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금은 아버지가 혼자 쓰고 계셔. 그 전에는 내내 증조부인 겐요가 썼고, 할아버지인 다쿠조는 이 집 주인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지.
서관은 달리아관이라고도 부르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저택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이야. 동관을 ‘바깥‘ 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서관을 ‘안‘ 이라고 부르지"
"달리아?"
당연히 나는 그 단어에 반응했다. - P155

겐지는 미소를 지우고 ‘걱정마라‘ 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얼핏 이야기했지? 아버지는 말하자면 현재 이집, 그리고 우라도 가문의 절대 권력자야. 그런 아버지가 괜찮다고 허락한 거니까 달리아의 날이라도 아무도 싫은 소리 할 수 없을 거야."
"그렇지만......."
나는 걱정이 되어 고개를 숙여 검은 바닥을 바라보았다. - P156

자기 집은 암흑관이란 별명이 붙은 아주 이상한 서양식 건물인데흥미가 있다면 한번 구경하러 오지 않겠느냐, 겐지가 그런 권유를 한것은 지난달 하순이었다. (중략)
9월에 시험이 끝난 뒤에 한번 가자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 P156

내일-9월 24일이 우라도 가문의 뭔가 특별한 날이라는 것을 나는 전혀 몰랐다. 그런데 겐지는 그걸 뻔히 알면서 일부러 그날과 겹치게 일정을 짜서 데려온 셈이다.
그의 말만 듣고, 그리고 흥미가 끌린다고 어슬렁어슬렁 이 저택을 찾아온 것이 혹시 큰 잘못이었던 걸까?  - P157

그렇게 말하고 겐지가 ‘북관‘으로 간 뒤 나는 일단 2층으로 올라가오늘밤에 잘 방으로 정해준 객실로 들어갔다. 잊고온내담배를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팔걸이 없는 의자 위에 놓아두었던 여행가방이 바닥에 굴러 떨어져 있었는데, 아마 지진 때문인 모양이었다. 담배는 침대 옆의 작은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 P158

내가 들어온 문 이외에 두 개의 문이 더 있었다. 왼쪽에는 외짝문이 정면 안쪽에는 홀 쪽과 마찬가지로 두 싹 문이 ‘그 안쪽이 응접실이다‘ 라고 한 겐지의 설명을 떠올리며 나는 똑바로 방을 가로질렀다.
안쪽 문을 열자, 당연하다는 듯 온통 검은 방이 나왔다. - P158

한가운데 깔린 카펫만이 2층 거실과 마찬가지로 탁한 붉은색이었다..
-검정에 빨강......
-핏빛 빨강.
그 위에 묵직한 검은 가죽 소파 세트가 놓여 있었다. - P159

폐에서 피 속으로 니코틴이 퍼지면서 느껴지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현기증과 감각의 마비를 느끼면서-.

사라져버린 것은
내 마음이었던가

4월이 끝나가던 그날 밤, 겐지의 입을 통해 들은 나카하라 추야의 시 앞머리 한 구절을 무심커 되뇌어보았다. - P160

사라져버리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기억한다. 그래서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마음만 먹고 힘껏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그것은 있다. 분명히 있다.
-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가다니.
10년 이상 지난 시간 저편의, 이것은 내 기억.
-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이 목소리 주인의, 그 얼굴 생김새도 그 몸짓도, 그 냄새도 모든 것은 거기서 고정되어 더 이상 변하지 않는다. - P160

이상한 그림이다.
대체 무얼 주제로, 어떤 의도를 갖고 그린 것일까? 유명한 화가의 작품일까?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그 그림 앞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거기서 어둠 속에 꿈틀거리는 진홍빛 불길-그렇게 보이는 것 아래 적힌 작가의 서명을 발견했다.
흘려 쓴 로마자가 다섯 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적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그 글자들을 읽었다. - Issei. - P162

3

"히루야마 씨에게 연락은 했습니까?"
내가 묻자, 겐지는 냅킨으로 뻗던 손을 멈추고 입술을 살짝 삐죽거렸다.
"그게 아무래도 회선 상태가 이상해서 말이야."
"전화가 되지 않나요?"
"아, 그래. 완전히 끊어진 건 아닌 모양인데, 수화기가 내려져 있거나 너무 잡음이 심해서……… 저쪽에서 제대로 호출음이 울리고 있는지어떤지도 모르겠고, 지진 때문에 뭔가 문제가 생겼는지도 모르지." - P163

