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제임스 맥도널드 Maurice JamesMcDonald (1909~1998)와 리처드 제임스 맥도널드(1902~1971) Richard JamesMcDonald 형제의 이야기다. 무성 영화 스튜디오에서 세트를 만들며주급을 25달러씩 받던 맥도널드 형제는 이 돈을 차곡차곡 모았다.
(중략)
하지만 1929년에 시작된 경제대공황은 백만장자를 향한 형제의 야심 찬 꿈을 무참히 짓밟았다. - P83

그런데 이렇게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잘되는 장사가 있었다. 바로 핫도그 가게였다. 맥도널드 형제는 캘리포니아주 몬로비아의 한 경마장 인근에서 핫도그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그런데 경마장 인근 장사는 시즌이아닐 때 손님들이 오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었다. - P84

둘은 가게를 이전하면서 운영 방식도 개편했다. 자동차 보급률이 늘어가는 당시 분위기에 맞춰 운전자들이 쉽게 음식을 구매할수 있게끔 한 것이었다. 그렇게 1940년 맥도널드 형제는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서 5,000달러를 대출받아 ‘드라이브 인 Drive-in‘ 형태의 레스토랑인 맥도날드 페이머스 바비큐McDonald‘s Famous BBQ를 오픈했다. - P85

문제는 맥도날드 드라이브 인 레스토랑의 종업원들이 대부분 젊은 여성이라, 이들과 대화하면서 놀고 싶은 젊은 남성들이죽치고 있는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주차할 곳이 없다고 불평하는 고객들이 많아지고, 주문받으러 간 여성 종업원들도 한참씩 돌아오지 않자 결국 1948년 대대적인 식당 개편을 단행한다. - P85

먼저 인기 없는 메뉴들은 과감히 없애고 햄버거, 치즈버거, 밀크셰이크 등 9개의 메뉴만 남겼다. 어차피 레스토랑 매출의 87%가 햄버거와 감자튀김, 청량음료였다. - P86

형제는 빠른 조립으로 자동차의 대중화를 이끈 포드 FORD 자동차의 조립 라인을 떠올렸다. 동생인 리처드는 원래 발명가적인 성향이 있었는데, 효율적이고 빠르게 햄버거를 만들 수 있도록 직접 부엌 구조도 설계했다. - P86

아주 커다란 그릴로 직원 한 명이 여러 햄버거를 동시에 조리하면서 동일한소스를 바르는 장비로 모든 햄버거가 비슷하게 맛있을 수 있도록했다.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 Speedee Service System의 탄생이었다. - P86

장사가 꾸준히 잘되자 형제는 인기 음료인 밀크셰이크를 더 빨리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던 중 밀크셰이크 5잔을 동시에 만들 수있는 멀티 믹서를 발견하고 무려 8대나 주문했다.  - P87

레이는 대체 어떤 곳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주문을 했는지 궁금했다. (중략)
영업을 하면서 그동안 수천 개의 식당을 가보았으나맥도널드 형제의 레스토랑처럼 깨끗하고 전문적이며 체계적인곳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P87

레이는 직접 맥도널드 형제에게 스피드 서비스 시스템에대한 이야기를 듣고 프랜차이즈 사업을 제안했다. 사실 맥도널드형제는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이 프랜차이즈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이미 사업을 시도해본 상황이었다 - P87

회사가 급성장하면서 맥도널드 형제와 레이 사이의 갈등이 심해졌다. 맥도널드 형제는 철저하게 품질 관리가 가능한 소수 정예가맹점만 유지하기를 원했는데, 레이는 미국 전역에 세워진 교회의 십자가들처럼 맥도날드의 황금 아치를 전국에 세우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 P88

맥도널드 형제가 당시 요구한 금액은 270만 달러였다. 약 15년간 받을로열티의 총액이었다. 엄청난 금액이라 당시 레이의 변호사들은너무 비싼 금액이라며 반대했음에도, 레이는 맥도날드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거래를 진행했다. - P89

1955년 레스토랑 박람회에서 레이와 만난 마이클 제임스델리게티 Michael James Delligatti (1918~2016)는 1967년 펜실베이니아주의피츠버그 지역에서 무려 12개의 맥도날드 매장을 관리하게 되었다. - P89

