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예전에 네이버에서 산 적이 있어서 다시 보았습니다.
다시봐도 몽환적인 상황이 능청스럽게 이어지는 점이 재미있었습니다.
영화와 소설이 다른 점이 있다면, 소설이 각각의 단편 모음집 형식이라면, 영화는 그것들을 잘 버무려 만든 장편입니다. 각기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엄지손가락을 남몰래 안으로 숨기면 굳게 쥐려고 해도쥐어지지 않아요. 그 살짝 숨긴 엄지손가락이야말로 사랑이에요." - P9

신랑은 가라츠마오이케 지점에 근무하는 은행원이고, 신부는 후시미에 있는 양조회사의 연구원이다. 둘 다 부모의의향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호걸들이라 양쪽 부모는 아직 얼굴도 마주한 적이 없다고 한다. 두 사람의 교제가 시작된 것은 대학 1학년 때, 여러 차례의 파란을 극복하며 들판을 지나고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 지금 이렇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운운. - P11

그러나 그 자리에서는 주위에 온통 선배님들만 있어서 마음껏 술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축하해야 할 결혼피로연 자리에서 만에 하나라도 실수를 하여 스승 같은 선배의 얼굴에 먹칠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술에 대한 욕구를 지그시 누르고 있다가 2차로 가는 자리에서 살짝 빠져나왔습니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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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다른 테이프들도 비슷비슷한 내용이었다. 순수하게 취재를 목적으로 촬영한 것 외에다른 특이사항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게 수사원들의 결론이었다. 일단 우리는 서로의 테이프를 교환하여 빨리감기 등으로 전체를 살펴보았지만 그 결론에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 P198

‘칼날 부분에 몇 번 사용한 듯한 마모 흔적이 있음. 혈액이묻은 일은 없었던 것으로 보임. 손잡이 부분에 지문 다수 감식결과, 이 지문은 모두 노노구치 오사무의 것으로 추정됨.‘ - P198

그녀가 먼저 내민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전에 그녀에게서받은 『야광충』이라는 소설의 단행본이다.
이 책이 왜요?"
표지를 넘겨보세요."
그녀의 말에 나는 손끝으로 표지를 넘겼다. 마키무라 형사가 옆에서 앗 하는 소리를 냈다.
책의 내부가 도려내졌고 그 속에 비디오테이프가 들어 있었다. 마치 예전의 스파이소설 같았다. - P199

화면 귀퉁이에 날짜를 나타내는 숫자가 주르륵 적혀 있었다. 7년 전 12월의 어느 날이라고 알려주는 자막이었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건가, 하고 나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카메라는 하염없이 정원과 창문을 찍고 있을뿐이었다. 아무런 변화도 없고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 P200

이다음에 가가 형사가 내 병실을 찾아오는 것은 모든 것을알아냈을 때가 아닐까. 나는 최근 며칠 동안 실은 그런 생각을했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활동하는 모습을 지켜본 끝에 나는그런 예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 P203

역시나 가가 형사는 병실에 두 가지 증거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나이프, 또 하나는 비디오테이프였습니다. 놀랍게도 테이프는 『야광충』의 책 내부를 도려내고 그 안에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정말 히다카다운 장난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역시 히다카는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고 실감했습니다.
만일 그것이 『야광충』이 아니라 다른 책이었다면 아무리 혜안을 가진 가가 형사라도 그리 쉽게 진실을 눈치채지는 못했을테니까요. - P204

"아무래도 내가 진 것 같군." 나는 말했습니다. 낭패감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애써 느릿느릿 말했습니다. 그나마 내 나름대로 최대한 강한 척했다는 건 가가 형사도 뻔히 알았겠지요. - P205

"내 추리에 잘못된 부분이 있었어요?"
"아니, 거의 없어. 대단하네. 다만 보충해야 할 부분이 몇 군데 있어. 명예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니까."
"그건 선생님의 명예인가요?"
"아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히다카 하쓰미 씨의 명예야." - P206

"고백의 글을 써주겠다는 건가요?"
"그게 허용된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
"알겠습니다. 나로서도 그게 편하겠군요. 시간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하루만 주면 쓸 수 있을 거야." - P207

어린 시절의 친구였기 때문에 나는 그가 데뷔했을 때부터유심히 지켜봤습니다. 참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생각하는 반면 시샘이 있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 당시 나 또한 언젠가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P208

그런 계산도 있어서 사실은 당장이라도 그를 만나고 싶었지만, 데뷔 직후의 그에게 어린 시절의 친구가 격려랍시고 찾아가봤자 공연히 폐만 끼칠 것이라고 짐작하고, 한참 동안은 문예지와 책을 통해 그의 작품을 읽는 것으로 조용히 후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 P209

