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어느 날, 웬일로 상냥한 목소리로 아줌마, 하고 부르더니 묘한 얘기를 했다.
"저기, 사사하라 선생님에게 내 얘기 좀 해줄래요? 착하다,
지나칠 만큼 순수하다, 순정파다, 라고 말해주시면 돼요. 주간지에 실린 기사는 모두 거짓말이라고 하세요. 그러면 다음 달부터 월급도 더 올려드릴게."
누군가 병문안하며 들고 온 백장미 꽃잎을 한 장 한 장 뜯어내며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바닥에 흩어진 흰 꽃잎을 바라보며 이 여자가 이번에는 의사 선생의 백의를 갈기갈기 찢어놓을심산이구나, 하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래도 지시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 P56

"위자료를 2천만 엔이나 받아갔으면서 왜 징징거리는 거야!"
언젠가 레이코가 통화 중에 그런 말을 한 걸 보면 아마 사실일 것이다. 주간지에는 ‘사사하라는 이혼한 전처에게 위자료로 전 재산을 내주고 무일푼이었기 때문에 레이코의 2천만 엔을 말없이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나와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사사하라의 일 처리 방식도 남자답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아줌마, 그 남자가 집에 와도 절대 안에 들이지 말아요." - P57

"병원을 휴직하기로 했어. 어쩌면 사표를 내야 할지도 몰라. 하지만 레이코만 내게 돌아와 주면 다 잃어도 두렵지 않아."
그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겨우 스물세 살이지만 남자와 밀고 당기는 데 선수급인 여자 앞에서 평생을 성실하게 의사 일만 해온 남자는 어린애나 마찬가지였다. - P58

"아줌마는 이런 거밖에 못 해요?"
레이코의 말대로 한 시간 뒤에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를 든 미치코에게 사사하라는 사과부터 했다.
"아주머님, 조금 전에는 죄송했습니다. 너무 지쳐서 나도모르게 불끈했어요."
그러고는 레이코가 전화를 안 받을 거라고 예상했는지 전언을 부탁했다.
"다음 주에 파리에 간다고 하던데 그전에 꼭 한번 만나자고 얘기해주십시오." - P59

. 실제로 15일 전에 사사하라가 연락을 했는지, 레이코가 거기에 응해 사사하라를 만났는지, 미치코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닷새 뒤인 11월 10일, 파리로 출발할 날이 다가오자 레이코가 말했다.
"오늘부터 월말까지 안 와도 돼요. 12월 1일에 귀국이니까 그 전날에 청소는 꼭 해주세요." - P59

"아차, 내가 11월 30일에는 집에 일이 좀 있어. 29일에 미리 와서 청소해도 되지?"
어차피 아무도 없으니 하루쯤 미리 와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레이코의 표정이 갑작스레 험악해졌다.
"집안에 어떤 일이 있건 호출하면 꼭 온다는 조건으로 월급을 듬뿍 쥐여주잖아요. 반드시 30일에 오셔야 해요. 하루라도 더 일찍 왔다가는 절대 안 봐줘요. 내가 돌아와서 먼지 상태 보면 금세 알아요. 약속 안 지키면 당장 해고예요." - P60

그리고 11월 30일, 미치코는 별수 없이 시골 고향 집의 아버지 13주기 제사에는 아이들만 보내고 자신은 청소를 위해 맨션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치코가 현관문을 연 것은 정확히 오후 2시 8분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상한 냄새가코를 찔렀기 때문이다. 고기가 썩는 듯한 냄새였다. - P60

테이블 옆에 떨어진 담요를 짖어 들고 미치코난 침실로 다가갔다.
(중략)
미치코는 저도 모르게 담요로 얼굴 아랫부분을 가렸다. 냄새를 막으려고 했는지, 순간적으로 치민 구토를 막으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담요 너머로 침대를 가로지르듯이 반듯하게 누워 있는 사람의 몸이 보였다. 처음에는 다른 여자인 줄 알았다. 베갯머리의 스탠드는 불이 꺼졌고 창문에 두툼한 커튼이 드리워져 문밖에서 흘러든 거실의 연한 불빛은 침대에 쓰러진 여자의 얼굴까지는 비춰내지 못했다. - P63

몇 분이나 그곳에 서 있었을까, 이윽고 미치코는 자긴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깨달았다.
"아줌마, 그러고도 가사도우미라고 할 수 있어요?"
삼년 전, 이 여자가 처음 욕을 퍼부었을 때부터 언젠가는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날이 오기를 오래오래 기다려온 것 같기도 했다. - P64

한 시간 뒤, 미치코는 1층 관리실에서 형사 두 명을 마주하고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것을 낱낱이 진술했다. 이미 죽은 사람이니 앞으로 단돈 1엔도 나올 리 없다. 이제 더 이상 감추고 말고할 것도 없었다. - P64

3장, 경찰

 사사하라 노부오의 이혼한 전처와 아이가 사는 요코하마에 가봤지만 아무수확도 없었다, 라는 신호였다. 한 시간 전에 이미 요코하마 역에서 전화 보고는 받았다. 지난 7월에 정식으로 이혼한 뒤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아무 연락도 없었다고 한다. 그 두 달 전인 5월,
사사하라와 미오리 레이코의 약혼이 전격 발표되기 직전부터 이미 아내 야스코는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간 모양이었다.
"여간 쌀쌀한 게 아니더라고요. 그이가 죽였겠죠, 라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던데요."
오니시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컹컹 기침을 했다. - P68

당연히 주요 용의자로 사사하라 노부오의 이름이 올랐다.
사건 현장에 남겨진 지문 중에서 특히 침실 문 앞의 깨진 유리잔조각과 붉은 약봉지에 찍혀 있던 게 가장 유력한 증거였다. 피해자의 사인으로 밝혀진 청산화합물이 약봉지에 극소량 남아 있었고 유리잔 파편이며 카펫 얼룩에서도 발견되었다. - P68

이제 곧 나올 부검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자세한 시각까지는 알 수 없지만, 아사이는 사건 발생 시각을 12일부터 14일 사이의 밤 시간으로 추정했다. - P69

밤이라는 건 사건 현장의 거실 조명이 계속 켜져 있었기 때문이다. 침실 침대 옆 스탠드도 스위치가 켜져 있었다. 즉, 사건 발생 이후에 전구가 끊긴 것으로 보였다.
사사하라는 11월 초 병원에 한 달간 휴가를 신청했다. 7일저녁에는 레이코의 맨션에 찾아와 "내 손으로 죽일 거야!"라고소리쳤고, 이어서 걸려온 전화에서는 파리로 떠나기 전에 꼭 한번 만나자는 전언을 남겼다. 게다가 닷새 뒤인 12일 오후에는 병원에 나타나 한 시간쯤 머물렀다. - P69

오카베 게이조라는 스물여덟 살의 젊은 형사다.
"자살로 볼 수는 없을까요?"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자살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은 첫째로 파리에 갈 예정, 절대 자살할 사람은 아니라는 가사도우미의 증언, 그리고 약봉지에 미오리 레이코의 지문이 없었던 점 때문이잖습니까."
"그렇지. 게다가 청산가리 약봉지에 사사하라의 지문도 있었어. 그거면 충분하잖아?" - P71

이윽고 아사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오니시와 오카베에게 마지막에 들은 얘기부터 전했다.
"피해자 미오리 레이코의 얼굴에 성형수술 흔적이 있다는거야. 게다가 얼굴 각 부위를 아주 정교하게 수술했대." - P72

