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경찰

식사를 권해도 고개를 저으며 지금은 그냥 자고 싶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실제로 벌써 며칠째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충혈된 눈 주위가 부석부석했다. 아사이에게는 그런 눈도 살인을 범한 한 가지 증거로 보였다. 자신을 배신한 여자를 살해한 뒤, 양심의 가책과 경찰이 언제 체포하러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지난 며칠 동안 밤의 어둠이 몹시 두려웠을 것이다. - P86

하지만 아무리 딱해도 경찰로서는 한시바삐 범인의 자백을 받아내야 한다. 위협도 해보고 어르고 달래도 봤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 - P86

결국 사사하라에게서 사건에 관한 진술은 한 마디도 듣지못한 채 12월 2일 저녁을 맞이했다. 체포한 지 만 하루 하고도 세시간이 지났다.
그러는 동안에도 형사 여러 명이 사사하라의 범행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찾아 도쿄 전역을 뛰어다녔다. 하지만 수확이라고 할 만한 것은 나오지 않았다. - P87

"14일 밤에... 레이코의 집에 가기는 갔습니다."
하지만 그 집에 갔다는 것을 인정했을 뿐, 살해 사실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어쩌면 13일 밤이었는지도 모른다, 11월 초부터 병원에 휴가를 신청했기 때문에 날짜 감각이 없어졌다. 라는 식의 애매한 얘기였다. - P88

찾아간 시각을 물었을 때는 아예 경찰을 얕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대답을 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아요. 분명한 것은 밤이라는 것뿐입니다. 어스름한 저녁때였던 것 같기도 하고, 자정이 넘은 한밤중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는 그뿐, 다시 입을 딱 다물어버렸다. - P88

아사이는 결국 포기하고 취조실을 나왔다. 그리고 오 분뒤, 4시 23분에 전화벨이 울렸다.
(중략)
"삼십 분 전에 월드섬유회사의 젊은 사장이 세이조 자택에서 엽총으로 자살을 했어. 사와모리 에이지로라는 사업가야. (중략). 하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더라고. 유서 마지막 부분에 자신이 모델 미오리 레이코를 살해했다고 적어놨더라니까. 사사하라라고 했던가, 그 의사를 어제 체포했지? 근데 이쪽 유서를 보니 아무래도 범인은 사사하라가 아닌 것 같아..." - P89

사와모리 에이지로에 대해서는 아사이도 약간의 지식이있었다. 창업자인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37세의 젊은 나이로사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굴지의 대기업이라는 건 허울뿐이고 실상은 경영 부진으로 여차하면 망할 거라는 소문이 자자하던 월드섬유를 단 이 년 만에 다시 일으켜 세운 수완 좋은 사업가라고 했다. - P90

넸다.
"오늘 아침에 이상한 전화가 왔었다고 합니다."
세이조 경찰서의 중년 형사가 아사이에게 그렇게 말을 건
"아침 8시경이었대요. 아침 식사 때는 평소와 다름없었는데 그 전화를 받은 뒤에 갑자기 얼굴이 새파래져서 부인이 회사에 무슨 일 있느냐고 물었답니다. (후략)." - P91

"아침에 온 전화라는 건 뭐지요?"
"그게..." 미간을 좁히며 형사는 말끝을 흐렸다. "통화 내용도 유서에 적혀 있으니까 직접 보시죠."
중년 형사가 아사이를 창가 책상 앞으로 데려갔다. - P92

 봉투에 적힌 ‘유서‘라는 글자만 붓글씨고 본문은 펜으로 쓴 것이었다. 획 끝이 심하게 삐쳐 올라간 글씨체였다. 오후 한나절 내내 썼는지 총 삼십여 장이나 되었다. 그중스무 장쯤까지 지난 이 년 동안 회사를 버텨온 것은 자신의 허세였을 뿐, 그 이면에서 회사가 어떻게 부진의 늪에 빠졌는지, 경위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 P92

그리고 ‘실은 여기까지 쓰고 펜을 내려놓을 생각이었으나 죽음을 앞두고 역시 모든 것을 참회하고자 한다‘라는 말과 함께 느닷없이 ‘미오리 레이코는 내가 살해했다‘라는 문장이이어졌다. - P93