당시 피츠버그는 제철 산업의 중심지로 철강공장이 여럿 있었고, 하루 종일 철강공장에서 고되게 일한 근로자들은 아주 배고픈상태로 매장을 찾아왔다. 마이클은 패티가 달랑 1장만 들어간 기존의 햄버거로는 그들을 절대로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주 풍성한 햄버거를 만들어보기로 결심했다. - P90

당시 기존의 햄버거는 하나에 20 센트로, 마이클은 이 대형 햄버거에 45센트의 가격을 책정하고본사와 출시를 의논했다. 본사에서는 새로운 햄버거가 다른 제품들에 비해 너무 비싸다며 부정적이었지만, 마이클의 눈물겨운 설득으로 유니언타운 매장에서만 시험 판매하도록 허락했다. - P90

1969년에는 맥도날드 총 매출의 19%가 빅맥의 매출이었다. 현재 빅맥은 매년 전 세계에서 13억 개 이상 팔린다. 이제 빅맥은 맥도날드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빅백을 발명한 마이클은 맥도날드로부터 로열티 대신 감사패를 하나 받았다고 한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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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들어도 달콤해지는 120년 전통의 초콜릿 명가 허쉬 허쉬는 초콜릿 업계에서 처음 대량 생산 기법을 도입해 밀크 초콜릿을 더 많은사람이 즐길 수 있게 만든 기업으로 유명하다.
브랜드 철학이 ‘행복‘이라 말하는 허쉬는 원래 초콜릿 가게가 아니라 사탕 가게로 시작했다. - P32

1886년 밀턴 허시 Milton Hershey (1857~1945)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에서 캐러멜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 P33

밀턴은 어린 시절 가난했던 가정환경 탓에 제대로 정규 교육을 받지는 못했어도 평소 사탕 만들기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아들을 유심히 지켜보던 어머니가 밀틴을 제과사의 제자로 보내면서 다양한 과자 제조법을 익히게 된다. - P33

얼마나 큰 거래였는지 밀턴이 네 번째 가게를 열기 위해 빌린 은행 대출을 다 갚고도 남을 정도였다. 이후 밀턴의 캐러멜 가게는 1890년대 초 1,400명의 직원을 거느린 큰 기업으로 성장한다.
그러던 1893년 시카고에서 만국 박람회가 열렸다. - P34

밀턴이 겨우 자리잡은 사업을 팔아버린 이유는 꼭 개발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밀크초콜릿! 당시 밀크 초콜릿은 스위스에서만 유일하게 만들어지는 아주 값비싼 고급 간식으로 사치품에 해당했다. 우유와 설탕, 카카오를 적절한 비율로섞어야만 밀크 초콜릿을 만들 수 있었는데, 스위스에서는 밀크 초콜릿의 황금 비율을 철저히 비밀로 했기 때문이다. - P35

3년의 연구 끝에 자신만의 밀크 초콜릿 레시피 개발에 성공한 밀턴은세계에서 가장 큰 초콜릿공장을 짓겠다고 다짐하며 고향인 데리타운십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밀턴은 가장 먼저 새로운 공장을 짓기 위해 땅부터 인수했다. - P35

밀턴의 초대형 최신식 초콜릿 공장은 2년 만에 완공되었다. 그곳에서 처음 생산된 제품이 바로 허쉬 밀크 초콜릿이다. - P356

밀턴의 초콜릿 사업이 초대박을 낸비결에는 ‘대량 생산으로 가격을 저렴하게‘ 라는 전략이 있었던셈이다.
허쉬사는 초콜릿 대량 생산을 위해 컨베이어 벨트와 노즐로 제조 기계도 만들었다. 노즐에서 컨베이어 벨트로 원물을 떨어뜨리면 눈물방울 모양 초콜릿이 만들어졌다. - P37

‘키세스‘라는 이름의 어원은 허쉬사에서도 제대로 밝히고 있지않기 때문에 아직까지 미스터리다. 노즐에서 초콜릿이 나올 때 마치 키스하듯 ‘쪽쪽‘ 소리가 나서 그렇게 지어졌다는 소문이 있지만, 전문가들은 그보다 당시 한입 크기의 캔디 조각을 ‘키스Kiss‘라고 부르던 것이 유래가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 P38

