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과거시제
강연자인 알트나이 교수는 며칠 전 이즈미르에서 있었던 친구 결혼식에서 만난 젊은 언어학자였다. 알트나이라는 성이 ‘앓던 아이‘처럼 들리는 게 재미있어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은 것을계기로 뜻하지 않게 가까워진 사람이었다. - P89
알트나이의 강연은 1930년대 튀르키예 어느 지역에서 사용된 특이한 어미(語尾)에 관한내용이었다. 강연은 영어로 진행됐고, 앞부분은 튀르키예어의 시제 어미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그것은 이 강연이 포함된 전체 학술행사의청중 상당수가 유럽어권 역사학자였던 탓이었다. - P90
한국어에도 있는 시제 선어말어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트나이 교수도 강연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라며 시간이 나면 들어볼 것을 권했다. - P90
강연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기록물이 발견된 동네에서 직접 겪은 재미난 에피소드와 유머 감각 넘치는 마을 풍경 사진덕분에, 강연이 본론으로 접어들기도 전에 객석은 이미 웃음바다였다. - P90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강연을 듣기전, 알트나이 박사가 어쩌면 조금 지루할지도 모른다고 했던 바로 그 내용 때문이었다. 강연의 본론, 즉 앞에 나온 모음에 따라 ‘-아닥-(-adak-)‘ 혹은 ‘-에덱-(-edek)‘으로 모음조화를 일으키며 활용되는 독특한 시제 어미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지점부터였다. - P91
그런데 이 어미가 사용된 텍스트들을 면밀히 검토해보니 미래시제라고 할 만큼 애매한 용법으로 사용된 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국어의 ‘-겠-‘처럼 불확실한 상황에서 사용된 말이 아니라, 화자가 과거시제로 말할때만큼의 경험적인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경우에만 한정적으로 사용된 어미라는 것. 그것이 알트나이의 설명이었다. - P91
그 대신 이 말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미래의 일을 마치 과거에 직접 겪은 것처럼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 그러자 머릿속에 봉인되어 있던 기억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쏟아져나왔다. - P92
벌써 15년도 더 된 일이었다. 그를 만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길을 잃지 않았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었으니까. - P92
(전략) 그 결과, 건물 왼쪽과 오른쪽이 층수조차 맞지 않는 이상한 구조가 되고 말았다. 예를들면 건물 오른쪽 1층 정문으로 들어가 왼쪽 복도 끝까지 쭉 걸어가면 어느 순간 H301, H302 같은 번호가 붙은 방들로 가득한복도에 다다르게 되는 식이었다. 분명히 1층으로 들어가 계단이라고는 단 한 칸도 오르지 않았는데, 어느새 3층 어딘가를 헤매게 되는 것이다. - P93
그러니 은경이 3년이나 다닌 학교 안에 있는 건물에서 길을잃어버린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음대나 미대 재학생들조차 본과 학부에서 시작해 박사 논문이 통과할 때쯤 돼야 비로소 건물 안에 있는 모든 방과 방 사이를 최단 경로로 이동할 수 있게 된다는 전설의 미궁이었으니까. - P93
계단에는 자연광이 들지 않았다. 형광등 조명은 어둡지 않았지만, 오히려 형광등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창백함에 그림자가 바짝 오그라든 느낌이었다. 은경은 자신 없는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내려가야 할지 올라가야 할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 P94
"여기 아니구나." 당황한 은경이 말끝을 흐렸다. "어디 찾으세요? 아는 데면 가르쳐드릴게요." "저기, 그러니까..." 그의 안내를 받아 사람이 많이 다니는 복도로 나왔다. 그는 은경과 또래거나 기껏해야 한두 살 많아 보일 뿐이었는데도 건물구조를 잘 아는 듯 자신 있는 걸음걸이였다. "저기 첫 번째 통로에서 왼쪽으로 가시면 돼요. 그럼." - P95
그로부터 일주일 뒤, 그를 처음 만난 날과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은경은 다시 예술대학 건물을 찾아갔다. 그와 ‘우연히‘ 마주치기 위해서였다. 일주일 전 헤맸던 그 계단은 일부러 찾아가기도 쉽지 않았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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