 휴업 중이라고 설명했다. 야자키 경감은 다른 종업원의 모습이 안 보이는 것도 그 설명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낮에 불쑥 찾아와서 묵게 해달라는손님이 있었어요. 휴업 중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모양이에요.
사정을 설명하고 돌려보내긴 했지만."
"그 사람의 인상착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 P132

"저기요." 아주 조심스럽게 요코가 입을 열었다. "유카가자살했다고 볼 수는 없는 건가요?"
"자살은 아닙니다." 경감은 일언지하에 부정했다. "흉기로보이는 나이프에 유카 씨의 지문이 묻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나이프는 유카씨가죽은 뒤 몸에서 빼낸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이건 이상한 부분입니다만, 유카씨 목을 누군가가 조른 흔적이 있습니다. 이 또한 죽은 뒤에 그런 것 같습니다." - P133

"유카씨 복부를 찌른 나이프입니다. 등산 나이프 같은데혹시 본 적이 있는 분 안계십니까?"
모두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일회용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는 파란색 손잡이가 달린 나이프가 찍혀 있었다. 칼에 묻어있는 검붉은 피가 선명했다.
"안 계십니까?" 야자키 경감이 다시 한번 물었다.
"처음 보는데." 나오유키가 말했다. - P135

"우리 중에 등산 다니는 사람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큰형님이 예전에 잠깐 다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소스케도 대답했다. - P136

"아지사와 히로미라고 합니다. 후루키 선생님 일을 도와주고있습니다." 히로미라는 조수가 시원시원한 말투로 대답했다.
단정한 얼굴, 탱탱한 피부.
옆에서 가나에가 남자인 그에게 예쁘다,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P138

중요한 것은 유카가 기리유 에리코의 유서를 훔쳤다는 사실이다. 그 일과 살인사건이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강도사건이 아니다. - P140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유카를 살해한 범인 또한 그 유서를훔치기 위해 벼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유카가 먼저 훔치는 것을 목격하고 당황해서 유카를 죽인 뒤 유서를 빼앗은것은 아닐까? - P140

유산이 많으면 많을수록 다툼도 많아지는 법이죠."
"아니, 다툼이랄 것까지는....…."소스케는 말을 우물거렸다.
"유산 다툼 같은 게 아니에요. 올케 언니가 이성을 잃고 멋대로 생각하는 거라고요."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요코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내가 그런 짓을 할 리 없잖아."
그만 진정하세요, 야자키 경감은 요코를 달래는 손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 P145

"다행히 알리바이는 증명되었습니다. 어제는 밤늦게까지사무실에서 일을 했으니까요. 다른 직원들에게 물어보면 저희 두 사람이 한밤중에 이곳으로 오는 게 불가능했다는 것을알겁니다."
아무튼 후루키 변호사와 아지사와 히로미는 유카를 살해한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 P147

"설마, 상속 몇 푼 더 받겠다고 살인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 정도는 경찰도 알고 있을 거야." 나오유키가 말했다.
유카의 죽음으로 법정상속분이 3분의 1에서 2분의 1로 늘어난 소스케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과연 그럴까? 어쨌든 상속액이 엄청나잖아." - P149

그때 검은색 넥타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넥타이가 떨어졌네요."
내가 넥타이를 주워주었다. 넥타이에는 진주로 된 타이택이 부착되어 있었다. 구입한지 얼마 안 된 듯 백금으로 된 받침 부분에 흠집 하나 없었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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