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사 년 동안의 수도원 생활에서 매 학년마다 한명 이상의 학생이 중퇴를 했다. 때로 누군가 죽음을 맞아 애도의 노래 속에땅에 묻히거나 친구들 손에 들려 고향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가끔은 누군가 제멋대로 수도원을 뛰쳐나가거나 큰 잘못을 저질러 퇴출되기도 했다. - P111
한스 기벤라트의 학년 역시 몇 명의 학생을 잃었다. 묘하게도 그들은 모두 헬라스 방 학생들이었다. - P111
오후 첫 수업이 시작되는 2시가 되어서야 힌딩거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힌딩거는 어디 갔지요?" 지도교사가 물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누가 헬라스 방에 좀 가보세요." 하지만 그곳에도 힌딩거의 흔적은 없었다. "수업에 좀 늦나 보군요. (후략)." - P112
4시에 지도교사가 노크도 없이 교실에 들어와서는 교장에게 귓속말을 했다. "주목해주세요!" 교장의 한마디에 학생들은 가만히 앉아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러분의 친구 힌딩거 군은 연못에 빠진 것으로 보입니다." 교장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힌딩거 군을 찾는 일에 함께 나서주기 바랍니다. 마이어 교수님이 여러분을 인솔하실 건데 교수님 말씀을 분명히 따르고 절대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세요." - P113
신학생들은 겁먹은 새들처럼 모여들어 불안한 눈으로 시체를 내려다보고 파랗게 얼어 뻣뻣해진 손을 마주비볐다. 물에 빠져 죽은 친구가 앞서 실려가고 학생들은 그 뒤를 따라 눈 덮인 숲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문득 그들의 불안한영혼에 공포가 엄습했고 사슴이 포식자의 기척을 느낀 것처럼 잔인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 P113
어찌 되었든 예기치 않게 친구의 창백한 얼굴을 가까이 보자 한스는 왠지 모를 깊은 아픔을 느끼고 충동적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 P114
교장을 선두로 모든 교사들이 나와서 죽은 힌딩거를 맞이했다. 살아 있었다면 그런 예우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도망쳤을 힌딩거였다. 언제나 교사들은 살아 있는 학생을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른 눈으로 죽은 학생을 바라본다. 평소에는 그토록 무심하게 학생들에게 악을 행하면서도 이런 순간만큼은모든 생명과 젊음이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 P114
이튿날 힌딩거의 아버지가 왔다. 그는 아들이 누운 작은 방에서 몇 시간 동안 홀로앉아 있다가 교장과 차를 마신 뒤 그날 밤은 근처의 히르셴 여관에 묵었다. 드디어 장례식이 치러졌다. 관이 기숙사 건물에 놓였고 알고이 지방에서 온 재단사가 곁에 서서 모든 과정을 바라보았다. - P115
(전략). 그리고 울음을 참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커다랗고 고요한 공간의 한가운데에서 한겨울의 마른 나뭇가지처럼 서 있었다. 희망도 없이 다 잃고 다 내어줘 버린 듯한 그 모습에서 불행을 느낄 수 있었다. 목사는 재단사의 손을 잡고 곁을 지키다가 관이 이동하자 멋지게 구부러진 신사 모자를 쓰고 제일 앞에 서서 관을 따라 걸었다. - P116
장례식이 끝나고 교장이 힌딩거의 아버지와 함께 헬라스 방을 찾아왔다. "여러분 중 누가 힌딩거 군과 가장 친했습니까?" 교장이 방에 있는 학생들에게 물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힌딩거의 아버지는 근심스럽소 비참한 표정으로 젊은 얼굴들을 쳐다보았다. - P116
. 하지만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이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길로 수도원을 떠나갔다. 하루 종일 기차를 타고 하얀 겨울 왕국을 달려 집에 도착하면 그는 부인에게 그녀의 사랑하는 아들이 어디에 묻혔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 P117
한스 기벤라트는 목이나 발에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불운했던 그날 이후 더 진지해지고 더 나이 든것 같았다. 그는 어딘가 달라졌다. 소년은 청년이 되었고, 그의영혼은 근심과 두려움에 떨게 되었으나 아직 쉴 곳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에 떨어진 것 같았다. - P117
학생들은 하일너를 피해 다녔으며, 조교는 그에게 조롱 섞인 친절을 베풀었다. 진정한 친구였던 셰익스피어, 실러, 레나우만이 그를 둘러싼 굴욕적이고 강압적인 환경과는 다른 위대한 세계를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은둔자의 구슬픈 목소리로 채워졌던 ‘수도사의 노래‘는 점점 수도원과 교사들, 동급생들을 향한 씁쓸하고 증오 섞인 시 모음집으로 변했다. - P116
한스는 어색하게 인사하고 의자를 침대 쪽으로 끌어다앉았다. 그리고 아픈 친구의 손을 잡았지만 하일너는 화를 내며 벽쪽으로 몸을 돌려버렸다. 그러나 한스는 물러나지 않고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며 옛 친구가 자신을 쳐다보도록 만들었다. 하일너가 짜증을 내며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뭔데?" - P118
하일너는 눈을 감았다. 한스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저기 말이야, 내가 잘못했어. 네가 다시 내 친구가 되고 싶을지는 모르겠지만 날 용서해줘야 해." 하일너는 아무 말 없이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속으로는 한없이 기쁜 얼굴로 친구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으나, 지금은 외롭고 씁쓸한 역할에 너무 익숙해져서 적어도 한동안은 그런 가면을 그대로 쓰고 있어야 했다. 한스는 집요하게 매달렸다. - P119
마침내 하일너가 한스의 손을 꼭 쥐며 눈을 떴다. 며칠 후 하일너도 침대에서 일어나 의무실을 벗어났다. 새롭게 다져진 우정은 수도원 안에서 대단한 관심거리가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속해 있다는 묘한 행복감과 말없이도 비밀스럽게 통하는 일체감으로 경이로운 몇 주를 보냈다. - P119
게다가 둘 모두 지난 시간 동안 서로몹시 그리워했던 터라 이들의 재결합은 대단한 경험이자 특별한 선물처럼 여겨졌다. 조숙한 두 소년은 설렘 가득한 수줍음과 함께 우정을 나누었고, 그 속에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ㅠ첫사랑의 달콤한 비밀을 미리 맛보았다. - P120
