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마샬한테 가는 게 이렇게 떨릴 일은 아니다. 마샬이 오늘 당장 나를 죽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요즘같은 때라면 그럴 수 없을 테니까. 최고 사령관이기는 하지만 마샬은 베르토를 제외한 니플하임의 누구보다도 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었다. - P94
"자, 힘멜 스테이션에 온 걸 환영한다. 드라카에 탑승할 수있게 될 때까지 이곳이 여러분의 집이다. 내 이름은 예로니모 마샬이고 이번 탐사 임무의 총책임자가 될 예정이다. 행성 밖으로 나온 경험이 있는 사람 있나?" 대여섯 명 정도가 손을 들었다. 마샬은 고개를 끄덕였다. - P97
"사령관님?" 토하고 싶다고 손을 든 사람 중 하나였다. 마샬이 그를 향해고개를 돌렸다. "말하게." "생명공학부의 듀건이라고 합니다. 사령관님 혹시...." 그는트림을 한 번 하고는 얼굴을 찌푸리며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그게………… 개인 물품은 언제쯤 받을 수 있습니까? 셔틀에 싣도록 허가를 내주지 않아서요." - P97
"좋다. 이름이?" 마샬이 말했다. "미키 반스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개인 물품은 30킬로그램까지 허용된다고 했는데요." 사령관의 미소가 더 경직되었다. 이제는 미소라고 할 수도없을 것 같았다. "말했듯이, 반스 군, 그 결정은 취소되었다." "저희는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들은 적 없습니다만, 가방에두고 온 물건 중에 필요한 물건이 있습니다." - P98
"그건 그렇고, 반스 군이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 아직 듣지못했네만." "제・・・・・・ 뭐요?" "역할 말이네. 듀건 군은 생물학자라고 했고, 반스 군은?" 여기에서 실수를 더 저지르고 말았다. 나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익스펜더블입니다. 사령관님." 마샬은 내 미소에 답해 주지 않았다. - P100
그가 사라지자 듀건이 말했다. "와,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마샬 사령관은 나탈리스트야." 에어 로크 옆에 매달려 있던검은 머리의 키 큰 여자가 말했다. 듀건은 짧고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그러고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넌 이제 끝난 것 같은데." - P101
"사이비 종교 같은 거." 듀건이 말했다. "사이비 아니야." 여자가 반박했다. 그녀는 마샬 못지않게 능숙하게 벽을 차더니 손잡이를 잡아 급히 내 앞에 멈췄다. "진짜 종교야. 마샬 사령관은 독실한 신자고. 그의 디지털프로필에서 봤어. 지원하기 전에 사령부 사람들 프로필을 전부 확인했지. 너는 안 했어?" - P102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을 안 듣고 있구나. 나도 선택권이 있었어. 이틀 전에 채용 담당자 사무실에 내 발로 걸어 들어갔어. 그웬이라는 여자랑 인터뷰도 했고, 내가 훌륭한 후보라고 했고 내가 지원해서 좋아하던데." 두 사람은 머리 두 개 달린 괴물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거짓말하지 마." 듀건이 말했다. "아니, 거짓말이 아니야." 여자가 말했다. "이런 걸 물어봐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대체무슨 생각으로 그랬어?" - P103
브리는 내 쪽으로 돌아섰다. 표정으로 보아 듀건에게 훨씬흥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나에게 어딘가 심각한 문제가있다고 결론을 내렸는지, 슬슬 성가시게 여기는 눈치였다. 브리가 말했다. "나탈리스트 교회의 주요 교리 중 하나가 하나뿐인 영혼의 신성성을 믿는 거야." - P104
듀건이 덧붙였다. "그래도 네가 익스펜더블이기는 하지만 아직 죽었다 살아난 적은 없잖아? 그러니까 지금 네 몸은 원래 몸이잖아, 안 그래?" "뭐, 그렇지. 탐사에 자원한 지 이틀밖에 안 됐어. 백업 같은건 어떻게 하는지도 아직 몰라. 적어도 지금은 태어난 몸 그대로야." 내가 말했다. - P105
7장
"자네, 반스 자네 말이야, 지금 몇 번째 재생본이지?" "음, 여덟 번째인 것 같은데요?" 마샬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확실하게는 모르는 건가?" "제 목뒤에 몇 번째 생이라고 표시를 해 두는 게 아니니까요. 그리고 죽었을 때가 기억이 잘 안 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저더러 에잇이라고 하니까 그런 줄 아는 거죠." - P107
