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토리얼 씽킹을 시작합니다

‘에디토리얼 씽킹‘이 뭐예요?

편집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기억하는 방식 그 자체다.
우리 뇌는 장면의 모든 세부 사항을 동결시켜 기록하는 카메라처럼 작동하지 않는다. 어떤 부분은 주목하고, 어떤 부분은 무시한다. 새로 들어온 정보를 원래의 것과 연결하고, 정보의 공백을 스스로 채워 넣기도 한다. - P25

책은 보통 단일 저자의 목소리를 선형적으로 따라가지만, 잡지는 여러 화자가 갖가지 방향에서 등장하며 독자의 주의를 빼앗는다. 지면에 올라가는 재료의 다양성 측면에서도 차이가 크다. 단행본과 달리 잡지에서는 서로 다른 크기의 텍스트 덩어리와 이미지, 다채롭게 변하는 레이아웃이 시선 경쟁을 한다. 독자는 덩어리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한다. - P25

나는 에디토리얼 씽킹을 이렇게 정의한다. ‘정보와 대상에서 의미와 메시지를 도출하고, 그것을 의도한 매체에 담아 설득력있게 전달하기 위해 편집하고 구조화하는 일련의 사고방식‘.  - P26

위의 놀이에서 경험한 것처럼 에디팅은 의미화되기 전의 잡음‘ 속에서 특정 정보에 주목해서 ‘신호 다시 말해 의미의 맥락을 만들어가는 작업이다. - P29

여기까지는 ‘정보와 재료에서 의미와 메시지를 도출하는 일‘
에 관한 내용이었다. ‘의미와 메시지를 의도한 매체에 담아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 구조화하고 재배열하는 일, 다시 말해 시각화 작업에 대해선 아직 언급도 못 했다. - P30

. 사물이나 현상을 낯설게 보면서 질문을 찾아내는 능력,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 개별 재료들을 연결하는 능력,
필요한 정보를 어디 가야 얻을 수 있는지 아는 노웨어 know-where, 노후know-who 능력, 컨셉을 정확히 설명하는 능력, 자신의 창작물이 의도치 않은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 위험은 없는지 데스킹하는 능력, 어떤 헤드라인과 이미지를 써야 주목도가 올라갈지 판단하는 능력 등 에디팅은 종합적이고 메타적인 사고 행위다. - P32

니콜라 부리요의 선언처럼 우리 시대의 예술적 질문이 이미갖고 있는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면 The Kiffness는 정확히 그 답을 보여준다. 이미 존재하는 정보, 누구든 접속 가능한사실, 발에 차이게 많은 재료 중 일부를 선택하고 재배열해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편집 행위가 얼마나 멋지고 창의적인지 피부로 곧장 느끼게 한다. - P33

저는 에디터가 아닌데, 에디토리얼 씽킹이 왜 필요해요?

2021년 가을, ‘아장스망‘이라는 에디토리얼 컨설턴시를 만들었다. 아장스망 agencement은 프랑스어로 ‘배치, 배열, 조합‘이란 뜻으로, 철학자 질 들뢰즈가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배치‘라는 의미로 정립한 철학 용어이기도 하다.  - P34

과거에는 노동 산출물로 업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중략) 하지만 정보와 지식 기반 산업이 커지면서 물리적 제품보다 연구, 분석, 문제 해결 서비스 개선, 경험 기획등 작업 프로세스 자체가 직업 정체성의 중심이 되는 일이 많아졌다. 기존 산업 경계가 무너지고 이종 간 협업이 너무나 활발해진 시대라서 커뮤니케이션 능력, 공감능력, 설득력, 갈등 해결 능력, 리더십 같은 소프트 스킬이 핵심 프로덕트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 P35

크게는 브랜드명과 슬로건을 짓고 브랜드 아키텍처를 정리하는 일부터 작게는 상사나 고객사에 보낼 보고서의 스토리라인을 짜는 일까지, 의미를 다룬다는 것은 타인과의 소통을 전제로 하는 활동이다. 누가 계산해도 동일한 답이 나와야 하는 과학 언어와는 성격이 다르다. 상대에 따라 구사하는 전략이 달라진다. - P36