한스는 우정이 깊어지고 행복해질수록 학교와는 점점 더 멀어졌다. (중략). 그러는 동안 리비우스는 물론 호메로스마저도 중요성과 광채를 잃어버렸다. 교사들은 이제까지 흠 잡을 데 없는 학생이었던 기벤라트가 수상쩍은 하일너의 강한 영향 아래 문제아로 변해가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 P120
교사라면 자신의 교실에 한 명의 천재보다 여러 명의 둔재가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교사의 의무는 특출한 인물을 키워내는 것이 아니라 라틴어와 수학을 잘하는 성실한 인간을 길러내는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 더 심하게 고통 받는가? - P121
눈에 띄는 두 젊은이에게서 위험을 감지하자마자 교사들은 전통 깊은 학교의 원칙에 따라 애정 대신 곱절의 엄격함으로 단속하려 했다. 가장 성실하게 히브리어를 공부했던 한스를 자랑으로 여겼던 교장이 어설픈 시도로 녀석을 구원하려 했다. - P122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보자고 했어요. 괜찮다면 편하게 자네라고 불러도 될까?" "물론입니다, 교장 선생님." "최근에 자네 성적이 약간 떨어졌다는 걸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기벤라트 군. 적어도 히브리어에서 말일세. 현재까지 우리 학교에서는 어쩌면 자네가 히브리어를 가장 잘하는 학생일 걸세. 그런데 성적이 갑자기 떨어져 버리니 내 마음이 안 좋다네. 혹시 히브리어 공부에 흥미가 떨어진 건가?" "그렇지 않습니다, 교장 선생님." - P123
"혹시 하루 공부 분량이 너무 많은가?" "아닙니다. 전혀요." "아니면 혹시 개인적으로 독서를 많이 하고 있나? 솔직히 말해보게!" "아닙니다. 독서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교장 선생님." "대체 이해를 할 수 없군, 이 젊은 친구야. 어딘가에 원인이있을 텐데 말이지. 앞으로는 성실히 노력하겠다고 약속해주겠나?" 한스는 권력자가 내민 오른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 P124
"그래야지. 이제 마음에 드는군. 다만 너무 지치지 않도록 하게나. 안 그러면 수레바퀴에 깔리고 말 테니." 교장은 한스의 손을 꼭 잡았다. 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 쪽으로 향했다. - P124
"왜냐하면 하일너는 제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친구를 외톨이로 만들 수 없습니다." "음, 자네는 얼마든지 다른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잖은가? 하일너의 나쁜 영향을 자진해서 받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어. 그 결과는 뻔할 텐데 말이야. 대체 하일너 군의 어떤 점을 좋아하는 건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희는 서로를 아끼고 있고, 제가 그 친구를 버리는 건 비겁한 행동 같습니다." - P125
한스는 마치 사랑에 빠진 청년처럼, 위대한 영웅처럼 행동하고 싶었다. 일상적인 것, 지루하고 사소한 공부 따위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매번 절망적인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공부의 멍에에 묶어야 했다. 하일너처럼 대충 공부하고 필요한 것만 빠르게 거의강제로 머릿속에 집어넣는 일을 한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 P126
그리스어로 된 신약성경을 읽을 때도 한스는 때때로 인물들의 생생한 현실감에 놀라고 거의 압도당할 지경이었다. 특히 마가복음 6장에는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배에서 내리는장면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eugus ényvovtes aitovQQalov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곧 예수를 알아보고 그리로달려오니)." 이 구절에서 한스도 인간 예수가 배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고 그가 예수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 P126
어느 순간 나타났다가 언제나 금세 또 사라져버리는 환상 때문에 한스는 자신에게 묘한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았다. 어떤 때는 검은 땅이 유리처럼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고 어떤때는 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이런 근사한 순간들은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가 슬퍼할 새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어딘가 낯설고 신성한 데가 있어서 감히 말을 붙이거나 머물러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는 순례자 혹은 친절한 손님처럼 말이다. - P127
한스는 이런 하일너를 달래기보다는 오히려 그에게 동참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다른 학생들이 꺼리는 기괴한 섬처럼 고립되었다. 한스는 시간이 흐르자 이 상황도 그리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에게 은근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교장만 없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한때 교장의 총애를 받았던 학생은 이제 냉랭한 대접을 받았고 누구나 알 정도로 무시당했다. - P128
. 신체는 아직 성장기에 볼 수 있는 우락부락한 골격을 갖추지 못했지만, 모세의 책을 공부할 때는 적어도일시적이나마 매끈한 이마에 어른다운 진지함이 나타났다. 뺨이 통통한 아이는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한스 또한 많이변했다. 키나 마른 체격은 하일너와 비슷했지만 이제 하일너보다 더 나이 들어 보였다. - P128
한스는 학교 성적에 대한 불만이 늘어날수록 하일너의 영향아래 더 날카로워지고 학우들과 더 멀어졌다. 더 이상 모범생이나 미래의 수석 학생으로서 다른 학생들을 내려다볼 수 없었기 때문에 우쭐거림은 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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