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이 사고로부터 꼭 일주일 뒤였으니, 그 다음다음 날이라고 하면 4월 29일이 되는 걸까?
겐지의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말하자면 한동안-어도 내 신분이 밝혀질 때까지는 겐지의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겐지가 사는 집은 하쿠산의 한적한 주택가에 있었다. - P137

1.
이렇게 큰 집에 혼자 살고 있다니, 가족을 한꺼번에 잃었다거나 하는 사정이 있는 것일까? 그런 상상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금방 알게 되었다. - P137

듣자하니, 겐지는 올 여름에 만 27세가 되는데, 아직도 신분은 대학생이라고 했다. (중략)
"왜 의사가 되지 않았느냐?"는 나의 소박한 질문에 겐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겐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 P137

겐지는 내게 넓은 정원이 내다보이는 네 평 남짓한 방을 쓰라고했다.
정원은 전혀 손길이 가지 않은 걸로 보였다. 폐가처럼 어수선한 모습이었지만, 실내는 무척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 P138

날씨가 좋고 나쁘고 관계가 없었다. 외출하기 위한 문단속도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늘 덧창은 닫혀 있었고, 하루 중 잠깐만 열어두기 때문에 집안은 낮에도 어두컴컴하고, 공기는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환한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 P138

식사는 아침과 저녁 두번, 도미에登美江중년 가정부가 와서는 지어주었다. 방 청소나 다른 일들도 그 여자가 하는 모양이었다. - P138

겐지가 도미에에게 말했다.
"당분간 여기서 살게 되었으니 식사는 두 사람 몫을 준비해줘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겐지가 나를 보며 말했다.
"무슨 불편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이야기하게. 내가 없을 땐 도미에 씨에게 뭐든 부탁하면 돼." - P139


"글쎄요. - 누구 시인가요?"
"츄야. 나카하라 츄야."
이름을 듣고도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내가 기억을 잃은 것은 기본적으로 나 자신에 관해서일 뿐, 다른일반적인 지식까지 모두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카하라츄야 라는 요절한 시인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 P140

기억이란
이제 전혀 없다

나를 바라보면서 겐지는 시의 한 구절을 반복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
"아니야, 아닐세. 내가 자네를 놀리려는 건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말아줘" - P141

"지금 자네 상태하고는 또 다르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점은 같아. 어린 시절-아홉 살인가, 열 살 때인가. 그 즈음부터 이전의 기억이 내겐 전혀 없어."
"아홉 살이나 열 살 ・・・・・・ 그렇지만, 그것은"
"누구나 어린 시절 기억은 희미하겠지. 하지만 내 경우에는 극단적일세. 그야말로 무엇 하나 기억나는 것이 없어. 마치 - " - P142

겐지는 그때까지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던 왼손을 꺼내 테이블 위에 얹었다. 그리고 그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 보여주었다.
"아니 ・・・・・・ 아아, 그 상처는?"
겐지의 왼쪽 손목 주위 - 시계 밴드로 가려지는 부분에 오래된 상처자국이 있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보았다. 꽤 심한 상처였다. 톱날처럼 수축해, 변색된 피부의 모양이 참혹했다. - P142

"뭐라 해야 좋을까? 자네가 이런 사고를 당하게 된 책임과는 별도로 나는 자네가 걱정이 되는 걸세. 자네 모습에서 나 자신의 일부를 발견하게 된다고나 해야 할까?"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잠깐 뜸을 들였다가 툭 내뱉었다.
"괜찮습니다.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조만간 기억이 전부 날 테니까요."
내가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 P143

"그런데 말이야. 그 복장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군."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옷, 말입니까?"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보며 겐지는 유쾌하다는 듯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그래. 검은 망토에 중절모 중절모는 위를 찌부러뜨려 써야하지. 어울릴 거야, 분명히."
"망토에 모자?"
"그리고 자네를 당분간 츄야 라고 부르기로 하지." - P144

"츄야 - 흠. 멋있잖아? 좋았어. 내일 당장 옷을 사러 가세. 아무래도 요즘은 망토 같은 건 없을 테니까, 비슷한 느낌이 드는 걸 찾아보다고."
이렇게 해서 겐지는 나를 ‘츄야‘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병원 담당의사 말대로 내가 사고 발생 전후를 제외한 나머지 기억을 무사히 되찾게 된 것은 그로부터 약 3주 뒤의 일이었다. 하지만 내원래 이름을 알게 된 뒤에도 겐지는 나를 계속 ‘츄야‘ 라고 불렀다. - P145