"몸이 안 좋아지거나 해서. 그래서 전화를 받을 수 없는 건지도"
"그 사람은 늘 몸이 좋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어. 그건 곱추병이기 때문이지. 곱추병에 걸린 사람은 아무래도 그렇게 되는 모양이야."
"분명히 무슨 비타민이 부족해서 걸리는 병이죠?"
"여러 가지 경우가 있지만, 그렇지. 비타민 D의 공급 부족, 또는 호흡 저하가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지 햇볕을 너무 쐬지 않는 것도 좋지 않다고 하지만." - P164

"그건 아닐세. 그 사람이 이 집에서 일하기 시작한 게 16년가량 되었는데, 그때부터 이미 그런 체형이었으니까."
16년 전이라면 겐지가 열한 살 때의 일이다. 그 시기라면 겐지가기억하는 범위 안이라는 이야기인가? - P164

"이상적?"
묘한 표현이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히루야마 씨는 그냥 둬도 내일 오후에는 한 번 섬에 건너올 거야.
점심 식사는 이쪽에서 하게 되어 있으니까 배 문제 같은 건 그때 이야기해도 될 거야. 그보다-제일 중요한 문제는 역시 내일 이후 저 청년을 어떻게 하느냐인데." - P165

"들지, 음식이 식겠어."
수프는 진한 포타주postage였다. 한 숟가락 맛을 보더니 겐지는 만족스러운 듯이 "음. 괜찮군" 하고 중얼거렸다.
겐지를 따라 런천 매트luncheon mat 오른쪽 끄트머리에 놓여 있는 스푼을 집어들었다. 나무로 만든 갈색 스푼이었다. 뜨거운 수프를 먹기에는 금속으로 만든 것보다 낫다.  - P165

술기운이 돌자 그 김에 나는 겐지에게 질문을 계속했다.
"응접실 벽에 이상한 느낌이 드는 유화가 걸려 있더군요. Issei 라고 사인이 되어 있던데, 그건 대체 어떤?"
"음, 그 그림 말인가?"
겐지는 잔에 포도주를 따르며 말했다.
"후지누마 잇세이라고 하는 화가의 작품이지." - P166

"이 저택에는 그 그림 말고도 후지누마 화백의 그림이 몇 장 더 있어. 응접실 그림 제목은 아마 <진홍빛 축제>라고 할 걸."
"진홍......."
"그래, 진홍빛 축제>. 뭔가 의미심장한 표현이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는 좀전에 응접실에서 보았던 그 그림을 떠올렸다. 캔버스 오른쪽 아래서 어둠 속에 꿈틀거리고 있던불길‘ - 그것이 ‘진홍빛‘ 인가, 그 ‘축제‘ 인가? - P1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5장.
딴 생각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말해두는 것

1890 년에 현대 미국 심리학의 창시자인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여태껏 이 주제에 관해 쓰인 가장 영향력 있는(적어도 서구에서는 텍스트에서 ‘집중이 무엇인지는 모두가 안다‘라고 말했다.¹ 그에 따르면 집중은 스포트라이트다. 우리 식으로 설명하자면, 비욘세가 무대 위에 홀로 등장하고 우리주변의 모든 사람이 사라지는 듯 보이는 순간이다. - P141

집중은 보통 주위 환경에서 무엇인가를 선택해서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그러므로 내가 집중이 흐트러졌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초점을 맞추고 싶은 한 가지로 집중력의 스포트라이트를 좁히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 P142

딴생각 중에 우리 뇌에 벌어지는 일

(중략)
스미스씨는 소년의 부모를 불러 소년이 나쁜 짓을 한다고 엄중히 설명했다. "아드님은 생각을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이것이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최악의 행동 중 하나임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 P144

수련을 받을 때 마커스는 사람이 집중하지 않는 순간 머릿속에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는 확신에 찬 말을 들었다. 인간의 뇌는 "몸을 움직이지 않을 때의 근육과 마찬가지로 그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얌전하게 가만히 누워 있"다. - P145

어느 날 마커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PET 기기 안에 환자가 누워 있었고, 환자는 마커스가 과제를 주기를 기다리며 딴생각을하고 있었다. (중략) 움직임은 뇌의 한 부위에서 다른 부위로 이동한 상태였지만, 여전히 뇌는 활발하게 활동 중이었다. - P145

