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3. 수학의 중심부에서
24. 수학자는 모두 플라톤주의자인가?

플라톤의 아카데미 입구에 실제로 기하학자가 아닌 자는 들어오지 말라"
라고 새겨져 있었든 아니든, 이 문장은 플라톤의 생각과 일치한다. 그는철학자가 기하학을 배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가Politeia』제7권에서 기하학 학습이 철학 공부의 전제조건이며 기하학이 시민을 양성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과목이라고 말했다. - P268

 명백하게 드러나는 개념 사이에 감추어진 비밀스러운 관계를 꿰뚫어 밝히려고 노력하면서 수학과 거리가 먼 분야 사이에 다리를 놓다 보니, 자신이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지녔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대수학과 기하학을 연결하는 이 정리는 정말 내가 만들어낸 것일까,
아니면 이 정리가 나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을까? - P268

동굴에 갇힌 사람들처럼 우리는 우리의 감각과 상상력을 뛰어넘는 광대한 세계를 슬쩍 훔쳐보기만 할 뿐이다.
플라톤은 (이런 외부세계가 무척 구체적이라고 보았는데도) 이를 ‘이데아의 세계‘라고 불렀다.
이 확장된 세계는 과연 존재하는가? 플라톤은 그렇다고 가정했고, 그래서 영혼이 불멸한다고 주장했다. - P269

. 그리스 철학은 가끔 이렇게 끝까지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성향은 수학자들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학자들에게 2+2는 3.99 일 수없다. 답은 이론의 여지없이 4다. 이 방법론은 그 틀 안에서는 정확하지망, 간혹 영혼이 불멸한다는 생각 같은 불필요한 부조리에 이르게 한다. - P269

수학의 세계는 인간보다 먼저 존재했을까

그렇다면 수학자는 플라톤주의자일까? 그들은 수의 세계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인간은 그 세계를 단순히 탐색하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믿을까? 확실한 것은, 수학자가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의 세계를 닮은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 P270

고대 이후로 기하학의 세계는 몇 가지 공리, 즉 증명 없이 참이라고 간주되는 결과로 규제된다. 이 공리적 방법은 20세기 초에 힐베르트가 일반화하고 발전시켰다. 오늘날 각 이론(산술학, 기하학 등)에는 그 이론의 구조를 세워주는 공리들이 있다. - P270

시라쿠사 침공

포물선의 축에 평행한 직선 D와 이 포물선이 점 M 에서 만난다면, M에서의 섭선에 대하여 D와 대칭하는 직선은 포물선의 초점을 지난다. 이 특성은 우리 일상세계에 눈에 띄는 결과로 나타난다. - P271

 뒤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물리학자 유진 위그너 Eugene Wigner,
1902~1995처럼 일부 과학자는 수학의 실효성이 ‘비이성적이다‘라고 평가했지만 말이다. 당신이 수학자에게 공리가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그는 아마도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대답할 것이다. "공리는 우리가 추상적인 방식으로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논리 법칙에 따라 일관된 이론을 구축하는 규칙들입니다"라고 말이다.  - P272

이상적인 세계

공리는 무작위로 선택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리들은이 공리로부터 끌어내는 수학 이론이 현실에 대한 좋은 모델이 되도록 선택된다. 이를 위해 공리는 현실에서 영감을 받는다. 수학자들은 플라톤이그랬듯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어내는데, 현실은 이 세계를 반영한다.
이런 의미에서 수학자들은 플라톤주의자이지만, 자신이 만든 모델에 쉽게 속아 넘어가지는 않는 플라톤주의자다. - P272

 달리 말하면, 수학은 비역사적인 세계에 머물지 않는다. 수학은 진화하는 역사의 산물이다. 수학적 진리가 변치 않는다고 단언할 수조차 없다. - P272

알랭 바디우가 『수학 예찬』에서 쓴 용어를 빌리면, 수학적 사고는 두 방향으로 나아간다. 첫번째 방향은 우리가 플라톤주의적 사고라고 부른것으로, 현실적 사고라 할 수 있다. (중략) 두 번째 방향은 공리가 자유의지로 선택되었다고 보는데, 이른바 형식주의적 사고라고 볼 수 있다. - P273

대부분의 수학자는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수학을 평가한다. 하지만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이 현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보는 수학자는 거의 없다. 이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 같은 철학자들의 견해에 가깝다. 하지만 현실주의와 형식주의, 이 두 방향은 모든 수학자에게 항상 존재한다. - P273

유명한 플라톤주의자의 글 발췌

"수학과 물리학 사이에 어떤 지속성의 중단, 단절도 없다고 보며, 정수가 나트륨이나 칼륨 같은 것과 똑같은 필요와 필연성으로 우리 바깥에 엄연히 존재하는 듯 보인다고 내가 여러분에게 감히 고백한다면 여러분은 펄쩍 뛸것이다"

- 샤를 에르미트Charles Hermite, 1822~1901 - P273

"수학은 (지질학, 입자물리학 등 같은) 과학의 대상만큼이나 실재하는 연구대상을 갖고 있다고 나는 계속 주장한다. 하지만 이 대상은 물질적이지 않으며 시간이나 공간에서 위치가 파악되지 않는다. 하지만 외부 현실만큼이나 견고하게 존재하며, 수학자들은 외부 현실 세계에서 물체에 부딪히듯 그것에 부딪힌다."