"진짜 실력 있는 명의가 수술해준 모양이네요. 다른 스캔들은 많았어도 성형 얘기는 나온 적이 없거든요. 차가운 인상이지만 성형 특유의 인공적인 느낌이 전혀 없었어요. 와아, 그렇구나,
모든 남자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 얼굴이 성형이었다니."
오카베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P72

4장, 용의자

 하마노는 의자에 앉히고 그는 침대 끝에 자리를 잡았다.
(중략)
"괜찮습니다. 경찰에서는 아직 제가 선생님께 신세진 사이라는 건 알지 못해요. 4시쯤에 병원으로 형사 두 명이 찾아왔는데 저한테는 어떤 질문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까 전화로 말씀하신 대로 프런트를 통하지 않고 옆의 출입구로 들어와서 엘리베이터를 탔어요." - P74

"정말로 선생님이 죽였습니까?"
(중략)
 세상을 너무 고지식하게 바라보는 눈빛.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는 죽이지 않았어."
"하지만...." - P75

"그날 밤에 내가 레이코의 집에 갔던 것은 사실이야. 12일 오후에 병원에 잠깐 들렀었지? 그때 슬쩍 집어온 독약을 들고….
레이코가 문도 열어주지 않을까 봐 걱정했는데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었는지 순순히 안에 들여줬어. 빈틈을 노려 술잔에 그 독약을 타려고 했어. 하지만 약봉지를 뜯으려는 순간에 레이코에게 들켜버렸어. 그게 뭐냐고 캐묻는 바람에 결국 청산가리라고 실토할 수밖에 없었어. 그다음에는 오로지 자기를 죽이려고 했느냐는 비난만 듣다가 아무 변명도 못 하고 그 집에서 쫓겨났어.
그날 밤에 내가 그 집에서 한 일은 그게 전부야." - P75

"그러시다면 그런 얘기를 경찰에 가서...."
"그건 안 돼. (중략). 그날 밤에 내가 약봉지를 테이블에 남겨둔 채 그 집을 뛰쳐나왔고, 그 뒤에 거의나와 교대하듯이 레이코를 찾아간 자가 있었어. (중략)
아마 레이코는 방금 자신이 살해될 뻔했다는 얘기를 자랑이라도 하듯이 그자에게 떠들어댔겠지. (중략), 청산가리 봉지를 일부러 내보이면서. 그리고 그 얘기를 들은 사람이 전부터 레이코가 죽기를 원했던 자라면 얘기가 어떻게 되겠나.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독약을 써먹으려고 하지 않았겠어?" - P76

 호텔 이름이 인쇄된 메모지에 여섯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약혼한 무렵에 레이코가 나한테 얘기해준 적이 있어. 자신을 죽이고 싶어할 만큼 미워하는 자가 일곱 명이라고. 한명 한명 이름을 들면서, 이유까지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정확히 그렇게 얘기했어. 사진작가, 여성 디자이너, 신인 남성 디자이너, 광고 모델을 했던 회사의 젊은 사장, 동료 패션모델, 그리고 레이코의 음반을 제작해준 여성 디렉터 나야 거의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었지만, 레이코를 사귀면서 차츰 누군지 알게 됐어. 틀림없이 여기 적힌 이 이름들을 말했어. 자네도 알 만한 사람이있지?" - P77

"방금 일곱 명이라고 하셨지요? 여기에는 여섯 명만 적혀있는데요."
(중략)
"그 얘기를 할 때 레이코가 손가락을 꼽아가며 한명 한명이름을 알려줬어. 그런데 일곱 번째로 약지였나, 실은 한 명 더있는데 그 사람 이름은 지금은 말해줄 수 없다면서 손가락을 입에 댔어. 남자 같긴 한데 나는 누군지 짐작도 못 하겠어. 내가 아는건이 여섯 명뿐이야." - P78

그는 다시 침대 끝에 앉아 메모지에 적힌 이름들을 손으로 짚어가며 말했다.
"우선 한 명 한 명에게 전화를 걸어 반응을 살펴보자. 내가그날 밤 우연히 레이코의 맨션 뒤쪽에 있었는데, 당신이 안색이홱 변한 채 6층에서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와 도망치는 것을 목격했다. 그렇게 얘기하면…."
"말하자면 포커의 블러핑 같은 거네요.‘ - P80

그렇게 대답하는 하마노를 지켜보다가 그는 가방에서 50만 엔을 꺼내 내밀었다.
"아뇨, 보수는 필요 없.."
"그게 아니라 실제로 비용이 들 거야. 그러기 위한 돈이야."
하마노는 잠시 말이 없었지만 이윽고 돈을 받아 레인코트안주머니에 넣었다. 그게 그의 대답이었다. - P81

일 분 뒤, 자리에서 일어나는 하마노에게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전부터 자네에게 한 가지 충고하고 싶은 게 있었어. 자네는 나를 닮아 지나칠 만큼 성실하지. 행여나 나처럼 못된 여자에게 너무 진지하게 빠져들어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해." - P82

그리고 다음 날 정오 뉴스에 그의 얼굴이 거의 확정적인 범인으로서 화면에 나왔다. (중략). 약사는 그가 12일에 병원에 왔을 때 약품실 보관창고에서 약병의 내용물을 호주머니에서 꺼낸 붉은 종이에 넣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야마네 하루코 약사가 틀림없었다. - P83

 그는 자신을 끼고 양쪽에 앉은 두 형사 중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상의 안주머니에 골루아즈 마지막 한 개비가 남았는데 그걸 피워도 괜찮겠습니까....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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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씽킹을 시작합니다

‘에디토리얼 씽킹‘이 뭐예요?

편집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기억하는 방식 그 자체다.
우리 뇌는 장면의 모든 세부 사항을 동결시켜 기록하는 카메라처럼 작동하지 않는다. 어떤 부분은 주목하고, 어떤 부분은 무시한다. 새로 들어온 정보를 원래의 것과 연결하고, 정보의 공백을 스스로 채워 넣기도 한다. - P25

책은 보통 단일 저자의 목소리를 선형적으로 따라가지만, 잡지는 여러 화자가 갖가지 방향에서 등장하며 독자의 주의를 빼앗는다. 지면에 올라가는 재료의 다양성 측면에서도 차이가 크다. 단행본과 달리 잡지에서는 서로 다른 크기의 텍스트 덩어리와 이미지, 다채롭게 변하는 레이아웃이 시선 경쟁을 한다. 독자는 덩어리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한다. - P25

나는 에디토리얼 씽킹을 이렇게 정의한다. ‘정보와 대상에서 의미와 메시지를 도출하고, 그것을 의도한 매체에 담아 설득력있게 전달하기 위해 편집하고 구조화하는 일련의 사고방식‘.  - P26

위의 놀이에서 경험한 것처럼 에디팅은 의미화되기 전의 잡음‘ 속에서 특정 정보에 주목해서 ‘신호 다시 말해 의미의 맥락을 만들어가는 작업이다. - P29

여기까지는 ‘정보와 재료에서 의미와 메시지를 도출하는 일‘
에 관한 내용이었다. ‘의미와 메시지를 의도한 매체에 담아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 구조화하고 재배열하는 일, 다시 말해 시각화 작업에 대해선 아직 언급도 못 했다. - P30

. 사물이나 현상을 낯설게 보면서 질문을 찾아내는 능력,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 개별 재료들을 연결하는 능력,
필요한 정보를 어디 가야 얻을 수 있는지 아는 노웨어 know-where, 노후know-who 능력, 컨셉을 정확히 설명하는 능력, 자신의 창작물이 의도치 않은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 위험은 없는지 데스킹하는 능력, 어떤 헤드라인과 이미지를 써야 주목도가 올라갈지 판단하는 능력 등 에디팅은 종합적이고 메타적인 사고 행위다. - P32

니콜라 부리요의 선언처럼 우리 시대의 예술적 질문이 이미갖고 있는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면 The Kiffness는 정확히 그 답을 보여준다. 이미 존재하는 정보, 누구든 접속 가능한사실, 발에 차이게 많은 재료 중 일부를 선택하고 재배열해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편집 행위가 얼마나 멋지고 창의적인지 피부로 곧장 느끼게 한다. - P33

저는 에디터가 아닌데, 에디토리얼 씽킹이 왜 필요해요?