이 결과는 뇌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과학자들의 생각에 패러다임 전환을 불러왔고, 이로써 전 세계에서 수십 가지 주제의 과학 연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딴생각의 과학에 대한 관심이 돌연 급증한 것도 그중 하나였다. - P146

이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 퀘벡 몬트리올에 있는 맥길 대학에서 신경학 및 신경외과 교수인 네이선 스프렝Nathan Spreng을, 잉글랜드 요크에 있는 요크 대학에서 심리학 교수인 조너선 스몰우Jonathan Smallwood를 인터뷰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이 문제를 가장 깊게 연구한 인물이다. - P146

먼저, 우리는 딴생각 중에 천천히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 조너선이 예를 하나 들어주었다. (지금 여러분이 하고 있는 것처럼 책을 읽을 때 우리는 분명히 개별단어와 문장에 집중하지만, 정신의 작은 일부는 언제나 배회하고 있다. 우리는 이 단어들이 자기 삶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생각한다.  - P147

조너선은 "사람들은 핵심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 책의 여러 다른 부분을 하나로 합칩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독서에서의 결함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독서다. 지금 정신이 배회하게 두지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이해되는 방식으로 이 책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 P147

딴생각은 상황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⁴ 조너선은 내게 "딴생각을 하지 못하면다른 수많은 것들이 사라질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딴생각을 많이 할수록 더욱 체계적인 목표를 세우고⁵ 더 창의적이며,⁶ 끈기있는 장기적 결정을 더 잘 내린다는 사실⁷을 발견했다. - P147

둘째, 딴생각을 할 때 우리의 정신은 서로 다른 것들을 새로 연결하기 시작하며, 종종 이 과정에서 문제의 해결책이 떠오른다.
네이선은 이렇게 말했다. "제 생각에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을때 (여유 공간이 주어지면) 뇌가 적절한 답을 찾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 P148

"창의력은 뇌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이선이 말했다. "창의력은 이미 그곳에 있었던 두 가지를 새롭게 연결하는 거예요." 딴생각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더욱 활짝 펼쳐지게 하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연결이 이뤄"진다. - P148

셋째, 딴생각을 하는 동안 우리의 정신은 (네이선의 표현에 따르면) "머릿속 시간 여행"을 떠나 과거를 더듬고 미래를 예측하려 한다. - P147

네이선은 우리가 하나의 스포트라이트로 주의를 좁혀 한 가지에만 초점을 맞추는 데 "일정량의 에너지"
가 필요하고, 그 스포트라이드를 꺼도 "우리는 여전히 그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저 다른 사고방식에 "에너지를 더 많이할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주의력이 꼭 낮아지는 것은 아니며" 다른 중요한 형태의 사고로 자리를 옮기는 것일 뿐이다. - P149

 우리 문화 전체가 이러한 믿음위에 세워져 있다. 우리의 상사는 우리가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데, 이것이 바로 상사가 생각하는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사람들에게 주입되어서, 마커스라이클처럼 아이들은 학교에서 공상에 빠지면 야단을 맞는다. - P149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내가 기차에서 본 몇 시간이나 창밖을 바라보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나는 속으로 그들이 생산적이지 못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소화할 짬도 내지 않고 정신없이 여러 권의 책에 메모를 남기던 나보다, 그들이 더 의미 있고 생산적이었을 수도있다는 사실을 이제 깨달았다.  - P150

그러므로 현재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은 스포트라이트 같은 집중뿐만이 아니다. 딴생각 또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이 두 가지 위기가 생각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 딴생각을 하지 않으면 세상을 이해하기 힘들어지며, 그 결과로 불안하고 혼란한 상태가 되면 우리는 그다음에 찾아오는 방해 요소에 더욱더 취약해진다. - P151

그러나 딴생각을 다룬 연구를 더 깊이 파헤치면서 방금 설명한 내용에 예외가 하나 있음을, 그리고 그 예외가 사소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아마 여러분도 이 예외를 실제로 경험해보았을것이다. - P152

2010년, 하버드의 과학 교수 댄 길버트Dan Gilbert와 매슈 킬링스워스Marchew Killingsworth 박사가 통근과 텔레비전 시청, 운동 등 다양한 일상 활동을 할 때 사람들이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연구하고자 앱 하나를 개발했다. 이 앱은 무작위 시간에 사람들에게 이렇게물었다.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그런 다음 그때 본인이 느끼는 기분을 평가해달라고 요청했다. - P152