한번 만나자는 이야기는 그 전화를 통해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주쿠의 찻집에서 만났고 이어서 중화요리점에서식사도 했습니다. 나는 학교에서 퇴근하는 길이어서 양복 차림이었지만 그는 블루종 점퍼에 면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역시 작가라는 건 자유롭구나, 하고 묘한 데서 감동했던 기억이 납니다. - P211

"완성한 작품은 있어?" 그가 물었습니다.
"아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제 겨우 첫 작품을 쓰는 중이야 조금만 더 하면 완성될 예정이기는 하지만"
"그거 다 쓰면 나한테 가져와 내가 읽어보고 괜찮으면 아는편집자를 소개해줄게." - P212

하지만 히다카에게서 도무지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일이 바쁜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재촉 전화 같은 건 하지 않았습니다. 머릿속 한 귀퉁이에서는 어쩌면 너무도 한심한 작품이라서 히다카가 대답을 못 하고 난감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상상이 커져갔습니다. - P213

"정말 미안해. 이 일만 정리되면 바로 읽어볼게. 첫 부분만얼핏 봤는데, 폭죽 장인의 이야기인 것 같던데?"
"응."
"절 옆에 살던 그 할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쓴 거지?"
히다카도 그 폭죽 만드는 노인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 맞아, 라고 나는 대답했습니다. - P214

"그건 안 되지. 내용도 완성도도 알지 못하는 작품을 항상바쁜 편집자들에게 들이대는 식으로 일을 처리하고 싶지는 않아. 그러잖아도 형편없는 작품들이 꾸역꾸역 들어오는 통에 지겨워 죽겠다고 항상 투덜거리는데. 소개를 하더라도 우선내가 읽어본 다음에 해야 돼. 아, 내가 미덥지 않다면 자네 원고, 지금 당장 돌려줄까?" - P215

나는 선물로 스카치위스키를 들고 그의 집을 찾았습니다.
히다카는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나를 맞이해주었습니다. 그런 그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 하쓰미 씨입니다. - P217

"나쁜 작품은 아니야, 주제 등은 오히려 좋은 편이라고 할까?"
"나쁘지는 않지만 좋지도 않다. ・・・・・ 그런 얘기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독자를 끌어당기는뭔가가 약간 부족하다고 할까. 소재는 좋은데 요리법이 잘못되어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 P218

"한 가지 주제에 오래 매달리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 이 폭죽 장인의 이야기는 일단 없었던 일로 하는 게 좋아. 자칫하면이번과 똑같은 일이 반복될 우려가 있어. 나로서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쓰라고 권하겠어." - P219

두 번째 소설은 그렇게 난항을 거듭했지만, 그 사이에 나는히다카의 집을 자주 찾았습니다. 코흘리개 친구이고 중학교때까지 함께 뛰어놀던 사이라서 우정이 금세 부활한 것이겠지요. 나로서는 현역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 흥미로웠고, 히다카로서도 외부인을 접한다는 메리트가 있었던 게 아니겠습니까. 작가가 된 뒤로 자기도 모르게 세상과는 멀어졌다는 말을 비친 적이 있으니까요. - P220

이윽고 나의 두 번째 소설이 완성되었습니다. 즉시 히다카에게 보여주고 비평을 청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이 작품 역시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흔해빠진 연애소설 같다. 라는 것이 히다카의 평이었습니다. "소년이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는 이야기라면 빗자루로 쓸어 담을 만큼 많아. 뭔가 플러스알파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 게다가 가장 중요한 여주인공이 어쩐지 마음에 쏙 들어오지 않아. 실재감이 없다는 거지. 머리로만 생각했다는 게뻔히 보여." - P222

"남편은 노노구치 씨를 함정에 빠뜨리고 있어요."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요?"
"노노구치 씨가 작가로 데뷔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해요. 작가가 되지 못하게 하려는 거예요."
"그건 내 소설이 재미가 없기 때문인가요?"
"아뇨, 그렇지 않아요. 분명 그 반대일걸요. 노노구치 씨가 쓴 작품이 자기 소설보다 뛰어나니까 질투심이 생긴 거예요." - P226

"그런데 막상 읽기 시작하고는 그 소설에 푹빠져버린 눈치였어요. 저는 그런 걸 잘 알아요. 그 사람은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이라 재미가 없으면 금세 내던졌을 거예요. 그만큼 열심히읽었다는 건 노노구치 씨의 작품 세계에 빠져들었다고 생각할수밖에 없어요.‘ - P227

"내 소설을 열심히 읽어준 것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나는 그녀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어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부정했습니다.
"남편은 그런 타입의 인간이 아니에요. 그 사람은 자기 자신말고는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이에요." - P228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둘이서만 지낼 수 있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나는 잔뜩 들뜬 마음으로 하쓰미씨와 상의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정해진 것이 바로 그 오키나와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사에 가서 신청하고 비용까지 지불했습니다. 짧은 기간이나마 마치 부부처럼 함께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그저 꿈만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 P231

