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왔어요. 엘리베이터 타고 10층으로 올라와요. 1015호예요. 그냥 들어오면 돼요. 정면으로 쭉 들어와요." 시라이시 씨는 그나저나 참 번거롭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도 집에 올 때마다 이런 절차를 거칠까. 어이가 없었다. ‘꼭 무슨 의식 같네.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으로 올라가니 살풍경한 복도가 이어졌다. - P80
‘어디서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는데. 『열대』의 첫머리에 가까운 장면이었다. 남양의 섬에 표류한 주인공은 사야마 쇼이치라는 남자의 안내를 받아 밀림 속에 있는 기이한 건물로 간다. ‘관측소‘라고 불리는 그 건물은 사야마쇼이치를 그 섬에 파견했다는 수수께끼 조직인 ‘학파‘가 세웠다. - P81
베란다에 작은 원형테이블 하나가 보였다. 메리 셀레스트호에 얽힌 해양 기담처럼 테이블 위에는 아직도김이 오르는 하얀 커피잔과 눈에 익은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열대』였다. 시라이시 씨는 망연자실해서 멈춰 섰다. "어서 와요, 시라이시 씨.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 P81
"왜 의자가 이렇게 많은 건가요?" "사람에게는 저마다 앉아야 할 의자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미소 지었다. "이건 『열대』에 나온 대사지만요." 시라이시 씨는 머뭇머뭇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왜 그걸 골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밝은 주황색 천으로 앉는 자리를 감싼작은 원형 스툴이었다. - P82
시라이시 씨는 머뭇머뭇 말했다.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면 어떨까요?" "어머, 이것도 본론이에요." ・・・・・・ 그런가요?" "세상만사가 『열대』와 관계있답니다." 지요 씨는 수수깨끼 같은 미소를 지었다. - P84
유리문으로 비쳐드는 햇빛 속에 그녀가 책을 폈다. "너와 관계없는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 그리하지 않으면 너는 원치 않는 것을 듣게 되리라." 그게 『열대』의 첫머리라는 것은 시라이시 씨도 기억하고 있었다. - P84
표지는 확실히 눈에 익었다. 붉은색과 파란색의 기하학무늬, ‘사야마 쇼이치‘ ‘열대‘라고 적힌 무뚝뚝한 글자. 빈말이라도 세련된 장정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30년도 더 된 책일 텐데 꼭 제본소에서 막 빠져나온 것처럼 새것이었다. 불길한 예감을 안고 책을 펴자 모든 페이지가 백지였다. ‘가짜잖아요. 너무한데요. 저를 놀리셨군요." 지요 씨는 즐겁게 웃었다. - P85
지요 씨는 책을 내밀었다.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언젠가 쓸모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더니 지요 씨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을 놀리려고 초대한 건 아니에요. 개인적인 인양 작업을 도와주었으면 해요." - P85
"나한테뿐 아니라 당신한테도 비장의 카드가 될 거니까요. 다른 분들은 모르는 것 같던데 사막의 궁전은 아주 중요한 장면이거든요. 왜냐하면 무풍대를 지나서 있으니까. 그게 무슨의미인지는 알겠죠?" "무풍대를 통과할 수 있다는 뜻인가요?" "그건 해봐야 알 수 있겠죠. 나랑 당신 기억을 엮어서 그 장면을 재현해 봐야 해요. 그래서 당신을 초대한 거예요." - P86
시라이시 씨는 휑뎅그렁한 황야에 서 있었다. 황무지를 둘러싸듯 커다란 모래 언덕이 있고 하늘은 눈이 시릴 만큼 파랗다. 옆에서 지요 씨가 어쩐지 다른 천체에 착륙한 느낌이라며 덧붙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문장을 읽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기억의 조각들을 주워 모으며 수수께끼 같은 황야를 뇌리에 그려갔다. 시라이시 씨는 "이게 진짜 인양 작업이군요" 하고 중얼거렸다. - P86
"봐요, 『천일야화』가 나왔죠?" 지요 씨가 말했다. "모든 게『열대』와 관계있어요." "저도 조금은 알아요. 알라딘, 알리바바, 신드바드." "그건 원래 『천일야화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나카쓰가와 씨한테 물어봐요. 자세히 알고 있으니까." "전 그 사람이 불편해서요." "안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 P87
폭풍 생각은 하면 안 된다고 지요 씨가 말했다. 언제나 폭풍에 가로막혀 그 이상 못 나갔다고 했다. "이 궁전에 사는 사람은 누구죠? 생각해 봐요." 그러나 구름이 늘어나 맑은 하늘을 덮더니 굵은 빗방울이궁전 지붕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런 이미지가 멋대로 부풀어상상의 세계를 뒤덮으려 했다. "폭풍 생각을 하면 안 돼요." - P88
"보름달의 마녀." 시라이시 씨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떴다. "그 궁전에 사는 건 보름달의 마녀예요." 두 사람 모두 꿈나라에서 단숨에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 P88
