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어느 날, 웬일로 상냥한 목소리로 아줌마, 하고 부르더니 묘한 얘기를 했다. "저기, 사사하라 선생님에게 내 얘기 좀 해줄래요? 착하다, 지나칠 만큼 순수하다, 순정파다, 라고 말해주시면 돼요. 주간지에 실린 기사는 모두 거짓말이라고 하세요. 그러면 다음 달부터 월급도 더 올려드릴게." 누군가 병문안하며 들고 온 백장미 꽃잎을 한 장 한 장 뜯어내며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바닥에 흩어진 흰 꽃잎을 바라보며 이 여자가 이번에는 의사 선생의 백의를 갈기갈기 찢어놓을심산이구나, 하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래도 지시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 P56
"위자료를 2천만 엔이나 받아갔으면서 왜 징징거리는 거야!" 언젠가 레이코가 통화 중에 그런 말을 한 걸 보면 아마 사실일 것이다. 주간지에는 ‘사사하라는 이혼한 전처에게 위자료로 전 재산을 내주고 무일푼이었기 때문에 레이코의 2천만 엔을 말없이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나와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사사하라의 일 처리 방식도 남자답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아줌마, 그 남자가 집에 와도 절대 안에 들이지 말아요." - P57
"병원을 휴직하기로 했어. 어쩌면 사표를 내야 할지도 몰라. 하지만 레이코만 내게 돌아와 주면 다 잃어도 두렵지 않아." 그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겨우 스물세 살이지만 남자와 밀고 당기는 데 선수급인 여자 앞에서 평생을 성실하게 의사 일만 해온 남자는 어린애나 마찬가지였다. - P58
"아줌마는 이런 거밖에 못 해요?" 레이코의 말대로 한 시간 뒤에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를 든 미치코에게 사사하라는 사과부터 했다. "아주머님, 조금 전에는 죄송했습니다. 너무 지쳐서 나도모르게 불끈했어요." 그러고는 레이코가 전화를 안 받을 거라고 예상했는지 전언을 부탁했다. "다음 주에 파리에 간다고 하던데 그전에 꼭 한번 만나자고 얘기해주십시오." - P59
. 실제로 15일 전에 사사하라가 연락을 했는지, 레이코가 거기에 응해 사사하라를 만났는지, 미치코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닷새 뒤인 11월 10일, 파리로 출발할 날이 다가오자 레이코가 말했다. "오늘부터 월말까지 안 와도 돼요. 12월 1일에 귀국이니까 그 전날에 청소는 꼭 해주세요." - P59
"아차, 내가 11월 30일에는 집에 일이 좀 있어. 29일에 미리 와서 청소해도 되지?" 어차피 아무도 없으니 하루쯤 미리 와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레이코의 표정이 갑작스레 험악해졌다. "집안에 어떤 일이 있건 호출하면 꼭 온다는 조건으로 월급을 듬뿍 쥐여주잖아요. 반드시 30일에 오셔야 해요. 하루라도 더 일찍 왔다가는 절대 안 봐줘요. 내가 돌아와서 먼지 상태 보면 금세 알아요. 약속 안 지키면 당장 해고예요." - P60
그리고 11월 30일, 미치코는 별수 없이 시골 고향 집의 아버지 13주기 제사에는 아이들만 보내고 자신은 청소를 위해 맨션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치코가 현관문을 연 것은 정확히 오후 2시 8분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상한 냄새가코를 찔렀기 때문이다. 고기가 썩는 듯한 냄새였다. - P60
테이블 옆에 떨어진 담요를 짖어 들고 미치코난 침실로 다가갔다. (중략) 미치코는 저도 모르게 담요로 얼굴 아랫부분을 가렸다. 냄새를 막으려고 했는지, 순간적으로 치민 구토를 막으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담요 너머로 침대를 가로지르듯이 반듯하게 누워 있는 사람의 몸이 보였다. 처음에는 다른 여자인 줄 알았다. 베갯머리의 스탠드는 불이 꺼졌고 창문에 두툼한 커튼이 드리워져 문밖에서 흘러든 거실의 연한 불빛은 침대에 쓰러진 여자의 얼굴까지는 비춰내지 못했다. - P63