그 뒤로 며칠이나 고민을 했을까요. 나는 교사로서의 일도 내팽개치고 타개책을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미 다 아시겠지요. 아니, 가가 형사는 오래전부터 짐작하고 있었으니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나는 히다카를 죽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 P232

당연한 일이지만 나의 제안에 하쓰미 씨는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런 무거운 죄를 짓게 할 수는 없다고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그런데 그 눈물은 나를 한층 더 미치게 했습니다. 히다카를 죽이는 것밖에 다른 길은 없다고 굳게 믿게 된 것입니다. - P233

그렇게 우리는 함께 히다카를 죽일 계획을 짰습니다. 하긴 계획이라야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강도가 저지른 것으로 위장하자는 것뿐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마침내 그 12월 13일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 P234

본심을 말하자면 나는 교살을 택하고 싶었습니다. 나이프로 찌른다는 건 상상만 해도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강도가 저지른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서는 나이프를 쓰는 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강도짓을 하려고 남의 집에 뛰어든 자가 제대로 된흉기도 준비하지 않았다는 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P235

"이봐, 노노구치." 그는 내 머리를 밀어붙이며 말했습니다.
"도범 방지법이란 거 알아? 거기에 정당방위에 관한 내용이 있어. 범죄를 목적으로 침입한 자를 잘못하여 죽게 하더라도 그 죄는 묻지 않는다고 나와 있어.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겠지? 여기서 내가 너를 죽여도 아무도 나를 처벌하지 못한단말이야!"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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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파다. 곧 일흔 살이 되는 노파……….
표를 건네고 개찰구를 나오자 약간 긴장이 풀렸다. 괜찮을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사람들이 알아차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전철 안에서는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학생으로 보이는 맞은편의 청년은 할머니한테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만화잡지를 읽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 P9

"일원정(原亭)으로 가주세요." 내가 말했다.
"일원정이라면...... 아아, 알겠습니다."
택시기사는 미터기를 작동시키고 나서 고개를 살짝 내 쪽으로 돌렸다. - P10

"불이 난 걸로 주위에서도 화제가 됐었나요?"
"그럼요. 좀 특이한 사건이었으니까요." 거기까지 말하고택시기사가 갑자기 말투를 바꾸었다. "사실 자세한 내용은 저도 잘 모릅니다. 지금은 말끔히 수리를 해서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하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 P11

"아아, 그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면 원하시는 방에 묵게 해드려야죠. 어떤 방이죠?" 눈가에 약간 불안한 기색을 띠며 지배인이 물었다.
"‘A-1‘ 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내 대답에 지배인은 몹시 당황했다. "아, 그 방요? 부인께서 원하신다면 저희야 상관없습니다만………" - P13

"일전에 발생한 사고 때문이라면 걱정 마세요. 그걸 알면서도 ‘A-1‘에 묵게 해달라고 부탁드리는 거니까요. 택시기사 얘기를 들어보니 지금은 깔끔하게 수리를 했다고 하던데요."
이 말이 효과를 발휘한 모양이다. 지배인은 안도의 한숨을내쉬었다. - P14

본관과 각각의 별관은 긴 복도로 이어져 있는데, 이 복도측면에는 창문 여러 개가 나 있어 주위의 경치를 바라볼 수있다. 그래서 본관에서 맨 끝에 있는 ‘A-1‘까지 가려면 왼쪽의 정원을 바라보면서 복도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면 된다.
정원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는데 복도의 일부는 이 연못을 건너는 다리 역할도 겸한다. - P15

냄새가 마음에 걸렸는지 지배인이 그렇게 물었지만, 나는거절했다. 3월의 공기는 아직 차갑다. 그것보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밀폐된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 P15

가방을 끌어당겨 안에서 손거울을 꺼냈다. 둥근 거울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자 그 속에 백발 노파의 얼굴이 비쳤다. 뺨은 늘어져 있고 눈가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아무리 잘봐.
도 예순 살 아래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 객관적인 사실이 다시금 용기를 주었지만 약간 쓸쓸한 기분이 드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 P17

건강한 피부는 극히 일부고 나머지는흉한 수술 자국으로 메워져 있다. 텔레비전에 출연해 성형외과의 진보가 눈부시다고 말했던 사람이 어느 대학의 교수였더라. 노파로 변장하지 않았더라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 P18

욕조에 물을 다 받은 다음, 기모노를 벗었다. 전라로 거울앞에 서서 서른두 살 여자의 마른 몸을 바라본 뒤, 몸을 약간틀어 등을 비쳐보았다. 등에도 흉한 화상 자국이 지도에 그려진 섬처럼 남아 있다. 이 상처를 잊어서는 안 된다. 증오를 누그러뜨려서는 안 된다. - P19

