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쿠정 철교 밑을 지나 도쿄 교통회관 건물로 향하는 그녀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가슴이 설렜다. 약속 장소는 15층 도교 회관 긴자 스카이라운지였다.
"유라쿠정의 하늘에서 만나요." - P106

이케우치 씨는 시라이시 씨를 발견하고 일어섰다.
"나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싹 나았는걸요."
(중략)
코스 요리를 주문한 뒤 이케우치 씨는 애용하는 노트를 폈다.
"이걸 보십시오. 그저께 도착한 겁니다." - P106

‘내 『열대』만이 진짜랍니다.‘
"보낸 사람 이름은 없네요."
"지요 씨가 보낸 겁니다."
보아하니 지요 씨는 학파에서 탈퇴한 뒤 교토로 간 듯했다.
그녀는 교토 출신이니 그곳으로 가도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하지만 일부러 이런 그림엽서를 이케우치 씨에게 보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 P107

이 엽서에는 다른 목적이 있다고 시라이시 씨는 생각했다.
"지요 씨는 교토로 오라고 하는 거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 그렇지만 왜요? 무슨 이유로?"
"아마도 『열대』의 비밀이 교토에 있기 때문이겠죠." 이케우치 씨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도 비장의 카드가 있어서 말입니다" - P107

"『열대』를 쓴 사야마 쇼이치는 교토에 살았습니다. 당시 그 사람은 학생이었죠. 그런데 1982년 2월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거든요."
"어떻게 그런 걸 아시죠?"
"지요 씨는 사야마 쇼이치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게 제비장의 카드입니다." - P108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저도 지요 씨한테서 들었어요." 시라이시 씨가 끼어들었다. "어렸을 때 서재에 숨어들었다면서요?"
천일야화 말이죠?"
"네, 그거."
"지요 씨 아버지가 사야마 쇼이치와의 만남에 얽혀 있는 겁니다." - P109

서재에는 ‘방 안의 방‘ 같은 기묘한 장소가 존재했다. 계단식 사다리로 이어지는 중 2층 같은 좁은 공간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할 법한 작은 문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말을미루어 짐작하건대 그 방에는 희귀 서적과 개인적인 메모 및 여러 권의 일기장이 가득한 듯 했다. - P109

 아버지가 이집트에 여행 가서 사온 천일야화 사본의 일부였다. 찾아온 학생은 문학부에서 아랍어를 공부하는 대학원생으로, 아버지는 사본을 그에게 읽어봐 달라고 부탁할 생각인 듯했다. 결과적으로 별달리 진기한사본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버지는 학생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 뒤로 청년, 즉 사야마 쇼이치는 애용하는 노트를 옆구리에 끼고 이따금 아버지의 서재를 찾아오게 됐다. - P110

"지요 씨와 사야마가 처음 만나고 반년 뒤, 다시 말해 1982년2월이군요. 요시다 신사의 세쓰분(입춘 전날) 축제를 구경하러나간 날 밤, 지요 씨는 인파 속에서 사야마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야마는 그 뒤로 모습을 감춰서 두번다시 지요 씨앞에 나다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해 겨울 사야마는 이따금
‘소설을 쓸 생각‘이라고 지요 씨한테 말했습니다. 마술에 얽힌이야기, 남양의 섬을 둘러싼 불가사의한 모험담이 될 거라고말이죠." - P110

지요 씨가 이케우치 씨에게 한 이야기에 따르면, 그냐가 사야마 쇼이치의 『열대』를 알게 된 것은 2년 전, 남편 사무실을대청소하고 있을 때였다. 폐기할 자료들 틈에 섞여 있던 것을우연히 발견했다. 이상하게도 남편은 그런 책을 산 적 없다고하는 데다 사무실 다른 사람들도 그 책의 출현 경위에 관해 짐작가는 데가 없는 듯했다.  - P111

"사야마 쇼이치라는 인물도 노트를 애용했나 봅니다."
이케우치 씨는 노트를 덮고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지요 씨와 산책을 나갈 때도 하숙집에서 이야기를 할 때도 늘 노트를 들고 있던 모양입니다. 그 부분에서 아주 공감이 느껴지더군요." - P111

시라이시 씨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사야마 쇼이치는 어째서 모습을 감췄을까. 『열대』라는 책이 존재하니까 그는 죽은 게 아니다. 하지만 살아 있다면 어째서 지요 씨에게 연락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사야마는 『열대』라는작품을 남긴 것을 끝으로 30년 이상 다른 작품을 한 편도 쓰지않았다. 아니, 애초에 『열대』의 존재 자체가 확실하지 않다. 실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까. - P112

"갔다 오시면 모험의 전말을 들려주세요."
"물론입니다. 좋은 소식을 기대해 주십시오."
이케우치 씨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P113

시라이시 씨는 상점 계산대에 턱을 괴고 있었다.
이케우치 씨는 『열대』의 수수께끼에 도전하기 위해 교토로 떠났다. 빈둥빈둥 손 놓고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한심하다. 뭔가 자기 나름의 가설을 세울 수는 없을까. - P113

지요 씨는 사막의 궁전이 무대를 지나서 있다고 말했다.
어떻게 단언할 수 있었을까. 그녀만의 비밀, 다른 학파 멤버들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은 기억이 있는 게 틀림없다. 그건 거의 완성된 퍼즐로서 그녀의 가슴에 감춰져 있었으나 마지막 조각이 모자랐다. 그런데 자신이 나타났다. 그리고 ‘보름달의 마녀‘
라는 말이 지요 씨의 퍼즐을 완성으로 이끈 것이라면,
보름달의 마녀는 어떤 인물일까. - P114