 우리 문화에서 딴생각을 할 때 사람들은 대체로 다른 그 어떤 활동을 할 때보다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평가한다.
심지어 집안일조차 딴생각보다 더 높은 수준의 행복도와 연관된다. 두 사람은 ‘딴생각을 하는 마음은 불행한 마음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이 연구 결과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그렇게 긍정적인 효과가많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는데도 딴생각은 왜 우리를 기분 나쁘게만들까?  - P153

 지금 돌아보면 나는자주 스트레스와 불안으로 가득 찼다. 생각을 가라앉히려고 시도했다면 아마 그런 나쁜 감정들이 밀려들었을 것이다. 이와 달리 프로빈스타운에서는 스트레스가 없었고 편안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딴생각이 자유롭게 떠다니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이다. - P153

다시, 딴생각에 실패하다.

그러므로 계산을 해보면, 내가 인터넷을 떠나 있는 동안 35시간만큼의 이메일이 쌓였을 것이고, (중략)
그러나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초조하게 수신함을 열어 이메일들을 훑어보았다. 별게 없었다. 나는 두 시간 만에 이메일을 전부확인했다. 세상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나의 부재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 P1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퇴원이 사고로부터 꼭 일주일 뒤였으니, 그 다음다음 날이라고 하면 4월 29일이 되는 걸까?
겐지의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말하자면 한동안-어도 내 신분이 밝혀질 때까지는 겐지의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겐지가 사는 집은 하쿠산의 한적한 주택가에 있었다. - P137

1.
이렇게 큰 집에 혼자 살고 있다니, 가족을 한꺼번에 잃었다거나 하는 사정이 있는 것일까? 그런 상상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금방 알게 되었다. - P137

듣자하니, 겐지는 올 여름에 만 27세가 되는데, 아직도 신분은 대학생이라고 했다. (중략)
"왜 의사가 되지 않았느냐?"는 나의 소박한 질문에 겐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겐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 P137

겐지는 내게 넓은 정원이 내다보이는 네 평 남짓한 방을 쓰라고했다.
정원은 전혀 손길이 가지 않은 걸로 보였다. 폐가처럼 어수선한 모습이었지만, 실내는 무척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 P138

날씨가 좋고 나쁘고 관계가 없었다. 외출하기 위한 문단속도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늘 덧창은 닫혀 있었고, 하루 중 잠깐만 열어두기 때문에 집안은 낮에도 어두컴컴하고, 공기는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환한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 P138

식사는 아침과 저녁 두번, 도미에登美江중년 가정부가 와서는 지어주었다. 방 청소나 다른 일들도 그 여자가 하는 모양이었다. - P138

겐지가 도미에에게 말했다.
"당분간 여기서 살게 되었으니 식사는 두 사람 몫을 준비해줘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겐지가 나를 보며 말했다.
"무슨 불편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이야기하게. 내가 없을 땐 도미에 씨에게 뭐든 부탁하면 돼." - P139


"글쎄요. - 누구 시인가요?"
"츄야. 나카하라 츄야."
이름을 듣고도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내가 기억을 잃은 것은 기본적으로 나 자신에 관해서일 뿐, 다른일반적인 지식까지 모두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카하라츄야 라는 요절한 시인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 P140

기억이란
이제 전혀 없다

나를 바라보면서 겐지는 시의 한 구절을 반복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
"아니야, 아닐세. 내가 자네를 놀리려는 건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말아줘" - P141

"지금 자네 상태하고는 또 다르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점은 같아. 어린 시절-아홉 살인가, 열 살 때인가. 그 즈음부터 이전의 기억이 내겐 전혀 없어."
"아홉 살이나 열 살 ・・・・・・ 그렇지만, 그것은"
"누구나 어린 시절 기억은 희미하겠지. 하지만 내 경우에는 극단적일세. 그야말로 무엇 하나 기억나는 것이 없어. 마치 - " - P142

겐지는 그때까지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던 왼손을 꺼내 테이블 위에 얹었다. 그리고 그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 보여주었다.
"아니 ・・・・・・ 아아, 그 상처는?"
겐지의 왼쪽 손목 주위 - 시계 밴드로 가려지는 부분에 오래된 상처자국이 있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보았다. 꽤 심한 상처였다. 톱날처럼 수축해, 변색된 피부의 모양이 참혹했다. - P142