지로, 나의 지로,
그와 함께했던 나날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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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게임에서 축적한 가상 재화를 이베이를 통해 현실 세계에서 사고판다는 점이 무엇보다 놀라웠다. 이를테면 이베이에는 게임에서 얻은 ‘거대 거북의 벨트‘나 ‘원시 바다의로브‘ 같은 아이템을 다른 사람에게 40달러에 팔겠다는 게시물이 올라오곤 했다. 심지어 가상 세계 속 화폐인 ‘플래티넘 조각‘ 50만 개를 무려 천 달러나 주고 사는 사람도 있었다. - P5

이 연구는 사실 순전히 개인적인 흥미로 시작한 작업이었다. 그래서 캐스트로노바는 이 논문을 SSRN에 공개할 때만 해도 그리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 P7

이렇게 언론과 커뮤니티를 통해 그의 연구가 소개되기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논문은 SSRN에서 가장 많은다운로드 횟수를 기록했다. 마침내 다른 사회과학 연구자부터 정부의 경제 관료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그가 연구한가상 세계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순식간에 그는 각종 미디어나학술회의의 초청을 받는 가장 인기 있는 경제학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 P7

그전까지 사람들은 게임 속 가상 세계는 현실과 단절된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어찌 보면 과거 오랜 시간 동안 비디오 게임을 통해 익숙해진 편견이었다.  - P8

MMORPG 속 가상 세계는 얼핏 보기에 용과 마법이 등장하는, 현실과 전혀 다른 세상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실 세계와 매우 유사한 경제·사회 체제가 구축되어 있었다.
가상 세계 속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활동은 표면적으로 보면 그저 유희를 추구하기 위한 행동 같았으나 실상은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하는 행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P9

그의 연구는 대단히 독창적이고 흥미로웠으나 세부적인 논리 전개나 자료 정리에서 허술한 면도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지나치게 경제학적인 관점에 매몰되었기 때문인지 게임 안에서 사용자들이 하는 모든 활동을 현실 세계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경제활동 지나치게 동일시하여 이론을 전개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그는 게임을 지나치게 도구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 P10

이런 한계가 있지만 그가 게임 경제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개척한 선구자라는 점에 논란의 여지는 없다.  - P11

 가상 세계는 디지털로 이뤄져 있으며 여기서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나 일어나는 사건은 모두 게임 서버를 통해 기록되고 저장되기 때문이다. 이런 자료를 ‘로그 데이터log data‘라고 부르는데, 이 로그 데이터를 분석하면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상세한 정보를 알 수 있다. - P12

이 책의 전반부인 1~3장은 이와 관련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을 때 인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올바른 정책은 무엇일까? 가장 합리적인 보상 정책은 무엇일까? 혹시 사람들은 큰 보상이 주어지면 더 열심히 일하지 않게 되지는 않을까? 조직 관리를 위해 필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사람들이 조직에서 떠나고 조직이 쇠퇴하는 것을 미리 알 수 있는 신호는 무엇일까? 이와 같은 다양한 사회학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데 게임이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 P13

그러나 실제 온라인 게임 속 가상 세계는 개인의심리나 행동, 각종 사회적 쟁점, 심지어 국가 무역과 같은 경제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현실과 영향을 주고받는다. 책의 후반부인 4~6장은 이와 관련된 주제를 다루고 있다. - P14

한편, 심리학에서 진행된 여러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행동에 쉽게 영향받는다. 
(중략)
 그런데 몇몇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호혜성이나 행위의 전파는 가상 세계 속 캐릭터 사이에서도 관측할 수 있으며,
심지어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경계를 넘어서도 가능하다고한다. 만약 이렇게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가 서로의 행동과 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면, 우리는 가상 세계가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 P15

고백하자면 나는 전문 연구자도 아니고 심지어 사회과학과는 거리가 먼 분야를 전공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소개하는 연구들이 사회과학 전공자의 눈에는 어설프게 비칠 수 있으리라 짐작한다. - P15

가장 큰 문제는 자료 확보의 어려움이다.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겠지만 연구에 필요한 자료는 항상 부족한 법이다. - P15

이런 이유 때문인지 캐스트로노바의 논문이 발표된 지 20년이 지났어도 게임 사회학은 여전히 학문적 유아기 수준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한 상태다. 이렇게 연구 수준이 낮다 보니 초반에 큰 관심을 보이던 사람들도 지지부진한 결과에 실망하여 등을 돌린 경우가 많다. - P17

그런데 여기서 그는 한 가지 기발한 착상을 떠올린다. 기존 게임 서비스를 단순히 끝내고 리부트버전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 <파이널 판타지> 속 가상 세계인 에오르제아가 거대한 재앙에 의해 멸망하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는 설정을 적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기존 버전을 리부트버전으로 대체하겠다는 것이다. - P26

