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우리의 생활이 그러하듯이, 우리 독일의 대학생활도 매우 중요한 점에서는 미국화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나이 많은 장인(匠人)이 자기 직업에서 그러했던 바와 같이, 직공I)이 노동수단(본질적으로는 장서)을 직접 소유하고 있는 학과들 - 나의 학과는 아직도 상당한 정도로 이러한 사정에 있습니다만 - 에서도 이러한 발전이 계속 진척될 것이라고나는 확신합니다. 이러한 발전이 완전히 진행 중에 있습니다. - P14

이러한 종류의 대(大)자본주의적인 대학기업(Universitätsunternehmen)의우두머리와 낡은 스타일의 일반적인 교수 사이에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대단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내적인 태도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그것을 자세하게 다루고 싶지 않습니다. - P15

 인간적인 약점은 다른 모든 선발의 경우에서와 같이 [대학에서의] 이러한 선발에서도 당연히 나타납니다. 그렇게도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의심할 여지 없이 대학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정에 대해서 교수단이나 문교당국자들의 인격적인 결함에 그 책임을 지운다면, 그것은 옳지 않을 것입니다 - P16

교황선출에서 그 선례(先例)를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와같은 종류의 인선(人選) 중에서는 가장 중요한 명백한 예입니다. ‘인기 있는 사람‘ 이라고 일컬어지는 추기경이 선출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 P16

대학의 어떤 교수도 자기가 임명될 때 벌어졌던 토론에 대해서 회상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토론이 유쾌했던 경우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 P17

우리 나라의 대학들, 특히 작은 대학들은 서로 학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아주 우스꽝스러운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대학도시의 하숙집주인들은 천 명째의 학생이 오면 축제를 베풀어서 축하하며, 이천 명째의 학생이 오면 아주 기꺼이 횃불 행렬을 통해 축하합니다. 수강료의 수익은-이것은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만-바로 인접한 학과들에 ‘인기있는‘ [많은 학생들을 끓어모으는] 교수가 있다는 것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습니다. - P19

만약 어느 강사에 대해서 그가 교사로서는 좋지 않다는 소문이 있다면, 설령 그가 세계 최고의 학자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에게는 대학에서의 사형선고나 거의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좋은 교사인지 아니면 좋지 않은 교사인지라는 문제는 학생 여러분들이 그에게 베풀어주는 출석수(出席數)로 대답되고 있습니다.  - P19

사실, 우리가 독일 대학의 전통에 따라서 대학에서 행해야 하는 학문훈련은 정신귀족적인(geistesaristokratische)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숨겨서는 안 됩니다.  - P20

학자라는 직업의 외적인 조건에 대해서 이 정도는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실제로 어떤 다른 것에 대해서, 즉 학문에대한 내적인 소명에 대해서 듣고 싶어 할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 P22

. 학문과는 무관한 모든 사람들로부터는 비웃음을 당하는 저 기이한 도취, 저 정열, 아울러 네가 그 판독에 성공하는 것을 보는 데에는 ‘네가 태어나기 전에 수천 년이 경과할 수밖에 없었으며, 또 다른 수천 년이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있다‘는 저 확신이 없는 사람은 학문에대한 소명이 없는 것이니, 어떤 다른 일을 하십시오. 왜냐하면정열을 갖지 않고서도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인간에게는 가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P23

그러나 정열이 아무리 많고 순수하며 깊다 하더라도, 그러한 정열만으로는 결과를 억지로라도 좀처럼 얻어내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 P23

오늘날 젊은이들 사이에 매우 널리 퍼져 있는 생각은 학문이 모든 ‘혼(Seele)‘ 보다는 단지 냉정한 이해력만을 동반하면서 ‘공장에서 처럼 실험실이나 통계실에서 만들어지는 계산문제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 P24

 우리들의 가장 좋은 문제제기와 인식 중 많은 것은 바로 아마추어들 덕분에 얻은 것입니다. 아마추어가 전문가와 구별되는 점은 단지-헬름홀츠가 로베르트 마이어⁶에 대해 말한 바와 같이-아마추어에게는 작업방법의 확고한 확실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로서는 대개의 경우 착상의 의의를 사후검증하고 평가하거나 그 착상을 일관되게 전개시킬 수없다는 사실뿐입니다.


6 율리우스 로베르트 폰 마이어 (Julius Robert von Mayer. 1814~1878): 독일의 의사이자 물리학자.
- P25

어쨌든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은 모든 과학연구의 밑에 깔려 있는이러한 요행, 즉 ‘영감‘이 떠오르느냐 안 떠오르느냐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훌륭한 연구가이면서도 그 자신의 가치 있는 착상을 갖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은 학문에서만 그러하며, 예를 들어 [상점] 계산대에서는 사정이 실험실의 경우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잘못입니다.  - P26

그런데 어떤 사람이 학문상의 영감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는 우리들에게 숨겨진 운명에 달려 있습니다만, 또한 ‘천부적인 재능에도 달려 있습니다. 어쨌든 이 의심할 바 없는 진리때문은 아닙니다만, 매우 통속적인 생각이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아주 명백할 정도로 몇몇 우상을 떠받들게 하였습니다. - P27

존경하는 참석자 여러분! 학문 영역에서는 일에 완전히 헌신하는 사람만이 ‘인격‘이 있습니다. - P28

학문연구는 진보(Fortschritt)라는 흘러감 속에 얽매여 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술 영역에는-그러한 의미의-진보가 없습니다. - P30

학문상의 모든 ‘성취‘는 새로운 ‘질문‘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성취에 의해] ‘가‘ 되어 시대에 뒤떨어지기를 원합니다(will), 학문에 몸을 바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이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물론 학문상의 업적들이 그 예술적인 성질 때문에 ‘향유수단(Genußmittel)‘으로서 또는 연구를 위한 훈련수단으로서 오랫동안 변함없이 중요성을 지니는 경우도 있을 수있습니다. - P31

여기서 우리는 학문의 의미문제(Sinnproblem)에 당면합니다. 왜냐하면 [진보라는] 그러한 법칙에 복종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 별로 자명(自明)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결코 끝나지 않으며 또끝날 수도 없는 것을 사람들은 왜 하는 것입니까? - P31

학문의 진보는 우리가 몇천 년 전부터 복종해온 저 주지주의화과정(主義化過程, Intellektualisierungsprozeß)의 한 단편,
더욱이 가장 중요한 단편입니다. 그런데 이 주지주의화과정에 대해서는 오늘날 일반적으로는 아주 대단히 부정적인 입장이 취해지고 있습니다. - P32

즉 그것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배워서 알 수 있다는것, 따라서 생활에 개입하는 그 어떤 힘도 근본적으로는 결코 신비하고 계산할 수 없는 힘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모든 사물은- 원칙적으로는 계산을 통해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고 있거나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계의 탈주술화(Entzauberung der Welt)를 뜻합니다. - P34

 진보에 대한 헌신이 의미 있는 소명이 될 수 있을 만큼, ‘진보‘ 자체가 기술적인 것을 넘어선다고 인정할 수 있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은 반드시 제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더 이상학문에 대한 소명을 묻는 것, 요컨대 학문에 몸을 바치는 자에게 있어서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문제가아니라, 이미 다른 것을 묻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생활 전체속에서의 학문의 사명은 무엇이며 또 그것의 가치는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 P36

그러면 오늘날에는 누가 학문에 대해 그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을까요? 특히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오히려 그 반대로 느끼고 있습니다. 즉 학문이라는 사유 구성물은 인위적인 추상들의 비실제적인 왕국이며, 이 인위적인 추상들은 그 마른 손으로 현실생활의 피와 활기를 낚아채려고 하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P37

