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잘 아는 걸 보면 늘 다니던 길이 분명해. 길 끝에 뭐가 있는지 보고 나면 그에 대해 뭐라도 알게 되겠지.‘
은경은 계단을 올라갔다. 그와 마주친 층계참을 지나, 창문도 하나 없고 복도로 연결된 문조차 없는 계단을 세 층이나 더 걸어 올라갔다. 그러자 문이 나타났다. 계단은 거기에서 끝이났다. - P97

잠겨 있지 않았다. 손잡이를 끌어당겨 바깥쪽으로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 순간 은경은 당황하고 말았다. 진짜였다.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문 안쪽은 바로 벽이었다.
‘그럼 그 사람은 어디에서 내려온 거야?‘
무언가를 담을 공간조차 존재하지 않은 완전한 허무, 빈 공간조차 아닌 막다른 길 앞에서 은경의 상상도 완전히 멎어버렸다. - P97

 그러자 알트나이가 단상 아래에서 공책과 펜을꺼내주었다.
(중략)
은경은 종이 위에 한글로 ‘-았-/-었-‘이라는 글씨를 썼다. 그리고 이용을 제외한 자음과 모음에 원을 둘렀다. 글자마다 하나씩, 두 개의 일그러진 원이었다.
"이게 한국말 과거시제 선어말어미야." - P98

 은경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았-/-었-‘ 아래 칸에 한글로 다른 글자를 썼다.
"그런데 이런 어미를 써서 말하는 사람이 있었어."
은경이 손을 떼자 알트나이가 공책을 눈앞으로 가져갔다. - P98

"강연 들으면서 생각해보니까 그 사람이 그 말 썼을 때 용법이 이상했지? 과거시제 어미를 전부 ‘암‘ ‘엄‘으로 쓴 것도 아니고, 미래에 일어날 일도 가끔 과거처럼 말했어, 그렇지?"
은경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트나이가 말한 그대로였다. - P99

은경은 기억을 더듬었다. 오래된 일이지만 뭔가는 남아 있을것이다. 찾는 데 시간은 좀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예술대학 건물 막다른 계단을 혼자 찾아갔던 날로부터 반년이 지난 뒤였다. - P100

 가만히 서 있어도 비현실적인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지만, 눈에 띄는 무대의상을 입고 있지 않은탓에 그의 공연은 공연인지 아닌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 작은 무대 근처에는 오래 머무는 관객이 거의 없었다. - P100

그는 시간을 표현하고 있었다. 겉옷을 벗고 가방을 뒤져 무언가를 찾아내고 책을 폈다가 전화기를 들여다봤다가 연필을 꺼내 무언가를 메모하고는 다시 책을 펼쳐들고 이야기에 빠져드는 모습까지. 물론 벤치 위에는 겉옷도 없고 가방도 없었다. - P100

그 공연의 핵심은 그 모든 일상적인 동작들이 다섯 가지 정도의 각기 다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 P101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공연이 끝나고, 앞에 서 있던 은경이 혼자 손뼉을 쳤다. 그제야 지나가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거리낌 없는 시선을 그쪽으로 보냈다. 하지만 이미 그곳에는 구경할 만한 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 P101

"튀르키에어로 된 텍스트여서 보기 좀 어렵겠다. 연구실에 가면 영어로 번역해둔게 있는데. 논문에 인용할 부분을 몇 군데뽑아놨거든. 나중에 보내줄게. 일단 이거부터 봐봐."
근처 카페에서 알트나이가 말했다. - P103

"그렇지. 패거리 의식 같은 걸 드러내는 거지. 누군가의 말버릇을 닮는다는 건 그 사람과 가깝다는 의미니까."
"그럼 이 마지막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었던 거네. 다른 두 사람이 친분을 과시하려고 했으니까." - P104

"누가 기록한 건데? 배운 사람이 한 거 아니야? 뭐에 관한 기록이랬지?"
"중앙 정치에서 밀려나서 좌천당한 엘리트 관료가 지역 종교단체 사람들이랑 아침부터 해 질 때까지 매일매일 싸운 이야기..
"꽤 이상적인 기록자잖아. 교육 수준이 높고 네 주제에 직접적인 관심은 없어서 조작할 이유가 거의 없고." - P105

알트나이는 분명 새 시제 어미의 정체를 설명하는 기존의 가설들, 이를테면 사투리나 말실수, 오기의 가능성을 부정하기 위해 꽤 애를 쓰고 있었다. 즉, 본인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은 어떤 결론을 지지하기 위해 다른 가능성들을 열심히 차단했던 셈이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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