"보름달의 마녀." 지요 씨는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이만 끝내죠" "네? 벌써 끝이에요?" 시라이시 씨는 당황했다.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요." 아닌 게 아니라 ‘보름달의 마녀‘라는 말을 생각해 낼 수 있었지만, 그게 『열대』라는 소설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궁전이 무엇인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 P89
지요 씨는 딱하다는 듯 말했다. "학파 분들에게 전해 주세요. 난 오늘부로 학파를 그만두겠어요. 당신도 언젠가 진실을 깨닫게 될 거예요. 당신들이 읽은 『열대』는 가짜예요." "・・・・・…가짜라고요?" "내 『열대』만이 진짜랍니다." 몇 분 뒤 시라이시 씨는 아파트에서 나와 멍하니 서 있었다. - P89
적당한 찻집에 들어가 시라이시 씨가 가짜 『열대』를 테이블에 꺼내놓자 이케우치 씨는 앗, 하고 작게 소리치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꼼짝도 하지 않고 『열대』를 응시했다. 시라이시 씨는 자신도 똑같이 속아놓고 이케우치 씨가 워낙 순순히 속아 넘어가 주는 바람에 기쁜 반면 딱한 마음도 들었다. "가짜예요, 이거." 시라이시 씨는 단박에 책을 폈다. "저도 지요 씨한테 속았지 뭐예요." - P90
하리마 고개의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전화 통화로 주고받은말, 의자와 소파가 흩어져 있는 기묘한 방, 베란다에 놓여 있던가짜 『열대』, 지요 씨의 어린 시절 추억, ‘사막의 궁전‘ 인양 작업 그리고 ‘보름달의 마녀‘,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인데도 벌써 현실감이 엷어져 먼 옛날 일을 이야기하는 기분이 들었다. - P90
이케우치 씨는 가짜 『열대』를 집어 들고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지요 씨가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모르겠단 말이죠. ‘당신들이 읽은 『열대』는 가짜예요. 내 『열대』만이 진짜랍니다." "비유적인 표현일지도 모르죠. 시라이시 씨가 말했다. - P91
"지요 씨만이 진짜『열대』를 읽었고 우리가 읽은 『열대』는 전부 가짜였다는 겁니다. 흥미로운 가설 같지 않습니까?" 이케우치 씨는 노트를 펴고 백지에 선 하나를 그었다. - P91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무풍대의 수수께끼가 풀린단 말이죠 우리가 각각 다른 『열대』를 읽었다면 기억하는 조각이 일치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하나의 흐름으로재구성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처음부터 별개의 이야기니까요." - P92
"그렇지만 『열대』는 사본이 아닌데요. 출판물이잖아요?" "하지만 나카쓰가와 씨조차도 실물을 입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특수한 출판물이고 세상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는 건 전부 작가인 사야마 쇼이치가 꾸민 걸지도 몰라요. 한 권 한 권이 다 다른, 세상에 한 권뿐인 『열대』인 겁니다." - P92
한 달 만에 학파 사람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본 시라이시 씨는 문득 웃음이 났다.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확실히 『열대』에 얽힌 수수께끼는 흥미롭지만『열대』는 한 편의 소설에 불과하다. ‘학파니 뭐니 해도 요는 평범한 독서 모임 아닌가. - P93
"그 뒤 지요 씨께 몇 번 전화를 해봤습니다만 연락이 안 됩니다." 이케우치 씨가 말했다. "지요 씨는 반칙을 할 생각인가 보군요." "반칙이라뇨?" "뻔하죠. 『열대』를 손에 넣는 겁니다."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일까. 그날 이야기해 본 인상으로는 지요 씨가 원하는 것이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P94
"우리는 이렇게 모여 1년도 더 넘게 『열대』에 관해 조사를벌여 왔습니다. 그동안 진전이 거의 없었습니다. 중대한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죠. 그런데 당신이 오자마자 꽤나 큰 발전이있군요." "제가 뭔가 더 숨기는 게 있다는 말씀인가요?" - P94
"여러분, 좀 냉정을 되찾으시는 게 어떨까요? 『열대』는 그냥소설이에요.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을 만났으니까 수수께끼를 즐기면 되는 거예요. 전 아는 걸 전부 말했어요. 그런데 의심하신다면 전 두 번 다시 여기 오지 않겠습니다." 이윽고 이케우치 씨가 "맞는 말씀입니다"라고 동조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는 『열대』에 홀렸습니다. 정상이 아니에요." - P95
나카쓰가와 씨가 인양 작업 일람표를 펼쳤다. 지요 씨가 한 말을 믿는다면 사막의 궁전은 무풍대를 지나서 나온다. 이케우치 씨는 이야기의 후반에 펼쳐진 공백에 ‘사막의 궁전‘이라고 썼다. 화살표를 그리고 ‘보름달의 마녀?‘라고덧붙였다. 그러나 그 이름을 기억하는 학파 멤버는 없었다. 나카쓰가와 씨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그건 ‘마왕‘ 하고 다른 인물입니까?" - P95