돈 봉투와 보석과 맨션을 선물하고 그만큼 아름다워지는 레이코를 보면서 실제로 큰 사업에 성공한 것처럼뿌듯한 기쁨을 느꼈다. 아니, 앞서 말했던 대로 회사 경영이 악화되어 막대한 부채를 떠안게 된 뒤에도 나는 그녀에게 계속 돈을 투자했다. 물론 모든 것은 레이코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 P93

빙산 위에서 타오르는 불꽃 나비의 이미지는 내가 직접 제안한 아이디어였다. 그 광고가 레이코를 일개 모델이 아니라 인기 스타의 자리로 올려줬지만, 실은 창백한 얼음도 빨간 불꽃도 레이코라는 여자 그 자체였다. - P94

"당신이란 인간, 너무 싫어. 처음 봤을 때부터 싫었어.",
(중략)
"알고 있어." 나는 대꾸했다. "내가 네 몸을 돈을 주고 샀지.
좋아, 오늘 밤은 얼마나 주면 되겠니?"
내가 수표책을 꺼내자 레이코는 냉랭하게 말했다.
"은행에 갚을 돈은 없어도 내게 줄 돈은 있는 모양이지?"
실제로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회사 사정이나 빚에 대해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는데도. - P95

"왜 나를 파명시키려는 건데?"
(중략)
"왜냐고? 당신이 돈으로 나를 사려 들었기 때문이야. 1억엔이라고? 당신은 내가 아니라 여자라는 상품을 샀을 뿐이야. 당신과 잠자리를 할 때마다 나는 인간이 아니었어.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내 몸은 더 이상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게 됐어."
"너와 잠자리를 한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텐데?"
"하지만 당신이 처음이었어." - P96

레이코는 협박의 말을 내뱉을 때마다 항상 웃었지만 단 한번도 농담이었던 적은 없었다. 돈을 요구한 적도 없었다. 그녀가원한 것은 단지 나의 파멸뿐이었다. - P97

노예를 일격에 죽여 없애기가 아까워서 물과 불로 괴롭히며 공포에 찬 표정을 실컷 즐기다가 그것도싫증이 난 참에 죽여버리라고 명령하는 고대 제국의 잔인한 왕너였다. 끈질기게 나를 괴롭힌 끝에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수화기를 들어 세 개의 숫자를 돌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 P97

사진을 빼앗아 찢어버리는 건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래봤자 소용없었다. 나는 이름도 모르는 어느 대학생에게 필름을 따로 맡겨둔 것이다.
그 무렵, 나는 회사 일로 이미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 P98

"대체 왜 그래? 내가 지난 이 년 동안 돈을 얼마나 많이 쥐여줬는데?" 한 번은 나도 모르게 소리치며 대든 적이 있었다. "그 진주 목걸이도 내가 준 거야!"
분노한 고함을 침묵의 미소로 듣고 있던 레이코는 목에 걸린 목걸이를 홱 잡아 뜯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흩어진 진주를긁어모았다. 돌려줄게, 라면서 진주를 한 알 한 알 내 입에 쑤셔넣었다.  - P98

"이러지 마, 그 사진을 경찰에 넘기지 않아도 우리 회사는어차피 이제 곧 망할 거라고."
가을 중반쯤에는 그렇게 애걸한 적이 있었다.
"어머, 그럼 그 전에 경찰에 보내야겠네." 레이코는 웃는 얼굴 그대로 말을 이어갔다. "나는 내 손으로 당신을 파멸시키고싶거든." - P99

"파리로 떠나기 전에 한 가지 처리해야겠어."
이번에야말로 그녀가 실행에 옮길 작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11월 들어 회사 자금 사정은 마침내 밑바닥까지 떨어졌지만 그래도 기적처럼 어느 은행과 대출 건이 성사되어가는 참이었다.  - P99

.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 레이코에게 접근한 것이 내 감을 어그러뜨려 저 높은 곳까지 치고 올라가던 성공의 계단에서 발을 헛디디게 했다. 지나치게 완벽한 아름다움은 반드시 희생자를 낳게 마련이다. 내가 그 희생자였다. - P100

약혼을 발표할 무렵에 레이코와 주고받은 얘기가 있었다.
"모범생 중년 남자를 갖고 노는 거, 너무 재미있어."
"네가 얼마나 무서운 여자인지 그 의사 선생에게 다 얘기해줄까?"
"얼마든지 일러바치세요. 어차피 이번 여름에는 걷어찰 생각이니까." - P100