사실 키세스가 눈물방울 모양을 한 최초의 초콜릿은 아니다. 당시 펜실베이니아에는 윌버 Wilbur라는 또 다른 초콜릿 공장이 있었다. 윌버에서는 1894년부터 윌버 버드라는 눈물방울 모양의 초콜릿을 생산했는데, 특수 제작한 몰드에 녹인 초콜릿을 일일이 짜내굳히는 방식으로 제조된 수제 초콜릿이었다. - P38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24시간 연중무휴로 제조되던 허쉬 키세스의 생산이 잠시 중단되었다. 초콜릿으로 만든 비상용 전투 식량 디-레이션D-ration 생산을 위해서였다 - P39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레이션은 훌륭한 전투 식량이었다. 이후 미군의 추가 의뢰로 디-레이션을 조금 더 맛있게 만든 허쉬 트로피칼 초콜릿 바가 개발되었다. - P40

우유만 부으면 맛있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간편식의 대명사, 시리얼 전 세계인의든든한 아침 식사를 책임지고 있는 시리얼을 처음 개발한 브랜드는 어디일까? 켈로그?
포스트?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시리얼 회사 두 곳은 사실 모두 하나의 요양원에서 탄생했다. 성욕 억제를 위한 건강식을 개발하던 중 우연히 시리얼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 P43

1850년대 미국 미시간주의 한 마을 배틀크릭에는 제임스 화이트 앨런 화이트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 부부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이하 안식교)를 창립했는데, 존 프레스톤 켈로그와앤 재닛 스탠리 켈로그 부부도 창립 멤버였다. - P43

 자연스럽게 존 하비도 앨런 화이트가 주장하는 안식교의 종교적 의무인 건강한 삶에 관심을 갖고 자연요법과 예방 의학, 채식주의 등 건강 관련 연구를 시작했다. - P44

1872년 안식교는 전통 의학을 비판하며 자신들의 교리에맞는 전문 의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안식교 지도자들은 존 하비를 포함해 똑똑한 몇 사람을 뽑아 뉴저지에서 물 치료, 자연 위생, 채식주의 등의 대체의학을 가르치던 러셀 트랄Russell Tral의 5개월짜리 의학 교육 과정을 이수하게 했다. 이때의 경험으로존 하비는 의학과 건강 개혁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P44

1877년 배틀크릭 요양소에 아픈 이모를 보살피기 위해 엘라 이튼이란 여성이 찾아왔다. 배틀크릭 연구소에 머무르면서 엘라는위생이란 개념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위생 학교에 입학하여 위생학, 해부학, 생리학 등 치료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했다. - P45

존 하비는 자신들뿐만 아니라 요양소 환자들의 식욕과성욕을 억제하기 위해 아내 엘라와 함께 양념이 강하고 자극적인음식 대신 채식 위주의 건강식을 연구했다. - P45

존 하비는 이뿐만 아니라 치아가 약한 환자들도 견과류를 먹을 수 있게 땅콩버터를 만들고, 고기 대신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 음식 등을 개발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건강한 채식 식단은 요양소 환자들에게 그저 맛없는 음식일 뿐이었다. - P46

 요양소에 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에 존 하비는 반죽만 남겨둔 채 긴급하게 회의에 참석했다. 그사이 반죽은 점점 말라갔고, 돌아왔을때는 이미 단단히 굳은 상태였다.
존 하비는 이대로 요양소 예산을 낭비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어떻게든 반죽을 살려보기 위해 단단하게 굳은 옥수수 반죽을 롤러압착기에 강제로 밀어 넣었다. - P46

존 하비는 이 부서진 옥수수 반죽 조각들을 익히기 위해 일단 구워봤다. 그 결과 바삭바삭한 옥수수 시리얼이 만들어졌다. - P46

 동생 월 케이트는 콘플레이크를 상품화하여 시리얼 사업을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형인 존 하비는 요양소 환자들의 건강과 성욕 억제를 위해 만든 음식을 상품화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에 콘플레이크는 곧바로 상품으로 제조되지 못했다. - P47

형제가 갈등하는 사이 배틀크릭 지역에서만 20개 이상의 시리얼 회사가 생겨났다. 이 회사들 중에 켈로그의 최대 라이벌 회사인 포스트 컨슈머 브랜드 Post Consumer Brands가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포스트의 설립자 찰스 윌리엄 포스트가 형제가 운영하던 배틀크릭 요양소의 환자였다는 것이다. - P47