마왕은 『열대』에 등장하는 마술사다. ‘창조의 마술‘로 섬들을 만들어 내고 주인공이 표류한 해역을 지배한다. - P95
이케우치 씨는 머뭇머뭇 지난번 내놓았던 가설을 설명했다. 자신들이 읽은 사야마 쇼이치의 『열대』는 전부 내용이 각기 다른 책이었다는 가설이다. 나카쓰가와 씨는 뜻밖에 흥미가 동한 듯했다. "재미있는 가설이군요. 현실적이진 않지만 저는 좋은데요." - P96
"애초에 왜 끝까지 읽은 사람이 없는 걸까요?" "지난번에는 나카쓰가와 씨가 우연이라고 하셨는데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우리는 다들 『열대』를끝까지 읽으려고 했습니다. 도중에 그만둔 게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책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렇디만 보세요, 책은 물체 아닙니까? 확고하게 그곳에 있는 겁니다. ‘읽는 도중에 사라지는 책‘은 만들 수 없어요. 무슨 마술도 아니고." - P97
(전략) "방금 그 이야기를 듣고 하나 생각난 게 있는데요." "뭡니까, 탐정 군." "물리적인 독이 아니라도 되지 않을까요. 전 언어학이 전공인데, 언어 자체라기보다 언어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심이 있어서 전부터 최면이나 자기 암시에 관해 여러모로 조사해왔거든요. 그래서 생각났는데, 말하자면 열대에 언어적인 독이 있었다면 어떨까요?" - P99
이케우치 씨의 질문에도 신조 군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만약 『열대』의 목적이 암시에 있는 거라면 이야기 자체는중요하지 않아요. 서두 부분은 우리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썼습니다. 그건 먹잇감을 유인하기 위한 덫이죠. ‘언어적인독‘이 있는 건 그 다음이에요. 거기까지 유인하고 나면 이야기의 맥락 같은 긴 필요 없거든요. 중반 이후 우리 기억이 일치하지 않는 것도, 일관된 이야기를 찾지 못하는 것도 애초에 그런게 없기 때문이에요. 무풍대는 언어적인 독을 감춘 장소에 불과한 거죠." - P100
신조 군은 문득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죠. 시라이시 씨말처럼 『열대』는 그냥 소설이거든요.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푹 빠져 있는 걸까요. 꼭 저주 같잖아요." - P100
시라이시 씨가 두 번째로 참가한 학파 모임은 멤버들이 각각 『열대』에 관한 황당무계한 가설만 제시하고 끝났다. 그러나 결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학파 멤버 전원이 『열대』에 홀려 있다는 것만은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꼭 저주 같잖아요. 신조 군이 한 말이 마음에 남아 있었다. - P101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편 뒤 지요 씨가 준 가짜 『열대』를 생각했다. 학파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는데 꺼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뭐, 상관없다. 어차피 가짜인데. ‘좀 더 냉정해져야지‘ 학과 내에서만 『열대』이야기를 하는 게 문제다. 시라이시씨는 학창 시절 친구에게 전화를 해봤다. "야호, 오랜만이네. 웬일이야?" 친구 모스키를 드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나는 듯했다. - P103
"그렇지만 재미있겠는데. 좀 조사해 볼게." 친구는 말했다. "다음에 같이 밥 먹자." 그때부터 시라이시 씨는 앓아누워 그다음 주까지 일어나지못했다. 병원 검사 결과 유행성 독감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열이 유달리 내리지 않아 화장실에 가기도 힘겨울 정도였다. 감기에 걸리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 P104
고열에 시달렸던 사흘 동안 그녀는 『열대』와 관련된 꿈을 종종 꾸었다. 하나같이 단편적이고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여 있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남양의 섬이 나왔다가, 찻집 메리에서 열린 모임이 나왔다가, 하리마 고개의 아파트가 나왔다가 했다. 열 때문에 정신이 몽롱한 데다 커튼 친 방에 몸져누워 있다보니 자칫하면 자신이 어디 있는 건지 알 수 없어지곤 했다. 사막의 궁전도 꿈에 등장했다. 모래에 파묻힌 텅 빈 궁전을 홀로 끝없이 방황하는 꿈이었는데, 꼭 진짜 기억처럼 현실감이 느껴졌다. - P104
금요일에야 만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점심 지나 뜻밖에 이케우치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중략) "………이케우치 씨, 무슨 일 있으세요?" "금요일 밤에 교토로 갑니다." 이케우치 씨는 말했다. "낮에 모형 상점에 찾아뵐 수 없는데 저녁에 식사를 같이 할 수 없을까요? 교토로 가기 전에 『열대』에 관해 꼭 드릴 말씀이 있거든요.‘ 시라이시 씨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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