마샬은 좀 더 오랫동안 나를 빤히 보다가 베르토에게 눈길을 돌렸다. "고메즈. 이 사람이 왜 미키 반스의 여덟 번째 재생본인가?" "그게 말입니다. 프로토콜에 따르면 기지에는 언제나 가동중인 익스펜더블이 있어야 합니다." 베르토가 대답했다. - P108
"됐네. 작업 매뉴얼에 나오는 설명 말고 자네 입장을 설명해보게. 어떻게 단백질과 칼슘 75킬로그램을 낭비하게 되었는지 말이야." 정확히 말하면 나는 1킬로그램이고 그중 대부분은 밖에서넘치게 구할 수 있는 물로 구성되어 있지만, 꼬치꼬치 따져 물을 때가 아닌 것 같았다. - P109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말이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았을 텐데. 미키7을 복구할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했느냐는 말일세." "그게………." 베르토가 말을 시작하면서 나를 흘끔 보았다. "나 보지 마. 나는 죽은 상태였다며?" 내가 말했다. - P110
"사령관님, 제 판단으로는 미키가 떨어진 위치로 안전하게 착륙할 수 없었습니다." "알겠네. 하지만 그 지점에 반스를 내려 줄 때는 안전하다고생각했지. 내 말이 맞나?" - P111
마샬은 내 쪽을 보았다. "반스, 이제 이야기해 보게. 여기에 대해 할 말 있나?" (중략) "흠, 맞는 것 같군. 자네가 그저 구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가끔 잊는단 말이지." - P112
"아니, 고메즈, 듣고 싶지 않네. 두 사람의 배급량을 영구적으로 20퍼센트 삭감하도록 하지." "하지만......." "듣고 싶지 않다고 했네." 마샬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 그는 베르토를 내려다보다가 내 쪽으로시선을 돌렸다. "반스, 더 할 말 있나?" - P113
마샬의 사무실에서 충분히 멀리 떨어지자 베르토가 입을열었다. "그래서 개척지 자산이 된 기분이 어때?" "좋은 질문이야. 너한테도 하나 물을게 거짓말쟁이로 사는 기분은 어때?" 내가 말했다. - P113
이쯤 되고 보니, 그다지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은 베르토와 내가 애초에 어떻게 친해졌는지 궁금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은 덕분이다. - P117
예를 들면, 나는 학교를 졸업하기 전 벤 아슬란이라는 친구와 친하게 지냈다. 벤은 좋은 친구였다. (중략)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내가 그와 계속 친하게 지낸 이유가 뭐였을까? 은행 계좌에 20크레딧 이상 있어 본 적 없는 내가 그 오랜 시간 동안 세계 최고 부호에게 술과 밥을 수없이 산 이유가 무엇일까? (중략) 베르토와도 마찬가지다. 다만 베르토는 밥값 때문에 치사하게 구는 대신 가끔 내가 구덩이에 빠져도 얼어 죽을 때까지 내버려 두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거짓말을 할 뿐이다. - P118
에잇은 고개를 들고 나를 보며 눈을 껌벅거리더니 이불을다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려고 했다. 그때 그의 왼쪽 손목에 감긴 압박붕대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 손은 왜 그래?" 내가 물었다. - P119
"네 손. 붕대를 감기는 했는데 보라색 멍이 없잖아. 유심히 보는 사람이 있으면 네가 진짜 다치지 않았다는 걸 금세 눈치챌걸." "그렇게 유심히 보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어차피 죽은 목숨이야" - P120
(중략) 결국 나는 이렇게 말했다. "좋아. 마샬이 위험한 명령을 내리면, 그러니까 스리한테 내린 임무 같은 걸 시키면 내가 맡을게. 그래도 위험한 작업을 다 하지는 않을 거야. 탐사 명령을 받거나 보안 경계선에 배치되거나 베르토랑 플리터를 타고 비행해야 할 때는 가위바위보라도 해서 그때그때 결정하기로 해." - P121
"배급 마샬이랑 면담을 했는데, 내가 원하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거든." 순간 에잇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말해 봐." "우리 배급이 20퍼센트나 감축됐어." - P122
나는 그를 쿡 찔렀다. "자리 좀 내주지?" 그는 침대 가장자리로 몸을 옮겼다. 나는 부츠를 벗어 던지고 그 옆에 누웠다. 나 자신과 침대를 나눠 쓰자니 기분이 이상했지만 어쨌든 적응해야 할 것 같았다. 막 잠에 빠져들려는 찰나 오큘러가 반짝였다.