"뭐라 해야 좋을까? 자네가 이런 사고를 당하게 된 책임과는 별도로 나는 자네가 걱정이 되는 걸세. 자네 모습에서 나 자신의 일부를 발견하게 된다고나 해야 할까?"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잠깐 뜸을 들였다가 툭 내뱉었다.
"괜찮습니다.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조만간 기억이 전부 날 테니까요."
내가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 P143

"그런데 말이야. 그 복장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군."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옷, 말입니까?"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보며 겐지는 유쾌하다는 듯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그래. 검은 망토에 중절모 중절모는 위를 찌부러뜨려 써야하지. 어울릴 거야, 분명히."
"망토에 모자?"
"그리고 자네를 당분간 츄야 라고 부르기로 하지." - P144

"츄야 - 흠. 멋있잖아? 좋았어. 내일 당장 옷을 사러 가세. 아무래도 요즘은 망토 같은 건 없을 테니까, 비슷한 느낌이 드는 걸 찾아보다고."
이렇게 해서 겐지는 나를 ‘츄야‘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병원 담당의사 말대로 내가 사고 발생 전후를 제외한 나머지 기억을 무사히 되찾게 된 것은 그로부터 약 3주 뒤의 일이었다. 하지만 내원래 이름을 알게 된 뒤에도 겐지는 나를 계속 ‘츄야‘ 라고 불렀다. - P145

5장
진홍빛 축제

1

겐지는 "선생님" 하고 부르며 검은 기왓장이 깔린 바닥 위를 빠른걸음으로 다가갔다. 홀 안 벽 쪽에 놓여 있던 추시계 사람 키 정도되는 긴 케이스를 지닌 중후한 시계다-가 그 발소리와 함께 천천히울리기 시작했다. 밤 10시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그 청년, 상태가 어떻습니까?"
종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려 겐지가 물었다.
"잠들었네." - P146

"그나저나 저 탑에서 떨어졌는데 저정도로 멀쩡하다면 그야말로 행운이로군."
"그렇죠. 의식은 아직?"
"아까 눈을 한 번 뜨기는 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던가요?"
노구치 선생은 빨갛게 물든 둥근 코에 주름을 잡으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 P147

"여기가 어딘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가로젓더군."
"누구냐고 물어보았습니까?"
"그 질문에도."
노구치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사정 설명은 했나요?"
"하지 않았네. 이 상태에서 이것저것 이야기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같더군. 큰 부상은 없지만 체력이 상당히 소모된 것 같고, 우선 푹 쉬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영양제와 진정제를 줬으니 내일 아침까지는 푹 자겠지." - P148

"하지만 아주 위급한 상태는 아니라서 ・・・・・・ 좀 더 상태를 지켜보고 어떻게 할 건지를 결정해도 괜찮을 것 같네."
"경우에 따라서는 경찰을 부를 필요가 생길지도 모르겠군요."
"흐음. 경찰이라?"
노구치 선생이 약간 당혹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흰 털이 섞인 눈썹을 찌푸렸다. - P149

"아버진 심기가 어떠신가요?"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지."
노구치 선생은 목소리 톤을 약간 낮췄다.
"날 만나도 말도 별로 없고, 술도 함께 마시지 않네."
"불만이십니까?"
넉넉한 볼살을 흔들며 노구치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 P149

"어쨌든, 그 청년 문제는 내일, 그 사람 입으로 설명을 듣는 게 우선이겠군요. 선생님은 그 청년에 대해 정말로 짐작 가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까?"
"없네."
"시노부 씨는 아무 말 없었나요?"
"아무 말도, 알고 있다면 이야기했겠지."
"흠, 아무도 그를 모른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뭐 그것도 내일 생각하기로 하고" - P150

"그 청년이 추락할 때에 떨어뜨린 것 같은데요. 뒤에 T. E 라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고……………."
"TE?....그런데?" - P150

"무라노村野라고 합니다."
"무라노?"
나는 무심코 되물었다.
"저어, 노구치 선생님 - 아니신가요?"
그러자 그는 "아하" 하며 활짝 웃었다.
"무라노라고 하네. 본명은 무라노 히데요. 우연히 우리 아버지가 훌륭한 사람 이름을 붙여줘서." - P151

