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사 년 동안의 수도원 생활에서 매 학년마다 한명 이상의 학생이 중퇴를 했다. 때로 누군가 죽음을 맞아 애도의 노래 속에땅에 묻히거나 친구들 손에 들려 고향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가끔은 누군가 제멋대로 수도원을 뛰쳐나가거나 큰 잘못을 저질러 퇴출되기도 했다. - P111

한스 기벤라트의 학년 역시 몇 명의 학생을 잃었다. 묘하게도 그들은 모두 헬라스 방 학생들이었다.  - P111

오후 첫 수업이 시작되는 2시가 되어서야 힌딩거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힌딩거는 어디 갔지요?" 지도교사가 물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누가 헬라스 방에 좀 가보세요."
하지만 그곳에도 힌딩거의 흔적은 없었다.
"수업에 좀 늦나 보군요. (후략)." - P112

4시에 지도교사가 노크도 없이 교실에 들어와서는 교장에게 귓속말을 했다.
"주목해주세요!"
교장의 한마디에 학생들은 가만히 앉아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러분의 친구 힌딩거 군은 연못에 빠진 것으로 보입니다."
교장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힌딩거 군을 찾는 일에 함께 나서주기 바랍니다. 마이어 교수님이 여러분을 인솔하실 건데 교수님 말씀을 분명히 따르고 절대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세요." - P113

신학생들은 겁먹은 새들처럼 모여들어 불안한 눈으로 시체를 내려다보고 파랗게 얼어 뻣뻣해진 손을 마주비볐다. 물에 빠져 죽은 친구가 앞서 실려가고 학생들은 그 뒤를 따라 눈 덮인 숲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문득 그들의 불안한영혼에 공포가 엄습했고 사슴이 포식자의 기척을 느낀 것처럼 잔인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 P113

어찌 되었든 예기치 않게 친구의 창백한 얼굴을 가까이 보자 한스는 왠지 모를 깊은 아픔을 느끼고 충동적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 P114

교장을 선두로 모든 교사들이 나와서 죽은 힌딩거를 맞이했다. 살아 있었다면 그런 예우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도망쳤을 힌딩거였다. 언제나 교사들은 살아 있는 학생을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른 눈으로 죽은 학생을 바라본다. 평소에는 그토록 무심하게 학생들에게 악을 행하면서도 이런 순간만큼은모든 생명과 젊음이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 P114

이튿날 힌딩거의 아버지가 왔다. 그는 아들이 누운 작은 방에서 몇 시간 동안 홀로앉아 있다가 교장과 차를 마신 뒤 그날 밤은 근처의 히르셴 여관에 묵었다.
드디어 장례식이 치러졌다. 관이 기숙사 건물에 놓였고 알고이 지방에서 온 재단사가 곁에 서서 모든 과정을 바라보았다. - P115

(전략). 그리고 울음을 참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커다랗고 고요한 공간의 한가운데에서 한겨울의 마른 나뭇가지처럼 서 있었다. 희망도 없이 다 잃고 다 내어줘 버린 듯한 그 모습에서 불행을 느낄 수 있었다. 목사는 재단사의 손을 잡고 곁을 지키다가 관이 이동하자 멋지게 구부러진 신사 모자를 쓰고 제일 앞에 서서 관을 따라 걸었다. - P116

장례식이 끝나고 교장이 힌딩거의 아버지와 함께 헬라스 방을 찾아왔다.
"여러분 중 누가 힌딩거 군과 가장 친했습니까?"
교장이 방에 있는 학생들에게 물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힌딩거의 아버지는 근심스럽소 비참한 표정으로 젊은 얼굴들을 쳐다보았다. - P116

. 하지만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이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길로 수도원을 떠나갔다. 하루 종일 기차를 타고 하얀 겨울 왕국을 달려 집에 도착하면 그는 부인에게 그녀의 사랑하는 아들이 어디에 묻혔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 P117

 한스 기벤라트는 목이나 발에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불운했던 그날 이후 더 진지해지고 더 나이 든것 같았다. 그는 어딘가 달라졌다. 소년은 청년이 되었고, 그의영혼은 근심과 두려움에 떨게 되었으나 아직 쉴 곳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에 떨어진 것 같았다.  - P117

 학생들은 하일너를 피해 다녔으며, 조교는 그에게 조롱 섞인 친절을 베풀었다. 진정한 친구였던 셰익스피어, 실러, 레나우만이 그를 둘러싼 굴욕적이고 강압적인 환경과는 다른 위대한 세계를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은둔자의 구슬픈 목소리로 채워졌던 ‘수도사의 노래‘는 점점 수도원과 교사들, 동급생들을 향한 씁쓸하고 증오 섞인 시 모음집으로 변했다. - P116

 한스는 어색하게 인사하고 의자를 침대 쪽으로 끌어다앉았다. 그리고 아픈 친구의 손을 잡았지만 하일너는 화를 내며 벽쪽으로 몸을 돌려버렸다. 그러나 한스는 물러나지 않고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며 옛 친구가 자신을 쳐다보도록 만들었다. 하일너가 짜증을 내며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뭔데?" - P118

하일너는 눈을 감았다. 한스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저기 말이야, 내가 잘못했어. 네가 다시 내 친구가 되고 싶을지는 모르겠지만 날 용서해줘야 해."
하일너는 아무 말 없이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속으로는 한없이 기쁜 얼굴로 친구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으나, 지금은 외롭고 씁쓸한 역할에 너무 익숙해져서 적어도 한동안은 그런 가면을 그대로 쓰고 있어야 했다. 한스는 집요하게 매달렸다. - P119

마침내 하일너가 한스의 손을 꼭 쥐며 눈을 떴다.
며칠 후 하일너도 침대에서 일어나 의무실을 벗어났다. 새롭게 다져진 우정은 수도원 안에서 대단한 관심거리가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속해 있다는 묘한 행복감과 말없이도 비밀스럽게 통하는 일체감으로 경이로운 몇 주를 보냈다.  - P119

 게다가 둘 모두 지난 시간 동안 서로몹시 그리워했던 터라 이들의 재결합은 대단한 경험이자 특별한 선물처럼 여겨졌다. 조숙한 두 소년은 설렘 가득한 수줍음과 함께 우정을 나누었고, 그 속에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ㅠ첫사랑의 달콤한 비밀을 미리 맛보았다. - P120

한스는 우정이 깊어지고 행복해질수록 학교와는 점점 더 멀어졌다. (중략). 그러는 동안 리비우스는 물론 호메로스마저도 중요성과 광채를 잃어버렸다. 교사들은 이제까지 흠 잡을 데 없는 학생이었던 기벤라트가 수상쩍은 하일너의 강한 영향 아래 문제아로 변해가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 P120

 교사라면 자신의 교실에 한 명의 천재보다 여러 명의 둔재가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교사의 의무는 특출한 인물을 키워내는 것이 아니라 라틴어와 수학을 잘하는 성실한 인간을 길러내는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 더 심하게 고통 받는가?  - P121