- 알랭 콘Alain Connes, 1947년 출생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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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잘 아는 걸 보면 늘 다니던 길이 분명해. 길 끝에 뭐가 있는지 보고 나면 그에 대해 뭐라도 알게 되겠지.‘
은경은 계단을 올라갔다. 그와 마주친 층계참을 지나, 창문도 하나 없고 복도로 연결된 문조차 없는 계단을 세 층이나 더 걸어 올라갔다. 그러자 문이 나타났다. 계단은 거기에서 끝이났다. - P97

잠겨 있지 않았다. 손잡이를 끌어당겨 바깥쪽으로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 순간 은경은 당황하고 말았다. 진짜였다.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문 안쪽은 바로 벽이었다.
‘그럼 그 사람은 어디에서 내려온 거야?‘
무언가를 담을 공간조차 존재하지 않은 완전한 허무, 빈 공간조차 아닌 막다른 길 앞에서 은경의 상상도 완전히 멎어버렸다. - P97

 그러자 알트나이가 단상 아래에서 공책과 펜을꺼내주었다.
(중략)
은경은 종이 위에 한글로 ‘-았-/-었-‘이라는 글씨를 썼다. 그리고 이용을 제외한 자음과 모음에 원을 둘렀다. 글자마다 하나씩, 두 개의 일그러진 원이었다.
"이게 한국말 과거시제 선어말어미야." - P98

 은경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았-/-었-‘ 아래 칸에 한글로 다른 글자를 썼다.
"그런데 이런 어미를 써서 말하는 사람이 있었어."
은경이 손을 떼자 알트나이가 공책을 눈앞으로 가져갔다. - P98

"강연 들으면서 생각해보니까 그 사람이 그 말 썼을 때 용법이 이상했지? 과거시제 어미를 전부 ‘암‘ ‘엄‘으로 쓴 것도 아니고, 미래에 일어날 일도 가끔 과거처럼 말했어, 그렇지?"
은경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트나이가 말한 그대로였다. - P99

은경은 기억을 더듬었다. 오래된 일이지만 뭔가는 남아 있을것이다. 찾는 데 시간은 좀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예술대학 건물 막다른 계단을 혼자 찾아갔던 날로부터 반년이 지난 뒤였다. - P100

 가만히 서 있어도 비현실적인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지만, 눈에 띄는 무대의상을 입고 있지 않은탓에 그의 공연은 공연인지 아닌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 작은 무대 근처에는 오래 머무는 관객이 거의 없었다. - P100

그는 시간을 표현하고 있었다. 겉옷을 벗고 가방을 뒤져 무언가를 찾아내고 책을 폈다가 전화기를 들여다봤다가 연필을 꺼내 무언가를 메모하고는 다시 책을 펼쳐들고 이야기에 빠져드는 모습까지. 물론 벤치 위에는 겉옷도 없고 가방도 없었다. - P100

그 공연의 핵심은 그 모든 일상적인 동작들이 다섯 가지 정도의 각기 다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 P101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공연이 끝나고, 앞에 서 있던 은경이 혼자 손뼉을 쳤다. 그제야 지나가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거리낌 없는 시선을 그쪽으로 보냈다. 하지만 이미 그곳에는 구경할 만한 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 P101

"튀르키에어로 된 텍스트여서 보기 좀 어렵겠다. 연구실에 가면 영어로 번역해둔게 있는데. 논문에 인용할 부분을 몇 군데뽑아놨거든. 나중에 보내줄게. 일단 이거부터 봐봐."
근처 카페에서 알트나이가 말했다. - P103

"그렇지. 패거리 의식 같은 걸 드러내는 거지. 누군가의 말버릇을 닮는다는 건 그 사람과 가깝다는 의미니까."
"그럼 이 마지막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었던 거네. 다른 두 사람이 친분을 과시하려고 했으니까." - P104

"누가 기록한 건데? 배운 사람이 한 거 아니야? 뭐에 관한 기록이랬지?"
"중앙 정치에서 밀려나서 좌천당한 엘리트 관료가 지역 종교단체 사람들이랑 아침부터 해 질 때까지 매일매일 싸운 이야기..
"꽤 이상적인 기록자잖아. 교육 수준이 높고 네 주제에 직접적인 관심은 없어서 조작할 이유가 거의 없고." - P105

