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공백의 시간


구름이 하늘을 가득 뒤덮었다. 아까는 달빛도 비쳤는데 이제 별빛하나 보이지 않는다.
겐지가 손전등으로 탑을 비췄다.
몇 단인가 되는 계단이 앞에 있는 탑 입구의 두 짝 문이 보였다. 이문이나 그 위에 튀어나온 짧은 처마나 주위의 벽도 온통 밤의 어둠속으로 녹아들 것만 같은 검은색뿐이다. - P112

 나는 머릿속으로 그 모양을 그려보았다. 서로 같은 각도로 만나는 같은 길이를 지닌 열 개의 변. 하나의 내각은 144 도라는 계산이나온다. 서양식 탑에서 뜻밖에 자주 볼 수 있는 육각형이나 팔각형보다 당연히 훨씬 원에 가까운 도형이다. - P113

겐지는 말을 잇지 않고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내내 탑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불쑥 나를 쳐다보았다.
"줄리앙 니콜로디라는 이름을 아나?"
겐지가 내게 물었다.
나는 허를 찔린 기분으로, "글쎄요"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P115

힐끔 나를 쳐다보고, 겐지는 탑 입구로 발길을 옮겼다. 나는 서둘러그 뒤를 따랐다. 땅바닥에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 검은 문 앞에 섰다.
"늘 자물쇠가 걸려 있다고 츠루코 씨에게 말했죠."
"응, 그럴 텐데."
겐지는 문 손잡이 부근을 비췄다.
"어? 아하, 이렇게 된 건가?"
자물쇠가 풀려 있나 보죠?"
"- 망가졌어." - P116

2

서늘한 습기를 머금은 짙은 어둠을 손전등 불빛으로 더듬었다.
지저분한 벽, 먼지투성이인 바닥,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판자 조각과 막대기 조각들………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내부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를 제대로 관찰하기 위해서는 손에든 손전등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 P117

탑의 꼭대기 층은 3층이었다.
다 올라가자 겐지는 바로 옆의 벽에 손전등 불빛을 향하더니 "좋았어" 라고 중얼거렸다.
"다행이군. 초가 남아 있네"
겐지가 라이터를 켜고 초에 불을 붙였다. 불꽃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시야를 좁히고 있던 어둠이 천천히 옅어져갔다. - P118

대충 설명하자면 정십각형의 바닥면 전체가 두 부분으로 나뉘어있었다. 우리가 서 있는 계단 언저리의 한 부분과 나머지 부분. 다만칸막이벽이 전면 목조 창살로 되어있어, 이 위치에서도 방전체의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 층이 툭 트인 공간으로 되어 있었다.
"이건"
나는 겐지를 바라보았다.
"마치 무슨・・・・・…."
마치 감옥 같다고 느꼈다. 창살로 나뉜 맞은편 쪽이 감옥 안, 이쪽이 바깥. - P119

"이 방은 대체 뭐하는?"
"뭐하는 방으로 보이나?"
겐지가 되물었다.
"아까 뭔가 이야기하려고 했잖아?"
"아, 그건."
"감옥 같다고?"
"예."
겐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깊은 숨을 들이쉬고 토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맞았네." - P120

"누구를 여기에?"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겐지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비밀이야. 그건 우라도 가문의 비밀. 그걸 알게 되면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걸." - P120

겐지는 몸을 돌려 방 안쪽으로 갔다. 손전등 불빛에 활짝 열려 있는 창문이 보였다.
"여기는 창문이 네 개 있어. 그 중에 발코니가 있는 것은 분명히 이것 하나뿐이지."
바닥에서 어른 키 높이까지가 창인 그것은 두 짝짜리 덧창이었다.
하지만 안쪽에 유리 창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 비를 막는 문 역할을 하는 판자문이 붙어 있었다. 발코니로 나가서야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상하다면 이상한 모습이었다. - P122

"이 아래로군. 틀림없어."
그러면서 겐지는 난간에서 떨어져 발코니 바닥을 살피기 시작했다.
"발자국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으음, 지금은 확실치 않군. 탑 안에는 남아 있는데."
"발자국이? 그래요?"
"아니, 눈치 채지 못했나? 하긴 이렇게 어두우니 할 수 없겠지."
당연한 이야기이기는 했다. 오래 사람이 출입하지 않은, 따라서 물론 청소도 하지 않았을 건물이다.  - P123

"이런 걸 발견했어."
그렇게 말하며 겐지는 왼손을 내밀었다. 나는 들고 있던 손전등 불빛으로 겐지의 손을 비췄다.
" - 시계?"
"그래. 회중시계야. 은으로 된 줄이 달려 있군." - P123

"문자판 유리는 무사한데, 바늘은 멈춰있네. 떨어지면서 망가진건가? - 여섯 시 반 지진이 일어났던 시각이지? 딱 들어맞는군."
"맞습니다."
"어?"
"뭔가, 또?"
"뒷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건・・・・・…."
겐지는 오른손의 손전등을 고쳐 쥐면서 왼손에 든 시계를 얼굴 앞으로 들어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 P124

"TE, 라고 되어 있네."
"TE...… 이니셜일까요?"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겐지는 회중시계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이 시계가 그 정년 물건이란 건 일단 틀림없을 거야. 그리고 이T-E라는 이니셜. 이게 그 친구 이름 머리글자일 가능성도 매우 높고,
어쨌든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겨우 발견되었군." - P124