 《국가론》에서의 플라톤의 열광적인 감격은 결국 모든 과학적 인식의 중대한 수단 중 그 하나의 의미가 당시에 처음으로 의식되어 발견되었다는사실에 의해 설명되는데, 그 수단이란 개념(Begriff)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의의는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드러났습니다. - P38

고대 그리스인의 이러한 발견 이외에 과학연구의 두 번째중대한 도구가 르네상스시대의 산물로서 나타났는데, 그것은 경험을 믿을 수 있게끔 검증하는 수단인 합리적인 실험이었습니다. 이것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경험과학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실험은 있었습니다. - P39

아니 반대로,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본성 그리고 이와 함께 자연 일반으로 되돌아가기위해서는 학문의 주지주의로부터 빠져나올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 진정한 예술에 도달하는 길로서의 학문은 어떻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비판할 필요도 없습니다-그러나 정밀 자연과학이 발생한 시대에는 과학에게서 더욱 많은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 P41

 특히 자연과학 쪽에 있는 몇몇 잘난척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누가 오늘날에 아직도 천문학이나 생리학, 물리학, 화학 등의 지식이 세계의 의미에 대해서 뭔가를 실로 조금이라도 가르쳐줄 수 있다고 믿고 있겠습니까? 설령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의미‘에 대해서 어떤 방법으로 그 단서를 잡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자연과학들은세계의 ‘의미‘와 같은 어떤 것이 있다는 믿음을 근본적으로 없애버리기에 적합합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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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목적지가 분명해 보였다. 특히 남자 쪽이 그랬다. 그는 툭 불거진 매부리코에 덥수룩한 수염이 눈에 띄는 백인이었는데, 배에서 내릴 때부터 손에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아마 약도인 모양이었다. 꽤 믿음직스러운 정보인 듯했다. - P83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이내 큰길을 사이에 두고 그를따라 천천히 걸었다. 아마 연주가 알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말했다. 인천항에 도착한 외국인들은 신경쓰지말라고 그들은 늘 갈 곳이 정해져 있다고 했다. - P84

 그애는 이런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썼고 서슴없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생각해보면, 그애 역시 매혹되었던 것 같다. 나를 가르치는 일에 말이다.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을 테니까.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좋았겠지.
이제 그 친구는 세상에 없다. - P85

그녀도 길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올려 묶곤 했다. 물론 저 여자와 모습이 같지는 않았지만, 뭐랄까, 분위기가 묘하게 비슷했다. - P86

"하이!"
여자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대답했다.
"Hi."
그러자 남자도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냐는 표정이었다. 목덜미의 열기가 온몸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나는 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아, 이제 어떻게 하지? - P87

남자가 단호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남자의 말을 알아듣고 곧장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여자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그녀는 남자의 그런 태도에 별로 불만이 없어 보였다. 무표정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순간 그녀에게 느꼈던 친근감이 아주빠르게 스르륵 사라졌던 것이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 P88

나는 재빨리 돌아섰다. 그들이 걸어가는 방향에는 대불호텔이있었다. 나는 그들을 눈으로 좇았다. 조금 멀어지긴 했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내 시야에 있었다. 나는 다시 천천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남자가 쪽지를 든 손으로 저 앞 어딘가를 가리켰다. - P89

고연주.

내게는 그녀만이 중요했다. - P89

문 옆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정리하고 있던 뢰이한이 나를 매섭게 바라보았다. 먼지투성이로 어디 부엌에 들어오느냐는 힐난이 눈빛에 가득 담겨 있었다. - P90

나는 금세 삼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도착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가파른 나무 계단이 삐걱댔다. 나는 소리쳤다.
"연주야! 손님이야!"
목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낡아빠진 이 건물에서는 늘 소리가이런 식으로 이상하게 울렸다. - P91

홀.

삼층에 올라서자마자 보이는 커다랗고 넓은 공간. 한때 그곳은사람들로 가득했다. 대불호텔을 찾은 이들의 사교장이었고, 중화루에서 가장 많은 손님을 수용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관리하기 힘든, 쓸데없이 넓은 공간에 불과했다. - P92

소문에 고연주가 중화루에 그렇게 오래 머무르고 있는 건 라이가문 누군가의 여자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차오는 조금 결벽적인구석이 있는 남자라서 그 소문에 진저리를 냈다. 그는 아무리 버릴 물건이라 해도 중화루가 그런 추잡한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건원치 않았다. - P93

들어보니, 이 건물에서 고연주를 내보내려는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뢰진한은 영업을 정리하며 고연주에게 나가달라는 말을 했다. 통역사를 두던 화려한 시절은 끝났던 것이다. 고연주는 당장 갈 곳이 없으니 중화루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부엌일이든 청소든 뭐라도 하겠다고 말이다. 그간의 정이 있는지라 뢰진한은 거절하지 못했다. - P94

차오는 웃으면서 뢰이한의 어깨에손을 올렸다. 그러더니 아무 감정이 실리지 않은 말투로 이렇게말했다.
"너는 아버지를 닮았구나.‘
차오는 거친 일을 대신할 사람들을 고용했다. 그들에게도 일이 생겼다. 한 명은 잠긴 문을 흔들다가 팔이 빠졌고, 다른 한 명은 계단을 오르기도 전에 머리가 아프다며 쓰러졌다.  - P95

이후 차오는 연주를 내버려뒀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이 건물에 머물고 싶으면 반드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P95

연주가 화교의 첩실 노릇도 부족해 이제는 몸까지 팔려 든다고 말이다. 그리고 또 말했다.

"아이고, 귀신이 들러붙지 않고서야 저런 팔자는 없지."

나는 그 말을 종종 따라 하곤 했다.

저런 팔자는 없지. 저런 팔자는 없어.

어쨌든 연주의 사업은 나쁘지 않게 돌아갔다. 차오는 연주를 내좋지 못했고, 그렇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머물게 하지도 못했다. 그에게 연주는 비쩍 마른 계륵이었다. - P97

(전략). 그날 저녁, 차오는 온갖 재료를공수해서 산둥 지방의 요리를 만들어 냈다. 입맛에 맞지 않았는지 헨드릭 하멜은 음식을 거의 다 남겼다. 대신 꽤 큰 돈을 지불하고갔다. 근래 차오가 벌어들인 돈 중 가장 거금이었다.
다음날 차오는 연주를 불러 말했다.
"좀더 지켜보마 잘 유지해라."

그때부터다. 연주가 내게 부탁을 했다. 대불호텔의 호객을 도와달라고. - P98

한 사람에 백오십 환. 연주는 데려오는 사람 수만큼 값을 쳐줬고 별다른 흥정도 하려 들지 않았다. 돈을 번 날, 나는 당숙모 앞에서 당당했다. (중략). 안심하지 마. 더 긴장해.
1950년 9월 10일, 나는 부모님과 오빠, 그리고 언니까지 모든 가족을 잃었다. 그날, 마을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폭격이 있었다. - P99

당숙은 아버지가 가장 가깝게 지낸 사촌형이었고, 월미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살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찾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진실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뿐이다. - P100

(전략). 저년도 부역자의 딸이오. 지금고향에서 도망쳐 이 바닷가로 숨어들었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숙모를 찾아갔다. 아아, 나는 그때 고작 열다섯 살이었다.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전부란 겨우 그런 것이었다. 당숙모를 붙잡고 외치는 것.
"숙모! 저 영현이예요. 저 기억하세요? 기억하시죠?"