2021년 가을, ‘아장스망‘이라는 에디토리얼 컨설턴시를 만들었다. 아장스망 agencement은 프랑스어로 ‘배치, 배열, 조합‘이란 뜻으로, 철학자 질 들뢰즈가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배치‘라는 의미로 정립한 철학 용어이기도 하다.  - P34

과거에는 노동 산출물로 업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중략) 하지만 정보와 지식 기반 산업이 커지면서 물리적 제품보다 연구, 분석, 문제 해결 서비스 개선, 경험 기획등 작업 프로세스 자체가 직업 정체성의 중심이 되는 일이 많아졌다. 기존 산업 경계가 무너지고 이종 간 협업이 너무나 활발해진 시대라서 커뮤니케이션 능력, 공감능력, 설득력, 갈등 해결 능력, 리더십 같은 소프트 스킬이 핵심 프로덕트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 P35

크게는 브랜드명과 슬로건을 짓고 브랜드 아키텍처를 정리하는 일부터 작게는 상사나 고객사에 보낼 보고서의 스토리라인을 짜는 일까지, 의미를 다룬다는 것은 타인과의 소통을 전제로 하는 활동이다. 누가 계산해도 동일한 답이 나와야 하는 과학 언어와는 성격이 다르다. 상대에 따라 구사하는 전략이 달라진다. - P36

이처럼 새로운 의미를 빚어가는 행위는 지각, 패턴 인식, 연상, 범주화, 기억 검색, 추론, 맥락화 같은 복잡한 인지 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저는 이 사안/작품/현상/데이터를 이렇게 읽고해석했습니다. 제가 가진 입장은 이것입니다"라고 선언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다.  - P37

얼마 전 첫 GPT를 비롯한 생성형 AI가 열어젖힌 문으로 거대한 변화가 들이닥쳤다. 챗 GPT는 긴 글의 핵심도 뚝딱 요약하고, 원문 메시지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독자 수준에 맞게 수십 가지 문체로 고칠 줄도 알았다. 함께 일하는 1~3년 차 주니어 에디터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언어 구사 능력을 보여줬다. - P38

 챗 GPT는 어떤 사안에 대해 개인적 의견이나 입장을 갖지 못한다. 입장이 없기 때문에 주장하지 못하고, 설득하지 못한다. 앞으로도 생성형 AI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수만 가지 단어와 이미지를 만들어낼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 무엇이 자신의 상황에 적합한지, 무엇이 신선하고 매력적인지 의미 부여하고 주장하고설득하는 일은 언제나 인간이 할 것이다. - P38

10. 생략: 군더더기를 알아보고 배제하는 판단력

회고형 에세이 쓰기는 오래 방치한 서랍을 정리하는 일과 비슷하다. (중략),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깊은 곳에 있던 서랍을 열어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 다시 말해 내밀한 기억을글로 옮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 P179

 지나가던 행인이 부당한 언사를 보일 땐 곧장 ‘미친 사람 아냐?‘라고 거침없이 판결내리지만, 가족이나 친구의 경우라면 온갖 모순된 감정이 동시에 찾아온다. - P179

‘A이면서 B이면서 C이자 D일 수 있는데, 내가 이렇게 느꼈다고 주장해도 될까? 다르게 해석할 가능성도 분명 있는데, 그걸 배제해도 될까?‘라는 고민은 사실 에세이 쓰기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 P180

이렇게 망설이는 사람은 일단 칭찬받아야 한다. 자신이 말하려는 주제를 다각도에서 섬세하고 종합적으로 살피는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피곤해하는 시대, 복잡한 이해관계나 사연을 단순화해서세줄 요약으로 알려주길 기대하는 시대이기에 저런 류의 망설임은 소중하다.  - P181

하지만 창작을 하려면 어느 순간에는 주장으로 도약해야 한다. 어떤 정보를 취하고 어떤 정보를 버릴지 선택하고,
그 결정을 바깥으로 드러내야 한다. - P181

생략은 첨가보다 용감하고 힘 있다. 무언가를 하기로 선택하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지만,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일은 극악무도할 정도로 어렵다. - P182

2022년에 학고재 갤러리에서 열렸던 노순택 작가의 개인전《검은 깃털》은 역광 사진으로만 채워진 전시였다. 사진에서 역광은 가급적 피해야 할 조건으로 여겨진다. - P182

 노순택 작가는 전시 작가 노트에 이렇게 썼다.

"사람 사진의 경우 중요한 세부는 얼굴과 표정인데, 역광사진은 그걸 가림으로써 누가 누군지 알 수 없게 한다. 누군지 알 수도 없는사진을 대체 왜 찍는단 말인가. (..) 가끔은 질문이 대답이 된다."

노순택 작가가 던진 질문에 답하는 그림이 있다면 아마 <회화의 기원 The Origin of Painting>이 아닐까. - P185

알랭 드 보통이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에 썼듯 ‘우리가 훌륭하다고 여기는 화가들은 무엇을 기념해야 하고 무엇을생략해야 할지 적절하게 선택하는 사람들이다. 디부타데스는 연인의 얼굴 윤곽선이 미래에 자신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킬 효과를 이해하고 있다. - P188

생략이라는 중요한 편집 기법을 창작 전략으로 사용하는 작가는 아주 많다. 특히 동시대 미술은 빼기의 고수들이 벌이는 인식의 전쟁터다. 손에 잡히지 않는 빛과 텅 빈 공간으로 관람자에게 엄청난 몰입의 경험을 선사하는 제임스 터렐James Tierrell, 재하얀 전시장 벽에 UV 라이트 손전등을 비추어야 작품이 보이도록한(그냥 보면 아무것도 없는 벽처럼 보이게 한) 박관태 작가, 그림을 한 장도 그리지 않았지만 아름답고 황홀한 그림책 『It Looks LikeSnow (눈처럼 생겼어)』를 지은 안무가이자 그림책 작가 레미 찰립Remy Charlip까지.... - P188

생략이 임팩트를 만들어낼 때, 수용자는 초대장을 받는 기분을 느낀다. 궁금증을 느끼면서 정보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작가의 세계와 자신의 세계를 부지런히 오간다. 이럴 때 생략은 그자체로 주장이 된다. 반면 생략으로 자신의 게으름을 숨기는 창작자도 있다. - P190

군더더기를 알아보고 배제하는 판단력을 갖기 위해선 먼저 자기만의 정의를 가져야 한다. 애초에 일을 시작한 목적도 잊지 말아야 한다.  - P190

기준점을 마련한 다음 수집한 재료를 검증한다. 더했을 때효과와 뺐을 때 효과를 비교하고 기억한다. 수집한 재료가 100개라면 100번의 가능성을 지었다가 부순다. 생략할 용기와 본질을 알아차리는 눈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경험치와 노력에 비례해 점진적으로 커진다. - P191

9. 객관성과 주관성: 주관적인 것의 힘

다음에 맡은 인터뷰는 재즈 뮤지션 그룹 기사였다. 선배의조언대로 그들의 음악과 인터뷰 답변을 나름대로 해석해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찾았다. 두어 줄 쓰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겨우 완성했던 첫 기사보다 원고 쓰는 속도가 빨라졌고, 온전히 집중하는 몰입감을 느끼기도 했다.
(중략)
그 두 페이지짜리 기사에는 ‘나‘라는 단어가 아홉 번 들어가 있었다. - P170

