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퍼런스, 문헌이라는 단어이다. 하지만 둘의 느낌은 다른데, 뭐가 다를까.



5. 레퍼런스: 새로움을 망드는 재배치, 재맥락화

‘ 집에 돌아와 작가를 조사하던 중 런던에서 열리는 《The Fear of NOW》 전시 영상을 보았다. 인터뷰 끝부분에 게니가 말했다.

"You can steal it."

아드리안 게니는 전통적 회화 기법과 주요 예술가의 작품을 창작 모티브로 자주 활용해온 작가다. 일례로 2016년 작<Degenerate Art>는 1920년대에 나치에 의해 ‘퇴폐 미술‘로 낙인찍혔던 화가들에게 바치는 헌사로, 빈센트 반 고흐의 1889년 자화상을 모티브로 한다. - P112

게니의 작업을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든다.

"레퍼런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결국은 ‘자기 것‘을 만들어내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나는 이 질문이 에디토리얼 씽킹의 핵심 중 하나라고 믿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재료는 더이상 원천적이지 않다. 머릿속에 떠오른 기획이 새로운 것 같아도 조금만 검색해보면 이미 비슷한 결과물이 나와 있다. - P114

얼마 전, 독창성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흥미로운 논문 <영화의 콘텐츠 차용 현황과 독창성의 위기>를 읽었다. 2천 3백여 편의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분석해 3만 4천여 개의 스토리모티브로 DB를 구축해보니 각 영화가 얼마나 닮아 있는지 지표화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 P114

이 정도면 표절 아니냐고?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어떤 예술 분야든 기존에 나온 창작물을 모티브 단위로 DB화하면 분명히 유사성을 지닌 작품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정말로. 없는 과잉생산 시대에는 독창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재배치를 통해 차이를 만들어내는 능력‘으로 봐야 한다. - P115

물론 표절이 흔한 시대인 것도 맞다. 레퍼런스를 똑같이 베끼면 표절이지만, 레퍼런스를 소화해서 자기화하면 창작이다. 표절과 창작을 가르는 기준이 모호하기 짝이 없는 ‘자기화 여부‘라니 말장난처럼 느껴질 수 있다.  - P115

앞서 소개한 아드리안 게니 이야기를 좀더 이어가보자.

(중략)

이미 존재하는 고전 예술 작품에서 ‘제스처‘에 주목하겠다고 결정했고, 이 결정이 ‘회화는 당대의 몸짓을 기록하는 장이라는 작가만의 정의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몸짓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스마트폰 액정과 노트북, TV 화면 등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인물을 그려야 하는 이유가 풍성해지고 설득력이 생겼다. - P119

아드리안 게니에게 배울 수 있는 두 번째 요령은 ‘다수의 레퍼런스 조합하기‘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드리안 게니의 레퍼런스 목록은 아주 길다. 레퍼런스가 하나일 때는 표절이 되기 쉽지만, 여러 레퍼런스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나 아이디어를 찾으면 고유한 탐색이 된다. - P121

생각보다 레퍼런스를 찾으면서 ‘내가 뭔가 하고 있다‘는 기분에 속는 사람이 많다. 정보를 자기화하려면 외부 자극을 차단하고 홀로 소화하는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 P121

아드리안 게니의 말처럼 우리가 훔칠 수 있는 재료는 아주많다. 그렇다고 쉬우리라 착각하진 말자. 배치의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일은 재료의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일만큼이나 고되고 어렵다. 레퍼런스 덕분에 작업이 술술 풀린다면 당신의 훔치기가진짜 훔치기가 되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 P124

1. 재료수집: 가능성을 품은 재료 찾고 모으기

사전에는 훌륭한 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오만 가지 단어들이 다실려 있지만, 그 안에는 단 한 편의 시도 들어 있지 않다.
브루노 무나리, 『판타지아』

편집은 일정량의 재료가 모인 이후에 발생하는 요구다. 식재료를 손에 넣어야 조리를 시작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원재료가 신선하고 고품질일수록 음식 맛이 좋아지는 것처럼 좋은 재료를 확보하면 편집 과정도 수월해지고 결과물도 좋아진다.  - P41

어떤 수집은 그 자체로 창조적 의미가 되는 반면 어떤 수집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단어를 많이 모아놓은 사전이 곧 시가 되지 않는 것처럼, 우표 수집가의 아카이브를 예술 작품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무언가를 모은다고 곧장 창조적 의미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 P41

핀란드 현대미술가 야니 레이노넨 Jani Leinonen은 자본주의를 통쾌하게 비꼬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다. 2015년에 헬싱키 키아스마 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개인전 《불복종 학교 School of Disobedience》에서 그의 주요 작품을 만났는데, 일상 속 사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 P42

야니 레이노넨은 6년 동안 유럽 여러 도시를 돌며 동냥하는 노숙인들로부터 손팻말을 구입하기도 했다. 제각각의 크기와 손글씨로 만들어진 손팻말을 황금 액자로 둘러 미술관 벽에 걸었다. (미술의 역사에서 황금 액자가 그간 무엇을 감싸왔는지 떠올려보자.) - P45

한번 상상해볼까, (중략) 코로나로 사망한 환자들의 부고를 모두 모아본다면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 P45

실제로 《뉴욕타임스》는 2020년 5월에 자국의 코로나 사망자가 10만 명에 가까워진 현실을 보도하기 위해 왼쪽 페이지와 같은 1면을 내놓았다. - P47

중국 현대미술가 아이 웨이웨이는 2015년부터 유럽에 머물면서 난민 문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꾸준히 촉구해왔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국경에 위치했다 철거된 이도메니 난민 캠프에서 버려진 옷가지와 신발을 수집해 베를린 자신의 스튜디오로 가져왔고, 깨끗하게 세탁하고 분류해서 행어에 걸었다. 나는 이 작품 앞에서 난민이 얼굴 없는 집단이 아니라 실재하는 몸을 가진 개별존재라는 사실을 체험했다. - P48

박혜수 작가는 2013년 6월부터 8월까지 헤어진 연인과 관련한 물품과 사연을 기증 혹은 대여받아 <실연수집>이라는 아카이브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옛사랑이 선물한 종이학 1,000마리를 6천 원에 판매한다는 중고 거래 광고를 발견하게 되었다.
사랑이 끝나지 않았다면 결코 거래되지 않을 사물. 여기서 영감을 받은 작가는 황금색 종이로 학 1,000마리를 접은 뒤 모두 풀어 하나의 커다란 황금 종이로 이어 붙였다. - P51

의미로 거듭날 가능성을 품고 있는 재료를 알아보는 힘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야, 저런 게 예술이면 나도 하겠다"라고 비아냥거려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사소한 재료에 숨어 있던 메시지를 어떻게 발견했을까? 어떤 맥락으로 의미를 빚어갔을까?"라고 질문하는 편이 에디터적 사고력을 키우는 데에 보탬이 된다. - P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