내가 우라도 겐지와 처음 만난 것은 올 봄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이야기하면 지금으로부터 5개월 전- 4월 하순의 어느 날 밤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건물들, 특히 오래된 서양식 건물들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를 여러 날 쉴 때면 여기저기 여행을 하며 곳곳의 많은 건축물을 보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다행히도 고등학생 주제에 어쩌고 하며 그런 행동을 뭐라 하는 사람은 내 주변에 없었다.
물론 저 녀석은 좀 이상한 녀석이니까‘ 하는 생각이 주위 사람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날은 기타구北区 니시가하라西ヶ原에 있는 옛 후루카와 남작의 저택을 보러갈 생각이었다. 유명한 영국인 건축가 조셔 콘 JosiahCondler(1852~1920). 일본 건축 초창기에 크게 기여한 건축가가 지은 북방 고딕 양식을 갖춘 중후한 석조 서양식 저택이었다. 이 저택에 대해서는 이미알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한번도 가볼 기회가 없었다. - P126

...... 여기까지다. 내 기억이 또렷한 것은.
그 뒤의 일에 관해서는 분명히 내가 한 행동이고 체험일 텐데 무엇하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끊어진 기억.
공백의 시간 머릿속에 남은 그 다음 기억은 병원의 약 냄새 나는 침대에 누운나를 낯선 사람들이 둘러서서 지켜보는 장면이다. - P126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머리에 둔한 통증을 느꼈지만 움직이는 것 자체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 나는 대체 누굴까?
초조한 의문이 옅은 안개가 깔린 듯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왜 내가 여기서 이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화요일 - 4월 22일 아침의 일이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우라도 겐지와의 첫 만남이었지만, 겐지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 P128

그때, 또는 그 뒤에 겐지의 입을 통해 들은 객관적인 정보로 파악할 수 있었던 ‘사실‘은 이러했다.
일요일 밤 7시 30분경, 나는 고이시카와식물원 옆에 있었다.
옛 후루카와 지태에서 거기까지, 상당한 거리를 똑바로 남쪽으로내려왔다는 이야기다. 빗속을 걸어온 것인지, 아니면 무슨 교통수단을 이용해 이동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센다기에 있는 하숙집으로가지 않고 왜 그런 곳에 있었던 걸까? 물론 이유가 있어서 한 행동이었을 테지만 그 까닭을 나는 알지 못한다. - P128

겐지는 깜짝 놀라 나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내 반응은 뜻밖이었다고 한다. 도랑에 얼굴을 처박고 엎어져 있을 뿐,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넘어질 때 머리 어딘가를 세게 부딪힌 모양이었다.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응급조치를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사실을 겐지는 바로 깨달았다.  - P129

그렇게 병원으로 옮겨진 나는 그 병원에서 신속한 치료와 검사를 받았다.
치료 과정의 비교적 초기 단계에서 나는 일단 의식만은 쉽게 되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사실도, 그때 의사나 겐지로부터 들었던 설명들도,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의식은 돌아왔지만, 어쩌다 사고를 당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였다. - P130

"교통사고 같은 것을 당했을 때, 사고를 당하기 어느 정도 전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뒤의 기억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닙니다."
담당 의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렇지만 학생의 경우에는 사고 발생 이후는 물론이고 - 당신 자신의 과거에 관한 기억 대부분을 현재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건 꽤 드문 증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지니고 있던 스케치북이나 가방은 모두 겐지가 병원까지 갖다주었다. - P130

"일시적인 기억상실 상태. 몸에 이상은 보이지 않으니, 굳이 이야기하자면 심인성, 또는 쇼크에 의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됩니까?"
담당의사의 견해는 낙관적이었다.
"너무 심하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문득 모든 것이 기억날 때가 올 겁니다. 지나치게 초조해하지 말고, 일단 천천히 요양을 하도록 하죠." - P131

다. 이렇게 되새겨보면 그날 그 병실에서 겐지와 만났던 그때부터 나는 내내 자신이 그때까지 살아왔던 현실과는 미묘하게 괴리된 묘하게 실체감이 옅은 세계 속을 계속 방황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구마모토 산속에 있는, 암흑관이라 불리는 이 기묘한 저택을 방문하고 있는 것도 분명히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 P132

4

‘십각탑‘ 을 나와 우리는 바로 섬의 문으로 향했다. 겐지가 선착장을 살펴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청년이 어떻게 이 섬으로 건너왔는지, 역시 신경 쓰이지 않나?"
나무들 사이로 난 오솔길을 잰걸음으로 걸으며 겐지는 그 이유를설명했다. - P132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정보인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겐지는 그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실제로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엄청난 양의 커다란 자연석으로 단단하게 쌓아올린 이높은 ‘성벽‘. 아무리 풍부한 자금이 있었다 해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이런 것을 처음부터 쌓을 생각은 어지간해서는 하지 못할 테니까. - P133

"당시에 이 집에 들어와 살던 일꾼의 아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지만 말이야. 아이가 헤엄치다가 빠진 것을 어머니가 구해내려다 그만 두 사람 다."
나는 계속 물이 찰랑거리는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겐지가 말을 이었다. - P134

긴 돌계단을 내려와 기슭에 있는 잔교로 걸어가고 있었다. 겐지는나와의 대화를 중단하고 손전등 불빛을 그쪽으로 비쳤다. 겐지는 당연히 그 문제의 배가 거기 떠 있는 광경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 - 없군."
잔교에서 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 - P134

"배 말고 뭔가 섬으로 건너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건가요?"
"그래, 있네."
겐지는 대답을 하다가 "어?" 하며 눈썹을 찡그렸다. 오른손에 든 손전등을 고쳐 들더니 잔교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츄야, 저기." - P135

겐지는 잔교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수면으로 불빛을 비추고 있었다. 깊은 어둠의 틈새에 이상하게 출렁이는 물결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힘없이 흔들리는 검은 그림자.
-배다.
"어째서 저기에…..…."
"저 배를 섬까지 타고 온 다음에 제대로 로프에 묶어두지 않았던거로군. 그래서 떠내려간 거야."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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