일요일 정오 지나 그녀가 메리에서 점심을 먹는데 갑자기전화가 왔다. 이케우치 씨였다. 무슨 발견이라도 한 걸까.
"웬일이세요. 이케우치 씨."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바쁘지 않아요. 지금 점심시간이거든요."
(중략)
"지금 어디 계시는지요?"
이케우치 씨의 목소리에는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중략)
"아뇨, 교토에서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봐서 말입니다."
"전 유라쿠정에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녀는 웃었다. - P115

시라이시 씨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내 『열대』만이 진짜랍니다.
확신에 찬 목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했다.
지요 씨가 보트를 타고 거침없이 바다를 달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반짝이는 눈동자는 수평선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참아름다운 이미지였다.
이케우치 씨는 교토에서 지요 씨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 P116

그 다음 월요일 오후, 시라이시 씨는 진보정에 갔다.
야스쿠니 거리에는 평온한 빛이 비추고 길을 걷는 이들도느긋해 보였다.
거리를 따라 늘어선 헌책방 앞에는 책이 가득한 손수레가여럿 있었다. 입구 양옆으로 쌓인 헌책 탑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곳도 있었다. 그쯤 되면 점포라기보다 헌책으로 만든 동굴이다. - P117

가령 여기 진보정의 서점에 들어가 책 한권을 집어서 펴면그 순간 특별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을 말이 메워 대지가 생겨나고 초목이 우거지고 인간이 살기 시작해 그곳에 세계가 나타난다. 다른 책을 집으면또 다른 세계가 나타날 것이다. - P117

‘어째 정신이 아득해지네.‘
시라이시 씨는 살짝 하품을 했다.
(중략)
약속 시간에 런천으로 가자 친구는 먼저 와서 교정쇄인 듯한 종이 뭉치를 읽고 있었다. 아주 편집자 같은 모습이었다. - P118

친구는 "그나저나 이상하네" 하고 중얼거렸다.
"학파 사람들은 지금까지 1년도 넘게 『열대』에 관해 조사한거잖아? 그동안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어. 그런데 연말에 네가 학파에 참가한 뒤부터 빠른 속도로 진전이 있었지. 의외로네가 핵심 인물일지도 몰라." - P119

친구는 아는 편집자들에게 물어봤지만 사야마 쇼이치라는소설가도, 『열대』라는 작품도 안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헌책방 주인에게 묻자 "그 책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다"라는대답이 돌아왔다. 1년쯤 전에 문의를 받았다고 했다. 어째서 그런 것을 기억하느냐 하면 나카쓰가와 씨라는 수집가가 끈덕지게 묻고 다니는 바람에 헌책방거리에서 조금 화제가 됐다는것이다.
"그런데 못 찾았다." - P119

어쨌거나 친구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나카쓰가와 씨에 관한 소문뿐, 막상 『열대』의 내용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세계 최대의 헌책방 거리에서 화제가 됐는데도 아무도 정체를 모른다는 것은 참 기이한 일이다.
"시라다마는 『열대』의 정체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데?"
시라이시 씨의 이름은 다마코라서 친구는 마음이 내킬 때면 갑자기 ‘시라다마‘라고 부르곤 했다. - P120

"...하나 생각한 게 있긴 한데."
『천일야화』와의 관계였다.
하리마 고개의 아파트를 찾아갔던 날, 지요 씨는 소파에 앉아 천일야화』를 읽고 있었다. 
(중략)
"『열대』와 『천일야화』는 뭔가 관계있는 걸까 싶어서." - P111

"반대일지도 모르잖아. 『열대』에 『천일야화』가 나오는 거야."
"그러게, 그런 패턴도 있겠네."
(중략)
"뭐, 실물이 없으니까 확인할 방법이 없네."
친구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나도 생각난 게 있는데"라며 뜸을 들였다. - P121

"......그거 정말 『열대』였어?"
정색하고 물으니 시라이시 씨는 괜히 불안해졌다. 꽤 오래전에 읽은 데다 실물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열대』를 읽은 사람들이 있다. 실물은 없어졌어도 학파 멤버들의 ‘추억‘은 남아 있다. - P122

"다시 말해서 말이지, 사실 『열대』라는 책은 존재하지 않는거야. 그건 학파 사람들의 바람 속에만 존재해, 너희가 읽었다고 믿는 건 실은 다 다른 책이야. 그걸 조합해서 『열대』라는 한권의 책을 날조하려고 하면 불일치가 생기는 건 당연하잖아? 그 모순을 ‘무풍대‘라고 부르면서 얼버무리는 거야."
(중략)
".....라는 가설을 세워봤는데, 어때?" - P122

시라이시 씨는 멈춰 서서 친구가 지적한 것을 돌이켜봤다.
사실 『열대』라는 책은 존재하지 않는 거야.
자신들은 『열대』를 읽은 게 아니라 『열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신조 군의 ‘언어적 독‘ 가설과 비슷한 정도로 황당무계한 가설이었지만 허튼소리라고 무시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그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진실일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 P123

"시라이시 씨."
그녀는 놀라 전화를 끊고 돌아봤다.
신조 군이 공터 울타리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홀쭉하게 여위어서 눈만 형형하게 빛났다. 분위기가 확실히 이상했다.
"신조 군? 어디 아파요?"
"아까 큰길에서 보고 쫓아왔어." 신조 군은 여유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 환영이 보여."
- P124

"잠깐만요, 신조 군." 시라이시 씨는 말했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태양이 구름에 가려져 뒷골목은 수몰되듯 어스름에 잠겨갔다. 신조 군은 울타리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시라이시 씨에게 서서히 다가오며 진범을 지적하듯 말했다.
"당신이 ‘보름달의 마녀 ‘지?"
시라이시 씨는 경악했다. - P125

주위 공간이 순간 일그러진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소리예요? 그럴 리 없잖아요." 미인
"자, 저주를 풀어 줘. 이제 수수께끼는 지긋지긋해."
서서히 다가오는 신조 군의 눈은 정상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자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쯤은 스스로 알 수 있다. 대체 신조 군은 어떤 망상같은 가설에 사로잡힌 걸까. - P125