눈에 띄는 두 젊은이에게서 위험을 감지하자마자 교사들은 전통 깊은 학교의 원칙에 따라 애정 대신 곱절의 엄격함으로 단속하려 했다. 가장 성실하게 히브리어를 공부했던 한스를 자랑으로 여겼던 교장이 어설픈 시도로 녀석을 구원하려 했다. - P122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보자고 했어요. 괜찮다면 편하게 자네라고 불러도 될까?"
"물론입니다, 교장 선생님."
"최근에 자네 성적이 약간 떨어졌다는 걸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기벤라트 군. 적어도 히브리어에서 말일세. 현재까지 우리 학교에서는 어쩌면 자네가 히브리어를 가장 잘하는 학생일 걸세. 그런데 성적이 갑자기 떨어져 버리니 내 마음이 안 좋다네. 혹시 히브리어 공부에 흥미가 떨어진 건가?"
"그렇지 않습니다, 교장 선생님." - P123

"혹시 하루 공부 분량이 너무 많은가?"
"아닙니다. 전혀요."
"아니면 혹시 개인적으로 독서를 많이 하고 있나? 솔직히 말해보게!"
"아닙니다. 독서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교장 선생님."
"대체 이해를 할 수 없군, 이 젊은 친구야. 어딘가에 원인이있을 텐데 말이지. 앞으로는 성실히 노력하겠다고 약속해주겠나?"
한스는 권력자가 내민 오른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 P124

"그래야지. 이제 마음에 드는군. 다만 너무 지치지 않도록 하게나. 안 그러면 수레바퀴에 깔리고 말 테니."
교장은 한스의 손을 꼭 잡았다. 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 쪽으로 향했다. - P124

"왜냐하면 하일너는 제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친구를 외톨이로 만들 수 없습니다."
"음, 자네는 얼마든지 다른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잖은가? 하일너의 나쁜 영향을 자진해서 받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어. 그 결과는 뻔할 텐데 말이야. 대체 하일너 군의 어떤 점을 좋아하는 건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희는 서로를 아끼고 있고, 제가 그 친구를 버리는 건 비겁한 행동 같습니다." - P125

 한스는 마치 사랑에 빠진 청년처럼, 위대한 영웅처럼 행동하고 싶었다. 일상적인 것, 지루하고 사소한 공부 따위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매번 절망적인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공부의 멍에에 묶어야 했다. 하일너처럼 대충 공부하고 필요한 것만 빠르게 거의강제로 머릿속에 집어넣는 일을 한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 P126

그리스어로 된 신약성경을 읽을 때도 한스는 때때로 인물들의 생생한 현실감에 놀라고 거의 압도당할 지경이었다.
특히 마가복음 6장에는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배에서 내리는장면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eugus ényvovtes aitovQQalov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곧 예수를 알아보고 그리로달려오니)." 이 구절에서 한스도 인간 예수가 배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고 그가 예수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 P126

어느 순간 나타났다가 언제나 금세 또 사라져버리는 환상 때문에 한스는 자신에게 묘한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았다.
어떤 때는 검은 땅이 유리처럼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고 어떤때는 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이런 근사한 순간들은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가 슬퍼할 새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어딘가 낯설고 신성한 데가 있어서 감히 말을 붙이거나 머물러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는 순례자 혹은 친절한 손님처럼 말이다. - P127

 한스는 이런 하일너를 달래기보다는 오히려 그에게 동참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다른 학생들이 꺼리는 기괴한 섬처럼 고립되었다. 한스는 시간이 흐르자 이 상황도 그리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에게 은근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교장만 없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한때 교장의 총애를 받았던 학생은 이제 냉랭한 대접을 받았고 누구나 알 정도로 무시당했다. - P128

. 신체는 아직 성장기에 볼 수 있는 우락부락한 골격을 갖추지 못했지만, 모세의 책을 공부할 때는 적어도일시적이나마 매끈한 이마에 어른다운 진지함이 나타났다. 뺨이 통통한 아이는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한스 또한 많이변했다. 키나 마른 체격은 하일너와 비슷했지만 이제 하일너보다 더 나이 들어 보였다. - P128

한스는 학교 성적에 대한 불만이 늘어날수록 하일너의 영향아래 더 날카로워지고 학우들과 더 멀어졌다. 더 이상 모범생이나 미래의 수석 학생으로서 다른 학생들을 내려다볼 수 없었기 때문에 우쭐거림은 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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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 내가 불렀다.
"쉿, 나도 보여"
캣은 조심스럽게 가속기를 조준했고, 가속기는 다시 한번 윙윙거리는 소리를 낸 후 발사되었다. 크리퍼의 앞마디가 산산조각이 나 공중에 흩어졌고 나머지 몸통은 눈 속으로 떨어졌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 확실히 이 무기가 먹히네." - P218

오큘러로 보이는 영상에서는 마른 형상 중 하나가 장난감같은 소총을 떨어뜨리고 뒤쪽으로 휘청거리며 걷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풍선 같은 머리를 이쪽으로 돌려 나를 뚫어져라보고 있었다. 내가 휘청거리며 넘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시점은바뀌지 않았고, 그동안 총을 떨어뜨린 마른 사람은 픽셀화된 눈 속으로 사라졌다. 다른 한 명이 무기를 들어 올려 발사하고또 발사해 그와 나 사이에 연신 폭발이 발생했다. - P219

낯선 목소리였다. 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우리 목소리가 들릴까요?"
캣의 목소리다. - P220

"죄송해요. 저한테 문제가 있나요?" 내가 말했다.
"모르지. 신체적 외상은 없고 지금은 뇌파도 정상이야 첸이야기에 따르면 밖에서 이유 없이 밀가루 포대 자루처럼 쓰러졌다고 하던데. 의학적인 관점에서 좋은 신호는 아니지."  - P220

나는 땅에 발을 디디고 일어섰다. 잠깐 어지러웠지만, 곧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버크가 나섰다. "한동안 여기 있어야 해. 이런 신경과 관련된 증상은 가볍게 여기면 안 돼 뇌 사진을 찍어 보고 싶은데 종양이 생겼을 수도 있네." - P222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요. 기억 안 나세요?
종양은 자라는 데 시간이 걸리고, 저는 아직 살아 있은 지하루 반밖에 안 됐잖아요."
버크는 얼굴을 찌푸렸다. 기억이 난 듯했다.
"좋아. 종양은 아니라고 하자고. 하지만 한 가지는 꼭 확인해야겠어." - P222

버크는 뒤돌아 캣을 보며 말했다. "지난 한 시간 이내에 오큘러에 전력이 과하게 흐른 적이 있는 것 같아 검사를 받아봐야 해. 뇌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거야. 오큘러에 이상이 생기는 건 위험 신호야."
"네, 검사해 주세요."
내 말에 버크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인간 두뇌 전문이야. 자네는 의용공학자에게 검사를 받아야지." - P223

거짓말이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이미 머릿속에서 결론을내렸다. 버크가 이야기한 것처럼 오큘러는 시신경과 연결되어있고, 뇌의 10여 개 영역과도 연관이 있다. 한 개를 빼내서 새것으로 갈아 끼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큘러에 결함이 발생해 장치를 교체하려면 매우 오랫동안 까다로운 현미경 수술을 받아야 한다. - P224

캣과 헤어진 뒤 카페테리아에 들러 사이클러 페이스트를 한잔 더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다.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방에 도착하니 에잇이 무릎에 태블릿을 올린 채 침대에 앉아 있었다. - P226

 "그래. 그럼 네가 돌아왔으니까 배 좀 채우러 가 봐야겠다.
배급 얼마나 남았어?"
"잘 모르겠어. 아마 900킬로칼로리 정도?"
"좋아, 내가 다 먹는다."
나는 안 된다고 하려고 했지만, 에잇은 이미 문밖을 나서고있었다.
"말리지 마. 난 이제 막 재생 탱크에서 나왔으니까."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 P226

에잇이 나와 같은 주제에 관심을 둔다는 사실에 5초 동안 놀랐다가, 그나 나나 다르지 않으니, 그러지 않는 게 오히려 더 놀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와 에잇 사이에는 지난 6주라는 차이가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6주가 어마어마한 차이를 만든 것 같았다. - P227

이 질문을 곱씹으며 상황이 나빠질 경우 나는 어떻게 될지생각하고 있는데 오큘러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RedHawk]: 미키 너 오늘 힘들었다며 난 16:00에 임무 교대야. 같이 저녁 할래? 내가 살게.