그리고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뭐든 할게요. 뭐든지 할게요. - P101

이후 나는 늘 기억했다. 당숙모가 나를 거둬줬다는 사실을 삯바느질을 하고 떡을 팔며 홀로 네 아이를 키우는 여자가 먼 친척아이를 떠맡게 되었다는 사실을 비밀을 떠안아줬다는 사실을. 그걸 절대 잊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나는 최선을 다했다. 집안일을 하고, 바느질감을 나르고, 동생들을 돌보고, 시장에 나가 떡장사를 도왔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 P102

우리의 관계는 동등했다. 그녀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을 때마다 내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던 어떤 불길한 씨앗이 훅 뽑혀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연주에게는 귀신이 붙었다고. 드센 팔자라고. 하지만 연주는 끝끝내 살아남았다. - P104

"Hi,"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여자였다. 그녀가 나를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한 듯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를 하고서 곧장 연주의 눈치를 봤다. - P104

그날 연주와 여자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집에 돌아갈 무렵, 혹시 무슨 일 없었느냐는 나의 질문에 연주가 그렇게 대답했다. 이상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설명하기도 어려웠고, 어쩐지 부끄러웠다. 그래도 연주는 그 여자가 나에 대해 한 말은 전해줬다.
"너랑 내가 많이 닮았대." - P106

다음날, 또다시 아침 일찍 나가려는데 갑자기 당숙모가 나를 불렀다.
"영현아, 오늘도 손님이 없을 것 같니?"
은근히 떠보는 듯한 질문이 꺼림칙했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리며 당숙모의 눈치를 봤다. 그러자 당숙모가 때마침 잘됐다는 투로 말했다.
"그럼 오늘 나가지 말렴. 이불 빨래가 밀렸다.‘ - P107

하지만 나는 당숙모가 시장에 일을 보러 나가자마자 곧장 선착장으로 갔다. 배들이 오가는 걸 한참 동안 쳐다봤다. 밀물과 썰물이 뒤바뀌는 걸 지켜봤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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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불안은 유령처럼 사방에 존재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팬데믹, 세계대전, 기후 재앙과 같은 종말론적 시나리오를 마주한다. 세상의 종말과 문명의 종식이 갈수록 시급한 문제로 다뤄지고 있다. - P14

종말론이 호황이다. 심지어 상품으로도 나온다. 돈 받고 팔리는 것이 되었다.  - P14

하나의 위기에서 다음 위기로, 하나의 재앙에서 다음 재앙으로, 하나의 문제에서 다음 문제로 줄타기를 하며 살아간다. 요란한문제 해결과 위기관리법 앞에서 삶은 생존의 삶으로축소된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생존사회는 마치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을 어떻게든 피해 보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는 병자와도 같다. - P15

만연해진 불안의 분위기는 희망의 싹을 질식시킨다. 불안으로 인해 우울한 기분이 널리 확산된다.
불안과 르상티망Ressentiment은 대중을 우파 포퓰리즘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혐오를 선동한다. 연대와 친절과 공감은 서서히 붕괴된다. 증가하는 불안과 커지는 르상티망은 사회 전체를 난폭하게 만든다. - P16

불안은 훌륭한 지배 도구다. - P16

. 불안을 공공연히 부추기는 혐오 발언이나 이른바 쉿스톰Shit Storm*은 자유로운 의견 표출을 가로막는다.
심지어 오늘날 우리는 사유에 대한 불안마저 가지고 있다. 사유할 용기가 사라져 가는 듯하다.


* [옮긴이] 인터넷상에서 막말과 비난이 짧고 강렬하게 쏟아지는 현상 - P17

불안이 지배하는 곳에 자유란 없다. 불안과 자유는 상호 배타적이다. - P17

 기후 운동가들은 본인들도 스스로 시인했듯,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불안이 그들 삶의 진짜 미래를 빼앗는다. 기후 불안자체는 정당한 불안이다. 그걸 부정할 수는 없다. 문제는 질병처럼 ‘창궐‘하는 불안의 기후다.  - P18

‘불안‘을 뜻하는 독일어 ‘Angst‘는 원래 ‘궁지‘라는 뜻이었다. 불안은 확장 가능한 모든 폭과 관점을 질식시키며, 시야를 좁히고 차단한다. - P19

가장 내면에 자리한 희망은 그야말로 깊은 절망 한가운데서 그 눈을 뜬다. 절망이 깊을수록 희망은 강렬하다. 희망의 정령 엘피스가 밤의 여신 닉스의 자식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 P20

절망과 희망은 마치 산과 계곡처럼 연결되어 있다. 희망이 절망의 부정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P21

 희망에는 분명 부드럽고 아름다운 담대함이 있다. 희망하는 자는 담대하게 행위하고, 인생의 험준함과 무정함에 흔들리지 않는다. - P21

희망적 사유는 낙관적 사유와 다르다. 희망과달리, 낙관주의에는 부정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낙관적 사유에는 의구심도, 절망도 없다. 완전한 긍정이 낙관주의의 본질이다. - P22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그래서 어딘가로 굳이향하여 가지 않는 낙관주의와 대조적으로 희망은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움직임이다. 희망은 방향과 지지할곳을 찾고자 하는 시도다. - P23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그래서 어딘가로 굳이향하여 가지 않는 낙관주의와 대조적으로 희망은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움직임이다. 희망은 방향과 지지할곳을 찾고자 하는 시도다. - P23

비관주의도 근본적으로 낙관주의와 다르지 않다. 그저 낙관주의가 거울에 반사된 형상에 불과하다. 비관주의자의 시간도 닫혀 있다. 이들은 심지어 ‘감옥 같은 시간‘에 갇혀 있다.⁶ - P24

6Gabriel Marcel, Philosophie der Hoff nung. Die Überwindung desNihilismus, München 1964, P. 56. - P162

희망은 ‘긍정사고‘나 ‘긍정심리학‘과도 다르다.
긍정심리학은 고통의 심리학에서 벗어나 오로지 안녕과 행복만을 얻으려 노력한다. 부정적인 생각은 즉시 긍정적인 생각으로 대체해야 한다. - P25

긍정성의 숭배는 사람들을 서로에게서 떼어 내고, 이기적으로 만들고, 공감 능력을 감퇴시킨다. 더이상 타인의 고통에 관심을 두지 않도록 만든다.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만, 자기의 행복, 자기의 안녕에만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자유주의 체제 하의 긍정성 숭배는 사회의 연대를 끊어 버린다. - P26

고난의 열정으로서의 희망은 수동적이지 않다. 오히려 희망은 그 안에 고유한 결단력을 지니고 있다. 희망은 확고한 기대를 가지고 암흑을 뚫고, 끝없는 길을 파나가는 용감한 역사의 두더지와도 같을 것이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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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과거의 나를 잊어라


공부를 시작하는 것은 어렵다. 사실 새롭게 시작하는 일은 무엇이든 어렵게 마련이다. 왜 새로운 도전은 항상 어려울까? 외국어를 배우거나 자격증 취득을 준비하거나 등등 그것이 무엇이든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한 도전은 늘 어렵다. - P55

도전이 어려운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가 하는 도전이 ‘어려운 것이어서는 아니다. 평상시에 안 하던 짓을 하기 때문도아니다. 원인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더 정확하게는 ‘자기가 만든 자기 자신‘에게 있다. - P55

공부가 어려운 진짜 이유


공부가 어려운 이유도 마찬가지다. 기초 단계를 막 배우기 시작할때는 ‘공부를 잘하는 자기 자신‘을 떠올리지 못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너무 많은 것을 잃는다. 우선 ‘공부를 못하는 나‘는 책을 잡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공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하더라도 언젠가 공부를 잘하게 되는 자신을 상상하기 쉽지 않기때문에 금방 흥미를 잃고 만다. 그뿐만이 아니다. - P57