시라이시 씨는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첫째는 신조 군의 ‘체력 부족‘을 만만히 본 것이었다. 탐정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 체력이 약해진 데다 최근 계속 수면 부족을 겪은 신조 군에게 거침없이 달려가는 시라이시 씨를 뒤쫓는 것은 무리였다. - P126

또 하나의 실수는 자신이 길치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신조 군을 떼치고 진보정 뒷길을 지그재그로 달리는 사이에 시라이시 씨는 길을 알 수 없게 됐다. ‘설마 여기까지 쫓아오지는 않겠지‘ 하고 한숨을 돌리려고 한 순간 신조 군의 궁상맞은 뒷모습이 보였다. - P126

중 2층 구석에서 난간 너머로 오락실 입구를 망보고 있으려니 아니나다를까 신조 군이 들어왔다. 게임기 불빛에 창백한얼굴이 비쳤다.
‘헉, 살인귀 같아.‘
그녀는 몸을 움츠리고 숨을 죽였다. - P127

그러고 보니 나카쓰가와 씨의 사무실이 진보정에 있다고 했다.
"쫓기고 있군요?"
"어떻게 아세요?"
"당신이 허겁지겁 들어오고 나서 신조 군이 보였으니까요.
그 친구 요새 분위기가 이상했거든요. 집요하게 시비를 걸어오는 바람네 저도 애먹는 중입니다." - P127

"저런 곳에 있으면 나갈 수 없잖아요."
그러나 나카쓰가와 씨는 침착했다.
"아가씨, 진보정은 우리 집 앞마당이랍니다."
나카쓰가와 씨는 오락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관계자외출입금지‘라고 쓰여 있는 작은 문이 있었다. 문을 지나자 건물 뒤로 나올 수 있었다. 눈앞에 콘크리트 벽이 있어 썰렁했다. - P128

나카쓰가와 씨가 그녀의 등을 계속 밀며 명랑하게 말했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거죠?"
"못 나갑니다."
".....못 나간다고요?"
그녀는 숨을 훅 들이마시며 멈춰 섰다.
"여기는 이야기의 막다른 골목이에요, 아가씨."
그 순간 뒤에서 문을 잠그는 차가운 소리가 났다.
"난 칼을 갖고 있으니까 쓸데없는 저항은 할 생각 말아요. 불을 켤 테니까 안으로 들어가서 소파에 앉아요. 고급 커피를 대접하죠.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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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애스터로이드 시티 - 아웃케이스 없음
웨스 앤더슨 감독, 제이슨 슈왈츠먼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23년 10월
평점 :
품절


각본가도 모르는 주인공의 심정 그리고 정체 모를 외계인.
세밀한 설정 그리고 장광한 대사.
배정되어 온 배우 그리고 도망치는 배우.

두 번 봐도 뭔 지는 모른 영화다.
그래도 이젠 ‘세상 일 어떻게든 되겠지‘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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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정치적 체험을 기초로 별도의 철학 체계를 세우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며, 엄밀히 보면 이는 철학의근대적 방향을 특징짓는 원칙이기도 하다. 그런 관점에서, 철학도 이제하나의 체험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점을 인정하고 나면,
이제 철학을, 철학에만 묻혀 논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 P296

반복하건대, 철학은 종합적인 작업의 방향에서만 가능성의 총체일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보기에 비교적 종합적이었던 것은 헤겔의 철학이다. 적어도 그의 초기의 변증 작업을 보면 에로티즘이 그의 이론의 일부를 공공연히 차지했는데, 아마 에로티즘의 체험은 얼핏 보기보다 그에게 더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 P297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는 철학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닥치는 대로 모든 것에 손을 대던 당시의 낭만주의 철학의 특성에 대해 강경한 반론을 제기한 철학자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그가 철학의 영역에서 즉흥적인 것을 몰아내 버런 잘못을 저질렀다고 탓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에서는 즉흥이 아예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헤겔의 빈틈없는 축조 (이것이 철학 용어라고 하더라도 이 용어를 쓰자면)는 특히 수집하게 해 주고, 수집과 체험을 분리시키게 해 주는 전문 분야로서의 가치를 갖추고 있다. - P297

헤겔의 철학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만 지적하고 넘어가면, 헤겔의 철학적 논리 전개는 전문성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헤겔 자신이 그러한 느낌을 못 벗어났던 듯하다. 그는, 반론을 예방하기 위해서, 철학도 시간 속의 전개이며 연속적 부분의 합으로진술되는 하나의 담론 체계임을 강조한 바 있다. 누구나 그렇게 인정할수 있다. - P298

전문화의 노력과 비교해 볼 때, 신성은 변덕스러운 것이다.
성자는 유효성을 찾지 않는다. 그를 자극하는 것은 오직 욕망뿐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에로티즘의 인간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이제 남은 일은 계획의 전문화, 다시 말해 계획의 유효성을 보장해 주는 전문화가 철학, 내가 위에서 말한 가능성의 총체와 종합 작업으로서의 철학의 본질에 가까운 것인지 아니면 욕망이 거기에 더 가까운 것인지를 가늠하는 일이다. - P299

이야기를 더 진행시키기 전에, 비록 본질을 언급하려고 하면 그때마다 기본적으로 부딪히는 난관이 없지 않지만 나는 그 점을 무릅쓰라도에로티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넘어가고 싶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성행위는 금기에 의해 금지를 당하며, 에로티즘의 영역은 그러한 금기들에 대한 위반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동물들의성행위와는 다르다. 에로티즘의 욕망은 금기를 눌러 이기는 욕망이다. - P299