몇 분이나 그곳에 서 있었을까, 이윽고 미치코는 자긴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깨달았다. "아줌마, 그러고도 가사도우미라고 할 수 있어요?" 삼년 전, 이 여자가 처음 욕을 퍼부었을 때부터 언젠가는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날이 오기를 오래오래 기다려온 것 같기도 했다. - P64
한 시간 뒤, 미치코는 1층 관리실에서 형사 두 명을 마주하고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것을 낱낱이 진술했다. 이미 죽은 사람이니 앞으로 단돈 1엔도 나올 리 없다. 이제 더 이상 감추고 말고할 것도 없었다. - P64
3장, 경찰
사사하라 노부오의 이혼한 전처와 아이가 사는 요코하마에 가봤지만 아무수확도 없었다, 라는 신호였다. 한 시간 전에 이미 요코하마 역에서 전화 보고는 받았다. 지난 7월에 정식으로 이혼한 뒤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아무 연락도 없었다고 한다. 그 두 달 전인 5월, 사사하라와 미오리 레이코의 약혼이 전격 발표되기 직전부터 이미 아내 야스코는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간 모양이었다. "여간 쌀쌀한 게 아니더라고요. 그이가 죽였겠죠, 라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던데요." 오니시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컹컹 기침을 했다. - P68
당연히 주요 용의자로 사사하라 노부오의 이름이 올랐다. 사건 현장에 남겨진 지문 중에서 특히 침실 문 앞의 깨진 유리잔조각과 붉은 약봉지에 찍혀 있던 게 가장 유력한 증거였다. 피해자의 사인으로 밝혀진 청산화합물이 약봉지에 극소량 남아 있었고 유리잔 파편이며 카펫 얼룩에서도 발견되었다. - P68
이제 곧 나올 부검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자세한 시각까지는 알 수 없지만, 아사이는 사건 발생 시각을 12일부터 14일 사이의 밤 시간으로 추정했다. - P69
밤이라는 건 사건 현장의 거실 조명이 계속 켜져 있었기 때문이다. 침실 침대 옆 스탠드도 스위치가 켜져 있었다. 즉, 사건 발생 이후에 전구가 끊긴 것으로 보였다. 사사하라는 11월 초 병원에 한 달간 휴가를 신청했다. 7일저녁에는 레이코의 맨션에 찾아와 "내 손으로 죽일 거야!"라고소리쳤고, 이어서 걸려온 전화에서는 파리로 떠나기 전에 꼭 한번 만나자는 전언을 남겼다. 게다가 닷새 뒤인 12일 오후에는 병원에 나타나 한 시간쯤 머물렀다. - P69
오카베 게이조라는 스물여덟 살의 젊은 형사다. "자살로 볼 수는 없을까요?"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자살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은 첫째로 파리에 갈 예정, 절대 자살할 사람은 아니라는 가사도우미의 증언, 그리고 약봉지에 미오리 레이코의 지문이 없었던 점 때문이잖습니까." "그렇지. 게다가 청산가리 약봉지에 사사하라의 지문도 있었어. 그거면 충분하잖아?" - P71
이윽고 아사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오니시와 오카베에게 마지막에 들은 얘기부터 전했다. "피해자 미오리 레이코의 얼굴에 성형수술 흔적이 있다는거야. 게다가 얼굴 각 부위를 아주 정교하게 수술했대." - P72
"진짜 실력 있는 명의가 수술해준 모양이네요. 다른 스캔들은 많았어도 성형 얘기는 나온 적이 없거든요. 차가운 인상이지만 성형 특유의 인공적인 느낌이 전혀 없었어요. 와아, 그렇구나, 모든 남자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 얼굴이 성형이었다니." 오카베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P72
4장, 용의자
하마노는 의자에 앉히고 그는 침대 끝에 자리를 잡았다. (중략) "괜찮습니다. 경찰에서는 아직 제가 선생님께 신세진 사이라는 건 알지 못해요. 4시쯤에 병원으로 형사 두 명이 찾아왔는데 저한테는 어떤 질문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까 전화로 말씀하신 대로 프런트를 통하지 않고 옆의 출입구로 들어와서 엘리베이터를 탔어요." - P74