"뭐 이름 같은 건 단순한 식별 기호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불리건 별로 신경 쓰지 않네. 겐지 군 덕분에 이 집에서는 이제 완전히 노구치로 통하고 있으니까. 자네도 그렇게 부르면 되네." - P152

"그런 증개축 때는 당연히 전문가에게 일을 맡기게 되는데, 그런사람 가운데 좀 괴팍한 건축가가 있었네. 그 건축가가 처음 이 집에왔을 때 우연히 나도 만나게 되었지. 그때 그 사람이......"
마음이 설렌다. 그런 감상을 이야기했다는 건가?
그런데 괴팍한 건축가‘라니, 어떤 의미에서 괴팍하다‘는 걸까 당연히 나는 그 부분이 궁금했다. - P153

"제법 배가 고픈걸. 츄야도 점심을 차안에서 빵으로만 때워서.
선생님은? 뭘 좀 드시겠습니까?"
"아닐세. 난 아까부터 홀짝홀짝 했기 때문에."
노구치 선생은 술잔을 들이키는 시늉을 했다.
"이사오伊佐夫군이 북관 살롱에서 기다리다 지쳤을지도 모르겠군.
그쪽에서 술이나 한잔 더." - P1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물학자 칼 폰 린네 (1707~1778) 가 창안한 생물 분류 체계에서 우리 인류의 학명(學名)은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다.¹ 과학자들이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나 ‘호모 에렉투스‘와 같은 이름을 붙인 인간 종이 여럿 있었지만 모두 멸종했다. - P13

‘역사(歷史)‘부터 시작한다. 국어사전에서는 역사를 ‘인간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이라고 한다. 사전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긴 해도 크게 보면 다 비슷하다. - P13

역사는 단순히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사실로 엮어 만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P14

. 예컨대 "우리 민족의 역사는 자랑스럽고 위대하다"거나 "시민을 학살하고 부정부패를 저지른 독재자에게 역사의 심판이 내렸다"고 할 때의 역사는 첫 번째 뜻인 ‘사회의변화 과정 그 자체‘를 가리킨다.  - P14

 그러나 자연과 우주의 변화에 대해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찬탄하지만 자랑스럽다거나 부끄럽다는 도덕적 감정을 느끼지는 않으며 자연과우주가 누군가를 심판했다고 하지도 않는다. 인간사회의 역사는 다른 것의 역사와 다르다. - P14

"역사는 사실과 역사가의 대화"라거나 "모든 역사는 현대사"
라고 할 때, 역사는 사회가 시간의 흐름 안에서 변화해 온 과정을 서술한 문자 텍스트를 말한다.  - P14

역사를 반드시 문자로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중략) 무엇이 생겨나 변화하고 소멸한 과정을 문자로 이야기하는 것을 ‘역사 서술‘이라고 하자. 우리는 모든 것의 역사를 쓸 수 있다. 개인, 민족, 사회, 국가, 음악, 미술, 옷, 건축, 과학을 비롯해 인간의 삶과 관련된 모든 것은 ‘변화 과정 그 자체로서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 P15

그렇다면 ‘역사의 역사‘는 무엇인가? ‘인간과 사회의 과거에 대해 문자 텍스트로 서술하는 내용과 방법이 변화해 온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더 정확하게는 ‘역사서술의 역사‘라고 해야 하겠지만 편의상 간단하게 ‘역사의 역사‘라고 하자. - P15

역사분야만이 아니라 미술, 음악, 사진, 영화를 포함하여 ‘해석이 필요한 텍스트‘를 생산하는 예술의 모든 분야에 창작자와 연구자가 있다. 예를 들어 소설 창작과 문학 비평 둘 다 하는 작가도 있지만 둘중 하나만 하는 경우도 많은데, 소설만 쓰면 소설가라 하고 문학비평만 쓰면 문예비평가 또는 문학평론가라고 한다. - P16

성실한 역사가는 사실을 수집해 검증하고 평가하며 중요한 역사의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한다. 뛰어난 역사가는 사실들 사이의 관계를 탐색해 역사적 사건의 인과관계를 밝혀내며 사회 변화를 일으키는 동력과 역사 변화의 패턴 또는 역사법칙을 찾아낸다.  - P16