(전략), 그러니까 오늘날 문제되는 나체라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그것들을 고찰할 수도 있다.
사실 나체에 대한 금기는 예나 지금이나 아주 강하게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나체 금기는 역사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며, 그래서 아무도 그것의 무상성, 상대적 부조리를 모르지 않을 뿐 아니라 에로티즘(에로티즘이 되어 버린 성행위, 인간의 성행위, 언어 능력이 있는 존재의 성행위)의 보편적 테마를 디공하는 것은 나체에 대한 금기와 위반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 P300

내 생각에는 우선 금기와 위반의ㅜ이론이 어디서 비롯되는디를 상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중략) 나는 개인적으로 그의 구두 강의를 들은 적이 없지만, 위반에 관한 마르셀 모스의이론은 제자인 로제 카유아의 작은 책자 인간과 신성에 잘 드러나 있다. 더욱 다행한 것은, 로제 카유아는 단순한 편집에 그치지 않고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예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다가 자신의 능동적이고도 확고한 사상까지 가미시켰다 - P300

 나는 여기에 카유아의 진술의 도식을 빌려오고 싶은데, 그의 진술에 의하면, 인종학이 다루는 미개인들의 시간은 세속적 시간과 신성의 시간으로 갈려 있었다고 한다. 세속적 시간이란 일상의 시간으로써 노동의 시간이자 금기를 준수하는 시간이었다. 반면 신성의 시간이란 축제의 시간, 다시 말해 금기를 위반하는 시간이었다. 에로티즘의 차원에서 볼 때 축제는 성적 방종의 시간이다. - P300

내가 비전문적인 철학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문 작업으로서의 철학은 말하자면 하나의 노동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철학은 내가 처음에 언급한 강렬한 감동적 순간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을뿐더러, 배제한다. - P301

사실 극단적 인간성, 즉 인간의 성행위와 죽음의 폭발을 외면한채 오직 평범한 인간성만을 설명할 뿐인 철학의 기만적인 결과에 놀라는 것은 내가 처음이 아닐 것이다. 내가 보기에 철학의 이러한 싸늘한측면에 대한 반발은 키에르케고르는 말할 것도 없고, 니체에서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근대 철학자들의 특징을 이룬다. 당연한 일이지만 철학은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P302

철학은 삶의 극단과 관련된 내가 어디에선가 ‘가능성의 극단‘이라고 표현한 것, 즉 철학적 대상의 극단을 끌어안지 못한 이유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죽음의 철학조차도 기본에 그친다면, 대상을 잊어버리고 만다. 물론 철학은 죽음에 파묻힐 때, 즉 죽음의 끝인 혼미에 자신을 내던질 때만 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 P302

그러한 가정은 철학적 계율을 인정하는 동시에 파기를 전제하는데그러면 이제 철학은 모든 가능성의 총체로서의 종합 작업이 될 수 있다. 그 총체는 종합이지 단순한 더하기가 아닌 것이 왜냐하면 그곳은인간의 노력이 한계를 드러내며, 인간이 무기력에 기꺼이 자신을 맡기는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계율이 없었다면 철학은 지금의 그 지점에이르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계율이 철학을 그것의 최종 목적지에 데려다 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경험적인 진리이다.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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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왔어요. 엘리베이터 타고 10층으로 올라와요. 1015호예요. 그냥 들어오면 돼요. 정면으로 쭉 들어와요."
시라이시 씨는 그나저나 참 번거롭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도 집에 올 때마다 이런 절차를 거칠까. 어이가 없었다. ‘꼭 무슨 의식 같네.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으로 올라가니 살풍경한 복도가 이어졌다. - P80

‘어디서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는데.
『열대』의 첫머리에 가까운 장면이었다. 남양의 섬에 표류한 주인공은 사야마 쇼이치라는 남자의 안내를 받아 밀림 속에 있는 기이한 건물로 간다. ‘관측소‘라고 불리는 그 건물은 사야마쇼이치를 그 섬에 파견했다는 수수께끼 조직인 ‘학파‘가 세웠다. - P81

베란다에 작은 원형테이블 하나가 보였다.
메리 셀레스트호에 얽힌 해양 기담처럼 테이블 위에는 아직도김이 오르는 하얀 커피잔과 눈에 익은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열대』였다.
시라이시 씨는 망연자실해서 멈춰 섰다.
"어서 와요, 시라이시 씨.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 P81

"왜 의자가 이렇게 많은 건가요?"
"사람에게는 저마다 앉아야 할 의자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미소 지었다. "이건 『열대』에 나온 대사지만요."
시라이시 씨는 머뭇머뭇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왜 그걸 골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밝은 주황색 천으로 앉는 자리를 감싼작은 원형 스툴이었다. - P82

시라이시 씨는 머뭇머뭇 말했다.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면 어떨까요?"
"어머, 이것도 본론이에요."
・・・・・・ 그런가요?"
"세상만사가 『열대』와 관계있답니다."
지요 씨는 수수깨끼 같은 미소를 지었다. - P84

유리문으로 비쳐드는 햇빛 속에 그녀가 책을 폈다.
"너와 관계없는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 그리하지 않으면 너는 원치 않는 것을 듣게 되리라."
그게 『열대』의 첫머리라는 것은 시라이시 씨도 기억하고 있었다. - P84

표지는 확실히 눈에 익었다. 붉은색과 파란색의 기하학무늬,
‘사야마 쇼이치‘ ‘열대‘라고 적힌 무뚝뚝한 글자. 빈말이라도 세련된 장정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30년도 더 된 책일 텐데 꼭 제본소에서 막 빠져나온 것처럼 새것이었다. 불길한 예감을 안고 책을 펴자 모든 페이지가 백지였다.
‘가짜잖아요. 너무한데요. 저를 놀리셨군요."
지요 씨는 즐겁게 웃었다. - P85

지요 씨는 책을 내밀었다.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언젠가 쓸모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더니 지요 씨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을 놀리려고 초대한 건 아니에요. 개인적인 인양 작업을 도와주었으면 해요." - P85