알트나이는 분명 새 시제 어미의 정체를 설명하는 기존의 가설들, 이를테면 사투리나 말실수, 오기의 가능성을 부정하기 위해 꽤 애를 쓰고 있었다. 즉, 본인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은 어떤 결론을 지지하기 위해 다른 가능성들을 열심히 차단했던 셈이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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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소유권의 동인으로서의 노동에 대하여

현대 법률학자들은 너나할것없이 경제학자들이 말한 것을 근거로 원초적 선점의 이론은 너무 파괴적이라고 폐기하고 나서소유는 노동에서 나온다는 이론에 전적으로 매달렸다. - P135

그러나 노동설을 내세우는 이들은 자신들의 체계가 법전과 완전히 모순되며 법전의 모든 조항과 규정들은 원초적 선점이라는(DEto 1510 10 2)행위에 근거한 소유를 상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 P136

나는, 소유권을 노동에서 찾는 학설이 소유권을 선점에서 찾는학설과 마찬가지로 재산의 평등을 함축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독자는 내가 어떻게 재산과 능력의 불평등에서 이 평등의 법칙을 도출해 낼 수 있을까 무척 궁금할 것이다. - P136

그는 삼단논법의 72가지 형식을 고안해낸 사람보다 천 배나 더 미묘하고 정교한 변증술의 온갖 책략을 다 동원한다. 자기 권리를정당화하려는 소유자들이 하는 짓이 바로 이런 식이다.  - P137

그대는 노동을 했다. 소유자여! 그런데 그대는 원초적 선점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뭐라고! 그대는 그대의 권리에 대해확신이 없었는가, 아니면 사람들을 속이고 정의를 우롱하길 원했는가? - P138

그대는 노동을 했다! 그러면 그대는 한번도 다른 이들에게 노동을 시킨 적이 없는가? 그런데 그대가 이들을 위해 노동하지 않으면서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을 이들은 어찌해서 그대를 위해서 노동하면서도 잃어야 한다는 말인가? - P138

물론, 선점의 원리는 포기된지 오래이다. 이제 더 이상 <땅은 맨 먼저 차지한 사람의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소유권은 처음의 참호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자신의 오랜 금언을 저버린다. - P139

 나는 도처에서<노동과 근면에 영광 있으라!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의 몫을 각자의 성취에 따라 각자의 능력을>이라는 외침을 듣는다. 그런데나는 인류의 대부분이 다시 무일푼이 되는 것을 본다. - P139

아! <문제가 해결되었다니! 소유가 노동의 딸이라니!> 그러면 종물취득권, 상속권, 증권 따위는 단순한 선점에 의해서 소유자가 될 권리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P140

여기서 법전에 대한 세세한 논의에 빠져들 수는 없으므로 나는소유를 옹호하는 가장 통상적인 편견 세 가지를 검토하는 것으로만족하려 한다. ① <전유appropriation), 즉 점유에 의한 소유의 형성. ② <사람들의 동의 > ⑧ <시효취득. 그리고 나서 나는 노동이일하는 자 개개인의 조건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소유 자체에 대해서 미치는 영향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60- - P140

제 1정 토지는 전유될 수 없다.

자연의 재산들, 즉 신이 창조한 부가 어떻게 사유 재산이 될 수 있는가?  - P141

. 내가 묻건대, 도대체 무엇이 토지의 비유동성을 전유의 권리와 관련시켰는가? 토지와 같이 <제한적이고> <옮겨다닐 수 없는 사물이물이나 빛보다는 더 쉽게 횡령의 손길에 노출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 P141

사람들은 왜 땅이 바다나 공기보다 더 많이 전유되었는가를 묻지 않는다.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어떤 권리에 의해서 인간이 스스로 창조하지도 안고 자연이 무상으로 준이 부를 자기의 것으로 하였는가 하는점이다.
Hale - P142

 어떻게 조물주의 모든 자식들 가운데 누구는 장자로 누구는 서자로 취급당할 수 있겠는가? 원래는 할당된 몫이 공평했는데, 어떻게 나중에 조건이 불평등해졌는가?
세는 공기와 물도 <옮겨 다닐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면 마찬가지로 횡령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 P142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길을 발견한 포루투갈인들은 그들만이 항로의 소유권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이 권리에 이의를 제기한 네덜란드인들이 이에 대해 자문을 구하자 그로티우스는 바다는 전유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특별히 『해양의 자유에 대하여 De Mari libero』를 썼던 것이다.
수렵 및 어로권은 언제나 영주나 소유자들에게만 주어졌다.  - P143

여권이란 무엇인가? 여행자의 인격을 모두에게 소개하는 것이며 여행자와 여행자의 소지품에 대한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물품이라도 변질시키고자 혈안이 된 세리 (稅?)들은 여권을 밀정 행위와 징세의 수단으로 삼았다. - P143