. 당시 ‘나‘를 빼라는 데스크의 가이드라인은 막내에게 취재를충실히 하는 습관을 만들어주기 위한 조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로 근거, 데이터, 출처를 댈 수는 없지만, 분명 내 안에 머무는 질문이나 감정을 기사에 담을 때마다 입이 마르고 심장이 뛰었다.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 P171

잡지 에디터는 자기 이름을 걸고 개성 있는 지면을 만들어야한다. 동시에 불특정다수에게 내보이는 공적 지면을 책임지기에팩트 체크, 데스킹 등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한 작업도 소홀히 할 수 없다. - P171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객관이라는 단어 앞에서 늘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객관이 티 없이 완전무결한 세계라면 주관은 허술하고유아적인 주장으로 점철된 세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비단나만 느끼는 차이는 아닐 것이다. "그건 당신의 주관적 판단이고요"라는 문장 앞에서 움찔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 P172

정치사회문화적 제도가 바뀌면 주류 시각도 바뀐다. 이상하지 않은가? 객관이 완전무결한 절대 진리라면 시대와 상황을 불문하고 변치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 P173

(전략)
(갈릴레오 사례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이어지는 퍼즐 조각을 김정운의 에디톨로지에서 찾았다.

객관성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객관적관점이란 각기 다른 인식의 주체들이 ‘같은 방식으로 보기 joint-attention‘로 서로 약속해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객관성이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합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 P173

결국 설득의 문제다. 주관은 열등하고 객관은 우등한 것이 아니라 모든 건 주관의 산물인데, 어떤 주관은 여러 이유에서 설득력을 가져 보편의 차원에 자리 잡는다. 냉철하게 숫자를 보는 비즈니스 세계도 마찬가지다. 경영자의 책상 위로 온갖 곳에서 기록한 데이터가 쌓인다. 숫자들은 중립적이지만, 그중 특정 지표에 ‘주목‘하고, 경영 여건에 대한 ‘판단‘을 내려 ‘전략‘을 세우는 경영자는 결국 자신의 주관을 바탕으로 일한다. - P174

 내 관점, 믿음, 판단을 신뢰하고, 그것을 나 아닌 타인이 납득할 수 있는 모양새로 만들어내려고 애쓸 뿐이다. - P175

변수와 맥락으로 요동치는 이 세계에선 어제 통했던 방법이 오늘 통하지 않을 수 있다. 긴장을 늦출 수 없고, 게을러질 수 없다. 20년을 해도 이 일이 지겹지 않은 이유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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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절 능력의 불평등은 재산의 평등의 필요 조건이다.

반론은 다음과 같다: 해야 할 노동이 모두 한결같이 쉬운 것은아니다. 그 중에는 아주 뛰어난 재능과 지력을 요구하는 것도 있으며, 이러한 우수성 자체가 값어치를 낳는다. 예술가, 학자, 시인, 정치인 등은 그들의 탁월성에 준해서만 평가받으며, 이러한탁월성은 그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대등한 관계를 파괴한다. - P196

이러한 반론은 늘 만만찮게 보였다. 그것은 경제학자들뿐만 아니라 평등의 주창자들에게도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 된다. 그것은 전자를 엄청난 오류 속에 몰아넣었으며, 후자로 하여금 믿기 어려울 정도의 어설픈 말을 내뱉게 했다.  - P196

우리는 무지한 유권자들이 지식의 불평등을 배척하는 것을 봐왔으며, 나로서도 언젠가 누군가가 미덕의 불평등에 맞서 들고일어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 P197

사회에서는 두 가지 사실, 즉 <기능>과 <관계>를 구별해야 한다.
(1) <기능> 노동하는 자는 누구나 자기의 맡은 바 일을 완수할능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즉 일상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모든 수공업자는 자기의 일métier을 알아야만 한다. - P198

그런데 자연의 경제를 우러러보자. 우리가 안고 태어났으나 우리 개인들의 고립된 힘만으로는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이 무수한 필요들에 대하여, 자연은 개체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힘을 집단espèce에게 주지 않았는가. 여기에서 <업무의 전문화>에 근거한원리, 즉 <분업>의 원리가 나온다.
게다가, 어떤 필요들은 충족되려면 인간의 지속적인 창조를 요구하는 반면에, 어떤 다른 필요들은 단 한 명의 노력만으로도 몇백만 명을 그것도 몇 세기 동안이나 충족시킬 수 있다. 예를 들면,
의복과 식량의 필요는 끝없는 재생산을 요구한다. - P199

나는 여기서 사람들의 재능과 지성의 차이가 우리의 개탄할 문명에서 유래하는 것인지 그리고 사람들이 오늘날 <능력의 불평등>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은 조건에서라면 사실 <능력의 다양성>에 다름아닌 것인지를 묻고자 하지 않는다. - P200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요점이다.
(2) <관계> 노동의 요소를 다루면서, 나는 같은 종류의 생산적 봉사에서는 사회적 과업을 수행하는 능력이 누구에게나 주어져있기 때문에 개개인의 힘의 불평등이 보상의 불평등을 낳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 P201

모든 거래는 생산물이나 용역의 교환을 목적으로 하므로 <상행위>로 규정할 수 있다.
상거래 commerce를 말하는 자는 동등한 가치의 교환을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가치가 동등하지 않고 손해를 본 계약당사자가 그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그는 교환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상거래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 P202

그가 몸 바쳐 일하는 주인은 임금과 용역의 교환에 의해 그와 한동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적이다.
사랑으로 조국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끌려 조국에 봉사하는 병사는 자유롭지 않다. 그의 동지들, 그의 상관들, 장관 또는 군사재판 기구들, 이 모두가 그의 적이다. - P203

아킬레우스(일리아드』에 나오는 그리스의 영웅 - 옮긴이)의 시인이 마땅한 보수를 얻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을 상대방에게 납득시키는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나서야 그의 시와얼마간의 급료 사이의 교환은 자유로운 행위이자 동시에 정당한행위가 될 것이다. 즉 시인의 급료는 그의 생산물과 동일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생산물의 가치는 무엇인가? - P205

 즉 이 상대적 가치란 무엇인가? 『일리아드』와 같은시의 저자에게 돌아가야 할 마땅한 보수는 얼마인가?
이 문제는 정치경제학이 학문으로 정립된 후에 해결해야 할 첫번째 문제였다. 그런데 정치경제학은 그 문제를 풀지 못했을 뿐만아니라 해결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 P206

세가 든 예는 나름대로 결실을 맺었다. 정치경제학은 그것이 현재 다다른 지점에서 볼 때 존재론과 유사하다. 결과와 원인에 대해서 말하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며 아무 결론도 맺지 못한다. - P208

산업의 모든 창조물은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따라서 정당하고 참된 시장가치를 갖는가? 그렇다.
인간의 모든 생산물은 인간의 다른 생산물과 교환될 수 있는가? 역시 그렇다.
얼마만큼의 못이 나막신 한 켤레와 맞먹는가?
우리가 이 엄청난 문제를 풀 수만 있다면, 우리는 지난 6,000년동안 인류가 찾던 사회체제의 열쇠를 쥘 수 있으리라. - P208