뒤에서 잡아 주겠다는 달콤한 거짓말로 ‘자전거를 잘 타는 나‘를 깨닫게 해 줄 친절한 조력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포기해야 하는 걸까?
당연하게도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자기가 스스로를 뒤에서 잡아주면 된다. 스스로 ‘공부 잘하는 나‘를 깨닫게하고, 그런 자신을 구체화하며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책을 잡기로 마음먹은 순간 우리는 책을 잡기 전의 나를 완전히 잊어야 한다. - P58

왜 내 목표는 갈수록 초라해질까?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반드시 할 일이 있다. 바로 ‘목표‘를 정하는 것이다. - P59

겨울 방학 때 우리의 모습

겨울 방학, 이선생님의 강의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어쩌지? 오늘 점심을 너무 맛있게 먹은 탓일까? 계획대로라면 강의를들어야 할 시간이지만 졸음이 쏟아져 결국에는 책상에 엎드려 단잠에 빠지고 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1시간이나 지난 뒤다. 벌써 다음 공부를 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러고는 생각한다.
‘아, 오늘은 어쩔 수 없지. 내일부터 진짜 열심히 해야겠다.‘ - P60

이미 이룬 것을 목표로 착각하는 사람들


목표란 꼭 도달하고 싶은 것을 일컫는다. 그래서 우리가 겨울 방학 때 세운 공부 계획과 3학년을 맞이하며 세운 목표 대학은 당당하게 ‘목표‘라고 부를 수 있다. - P61

사실 이런 나란한 목표에라도 이른다면 다행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란한 목표의 정말 무서운 점은 노력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미 이룬 것이나 다름없는 목표를 위해 어떤 사람이 피땀 흘려 노력을 하겠는가. - P61

도대체 공부를 얼마나 해야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내가 공부와 관련해서 단언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수험 생활이 힘들다는 점이다. 1년이란 시간이 길어 보일지 몰라도 적어도 수험생으로서의 1년은 정말 눈 깜짝할 새 지나가 버린다. 그래서 시간상으로 엄청난 압박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시간만 효율적으로 쓴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나와야 한다. - P62

게으른 나와 절대 타협하지 말자


우리가 아직 수험 생활의 피로에 잠식되지 않고 새 도전에 대한열정이 가득할 때는 목표를 향해 한 치의 미련도 남지 않는 노력을쏟아부을 수 있다. (중략)
누군가 내게 수험생에게 딱 한 가지만 조언해 달라고 한다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것이다. - P63

학년이 올라갈수록
추락하는 성적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내가 다닌 내동중학교는 당시 같은 지역의 다른 중학교에 비해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였지만 공부에 관심이 많던 나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 P27

사실 중학생 시절 나에게는 공부를 하는 이유가 딱히 없었다. 공부에 간절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단순히 수석이라는 이미지가 깎이는 게 싫어서 공부했을 뿐이다. - P28

상황이 그렇다 보니 선생님들도 최대한 쉽게 수업을 진행했고, 시험에 나올 만한 부분은 재차 강조하며 어떻게든 아이들의 성적을높여 주려고 애를 쓰셨다. 여러 선생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부하는 학생 자체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상위권에 도달할 수 있었다. - P28

공부가 절실하지 않던 시절


(전략).
 수석으로 입학한 나는 1학년 때만 하더라도 수학과 영어 두 과목 모두 높은 성적을 유지해 A반에서수업을 들었다. 그런데 2학년 때 치른 어느 영어 시험에서 처음으로70점대 점수를 받아 그다음 학기에 B반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 P29

비단 영어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반에서는 물론 전교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수학을 잘하는 아이였다. 그런데 2학년이 되자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성적이 밀리기 시작하더니, 3학년 때는 수학에서는 아예 이름을 내밀기도 애매한 겨우 A반 컷의 최후의 보루를 담당하곤 했다. - P29

"외고가 뭐에요?"

(전략).
중학교 3학년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의 관심사가 고등학교로 쏠리기 시작할 무렵 담임 선생님이 뜻밖의 제안을 하셨다.
"영준아, 너 외고가라."
사실 당시 나는 입시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외고가 일반고랑 뭐가 다른지조차 몰랐다. - P30

외고에 도전하기로 결심한 순진한 이유


이유는 단순했다. 우선, 영어를 잘하고 싶었다. 나는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라 영어를 잘하고 싶어서 외고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성적은 떨어지기 시작해서 이대로 두면 끝없이 추락할 것이 분명했다. 굳이 성적이 아니더라도 신경 쓰이던 것이 바로 회화였다. 나는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원어민과의 영어 수업에서 ‘에이스‘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회화를 거의 안 해서였는지 2학년 때부터는 듣기 평가도 잘해야 80점대가 나왔다.  - P31

그때 나는 공부에 목숨을 걸었다.
내 목표가 ‘쉽게 이룰 수 없고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가치 있고 짜릿한 성취감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힘들지 않았다. 공부에 지친 친구들이 꼭 알았으면
하는 게 있다. 지금의 어려움이나 고통은 본인이
성장하는 증거라는 사실을. 지금 힘든 만큼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맛볼 성취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점을.


공부는머리가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
: 실력이 쑥쑥 느는 공부습관 - P105

나의 일과
-고3 시절, 나는 매일 이렇게 공부했다

내가 다닌 김해외고는 기숙 학교였다. 아침 6시 20분 전교에 울려퍼지는 기상송과 함께 하루가 시작되었다.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점호하러 나가야 하기 때문에 기상이 일과 중 가장 험난한 산이었다. - P107

하루의 시작은 국어 공부와 함께


샤워를 마치고 정신을 차리면 곧바로 책상 앞에 앉아 국어 공부를했다. 국어 중에서도 비문학을 공부했다. (중략). 담임 선생님과의 상담이 끝난 지 얼마 안 된1학년 시절에는 영어 라디오를 듣거나 영어 단어를 외웠다. - P108

일찍 밥을 먹고 8시쯤 학교에 도착하면 교실에는 나밖에 없거나 간혹 1~2명의 친구가 있었다. 3년간 등교 시간을 지켜보면서 신기한 점을 발견했다. 등교 시간은 8시 20분까지였는데 8시 15분까지는 거의 아무도 등교하지 않다가 15분에서 20분 사이에 거의 모든학생이 우르르 등교한다는 사실이었다. 역시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에서든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 P108

과제는 밤 11시 이후에


과제가 많은 주에는 잠이 부족해 지각을 밥 먹듯이 했다. 우리 학교는 수행 평가로 발표나 리포트를 작성해야 하는 과목이 많았다. 그런데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배려해 주어 과제는 시험 기간이 아닌때에 내 주셨다. 열 과목 이상의 선생님들이 그런 배려를 해 주시기 때문에 하루에 소화해야 하는 과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 P109

요즘 고등학생들은 시험공부도 해야 하고 이것저것 조사할 게 많은 발표도 해야 하기 때문에 학교생활이 너무 빡빡한 것 같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 P109

시험 기간에 수면 시간은 하루 3시간

(전략). 보충이 없는 날에는 4시 30분부터 자습이시작된다. 저녁 식사를 위한 1시간을 제외하곤 새벽 1시까지 계속자습을 했다. 나는 그런 생활을 3년간 했다.  - P110

힘들어도 버틸 수 있던 것은

그런데 선생님과의 첫 상담 이후 간절한 목표가 생기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졸린다고 자는 게 내 목표와 비교해 과연 얼마나 가치 있는일이지?‘
대답은 너무 뻔했다. 너무나도 가치 없는 일이었다. - P111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 정도로 그때의 나는 공부에 목숨을 걸었다.  - P111