프롤레타리아인 우리 모두는 소유로부터 파문당한다. 땅과 물, 공기와 불로부터 우리들은 유배되었도다(Tera, et aqua, et acre, et igne interdicti sumus). - P144

. 그러므로 만일 물과 공기와 불의 사용에 대한 소유권을배제한다면, 땅의 사용도 마찬가지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연결을 샤를 콩트 씨는 『소유론 Traité de la propriété』 (제5장)에서이미 예견한 듯이 보인다. - P144

. 이렇게 토지는 물과 공기와 빛과함께 타인의 향유를 해치지 않는 한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해야 하는 첫번째 필수품이다. 그런데 토지는 왜 횡령되었는가? 콩트 씨의 대답은 기묘하다. 세는 토지가 <옮겨 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데 비해서, 콩트 씨는 토지가 <무진장>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확언한다. - P145

 즉, 그러므로 토지는 전유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사람들이 상당한 분량의 공기나 빛을 자기의 것으로 한다고 해도 항상 충분히 남아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손해를 끼치지않는다. - P145

샤를 콩트 씨의 추론은 자신의 논지와도 어긋나는 것이다. 그는말한다.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사물들 중에는 무진장 존재하며 고갈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다른 것들은 소량만 존재하며 일정 수의 사람들의 필요만을 충족시킬 뿐이다. 전자는
‘공동의 것‘, 후자는 ‘개인의 것‘이라 불린다.>
이것은 결코 정확한 추론이 아니다. (중략) 마찬가지로 토지는 우리 생명의 보존에 필수불가결한 사물이며, 따라서 공통의 사물이고, 따라서 전유될 수 없는 것이다. 토지는 다른 요소들보다 훨씬 그 양이 적으므로, 토지의 이용은 특정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서 규제되어야 한다. - P146

그런데 만약 사물이 유한하다면, 권리의 평등은 점유의 평등에 의해 실현될 수밖에 없다. 콩트 씨의 논지의 근저에 있는 것은 바로 농지법류의 사고방식이다. - P146

 민법전은 소유에 대한 정의를 내린후, 전유 가능한 사물들과 그렇지 않은 사물들에 대해서는 침묵을지키고 있으며, <상거래의 대상이 되는 물건들에 대해 말할 때에도 어떤 규정이나 정의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밝힌 것이 전혀 없지는 않다. 다음과 같은 변변찮은 격률이 있다. 왕은 모든 권리와 관계하며, 개개인은 특수한 일과 관계한다. - P147

제2절 보편적 동의는 소유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앞에서 인용한 세의 문장에는 저자가 소유권을 땅의 비유동성에서 찾고 있는지 아니면 모든 사람이 이 전유에 동의했다는 사실에서 찾고 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문장의 구성을 보면 그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일 수도 있고 두 가지 다일 수도 있을 듯하다. - P148

어떻든 간에 사람들은 그들 상호간의 동의에 의해서 소유를 정당화할 수 있었는가? (중략) 그러한 계약은 설령 그로티우스, 몽테스키외, 루소 등에 의해 작성되었다고할지라도, 그리고 전 인류의 날인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으며 거기에 명기된 규약은 모두 정당성이 없는 것이다. - P148

 요컨대 사람들은 보편적 동의 즉 평등에 의해 소유권을 정당화한 후에, 소유권에의해 조건들의 불평등을 정당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순환논법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리라. - P149

 사실상 사회 계약을 맺을 때소유가 평등을 조건으로 한다면,이 평등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때 계약은 파기되고 모든 소유는 강탈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이른바 모든 사람의 동의라는 것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P149

제3절 시효취득은 결코 소유를 낳을 수 없다.


시효취득이라고 하는 거짓말은 정신에 던져진 불길한 주술이며,
진리를 향한 인간의 진보를 저해하고 오류의 숭배를 조장하기 위해 양심에 불어넣은 죽음의 말이다.
법전은 시효취득을 <시간의 경과에 의해 획득되고 또 면제되는 수단>이라고 정의한다. - P149

개신교가 세상에 나타났을 때, 폭력과 방탕과 이기심을 옹호하기 위해 시효취득이 존재했다. 갈릴레이, 데카르트, 파스칼과 그사도들이 철학과 과학들을 혁신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옹호하기 위해 시효취득이 존재했다. - P150

 모든 것이 다 말해졌다고, 즉 지성과 도덕의 사안에서는 모든 것이 다 밝혀졌다고 확언하려는 이 우스꽝스러운 집착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잠언은 왜 형이상학의 연구에만적용되는가? - P151