이처럼 새로운 의미를 빚어가는 행위는 지각, 패턴 인식, 연상, 범주화, 기억 검색, 추론, 맥락화 같은 복잡한 인지 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저는 이 사안/작품/현상/데이터를 이렇게 읽고해석했습니다. 제가 가진 입장은 이것입니다"라고 선언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다.  - P37

얼마 전 첫 GPT를 비롯한 생성형 AI가 열어젖힌 문으로 거대한 변화가 들이닥쳤다. 챗 GPT는 긴 글의 핵심도 뚝딱 요약하고, 원문 메시지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독자 수준에 맞게 수십 가지 문체로 고칠 줄도 알았다. 함께 일하는 1~3년 차 주니어 에디터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언어 구사 능력을 보여줬다. - P38

 챗 GPT는 어떤 사안에 대해 개인적 의견이나 입장을 갖지 못한다. 입장이 없기 때문에 주장하지 못하고, 설득하지 못한다. 앞으로도 생성형 AI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수만 가지 단어와 이미지를 만들어낼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 무엇이 자신의 상황에 적합한지, 무엇이 신선하고 매력적인지 의미 부여하고 주장하고설득하는 일은 언제나 인간이 할 것이다. - P38

10. 생략: 군더더기를 알아보고 배제하는 판단력

회고형 에세이 쓰기는 오래 방치한 서랍을 정리하는 일과 비슷하다. (중략),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깊은 곳에 있던 서랍을 열어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 다시 말해 내밀한 기억을글로 옮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 P179

 지나가던 행인이 부당한 언사를 보일 땐 곧장 ‘미친 사람 아냐?‘라고 거침없이 판결내리지만, 가족이나 친구의 경우라면 온갖 모순된 감정이 동시에 찾아온다. - P179

‘A이면서 B이면서 C이자 D일 수 있는데, 내가 이렇게 느꼈다고 주장해도 될까? 다르게 해석할 가능성도 분명 있는데, 그걸 배제해도 될까?‘라는 고민은 사실 에세이 쓰기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 P180

이렇게 망설이는 사람은 일단 칭찬받아야 한다. 자신이 말하려는 주제를 다각도에서 섬세하고 종합적으로 살피는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피곤해하는 시대, 복잡한 이해관계나 사연을 단순화해서세줄 요약으로 알려주길 기대하는 시대이기에 저런 류의 망설임은 소중하다.  - P181

하지만 창작을 하려면 어느 순간에는 주장으로 도약해야 한다. 어떤 정보를 취하고 어떤 정보를 버릴지 선택하고,
그 결정을 바깥으로 드러내야 한다. - P181

생략은 첨가보다 용감하고 힘 있다. 무언가를 하기로 선택하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지만,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일은 극악무도할 정도로 어렵다. - P182

2022년에 학고재 갤러리에서 열렸던 노순택 작가의 개인전《검은 깃털》은 역광 사진으로만 채워진 전시였다. 사진에서 역광은 가급적 피해야 할 조건으로 여겨진다. - P182

 노순택 작가는 전시 작가 노트에 이렇게 썼다.

"사람 사진의 경우 중요한 세부는 얼굴과 표정인데, 역광사진은 그걸 가림으로써 누가 누군지 알 수 없게 한다. 누군지 알 수도 없는사진을 대체 왜 찍는단 말인가. (..) 가끔은 질문이 대답이 된다."

노순택 작가가 던진 질문에 답하는 그림이 있다면 아마 <회화의 기원 The Origin of Painting>이 아닐까. - P185

알랭 드 보통이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에 썼듯 ‘우리가 훌륭하다고 여기는 화가들은 무엇을 기념해야 하고 무엇을생략해야 할지 적절하게 선택하는 사람들이다. 디부타데스는 연인의 얼굴 윤곽선이 미래에 자신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킬 효과를 이해하고 있다. - P188

생략이라는 중요한 편집 기법을 창작 전략으로 사용하는 작가는 아주 많다. 특히 동시대 미술은 빼기의 고수들이 벌이는 인식의 전쟁터다. 손에 잡히지 않는 빛과 텅 빈 공간으로 관람자에게 엄청난 몰입의 경험을 선사하는 제임스 터렐James Tierrell, 재하얀 전시장 벽에 UV 라이트 손전등을 비추어야 작품이 보이도록한(그냥 보면 아무것도 없는 벽처럼 보이게 한) 박관태 작가, 그림을 한 장도 그리지 않았지만 아름답고 황홀한 그림책 『It Looks LikeSnow (눈처럼 생겼어)』를 지은 안무가이자 그림책 작가 레미 찰립Remy Charlip까지.... - P188

