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들어도 달콤해지는 120년 전통의 초콜릿 명가 허쉬 허쉬는 초콜릿 업계에서 처음 대량 생산 기법을 도입해 밀크 초콜릿을 더 많은사람이 즐길 수 있게 만든 기업으로 유명하다.
브랜드 철학이 ‘행복‘이라 말하는 허쉬는 원래 초콜릿 가게가 아니라 사탕 가게로 시작했다. - P32

1886년 밀턴 허시 Milton Hershey (1857~1945)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에서 캐러멜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 P33

밀턴은 어린 시절 가난했던 가정환경 탓에 제대로 정규 교육을 받지는 못했어도 평소 사탕 만들기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아들을 유심히 지켜보던 어머니가 밀틴을 제과사의 제자로 보내면서 다양한 과자 제조법을 익히게 된다. - P33

얼마나 큰 거래였는지 밀턴이 네 번째 가게를 열기 위해 빌린 은행 대출을 다 갚고도 남을 정도였다. 이후 밀턴의 캐러멜 가게는 1890년대 초 1,400명의 직원을 거느린 큰 기업으로 성장한다.
그러던 1893년 시카고에서 만국 박람회가 열렸다. - P34

밀턴이 겨우 자리잡은 사업을 팔아버린 이유는 꼭 개발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밀크초콜릿! 당시 밀크 초콜릿은 스위스에서만 유일하게 만들어지는 아주 값비싼 고급 간식으로 사치품에 해당했다. 우유와 설탕, 카카오를 적절한 비율로섞어야만 밀크 초콜릿을 만들 수 있었는데, 스위스에서는 밀크 초콜릿의 황금 비율을 철저히 비밀로 했기 때문이다. - P35

3년의 연구 끝에 자신만의 밀크 초콜릿 레시피 개발에 성공한 밀턴은세계에서 가장 큰 초콜릿공장을 짓겠다고 다짐하며 고향인 데리타운십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밀턴은 가장 먼저 새로운 공장을 짓기 위해 땅부터 인수했다. - P35

밀턴의 초대형 최신식 초콜릿 공장은 2년 만에 완공되었다. 그곳에서 처음 생산된 제품이 바로 허쉬 밀크 초콜릿이다. - P356

밀턴의 초콜릿 사업이 초대박을 낸비결에는 ‘대량 생산으로 가격을 저렴하게‘ 라는 전략이 있었던셈이다.
허쉬사는 초콜릿 대량 생산을 위해 컨베이어 벨트와 노즐로 제조 기계도 만들었다. 노즐에서 컨베이어 벨트로 원물을 떨어뜨리면 눈물방울 모양 초콜릿이 만들어졌다. - P37

‘키세스‘라는 이름의 어원은 허쉬사에서도 제대로 밝히고 있지않기 때문에 아직까지 미스터리다. 노즐에서 초콜릿이 나올 때 마치 키스하듯 ‘쪽쪽‘ 소리가 나서 그렇게 지어졌다는 소문이 있지만, 전문가들은 그보다 당시 한입 크기의 캔디 조각을 ‘키스Kiss‘라고 부르던 것이 유래가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 P38

사실 키세스가 눈물방울 모양을 한 최초의 초콜릿은 아니다. 당시 펜실베이니아에는 윌버 Wilbur라는 또 다른 초콜릿 공장이 있었다. 윌버에서는 1894년부터 윌버 버드라는 눈물방울 모양의 초콜릿을 생산했는데, 특수 제작한 몰드에 녹인 초콜릿을 일일이 짜내굳히는 방식으로 제조된 수제 초콜릿이었다. - P38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24시간 연중무휴로 제조되던 허쉬 키세스의 생산이 잠시 중단되었다. 초콜릿으로 만든 비상용 전투 식량 디-레이션D-ration 생산을 위해서였다 - P39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레이션은 훌륭한 전투 식량이었다. 이후 미군의 추가 의뢰로 디-레이션을 조금 더 맛있게 만든 허쉬 트로피칼 초콜릿 바가 개발되었다. - P40