역사의 사실과 논리적 해석에 덧입혀 둔 희망, 놀라움, 기쁨, 슬픔, 분노,
원망, 절망감 같은 인간적·도덕적 감정이었다. 역사의 매력은 사 - P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래과거시제

강연자인 알트나이 교수는 며칠 전 이즈미르에서 있었던 친구 결혼식에서 만난 젊은 언어학자였다. 알트나이라는 성이 ‘앓던 아이‘처럼 들리는 게 재미있어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은 것을계기로 뜻하지 않게 가까워진 사람이었다. - P89

알트나이의 강연은 1930년대 튀르키예 어느 지역에서 사용된 특이한 어미(語尾)에 관한내용이었다. 강연은 영어로 진행됐고, 앞부분은 튀르키예어의 시제 어미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그것은 이 강연이 포함된 전체 학술행사의청중 상당수가 유럽어권 역사학자였던 탓이었다.  - P90

 한국어에도 있는 시제 선어말어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트나이 교수도 강연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라며 시간이 나면 들어볼 것을 권했다. - P90

강연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기록물이 발견된 동네에서 직접 겪은 재미난 에피소드와 유머 감각 넘치는 마을 풍경 사진덕분에, 강연이 본론으로 접어들기도 전에 객석은 이미 웃음바다였다. - P90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강연을 듣기전, 알트나이 박사가 어쩌면 조금 지루할지도 모른다고 했던 바로 그 내용 때문이었다. 강연의 본론, 즉 앞에 나온 모음에 따라
‘-아닥-(-adak-)‘ 혹은 ‘-에덱-(-edek)‘으로 모음조화를 일으키며 활용되는 독특한 시제 어미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지점부터였다. - P91

그런데 이 어미가 사용된 텍스트들을 면밀히 검토해보니 미래시제라고 할 만큼 애매한 용법으로 사용된 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국어의 ‘-겠-‘처럼 불확실한 상황에서 사용된 말이 아니라, 화자가 과거시제로 말할때만큼의 경험적인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경우에만 한정적으로 사용된 어미라는 것. 그것이 알트나이의 설명이었다. - P91

 그 대신 이 말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미래의 일을 마치 과거에 직접 겪은 것처럼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
그러자 머릿속에 봉인되어 있던 기억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쏟아져나왔다. - P92

벌써 15년도 더 된 일이었다. 그를 만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길을 잃지 않았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었으니까. - P92

(전략)
그 결과, 건물 왼쪽과 오른쪽이 층수조차 맞지 않는 이상한 구조가 되고 말았다. 예를들면 건물 오른쪽 1층 정문으로 들어가 왼쪽 복도 끝까지 쭉 걸어가면 어느 순간 H301, H302 같은 번호가 붙은 방들로 가득한복도에 다다르게 되는 식이었다. 분명히 1층으로 들어가 계단이라고는 단 한 칸도 오르지 않았는데, 어느새 3층 어딘가를 헤매게 되는 것이다. - P93

그러니 은경이 3년이나 다닌 학교 안에 있는 건물에서 길을잃어버린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음대나 미대 재학생들조차 본과 학부에서 시작해 박사 논문이 통과할 때쯤 돼야 비로소 건물 안에 있는 모든 방과 방 사이를 최단 경로로 이동할 수 있게 된다는 전설의 미궁이었으니까. - P93

계단에는 자연광이 들지 않았다. 형광등 조명은 어둡지 않았지만, 오히려 형광등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창백함에 그림자가 바짝 오그라든 느낌이었다. 은경은 자신 없는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내려가야 할지 올라가야 할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 P94

"여기 아니구나."
당황한 은경이 말끝을 흐렸다.
"어디 찾으세요? 아는 데면 가르쳐드릴게요."
"저기, 그러니까..."
그의 안내를 받아 사람이 많이 다니는 복도로 나왔다. 그는 은경과 또래거나 기껏해야 한두 살 많아 보일 뿐이었는데도 건물구조를 잘 아는 듯 자신 있는 걸음걸이였다.
"저기 첫 번째 통로에서 왼쪽으로 가시면 돼요. 그럼." - P95

그로부터 일주일 뒤, 그를 처음 만난 날과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은경은 다시 예술대학 건물을 찾아갔다. 그와 ‘우연히‘ 마주치기 위해서였다. 일주일 전 헤맸던 그 계단은 일부러 찾아가기도 쉽지 않았다. - P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