서비스 종료일이 다가올수록 에오르제아 전반에 걸쳐진행되는 종말 설정에 사람들의 관심이 뜨거워졌다. 도시에 쳐들어오는 몬스터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재화를 털어 방어에 전념하는 사용자가 있는가 하면, 심지어 이전에 게임을 떠났던 사용자가 에오르제아의 종말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 돌아오는 사례도 있었다. - P28

특히 감동적인 부분은 마지막을 장식한 참여자 명단 영상이었다. <파판 14>의 엔딩 크레디트는 무려 1시간 38분 동안 이어졌는데, 여기에는 게임 제작진뿐만 아니라 종료 시점까지 남아준 게임 사용자들의 이름이 모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파판 14>는 엔딩 크레디트가 가장 긴 게임으로 《기네스북Guinness book》에 올랐다.  - P29

이 사례는 실패한 게임이 리부트를 통해 성공한 거의 유일한 사례라는 점뿐만 아니라 서비스 종료 자체를 게임 안에 훌륭하게 녹여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찬사를 받고 있다. - P29

 처음에 그는 가상 세계의 종말을 앞둔 사람들이 서비스 종료를 결정한 게임 회사의 독단적인 결정에 분노하거나최후의 순간에 마음껏 가상 세계를 짓밟는 등의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걱정했다. 혹은 어차피 서비스를 종료하면모든 게 끝이니 미련을 두지 않고 접속을 끊고 일상으로 돌아가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 P33

그러나 그의 예상은 모두 빗나갔다. 그동안 서비스에 애착을 가지던 사람들은 종료 순간에 가상 세계에 모여 그동안의추억을 서로 나누고, 서비스가 서서히 종료되면서 가상 세계가 조금씩 사라지고 마침내 텅 빈 화면에 접속 오류 메시지 창이 뜨는 모습을 같이 지켜봤다. - P34

고려대학교 김휘강 교수 연구실은 아마 전 세계에서 게임과관련된 연구를 가장 많이, 가장 다양하게 진행하는 곳일 것이다. 이 연구실에서는 주로 국내에서 서비스되는 MMORPG 로그 데이터를 이용해 데이터기반 보안이나 사용자 행동 분석과 관련된 여러 가지 논문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 P35

논문에 따르면, (저자의 예상과 달리) 테스트 종료가 가까워져도 게임 사용자들은 캐릭터 육성이나 생산, 소비 등의 활동에 큰 변화가 없었다. 물론 캐릭터 성장과 관련된 임무 수행이나 경험치 획득 같은 활동량은 소폭 줄어들었으며, 경제활동에서 생산에 비해 소비 비율이 늘어나는 경향이 보이기는 했으나 종말을 앞둔 시점의 변화라고 하기에는 그리 크지 않았다. - P36

강아름 교수는 그 이유에 관해 테스트 종료를 앞둔 상황이기 때문에 다른 캐릭터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사용자들이 늘어났기 때문으로 추정했다. 물론 그렇다고 이것을 종말을 앞둔 아비규환으로 확대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 P38

마지막으로 저자는 캐릭터 간의 채팅 데이터를 이용해 소통량의 변화도 분석했는데 서비스 종료가 가까울수록 함께 임무를 수행할 새로운 모임을 구하는 내용은 줄어들지만 기존 모임의 구성원들과 주고받는 대화량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 P39

정리하자면, 이 연구는 서버에 기록된 수많은 캐릭터의 상세한 수행 기록을 바탕으로 가상세계의 종말을 앞둔 사람들의 행태를 분석했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물론 이 연구에서 관측한 행태가 실제 세계의 종말에서도 똑같이 재현될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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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스릴러에선 이런 것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막상 읽으면서도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 책이 1990년대에 나왔었다는데, 그때는 이런 식의 전개가 익숙하지 않아서 인기가 있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재미있는 책이다. 가볍게 읽기 좋은 책으로 추천할만하다.

그의 대답은 명료하고 게다가 흥미로웠다. 『야광충』은 노노구치 오사무의 노트나 플로피디스크 속에서 내용이 일치되는 원고가 발견되지 않았던 작품 중의 하나라는 것이었다. - P144

그날 밤부터 나는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노노구치 오사무에게 히다카 구니히코의 작품 중에 추리소설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이 작품의 제목을 말했었다. 뭔가 다른 의도가 있어서 이 책을 거론했는지 어떤지는 아직 알수 없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일부러 자신이 관여하지 않은 작품을 추천했는지도 모른다. - P145

고뇌를 거듭하던 그는 밤이면 밤마다 자신이 살해되는 꿈을꾼다. 천사의 얼굴을 가진 아내가 그에게 미소를 보낸 뒤에 침실의 창문을 여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로 한 남자가 들어온다.
남자는 나이프를 들고 그에게 덤벼들지만 그 직후에 남자의모습은 아내로 바뀐다. 그런 꿈이었다. - P146