 솔로몬에서 피타고라스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법칙이나 심리적 법칙을 파악하는 데 상상력이 너무나 많이동원되었다. 온갖 체계가 다 제시되었다. 이 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다 말해졌다>라는 말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라는 말 역시 진실이다. - P151

법전이 말하는 민사상의 시효취득에만 한정하기 위하여, 나는소유자들이 내세우는 이 비공소권(非公訴權)의 사유에 대한 논의는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이는 너무나도 지루하고 허식적인 일이다. 시효취득에 의해 소멸될 수 없는 권리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 P152

 게다가 바로 이 점유는 법률상의 오류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또 법률의 오류는 시효취득을 방해하기 때문에, <선의 bonne foi>를 상실한다. - P152

이 경우 법률상의 오류는 보유자가용익권자의 자격으로 점유할 뿐인데도 소유자의 자격으로 점유하거나, 그 누구도 양도하거나 매각할 권리가 없는 물건을 보유자가 구입할 경우에 성립한다. - P153

(전략). 마찬가지로 우리는, <재산의 평등>, <권리의 평등>, <자유>, <의지〉, 법인격 등은 한 가지 동일한 사물, 즉 <보존과발전의 권리>의 여러 가지 표현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이는 곧 생존권인 것이며, 이 삶의 권리에 맞서서 시효취득은 당사자가 죽은 이후에만 개시될 수 있는 것이다. - P153

한 사람의 점유는 다른 사람의 점유에 맞서서 시효취득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점유자가 자기 자신에 맞서서 시효취득을 주장할 수는 없듯이, 이성은 항상 스스로를 정정하고 고칠 능력이 있으며 과거의 잘못이 미래까지를 구속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성은 영원하고 항상 동일하다. 그러나 무지한 이성의 소산인 소유제도는 더 잘 계명된 이성에 의해 폐기될 수 있으며, 따라서 소유는 시효취득에 의해서 확립될 수 없다. - P154

툴리에는 「민법론 Droit civil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유의문제를 너무 오랫동안 불확실한 상태로 방치해 둔다면 가정의 평화와 상거래의 안전을 해칠 것이기 때문에, 법률은 일정한 기간을설정하고, 그것이 지나면 소유권 회복의 청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점유를 소유에 합치시킴으로써 점유의 오랜 특전을 유지하게 해주었다.> - P156

. 만사는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나, 어떤 것도 시간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효취득, 즉 시간의 경과에 의해 무엇인가 취득할 권리란, 따라서 관례적으로 수용되는 법률의 허구이다. - P156

시간 지속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창출하지도, 바꾸지도, 변형시키지도 못한다. 오랫동안 자기 권리를 누려온 선의의 점유자는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에게 모든 것을 박탈당하지 않을 권리를 민법에서 인정받고 있다. - P157

그런데 법률은 왜 소유권을 창출했는가? 시효취득이란 미래에 대한 보험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법률은 왜 시효취득을 특권의 원리로 만들었는가? - P157

그런데 모든 국민들이 정의와 보존의 본능에 의해서 시효취득의 유용성과 필요성을 인정했다면,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의도가 점유자의 이익을 지켜주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그들은,
통상이나 전쟁에 의해 또는 포로 신세라서 가족이나 조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어떤 점유 행위도 행사할 수 없게 된 부재(不?) 시민에 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가? - P158

. 그런데, 만일 시효취득이의향만으로도 보존되고 소유자의 행위에 의해서만 상실되는 것이라면, 시효취득의 유용성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떻게 법률은 의향만으로 무엇인가 보존하고 있는 소유자가 자신이 시효취득을 적용하도록 허용한 것을 포기할 의사를 가졌다고 추정하는 것인가?  - P158

그로티우스는 이 유력한 사유(事?)에 다른 하나를 덧붙인다. 그것은 소송을 걸어서 국민들의 평화를 교란시키고 내전의 불을 지피는 것보다는 논란이되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생각이다. 보상을 해주기만 한다면, 나는 이러한 논리를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이러한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부자들의 휴식과 안전 따위가 무산자인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P159

. 사실 우리가 소유에서 각자에게 토지의 몫과 노동의 권리를 보장하려는 소망만을 보고, 허유(虛有, nue-pro-priété)와 점유의 구별에서 부재자나 고아들 및 자기의 권리를 알지도 지키지도 못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는 안식처만을 본다면, 시효취득이라는 것에서는 부당한 요구나 침해를 물리치거나 범유자의 이주에 의해 처래된 분규를 끝내는 수단만을 보게 된다. - P160

최초의 계약이 이루어진 후에, 푀초의 욕구의 표현이었던 법률과 국가 조직의 희미한 윤곽이 마련된 후에, 법률가들의 사명은입법에서 잘못된 것을 고치고, 결함이 있는 것을 보충하며, 모순되어 보이는 것을 최선의 규정에 의해 일치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 그들은 법률의 자구적 의미에 매달리고 주석자나 고전주해자들의 판에 박은 역할에 만족하였다. - P161

 인류의 동의라는 것은 자연의 지침일뿐, 키케로가 말하듯이 자연의 법칙은 아닌 것이다. 진리는 가상(假想)의 밑에 숨어 있다. 신앙은 그것을 믿을 수 있을 뿐이며, 오직 성찰만이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 물리현상이나 천재의 창작물들에 관련된 모든 것에서 인간 정신의 진보란 바로 이와 같은것이다. 우리의 의식과 우리의 행위가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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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읽었지만, 머리에 들어온 것이 없을까.