당연히 답은 완전 좋아였지만 대체 무슨 수로 네가 저녁을 대접할 수 있지? 하는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어떻게 대답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메시지 하나가 전송되었다. - P228

[Mickey8]: 잘 들어. 나는 지난 24시간 동안 두 번이나 죽을고비를 넘겼고, 너는 두 번 다 낮잠을 자고 있었어. 계속 이럴 거면사이클러에서 20분 뒤에 만나 이번에는 제대로 한번 해보자고.
(중략)
[Mickey8]: 좋아, 알겠어. 맛있는 저녁 많이 잡수세요, 덩치만 큰아가씨. 네가 얼른 크리퍼한테 먹혔으면 좋겠다. - P229

14장

나는 주문 카운터 쪽으로 돌아섰다. "한도를 정해 줘. 나 정말 여기 있는 음식을 다 먹을 수도 있어."
베르토는 주문 카운터를 내려다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 1000킬로칼로리 아래로, 됐지?" - P231

베르토는 아직도 거짓말을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을것 같았다. 나는 감자, 귀뚜라미 튀김 그리고 작은 볼에 담긴 양상추와 토마토 샐러드를 주문했다. 그래도 700킬로칼로리밖에 되지 않아서 페이스트를 한 컵 가득 담아 남은 칼로리를 채웠다. 많아서 나쁠 건 없지. 내가 주문한 음식이 배식에서 나와서 보니 베르토도 음식을 주문한 모양이었다.
베르토는 토끼 고기를 주문했다.
- P231

"(전략). 그러니까 플리터를 90도로 꺾으면 날개둘 중 한쪽 끝은 여유 공간이 50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거야.
회전을 시작하는 타이밍이 10분의 1초 이내로 정확해야 해."
"그래, 미친 소리 같아. 그래서?" 내가 재촉했다.
"다른 사람들도 다 미쳤다고 했어. 그래서 내가 내기를 걸었지."
베르토는 이야기를 멈추고 입안 가득 음식을 채웠다. (중략)
"그럼 해냈지. 3000킬로칼로리를 모았다. 이 말씀이야. 훌륭하지?" - P233

"별일이 아니야? 그깟 몇 킬로칼로리에 목숨을 걸었잖아. 나를 위해서는 절대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놈이."
베르토는 맥이 탁 풀린 표정이었다. 그는 나를 빤히 보았고나도 그를 뚫어져라 보았다.
내가 거기까지 안다는 사실을 알려서는 안 되는데……………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 P234

"미키?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야?" 베르토가 물었다.
나는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굳게 다물었다.
"넌 막 재생 탱크에서 나왔잖아. 미키, 내 말이 틀려?"
나는 시선을 돌렸다. - P234

 베르토가 토끼 뒷다리를 한 입 더 베어 무는 모습을 보며, 나는 이렇게 덧붙이는 상상을 한다. 너한테 이틀치 배급을 주겠다고 했으면 돌아왔으려나? 마침내 입을 열고 상상한 대로 이야기하려는데, 우리를 보고 있던 경비대원 무리중 하나가 테이블에서 일어나 우리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 P235

대런은 베르토의 한두 걸음 뒤에 서서 가슴팍 앞으로 팔짱을 끼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말했다.
"저기, 신사 여러분, 오늘 저녁 배급은 맛이 괜찮으신가?"
베르토는 뒤를 돌아보며 토끼 뒷다리를 들어 일부러 천천히한 입을 뜯었다. - P235

대런의 얼굴이 움찔거리더니 점점 일그러졌다. "고메즈 너는 아주 개자식이야. 네놈도, 딱 한 대 남은 멀쩡한 플리터도 오늘 아침에 박살이 날 뻔했어."
(중략)
"플리터는 내가 없으면 어차피 쓸 일도 없잖아. 나샤는 어차피 중력 그리드 없는 건 조종하지 않으니까." (중략). "그렇게 개척지 자산이 신경이 쓰이면 네 저녁 식사를 사이클러에 넣지 그래? (후략)." - P236

"넌 빠져, 고메즈, 방금 나는 저녁 식사로 빌어먹을 사이클러 페이스트를 먹었고, 기분이 별로라……………"
대런은 거기까지밖에 말하지 못했다. 베르토의 뒤통수를 밀치는 최악의 수를 두었기 때문이다. 대런은 덩치가 좋은 경비대원이었다. 그가 그렇게 나오면 보통 사람들은 알아서 그를 피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베르토는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한 사람을 그냥 보낼 친구가 아니었다. - P237

베르토가 포그볼을 잘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길쭉하고 흐느적거리는 외모와 달리 그는 초인적으로 빨랐다. - P237

"설명해 보게."
나는 베르토를 흘긋 보았다. 그의 시선은 마샬의 머리 뒤쪽 어느 한 점에 고정되어 있었다. 5초쯤 어색한 정적이 흐른 뒤내가 말했다.
"오해가 있었습니다. 사령관님." - P238

"흠, 드레이크가 자네를 모욕했다고? 자네는 털끝하나 다친것 같지 않은데 드레이크는 광대뼈에 금이 가서 의료국에 누워 있지. 그건 어떻게 설명할 텐가?"
베르토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저를 모욕했다고 했지, 이겼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마샬의 얼굴에 더 깊은 골이 파였다. - P239

"좋아. 이 일로 자네들을 어떻게 할 수 있으면 나도 좋겠네.
특히 지난 24시간 동안 자네들이 내 사무실에 두 번이나 들락거렸다는 점을 생각하면 말이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감시 카메라에 찍힌 영상이 자네들의 설명과 대부분 일치하더군. 드레이크가 분명 제멋대로 접근했고, 본인이 나가떨어지기 전에 고메즈를 먼저 건드렸어. 솔직히 경비대원들에게 조금 실망했네." - P240

마샬이 책상에 있는 태블릿을 두드리자 오큘러에 영상 클립이 나타났다. 나는 눈을 깜빡여 동영상을 재생했다. 멀리서 찍어 화질이 나빴지만 눈 덮인 능선 꼭대기에 있는 바위를 향해 베르토의 플리터가 돌진하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 P241

‘(전략). 자, 이제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 측면에서 우리가 위태로운 상황에 있다난 사실을 알면서도 겉멋든 어린애들이나 할 법한 장난에 자네 목숨과 더 중요하게는대체할 수 없는 금속 및 전자 기기 2000킬로그램을 위험에 빠뜨린 이유를 설명해 주겠나?"
(중략)
마샬이 마침내 침묵을 깼다. "좋네. 자네가 도박꾼인 것은잘 알겠어. 자네가 지난 이틀 동안 어긴 규칙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어차피 상관도 안 할 테니."  - P241