히다카 쿠니히코는 모 사립대학의 계열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그대로 그 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진학했다. 그곳을 졸업한뒤에는 홍보대리점과 출판사 등을 전전했고, 그 사이에 응모한 단편소설로 신인상을 수상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작가활동을시작했다. 그게 약 10년 전의 일이다. 데뷔 후 3년쯤은 책이 거의 팔리지 않았지만, 4년째 되던 해에 『타오르지 않는 불꽃』이라는 작품으로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단숨에 인기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 P147

각자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이 재회한 것은 노노구치 오사무에 의하면 7년 전쯤이었다. 소설 및 잡지 등을 통해 히다카의 이름을 보고 반가워서 찾아갔던 게 계기였다고 한다. - P148

"결론부터 말하자면, 타오르지 않는 불꽃이 히다카 씨에게 모종의 분기점이 되었던 건 분명해요. 그 작품으로 한 꺼풀을 벗었다고 할 수 있죠. 둔갑을 했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 P149

『타오르지 않는 불꽃』은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던 한 남자가출장길에 목격한 불꽃놀이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폭죽 장인이 된다는 이야기다. 스토리도 재미있지만 불꽃의 묘사가 특히 훌륭했다. - P150

"그걸 두 분이서 함께 생각해내는 건가요?"
"아뇨, 기본적으로는 모두 히다카 씨가 생각해냅니다. 당연하죠, 그쪽이 작가니까요. 나로서는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간단한 의견을 말해주는 정도예요." - P150

"별로 그런 느낌은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전혀 뜻밖인 것도아니었죠. 폭죽 장인에 대해 다룬 소설가가 적지 않으니까요."
"미무라 씨가 뭔가 충고를 해서 그 내용이 바뀌었다. 하는부분은 없습니까?" - P151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건 구별하기 힘들어요. 그 작가의 글이냐 아니냐를 알 수 있는 단서는 단어의 사용이나 표현 방식에 있거든요." - P151

나의 고스트라이터설은 흔들리지 않았다. - P152

단서는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에이프런이다. 체크무늬로,
여성용이 분명한 디자인의 에이프런이 노노구치 오사무의 서랍장에 세탁하여 다리미질을 한 상태로 들어 있었다. - P153

두 번째는 금목걸이였다. 이쪽은 아직 케이스에 든 채로 포장도 뜯지 않은 상태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석가게의 물건이다. 누군가에게 선물하려다가 그대로 넣어둔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 P153

그리고 세 번째는 여행 신청서였다. 그것은 작게 접혀서 목걸이 포장과 함께 작은 가방 속에 들어 있었다. 신청서는 모 여행대리점의 것으로, 그 내용에 따르면 노노구치 오사무는 오키나와 여행을 신청하려고 한 모양이었다. 신청서의 날짜는 7년 전 5월 10일로 되어 있었다. 출발 예정일이 7월 30일인 것을 보면 여름휴가를 이용해 여행을 떠날 생각이었던 듯했다. - P153

이런 세 가지 단서에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노노구치 오사무에게는 적어도 7년 전에는 연인이라고 할 만한 여자가 있었고, 현재 그 여자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노노구치 쪽에서는 아직도 그여자에 대해 호감을 품고있다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추억의 물건을 오랜 세월 소중히 간직하고 있을 리 없는 것이다. - P154

하지만 7년 전이라면, 히다카 구니히코가『타오르지 않는 불』을 발표하기 1년 전이었다. 그 무렵에 노노구치 오사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 여자를 만나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P154

"공개하라는 건 아니고요. 그냥 저한테만 말해주시면 돼요.
만일 수사 결과, 사건과 관계가 없다는 게 밝혀지면 두 번 다시 이런 질문은 안 할 것이고, 물론 보도기관에 발표하지도 않겠습니다. 또한 상대 여성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것은 제가 보증하지요." - P155

하지만 노노구치 오사무는 그 여자의 이름을 말하려 하지않았다. 그 대신, 수사 방식에 클레임을 걸어왔다.
"아무튼 더 이상 내집을 휘젓지 말아줘. 그 속에 남에게서맡아둔 귀중한 책도 있으니까." - P156

하지만 이 탐문수사에서는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노노구치의 자택 왼편 이웃집에 살고 있고 전업주부라서 늘 집에 있다는 아줌마조차 그의 집에 여자 손님이 찾아오는 건 본 적이 없다고 대답한 것이다. - P156

나는 노노구치 오사무의 교제 범위를 처음부터 다시 점검해보았다. 올 3월에 사직했다는 중학교에도 가보았다. 그러나 그의 사적인 부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단적으로 적었다. 예전부터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 아니었지만, 건강이 나빠진뒤로는 학교 밖에서 다른 교사들을 만나는 일은 아예 없어졌다고 한다. - P157