"나한테뿐 아니라 당신한테도 비장의 카드가 될 거니까요.
다른 분들은 모르는 것 같던데 사막의 궁전은 아주 중요한 장면이거든요. 왜냐하면 무풍대를 지나서 있으니까. 그게 무슨의미인지는 알겠죠?"
"무풍대를 통과할 수 있다는 뜻인가요?"
"그건 해봐야 알 수 있겠죠. 나랑 당신 기억을 엮어서 그 장면을 재현해 봐야 해요. 그래서 당신을 초대한 거예요." - P86

시라이시 씨는 휑뎅그렁한 황야에 서 있었다. 황무지를 둘러싸듯 커다란 모래 언덕이 있고 하늘은 눈이 시릴 만큼 파랗다.
옆에서 지요 씨가 어쩐지 다른 천체에 착륙한 느낌이라며 덧붙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문장을 읽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기억의 조각들을 주워 모으며 수수께끼 같은 황야를 뇌리에 그려갔다. 시라이시 씨는 "이게 진짜 인양 작업이군요" 하고 중얼거렸다. - P86

"봐요, 『천일야화』가 나왔죠?" 지요 씨가 말했다. "모든 게『열대』와 관계있어요."
"저도 조금은 알아요. 알라딘, 알리바바, 신드바드."
"그건 원래 『천일야화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나카쓰가와 씨한테 물어봐요. 자세히 알고 있으니까."
"전 그 사람이 불편해서요."
"안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 P87

폭풍 생각은 하면 안 된다고 지요 씨가 말했다.
언제나 폭풍에 가로막혀 그 이상 못 나갔다고 했다.
"이 궁전에 사는 사람은 누구죠? 생각해 봐요."
그러나 구름이 늘어나 맑은 하늘을 덮더니 굵은 빗방울이궁전 지붕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런 이미지가 멋대로 부풀어상상의 세계를 뒤덮으려 했다.
"폭풍 생각을 하면 안 돼요." - P88

"보름달의 마녀."
시라이시 씨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떴다.
"그 궁전에 사는 건 보름달의 마녀예요."
두 사람 모두 꿈나라에서 단숨에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 P88

"보름달의 마녀." 지요 씨는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이만 끝내죠"
"네? 벌써 끝이에요?" 시라이시 씨는 당황했다.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요."
아닌 게 아니라 ‘보름달의 마녀‘라는 말을 생각해 낼 수 있었지만, 그게 『열대』라는 소설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궁전이 무엇인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 P89

지요 씨는 딱하다는 듯 말했다. "학파 분들에게 전해 주세요. 난 오늘부로 학파를 그만두겠어요. 당신도 언젠가 진실을 깨닫게 될 거예요. 당신들이 읽은 『열대』는 가짜예요."
"・・・・・…가짜라고요?"
"내 『열대』만이 진짜랍니다."
몇 분 뒤 시라이시 씨는 아파트에서 나와 멍하니 서 있었다. - P89

적당한 찻집에 들어가 시라이시 씨가 가짜 『열대』를 테이블에 꺼내놓자 이케우치 씨는 앗, 하고 작게 소리치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꼼짝도 하지 않고 『열대』를 응시했다. 시라이시 씨는 자신도 똑같이 속아놓고 이케우치 씨가 워낙 순순히 속아 넘어가 주는 바람에 기쁜 반면 딱한 마음도 들었다.
"가짜예요, 이거." 시라이시 씨는 단박에 책을 폈다. "저도 지요 씨한테 속았지 뭐예요." - P90

하리마 고개의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전화 통화로 주고받은말, 의자와 소파가 흩어져 있는 기묘한 방, 베란다에 놓여 있던가짜 『열대』, 지요 씨의 어린 시절 추억, ‘사막의 궁전‘ 인양 작업 그리고 ‘보름달의 마녀‘,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인데도 벌써 현실감이 엷어져 먼 옛날 일을 이야기하는 기분이 들었다. - P90

이케우치 씨는 가짜 『열대』를 집어 들고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지요 씨가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모르겠단 말이죠. ‘당신들이 읽은 『열대』는 가짜예요. 내 『열대』만이 진짜랍니다."
"비유적인 표현일지도 모르죠. 시라이시 씨가 말했다. - P91

"지요 씨만이 진짜『열대』를 읽었고 우리가 읽은 『열대』는 전부 가짜였다는 겁니다. 흥미로운 가설 같지 않습니까?"
이케우치 씨는 노트를 펴고 백지에 선 하나를 그었다. - P91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무풍대의 수수께끼가 풀린단 말이죠 우리가 각각 다른 『열대』를 읽었다면 기억하는 조각이 일치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하나의 흐름으로재구성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처음부터 별개의 이야기니까요."  - P92

"그렇지만 『열대』는 사본이 아닌데요. 출판물이잖아요?"
"하지만 나카쓰가와 씨조차도 실물을 입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특수한 출판물이고 세상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는 건 전부 작가인 사야마 쇼이치가 꾸민 걸지도 몰라요. 한 권 한 권이 다 다른, 세상에 한 권뿐인 『열대』인 겁니다." - P92

한 달 만에 학파 사람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본 시라이시 씨는 문득 웃음이 났다.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확실히 『열대』에 얽힌 수수께끼는 흥미롭지만『열대』는 한 편의 소설에 불과하다. ‘학파니 뭐니 해도 요는 평범한 독서 모임 아닌가. - P93

"그 뒤 지요 씨께 몇 번 전화를 해봤습니다만 연락이 안 됩니다."
이케우치 씨가 말했다.
"지요 씨는 반칙을 할 생각인가 보군요."
"반칙이라뇨?"
"뻔하죠. 『열대』를 손에 넣는 겁니다."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일까. 그날 이야기해 본 인상으로는 지요 씨가 원하는 것이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P94