[Command1]: 즉시 메인 로크로 오기 바랍니다. 반스 문제가발생했습니다. - P125
나는 일어나 앉으며 대꾸했다. "이것도 소환 중 하나야, 에잇" "그래, 만약 목숨을 잃을 만한 일이면 네가 맡아야지, 안 그래? 별일 아니어도 어차피 오늘은 네 차례야. 나는 오늘 재생탱크에서 나왔으니까" - P125
8장
어떤 부서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2~3일마다 부서를 바꿔 가며 일손이 필요한곳에 보내졌다. 농업부에서는 토끼를 관리했다. 경비대에서는보초를 섰다. 마샬의 행정관이 병가를 냈을 때 그 자리를 채운 적이 있는데, 나중에 보니 그가 집에서 몰래 담근 술에 문제가 있어 크게 병이 난 것이었다. - P127
힘멜 스테이션에서 첫날을 이하자마자 내 진짜 임무가 무엇인지 알고 놀랄 수박에 없었다. (중략) 나는 해먹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둥둥 떠 있을 뿐 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딱딱하고 뾰족한 물체가 내 갈비뼈를 쿡 찔렀다. 나는 물체를 쳐냈고 그 바람에 해먹이 빙글 돌며 뒤집혔다. 눈을 떠 보니 바닥이 보였다. - P128
첫날 우리는 드라카 엔진 시스템의 설계도를 살펴보았다. 반물질이 어디에 어떻게 저장되는지 배웠고, 반응물을 어디에 두는지, 두 가지 물질을 어떻게 합치는지, 그리고 각각의 장치가고장날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도 배웠다. 젬마는 이 부분을 특히 강조했다. - P129
"당신을 엔지니어로 만들려는 건 아니에요. 드라카에는 추진력 전문가들이 차고 넘치게 탈 거예요. 당신이 필요해지면 뭘어떻게 하라고 그들이 정확히 말해 줄 거고요. 하지만 실제로 일이 닥치면 해결할 시간은 짧을 테고, 기본 지식이 있으면 훨씬 빨리 일을 처리할 수 있잖아요." "일이 잘못되었을 때 제 도움이 필요한 이유는......" - P130
젬마와 나는 설계 도면이나 방사능 중독에 관해서만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 머릿속이 기술적인 데이터로 가득 찼다는 확신이 들자 주제는 철학으로 바뀌었는데, 나로서는 훨씬 받아들이기 쉬웠다. 인류는 내 삶의 축이 된 의문을 오랫동안 탐구해 왔던 모양이다. - P131
"맞아요. 테세우스는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전 세계를 항해했어요. 그동안 배 여기저기가 망가지고 뜯어져 배를 고쳐야했어요. 몇 년이 지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원래 선체를 구성했던 목재는 모두 교체되고 없었어요. 이 경우에 테세우스의 배는 출발할 때와 같은 배일까요? 아닐까요?" "멍청한 질문이네요. 당연히 같은 배죠." - P132
젬마는 진공 슈트를 어떻게 입고 벗는지도가르쳐 줬다. 전투에 필요한 무기를 조립하는 방법을 보여 주기도 했다. 여섯 번째 날에는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스테이션 선체를 기어올라 무반동 렌치로 느슨해진 볼트를 조이는연습도 시켰다. - P133
나는 한숨을 쉬었다. "보통은 범죄자들이 익스펜더블이 되니까요. 하지만 힘멜 스테이션의 익스펜더블이 되기로 결심하는 건 좀 다르죠. 정당한 이유 없이 가끔 한 번씩 죽겠다는 데동의하는 거니까요. 나는 개척지 건설 임무에 참여하기로 한거예요. 당신이 말한 것처럼 나름의 낭만이 있다고 할까......." 젬마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기요, 그쪽 친구랑 이야기한 적있어요. 고메즈라는 당신의 조종사 친구요. 당신이 이 미션에왜 참여했는지 들었어요." - P135