많은 수험생이 공부가 너무 힘들고 잠을 줄이는 건 더더욱 힘들다고 말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주위 후배들만 하더라도 그런 고민으로 내게 상담하는 친구가 꽤 있었다. 그런 친구들이 꼭 알았으면하는 게 있다. 지금의 힘듦, 어려움, 고통 등 그 모든 것이 본인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표이자 명예로운 상처라는 것을. - P112

하루를 두 배로 늘려주는
자투리 시간 활용법
-성적은 자투리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 학년의 시험 과목은 총 열 과목이었다. 시험 기간이 다가와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학생들은 일반적으로 하루에 두세 과목씩 총 3~4일에 걸쳐 전 과목을 공부하는 사이클을 만들고 시험 당일까지 그 사이클대로 공부했다. 그런데 나는그렇게 하지 않았다(물론 내 방식이 더 좋다고 이야기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람마다 각자의 공부법이 있다). - P118

하루에 열 과목을 전부 공부할 수 있는 시간 활용법


하루에 열 과목을 공부하던 그 시절은 내가 살면서 공부를 가장 열심히 한 시기일 것이다. 앞으로도 그보다 열심히 하는 것은 어려우리라 생각한다. 당시 나는 잠을 하루에 3시간만 잤다. 새벽 5시에 일어나 5시 30분부터 바로 공부를 시작했다. - P119

. 아침에 밥을 먹으러 갈 때, 밥을 먹고 다시 교실로 갈 때, 교실에 도착해서 조례를 기다릴 때 등등의 자투리 시간에도 귀마개를 한 채 영어 지문을 외웠다. 쉬는 시간에도 종이 치는순간 바로 귀마개를 하고 지문을 보고, 점심시간에도 밥을 빠르게먹고 와서 지문을 외웠다. 청소 시간도 예외는 아니었다. - P120

그 짧은 자투리 시간에 도대체 뭘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수도있을 것 같다. 그러나 자투리 시간을 하루에 15분씩만 모아도 한달이면 7시간 30분을 더 공부할 수 있다. 30분을 모으면 한 달에 15시간을 더 공부하는 효과를 얻는다. 비록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과제를 미루다가 여러 날 밤을 지새우기도 하는 나지만, 시간에 관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시간은 쓰고자 마음먹는 만큼 주어지는 것이라고. - P121

내가독서실에
다니지 않은 이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은 가득한데 열정만큼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이번 방학 때 정말 마음먹고 공부하려고 야심 차게 목표도 정하고, 하루 시간표도 더는 좋아질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준비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방학한 지 일주일도 안 돼 몸과 마음이따로 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 P130

공부가 잘되는 공간을 찾아라


‘공부는 환경이 중요하다.‘
누구나 들어 봤을 법한 말이고 실제로도 매우 중요한 말이다. 다들 그런 경험 한 번쯤은 있지 않은가. 시험 기간에 공부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평소에 어지럽혀 놓은 책상이 그날따라 유독 거슬려서 집중이 되지 않는다. 책상을 빨리 정리하고 공부하자고 마음먹지만,
결국 그 정리가 대청소로 이어져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왔을 때는이미 1시간이 훌쩍 지나 있는, 그런 경험. - P131

공부 장소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법

지금까지 공부 환경의 중요성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여기서 살짝더 나아가 공부 환경을 좀 더 효율적으로 쓰는 법에 관해 언급하려한다. 대한민국 고등학생이라면 하루에 최소 두 가지 이상의 환경에서 공부할 확률이 높다. 교실, 독서실, 학원, 집 등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공부하는 게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장소에서 똑같은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긴 쉽지 않다. - P134

수험생이라면 반드시 본인의 환경에 대해 한 번쯤 고민해 보면 좋겠다. 본인이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찾고, 그 환경에서 언제든 공부할 수 있게 세팅을 해 놓고,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자신의 집중도를고려한다면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P135

내 간절한 목표는 옆에서 자고있는
저친구를 이기는 것

내가 성적이 안 좋았을 때도 어떻게 그렇게 흔들림 없이 공부할수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공부에 매진할 수 있게 했는지에 관한 질문인데, 나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열에 아홉은 ‘정의로운 검사‘라든가 ‘전교1등‘과 같은 뭔가 거창하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운 목표를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내 목표는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 - P136

(전략). 이렇듯 마음속에 공부의 ‘최종 목표‘를 품고 사는 것은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런 목표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대학에 가고 싶다,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다와 같은 목표는 당장 다가온 중간고사에서 큰 힘을발휘하지 못한다. 물론 중간고사도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잘 넘어서야할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최종 목표가 눈앞에 놓인 중간고사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 P137

눈앞의 목표가 가장 강력한 목표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 치른 배치 고사에서 뒤에서 2등이라는 충격적인 성적을 받아 들고 좌절하던 그때, 나를 공부하게 한 것은 미래에 검사가 되고 싶다는 꿈도 아니고, 전교 등수를 높여서 좋은 대학교에 가겠다는 의지도 아니었다. (중략). 더 정확히는 ‘나보다 공부를 덜 하고도 성적은 더 좋은 친구들‘이었다. - P137

1학년 때 공부 동기는 명확하게 딱 하나였다.
‘얘네는 이겨야겠다.‘
노력하는 학생이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한다는 내 믿음을 현실에서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거짓 하나 없이 그때의 나는 국어를 몇 등급 받고 수학을 몇 등급 받아야지하는 등수와 관련된 목표가 아예 없었다. - P138

목표가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

많은 학생이 ‘목표‘에 대해 약간의 오해를 하는 것 같다. - P138

그런 측면에서, 대학교나 장래 희망 같은 거대한 목표와 더불어 지금의 나와 그 거대한 목표를 이어주는 수많은 ‘징검다리 목표‘를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조금 저속한 표현일지 모르나, 당장 자신보다 공부를 덜 하는 것 같은데 성적은 더 잘 나오는 ‘재‘를 이겨야지 하는 마음도 좋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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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나는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작가이다. 더없이 우아하고 생생하게 표현해내는 능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내가 이 점을 조금이라도 의심한다면・・・・・・ 나는 대략 이렇게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했다. - P9

나는 단지 이야기의 실마리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것 같다. - P10

손이 떨린다. 고함치고 싶다. 아니면 뭐라도 박살 내고 싶다.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다・・・・・・ 이런 기분으로는 이야기를 차분히 펼쳐나갈 수가 없다. 심장을 긁어댄다. 끔찍한 느낌이다. 진정해야 한다.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태연자약할 것. 주지한바와 같이 초콜릿은・・・・・・ (초콜릿 생산 장면을 상상해보시라.) - P11

나는 방금 긴 간극이 있었음을 독자에게 알릴 필요를 느낀다. 그사이 후지산을 닮은 산 위에 떠 있는 연노란색 구름들을 불태우며 길을가던 태양이 졌다. 무거운 피로감에 잠겨 한동안 나는 앉아 있었다. 소음과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거나 여백에 코를 그리기도 하고, 선잠이 들락 말락 하다 갑자기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 P12

요컨대 나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그는 한 시간 후에 올 거라했다. 할 일도 없는데 좀 거닐까 하고 밖으로 나갔다. 바람이 불었다. 날은 쾌청했다. 얼룩덜룩한 그림자가 여기저기 드리워 있었다. 여기서 부는 바람의 먼 친척뻘인 바람이 좁은 거리를 따라 날아다녔다. - P12