이것은 몇 가지 의견을 일깨운다.
(1) 같은 생산물이라도 시기와 장소에 따라 투자된 시간과 경비가 어느 정도 다를 수 있다. 이 점에서 가치의 양이 변동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중략) 요컨대, 어떤 물건의 참된 가치는 화폐적 표현에서는 변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대수적 표현에서는 불변인 것이다.
(2) 수요를 가진 모든 생산물은 그것에 들어간 시간과 경비만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지불되어야 한다. 
(3) 평가의 원리에 대한 무지, 또 대개의 경우 그 원리를 적용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은 상업상의 기만의 원천이며 재산의 불평등을 가져오는 가장 유력한 원인들 중 하나이다.
(4) 어떤 산업들, 어떤 생산물들의 값을 지불하는 경우, 재능이희소할수록, 생산물이 비쌀수록, 예술과 과학의 종류가 다양할수록, 그만큼 인구가 더 많은 사회를 필요로 한다. - P210

사실상, 사람의 손을 거치는 모든 작품은 그 작품에 들어가는 원료와 비교할 때 무한한 값어치를 갖고 있다. - P211

4) 철학 교수 한 명에게 봉급을 지불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민이 필요한가?
3,500만 명이다. 경제학자 한 명에게는? 20억 명이다. 그러면 학자도 예술가도 철학자도 경제학자도 아닌, 그저 신변잡기 소설을 쓰는 글쟁이에게는? 한 사람도 필요치 않다.

 그러나 서로의 욕구를 충족시킬 목적으로 생산물을 교환하는 일은 어떠한가? 이러한 교환은재능이나 천재성에 대한 고려와는 관계없이 경제적 추산 아래서만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 교환을 규제하는 법칙은 막연하고 무의미한 감탄이 아니라 차변(借, le doit)과 대변, l‘avoir) 사이의 정당한 균형, 즉 상업적인 산술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사고 파는 자유가 임금의 평등에 대한 유일한 근거이고,
사회는 권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어떤 타성적인 힘에서만 재능의 우월성에 맞선 도피처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있다. - P212

평등은 경제학자에게는 대단히 역겨운 것이라 할지라도,
사실 정치경제학에서 많은 것을 얻고 있다.
<어느 의사(원문에는 변호사라고 되어 있으나 이 역시 좋은 예가 아니다)의 가족이 그의 교육에 4만 프랑을 들였다고 했을 때, 이 금액은 그의 머리에 투여된 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투하된 자본이 앞으로 매년 4,000프랑 정도의 수입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해 보자.
의사가 3만 프랑을 번다면, 따라서 자연이 부여한 그의 개인적 능력에서 나오는 수입의 몫은 2만 6,000 프랑인 셈이다. 이러한 계산에 따른다면, 이자율을 10%로 할 경우, 자연적 자본은 26만 프랑이 된다. 그리고 그의 가족이 그에게 학비로 제공한 자본은 4만 프랑이다. 이 두 가지 자본금을 합한 것이 바로 그의 재산이다.>(세, 『경제학 강의』등) - P213

. 나는 이 대전제를 아무런 유보조건없이 받아들인다. 이제 그 결과를 보자.
(1) 세는 의사의 교육에 들어간 4만 프랑을 그의 대변 쪽에 집어넣고 있다. 하지만 이 4만 프랑은 그의 차변 쪽에 넣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지출은 비록 그를 위해 쓰이기는 했지만 그가 쓴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이 4만 프랑을 자기 것으로 하기는커녕 의사는그것을 자기의 생산물에서 공제하고 빚진 자에게 갚아야 한다.  - P214

(2) 재능에 대한 교육비를 상환해야 할 의무에 관해 내가 지금말한 것에 대해서, 경제학자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중략)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재능의 권리 문제를 벗어나서 선점권의 문제와 다시 마주치게 되며, 우리가 앞의 제2장에서 제기한 모든 문제가 다시 나타난다. 선점권이란 무엇인가? 상속이란 무엇인가? - P215

(3) <자연이 부여한 그의 개인적 능력에서 나오는 수입의 몫은2만 6,000프랑이다.> (세, 앞의 책) 여기서 출발해서 세는 우리의사의 재능은 26만 프랑의 자본과 맞먹는다고 결론짓는다. (중략)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재능에 의해 그의 급료가 산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문제의 의사가 자신의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벌지 못하는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그런데 어떤 재능이든 그것을 현금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재능과 돈은 서로 공통의 척도로 측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 P216

(4) 우선 나는 의사가 어떤 다른 생산자보다 불리하게 보수를받아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들과 대등한 수준 아래에 머물러서도안 된다고 말한다. 나는 이 점을 줄기차게 입증할 것이다. 그러나나는 의사가 이 평등의 수준을 넘어서도 안 된다고 덧붙인다. - P216

의사가 자신의 선생님에게 지불하고, 자기 책과 자격증의 값을 치르고, 모든 비용을 다 청산했을 때에도,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서는 값을 치르지 않았다. 이는 자본가가 노동자들에게 봉급을 지불하면서도 자신의 영지와 성(城)에 대해서는 값을 치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 P217

재능의 우월성이라는 것이 타인의 희생을 요구할 수 있는 어떤근거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봉급을 공통의 수준 이상으로 올리기보다는 차라리 낮추는 동기를 재능에서 찾아야 하리라. 모든 생산자는 교육을 받는다. 모든 노동자는재능이자 능력 즉 달리 말하자면 집합적 재산이다. 그러나 그 재산을 창출하는 데 드는 비용은 같지가 않다. - P217

물론,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복음서에 따르자면,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 즉 선을 사랑하고 실천하며, 미를 알고 즐기며, 자연의 경이를 탐구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영혼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육체를 보존하는 일부터 시작하지않으면 안 된다.  - P218

따라서 사회가 분업의 원리에 충실하여 구성원 중 한사람에게 예술이나 학문의 사명을 맡기고 공통의 노동을 면제해 줄때, 그는 자신이 생업에서 면제받은 모든 것에 대하여 사회에 보상할 책임을 진다. 사회가 바라는 것은 다만 이것뿐이다. 만일 그가 더 이상을 요구한다면, 그의 봉사를 거부하고 그의 주장을 무효로 할 것이다. - P219

우리가 기만적인 거래를 받아들이고 노동자가 권력의 위압과재능의 이기심에 눌려 한가한 이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 보수를 지불하는 것은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며 충분히 개명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론이 조장하고 갈채를 보내는이 기괴한 불평등들에 늘 분개하며 사는 것이다.
국민 전체가 그리고 오직 국민만이 이들 작가, 학자, 예술가, 공무원 등에게 보수를 지불한다. 그 보수가 어떤 경로를 통해 이들에게 전달되든지 간에 말이다.  - P221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든 자본은 집합적 소산이며 따라서 집합적 재산을 이룬다.
강자는 약자의 노동을 강압적으로 침해할 권리가 없으며, 유능한자는 단순한 자의 선의를 이용할 권리가 없다.
마지막으로, 누구나 자신이 원하지 않는 물건을 사도록 강요당하지 않으며 자신이 사지 않은 물건의 값을 지불하도록 강요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 생산물의 교환가치는 사는 이의 의도나 파는 이의 의도를 척도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들어간 시간과 비용을 척도로 하기 때문에 소유는 누구에게나 항상 평등하다. - P222

기하학자들의 경우, 이들이앞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문제는 더욱 어려워진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가장 추상적인 명제들로부터 시작해서 공리(公理)로 끝을 맺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을 끝맺기 전에 경제학자도 법학자도 꿈꿔보지 못한 엄청난 진실들 중 하나를 드러내 보자.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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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그리고 공동행동은 2014년 12월 2일 입법토론회를 통하여 ‘정신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제안하였으며, 수차례공청회를 통하여 일부 수정이 이루어진 후 2015년 7월 24일 김춘진 의원 등 13인의 발의로 국회 보건복지상임위원회에 상정되었다. ‘정신장애인복지지원 등에 관한 법률‘(이하 정신장애인복지지원법, 의안번호 16215)은 정신보건법이 지역사회 사회복지서비스로서 사회복귀시설 이용만을 규정하고 의료적 지원에 중점을두고 있었던 것과 비교한다면, 고용 및 직업훈련 지원, 평생교육 지원, 문화·예술·여가·체육 활동 지원, 소득보장, 지역사회 거주. 복귀 지원, 심리·사회적 재활지원 등 구체적인 복지지원 내용을 포함한다. - P36