 "반스, 추천할 방법이라도 있나?"
나는 베르토를 흘긋 본 다음 마샬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제가 말입니까? 없습니다. 사령관님."
마샬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고 의자에 기댔다. "몇 안 되는 선택지 가운데 제일 나은 방법은 일을 늘리고 배급을 줄이는것이겠지. (후략)." - P242

 이윽고 마샬의 머리 뒤쪽 어느 한 점에 시선을 고정한 채겨우 입을 뗐다. "네, 사령관님, 감사합니다."
"그렇지. 가 보게." 우리가 일어서서 방을 나서려는 찰나 마샬이 큰 소리로 덧붙였다. "아, 반스? 이 사건에 어떻게 끼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자네도 연관이 있는 게 틀림없겠지. 자네 배급도 5퍼센트 삭감하는 것으로 하겠네."
나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네? 안 됩니다!"
"10퍼센트." 내가 다시 반항할 기미를 보이자 마샬이 덧붙였다. "15퍼센트로 하겠나?"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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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경찰

식사를 권해도 고개를 저으며 지금은 그냥 자고 싶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실제로 벌써 며칠째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충혈된 눈 주위가 부석부석했다. 아사이에게는 그런 눈도 살인을 범한 한 가지 증거로 보였다. 자신을 배신한 여자를 살해한 뒤, 양심의 가책과 경찰이 언제 체포하러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지난 며칠 동안 밤의 어둠이 몹시 두려웠을 것이다. - P86

하지만 아무리 딱해도 경찰로서는 한시바삐 범인의 자백을 받아내야 한다. 위협도 해보고 어르고 달래도 봤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 - P86

결국 사사하라에게서 사건에 관한 진술은 한 마디도 듣지못한 채 12월 2일 저녁을 맞이했다. 체포한 지 만 하루 하고도 세시간이 지났다.
그러는 동안에도 형사 여러 명이 사사하라의 범행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찾아 도쿄 전역을 뛰어다녔다. 하지만 수확이라고 할 만한 것은 나오지 않았다. - P87

"14일 밤에... 레이코의 집에 가기는 갔습니다."
하지만 그 집에 갔다는 것을 인정했을 뿐, 살해 사실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어쩌면 13일 밤이었는지도 모른다, 11월 초부터 병원에 휴가를 신청했기 때문에 날짜 감각이 없어졌다. 라는 식의 애매한 얘기였다. - P88

찾아간 시각을 물었을 때는 아예 경찰을 얕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대답을 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아요. 분명한 것은 밤이라는 것뿐입니다. 어스름한 저녁때였던 것 같기도 하고, 자정이 넘은 한밤중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는 그뿐, 다시 입을 딱 다물어버렸다. - P88

아사이는 결국 포기하고 취조실을 나왔다. 그리고 오 분뒤, 4시 23분에 전화벨이 울렸다.
(중략)
"삼십 분 전에 월드섬유회사의 젊은 사장이 세이조 자택에서 엽총으로 자살을 했어. 사와모리 에이지로라는 사업가야. (중략). 하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더라고. 유서 마지막 부분에 자신이 모델 미오리 레이코를 살해했다고 적어놨더라니까. 사사하라라고 했던가, 그 의사를 어제 체포했지? 근데 이쪽 유서를 보니 아무래도 범인은 사사하라가 아닌 것 같아..." - P89

사와모리 에이지로에 대해서는 아사이도 약간의 지식이있었다. 창업자인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37세의 젊은 나이로사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굴지의 대기업이라는 건 허울뿐이고 실상은 경영 부진으로 여차하면 망할 거라는 소문이 자자하던 월드섬유를 단 이 년 만에 다시 일으켜 세운 수완 좋은 사업가라고 했다. - P90

넸다.
"오늘 아침에 이상한 전화가 왔었다고 합니다."
세이조 경찰서의 중년 형사가 아사이에게 그렇게 말을 건
"아침 8시경이었대요. 아침 식사 때는 평소와 다름없었는데 그 전화를 받은 뒤에 갑자기 얼굴이 새파래져서 부인이 회사에 무슨 일 있느냐고 물었답니다. (후략)." - P91

"아침에 온 전화라는 건 뭐지요?"
"그게..." 미간을 좁히며 형사는 말끝을 흐렸다. "통화 내용도 유서에 적혀 있으니까 직접 보시죠."
중년 형사가 아사이를 창가 책상 앞으로 데려갔다. - P92

 봉투에 적힌 ‘유서‘라는 글자만 붓글씨고 본문은 펜으로 쓴 것이었다. 획 끝이 심하게 삐쳐 올라간 글씨체였다. 오후 한나절 내내 썼는지 총 삼십여 장이나 되었다. 그중스무 장쯤까지 지난 이 년 동안 회사를 버텨온 것은 자신의 허세였을 뿐, 그 이면에서 회사가 어떻게 부진의 늪에 빠졌는지, 경위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 P92

그리고 ‘실은 여기까지 쓰고 펜을 내려놓을 생각이었으나 죽음을 앞두고 역시 모든 것을 참회하고자 한다‘라는 말과 함께 느닷없이 ‘미오리 레이코는 내가 살해했다‘라는 문장이이어졌다. - P93

돈 봉투와 보석과 맨션을 선물하고 그만큼 아름다워지는 레이코를 보면서 실제로 큰 사업에 성공한 것처럼뿌듯한 기쁨을 느꼈다. 아니, 앞서 말했던 대로 회사 경영이 악화되어 막대한 부채를 떠안게 된 뒤에도 나는 그녀에게 계속 돈을 투자했다. 물론 모든 것은 레이코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 P93

빙산 위에서 타오르는 불꽃 나비의 이미지는 내가 직접 제안한 아이디어였다. 그 광고가 레이코를 일개 모델이 아니라 인기 스타의 자리로 올려줬지만, 실은 창백한 얼음도 빨간 불꽃도 레이코라는 여자 그 자체였다. - P94

"당신이란 인간, 너무 싫어. 처음 봤을 때부터 싫었어.",
(중략)
"알고 있어." 나는 대꾸했다. "내가 네 몸을 돈을 주고 샀지.
좋아, 오늘 밤은 얼마나 주면 되겠니?"
내가 수표책을 꺼내자 레이코는 냉랭하게 말했다.
"은행에 갚을 돈은 없어도 내게 줄 돈은 있는 모양이지?"
실제로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회사 사정이나 빚에 대해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는데도. - P95

"왜 나를 파명시키려는 건데?"
(중략)
"왜냐고? 당신이 돈으로 나를 사려 들었기 때문이야. 1억엔이라고? 당신은 내가 아니라 여자라는 상품을 샀을 뿐이야. 당신과 잠자리를 할 때마다 나는 인간이 아니었어.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내 몸은 더 이상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게 됐어."
"너와 잠자리를 한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텐데?"
"하지만 당신이 처음이었어." - P96

레이코는 협박의 말을 내뱉을 때마다 항상 웃었지만 단 한번도 농담이었던 적은 없었다. 돈을 요구한 적도 없었다. 그녀가원한 것은 단지 나의 파멸뿐이었다. - P97

노예를 일격에 죽여 없애기가 아까워서 물과 불로 괴롭히며 공포에 찬 표정을 실컷 즐기다가 그것도싫증이 난 참에 죽여버리라고 명령하는 고대 제국의 잔인한 왕너였다. 끈질기게 나를 괴롭힌 끝에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수화기를 들어 세 개의 숫자를 돌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 P97