저 멀리에서는 멋지게 생긴 가파른 산이 벽이 되어 하늘 위로 솟구쳐 있었다. 산을 오르기로 했다. 산의 장관은 눈속임이었다. 계단이 난 오솔길이 키 작은 너도밤나무와 딱총나무 사이를 지그재그로 지나고 있었다. 자, 자! 이제 금방이라도 경이로운 야생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어떤 장소에 다다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곳은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P13

나는 옹이투성이인 난간에 팔꿈치를 괸 채 저 아래 옅은 안개에 덮인 프라하를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지붕들, 연기 나는 굴뚝들, 병영, 작은 백마. 다른 길로 돌아가기로 했다. - P13

오케스트라, 팡파르! 아니 이게 낫겠다. 곡예를 할 때처럼 숨을 헐떡이며 쪼개져라고 북을 쳐라! 믿기지 않는 순간이다. 이게 지금 진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 내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자리에 앉았다. 솔직히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른 사람이 그 모습을 봤다면 폭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나는 아연실색했다. - P14

일단 벌써 중요한 대목에 도달했고 가려움증을 가라앉혔으니, 자, 이쯤에서 내 이야기에 이렇게 명령하는 게 부적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쉬어! 조용히 되돌아가! 그리고 그날 아침 내 기분이 어땠는지,
계약할 사람을 만나지 못한 채 산책하러 나선 길에 언덕을 기어올라서는, 바람 부는 5월 어느 날의 푸른 하늘 사이로 저 멀리 둥글둥글하고 불그스레한 가스탱크를 바라보았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분명히 밝혀! 되돌아가서 밝히자. - P15

올 한 해 나는, 강하게 발달했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내 정신이 골몰해 세운 저 논리의 집이 지닌 놀라운 명확성과 조화를 철저히 시험했다. 직관의 유회, 창작, 영감, 내 생을 치장해온 고상한 모든 것이, 말하자면 문외한에게는, 심지어 똑똑한 문외한에게도 가벼운 광기의 서곡으로 비칠수 있으리라. 하지만 진정하시라.  - P15

그는 코를 벌름거리며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생의 파문이 얼굴에일었다. 그로 인해 약간 흐릿해지긴 했지만, 기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눈을 뜨고 곁눈질로 나를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하품을 주체하지 못하며 기름진 어두운 금발 머리를 긁기 시작했다. - P16

"담배 있습니까?" 체코어로 그가 물었다. 예기치 못하게 낮고 차분하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그는 두 손가락을 벌려 담배 피우는 시늉을 했다.
나는 내 커다란 가죽 담뱃갑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에게서 한순간도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는 손바닥을 땅에 짚고 조금 움직였다. 그사이에 나는 그의 귀와 움푹 들어간 관자놀이를 살펴보았다.
"독일제구먼." 그가 말하며 미소 지었다. 잇몸이 드러났다. - P17

내가 물었다. "당신 뭐요, 하는 일 없소?"
그는 애처롭게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다시 침을 뱉었다. 하층민은침이 어쩌면 그리 많이 나는지 나는 항상 놀란다.
"나는 내 부츠보다 더 오래 걸을 수 있지요." 자기 두 발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그의 신발은 정말로 보잘것없었다. - P18

"이보시오." 나는 참지 못했다. "정말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겠소?"
그가 몸을 돌려 일어나 앉았다. "뭘 말입니까?" 그가 물었다. 미심쩍어하는 음울한 표정이 그의 얼굴을 스쳐갔다.
내가 말했다. "눈이 멀었구먼."
한십초 남짓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의 왼손은 들리지 않았다. 거의 그걸 기대했는데, 나는 왼쪽 눈을 게슴츠레 떠보았지만, 그의 두 눈은 열린 그대로였다. - P19

나는 그의 머리를 내 머리 쪽으로 당겨서 관자놀이를 맞댔다. 거울속에서 두 쌍의 눈이 춤추듯 헤엄치듯 움직였다.
거들먹거리며 그가 말했다. "부자가 가난뱅이를 닮을 리가 있겠소. 잘 알면서 그러시네・・・・・・ 그러고 보니 저잣거리에서 봤던 쌍둥이가떠오릅니다. 1926년 8월인가 9월이었소. 아니 8월이었던 것 같네요. 거기서는 정말 그 둘을 분간할 수 없었소. 다른 점을 찾는 사람에게100마르크를 걸었지요. ‘좋소‘ 하고 붉은 머리의 프리츠가 말하더니느닷없이 쌍둥이 중 한 녀석의 귀싸대기를 찰싹 때리는 겁니다. 그러고는 말하길, ‘보세요. 이 사람은 귀가 빨간데, 저 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당신 100 마르크 이리 주세요.‘ 배꼽을 잡았지요!" - P20

"현재로선 자넬 도와줄 길이 전혀 없네." 나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나한테 자네 주소를 줘보게." 나는 수첩과 은 연필을 꺼냈다.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별장에서 산다고 말해봐야 소용없는 노릇이겠지요. 숲보다는 건초 더미 위에서 자는 게 더 낫지요. 그렇지만 딱딱한 벤치보다는 숲에서 자는 게 더 낫소."
"하지만 그래도 자넬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알고 싶군." 내가 말했다. - P21

교회의 먼지가 밀려들어 콧구멍이 꽉 막혔다. 코를 풀며 침대 끝에걸터앉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콧속의 가려움, 허기, 레스토랑에서 먹은 송아지 커틀릿의 불그레한 맛 같은 존재의 사소한 징후들이 이상하게 내 주의를 끌었던 것이 기억난다. - P22

실로 그 사람은 특히 자고 있을 때, 이목구비의 움직임이 없을 때, 내 얼굴을, 내 마스크를, 티 없이 깨끗한 내 시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가 시체라고 말하는 이유는 오직 내 생각을 극도로 선명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무슨 생각? 바로 이런 생각 말이다. 우리는 똑같은 이목구비를 지녔다. 그리고 완전한 수면 상태에서 이 동일성은 아주 분명해졌다. 죽음, 그것은 얼굴의 안식. 얼굴의예술적 완벽이다. 생은 그저 내 분신을 망칠 따름이다. 그렇게 바람은나르시스의 행복에 안개를 드리운다. 그렇게 화가가 없을 때, 그의 제자가 들어와서 시키지 않은 덧칠로 대가의 초상화를 망친다. - P23

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여러분 모두를 납득시키고 싶다. 불한당인 당신들을 강제로라도 믿게 만들고 싶다.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말 그 자체의 본성 탓에 닮은 두 얼굴을 말로는 완전히 묘사할 수 없다는 점이 두렵다. 그러니까 말이 아니라 물감으로 그들을 나란히 그려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말하는 바가 관객에게 분명해지지 않을까? - P24

나는 잔뜩 거드름을 피우고 있다. 내가 내 주장을 입증했음을 알기때문이다. 모든 상황이 멋지다. 독자여, 그대는 이미 우리를 보고 있다. 둘이지만 하나인 얼굴! 하지만 가능한 결함들을, 자연의 책에 존재하는 사소한 오식들을 내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생각지는 마시라. 유심히 보시라. 내 치아는 크고 누렇다. 반면 그의 치아는 더 조밀하고 하얗다. 그러나 과연 이게 중요한가? 내 이마에는 다 그리지 못한 ‘생각‘ 같은 혈관이 부풀어오른다.**


