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금은 아버지가 혼자 쓰고 계셔. 그 전에는 내내 증조부인 겐요가 썼고, 할아버지인 다쿠조는 이 집 주인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지.
서관은 달리아관이라고도 부르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저택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이야. 동관을 ‘바깥‘ 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서관을 ‘안‘ 이라고 부르지"
"달리아?"
당연히 나는 그 단어에 반응했다. - P155

겐지는 미소를 지우고 ‘걱정마라‘ 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얼핏 이야기했지? 아버지는 말하자면 현재 이집, 그리고 우라도 가문의 절대 권력자야. 그런 아버지가 괜찮다고 허락한 거니까 달리아의 날이라도 아무도 싫은 소리 할 수 없을 거야."
"그렇지만......."
나는 걱정이 되어 고개를 숙여 검은 바닥을 바라보았다. - P156

자기 집은 암흑관이란 별명이 붙은 아주 이상한 서양식 건물인데흥미가 있다면 한번 구경하러 오지 않겠느냐, 겐지가 그런 권유를 한것은 지난달 하순이었다. (중략)
9월에 시험이 끝난 뒤에 한번 가자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 P156

내일-9월 24일이 우라도 가문의 뭔가 특별한 날이라는 것을 나는 전혀 몰랐다. 그런데 겐지는 그걸 뻔히 알면서 일부러 그날과 겹치게 일정을 짜서 데려온 셈이다.
그의 말만 듣고, 그리고 흥미가 끌린다고 어슬렁어슬렁 이 저택을 찾아온 것이 혹시 큰 잘못이었던 걸까?  - P157

그렇게 말하고 겐지가 ‘북관‘으로 간 뒤 나는 일단 2층으로 올라가오늘밤에 잘 방으로 정해준 객실로 들어갔다. 잊고온내담배를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팔걸이 없는 의자 위에 놓아두었던 여행가방이 바닥에 굴러 떨어져 있었는데, 아마 지진 때문인 모양이었다. 담배는 침대 옆의 작은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 P158

내가 들어온 문 이외에 두 개의 문이 더 있었다. 왼쪽에는 외짝문이 정면 안쪽에는 홀 쪽과 마찬가지로 두 싹 문이 ‘그 안쪽이 응접실이다‘ 라고 한 겐지의 설명을 떠올리며 나는 똑바로 방을 가로질렀다.
안쪽 문을 열자, 당연하다는 듯 온통 검은 방이 나왔다. - P158

한가운데 깔린 카펫만이 2층 거실과 마찬가지로 탁한 붉은색이었다..
-검정에 빨강......
-핏빛 빨강.
그 위에 묵직한 검은 가죽 소파 세트가 놓여 있었다. - P159

폐에서 피 속으로 니코틴이 퍼지면서 느껴지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현기증과 감각의 마비를 느끼면서-.

사라져버린 것은
내 마음이었던가

4월이 끝나가던 그날 밤, 겐지의 입을 통해 들은 나카하라 추야의 시 앞머리 한 구절을 무심커 되뇌어보았다. - P160

사라져버리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기억한다. 그래서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마음만 먹고 힘껏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그것은 있다. 분명히 있다.
-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가다니.
10년 이상 지난 시간 저편의, 이것은 내 기억.
-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이 목소리 주인의, 그 얼굴 생김새도 그 몸짓도, 그 냄새도 모든 것은 거기서 고정되어 더 이상 변하지 않는다. - P160

이상한 그림이다.
대체 무얼 주제로, 어떤 의도를 갖고 그린 것일까? 유명한 화가의 작품일까?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그 그림 앞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거기서 어둠 속에 꿈틀거리는 진홍빛 불길-그렇게 보이는 것 아래 적힌 작가의 서명을 발견했다.
흘려 쓴 로마자가 다섯 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적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그 글자들을 읽었다. - Issei. - P162

3

"히루야마 씨에게 연락은 했습니까?"
내가 묻자, 겐지는 냅킨으로 뻗던 손을 멈추고 입술을 살짝 삐죽거렸다.
"그게 아무래도 회선 상태가 이상해서 말이야."
"전화가 되지 않나요?"
"아, 그래. 완전히 끊어진 건 아닌 모양인데, 수화기가 내려져 있거나 너무 잡음이 심해서……… 저쪽에서 제대로 호출음이 울리고 있는지어떤지도 모르겠고, 지진 때문에 뭔가 문제가 생겼는지도 모르지." - P163

"몸이 안 좋아지거나 해서. 그래서 전화를 받을 수 없는 건지도"
"그 사람은 늘 몸이 좋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어. 그건 곱추병이기 때문이지. 곱추병에 걸린 사람은 아무래도 그렇게 되는 모양이야."
"분명히 무슨 비타민이 부족해서 걸리는 병이죠?"
"여러 가지 경우가 있지만, 그렇지. 비타민 D의 공급 부족, 또는 호흡 저하가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지 햇볕을 너무 쐬지 않는 것도 좋지 않다고 하지만." - P164

"그건 아닐세. 그 사람이 이 집에서 일하기 시작한 게 16년가량 되었는데, 그때부터 이미 그런 체형이었으니까."
16년 전이라면 겐지가 열한 살 때의 일이다. 그 시기라면 겐지가기억하는 범위 안이라는 이야기인가? - P164

"이상적?"
묘한 표현이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히루야마 씨는 그냥 둬도 내일 오후에는 한 번 섬에 건너올 거야.
점심 식사는 이쪽에서 하게 되어 있으니까 배 문제 같은 건 그때 이야기해도 될 거야. 그보다-제일 중요한 문제는 역시 내일 이후 저 청년을 어떻게 하느냐인데." - P165

"들지, 음식이 식겠어."
수프는 진한 포타주postage였다. 한 숟가락 맛을 보더니 겐지는 만족스러운 듯이 "음. 괜찮군" 하고 중얼거렸다.
겐지를 따라 런천 매트luncheon mat 오른쪽 끄트머리에 놓여 있는 스푼을 집어들었다. 나무로 만든 갈색 스푼이었다. 뜨거운 수프를 먹기에는 금속으로 만든 것보다 낫다.  - P165

술기운이 돌자 그 김에 나는 겐지에게 질문을 계속했다.
"응접실 벽에 이상한 느낌이 드는 유화가 걸려 있더군요. Issei 라고 사인이 되어 있던데, 그건 대체 어떤?"
"음, 그 그림 말인가?"
겐지는 잔에 포도주를 따르며 말했다.
"후지누마 잇세이라고 하는 화가의 작품이지." - P166

"이 저택에는 그 그림 말고도 후지누마 화백의 그림이 몇 장 더 있어. 응접실 그림 제목은 아마 <진홍빛 축제>라고 할 걸."
"진홍......."
"그래, 진홍빛 축제>. 뭔가 의미심장한 표현이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는 좀전에 응접실에서 보았던 그 그림을 떠올렸다. 캔버스 오른쪽 아래서 어둠 속에 꿈틀거리고 있던불길‘ - 그것이 ‘진홍빛‘ 인가, 그 ‘축제‘ 인가? - P1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