사진을 빼앗아 찢어버리는 건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래봤자 소용없었다. 나는 이름도 모르는 어느 대학생에게 필름을 따로 맡겨둔 것이다.
그 무렵, 나는 회사 일로 이미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 P98

"대체 왜 그래? 내가 지난 이 년 동안 돈을 얼마나 많이 쥐여줬는데?" 한 번은 나도 모르게 소리치며 대든 적이 있었다. "그 진주 목걸이도 내가 준 거야!"
분노한 고함을 침묵의 미소로 듣고 있던 레이코는 목에 걸린 목걸이를 홱 잡아 뜯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흩어진 진주를긁어모았다. 돌려줄게, 라면서 진주를 한 알 한 알 내 입에 쑤셔넣었다.  - P98

"이러지 마, 그 사진을 경찰에 넘기지 않아도 우리 회사는어차피 이제 곧 망할 거라고."
가을 중반쯤에는 그렇게 애걸한 적이 있었다.
"어머, 그럼 그 전에 경찰에 보내야겠네." 레이코는 웃는 얼굴 그대로 말을 이어갔다. "나는 내 손으로 당신을 파멸시키고싶거든." - P99

"파리로 떠나기 전에 한 가지 처리해야겠어."
이번에야말로 그녀가 실행에 옮길 작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11월 들어 회사 자금 사정은 마침내 밑바닥까지 떨어졌지만 그래도 기적처럼 어느 은행과 대출 건이 성사되어가는 참이었다.  - P99

.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 레이코에게 접근한 것이 내 감을 어그러뜨려 저 높은 곳까지 치고 올라가던 성공의 계단에서 발을 헛디디게 했다. 지나치게 완벽한 아름다움은 반드시 희생자를 낳게 마련이다. 내가 그 희생자였다. - P100

약혼을 발표할 무렵에 레이코와 주고받은 얘기가 있었다.
"모범생 중년 남자를 갖고 노는 거, 너무 재미있어."
"네가 얼마나 무서운 여자인지 그 의사 선생에게 다 얘기해줄까?"
"얼마든지 일러바치세요. 어차피 이번 여름에는 걷어찰 생각이니까." - P100

사사하라가 조금 전에 자신을 죽이러 왔었다고 레이코는마치 재미난 얘기처럼 말했다. 의사 선생은 약봉지를 뜯기도 전에 레이코에게 들키는 바람에 그대로 테이블에 버려둔 채 뛰쳐나갔다고 했다. 게다가 레이코는 제 입으로, 지금 자신이 살해된다면 경찰은 틀림없이 그 의사 선생을 체포해갈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 P101

상대는 놀랄 만큼 좋은 조건을 준비해놓고 이제 나의 동의만 기다리는 단계였다. 도장을 찍는 대신, 독이 든 술잔과 레이코가 마시던 술잔을 바꿔놓기만 하면 된다. 레이코는 술에 잔뜩취해서 유리잔의 미세한 차이 따위, 알아볼 리 없었다. 그래도 레이코가 자신의 잔에 얼음을 넣어달라고 말했을 때, 최대한 독약이든 술잔 속 얼음과 비슷한 크기의 얼음을 골라 넣었다. - P101

레이코가 담요를 찾으러 침실에 들어갔을 때, 나는 지문이남지 않도록 손수건을 이용해 두 개의 술잔을 잽싸게 바꿨다. 다시 거실로 나온 레이코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독약이 든 잔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삼 분이 흘러갔다.
"난 자야겠어. 당신은 그만 가봐."
레이코는 그렇게 말하고 비틀비틀 일어나 침실 문 앞에서그 술을 마셨다.  - P102

유서는 그다음에, 살인을 저지른 며칠 뒤에 회사 부도 소문이 퍼져 결국 은행 대출은 받지 못한 채 끝이 났으니 레이코를 살해한 게 아무 쓸모 없게 되었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끔찍한 협박에 시달리면서도 여전히 진심으로 레이코를 사랑했기 때문에내 손으로 매장한 것에 만족감마저 느낀다, 라고 이어졌다.  - P103

(전략), 마지막 부분에 전화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오늘 아침 8시에 남자 목소리로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그날 밤 우연히 미오리 레이코의 맨션 뒤쪽에 있었어. 당신이 얼굴빛이 홱 변한 채 6층에서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것을 목격했다고. 당신 얼굴은 잡지 등에서 여러 번 봐서 잘 알지. (후략)." - P103

나와 레이코는 지난 삼 년 동안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둘의 관계를 아내에게도 언론에도 들키지 않고 지내왔는데 레이코를 살해하고 드디어 모든 것을 청산한 마지막 순간에 실수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전화가 끊긴 뒤에도 나는 수화기를 움켜쥔 채 남자가 왜 경찰에 연락하지 않고 나한테 전화했는지 생각해보았다. - P104

아침에 걸려온 전화는 유서에 나온 대로 협박의 의도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 사와모리의 자살이 보도되면 더 이상 전화할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내일 그자에게서 다시 전화가 온다면우리 쪽에도 알려달라고 세이조 경찰서 형사에게 부탁해두고 아사이는 그 집을 나왔다.  - P105

"유서에 사사하라를 딱하게 생각했다고 적혀 있었지요?"
조수석에서 오카베가 말을 건넸다. "회사가 부도에 몰리자 자살을 결심한 사와모리가 자신의 죽음으로 사사하라를 구해주려고 그런 엉터리 고백을 했을 수도 있어요."
"그런 거라면 오늘 아침에 걸려온 협박 전화는 뭐지? 그런 전화가 왔다는 건 부인이 분명하게 증언했어." - P105

"단순한 장난 전화일 수도 있잖아요. 사와모리와 레이코의관계를 알고 있던 누군가가.."
"유서에 아무에게도 둘의 관계를 들키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어." - P106

"근데 그 협박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자도 좀 이상하잖아요? 사건 날 밤에 왜 하필 그 비상계단 뒤쪽에 있었을까요?"
오카베의 지나치게 카랑한 목소리에 왠지 짜증이 나서아사이는 대답 없이 차가 경찰서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꾹 다물었다. - P106

"하지만 청산가리는 자기가 먹고 죽을 작정으로 가져갔고,
결국 약봉지도 다 뜯지 못한 채 그 집에서 쫓겨났다고 주장하네요. 그냥 둘러대는 소리일까요?"
사와모리의 유서에 대해 아직 알지 못하는 오니시가 멍하니 물었다. (중략). 하지만 그가 약봉지를 뜯지도 못하고 레이코의 집을 뛰쳐나왔고, 따라서 레이코를 살해하지 않았다는 건 이제 틀림없는 것 같았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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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퍼런스, 문헌이라는 단어이다. 하지만 둘의 느낌은 다른데, 뭐가 다를까.



5. 레퍼런스: 새로움을 망드는 재배치, 재맥락화

‘ 집에 돌아와 작가를 조사하던 중 런던에서 열리는 《The Fear of NOW》 전시 영상을 보았다. 인터뷰 끝부분에 게니가 말했다.

"You can steal it."

아드리안 게니는 전통적 회화 기법과 주요 예술가의 작품을 창작 모티브로 자주 활용해온 작가다. 일례로 2016년 작<Degenerate Art>는 1920년대에 나치에 의해 ‘퇴폐 미술‘로 낙인찍혔던 화가들에게 바치는 헌사로, 빈센트 반 고흐의 1889년 자화상을 모티브로 한다. - P112

게니의 작업을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든다.