나는 다시금 인사말을 건네고 도네 선생의 근황 등을 으레하는 절차대로 물어보았다. 그런 뒤에 노노구치 전임 교사에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슬그머니 운을 뗐다.
도네 선생은 그 즉시, 요즘 큰 화제가 된 인기작가 살인사건을 머릿속에 떠올렸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승낙해주었다. - P158

"하지만 여자의 감이라는 건 적중했을 때는 꽤 인상적이지만 실은 틀리는 일도 많거든. 그러니까 객관적인 정보도 말해두는 편이 좋겠지? 노노구치 선생이 중매로 몇 번인가 선을 봤었다는 건 알고 있어?"
"아뇨, 모르는데요." - P159

나는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갔다. 노노구치 오사무와 히다카 구니히코의 관계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아, 그렇구나, 그때 이미 가가 선생은 학교를 사직한 뒤였지?"
"그때, 라고 하시면?"
"히다카 구니히코가 무슨 신인상을 탔을 때 말이야." - P160

"잘 기억나지는 않는데 아마 그 시점에는 아직 교류가 없었을 거야. 한참 뒤에야 그를 요즘 다시 만나게 됐다고 우리한테 얘기했었으니까."
"한참 지난 뒤라면 2, 3년쯤 지난 다음이라는 뜻인가요?" - P161

"노노구치 선생도 작가지망생이었잖아. 어렸을 때 친구가자기보다 먼저 작가가 된 걸 보고 나름대로 초조했던 거 아닐까? 그렇다고 모른 척 무시할 수도 없고 자기도 모르게 찾아서읽었겠지. 그러고는 뭐야, 이 따위 글로 작가가 되다니, 차라리 내가 쓰는 게 낫겠다, 그런 식으로 생각했을 거라고."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히다카 구니히코가 『타오르지 않는 불꽃』으로 문학상을 탔을 때는 노노구치 선생님이 어떤 모습이었어요?" - P162

"여전히 학교폭력은 없어지지를 않아."
그렇겠지요, 라고 나는 대답했다. 학교폭력에 관한 사건에는 나도 민감해져 있었다. 예전에 내가 범한 실수가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 P163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목적은 노노구치와 특별한 관계였던 여성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이었다. 에이프런, 목걸이, 여행 신청서. 현재로서는 그 세 가지 물품이 단서였지만 그 밖에 좀더 결정적인 증거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P163

에이프런이 있으니까 여자가 가끔 이 집에 왔었다는 건 틀림이 없다. 그런 때 사진을 찍는 것도 가능했을 터였다. 노노구치 오사무는 오토포커스 기능이 있는 카메라를 갖고 있었다.
"사진이 있는데도 이렇게 눈에 띄지 않는 거라면 어딘가에감춰뒀다는 얘기겠죠?"
"그런 얘기가 되지. 하지만 왜 감춰뒀을까? 노노구치는 체포될 때까지 이 집이 경찰에 수색을 당하리라는 건 예상하지 못했을 텐데." - P164

나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퍼뜩 생각나는 게있었다. 지난번에 노노구치 오사무가 했던 말이다. 더 이상 집안을 휘젓지 말아달라, 남에게서 맡아둔 귀중한 책도 있다, 라고 했었다. - P165

"일하는 틈틈이 문득 그녀를 보고 싶다면 여기쯤에 사진을 세워두면 딱 좋을 텐데 말이에요."
그가 말한 자리는 워드프로세서 바로 옆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물론 탁상용 사진 액자 같은 건 없었다. - P166

사진 속의 여자는 히다카 하쓰미라고 했다. 즉 히다카 구니히코의 전처였다. - P167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남편 장례식 때였는데요, 노노구치 씨가 나한테 이상한 걸물었어요."
"뭐였지요?"
"비디오테이프는 어디에 있느냐고 했어요."
"비디오테이프?"
"처음에는 남편이 수집한 영화 비디오인 줄 알았어요. 근데그게 아니라 취재용으로 촬영한 비디오테이프 얘기더라고요." - P169

"짐이 도착하는 대로 알려달라고 했어요. 자신의 집필에 사용할 테이프를 우리 남편에게 맡겨뒀다고 하더라고요."
"뭐가 찍혀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군요?"
네, 라고 대답하면서 히다카 리에는 탐색하듯이 우리를 보며 말했다. - P170

"이건 좀 지난 일인데요, 노노구치 씨가 하쓰미 씨에 대한얘기를 했던 적이 있어요."
나는 내심 놀랐다.
"어떤 얘기였지요?"
"하쓰미 씨가 사망한 사고에 대한 거예요."
"노노구치 씨가 그 사고에 대해서?"
히다카 리에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마음을 정한 듯 입을 열었다.
"그건 단순항 사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노수치 씨가 그렇게 말했어요." - P171