"우리는 이렇게 모여 1년도 더 넘게 『열대』에 관해 조사를벌여 왔습니다. 그동안 진전이 거의 없었습니다. 중대한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죠. 그런데 당신이 오자마자 꽤나 큰 발전이있군요."
"제가 뭔가 더 숨기는 게 있다는 말씀인가요?" - P94

"여러분, 좀 냉정을 되찾으시는 게 어떨까요? 『열대』는 그냥소설이에요.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을 만났으니까 수수께끼를 즐기면 되는 거예요. 전 아는 걸 전부 말했어요. 그런데 의심하신다면 전 두 번 다시 여기 오지 않겠습니다."
이윽고 이케우치 씨가 "맞는 말씀입니다"라고 동조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는 『열대』에 홀렸습니다. 정상이 아니에요." - P95

나카쓰가와 씨가 인양 작업 일람표를 펼쳤다.
지요 씨가 한 말을 믿는다면 사막의 궁전은 무풍대를 지나서 나온다. 이케우치 씨는 이야기의 후반에 펼쳐진 공백에 ‘사막의 궁전‘이라고 썼다. 화살표를 그리고 ‘보름달의 마녀?‘라고덧붙였다. 그러나 그 이름을 기억하는 학파 멤버는 없었다.
나카쓰가와 씨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그건 ‘마왕‘ 하고 다른 인물입니까?" - P95

마왕은 『열대』에 등장하는 마술사다. ‘창조의 마술‘로 섬들을 만들어 내고 주인공이 표류한 해역을 지배한다. - P95

이케우치 씨는 머뭇머뭇 지난번 내놓았던 가설을 설명했다.
자신들이 읽은 사야마 쇼이치의 『열대』는 전부 내용이 각기 다른 책이었다는 가설이다.
나카쓰가와 씨는 뜻밖에 흥미가 동한 듯했다.
"재미있는 가설이군요. 현실적이진 않지만 저는 좋은데요." - P96

"애초에 왜 끝까지 읽은 사람이 없는 걸까요?"
"지난번에는 나카쓰가와 씨가 우연이라고 하셨는데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우리는 다들 『열대』를끝까지 읽으려고 했습니다. 도중에 그만둔 게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책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렇디만 보세요, 책은 물체 아닙니까? 확고하게 그곳에 있는 겁니다. ‘읽는 도중에 사라지는 책‘은 만들 수 없어요. 무슨 마술도 아니고." - P97

(전략)
"방금 그 이야기를 듣고 하나 생각난 게 있는데요."
"뭡니까, 탐정 군."
"물리적인 독이 아니라도 되지 않을까요. 전 언어학이 전공인데, 언어 자체라기보다 언어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심이 있어서 전부터 최면이나 자기 암시에 관해 여러모로 조사해왔거든요. 그래서 생각났는데, 말하자면 열대에 언어적인 독이 있었다면 어떨까요?" - P99

이케우치 씨의 질문에도 신조 군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만약 『열대』의 목적이 암시에 있는 거라면 이야기 자체는중요하지 않아요. 서두 부분은 우리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썼습니다. 그건 먹잇감을 유인하기 위한 덫이죠. ‘언어적인독‘이 있는 건 그 다음이에요. 거기까지 유인하고 나면 이야기의 맥락 같은 긴 필요 없거든요. 중반 이후 우리 기억이 일치하지 않는 것도, 일관된 이야기를 찾지 못하는 것도 애초에 그런게 없기 때문이에요. 무풍대는 언어적인 독을 감춘 장소에 불과한 거죠." - P100

신조 군은 문득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죠. 시라이시 씨말처럼 『열대』는 그냥 소설이거든요.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푹 빠져 있는 걸까요. 꼭 저주 같잖아요." - P100

시라이시 씨가 두 번째로 참가한 학파 모임은 멤버들이 각각 『열대』에 관한 황당무계한 가설만 제시하고 끝났다. 그러나 결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학파 멤버 전원이 『열대』에 홀려 있다는 것만은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꼭 저주 같잖아요.
신조 군이 한 말이 마음에 남아 있었다. - P101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편 뒤 지요 씨가 준 가짜 『열대』를 생각했다. 학파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는데 꺼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뭐, 상관없다. 어차피 가짜인데.
‘좀 더 냉정해져야지‘
학과 내에서만 『열대』이야기를 하는 게 문제다. 시라이시씨는 학창 시절 친구에게 전화를 해봤다.
"야호, 오랜만이네. 웬일이야?"
친구 모스키를 드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나는 듯했다. - P103

"그렇지만 재미있겠는데. 좀 조사해 볼게." 친구는 말했다.
"다음에 같이 밥 먹자."
그때부터 시라이시 씨는 앓아누워 그다음 주까지 일어나지못했다. 병원 검사 결과 유행성 독감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열이 유달리 내리지 않아 화장실에 가기도 힘겨울 정도였다. 감기에 걸리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 P104

고열에 시달렸던 사흘 동안 그녀는 『열대』와 관련된 꿈을 종종 꾸었다.
하나같이 단편적이고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여 있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남양의 섬이 나왔다가, 찻집 메리에서 열린 모임이 나왔다가, 하리마 고개의 아파트가 나왔다가 했다. 열 때문에 정신이 몽롱한 데다 커튼 친 방에 몸져누워 있다보니 자칫하면 자신이 어디 있는 건지 알 수 없어지곤 했다. 사막의 궁전도 꿈에 등장했다. 모래에 파묻힌 텅 빈 궁전을 홀로 끝없이 방황하는 꿈이었는데, 꼭 진짜 기억처럼 현실감이 느껴졌다. - P104

 금요일에야 만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점심 지나 뜻밖에 이케우치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중략)
"………이케우치 씨, 무슨 일 있으세요?"
"금요일 밤에 교토로 갑니다." 이케우치 씨는 말했다. "낮에 모형 상점에 찾아뵐 수 없는데 저녁에 식사를 같이 할 수 없을까요? 교토로 가기 전에 『열대』에 관해 꼭 드릴 말씀이 있거든요.‘ 시라이시 씨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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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공백의 시간