윌 케이트는 대중의 입맛에 맞춘 더 맛있는 콘플레이크를 출시하기위해 설탕을 첨가한 뒤 ‘그라노스Granose‘라는 이름을 붙였다. 건강식으로 개발한 콘플레이크에 설탕을 넣는 일은 존 하비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두 형제의 관계는 더욱 나빠졌다. - P48

윌 케이트는 콘플레이크 판매를 더욱 촉진시키기 위해 재미있는 이벤트를 기획했다. 식료품점에서 윙크하는 모든 여성에게 콘플레이크 한 상자를 무료로 나눠준 것이다. 이 이벤트로 콘플레이크를 처음 접한 이들도 콘플레이크가 아주 편리한 아침 식사 대용임을 금세 알아차렸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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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양소들은 언론에 의해 어떤 달에는 악마화되기도하고 또 어떤 주에는 찬양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세 영양소가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우리 식단에 금속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나트륨, 칼륨, 칼슘 같은 물질은 화학적으로 금속으로 분류되지만, 일반적으로 금속이라 하면 우리는 철이나 구리 또는 알루미늄 같은 것을 떠올린다. - P265

 이런 금속 성분들이 우리 몸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면, 인체가 식품으로부터 금속을 흡수하기 위한 특별한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는 것이 아주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 P265

1903년, 피에르와 마리 퀴리가 방사능 연구와 마리의 모국인폴란드에 헌정하는 의미로 폴로늄polonium이라 이름 지은 새로운 방사능 원소의 발견에 대한 업적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으로수상했다. - P266

비스무트 bismuth에 방사선을 조사하면 폴로늄210 이 생성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어서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동물 실험을 통해 폴로늄210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졌다. 1밀리그램, 즉 먼지 한 톨만큼의 폴로늄-210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 P267

폴로늄-210은 핵무기에서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 촉발제로 쓰일 수 있음이 밝혀졌고, 한때 미국과 소련, 영국과 프랑스가 모두 핵폭탄을 만들 목적으로 폴로늄을 생성하는 원자로를 갖고 있었다.¹ - P267

1 소련은 1970년에 달 탐사선 루노호트Lunokhod를 달 표면에 착륙시켰다(아직 회수되지 않았다). 이 탐사선의 전자 부품들은 폴로늄-210 의 방사능 붕괴에서 발생하는 열로 온도를 유지한다. - P366

폴로늄-210은 완벽한 암살 도구라고 할 수 있다. 극히 적은양으로도 치명적이어서, 같은 질량의 청산가리보다 25만 배나 더 치명적이다. - P267

●에드윈 카터 사건

에드윈 카터는 어쩐지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로 집에 도착했다. 감기 기운이거나 음식을 잘못 먹은 탓이거니 했다. 밤 11시,
에드윈과 아내는 함께 잠자리에 들었는데 침대에 누운 지 채 10분도 못 되어 에드윈이 토하기 시작했다. - P268

여러 번 반복적으로 검사를 했음에도, 의사들은 그 이유를 찾지 못했다. 환자는 분명히 통증을 겪고 있었고, 설사와 구토도 멈추지 않고 반복되었다. 환자의 목에는 점점이 궤양이 나타났고, 그 때문에 먹거나 마실 때 심한 통증을 느꼈다. - P269

카터는 계속해서 자신은 독성 물질에 중독되었다고 주장했다. 병원 측에서는 환자의 주장을 신뢰하지않았지만, 병원의 독물학자들도 일단 중금속 중독 검사에 동의했다. 샘플을 분석한 결과 놀랍게도 탈륨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왔다. - P270

카터의 첫 진술부터 놀라웠다. 그는 경찰에게 자신의 이름은 에드윈 카터가 아니라 알렉산더 리트비넨코이며 전직 KGB 요원이었다고 진술했다. 그는 KGB에서도 최고 비밀 부서에 소속된 중령이었다. - P270

사샤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알렉산더 발테로비치 리트비넨코는 1962년 12월 12일,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510킬로미터 떨어진 러시아의 소도시 보로네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처럼 사샤도 군에 입대해 소대장까지 진급했다. 1988년, 내무부 소속 특수부서로 전출되어 모스크바로 옮겼고, 그곳에서 KGB요원으로 차출되었다.  - P271