"레퍼런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결국은 ‘자기 것‘을 만들어내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나는 이 질문이 에디토리얼 씽킹의 핵심 중 하나라고 믿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재료는 더이상 원천적이지 않다. 머릿속에 떠오른 기획이 새로운 것 같아도 조금만 검색해보면 이미 비슷한 결과물이 나와 있다. - P114

얼마 전, 독창성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흥미로운 논문 <영화의 콘텐츠 차용 현황과 독창성의 위기>를 읽었다. 2천 3백여 편의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분석해 3만 4천여 개의 스토리모티브로 DB를 구축해보니 각 영화가 얼마나 닮아 있는지 지표화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 P114

이 정도면 표절 아니냐고?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어떤 예술 분야든 기존에 나온 창작물을 모티브 단위로 DB화하면 분명히 유사성을 지닌 작품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정말로. 없는 과잉생산 시대에는 독창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재배치를 통해 차이를 만들어내는 능력‘으로 봐야 한다. - P115

물론 표절이 흔한 시대인 것도 맞다. 레퍼런스를 똑같이 베끼면 표절이지만, 레퍼런스를 소화해서 자기화하면 창작이다. 표절과 창작을 가르는 기준이 모호하기 짝이 없는 ‘자기화 여부‘라니 말장난처럼 느껴질 수 있다.  - P115

앞서 소개한 아드리안 게니 이야기를 좀더 이어가보자.

(중략)

이미 존재하는 고전 예술 작품에서 ‘제스처‘에 주목하겠다고 결정했고, 이 결정이 ‘회화는 당대의 몸짓을 기록하는 장이라는 작가만의 정의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몸짓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스마트폰 액정과 노트북, TV 화면 등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인물을 그려야 하는 이유가 풍성해지고 설득력이 생겼다. - P119

아드리안 게니에게 배울 수 있는 두 번째 요령은 ‘다수의 레퍼런스 조합하기‘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드리안 게니의 레퍼런스 목록은 아주 길다. 레퍼런스가 하나일 때는 표절이 되기 쉽지만, 여러 레퍼런스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나 아이디어를 찾으면 고유한 탐색이 된다. - P121

생각보다 레퍼런스를 찾으면서 ‘내가 뭔가 하고 있다‘는 기분에 속는 사람이 많다. 정보를 자기화하려면 외부 자극을 차단하고 홀로 소화하는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 P121

아드리안 게니의 말처럼 우리가 훔칠 수 있는 재료는 아주많다. 그렇다고 쉬우리라 착각하진 말자. 배치의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일은 재료의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일만큼이나 고되고 어렵다. 레퍼런스 덕분에 작업이 술술 풀린다면 당신의 훔치기가진짜 훔치기가 되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 P124

1. 재료수집: 가능성을 품은 재료 찾고 모으기

사전에는 훌륭한 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오만 가지 단어들이 다실려 있지만, 그 안에는 단 한 편의 시도 들어 있지 않다.
브루노 무나리, 『판타지아』

편집은 일정량의 재료가 모인 이후에 발생하는 요구다. 식재료를 손에 넣어야 조리를 시작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원재료가 신선하고 고품질일수록 음식 맛이 좋아지는 것처럼 좋은 재료를 확보하면 편집 과정도 수월해지고 결과물도 좋아진다.  - P41

어떤 수집은 그 자체로 창조적 의미가 되는 반면 어떤 수집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단어를 많이 모아놓은 사전이 곧 시가 되지 않는 것처럼, 우표 수집가의 아카이브를 예술 작품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무언가를 모은다고 곧장 창조적 의미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 P41

핀란드 현대미술가 야니 레이노넨 Jani Leinonen은 자본주의를 통쾌하게 비꼬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다. 2015년에 헬싱키 키아스마 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개인전 《불복종 학교 School of Disobedience》에서 그의 주요 작품을 만났는데, 일상 속 사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 P42

야니 레이노넨은 6년 동안 유럽 여러 도시를 돌며 동냥하는 노숙인들로부터 손팻말을 구입하기도 했다. 제각각의 크기와 손글씨로 만들어진 손팻말을 황금 액자로 둘러 미술관 벽에 걸었다. (미술의 역사에서 황금 액자가 그간 무엇을 감싸왔는지 떠올려보자.) - P45

한번 상상해볼까, (중략) 코로나로 사망한 환자들의 부고를 모두 모아본다면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 P45

실제로 《뉴욕타임스》는 2020년 5월에 자국의 코로나 사망자가 10만 명에 가까워진 현실을 보도하기 위해 왼쪽 페이지와 같은 1면을 내놓았다. - P47

중국 현대미술가 아이 웨이웨이는 2015년부터 유럽에 머물면서 난민 문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꾸준히 촉구해왔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국경에 위치했다 철거된 이도메니 난민 캠프에서 버려진 옷가지와 신발을 수집해 베를린 자신의 스튜디오로 가져왔고, 깨끗하게 세탁하고 분류해서 행어에 걸었다. 나는 이 작품 앞에서 난민이 얼굴 없는 집단이 아니라 실재하는 몸을 가진 개별존재라는 사실을 체험했다. - P48

박혜수 작가는 2013년 6월부터 8월까지 헤어진 연인과 관련한 물품과 사연을 기증 혹은 대여받아 <실연수집>이라는 아카이브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옛사랑이 선물한 종이학 1,000마리를 6천 원에 판매한다는 중고 거래 광고를 발견하게 되었다.
사랑이 끝나지 않았다면 결코 거래되지 않을 사물. 여기서 영감을 받은 작가는 황금색 종이로 학 1,000마리를 접은 뒤 모두 풀어 하나의 커다란 황금 종이로 이어 붙였다. - P51

의미로 거듭날 가능성을 품고 있는 재료를 알아보는 힘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야, 저런 게 예술이면 나도 하겠다"라고 비아냥거려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사소한 재료에 숨어 있던 메시지를 어떻게 발견했을까? 어떤 맥락으로 의미를 빚어갔을까?"라고 질문하는 편이 에디터적 사고력을 키우는 데에 보탬이 된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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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진상/심판은 누가?

병실에 나 혼자 있었다. 시트를 걷고 내 몸과 대면했다. 얇은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옆구리를 만져보자 붕대와 거즈의 감촉이 느껴졌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상처가 욱신거려서 가슴으로숨을 쉬었다. - P315

"저기." 간호사 등에 대고 말했다. "제 아내와 아들은요?"
"부인은 밤새 계시다가 방금 전 갈아입을 옷을 챙기러 집에 돌아가셨어요. 아드님도 함께 있었을 거예요."
"그렇군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즈미와 얼굴을 마주하기까지 아직 시간이 있다. 서로 마음의 준비를 할 짬이 있다는뜻이다. - P316

"화농만 안 생기면 내일 오후에라도 가능합니다. 이후로는 통원 치료만 받으셔도 됩니다." 볼펜을 가슴주머니에 찔러넣으며 의사는 문 쪽으로 힐끔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지금 밖에 사람들이 와 있는데 만날 수 있겠습니까?" - P316

구노가 두 손을 바지 옆선에 붙이고 깊이 머리를 숙였다.
"같이 있으면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해 정말 면목없습니다. 순식간에 일이 벌어져 대응이 늦고 말았습니다.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뻔했어요. 중상이 아니라 정말 다행입니다. 다시 사과드립니다." - P317