사사하라가 조금 전에 자신을 죽이러 왔었다고 레이코는마치 재미난 얘기처럼 말했다. 의사 선생은 약봉지를 뜯기도 전에 레이코에게 들키는 바람에 그대로 테이블에 버려둔 채 뛰쳐나갔다고 했다. 게다가 레이코는 제 입으로, 지금 자신이 살해된다면 경찰은 틀림없이 그 의사 선생을 체포해갈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 P101

상대는 놀랄 만큼 좋은 조건을 준비해놓고 이제 나의 동의만 기다리는 단계였다. 도장을 찍는 대신, 독이 든 술잔과 레이코가 마시던 술잔을 바꿔놓기만 하면 된다. 레이코는 술에 잔뜩취해서 유리잔의 미세한 차이 따위, 알아볼 리 없었다. 그래도 레이코가 자신의 잔에 얼음을 넣어달라고 말했을 때, 최대한 독약이든 술잔 속 얼음과 비슷한 크기의 얼음을 골라 넣었다. - P101

레이코가 담요를 찾으러 침실에 들어갔을 때, 나는 지문이남지 않도록 손수건을 이용해 두 개의 술잔을 잽싸게 바꿨다. 다시 거실로 나온 레이코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독약이 든 잔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삼 분이 흘러갔다.
"난 자야겠어. 당신은 그만 가봐."
레이코는 그렇게 말하고 비틀비틀 일어나 침실 문 앞에서그 술을 마셨다.  - P102

유서는 그다음에, 살인을 저지른 며칠 뒤에 회사 부도 소문이 퍼져 결국 은행 대출은 받지 못한 채 끝이 났으니 레이코를 살해한 게 아무 쓸모 없게 되었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끔찍한 협박에 시달리면서도 여전히 진심으로 레이코를 사랑했기 때문에내 손으로 매장한 것에 만족감마저 느낀다, 라고 이어졌다.  - P103

(전략), 마지막 부분에 전화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오늘 아침 8시에 남자 목소리로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그날 밤 우연히 미오리 레이코의 맨션 뒤쪽에 있었어. 당신이 얼굴빛이 홱 변한 채 6층에서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것을 목격했다고. 당신 얼굴은 잡지 등에서 여러 번 봐서 잘 알지. (후략)." - P103

나와 레이코는 지난 삼 년 동안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둘의 관계를 아내에게도 언론에도 들키지 않고 지내왔는데 레이코를 살해하고 드디어 모든 것을 청산한 마지막 순간에 실수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전화가 끊긴 뒤에도 나는 수화기를 움켜쥔 채 남자가 왜 경찰에 연락하지 않고 나한테 전화했는지 생각해보았다. - P104

아침에 걸려온 전화는 유서에 나온 대로 협박의 의도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 사와모리의 자살이 보도되면 더 이상 전화할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내일 그자에게서 다시 전화가 온다면우리 쪽에도 알려달라고 세이조 경찰서 형사에게 부탁해두고 아사이는 그 집을 나왔다.  - P105

"유서에 사사하라를 딱하게 생각했다고 적혀 있었지요?"
조수석에서 오카베가 말을 건넸다. "회사가 부도에 몰리자 자살을 결심한 사와모리가 자신의 죽음으로 사사하라를 구해주려고 그런 엉터리 고백을 했을 수도 있어요."
"그런 거라면 오늘 아침에 걸려온 협박 전화는 뭐지? 그런 전화가 왔다는 건 부인이 분명하게 증언했어." - P105

"단순한 장난 전화일 수도 있잖아요. 사와모리와 레이코의관계를 알고 있던 누군가가.."
"유서에 아무에게도 둘의 관계를 들키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어." - P106

"근데 그 협박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자도 좀 이상하잖아요? 사건 날 밤에 왜 하필 그 비상계단 뒤쪽에 있었을까요?"
오카베의 지나치게 카랑한 목소리에 왠지 짜증이 나서아사이는 대답 없이 차가 경찰서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꾹 다물었다. - P106

"하지만 청산가리는 자기가 먹고 죽을 작정으로 가져갔고,
결국 약봉지도 다 뜯지 못한 채 그 집에서 쫓겨났다고 주장하네요. 그냥 둘러대는 소리일까요?"
사와모리의 유서에 대해 아직 알지 못하는 오니시가 멍하니 물었다. (중략). 하지만 그가 약봉지를 뜯지도 못하고 레이코의 집을 뛰쳐나왔고, 따라서 레이코를 살해하지 않았다는 건 이제 틀림없는 것 같았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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