리트비넨코는 자신의 직속 상관마저 범죄 조직과 손을 맞잡고 있으며 사회 곳곳에 부패가 만연해 있음을 발견하고는 러시아라는 국가의 시스템 전체에 환멸을 느꼈다. - P271

그는 이 밀매 조직이 블라디미르 푸틴을 포함한 FSB 고위 관료들까지 연루된 신디케이트가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첩보조직의 동료들이 보기에는, 기자회견을 열고 FSB의 더러운 돈세탁을 까발린 리트비넨코의 행동은 대역죄와 다름이 없었다. - P272

 이러한 주장에 대응하기 위해 푸틴은 TV 인터뷰에 모습을 드러냈고, 메시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메신저를 공격하고 비난하는 전술을 썼다. "FSB 요원은 기자회견을 해서도 안 되고 내부의 스캔들을 대중 앞에 노출시켜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 P272

금속도 나름의 수송체를 이용하는데, 철과 아연 같은 금속은 DMT1이라는 특수한 수송 단백질을 이용해 내장의 세포 속으로들어간다. DMT1은 철, 구리, 아연을 차별하지 않고 활발하게 이금속들을 체내로 운반한다. 그러나 DMT1은 인체가 필요로 하는금속과 납, 카드뮴, 폴로늄 같이 인체에 해로운 금속을 구분하지 못한다. - P273

 아이러니하게도, 레이건 동상으로부터 엎어지면 코 닿을 자리에 있는 밀레니엄 호텔에서 전직KGB 요원 알렉산더 리트비넨코 암살 작전이 실행되었다. - P275

두 러시아인은 차를 주문했고 4시 30분, 리트비넨코가 바에 도착해 루가보이, 코브툰과 합석했다. 차는 이미 찻잔에 따라져있었다. 루가보이는 웨이터에게 리트비넨코가 사용할 찻잔을 다시 부탁했다. 찻주전자에는 차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데다 많이식어 있었지만 리트비넨코는 그 차를 몇 모금 마셨다. 그 몇 모금의 차가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 P275

이제 병원에 있는 모든 사람이 리트비넨코가 무언가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정확히 무엇에 중독되었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탈륨이라는 전제하에 프러시안 블루 치료를 했지만. 그 효과는 매우 미미했다. - P276

그때, 리트비넨코를 치료하던 의사 중 한 명이 자신이 치료하는 백혈병 환자 중에서 화학 요법 치료를 받은 사람들이 보이는 증상과 리트비넨코의 증상이 비슷하다는 점을 간파했다. 그렇다면 리트비넨코에게 화학 요법 약물을 과다 처방했던 것일까? - P276

 응급 소생팀이 즉각 소생술을 실시했지만, 리트비넨코를 살려내는 데 30분이나 걸렸다. 다음 날 오후,
올더마스턴에서 전화로 소변 샘플의 검사 결과를 알려왔다. 중독물질이 무엇인지 드디어 밝혀졌다. 폴로늄-210이었다. 소변에서 발견된 양은 치사량의 100만 배에 달했다. 리트비넨코가 그때까지 살아 있는 게 기적이었다. - P277

폴로늄-210은 1밀리그램 미만의 극미량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리트비넨코가 이 물질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알아내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던 이유는 그 이전까지 이 물질이 살인 무기로 쓰인 적이 없었기때문이었다. - P277

법의병리학자 너새니얼 캐리는 방호복 두 겹을 겹쳐 입고 장갑을 낀 후 손목을 테이프로 감아 밀봉하고, 머리에 쓴 플라스틱 후드 안으로 여과된 공기를 흡입했다. 두 번째 병리학자, 형사, 그리고 사진사도 비슷하게 방호복을 착용했다. 방사능 전문가가 옆에 서서 부검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튀는 피를 즉시 닦아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누구든 이상 징후를 보이면 즉시 철수시킬 수 있도록 구급대원이 대기했다. - P278

 사실, 소장 내막의 모든 세포는 대략 3일에서 7일마다 교체된다. 따라서 소장 내막은 우리 인체에서 교체 주기가 가장 빠른 조직에 속한다. 세포가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고 자주 교체되려면 DNA 합성도 자주, 많이 일어나야 하며, 이 과정이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이라 하더라도 그 속도때문에 내장은 DNA 합성을 방해하는 물질에 극도로 예민해진다. - P279