5장
진홍빛 축제

1

겐지는 "선생님" 하고 부르며 검은 기왓장이 깔린 바닥 위를 빠른걸음으로 다가갔다. 홀 안 벽 쪽에 놓여 있던 추시계 사람 키 정도되는 긴 케이스를 지닌 중후한 시계다-가 그 발소리와 함께 천천히울리기 시작했다. 밤 10시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그 청년, 상태가 어떻습니까?"
종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려 겐지가 물었다.
"잠들었네." - P146

"그나저나 저 탑에서 떨어졌는데 저정도로 멀쩡하다면 그야말로 행운이로군."
"그렇죠. 의식은 아직?"
"아까 눈을 한 번 뜨기는 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던가요?"
노구치 선생은 빨갛게 물든 둥근 코에 주름을 잡으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 P147

"여기가 어딘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가로젓더군."
"누구냐고 물어보았습니까?"
"그 질문에도."
노구치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사정 설명은 했나요?"
"하지 않았네. 이 상태에서 이것저것 이야기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같더군. 큰 부상은 없지만 체력이 상당히 소모된 것 같고, 우선 푹 쉬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영양제와 진정제를 줬으니 내일 아침까지는 푹 자겠지." - P148

"하지만 아주 위급한 상태는 아니라서 ・・・・・・ 좀 더 상태를 지켜보고 어떻게 할 건지를 결정해도 괜찮을 것 같네."
"경우에 따라서는 경찰을 부를 필요가 생길지도 모르겠군요."
"흐음. 경찰이라?"
노구치 선생이 약간 당혹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흰 털이 섞인 눈썹을 찌푸렸다. - P149

"아버진 심기가 어떠신가요?"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지."
노구치 선생은 목소리 톤을 약간 낮췄다.
"날 만나도 말도 별로 없고, 술도 함께 마시지 않네."
"불만이십니까?"
넉넉한 볼살을 흔들며 노구치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 P149

"어쨌든, 그 청년 문제는 내일, 그 사람 입으로 설명을 듣는 게 우선이겠군요. 선생님은 그 청년에 대해 정말로 짐작 가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까?"
"없네."
"시노부 씨는 아무 말 없었나요?"
"아무 말도, 알고 있다면 이야기했겠지."
"흠, 아무도 그를 모른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뭐 그것도 내일 생각하기로 하고" - P150

"그 청년이 추락할 때에 떨어뜨린 것 같은데요. 뒤에 T. E 라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고……………."
"TE?....그런데?" - P150

"무라노村野라고 합니다."
"무라노?"
나는 무심코 되물었다.
"저어, 노구치 선생님 - 아니신가요?"
그러자 그는 "아하" 하며 활짝 웃었다.
"무라노라고 하네. 본명은 무라노 히데요. 우연히 우리 아버지가 훌륭한 사람 이름을 붙여줘서." - P151

"뭐 이름 같은 건 단순한 식별 기호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불리건 별로 신경 쓰지 않네. 겐지 군 덕분에 이 집에서는 이제 완전히 노구치로 통하고 있으니까. 자네도 그렇게 부르면 되네." - P152

"그런 증개축 때는 당연히 전문가에게 일을 맡기게 되는데, 그런사람 가운데 좀 괴팍한 건축가가 있었네. 그 건축가가 처음 이 집에왔을 때 우연히 나도 만나게 되었지. 그때 그 사람이......"
마음이 설렌다. 그런 감상을 이야기했다는 건가?
그런데 괴팍한 건축가‘라니, 어떤 의미에서 괴팍하다‘는 걸까 당연히 나는 그 부분이 궁금했다. - P153

"제법 배가 고픈걸. 츄야도 점심을 차안에서 빵으로만 때워서.
선생님은? 뭘 좀 드시겠습니까?"
"아닐세. 난 아까부터 홀짝홀짝 했기 때문에."
노구치 선생은 술잔을 들이키는 시늉을 했다.
"이사오伊佐夫군이 북관 살롱에서 기다리다 지쳤을지도 모르겠군.
그쪽에서 술이나 한잔 더."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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