** 이마에 혈관이 불완전한 M자 모양으로 부풀어오른다는 뜻. ‘생각‘을 뜻하는 러시아어
‘미술‘과 러시아어 철자 M의 옛 명칭 ‘미슬레테‘를 연관시킨 언어유희. - P25

바로 지금 나는 단춧구멍에 온전히 남은 마지막 제비꽃을 꽂은 채 팔을 늘어뜨리고 자고 있는 그를 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나란히 있는 우리를 주목하고 벌떡 일어나 에워싼 다음 경찰서로 끌고 가지는 않을까? 왜? 왜 나는 이 글을 쓰는 걸까? 그저 익숙한 펜 놀림인가? 아니면 두 사람이 두 방울의 피처럼 서로 닮았다는 것 자체가 실제로 이미 범죄인 걸까? - P26

2장


나는 거리를 두고 나 자신을 바라보는 데, 스스로의 모델이 되는 데 몹시 익숙해져버렸다. 바로 그 까닭에 내 문체는 꾸밈없는 자연스러움의 은총을 잃어버렸다. 나는 이제 도무지 원래의 내 껍질 속으로 돌아가서 옛 자아 안에 편안히 기거할 수 없다. - P27

 나는 늘 같은 가게에서 담배를 사곤 했는데, 행복한 미소가 변함없이 날 맞아주었다. 버터와 달걀을 사던 가게에서도 그와 같은 미소가 아내를 맞이했다. 토요일이면 우리는 카페에 가거나 영화를 보러 갔다. 우리는 중산층 중에서도 잘사는 축에 속했다. 적어도 그렇게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사무실에서 돌아오면신발을 벗고 소파에 누워 석간신문을 펼치지 않았다. - P28

아니, 여기에서 ‘증오‘는 너무 강렬한 단어인 것 같다. 그건 뭔가 가정적이고 기초적이며 여자들한테나 어울리는 것이었다. (특히 일요일이면) 비나 (특히 새 아파트에서) 빈대를 좋아하지 않듯이, 아내는 볼셰비키를 좋아하지 않았다. - P28

아내는 로이드 조지를 증오한다. 그 사람 때문에 러시아가 파멸했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내 손으로 목 졸라 죽여버려도 시원찮을 영국 놈들" 독일인들은 밀폐된 열차 때문에 혼이 난다. (그건 레닌이 수입한 볼셰비즘의 통조림이다.)****


*** 소비에트 혁명 직후 벌어진 내전 당시 (1918~1922) 영국의 총리로 볼셰비키와의 전쟁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유로 러시아 망명자들의 증오를 샀다.
**** 1917년 2월 혁명 직후 스위스에 머물던 레닌과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독일제국 정부가 독일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가해준 덕분에 러시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독일정부는 레닌이 독일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밀폐된 열차를 제공했다. - P31

아내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관찰력이 부족하다. 한번은 그녀가 ‘신비주의자‘라는 말을 항상 지소사로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검은 토가를 두른, 얼굴이 별처럼 초롱초롱하고 몸집 큰 어떤 진정한
‘신비주의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음을 알게 된 적이 있다.

** ‘신비주의자‘를 뜻하는 러시아어 ‘미스티크‘의 ‘이크‘를 지소(指小) 접미사로 착각했고, 그래서 진정한 ‘큰‘ 신비주의자인 ‘미스트‘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 P32

아내에게 나는 이상적인 남자였다. 나는 명석하고 결단력이 있다.
게다가 나보다 더 맵시 있게 차려입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통 큰바지에 새 턱시도를 걸쳤던 때가 기억난다. 그녀는 조용히 두 손을 꼭쥐더니 살짝 기운이 빠진 듯 의자에 주저앉아 소곤거렸다. "오, 게르만!......" 그건 천국의 비애에 가까운 환희였다.
아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며 그녀와 타협하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그건 그녀의 행복을 위한 선하고 유용한 일이라는 느낌,
아마도 나는 이런 분명치 않은 느낌과 함께 쉽게 믿는 그녀의 성향을 이용하고 있었다. - P35

조건 없이 맹목적으로, 일종의 자연적인 헌신으로 아내는 나를 사랑했다. 내가 왜 다시 과거시제로 빠졌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뭐 상관없다. 그게 더 쓰기 편하다. 그래, 그녀는 날 사랑했다. 사랑에 충실했다. 아내는 내 얼굴을 이쪽저쪽 찬찬히 뜯어보기를 좋아했다. - P36

내가 프라하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리다는 부엌에 있었다. 컵에 달걀을 풀어 고골모골 거품을 내고 있었다...... "목이 아파요." 그녀가 걱정스레 말했다. 레인지 모서리에 컵을 세워두고 손등으로 노란 입술을 닦더니 내 손에 입을 맞추었다.

*달걀에 설탕 등을 넣어 거품을 낸 음료로 목이 쉬거나 아플 때 치료 수단으로 쓰인다. - P37

나는 그 만남에 며칠을 짓눌려 있었다. 지금 내 분신이 내가 모르는 길을 따라 터덜터덜 걷고 있고, 잘 먹지 못하고 추위에 떨고 비에 젖고 있으며, 오한에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상하게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가 일을 찾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가 아늑하고 따뜻하게 지낸다고, 하다못해 안전히 감옥에라도 갇혀 있다고 확인할 수 있다면야 기분이 좀 나으련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 P39

6월 중순 우리는 (아르달리온의 열렬한 설득에 못 이겨) 처음 그곳에 갔다. 내 기억으로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아르달리온을 태우러 그의 집에 들러서 창을 바라보며 연신 경적을 빵빵댔다. 창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리다가 손으로 확성기를 만들어 소리를 질렀다. "아르달리오샤!" 술집 간판 바로 위에 있는 아래쪽 창에서 커튼이 사납게 홱 젖혀졌다. - P41

"내 땅이다! 이제 알겠어!" 정오 무렵 쾨니히스도르프를 지나 아르달리온이 아는 큰길로 접어들었을 때 그가 환호성을 질렀다. "어디서돌려 들어가야 할지 알려드리지요. 안녕, 안녕, 내 오랜 나무들아!"
"아르달리온칙, 바보짓 좀 하지 마." 리다가 차분하게 말했다.
길 양쪽에 펼쳐진 울퉁불퉁한 황무지, 모래밭과 히스 꽃 군집. 작은소나무들이 간간이 섞여 있었다. - P42

리다가 말했다. "아르달리오샤, 우리 그냥 큰길로 곧장 발다우로가는 게 어때. 거기 큰 호수랑 카페가 있다고 했잖아."
"절대 안 돼." 아르달리온이 흥분해서 반대했다. "첫째, 그 카페는이제 막 설계에 들어갔다고. 그리고 둘째, 내 땅에도 호수가 있어. 자,
자, 어서요!" 그가 내 쪽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쭉 가세요.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 P44

"내려서 걸어가는 게 어떨까요?" 리다가 제안했다.
"당신 말이 맞아. 누가 새 차를 훔칠 생각을 하겠어?" 내가 말했다.
"그래, 이건 위험해." 그녀가 즉시 동의했다. "그럼 당신들 둘이서갔다 오는 게 어때? (그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아르달리온이 당신에게 땅을 보여주고, 난 여기서 당신들을 기다리지 뭐. 그다음에 발다우로 가서 수영하고 카페에 좀 앉아 있자."
"무례하군요, 마담!" 격한 어조로 아르달리온이 말했다. - P45

"대체 뭐 하느라 안 돌아오는 거야? 길을 잃고 헤매는 거 아닐까?"
나는 차에서 나와 잠시 주위를 서성거렸다. 흠집투성이였다. 무료해하던 리다가 아르달리온의 불룩한 서류가방을 만지작거리더니 열어보았다. 나는 몇 걸음 물러섰다. 아냐, 아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발에 밟힌 잔가지를 살펴보고는 돌아왔다. 리다는 차 발판에 걸터앉아 휘파람을 불었다. 둘이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침묵. 그녀는 입을 일그러뜨리며 옆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 P47