구름이 하늘을 가득 뒤덮었다. 아까는 달빛도 비쳤는데 이제 별빛하나 보이지 않는다.
겐지가 손전등으로 탑을 비췄다.
몇 단인가 되는 계단이 앞에 있는 탑 입구의 두 짝 문이 보였다. 이문이나 그 위에 튀어나온 짧은 처마나 주위의 벽도 온통 밤의 어둠속으로 녹아들 것만 같은 검은색뿐이다. - P112

 나는 머릿속으로 그 모양을 그려보았다. 서로 같은 각도로 만나는 같은 길이를 지닌 열 개의 변. 하나의 내각은 144 도라는 계산이나온다. 서양식 탑에서 뜻밖에 자주 볼 수 있는 육각형이나 팔각형보다 당연히 훨씬 원에 가까운 도형이다. - P113

겐지는 말을 잇지 않고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내내 탑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불쑥 나를 쳐다보았다.
"줄리앙 니콜로디라는 이름을 아나?"
겐지가 내게 물었다.
나는 허를 찔린 기분으로, "글쎄요"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P115

힐끔 나를 쳐다보고, 겐지는 탑 입구로 발길을 옮겼다. 나는 서둘러그 뒤를 따랐다. 땅바닥에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 검은 문 앞에 섰다.
"늘 자물쇠가 걸려 있다고 츠루코 씨에게 말했죠."
"응, 그럴 텐데."
겐지는 문 손잡이 부근을 비췄다.
"어? 아하, 이렇게 된 건가?"
자물쇠가 풀려 있나 보죠?"
"- 망가졌어." - P116

2

서늘한 습기를 머금은 짙은 어둠을 손전등 불빛으로 더듬었다.
지저분한 벽, 먼지투성이인 바닥,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판자 조각과 막대기 조각들………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내부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를 제대로 관찰하기 위해서는 손에든 손전등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 P117

탑의 꼭대기 층은 3층이었다.
다 올라가자 겐지는 바로 옆의 벽에 손전등 불빛을 향하더니 "좋았어" 라고 중얼거렸다.
"다행이군. 초가 남아 있네"
겐지가 라이터를 켜고 초에 불을 붙였다. 불꽃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시야를 좁히고 있던 어둠이 천천히 옅어져갔다. - P118

대충 설명하자면 정십각형의 바닥면 전체가 두 부분으로 나뉘어있었다. 우리가 서 있는 계단 언저리의 한 부분과 나머지 부분. 다만칸막이벽이 전면 목조 창살로 되어있어, 이 위치에서도 방전체의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 층이 툭 트인 공간으로 되어 있었다.
"이건"
나는 겐지를 바라보았다.
"마치 무슨・・・・・…."
마치 감옥 같다고 느꼈다. 창살로 나뉜 맞은편 쪽이 감옥 안, 이쪽이 바깥. - P119

"이 방은 대체 뭐하는?"
"뭐하는 방으로 보이나?"
겐지가 되물었다.
"아까 뭔가 이야기하려고 했잖아?"
"아, 그건."
"감옥 같다고?"
"예."
겐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깊은 숨을 들이쉬고 토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맞았네." - P120

"누구를 여기에?"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겐지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비밀이야. 그건 우라도 가문의 비밀. 그걸 알게 되면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걸." - P120

겐지는 몸을 돌려 방 안쪽으로 갔다. 손전등 불빛에 활짝 열려 있는 창문이 보였다.
"여기는 창문이 네 개 있어. 그 중에 발코니가 있는 것은 분명히 이것 하나뿐이지."
바닥에서 어른 키 높이까지가 창인 그것은 두 짝짜리 덧창이었다.
하지만 안쪽에 유리 창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 비를 막는 문 역할을 하는 판자문이 붙어 있었다. 발코니로 나가서야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상하다면 이상한 모습이었다. - P122

"이 아래로군. 틀림없어."
그러면서 겐지는 난간에서 떨어져 발코니 바닥을 살피기 시작했다.
"발자국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으음, 지금은 확실치 않군. 탑 안에는 남아 있는데."
"발자국이? 그래요?"
"아니, 눈치 채지 못했나? 하긴 이렇게 어두우니 할 수 없겠지."
당연한 이야기이기는 했다. 오래 사람이 출입하지 않은, 따라서 물론 청소도 하지 않았을 건물이다.  - P123

"이런 걸 발견했어."
그렇게 말하며 겐지는 왼손을 내밀었다. 나는 들고 있던 손전등 불빛으로 겐지의 손을 비췄다.
" - 시계?"
"그래. 회중시계야. 은으로 된 줄이 달려 있군." - P123

"문자판 유리는 무사한데, 바늘은 멈춰있네. 떨어지면서 망가진건가? - 여섯 시 반 지진이 일어났던 시각이지? 딱 들어맞는군."
"맞습니다."
"어?"
"뭔가, 또?"
"뒷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건・・・・・…."
겐지는 오른손의 손전등을 고쳐 쥐면서 왼손에 든 시계를 얼굴 앞으로 들어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 P124

"TE, 라고 되어 있네."
"TE...… 이니셜일까요?"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겐지는 회중시계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이 시계가 그 정년 물건이란 건 일단 틀림없을 거야. 그리고 이T-E라는 이니셜. 이게 그 친구 이름 머리글자일 가능성도 매우 높고,
어쨌든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겨우 발견되었군." - P124