생략이 임팩트를 만들어낼 때, 수용자는 초대장을 받는 기분을 느낀다. 궁금증을 느끼면서 정보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작가의 세계와 자신의 세계를 부지런히 오간다. 이럴 때 생략은 그자체로 주장이 된다. 반면 생략으로 자신의 게으름을 숨기는 창작자도 있다. - P190

군더더기를 알아보고 배제하는 판단력을 갖기 위해선 먼저 자기만의 정의를 가져야 한다. 애초에 일을 시작한 목적도 잊지 말아야 한다.  - P190

기준점을 마련한 다음 수집한 재료를 검증한다. 더했을 때효과와 뺐을 때 효과를 비교하고 기억한다. 수집한 재료가 100개라면 100번의 가능성을 지었다가 부순다. 생략할 용기와 본질을 알아차리는 눈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경험치와 노력에 비례해 점진적으로 커진다. - P191

9. 객관성과 주관성: 주관적인 것의 힘

다음에 맡은 인터뷰는 재즈 뮤지션 그룹 기사였다. 선배의조언대로 그들의 음악과 인터뷰 답변을 나름대로 해석해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찾았다. 두어 줄 쓰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겨우 완성했던 첫 기사보다 원고 쓰는 속도가 빨라졌고, 온전히 집중하는 몰입감을 느끼기도 했다.
(중략)
그 두 페이지짜리 기사에는 ‘나‘라는 단어가 아홉 번 들어가 있었다. - P170

. 당시 ‘나‘를 빼라는 데스크의 가이드라인은 막내에게 취재를충실히 하는 습관을 만들어주기 위한 조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로 근거, 데이터, 출처를 댈 수는 없지만, 분명 내 안에 머무는 질문이나 감정을 기사에 담을 때마다 입이 마르고 심장이 뛰었다.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 P171

잡지 에디터는 자기 이름을 걸고 개성 있는 지면을 만들어야한다. 동시에 불특정다수에게 내보이는 공적 지면을 책임지기에팩트 체크, 데스킹 등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한 작업도 소홀히 할 수 없다. - P171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객관이라는 단어 앞에서 늘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객관이 티 없이 완전무결한 세계라면 주관은 허술하고유아적인 주장으로 점철된 세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비단나만 느끼는 차이는 아닐 것이다. "그건 당신의 주관적 판단이고요"라는 문장 앞에서 움찔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 P172

정치사회문화적 제도가 바뀌면 주류 시각도 바뀐다. 이상하지 않은가? 객관이 완전무결한 절대 진리라면 시대와 상황을 불문하고 변치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 P173

(전략)
(갈릴레오 사례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이어지는 퍼즐 조각을 김정운의 에디톨로지에서 찾았다.

객관성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객관적관점이란 각기 다른 인식의 주체들이 ‘같은 방식으로 보기 joint-attention‘로 서로 약속해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객관성이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합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 P173

결국 설득의 문제다. 주관은 열등하고 객관은 우등한 것이 아니라 모든 건 주관의 산물인데, 어떤 주관은 여러 이유에서 설득력을 가져 보편의 차원에 자리 잡는다. 냉철하게 숫자를 보는 비즈니스 세계도 마찬가지다. 경영자의 책상 위로 온갖 곳에서 기록한 데이터가 쌓인다. 숫자들은 중립적이지만, 그중 특정 지표에 ‘주목‘하고, 경영 여건에 대한 ‘판단‘을 내려 ‘전략‘을 세우는 경영자는 결국 자신의 주관을 바탕으로 일한다. - P174

 내 관점, 믿음, 판단을 신뢰하고, 그것을 나 아닌 타인이 납득할 수 있는 모양새로 만들어내려고 애쓸 뿐이다. - P175

변수와 맥락으로 요동치는 이 세계에선 어제 통했던 방법이 오늘 통하지 않을 수 있다. 긴장을 늦출 수 없고, 게을러질 수 없다. 20년을 해도 이 일이 지겹지 않은 이유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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