"보통은 자살하는 사람들 두고 그렇게 이야기하던데요." 그녀는 한 손을 내 어깨에 올리며 말했다. "자, 이제 안으로 돌아가요. 존 로크(17세기 영국의 철학자로 민주주의 사상의 선구자-옮긴이)의 철학을 배워야 할 때예요." - P135
"컨디션이 좋은 날이길 바라요. 지금 보이는 모습이 앞으로 남은 일생 동안 재생 탱크에서 나올 때의 모습이 될 거예요." "이런 딱 한 번밖에 못 하나요?" 내가 말했다. "아마도요. 스캐너는 에너지를 어마어마하게 소모하거든요. 레콘 소프트웨어는 오늘 추출한 정보를 분류하느라 거의 일주일 내내 돌아갈 거예요. 게다가 방금 당신은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문제가 될 만한 양의 방사선을 흡수했어요." - P136
그 뒤로 정기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인격 백업안 신체 백업보다 간단하지만 생소했다. (중략) 기술자가 말했다. "스퀴드 배열이에요. 조금 불편하겠지만 다치지는 않을 겁니다." 나중에 나는 스퀴드라는 단어가 옛 지구에 존재했던 지능이 높은 무척추 해양 동물을 뜻하기도 하지만 초전도 양자 간섭 소자를 뜻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러분은 스퀴드가 무슨 뜻인지 나보다는 잘 이해할 수 있길 바란다. - P137
스캔이 끝났을 때 젬마는 장교 식당으로 나를 데려가 테이블에 앉히고 원하는 음식이 있으면 뭐든 시키라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녀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축하해야죠. 훈련을 수료하는 날이니까." "정말요? 수료식도 있나요?" 그녀는 내 눈을 피했다. "식사를 마치는 대로 할 거예요. 천천히 먹어요."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이상한 시간 중 하나였다. (중략) 그런데 복도로 막 나서는 찰나 젬마가 내 팔을 붙들었다. "안 되죠. 수료식이 남았잖아요?" "아, 그냥 농담인 줄 알았어요." 그녀는 나를 오랫동안 지그시 보다가 고개를 젓고는 벽장이있는 쪽 복도로 나를 밀었다. - P138
"미키, 이게 수료식이에요. 익스펜더블이 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해요." (중략) "빨리 끝내는 게 좋아요. 고개를 최대한 돌리고 귀 바로 뒤말랑한 부분에 총구를 놓으세요. 각도는 살짝 위로 향하게 하고요. 부채꼴로 발화되도록 설정되어 있어요. 제대로 하면 뇌연수 전체와 소뇌 일부까지 한 번에 파괴할 수 있어요. 장담하는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거예요. 제대로 하지 못하면 내가 나머지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건 우리 둘 모두한테 못할 짓이에요." - P140
나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내뱉었다. 그리고 방아쇠를 눌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얼어붙은 채 몸을 달달 떨며 자리에 서 있었고, 젬마가 다가와 버너를 내 머리에서 멀리 치워 주었다.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축하해요. 오늘부로 공식적으로 미키1이 되었어요."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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