5장 위반

위반은 금기를 부정하는 대신 오히려 금기를 초월하고 완성시킨다

금기에 대한 언급이 불편한 이유는 금기 대상의 불안정성 때문만이아니라 비논리성 때문이기도 하다. (중략)
"살인하지 말라."라는 엄숙한 계명을 생각하면 우리는 실소를 금할수 없다. 축복 받은 군대와 찬양의 신이 동시에 그렇게 노래한다. 그러나 금기는 살해와 어쩔 수 없는 공모 관계에 있다.  - P71

. 금기를 인정하고 군대의 살상을 막기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하든지, 아니면 겉치레와 규칙을 지키는 싸움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성의 세계를 받쳐 주는 금기들이 합리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 P71

 평안과 이성의 세계를 가능케 하는 터부란 그런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터부는 원칙적으로 폭력이 그렇듯이(인간의 폭력은 본질적으로 계산이 아닌, 분노, 공포, 욕망 등의 감정 상태에서 비롯되지 않던가.) 그 자체로는 지성이 아닌 감성에 호소한다. 금기와 관계를 유지하면서 금기를 무시하는 논리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금기의 비합리적 성격을 고려해야 한다. - P72

 부정적 감정의 영향을 받는 경우 우리는 금기에 복종한다. 하지만 부정의 감정이 긍정으로 변하면 우리는 금기를 위반한다. 그러나 한번 범했다고 해서 반대 감정의 가능성과 의미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위반의 폭력이 가져올수 있는 최악의 상태를 모르거나 또는 희미하게 밖에 의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폭력을 그렇게까지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P72

"금기는 범해지기 위해 거기에 있다."라는 명제는 살해 금기가 없는 곳이 없지만 그것은 결코 아무 데서도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 P75

금기를 모르는 동물들은 조직적인 전쟁은 그만두고라도 전투조차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전쟁이란 공격 충동의 집단적 조직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 P73

그러면 전쟁과 폭력이 대립적인 것이라는 말인가? 아니다. 다만 전쟁은 조직된 폭력이라는 말이다. 금기의 위반은 동물의 폭력과는 다르다. 그런데도 그것은 여전히 폭력이다. - P73

위반(위반은 금기의 무시와는 다르다.)에 제한이 없었다면 위반은 동물적 폭력과 다를 것이 없는 폭력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 조직적 위반은 금기와 하나가 되어 사회생활을 규정한다. - P73

우리가 요즘에야 그에 관한 담론을 발견하는 이유는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금기와 위반의 관계를 제대로 인식한학자는 뛰어난 종교사 해석학자 마르셀 모스이며, 그는 강의를 통해서 그 진리를 체계화시켰다.  - P73

끝없는 위반

대체로 금기가 그렇듯이 금기의 위반도 규칙을 지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위반이 결코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어떤 때, 거기까지, 그것이 가능하다가 위반의 의미이다. - P74

그러나 제한이 없는 예외적인 어떤 무한정의 위반을 가정해 볼 수도있을 것이다.
관심을 가질 만한 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 이를테면 폭력이 금기를 넘어설 수 있다. 그러면 규칙은 무능한 것이 되고, 단단한 어떤 것도 더 이상 폭력을 가둘 수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죽음은 근본적으로 폭력을 막는 금기를 초월하며 또 이론적으로 보면 폭력은 죽음의 원인이다. - P74

위반의 메커니즘은 이처럼 폭력이 폭발하면서 시작된다. - P75

그러나 폭력을 가로막기 위해 사용한 방어벽이 더 이상 효과가 없어지면 인간이 지키던 금기들도 덩달아 의미를 상실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는 잘 다스려져 왔던 폭력 충동이 폭발하면서, 이제 인간은 마음대로 살해를 저지르기에 이르며, 성적 과잉을 조절하지 못하는 인간은 지금까지 조심스럽게 하던 짓을 이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절제 없이 공개적으로 해댄다. - P76