"미치코 씨 남편은요?" 화제를 바꿨다. "자백을 했나요?"
내가 묻자 둘은 서로를 쳐다봤다. 노리즈키가 고개를 돌려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망설이는 표정이 살짝 떠올랐다.
"실은 그 일로 야마쿠라 씨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죠?"
노리즈키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리더니 문밖을 향해 불렀다. - P318

"도미사와 씨와 짜고 연극을 했습니다." 노리즈키가 말했다.
"도미사와 씨는 시게루와 미우라 야스시를 죽인 범인이 아닙니다. 어젯밤에 제가 한 말은 아무 근거도 없는 거짓말이었습니다." - P319

"물론 다카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흥분한 미치코 씨가 들이대는 감정의 비수를 야마쿠라 씨에게서 돌려야만했으니까요. 그래서 사채를 빌렸다느니 삼천만 엔의 보험금을 받는다느니 하는 말을 했어요. 모두 그 자리에서 떠오르는 대로한 말이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기는커녕 도미사와 씨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갖고 있죠. 무슨 수를 쓰더라도 시게루를 죽이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미우라도 마찬가지고요. 그때 도미사와 씨가 범행을 인정한 건 사전에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떤 엉뚱한 소리를 하더라도 부인 앞에서는 무조건 인정해달라고 부탁드렸죠." - P319

도미사와 고이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마 그렇겠죠." 담담한 어조였다. "하지만 야마쿠라 씨, 이제 와서 야마쿠라 씨에게 미치코에 관해 이렇다 저렇다 들을 입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에 대한 질투와 분노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 P320

불편한 침묵을 깨고 노리즈키가 말했다.
"도미사와 씨, 실은 전부터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시게루의 친아버지가 누군지 말입니다."
"무슨 소리죠?" 도미사와 고이치가 단호하게 말했다. "시게루는 제 아들입니다."
어디까지가 진심일까. 헤아릴 수 없는 어조였다. 그러고는 획돌아서서 인사도 없이 병실에서 나가버렸다. - P321

"그나저나 진범의 윤곽은 잡혔습니까?" 거북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물어봤다.
역효과였다. 구노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처음부터 시게루를 노렸다는 점에 착안해서 도미사와 가족 주변을 조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실마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이를 죽인 동기를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거의 두 손든 상황입니다." - P321

"나카노 뉴하임의 밀실은 어떻게 됐죠? 해결의 실마리가 잡혔나요?"
노리즈키의 얼굴에 생기가 되살아났다.
"아, 그것과 관련해서는 생각이 정리됐습니다. 야마쿠라 씨에게는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그곳은 사전적인 의미의 밀실이 아니었을 겁니다." - P322

"하지만 범인이 다른 이유로 여벌 열쇠를 갖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요? 우연히 제가 기절한 걸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이용할 생각을 떠올렸다면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노리즈키가 딱 잘라 말했다. (중략)
"(전략). 즉 범인이 야마쿠라 씨를 방치하고 사라졌다는 사실은 그 밀실이 범인의 의도로 구성된 것이 아님을 시사합니다.
범인이 아니라면 누굴까요? 물론 야마쿠라 씨는 아니죠. 그렇다면 남는 인물은 단 한 사람, 즉 피해자 자신입니다." - P323

"다잉 메시지. 죽는 순간에 남기는 메시지를 말합니다. 요컨대 피해자가 살인범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실마리를 남긴 결과가 그 밀실이 아닌가 합니다."
"살인범의 이름?"
"혹은 열쇠나 자물쇠와 관계가 있는 인물일지도 모르죠. 현재까지 떠올릴 수 있는 건 그 정도입니다." - P324

내가 먼저 꺼내야 한다. 아내를 똑바로 바라보며 용기내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다시는 안 올 줄 알았어."
"으응." 가즈미가 어물쩍 대답한다.
"어제 한 얘기는 모두 사실이야." 침대 위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 P329

나는 고개를 들었다. 가즈미는 얼굴을 돌리더니 손수건으로 눈가를 눌렀다. 그러고는 내 눈을 보지 않고 말했다.
"아버지가 당신에게 할 말씀이 있대."
"지금 와 계셔?"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인다.
"만날 거야? 몸이 불편하면 나중에 봐도 돼."
"만날게." - P327

"그렇게 시간 걸릴 이야기는 아니네."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두 번 접은 하얀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를 펼쳐봤다. 이혼 서류였다. 가즈미는 이미 서류에 필요사항을 적고 날인까지 해놓은 상태였다. 물론 본인의 필적이었다.
"이게 뭡니까?"
"여기 오면서 쓰게 했네. 서명하고, 인감을 주게 빠를수록 좋아."
나는 자세를 고쳐앉고 장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 P328

2

혼자 소지품을 정리하고 로비 창구에서 퇴원 수속을 마쳤다. 그때 장인이 치료비와 이틀치 입원비를 냈다는 걸알았다. 위자료 대신인가. 콜택시를 불러달라고 해서 타고 돌아왔다.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았지만 벨을 누르고 싶은 유혹을 이길 수 없었다. 당연히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 P329

가즈미가 서 있었다. 살짝 몸을 숙여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있었다.
(중략)
"꿈 아니야." 꿈속의 가즈미가 말했다.
"꿈인 주제에 꿈이 아니라니, 시건방진 꿈이네."
그렇게 중얼거렸다가 번뜩 눈을 떴다.  - P330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아버지 몰래 빠져나왔어." 살짝 늘어지는, 평소 가즈미의 말투다. "실은 병원에도 가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 맞아서 못 갔어."
"하지만 왜?"
"당신은 늘 왜라고 묻네." - P331

아내는 말없이 내 쪽으로 그 종이를 펼쳐 보였다. 어제 장인이 내민 이혼 서류다. 가즈미는 다시 보지도 않고 손가락으로 종이 양끝을 잡고 힘차게 반으로 찢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그야말로 번개 같은 행동이었다. 그러고는 나를 보며 확인하듯 말했다.
"이게 내 마음이야." - P331

가즈미의 목이 흐느끼듯 떨렸다. 입술이 말을 토해내기 전에나는 한없는 애정을 담아 가즈미를 껴안았다.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 말로 들으면 진정한 마음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 같았다. "용서해주지 않아도 돼. 내 곁에만 있어줘."
가즈미의 눈물이 내 뺨에 느껴졌다. - P332

현관에 나갈 때까지 벨이 끈질기게 울렸다. 발끈하며 문을 열었다. 그런데 밖에 서 있는 사람은 장인이 아니었다.
"실례합니다." 구노가 말했다.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불길한 예감이 압도했다.
"무슨 일이죠?"
"몇 가지 여쭤볼 일이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경시청까지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긴박하고 딱딱한 말투였다. - P333

. "어쨌든 아들은 아들이고 전 저죠. 인사는 이 정도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왜 갑자기 불려왔는지 알고 있습니까. 야마쿠라 씨?"
"모릅니다."
"당연히 얼마 전에 일어난 유괴와 두 건의 살인과 관련해서 묻고자 해서죠." - P335

"네. 도미사와 시게루가 유괴된 아침 말입니다."
(중략)
"똑같았습니다." 발끈해서 대답했다. "일곱시 삼십분에 집에서 나와 한 시간 후에 회사에 도착했죠."
"틀림없습니까?"
"의심되면 회사 근무 기록을 확인해보십시오."
"이미 조사했습니다." 딱하다는 투로 그는 말했다. "9일 아침 야마쿠라 씨의 출근 기록은 없었습니다. 누군가 조작한 흔적이 있었어요." - P336