‘정신장애인복지지원법‘에 대한 정부의 의견¹¹은 (1) 정신장애인의 인권보호를 위해서는 입원중심의 정신장애인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으며 지역사회복귀를 위한 복지지원 강화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법안의 제정 취지에는 동감하나, (후략)

11) 보건복지부는 2015년 8월 24일 정신장애인복지지원법에 대한 의견을 "정신장애인복지지원에 관한 법률안 검토"라는 문서로 국회에 보고하였음. - P36

(전략), 마침내 2016년 4월 임시국회에서 의결되었다. 이 법안이 의결될 수 있었던 정치적 상황은 다음의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이용표, 2017). 첫째, 정신보건법상 보호의무자에 의한 입원제도가 위헌법률심사의 대상이 되어 헌법재판소에서 심판 중이어서 법률 개정의 사법적압박이 있었다. 둘째, 19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발달장애인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심사한 경험이 있어 정신장애인 복지문제를 설득하기 위한 좋은 여건이 조정되어 있었다. 셋째, 두 법률안의 병합법률안은 당시 정부는 신규입법을 극도로자제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통과를 위한 차선책이 될 수 있었다. 넷째, 그동안 당사자 활동이 부재했던 정신건강영역에서 당사자와 인권활동가들이 연합한 공동행동 활동가들의 등장은 입법운동에 탄력을 부여하였다.  - P37

 개정법은 강제입원의 요건을 자. 타해위험의 존재와 입원을 요하는 정신질환의 존재를 동시에 요구하고, 입원적합성심사위원회(제46조)라는 이중의 통제장치를 마련하여 강제입원과정에서의 인권보호장치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정신질환자에대한 고용 및 직업재활(제34조), 평생교육(제35조), 문화·예술·여가·체육활동(제36조). 주거(제37조), 가족에 대한 정보제공과교육(제38조) 등에 관한 복지지원의 법적 근거를 확보하였다. - P38

4. 정신장애인 감금구조의 형성과 작동¹³

 근본적으로는 정신장애인을 무능력하고 위험한 사람으로 보는 사회적 관념이 감금을 조장하고 용인하도록 함으로써 구조적 문제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은 정신장애인 당사자의 내부를 관통하면서 자신을 무능력하게 여기거나 스스로를 관리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으로 위축시킬 수도 한다.

13) 이 내용은 이용표, 강상경, 배진영(2021). 인권과 대안을 위한 정신건강복지론. 이엠실천의 제3장의 일부 내용을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수정, 보완한 것임. - P39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정신장애인 감금과 정신보건정책이나 관련 사회보장제도의 관련성을 우선적으로 검토해본다. 왜냐하면 정신장애인의 몸을 규율하고 통제하는 정신의학의 담론이 정신보건 및 사회보장제도에 직접적으로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 P39

1) 정신보건법 시대의 장기감금 유인구조

먼저 정신병상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정신장애인에 대한 장기감금구조가 형성되었던 정신보건법 시대(1997년~2016년)의 정신장애인 관련제도를 분석해 보면 4가지 감금의 구조적 요인이 드러난다. 첫째, 권익옹호제도가 부재한 용이한 입원구조이다.  - P40

둘째, 입원를 촉진하는 정신보건센터의 업무구도이다.
(중략)
셋째, 지역사회에서의 보편적 장애인서비스 배제구조이다.
(중략)
넷째, 지자채 • 정신의료기관 • 가족의 결탁을 형성시키는 재원부담구조이다. - P41

2) 정신건강족지법에 의한 구조적 변화

정신건강복지법은 기초생활수급자인 정신질환자의 제도적 장기감금 유인구조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 P42

 이전 정신보건법의 보호의무자에 의한 입원의 요건을 강화하여 자. 타해위험과 입원 필요성을 모든 충족하고 소속을 달리하는 2명의 정신과전문의의 일치된 소견으로 강제입원을 시킬 수 있으며, 강제입원 직후 입원적합성심사위원회가 다시 적합성을 심사하도록 하였다. - P43

 그렇지만 입원구조의 개선에도 불구하고 감금구조의 뚜렷한 변화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입원적합성심사제도는 서면심사에 의존하면서 대면심사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 P43

5. 감금 없는 정신보건으로 가는 길

 정신보건이 형성한 구조는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을 철저히 타인으로 만들었고, 현재까지도 그들이 겪는 고통을 옹호하는 시스템도 발전시키지 못해 오고 있다. 감금에 대항하여 말할 권리, 몸을 침습하는 치료에 대하여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 등에 관한 논의의 출발도 최근의 일이다. - P44

정신의학은 인간의 정신적 문제를 몸의 고장으로 여기면서 치료의 논리로 감금을 옹호하고 의과학의 권력으로 정당화된다. 이러한 담론은 의료체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정신장애를 이유로 공공부조를 받고 있는 사람은 정신약물을 복용하고있음을 입증해야만 수급권을 유지할 수 있으며, 사회서비스 이용자의 자격도 같은 방식으로 부여된다. 정신의학은 푸코가 예견한일상적 권력이 되어 정신장애인의 전반적인 삶을 지배한다. - P45

과학기술의 몰아세움은 몸의 감금이 가져다주는 정신적고통에 눈을 가리고 감금을 통한 과학기술의 적용에 매몰되게만든다. 인간의 정신적 고통에 대한 공감과 따뜻한 돌봄은 비과학적인 행위가 되었다. - P46

그러나 최근 정신장애인 당사자의 존엄성을 중심으로 하는 인권모델이 사회복지모델을 흡수하면서 등장하고 있다. 정신건강복지실천에서 인권모델은 UN장애인권리협약에 기반을 두고 장애인단체의 지지를 얻고 있다.  - P46

참고문헌 (일부)

국립정신건강센터 (2017), 국가정신건강현황 3차 예비조사 보고서.
김재철 (2015). 정신의학과 하이데거의 대화, 현대유럽철학연구, 39, 31-73,
김정현 (2019). 몸담론의 현재적 지형과 철학적 의미, 니체연구, 35, 113-139.
김향선 (2001). 하이데거의 기술철학, 철학연구, 52, 79-102.
신권철, 박귀천, 김진, 홍남희, 양승업 (2014), 정신보건법상 입·퇴원제도 개선방안, 보건복지부
오생근 (1990). 미셸 푸코론, 한울.
이부영 (1994), 일제하 정신과 진료와 그 변찬조선총독부의원의 정신과 진료(1913-1928)를 중심으로, 의사학, 3(2), 147-169.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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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마샬한테 가는 게 이렇게 떨릴 일은 아니다. 마샬이 오늘 당장 나를 죽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요즘같은 때라면 그럴 수 없을 테니까.
최고 사령관이기는 하지만 마샬은 베르토를 제외한 니플하임의 누구보다도 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었다. - P94

"자, 힘멜 스테이션에 온 걸 환영한다. 드라카에 탑승할 수있게 될 때까지 이곳이 여러분의 집이다. 내 이름은 예로니모 마샬이고 이번 탐사 임무의 총책임자가 될 예정이다. 행성 밖으로 나온 경험이 있는 사람 있나?"
대여섯 명 정도가 손을 들었다. 마샬은 고개를 끄덕였다. - P97