인간의 위반은 일상적으로 지켜지던 금칙에 한번 도전할 뿐, 한계를 유보해 둔다. 인간의 위반은 위반의 보완물인 세속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은 채 그것을 넘어서는 행위이다. 인간 사회가 오직 노동의 세계인 것만은 아니다. 세속의 세계와 신성의 세계는 동시에 (혹은 연속적으로) 위반을 구성하며, 둘은 위반의 두 가지 보완적 형태들이다. 세속의세계는 금기의 세계이다. 신성의 세계는 제한된 위반으로 열린 세계이다. 그것은 축제의 세계이고 군주들의 세계이고 신들의 세계이다. - P76

신성이 상호 대립적인 금기와 위반을 동시에 의미하는 한 위의 시각은 쉽게 이해가 안 된다. 본래 금기의 대상은 신성하다. - P76

신성의 육화인 신들은 경배하는 모든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다. 인간들은 두 가지 충동에 동시에 복종한다. 하나는 두려움에 의한 거부적 충동이고, 다른 하나는 매혹에 이끌린 경배의 충동이다. - P77

노동이라는 세속의 시간에는 사회는 재원을 가능한 한 축적하는 반면 소비는 생산에 필요한 최소한의 양으로 억제한다. 반면 축제는 신성의 시간이다. 축제가 반드시 위에서 본 것 같은 왕의 죽음과 그에 이은 금기의 대대적인 제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P77

 일상적인 노동의 시간으로부터 축제의 시간으로 건너가면 카유아가 말한 것처럼 어떤 가치 전도가 발생한다.⁵
경제적인 각도에서 보면 축제는 노동으로 축적해 놓은 재원들을 무절제하게 마구 허비한다. 지금 문제는 극단적인 대립이다. - P77

전체적으로 보면 충동의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는 충분히 밝혀진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금기의 위반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 P78

기독교도 그렇고 불교도 그렇고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공포감과 역겨움은 뜨겁게 끓어오르는 영적생명의 전주곡이다. 애초의 강력한 금기들에 기초한 영적 생명의 잔치는 축제의 의미를 가지며 이때 그것은 규칙의 준수가 아니라 위반이다. - P78

기독교와 불교에서 법열은 공포의 극복에 근거한다. (중략) 허무의 감정보다 더 심하게 우리를 충일 속에 내던지는 감정은 없다. 그러나 그 공허는 결코 소멸과는 다르다. 그것은 낙담한 태도의 초월, 위반이다. - P78

그러나 그렇더라도 우선 나는 그보다 다소 덜 복잡한 위반의 형태인 전쟁과 제사를 순차적으로 살펴보겠다. 그런 다음 육체적 에로티즘을 살펴볼 것이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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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금은 아버지가 혼자 쓰고 계셔. 그 전에는 내내 증조부인 겐요가 썼고, 할아버지인 다쿠조는 이 집 주인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지.
서관은 달리아관이라고도 부르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저택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이야. 동관을 ‘바깥‘ 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서관을 ‘안‘ 이라고 부르지"
"달리아?"
당연히 나는 그 단어에 반응했다. - P155

겐지는 미소를 지우고 ‘걱정마라‘ 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얼핏 이야기했지? 아버지는 말하자면 현재 이집, 그리고 우라도 가문의 절대 권력자야. 그런 아버지가 괜찮다고 허락한 거니까 달리아의 날이라도 아무도 싫은 소리 할 수 없을 거야."
"그렇지만......."
나는 걱정이 되어 고개를 숙여 검은 바닥을 바라보았다. - P156

자기 집은 암흑관이란 별명이 붙은 아주 이상한 서양식 건물인데흥미가 있다면 한번 구경하러 오지 않겠느냐, 겐지가 그런 권유를 한것은 지난달 하순이었다. (중략)
9월에 시험이 끝난 뒤에 한번 가자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 P156

내일-9월 24일이 우라도 가문의 뭔가 특별한 날이라는 것을 나는 전혀 몰랐다. 그런데 겐지는 그걸 뻔히 알면서 일부러 그날과 겹치게 일정을 짜서 데려온 셈이다.
그의 말만 듣고, 그리고 흥미가 끌린다고 어슬렁어슬렁 이 저택을 찾아온 것이 혹시 큰 잘못이었던 걸까?  - P157

그렇게 말하고 겐지가 ‘북관‘으로 간 뒤 나는 일단 2층으로 올라가오늘밤에 잘 방으로 정해준 객실로 들어갔다. 잊고온내담배를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팔걸이 없는 의자 위에 놓아두었던 여행가방이 바닥에 굴러 떨어져 있었는데, 아마 지진 때문인 모양이었다. 담배는 침대 옆의 작은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 P158

내가 들어온 문 이외에 두 개의 문이 더 있었다. 왼쪽에는 외짝문이 정면 안쪽에는 홀 쪽과 마찬가지로 두 싹 문이 ‘그 안쪽이 응접실이다‘ 라고 한 겐지의 설명을 떠올리며 나는 똑바로 방을 가로질렀다.
안쪽 문을 열자, 당연하다는 듯 온통 검은 방이 나왔다. - P158

한가운데 깔린 카펫만이 2층 거실과 마찬가지로 탁한 붉은색이었다..
-검정에 빨강......
-핏빛 빨강.
그 위에 묵직한 검은 가죽 소파 세트가 놓여 있었다. - P159

폐에서 피 속으로 니코틴이 퍼지면서 느껴지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현기증과 감각의 마비를 느끼면서-.