"당신 얼굴은 까다롭네요." 그가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어, 보여줘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리다가 소리쳤다.
"머리 좀 들어보세요." 아르달리온이 말했다. "그래 그렇게 됐어요."
"아이. 좀 보여줘." 잠시 후 리다가 다시 소리쳤다.
"내 보드카를 어디다 팽개쳤는지 먼저 보여주시지." 아르달리온이 투덜거렸다.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은 안 돼." 리다가 대꾸했다.
"넌 내가 있을 때는 술 못 마실 줄 알아." - P49

"그런데 말이오, 모든 얼굴이 정말 유일무이하다고 생각하나요? 우선 실제로 특정한 얼굴형이 있잖소. 이를테면 동물형 얼굴 같은 유인원같이 생긴 사람도 있고, 쥐같이 생긴 사람도 있고, 돼지형 얼굴도있고...... 그다음 유명한 사람들의 얼굴형도 있잖습니까. 나폴레옹타입 남자나, 빅토리아 여왕 타입 여자 같은 경우 말이오. 난 내가 아문센을 떠올리게 한다는 말을 듣곤 했소. 톨스토이풍 코를 난 심심찮게 봤어요. 음, 또 미술 작품형도 있지 않소. 성화(聖畵)에 나오는 얼굴, 성모형 얼굴. 생활 방식이나 직업 때문에 닮은 얼굴형은 또 어떻소......" - P50

3장

우리 이 장을 어떻게 시작할까? 몇 가지 제안을 할 테니 골라보시라. 첫번째 안이다. 이건 실제 작가나 작가의 대리인에 의해 서사가전개되는 일인칭 소설들에서 흔히 만나게 된다. - P52

(전략).
그런데 이 기법은 남용되어왔다. 작가입네 하고 거짓을 떠벌리는 장사치들이 찢어발겨서 누더기가 되어버렸다. 이건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진실해졌으니까. 그럼 이제 두번째 안으로 주의를 돌리자.
요점은 곧장 새 인물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을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오를로비우스는 불만스러웠다. - P53

문학과 관련하여 나는 모르는 게 없다. 내겐 늘 이런 기벽(奇癖)이있었다. 어릴 적 나는 시와 긴 이야기를 쓰곤 했다. - P55

 어리석은 상황 속에 말을 집어넣기. 말장난의 위장결혼으로 말들을 결합하기. 안팎을 뒤집기. 불시에 덮치기. 내가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는 것들이다. ‘베테리나르‘라는 말 속에서 소비에트의 ‘베테르‘는 무얼 하고 있는가? ‘압토마트‘ 속의 ‘토마트‘는 어디서 온 걸까? ‘주브르‘로 ‘아르부스‘를 어떻게 만들지?*** 나는 수년간 더없이 기이하고 끔찍한 꿈에 시달려왔다.


*** 러시아어로 ‘베테리나르‘는 수의사, ‘베테르‘는 바람, ‘압토마트‘는 자동기계 혹은 기관총, ‘토마트‘는 토마토, ‘주브르‘는 들소 혹은 고수(高手), ‘아르부스‘는 수박이라는 뜻. - P56

내 것, 내 것을, 청소년 시절 내 실험들을 무의미한 소리들에 대한내 사랑을・・・・・・ 그건 그렇고 그 시절 나는 이른바 어떤 범죄적 성향을 가졌던 걸까? 지금 나를 골몰케 하는 건 바로 이 물음이다. - P57

"말하기 무겁지만, 내가 보기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젊었을때 나는 최상의 것만을 가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최상의 것‘은 그의 입에서 극도로 침울하고도 번드르르하게 울려나왔다.) 그때 이후로 이 생각에 변함이 없어요. 내 생각을 지배하는 건 옵티미스무스*입니다."
"당신 직업에 꼭 필요하지요." 미소를 머금으며 내가 말했다.
오를로비우스가 도끼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진지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고객을 확보해주는 건 페시미스무스**입니다."


* ‘낙관주의‘라는 뜻의 라틴어.
** ‘비관주의‘라는 뜻의 라틴어 - P58

"빌어먹을 놈의 초콜릿 사업이 결딴나게 생겼어." 내가 말했다. 나도 하품이 나왔다.
"다 잘될 거예요." 리다가 중얼거렸다. "그냥 좀 쉬어요."
"휴식이 아니라 삶의 변화가 필요해." 거짓 한숨을 내쉬며 내가 말했다.
"삶의 변화라." 리다가 말했다. - P60

"알아맞혀봐. 자, 첫번째 마디, 이건 프랑스어로 ‘덥다‘는 뜻이야. 두번째 마디는 튀르크인을 꽂아 죽이는 뾰족한 ‘말뚝‘이야. 세번째 마디, 이건 우리가 이르든 늦든 다다르게 될 곳이지. 이것들을 합한 게날 파멸로 이끌어."*
바스락 소리를 내며 자동차가 지나갔다.

*한 낱말을 여러 마디로 나눠 맞히는 낱말 수수께끼. 각 마디의 발음을 표기하면 쇼-콜-아트(지옥)이고, 전체 단어는 ‘쇼콜라‘, 곧 ‘초콜릿‘이다. - P60

"난 눈은 항상 마지막에 그려요." 아르달리온이 우쭐대며 말했다.
그는 팔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이제 그리기 시작한 초상화를 두고 고개를 이리 숙였다 저리 숙였다 했다. 그는 자주 와서 목탄으로 나를그리곤 했다. 우리는 보통 발코니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 나는 시간이 남아돌았다. 그래서 짤막한 휴가 비슷한 뭔가를 궁리해냈다. - P62

내 삶은 온통 망가지고 꼬였다. 그런데도 난 여기에서 이 발랄한 묘사 한 토막과 이 친밀한 일인칭 복수와 여행자에게, 별장의 휴가객에게, 그림같이 어우러진 초목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건네는 이 눈길과노닥거리는 바보짓을 하고 있다. 하지만, 독자여, 참으시게. 내가 지금 그대를 거닐게 하는 건 다 까닭이 있어서라네. - P64

나는 수차 이 단조로운 산책을 반복했다. 숲에서 단 한 사람도 마주치지 않았다. 오지(奧地). 정적. 호숫가 땅은 한 군데도 팔리지 않았다. 정말이지 사업 전체가 망해갔다. 그곳에 갈 때면 하루 종일 사람이라곤 우리 셋뿐이어서 원하면 발가벗고 수영해도 거리낄 게 없었다. - P65

자, 이제, 친애하는 독자여, 아무도 없는 건물 6층에 있는 조그마한 사무실을 상상해보자. 타이피스트는 떠났고 나 혼자다. 창에는 구름낀 하늘. 벽에는 달력. 어쩐지 황소의 혀를 닮은 거대한 검은색 숫자9. 9월 9일. 탁자 위에는 채권자들이 보낸 편지의 모습을 한 연이은걱정거리와 나를 배신한 라일락 부인이 그려진 초콜릿 상자, 상징적으로 비어 있다. 아무도 없다. 타자기의 덮개는 열려 있다. 정적. - P67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멍한 상태를 떨쳐냈다. 수첩을 주머니에 넣고 열쇠를 꺼내 죄다 잠그고 떠날 참이었다. 거의 벗어나려는 순간,
그러나 나는 복도에서 멈췄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떠날 수 없었다. 나는 되돌아갔다. 창가에 서서 건너편 집을 바라보았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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