"사령관님?"
토하고 싶다고 손을 든 사람 중 하나였다. 마샬이 그를 향해고개를 돌렸다.
"말하게."
"생명공학부의 듀건이라고 합니다. 사령관님 혹시...." 그는트림을 한 번 하고는 얼굴을 찌푸리며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그게………… 개인 물품은 언제쯤 받을 수 있습니까? 셔틀에 싣도록 허가를 내주지 않아서요." - P97

"좋다. 이름이?" 마샬이 말했다.
"미키 반스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개인 물품은 30킬로그램까지 허용된다고 했는데요."
사령관의 미소가 더 경직되었다. 이제는 미소라고 할 수도없을 것 같았다.
"말했듯이, 반스 군, 그 결정은 취소되었다."
"저희는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들은 적 없습니다만, 가방에두고 온 물건 중에 필요한 물건이 있습니다." - P98

"그건 그렇고, 반스 군이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 아직 듣지못했네만."
"제・・・・・・ 뭐요?"
"역할 말이네. 듀건 군은 생물학자라고 했고, 반스 군은?"
여기에서 실수를 더 저지르고 말았다. 나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익스펜더블입니다. 사령관님."
마샬은 내 미소에 답해 주지 않았다. - P100

그가 사라지자 듀건이 말했다. "와,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마샬 사령관은 나탈리스트야." 에어 로크 옆에 매달려 있던검은 머리의 키 큰 여자가 말했다.
듀건은 짧고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그러고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넌 이제 끝난 것 같은데." - P101

"사이비 종교 같은 거." 듀건이 말했다.
"사이비 아니야." 여자가 반박했다. 그녀는 마샬 못지않게 능숙하게 벽을 차더니 손잡이를 잡아 급히 내 앞에 멈췄다.
"진짜 종교야. 마샬 사령관은 독실한 신자고. 그의 디지털프로필에서 봤어. 지원하기 전에 사령부 사람들 프로필을 전부 확인했지. 너는 안 했어?" - P102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을 안 듣고 있구나. 나도 선택권이 있었어. 이틀 전에 채용 담당자 사무실에 내 발로 걸어 들어갔어. 그웬이라는 여자랑 인터뷰도 했고, 내가 훌륭한 후보라고 했고 내가 지원해서 좋아하던데."
두 사람은 머리 두 개 달린 괴물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거짓말하지 마." 듀건이 말했다.
"아니, 거짓말이 아니야."
여자가 말했다. "이런 걸 물어봐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대체무슨 생각으로 그랬어?" - P103

브리는 내 쪽으로 돌아섰다. 표정으로 보아 듀건에게 훨씬흥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나에게 어딘가 심각한 문제가있다고 결론을 내렸는지, 슬슬 성가시게 여기는 눈치였다.
브리가 말했다. "나탈리스트 교회의 주요 교리 중 하나가 하나뿐인 영혼의 신성성을 믿는 거야." - P104

듀건이 덧붙였다. "그래도 네가 익스펜더블이기는 하지만 아직 죽었다 살아난 적은 없잖아? 그러니까 지금 네 몸은 원래 몸이잖아, 안 그래?"
"뭐, 그렇지. 탐사에 자원한 지 이틀밖에 안 됐어. 백업 같은건 어떻게 하는지도 아직 몰라. 적어도 지금은 태어난 몸 그대로야." 내가 말했다. - P105

7장

"자네, 반스 자네 말이야, 지금 몇 번째 재생본이지?"
"음, 여덟 번째인 것 같은데요?"
마샬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확실하게는 모르는 건가?"
"제 목뒤에 몇 번째 생이라고 표시를 해 두는 게 아니니까요. 그리고 죽었을 때가 기억이 잘 안 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저더러 에잇이라고 하니까 그런 줄 아는 거죠." - P107

마샬은 좀 더 오랫동안 나를 빤히 보다가 베르토에게 눈길을 돌렸다. "고메즈. 이 사람이 왜 미키 반스의 여덟 번째 재생본인가?"
"그게 말입니다. 프로토콜에 따르면 기지에는 언제나 가동중인 익스펜더블이 있어야 합니다." 베르토가 대답했다. - P108

"됐네. 작업 매뉴얼에 나오는 설명 말고 자네 입장을 설명해보게. 어떻게 단백질과 칼슘 75킬로그램을 낭비하게 되었는지 말이야."
정확히 말하면 나는 1킬로그램이고 그중 대부분은 밖에서넘치게 구할 수 있는 물로 구성되어 있지만, 꼬치꼬치 따져 물을 때가 아닌 것 같았다. - P109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말이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았을 텐데. 미키7을 복구할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했느냐는 말일세."
"그게………." 베르토가 말을 시작하면서 나를 흘끔 보았다.
"나 보지 마. 나는 죽은 상태였다며?" 내가 말했다. - P110

"사령관님, 제 판단으로는 미키가 떨어진 위치로 안전하게 착륙할 수 없었습니다."
"알겠네. 하지만 그 지점에 반스를 내려 줄 때는 안전하다고생각했지. 내 말이 맞나?" - P111

마샬은 내 쪽을 보았다. "반스, 이제 이야기해 보게. 여기에 대해 할 말 있나?"
(중략)
"흠, 맞는 것 같군. 자네가 그저 구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가끔 잊는단 말이지." - P112

"아니, 고메즈, 듣고 싶지 않네. 두 사람의 배급량을 영구적으로 20퍼센트 삭감하도록 하지."
"하지만......."
"듣고 싶지 않다고 했네." 마샬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 그는 베르토를 내려다보다가 내 쪽으로시선을 돌렸다. "반스, 더 할 말 있나?" - P113

마샬의 사무실에서 충분히 멀리 떨어지자 베르토가 입을열었다. "그래서 개척지 자산이 된 기분이 어때?"
"좋은 질문이야. 너한테도 하나 물을게 거짓말쟁이로 사는 기분은 어때?" 내가 말했다. - P113

이쯤 되고 보니, 그다지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은 베르토와 내가 애초에 어떻게 친해졌는지 궁금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은 덕분이다. - P117

예를 들면, 나는 학교를 졸업하기 전 벤 아슬란이라는 친구와 친하게 지냈다. 벤은 좋은 친구였다.
(중략)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내가 그와 계속 친하게 지낸 이유가 뭐였을까? 은행 계좌에 20크레딧 이상 있어 본 적 없는 내가 그 오랜 시간 동안 세계 최고 부호에게 술과 밥을 수없이 산 이유가 무엇일까?
(중략)
베르토와도 마찬가지다. 다만 베르토는 밥값 때문에 치사하게 구는 대신 가끔 내가 구덩이에 빠져도 얼어 죽을 때까지 내버려 두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거짓말을 할 뿐이다. - P118

에잇은 고개를 들고 나를 보며 눈을 껌벅거리더니 이불을다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려고 했다. 그때 그의 왼쪽 손목에 감긴 압박붕대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 손은 왜 그래?" 내가 물었다. - P119

"네 손. 붕대를 감기는 했는데 보라색 멍이 없잖아. 유심히 보는 사람이 있으면 네가 진짜 다치지 않았다는 걸 금세 눈치챌걸."
"그렇게 유심히 보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어차피 죽은 목숨이야" - P120

(중략)
결국 나는 이렇게 말했다. "좋아. 마샬이 위험한 명령을 내리면, 그러니까 스리한테 내린 임무 같은 걸 시키면 내가 맡을게.
그래도 위험한 작업을 다 하지는 않을 거야. 탐사 명령을 받거나 보안 경계선에 배치되거나 베르토랑 플리터를 타고 비행해야 할 때는 가위바위보라도 해서 그때그때 결정하기로 해." - P121

"배급 마샬이랑 면담을 했는데, 내가 원하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거든."
순간 에잇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말해 봐."
"우리 배급이 20퍼센트나 감축됐어." - P122

나는 그를 쿡 찔렀다. "자리 좀 내주지?"
그는 침대 가장자리로 몸을 옮겼다. 나는 부츠를 벗어 던지고 그 옆에 누웠다. 나 자신과 침대를 나눠 쓰자니 기분이 이상했지만 어쨌든 적응해야 할 것 같았다.
막 잠에 빠져들려는 찰나 오큘러가 반짝였다.