사라져버린 것은
내 마음이었던가

4월이 끝나가던 그날 밤, 겐지의 입을 통해 들은 나카하라 추야의 시 앞머리 한 구절을 무심커 되뇌어보았다. - P160

사라져버리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기억한다. 그래서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마음만 먹고 힘껏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그것은 있다. 분명히 있다.
-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가다니.
10년 이상 지난 시간 저편의, 이것은 내 기억.
-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이 목소리 주인의, 그 얼굴 생김새도 그 몸짓도, 그 냄새도 모든 것은 거기서 고정되어 더 이상 변하지 않는다. - P160

이상한 그림이다.
대체 무얼 주제로, 어떤 의도를 갖고 그린 것일까? 유명한 화가의 작품일까?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그 그림 앞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거기서 어둠 속에 꿈틀거리는 진홍빛 불길-그렇게 보이는 것 아래 적힌 작가의 서명을 발견했다.
흘려 쓴 로마자가 다섯 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적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그 글자들을 읽었다. - Issei. - P162

3

"히루야마 씨에게 연락은 했습니까?"
내가 묻자, 겐지는 냅킨으로 뻗던 손을 멈추고 입술을 살짝 삐죽거렸다.
"그게 아무래도 회선 상태가 이상해서 말이야."
"전화가 되지 않나요?"
"아, 그래. 완전히 끊어진 건 아닌 모양인데, 수화기가 내려져 있거나 너무 잡음이 심해서……… 저쪽에서 제대로 호출음이 울리고 있는지어떤지도 모르겠고, 지진 때문에 뭔가 문제가 생겼는지도 모르지." - P163

"몸이 안 좋아지거나 해서. 그래서 전화를 받을 수 없는 건지도"
"그 사람은 늘 몸이 좋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어. 그건 곱추병이기 때문이지. 곱추병에 걸린 사람은 아무래도 그렇게 되는 모양이야."
"분명히 무슨 비타민이 부족해서 걸리는 병이죠?"
"여러 가지 경우가 있지만, 그렇지. 비타민 D의 공급 부족, 또는 호흡 저하가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지 햇볕을 너무 쐬지 않는 것도 좋지 않다고 하지만." - P164

"그건 아닐세. 그 사람이 이 집에서 일하기 시작한 게 16년가량 되었는데, 그때부터 이미 그런 체형이었으니까."
16년 전이라면 겐지가 열한 살 때의 일이다. 그 시기라면 겐지가기억하는 범위 안이라는 이야기인가? - P164

"이상적?"
묘한 표현이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히루야마 씨는 그냥 둬도 내일 오후에는 한 번 섬에 건너올 거야.
점심 식사는 이쪽에서 하게 되어 있으니까 배 문제 같은 건 그때 이야기해도 될 거야. 그보다-제일 중요한 문제는 역시 내일 이후 저 청년을 어떻게 하느냐인데." - P165

"들지, 음식이 식겠어."
수프는 진한 포타주postage였다. 한 숟가락 맛을 보더니 겐지는 만족스러운 듯이 "음. 괜찮군" 하고 중얼거렸다.
겐지를 따라 런천 매트luncheon mat 오른쪽 끄트머리에 놓여 있는 스푼을 집어들었다. 나무로 만든 갈색 스푼이었다. 뜨거운 수프를 먹기에는 금속으로 만든 것보다 낫다.  - P165

술기운이 돌자 그 김에 나는 겐지에게 질문을 계속했다.
"응접실 벽에 이상한 느낌이 드는 유화가 걸려 있더군요. Issei 라고 사인이 되어 있던데, 그건 대체 어떤?"
"음, 그 그림 말인가?"
겐지는 잔에 포도주를 따르며 말했다.
"후지누마 잇세이라고 하는 화가의 작품이지." - P166

"이 저택에는 그 그림 말고도 후지누마 화백의 그림이 몇 장 더 있어. 응접실 그림 제목은 아마 <진홍빛 축제>라고 할 걸."
"진홍......."
"그래, 진홍빛 축제>. 뭔가 의미심장한 표현이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는 좀전에 응접실에서 보았던 그 그림을 떠올렸다. 캔버스 오른쪽 아래서 어둠 속에 꿈틀거리고 있던불길‘ - 그것이 ‘진홍빛‘ 인가, 그 ‘축제‘ 인가?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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