"잠깐만요." 여기서 질 순 없었다. "그럼 제 부하직원들에게 물어보세요. 지난주 금요일이라면 제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시간에 회사에 왔다는 걸 대부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 P337

"SP국 직원 전원에게 진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홉시 이전인지 아닌지 모두가 기억이 없다고 발언했습니다. 사실 기억이 없다기보다 당신이 지각한 걸 감추기 위해 모두가 입을 맞췄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구노가 말을 마치고는 입술 한끝을 일그러뜨린다. - P337

"그럴 리가 틀림없이 날짜를 착각했을 겁니다."
"당신의 부하직원 전원이 말입니까?" 노리즈키 경시는 혀를차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야마쿠라 씨, 여기까지 와서 보기 딱한 변명은 그만두는 게 어떨까요. 금요일 아침 회사에 지각한걸 인정하시죠." - P338

.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구노가 앞질러 문 앞을 가로막았다.
"자리로 돌아가주십시오."
"체포된 기억은 없습니다. 언제든 여기서 나갈 권리가 있을텐데요."
구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 P338

"난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아니라고 대답하면 그만이죠.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 죄를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거야말로 고양이가 쥐 생각해주는 격이다. 나는 오기가 발동해서 자리로 돌아갔다. 이들의 수에 놀아나는 꼴일지 몰라도그런 말까지 들은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 - P339

"(전략). 최소한 아홉시 무렵에는 회사에 도착해야 했을 테니 아지트는 구가야마 역에서 걸어서 오분 이내에 갈 수 있는 곳으로 했을 겁니다. 지금 스기나미 서 수사원들이 해당 구역을 샅샅이 뒤지고있습니다."
경시는 혼자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일일이 반론할 의욕조차 생기지 않았다.
"뒤져봐야 시간 낭비입니다."
"당신 입으로 장소를 말해주면 수고를 덜 수 있을 텐데요."
"그런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화가 치밀어서 버럭 소리쳤다. - P340

"당신이 시게루의 존재를 최대 위협으로 간주한 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치코 씨에 대해서는 무의식적인 죄책감이 있었을 테니 무조건 증오할 수만도 없었겠죠. 그 결과 굴절된 딜레마의 배출구가 시게루를 향하게 됐을 겁니다. (중략)"
일부러 흘려들었다. 마지막 결론만 빼면 노리즈키 경시의 지적은 정확했다. 반박하기가 쉽지 않았다. - P342

"가장 교묘한 점은 미우라 야스시 씨를 공범으로 택한 겁니다. 과거에 다카시를 두고 싸웠던 두 사람이 실은 뒤에서 손을잡고 있었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그토록 증오하던 두 사람의 모습이 실제로는 연극에 불과했다니 말입니다. 광고업계에서 그런 수련을 쌓은 겁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구노 경부 눈앞에서 무시무시한 폭력 장면을 연출한 것도 형사에게 선입관을 심어놓기 위한 퍼포먼스였습니다. 그보다 무슨 수를 썼길래 미우라씨의 협력을 얻어낸 겁니까? (중략)"
경시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너무도 교묘했다. 유일한 결점은,
완전히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안타깝게도 노리즈키 경시 - P345

"(전략). 전 시게루를 죽일 수 없습니다. 시게루가 살해당하던 시각에 전 저희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건 스기나미 서형사들이 증명할 수 있습니다. 제게는 알리바이가 있습니다. 집에서 나가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감금된 아이를 죽일 수 있다는거죠?"
"방법은 얼마든지 있죠." 노리즈키 경시가 대수롭지 않다는듯이 말했다. "현대는 하이테크 시대입니다. 간단한 기계장치와 타이머를 조합하면 원격 살인 같은 건 일도 아닙니다." - P344

"그럼 그 장치를 보여주시죠."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억지처럼 튀어나온 허세였다. 제정신인 인간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역시 멋쩍었는지 노리즈키 경시가 뚱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취조실에서 몰아세우면 바로 자백하리라 만만하게 봤다면 여간 잘못 본 게 아니다. - P345

"납득할 수 없는 쪽은 접니다.‘
"하지만 금요일 밤 알리바이와 관련해서도 야마쿠라 씨 언동에는 의문점이 많습니다. 이를테면 근무 기록이 그렇죠. 죄송하지만 조금만 더 계십시오."
그런 말을 했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지기 싫어하는 근성이 얼굴을 내밀었다.  - P345

3

밤 열시, 드디어 취조실에서 해방됐다.
(중략)
나는 범인의 정체를 알아차렸지만 잠자코 있었다.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본인을 만나 직접 묻고 싶었다. 내 추리가 옳다면 자수를 권할 생각이었다.
우치보리 길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행선지를 말했다. - P346

"아버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이 몇시인 줄 아나. 내일 하게." 장인은 거칠게 내뱉고바로 외면하려고 했다.
"왜 직원들에게 거짓 증언을 시키셨습니까?"
장인의 어깨가 파도처럼 움찔거렸다. 얼굴의 반만 나를 향한채 장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제 근무 기록을 조작한 것도 아버님이 하신 일이죠?" 연이어말했다. - P347

"방금 전까지 경찰에게 취조를 받았습니다. 제게 살인 누명을 씌우려고 하셨더군요."
"모르는 일이야." 장인은 경련하듯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난 전혀 모르는 일이야."
"이제 와서 모른다고 끝날 일이 아니죠. 전 압니다. 아버님이 두 사람을 죽였다는 걸." - P348

"아니네. 자넨, 그래, 오해하고 있어." 장인은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긍지는 간데없고 추태를 보이고 있다. 귓등으로도 들을 가치가 없는 말이었다. - P349

"동기도 있었죠. 빈틈없는 아버님이 미치코와 제 관계를 모를리가 없었습니다. 시게루 일도 알았을 테고요. 미우라의 신상 보고서 밑에는 제 이름이 적힌 파일도 틀림없이 있었겠죠? (전략). 아버님의 유일한 목적은 딸을 지키는 것뿡이었으니까요." - P350

 장인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꽉 감고 있다. 신음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미동도 없었다.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
"그제 혼마 마호라는 여자를 만났습니다. 아시죠? 아버님이미우라를 조사하라고 의뢰한 ‘쇼와 종합 리서치‘에서 일하는 여대생 말입니다. (중략). 혼마 마호는 아버님이 사건의 재후에 있다는 것을 알았디만, (후략). 아니면 그 여자도 처음부터 아버님과 한패였습니까?" - P351

장인은 만감이 교차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자넨 모르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 정도로 체념이 느린 남자였다니. 깔끔한 성품인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다다랐는데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건가. - P352

"자넨 크게 오해하고 있더." 장인운 비장한 표정으로 호소했다. 애절한 만큼 유난히 더 꼴사나웠다. "그 애에게는 아직도 내가 필요하네."
언제까지 노추老醜를 드러낼 작정인가. 더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할 말도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대사가남아 있었다.
"아직 이 이야기는 경찰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일까지 딱 하루만 기다리겠습니다. 자수하세요." - P353

다카시의 손을 끌고 현관으로 향했다. 장모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서 있었다. 장인은 없었다.
"짐은 나중에 가지러 오겠습니다. 밤늦게 실례했습니다."
그렇게만 말하고 머리를 숙였다. 아무 죄가 없는 장모에게 무거운 슬픔을 짊어지게 한 것 같아 괴로웠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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