우유만 부으면 맛있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간편식의 대명사, 시리얼 전 세계인의든든한 아침 식사를 책임지고 있는 시리얼을 처음 개발한 브랜드는 어디일까? 켈로그?
포스트?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시리얼 회사 두 곳은 사실 모두 하나의 요양원에서 탄생했다. 성욕 억제를 위한 건강식을 개발하던 중 우연히 시리얼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 P43

1850년대 미국 미시간주의 한 마을 배틀크릭에는 제임스 화이트 앨런 화이트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 부부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이하 안식교)를 창립했는데, 존 프레스톤 켈로그와앤 재닛 스탠리 켈로그 부부도 창립 멤버였다. - P43

 자연스럽게 존 하비도 앨런 화이트가 주장하는 안식교의 종교적 의무인 건강한 삶에 관심을 갖고 자연요법과 예방 의학, 채식주의 등 건강 관련 연구를 시작했다. - P44

1872년 안식교는 전통 의학을 비판하며 자신들의 교리에맞는 전문 의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안식교 지도자들은 존 하비를 포함해 똑똑한 몇 사람을 뽑아 뉴저지에서 물 치료, 자연 위생, 채식주의 등의 대체의학을 가르치던 러셀 트랄Russell Tral의 5개월짜리 의학 교육 과정을 이수하게 했다. 이때의 경험으로존 하비는 의학과 건강 개혁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P44

1877년 배틀크릭 요양소에 아픈 이모를 보살피기 위해 엘라 이튼이란 여성이 찾아왔다. 배틀크릭 연구소에 머무르면서 엘라는위생이란 개념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위생 학교에 입학하여 위생학, 해부학, 생리학 등 치료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했다. - P45

존 하비는 자신들뿐만 아니라 요양소 환자들의 식욕과성욕을 억제하기 위해 아내 엘라와 함께 양념이 강하고 자극적인음식 대신 채식 위주의 건강식을 연구했다. - P45

존 하비는 이뿐만 아니라 치아가 약한 환자들도 견과류를 먹을 수 있게 땅콩버터를 만들고, 고기 대신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 음식 등을 개발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건강한 채식 식단은 요양소 환자들에게 그저 맛없는 음식일 뿐이었다. - P46

 요양소에 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에 존 하비는 반죽만 남겨둔 채 긴급하게 회의에 참석했다. 그사이 반죽은 점점 말라갔고, 돌아왔을때는 이미 단단히 굳은 상태였다.
존 하비는 이대로 요양소 예산을 낭비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어떻게든 반죽을 살려보기 위해 단단하게 굳은 옥수수 반죽을 롤러압착기에 강제로 밀어 넣었다. - P46

존 하비는 이 부서진 옥수수 반죽 조각들을 익히기 위해 일단 구워봤다. 그 결과 바삭바삭한 옥수수 시리얼이 만들어졌다. - P46

 동생 월 케이트는 콘플레이크를 상품화하여 시리얼 사업을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형인 존 하비는 요양소 환자들의 건강과 성욕 억제를 위해 만든 음식을 상품화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에 콘플레이크는 곧바로 상품으로 제조되지 못했다. - P47

형제가 갈등하는 사이 배틀크릭 지역에서만 20개 이상의 시리얼 회사가 생겨났다. 이 회사들 중에 켈로그의 최대 라이벌 회사인 포스트 컨슈머 브랜드 Post Consumer Brands가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포스트의 설립자 찰스 윌리엄 포스트가 형제가 운영하던 배틀크릭 요양소의 환자였다는 것이다. - P47

윌 케이트는 대중의 입맛에 맞춘 더 맛있는 콘플레이크를 출시하기위해 설탕을 첨가한 뒤 ‘그라노스Granose‘라는 이름을 붙였다. 건강식으로 개발한 콘플레이크에 설탕을 넣는 일은 존 하비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두 형제의 관계는 더욱 나빠졌다. - P48

윌 케이트는 콘플레이크 판매를 더욱 촉진시키기 위해 재미있는 이벤트를 기획했다. 식료품점에서 윙크하는 모든 여성에게 콘플레이크 한 상자를 무료로 나눠준 것이다. 이 이벤트로 콘플레이크를 처음 접한 이들도 콘플레이크가 아주 편리한 아침 식사 대용임을 금세 알아차렸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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