"정말로 선생님이 죽였습니까?" (중략) 세상을 너무 고지식하게 바라보는 눈빛.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는 죽이지 않았어." "하지만...." - P75
"그날 밤에 내가 레이코의 집에 갔던 것은 사실이야. 12일 오후에 병원에 잠깐 들렀었지? 그때 슬쩍 집어온 독약을 들고…. 레이코가 문도 열어주지 않을까 봐 걱정했는데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었는지 순순히 안에 들여줬어. 빈틈을 노려 술잔에 그 독약을 타려고 했어. 하지만 약봉지를 뜯으려는 순간에 레이코에게 들켜버렸어. 그게 뭐냐고 캐묻는 바람에 결국 청산가리라고 실토할 수밖에 없었어. 그다음에는 오로지 자기를 죽이려고 했느냐는 비난만 듣다가 아무 변명도 못 하고 그 집에서 쫓겨났어. 그날 밤에 내가 그 집에서 한 일은 그게 전부야." - P75
"그러시다면 그런 얘기를 경찰에 가서...." "그건 안 돼. (중략). 그날 밤에 내가 약봉지를 테이블에 남겨둔 채 그 집을 뛰쳐나왔고, 그 뒤에 거의나와 교대하듯이 레이코를 찾아간 자가 있었어. (중략) 아마 레이코는 방금 자신이 살해될 뻔했다는 얘기를 자랑이라도 하듯이 그자에게 떠들어댔겠지. (중략), 청산가리 봉지를 일부러 내보이면서. 그리고 그 얘기를 들은 사람이 전부터 레이코가 죽기를 원했던 자라면 얘기가 어떻게 되겠나.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독약을 써먹으려고 하지 않았겠어?" - P76
호텔 이름이 인쇄된 메모지에 여섯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약혼한 무렵에 레이코가 나한테 얘기해준 적이 있어. 자신을 죽이고 싶어할 만큼 미워하는 자가 일곱 명이라고. 한명 한명 이름을 들면서, 이유까지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정확히 그렇게 얘기했어. 사진작가, 여성 디자이너, 신인 남성 디자이너, 광고 모델을 했던 회사의 젊은 사장, 동료 패션모델, 그리고 레이코의 음반을 제작해준 여성 디렉터 나야 거의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었지만, 레이코를 사귀면서 차츰 누군지 알게 됐어. 틀림없이 여기 적힌 이 이름들을 말했어. 자네도 알 만한 사람이있지?" - P77
"방금 일곱 명이라고 하셨지요? 여기에는 여섯 명만 적혀있는데요." (중략) "그 얘기를 할 때 레이코가 손가락을 꼽아가며 한명 한명이름을 알려줬어. 그런데 일곱 번째로 약지였나, 실은 한 명 더있는데 그 사람 이름은 지금은 말해줄 수 없다면서 손가락을 입에 댔어. 남자 같긴 한데 나는 누군지 짐작도 못 하겠어. 내가 아는건이 여섯 명뿐이야." - P78
그는 다시 침대 끝에 앉아 메모지에 적힌 이름들을 손으로 짚어가며 말했다. "우선 한 명 한 명에게 전화를 걸어 반응을 살펴보자. 내가그날 밤 우연히 레이코의 맨션 뒤쪽에 있었는데, 당신이 안색이홱 변한 채 6층에서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와 도망치는 것을 목격했다. 그렇게 얘기하면…." "말하자면 포커의 블러핑 같은 거네요.‘ - P80
그렇게 대답하는 하마노를 지켜보다가 그는 가방에서 50만 엔을 꺼내 내밀었다. "아뇨, 보수는 필요 없.." "그게 아니라 실제로 비용이 들 거야. 그러기 위한 돈이야." 하마노는 잠시 말이 없었지만 이윽고 돈을 받아 레인코트안주머니에 넣었다. 그게 그의 대답이었다. - P81
일 분 뒤, 자리에서 일어나는 하마노에게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전부터 자네에게 한 가지 충고하고 싶은 게 있었어. 자네는 나를 닮아 지나칠 만큼 성실하지. 행여나 나처럼 못된 여자에게 너무 진지하게 빠져들어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해." - P82
그리고 다음 날 정오 뉴스에 그의 얼굴이 거의 확정적인 범인으로서 화면에 나왔다. (중략). 약사는 그가 12일에 병원에 왔을 때 약품실 보관창고에서 약병의 내용물을 호주머니에서 꺼낸 붉은 종이에 넣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야마네 하루코 약사가 틀림없었다. - P83
그는 자신을 끼고 양쪽에 앉은 두 형사 중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상의 안주머니에 골루아즈 마지막 한 개비가 남았는데 그걸 피워도 괜찮겠습니까.... - P8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