내가 우라도 겐지와 처음 만난 것은 올 봄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이야기하면 지금으로부터 5개월 전- 4월 하순의 어느 날 밤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건물들, 특히 오래된 서양식 건물들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를 여러 날 쉴 때면 여기저기 여행을 하며 곳곳의 많은 건축물을 보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다행히도 고등학생 주제에 어쩌고 하며 그런 행동을 뭐라 하는 사람은 내 주변에 없었다.
물론 저 녀석은 좀 이상한 녀석이니까‘ 하는 생각이 주위 사람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날은 기타구北区 니시가하라西ヶ原에 있는 옛 후루카와 남작의 저택을 보러갈 생각이었다. 유명한 영국인 건축가 조셔 콘 JosiahCondler(1852~1920). 일본 건축 초창기에 크게 기여한 건축가가 지은 북방 고딕 양식을 갖춘 중후한 석조 서양식 저택이었다. 이 저택에 대해서는 이미알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한번도 가볼 기회가 없었다. - P126

...... 여기까지다. 내 기억이 또렷한 것은.
그 뒤의 일에 관해서는 분명히 내가 한 행동이고 체험일 텐데 무엇하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끊어진 기억.
공백의 시간 머릿속에 남은 그 다음 기억은 병원의 약 냄새 나는 침대에 누운나를 낯선 사람들이 둘러서서 지켜보는 장면이다. - P126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머리에 둔한 통증을 느꼈지만 움직이는 것 자체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 나는 대체 누굴까?
초조한 의문이 옅은 안개가 깔린 듯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왜 내가 여기서 이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화요일 - 4월 22일 아침의 일이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우라도 겐지와의 첫 만남이었지만, 겐지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 P128

그때, 또는 그 뒤에 겐지의 입을 통해 들은 객관적인 정보로 파악할 수 있었던 ‘사실‘은 이러했다.
일요일 밤 7시 30분경, 나는 고이시카와식물원 옆에 있었다.
옛 후루카와 지태에서 거기까지, 상당한 거리를 똑바로 남쪽으로내려왔다는 이야기다. 빗속을 걸어온 것인지, 아니면 무슨 교통수단을 이용해 이동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센다기에 있는 하숙집으로가지 않고 왜 그런 곳에 있었던 걸까? 물론 이유가 있어서 한 행동이었을 테지만 그 까닭을 나는 알지 못한다. - P128

겐지는 깜짝 놀라 나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내 반응은 뜻밖이었다고 한다. 도랑에 얼굴을 처박고 엎어져 있을 뿐,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넘어질 때 머리 어딘가를 세게 부딪힌 모양이었다.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응급조치를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사실을 겐지는 바로 깨달았다.  - P129

그렇게 병원으로 옮겨진 나는 그 병원에서 신속한 치료와 검사를 받았다.
치료 과정의 비교적 초기 단계에서 나는 일단 의식만은 쉽게 되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사실도, 그때 의사나 겐지로부터 들었던 설명들도,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의식은 돌아왔지만, 어쩌다 사고를 당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였다. - P130

"교통사고 같은 것을 당했을 때, 사고를 당하기 어느 정도 전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뒤의 기억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닙니다."
담당 의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렇지만 학생의 경우에는 사고 발생 이후는 물론이고 - 당신 자신의 과거에 관한 기억 대부분을 현재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건 꽤 드문 증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지니고 있던 스케치북이나 가방은 모두 겐지가 병원까지 갖다주었다. - P130

"일시적인 기억상실 상태. 몸에 이상은 보이지 않으니, 굳이 이야기하자면 심인성, 또는 쇼크에 의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됩니까?"
담당의사의 견해는 낙관적이었다.
"너무 심하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문득 모든 것이 기억날 때가 올 겁니다. 지나치게 초조해하지 말고, 일단 천천히 요양을 하도록 하죠." - P131

다. 이렇게 되새겨보면 그날 그 병실에서 겐지와 만났던 그때부터 나는 내내 자신이 그때까지 살아왔던 현실과는 미묘하게 괴리된 묘하게 실체감이 옅은 세계 속을 계속 방황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구마모토 산속에 있는, 암흑관이라 불리는 이 기묘한 저택을 방문하고 있는 것도 분명히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 P132

4

‘십각탑‘ 을 나와 우리는 바로 섬의 문으로 향했다. 겐지가 선착장을 살펴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청년이 어떻게 이 섬으로 건너왔는지, 역시 신경 쓰이지 않나?"
나무들 사이로 난 오솔길을 잰걸음으로 걸으며 겐지는 그 이유를설명했다. - P132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정보인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겐지는 그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실제로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엄청난 양의 커다란 자연석으로 단단하게 쌓아올린 이높은 ‘성벽‘. 아무리 풍부한 자금이 있었다 해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이런 것을 처음부터 쌓을 생각은 어지간해서는 하지 못할 테니까. - P133

"당시에 이 집에 들어와 살던 일꾼의 아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지만 말이야. 아이가 헤엄치다가 빠진 것을 어머니가 구해내려다 그만 두 사람 다."
나는 계속 물이 찰랑거리는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겐지가 말을 이었다. - P134

긴 돌계단을 내려와 기슭에 있는 잔교로 걸어가고 있었다. 겐지는나와의 대화를 중단하고 손전등 불빛을 그쪽으로 비쳤다. 겐지는 당연히 그 문제의 배가 거기 떠 있는 광경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 - 없군."
잔교에서 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 - P134

"배 말고 뭔가 섬으로 건너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건가요?"
"그래, 있네."
겐지는 대답을 하다가 "어?" 하며 눈썹을 찡그렸다. 오른손에 든 손전등을 고쳐 들더니 잔교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츄야, 저기." - P135

겐지는 잔교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수면으로 불빛을 비추고 있었다. 깊은 어둠의 틈새에 이상하게 출렁이는 물결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힘없이 흔들리는 검은 그림자.
-배다.
"어째서 저기에…..…."
"저 배를 섬까지 타고 온 다음에 제대로 로프에 묶어두지 않았던거로군. 그래서 떠내려간 거야."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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