"네. 나도 물어봤죠. 그건 무슨 뜻이냐고. 그랬더니 노노구치씨가 그 즉시 후회하는 표정으로, 방금 한 말을 잊어버려라, 히다카에게는 말라고 하더라고요." - P171

하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따로 추리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노노구치의 집에 에이프런이 있고, 그에게 목걸이 선물을 받을 예정이었던 여자, 그와 함께 오키나와로 여행을 떠나려 했던 여자의 정체가 히다카 하쓰였다는 것이다. 그 시점에 그녀는 분명 히다카 구니히코의 아내였으니까 두 사람은 불륜관계였다는 얘기다. 노노구치 오사무가 히다카 구니히코를 다시 만난 게 7년 전이고, 히다카 하쓰미가 사망한 것은 5년 전이니까 두 사람이 깊은 관계로 발전할 시간은 충분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또한 노노구치의 집에서 발견된 여행 신청서에 적혀 있던 또 한 사람의 이름이 노노구치 하쓰코였다. 그건하쓰미의 가짜 이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 P172

나는 노노구치 오사무가 히다카 구니히코의 고스트라이터였다는 건 거의 명확하다고 추리했다. 많은 정황 증거가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추리는 왜 노노구치가 계속 고스트라이터로 하가카의 글을 대신 써주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은 되지 못했다. - P173

하지만 어쨌든 노노구치 오사무와 히다카 부부 사이에 어떤일이 있었는지 조사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유감스럽게도 부부가 모두 사망해버려서 직접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겠지만. - P173

노노구치가 하쓰미의 죽음을 단순한 사고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노노구치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가. 또, 사고사가 아니라면 무엇이라는 건가. - P174

그렇다면 남는 것은 자살뿐이다. 즉 노노구치는 히다카 하쓰미가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자살했다고 생각한다는 얘기다. - P175

"아뇨 사위가 하는 일이 워낙 바빴으니까요. 웬만해서는 친정 나들이는 못 했어요. 그래서 전화로 잠깐 어떻게 사는지 물어보는 정도였지요."
"목소리를 통해서는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는 말씀이시군요?"
"예." - P179

"앨범은?"
"그건 있지요."
"그럼 우선 그것부터 좀 보여주세요."
"하지만 앨범에 붙여놓은 건 사위하고 딸 사진뿐이에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참고가 될지 어떨지는 저희가 판단하니까요." - P180

이윽고 마키무라 형사가 한 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그리고 말없이 내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나는 마키무라가 어째서 그 사진을 점찍었는지 금세 이해했다. - P181

나는 그의 빈정거리는 말에는 대응하지 않고, 가져간 사진을 그 앞에 내밀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의 국어사전에 끼워져있던 히다카 하쓰미의 사진이었다.
"이 사진이 당신 방에서 발견되었어요."
그 순간, 노노구치 오사무의 안면이 기묘하게 뒤틀린 채딱 굳어버렸다. 호흡이 거칠어지는 게 느껴졌다. - P185

"글쎄, 그게 언제 찍은 사진인지도 모른다니까. 더구나 그사진들이 어딨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앨범에 넣었는지 내버렸는지, 그것도 몰라. 아무튼 나는 기억에 없는 사진이야."
노노구치 오사무는 낭패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나는 다시 두 장의 사진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두 장모두 멀리 후지산을 배경으로 찍은 것이다. - P187

내 말에 대해 노노구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물론 긍정한다는 뜻의 침묵이었다.
"여기 하쓰미 씨가 입은 에이프런은 어때요? 노란색과 흰색의 체크무늬가 눈에 익은 것이겠지요? 당신 집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에이프런이니까요." - P189

"제발 사실대로 얘기해주세요. 당신이 자꾸 감추려고 들면우리는 다시 조사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움직이면 당연히 매스컴에서 냄새를 맡을 확률도 높아져요. 아직은 그런 낌새가 없지만 곧 눈치를 채고 온갖 억측이 난무하는 기사를 써낼 거라고요. 당신이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으면 그런 쪽에 대한 대책도 세울 수 있어요." - P190

"세키카와? 그게 누구지?"
"모르세요? 세키카와 다쓰오라는 게 풀네임이죠.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텐데요."
"모르겠어. 나는 그런 이름, 들어본 적이 없어."
그가 단언하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답을 알려주기로 했다.
"트럭 운전기사예요. 하쓰미 씨를 치었던 사람입니다."
노노구치는 허를 찔린 얼굴이었다. - P194

"짐 속에 들어 있던 비디오테이프는 이것뿐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히다카 리에가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것은8 밀리미터 비디오테이프 일곱 개였다. 모두 한 시간짜리 녹화용 테이프였다. - P196

상자를 당겨 뚜껑을 열었다. 비닐봉투에 담긴 나이프가 들어 있었다. 손잡이는 플라스틱이고 칼날은 20센티미터 정도였다. 비닐봉투째 들고 가늠해보니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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