[Command1]: 즉시 메인 로크로 오기 바랍니다. 반스 문제가발생했습니다. - P125

나는 일어나 앉으며 대꾸했다. "이것도 소환 중 하나야, 에잇"
"그래, 만약 목숨을 잃을 만한 일이면 네가 맡아야지, 안 그래? 별일 아니어도 어차피 오늘은 네 차례야. 나는 오늘 재생탱크에서 나왔으니까" - P125

8장

어떤 부서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2~3일마다 부서를 바꿔 가며 일손이 필요한곳에 보내졌다. 농업부에서는 토끼를 관리했다. 경비대에서는보초를 섰다. 마샬의 행정관이 병가를 냈을 때 그 자리를 채운 적이 있는데, 나중에 보니 그가 집에서 몰래 담근 술에 문제가 있어 크게 병이 난 것이었다. - P127

힘멜 스테이션에서 첫날을 이하자마자 내 진짜 임무가 무엇인지 알고 놀랄 수박에 없었다.
(중략)
나는 해먹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둥둥 떠 있을 뿐 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딱딱하고 뾰족한 물체가 내 갈비뼈를 쿡 찔렀다. 나는 물체를 쳐냈고 그 바람에 해먹이 빙글 돌며 뒤집혔다. 눈을 떠 보니 바닥이 보였다. - P128

첫날 우리는 드라카 엔진 시스템의 설계도를 살펴보았다. 반물질이 어디에 어떻게 저장되는지 배웠고, 반응물을 어디에 두는지, 두 가지 물질을 어떻게 합치는지, 그리고 각각의 장치가고장날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도 배웠다. 젬마는 이 부분을 특히 강조했다. - P129

"당신을 엔지니어로 만들려는 건 아니에요. 드라카에는 추진력 전문가들이 차고 넘치게 탈 거예요. 당신이 필요해지면 뭘어떻게 하라고 그들이 정확히 말해 줄 거고요. 하지만 실제로 일이 닥치면 해결할 시간은 짧을 테고, 기본 지식이 있으면 훨씬 빨리 일을 처리할 수 있잖아요."
"일이 잘못되었을 때 제 도움이 필요한 이유는......" - P130

젬마와 나는 설계 도면이나 방사능 중독에 관해서만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 머릿속이 기술적인 데이터로 가득 찼다는 확신이 들자 주제는 철학으로 바뀌었는데, 나로서는 훨씬 받아들이기 쉬웠다.
인류는 내 삶의 축이 된 의문을 오랫동안 탐구해 왔던 모양이다. - P131

"맞아요. 테세우스는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전 세계를 항해했어요. 그동안 배 여기저기가 망가지고 뜯어져 배를 고쳐야했어요. 몇 년이 지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원래 선체를 구성했던 목재는 모두 교체되고 없었어요. 이 경우에 테세우스의 배는 출발할 때와 같은 배일까요? 아닐까요?"
"멍청한 질문이네요. 당연히 같은 배죠." - P132

 젬마는 진공 슈트를 어떻게 입고 벗는지도가르쳐 줬다. 전투에 필요한 무기를 조립하는 방법을 보여 주기도 했다. 여섯 번째 날에는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스테이션 선체를 기어올라 무반동 렌치로 느슨해진 볼트를 조이는연습도 시켰다. - P133

나는 한숨을 쉬었다. "보통은 범죄자들이 익스펜더블이 되니까요. 하지만 힘멜 스테이션의 익스펜더블이 되기로 결심하는 건 좀 다르죠. 정당한 이유 없이 가끔 한 번씩 죽겠다는 데동의하는 거니까요. 나는 개척지 건설 임무에 참여하기로 한거예요. 당신이 말한 것처럼 나름의 낭만이 있다고 할까......."
젬마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기요, 그쪽 친구랑 이야기한 적있어요. 고메즈라는 당신의 조종사 친구요. 당신이 이 미션에왜 참여했는지 들었어요." - P135

"보통은 자살하는 사람들 두고 그렇게 이야기하던데요."
그녀는 한 손을 내 어깨에 올리며 말했다. "자, 이제 안으로 돌아가요. 존 로크(17세기 영국의 철학자로 민주주의 사상의 선구자-옮긴이)의 철학을 배워야 할 때예요." - P135

"컨디션이 좋은 날이길 바라요. 지금 보이는 모습이 앞으로 남은 일생 동안 재생 탱크에서 나올 때의 모습이 될 거예요."
"이런 딱 한 번밖에 못 하나요?" 내가 말했다.
"아마도요. 스캐너는 에너지를 어마어마하게 소모하거든요.
레콘 소프트웨어는 오늘 추출한 정보를 분류하느라 거의 일주일 내내 돌아갈 거예요. 게다가 방금 당신은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문제가 될 만한 양의 방사선을 흡수했어요." - P136

그 뒤로 정기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인격 백업안 신체 백업보다 간단하지만 생소했다.
(중략)
기술자가 말했다. "스퀴드 배열이에요. 조금 불편하겠지만 다치지는 않을 겁니다."
나중에 나는 스퀴드라는 단어가 옛 지구에 존재했던 지능이 높은 무척추 해양 동물을 뜻하기도 하지만 초전도 양자 간섭 소자를 뜻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러분은 스퀴드가 무슨 뜻인지 나보다는 잘 이해할 수 있길 바란다. - P137

스캔이 끝났을 때 젬마는 장교 식당으로 나를 데려가 테이블에 앉히고 원하는 음식이 있으면 뭐든 시키라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녀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축하해야죠. 훈련을 수료하는 날이니까."
"정말요? 수료식도 있나요?"
그녀는 내 눈을 피했다. "식사를 마치는 대로 할 거예요. 천천히 먹어요."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이상한 시간 중 하나였다.
(중략)
그런데 복도로 막 나서는 찰나 젬마가 내 팔을 붙들었다.
"안 되죠. 수료식이 남았잖아요?"
"아, 그냥 농담인 줄 알았어요."
그녀는 나를 오랫동안 지그시 보다가 고개를 젓고는 벽장이있는 쪽 복도로 나를 밀었다. - P138

"미키, 이게 수료식이에요. 익스펜더블이 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해요."
(중략)
"빨리 끝내는 게 좋아요. 고개를 최대한 돌리고 귀 바로 뒤말랑한 부분에 총구를 놓으세요. 각도는 살짝 위로 향하게 하고요. 부채꼴로 발화되도록 설정되어 있어요. 제대로 하면 뇌연수 전체와 소뇌 일부까지 한 번에 파괴할 수 있어요. 장담하는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거예요. 제대로 하지 못하면 내가 나머지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건 우리 둘 모두한테 못할 짓이에요." - P140

나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내뱉었다.
그리고 방아쇠를 눌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얼어붙은 채 몸을 달달 떨며 자리에 서 있었고, 젬마가 다가와 버너를 내 머리에서 멀리 치워 주었다.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축하해요. 오늘부로 공식적으로 미키1이 되었어요."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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