사실, 소장 내막의 모든 세포는 대략 3일에서 7일마다 교체된다. 따라서소장 내막은 우리 인체에서 교체 주기가 가장 빠른 조직에 속한다. 세포가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고 자주 교체되려면 DNA 합성도 자주, 많이 일어나야 하며, 이 과정이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이라 하더라도 그 속도 때문에 내장은 DNA 합성을 방해하는 물질에 극도로 예민해진다.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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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모든 제전은 특정한 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종교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올림피아 제전은 전 그리스인들의 최고 축제인 만큼, 그리스 신화의 최고 신인 제우스에게 영광을 돌리는 제전이었죠. 여러 가지 기원 신화가 있는데, 그중에 가장 오래된 신화는 그리스의 역사가 파우사니아스 (Pausanias)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P240

또 다른 기원 신화는 어린 제우스가 커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후에 아버지 크로노스를 찾아가는 이야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장성한 제우스는 아버지 크로노스에게 도전하기 위해 뱃속에 갇힌 형제 자매를 모두 구하고, 힘을 합해 아버지와 싸워 승리를 거둡니다. - P240

헤라클레스가 열두 가지 과업을 모두 성공한 다음에 그 업적을 기념하고 아버지인 제우스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올림피아 제전을 열었다고 합니다. 이 제전은 처음에 달리기 경기만 있었는데, 점점 종목이 늘어서 스물세 종목까지 되었죠. - P241

우리는 축구장을 포함한 종합 경기장을 ‘스타디움 (stadium)‘
이라고 부르는데, 이 명칭은 바로 그리스어 스타디온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원래 구조물이나 건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길이의 단위였죠.  - P241

 65회에는 완전 무장을 하고 스타디온을 한 번 또는 두 번 왕복하는 호플리토드로모스(hop-litodromos)라는 경기도 시작되었고요. 이 모든 경기는 이후에 생겨난 다른 범그리스 축제의 운동 시합에서 표준이 되었습니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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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저어………. 실례를 무릅쓰고 여쭤볼게요………. 미야에 교이치 씨와는 어떤 관계십니까? 아까 사건에관한 기사를 읽었는데, ‘미야에 교이치 씨는 미혼이었다.‘라는 구절이 있었거든요. - P113

미야에 : 네. 미야에 교이치 씨는 제 남편이 아니에요.
제 본명은∙∙∙∙∙∙ 가타후치 유키. 그 집에 살았던 가타후치 아야노의 여동생이에요. - P113

언니가 사라진 후로 우리 가족은 점점 망가졌어요. 아빠는 느닷없이 일을 그만두고 방에 틀어박혀 술만 마시다가…………2007년에 음주 운전으로 사고를 일으켜서 돌아가셨어요.
그 후 엄마는 ‘기요쓰구‘라는 남자와 재혼했는데요. 아주 고압적인 사람이라 저는 도무지 마음에 들지가 않았어요. - P115

스무 살이 넘어 생활이 안정되자, 가족 생각도 덜 나더라고요. 생각나지 않도록 애썼다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싫은 기억이 너무 많았으니까요.

그런데 2016년 10월, 갑자기 편지 한 통이 왔어요.

언니가 보낸 편지였죠. - P116

언니가 얼마 전에 결혼해 사이타마현에 살고 있다는 걸 알았죠.
형부는 레이타 씨라는 사람인데, 우리 집안 성씨를 선택하는 형태로 결혼했대요. 그래서 결혼해도 성씨가 바뀌지 않고
‘가타후치 아야노‘라는 이름 그대로라고 했어요. 지금은 사정이 있어서 어렵지만, 언젠가 저를 집에 초대하고 싶다고도 했죠. - P117

하지만 어느 날 느닷없이 출산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좀 섭섭하더군요. 저는 언니가 임신한 줄조차 몰랐으니까요.
아이를 키우느라 바쁜지 한동안 연락이 끊겼어요. 쓸쓸했지만 언니가 행복하다면 저는 만족할 수 있었어요. - P118

그리고…… 뭐라고 하면 좋을까, 언니 부부가 내내 뭔가에겁먹고 긴장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때 느낀 작은 위화감을 확인하지 않고 넘어간 게 지금도 후회스럽네요.

도쿄의 새집에 다녀오고 두 달 후, 또 언니와 연락이 끊겼어요.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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